최근 수정 시각 : 2024-12-04 01:49:07

헨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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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왕국 노르만 왕조 제3대 국왕
헨리 1세
Henry I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nry1.jpg
<colbgcolor=#cf091f><colcolor=black> 왕호 헨리 1세
(Henry I)
출생 1068년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셸비
사망 1135년 12월 1일 (향년 67세)
프랑스 왕국 노르망디 생드니앵리옹
재위기간 잉글랜드의 왕
1100년 8월 2일 ~ 1135년 12월 1일
노르망디 공작
1106년 ~ 1135년 12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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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f091f><colcolor=#fff> 이름 고대 노르만어 Henri I (엔리 1세)
영어 Henry I (헨리 1세)
프랑스어 Henry I (앙리 1세)
라틴어 Henricus I (헨리쿠스 1세)
별칭 뛰어난 학자
(The Beauclerc/Le Beauclerc)
배우자 스코틀랜드의 마틸다[1]
(1110년 결혼/1118년 사망)
루뱅의 아델리자
(1121년 결혼)
적자녀 마틸다, 윌리엄 애설링
사생아 로버트[2], 리처드, 레지널드, 로버트, 길버트, 윌리엄, 헨리, 풀크, 윌리엄, 마틸다, 마틸다, 줄리안, 마벨, 콘스탄스, 앨리스, 이사벨, 시빌라, 마틸다, 군드라다, 엠마, 아델리자, 엘리자베스
아버지 윌리엄 1세
어머니 파일:800px-Blason_Comte-de-Flandre.svg.png 플랑드르의 마틸다
형제 로베르 2세, 리샤르, 아델리자, 세실리아, 윌리엄 2세, 콩스탕스, 아델
종교 가톨릭 }}}}}}}}}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시련기2.3. 잉글랜드 왕위 등극2.4. 형 로베르 2세와의 대결2.5. 통치
2.5.1.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통치2.5.2.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통치2.5.3. 교회와의 관계
2.6. 승계 위기2.7. 말년과 사망
3. 가족
3.1. 왕비3.2. 자녀3.3. 정부와 사생아
4. 대중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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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 이름인 헨리는 윌리엄 1세의 은인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왕 앙리 1세에게서 따온 이름이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의 행정, 관료체계를 제대로 돌아가게끔 조직한 능력있는 군주였으며 순회법정 제도를 시행하여 국가사회의 틀을 잡아나가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동시에 영국이 관료 국가로 나아가는 데 초석을 다진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2. 생애

2.1. 초년기

1068년경,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셸비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이자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윌리엄 1세이고, 어머니는 플랑드르의 마틸다였다. 그는 윌리엄 1세의 4번째 아들이자 잉글랜드에서 출생한 유일한 아들이었다. 헨리의 초년기에 관한 정보는 거의 없다. 그는 솔즈베리 대성당의 주교 겸 왕실 총리인 오스몬드로부터 신학 교육을 받았다고 전해지는데, 일부 학자들을 이를 근거로 윌리엄 1세와 마틸다 부부가 그를 성직자로 키우려 했을 거라고 추정하지만 불확실하다. 그의 교육 수준은 불확실하나 라틴어를 배웠고 교양을 익혔으며, 기사 로머트 아사르로부터 무술 및 군사 전술 훈련을 받았다고 전해진다. 1086년 5월 24일, 아버지로부터 기사 작위를 받았다.

1087년 여름, 윌리엄 1세는 프랑스의 망트를 침공해 그곳을 불태웠다. 그러나 그곳에서 병을 얻거나 부상을 입어 노르망디 공국의 수도 루앙으로 귀환했다. 헨리는 즉시 아버지와 합류했고, 1087년 9월 9일에 루앙 성문에 있는 생 제르베 수도원에서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봤다. 윌리엄 1세는 유언장에서 장남 로베르 2세에게 노르망디를 물려주고, 삼남 윌리엄 2세에게 잉글랜드 왕국을 물려줬으며, 헨리는 1083년에 사망한 어머니 마틸다가 소유한 땅인 버킹엄셔와 글로스터셔 영지 및 5,000 파운드 가량의 자금을 물려받았다. 그 후 로베르 2세가 윌리엄 2세의 잉글랜드 왕위 등극에 불복하여 군대를 일으켰을 때, 헨리는 노르망디에 남아 로베르 2세의 궁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1088년, 전황이 불리해진 로베르 2세는 헨리에게 접근해 상속 재산 일부를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헨리는 3,000 파운드를 줄 테니 코탕탱 반도의 백작에 자신을 세워달라고 요청했고, 로베르 2세는 받아들였다. 헨리는 뒤이어 아브랑챙에도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노르망디 서부의 저명한 수도원인 몽생미셸 수도원을 통제했고, 노르만 대영주인 아브랑슈 자작 겸 체스터 남작 휴 다브랑슈, 레비에, 버논, 생트메르에글리즈 등지의 영주인 리샤르 드 레비에와 친분을 다졌으며, 에브레쉬와 글로스터 영주 로버트 피츠하몬, 로저 드 솔즈베리와 두터운 인맥을 다졌다.

2.2. 시련기

1088년, 헨리는 어머니가 물려준 글로스터셔와 버킹엄셔의 영지를 얻기 위해 잉글랜드로 갔다. 그러나 윌리엄 2세는 이미 반란을 진압하는 데 도움을 준 로버트 피츠하몬을 켄트 보안관으로 선임해 그 땅을 다스리도록 했고, 헨리가 원하는 땅을 주기를 거부했다. 헨리는 별 수 없이 벨렘의 영주 로베르 2세 드 벨렘과 함께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그러나 바이외 주교 오돈 드 바이외는 노르망디 공작 로베르 2세에게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을 체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로베르 드 벨렘이 지난날 윌리엄 1세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자기가 소유한 모든 성에서 윌리엄 1세가 배치해둔 공작 소속 부대를 쫓아낸 전적이 있다는 걸 상기하면서,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윌리엄 2세와 손잡고 그에 대항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는 게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로베르 2세는 이에 설득되어 헨리와 로베르 드 벨렘이 배에서 내리자마자 체포했다. 그 후 헨리 왕자는 코탕탱 백작령을 빼앗기고 바이외에 감금되었다가 1089년 봄 로베르2세의 고문들이 석방하라고 설득한 덕분에 풀려났다.

그는 더 이상 코탕탱 반도를 소유하지 않았지만, 두 형제 로베르 2세와 윌리엄 2세의 지속적인 갈등에 힘입어 서부 노르망디를 계속해서 통제했다. 그러던 1090년 10월 말, 코난 빌라도라는 이름의 유력자가 윌리엄 2세의 회유를 받아들인 뒤,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만 기사들을 루앙으로 끌어들였다. 11월 3일, 코난 빌라도의 추종자들은 윌리엄 2세와 손잡은 노르만 기사 레이날드 드 바렌스의 기사단을 루앙에 진입하도록 했다. 뒤이어 로베르 공작에게 충성하는 길베르 드 라들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시민들은 성문을 닫고 거부했다. 한편, 루앙에 있던 로베르 공작은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닫고 루앙에서 병사를 급히 모은 뒤 레이날드 드 바렌스와 대적했지만, 전세가 불리해지자 도시에서 탈출했다.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로베르 공작은 동료들의 조언에 따라 수도를 떠나 센 강 반대편에 있는 노트르담뒤프레 수도원에 들어가서 반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헨리는 로베르 공작의 구원 요청을 받자 곧바로 현장으로 달려가 1990년 11월 루앙에 도착한 뒤, 코난 빌라도를 상대로 시가전을 벌였다. 그 결과 헨리가 이끄는 로베르 2세의 군대가 승리했고, 코난 빌라도는 헨리의 포로가 되었다. 헨리는 그가 감히 주군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며 많은 몸값을 지불해 자유를 사겠다는 코난 빌라도의 제안을 거부하고, 그를 탑에서 던져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헨리에게 루앙을 떠나라는 요구를 받았는데, 이는 아마도 헨리가 반란 진압을 진두지휘해 명성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이거나, 헨리가 코탕탱 백작령을 돌려달라고 요구한 데서 비롯된 조치로 추정된다.

1091년 2월, 로베르 2세와 윌리엄 2세는 더럼 주교인 기욤 드 생칼레의 중재로 에서 협약을 체결했다. 캉 평화 협약에 따르면, 양자 중 한 사람을 지지했던 영주들은 몰수되었던 영지를 돌려받으며, 로베르는 노르망디, 팔캉 수도원, 세르부르와 몽에 대한 잉글랜드 국왕의 종주권을 자기 소유물로 삼았고, 헨리 왕자가 소유하던 코탕탱 반도 영지를 몰수하며, 윌리엄 2세는 잉글랜드 왕국의 주권을 온전히 인정받았다. 또한 두 사람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땅에 대한 통제권을 확립하는 데 상호 지원하기로 했으며, 로베르는 윌리엄의 상속자로 지명되고, 윌리엄 역시 로베르의 상속자로 지명되었다. 헨리는 캉 조약에 반발해 몽생미셸 성에서 용병을 끌어모아 농성했지만, 두 형의 군대에게 포위되어 몇 주간 항전한 끝에 4월에 성이 함락되자 브르타뉴로 망명했다.

1092년, 헨리는 노르망디 서부 귀족들을 포섭해 로베르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확보하려 들었고, 윌리엄 2세도 헨리 왕자를 지원했다. 얼마 후, 헨리 왕자는 지역 주민들의 지원으로 동프롱에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 로베르 공작은 동프롱이 당시 노르망디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인 로베르 드 벨렘의 영지이므로, 동생이 그곳을 취하는 건 노르망디 공작에게 도전할 수 있는 위험한 봉신을 약화할 좋은 기회라고 여겼기에 동생과 싸우지 않았다. 이후 헨리는 2년간 서부 노르망디에서 추종자들을 끌어모으고, 로베르 2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봉신들엑에 영지를 수여했으며, 윌리엄 2세로부터 받은 자금으로 동프롱에 새로운 요새를 건설했다. 1096년 로베르 2세가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뒤, 윌리엄 2세가 노르망디 공국을 대신 맡았다. 헨리는 윌리엄 2세와 더욱 가까워졌고, 1097년에서 1098년 사이에 벡상에서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를 상대로 원정을 벌였다.

2.3. 잉글랜드 왕위 등극

1100년 8월 2일, 헨리를 포함한 여러 귀족과 함꼐 햄프셔의 뉴 포레스트로 사냥을 갔던 윌리엄 2세가 화살에 맞아 사망했다. 헨리는 윌리엄 2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즉시 윈체스터로 달려간 뒤, 그곳에서 귀족들과 잉글랜드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했다. 기욤 드 브레퇴유 등 일부 귀족은 로베르 2세가 십자군 원정에서 귀환하기를 기다리자고 주장했지만, 헨리는 자신이 로베르와는 달리 아버지가 잉글랜드 왕국을 통치하는 동안 잉글랜드 땅에서 태어났으므로 포르피로게니투스이니 자신이 잉글랜드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워릭 백작 헨리 드 보몽과 랭커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이 헨리를 지지했고, 뒤이어 대다수 귀족이 헨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 후 헨리는 국고를 확보한 후 8월 5일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서 런던 주교 모리스에 의해 대관식을 거행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로 등극했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 주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해 자유 헌장을 반포했다. 그는 이 헌장에서 왕국의 질서를 회복하며, 전임자의 성직자 억압 정책을 파기하며, 영주들의 재산에 대한 왕실의 과도한 간섭 및 수탈을 종식하며, 참회왕 에드워드의 선한 관습으로 복귀하며, "확고한 평화를 확립하겠다"라고 약속했다. 여기에 윌리엄 2세가 공석으로 남겨뒀던 주교들을 신속하게 선임하고, 로마에 망명 중이던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불러들였으며, 윌리엄 2세의 최고 고문으로서 전제 정치에 기여했던 더럼 주교 라눌프 플림바드는 부패 혐의로 런던 탑에 투옥되었다.

1100년 11월 11일, 헨리 1세는 스코틀랜드 국왕 에트가르의 누이인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했다. 마틸다는 어머니 마가렛을 통해 앵글로색슨 혈통이며, 지난날 잉글랜드 왕위를 놓고 윌리엄 1세와 대적했으나 끝내 실패한 에드거 2세의 조카이며, 에드먼드 2세의 증손녀였다. 따라서 그는 이 결혼을 통해 잉글랜드 인구 다수를 차지하는 앵글로색슨족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다. 마틸다는 여러 수녀원에서 자랐고, 이미 수녀가 되겠다는 서약을 했을 수도 있어서, 결혼이 성사될 지는 미지수였다. 이에 헨리 1세는 안셀무스의 주관하에 램버스 궁전에서 소집된 의회에서 의원들에게 지지를 호소했다. 일부 인사들이 반대했지만, 의회는 마틸다가 실제로 수녀가 아니라고 결론 내리고 그녀에게 헨리 1세와 결혼할 권한을 부여했다.

마틸다를 왕비로 택한 헨리 1세의 선택은 적중했다. 그녀는 탁월한 지성인으로, 원정을 떠난 남편을 대신해 섭정을 여러 차례 맡으면서 의회를 주재하고 연설했으며, 예술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또한 그녀는 남편에게 여러 자식을 낳았다. 1102년 딸 마틸다를 낳았고, 1103년에는 아들 윌리엄 애셀링을 낳았다. 이후 셋째 아들 리처드를 낳았으나 유아기에 사망했다. 그러나 이렇듯 성공적인 결혼 생활에도 불구하고, 헨리 1세는 적어도 아들 9명과 딸 13명에 달하는 사생아를 두었다.

2.4. 형 로베르 2세와의 대결

한편, 십자군 원정을 마치고 노르망디로 귀환한 로베르 2세는 윌리엄 2세가 사망하고 헨리 1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깊은 불만을 품었지만, 일단 일단 노르망디의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그는 주민들이 불만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지난날 윌리엄 2세에게 선임된 바이외 주교 투룰 드 브레모이의 권력을 박탈해 바이외를 사실상 통제했고, 리지외 교구를 윌리엄 2세의 총신이었으나 헨리 1세에게 체포되어 런던 탑에 수감되었다가 탈출해 노르망디로 망명한 라눌프 플램바드의 통제하에 두게 했다. 또한 세 교구는 로베르 드 벨렘의 통제하에 두도록 했다. 이로 인해 교구 수입이 대거 넘어가자, 세 주교인 세를롱 도르제르는 로베르 드 벨렘을 파문한 뒤 지역 수도원장과 대 집사와 함께 헨리 1세의 궁정으로 망명했다.

1101년 6월, 로베르는 200척의 대함대를 르 트레포르에 집결해 잉글랜드로 진격할 준비에 착수했다. 로베르 드 벨렘, 페벤시 성주 윌리엄 드 모르탱,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 등 잉글랜드 거물들이 그를 지지했고, 볼로뉴 백작 유스타스와 에브뢰 백작 앙리도 그를 지지했다. 헨리 1세는 이에 맞서 샤이어에서 군대를 소집한 뒤, 병사들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가용 병력과 함께 남쪽으로 가서 페벤시 인근에 숙영지를 세웠다. 7월 20일, 로베르의 함대는 잉글랜드로 출항했다. 그는 영국 해협에서 헨리가 보낸 배들을 만났지만, 그들은 곧장 로베르 편으로 돌아섰다. 노르만 함대는 서쪽으로 항해해 8월 초에 포츠머스 항구에 도착했다.

로베르의 군대는 윈체스터를 향해 진군했지만, 윈체스터 시민과 수비대가 항복을 거부하고 농성하자 공략을 포기하고 런던으로 방향을 틀었다. 헨리 1세는 가신들로부터 충성 맹세를 갱신받았고,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로베르 편으로 들려던 귀족 상당수를 자기 쪽으로 돌려세웠다. 이후 앨턴에서 헨리 1세의 군대와 조우한 로베르는 전투를 벌이는 대신 평화 협상하기로 마음먹었다. 로베르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불명확하다. 연대기 작가들은 왕위를 주장하는 두 사람의 동맹자들의 노력을 통해 화해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오더릭 바이탈은 거물들은 전쟁을 열망했지만, 헨리 1세가 로베르와 직접 만나 평화적으로 해결하자고 설득해 동의를 얻어냈다고 주장했다. 일부 학자들은 기름부음받은 군주를 상대로 무기를 든 로베르를 파문할 준비가 되어 있던 안셀무스 대주교의 강경한 태도가 로베르로 하여금 헨리 1세와 타협하기로 마음먹은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두 형제는 앨턴에서 1091년 로베르와 윌리엄 2세가 체결한 캉 조약과 유사한 조건의 조약을 맺었다. 로베르는 잉글랜드 왕위에 대한 자신의 권리를 포기했고, 헨리도 노르망디에 대한 자신의 소유권을 포기했다. 또한 두 형제는 적법한 후손이 없을 경우 서로를 상속자로 삼기로 했다. 그리고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매년 은화로 3천 마르크를 지불할 의무가 있었는데, 이는 잉글랜드 수입의 10분의 1에 달했다. 그리고 분쟁에 참가한 모든 당사자는 자기 영지로 돌아가며, 형제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서로 돕기로 했다. 로베르는 조약 체결 후 잉글랜드에서 몇 달간 지내다가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조약을 무시하고 로베르 2세를 지지하는 귀족들에게 엄격한 제재를 가했다. 로베르 2세의 상륙 중에 여러 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기소된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은 앨턴 조약의 사면 대상에서 제외되어 추방형에 처해졌다. 1102년, 헨리 2세는 로베르 드 벨렘이 45개의 중범죄를 저질렀다고 규탄했다. 그 후 그는 몇 달간 로베르 드 벨렘이 속한 몽고메리 가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모조리 압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 2세에게 앨턴 협정에 따라 반역자 로베르 드 벨렘을 처벌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따라 로베르 드 벨렘이 숨은 비니 성을 포위했지만, 그의 진영에 있던 공모자들이 자기 천막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면서 군대가 와해되었다. 이후 로베르 드 벨렘의 군대는 이웃 영주들의 영지를 약탈했다.

그 후 헨리 1세는 노르망디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노르만 귀족 라울 3세 드 토스니가 아버지 사후 잉글랜드에서 상속받은 땅을 접수하기 위해 찾아오자, 헨리 1세는 노섬브리아 백작 월테오프의 부유한 상속녀인 아델리자와 라울 3세의 결혼을 주선했다. 1103년 1월 12일, 기욤 드 브레퇴유가 적법한 후손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했고, 사생아 유스타스가 이 땅을 접수했다. 그러자 기욤의 조카들이 강하게 반발했고, 유스타스는 헨리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헨리 1세는 그를 지원해주겠다고 약속하고, 자신의 사생아인 줄리아나 드 퐁트브로와 결혼시켰다. 이후 헨리 1세의 지시를 받은 로베르 드 멜룬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조카들이 유스타스에게 복종하도록 강요했다. 여기에 더해, 헨리 1세는 또다른 사생아인 마틸다를 로베르 드 벨렘의 정적인 페르샤 백작 로트루 3세와 결혼시켰다.

이렇듯 헨리 1세가 노르망디 정계에 광범위한 개입을 행사하는 동안, 로베르는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1103년 로베르 드 벨렘을 상대로 군사 원정을 벌이기로 했다. 아르눌프 드 몽고메리가 알메네스 성을 접수한 뒤 로베르에게 넘겨주자, 로베르 드 벨렘은 반격을 가해 알메네스 성을 접수하고 그곳의 수녀원을 불태웠으며, 수비대 일부는 위생이 좋지 않은 감옥에 감금되어 기나긴 옥살이를 해야 했고, 나머지는 신체 절단형에 처해졌다. 뒤이어 로베르 드 벨렘은 로베르와 그의 동맹군을 격파하고 주변의 여러 성을 접수했다.

1103년 여름, 제2대 서리 백작 윌리엄 드 워렌이 핸라 1새애개 영지를 몰수당한 뒤 로베르를 찾아와서 왕을 설득해서 재산을 돌려주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는 이에 응해 잉글랜드로 가서 헨리 1세와 접견했다. 그 결과 헨리 1세는 서리 백작에게 영지를 돌려주는 걸 받아들였지만, 그 대신 로베르는 1101년 침공 이후에 받았던 연금 3,000마르크를 포기해야 했다. 1104년, 헨리 1세는 윌리엄 드 모르탱이 왕국 남동부의 영지를 불법적으로 점유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윌리엄 드 모르탱은 노르망디로 망명했고, 헨리 1세는 그의 잉글랜드 영지를 몰수했다. 그 해 8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에 있는 자기 영지를 방문했고, 그의 가신들로부터 명예로운 영접을 받았다. 그 후 헨리는 로베르와 만나서 그가 자기 가신들 사이에 체결된 계약 조건을 위반했다고 비난했다. 이에 로베르는 기욤 데브뢰가 헨리 1세의 봉신이 되는 걸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그가 이토록 헨리 1세에게 무기력하게 끌려다닌 이유는 불분명하나, 아마도 1103년 3월 아내 시빌이 아들 기욤 클리토를 낳은 지 5개월 만에 사망한 것에 깊은 정신적 충격을 받았기 때문으로 보인다.[3] 그러던 1105년 초, 칼바도스 지역의 크룰리 영주이자 노르망디 망슈 지역의 영주이며, 글로스터 남작인 로버트 피츠하몬이 노르망디로 가서 바이외 근처의 조상 영지 근처에서 군사 작전을 벌이다가 로베르의 지지자들에게 패배해 생포되었다. 헨리 1세는 자신의 주요 추종자인 로버트 피츠하몬의 생포 소식을 듣자 로베르에게 그를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로베르가 받아들이지 않자, 헨리 1세는 앨턴 협정이 파기되었다고 선언했다.

1105년 4월, 헨리 1세는 노르망디 원정을 개시했다. 잉글랜드군은 바르플뢰르에 상륙한 뒤 부활절에 카랑탕에 도착했다. 그들은 이곳에서 멘 백작 엘리 1세, 앙주 백작 조프루아 4세 마르텔의 군대와 합세했고, 노르망디의 주요 거물들의 지원을 받았다. 로베르에게 가담한 거물은 로베르 드 벨렘과 윌리엄 드 모르탱 뿐이었다. 로베르는 프랑스 국왕 필리프 1세와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에게 원군을 욫어했지만, 헨리 1세가 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보내며 중립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4월 중순 바이외에 도착한 헨리 1세는 로버트 피츠하몬을 석방한 뒤 바이외 수비대에 항복을 요구했다. 수비대가 이를 거부하자, 헨리 1세는 무력으로 공략한 뒤 약탈과 방화를 자행했다. 그 후 캉으로 진군한 헨리 1세는 캉 시민들이 성주를 추방하고 도시를 넘겨준 덕분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헨리 1세는 여세를 이어가 팔레즈 성을 맹렬하게 공격했으나 공략에 실패했다.

1105년 5월 말, 헨리 1세는 생토에서 로베르의 사절단과 협상했지만 별다른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그러다가 성직자 서임권 논쟁으로 인해 켄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와 갈등이 생기자, 헨리 1세는 일단 원정을 중단하고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 해 겨울 로베르 드 벨렘과 로베르 공작의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해 평화 협상을 논의했지만 별다른 결론을 얻지 못했다. 1106년 봄, 안셀무스와의 분쟁이 해결되자 원정을 재개한 헨리 1세는 팔레즈 근처 생피에르쉬르디브의 요새화된 수도원을 재빨리 점령한 후, 남쪽으로 방향을 돌려 팅슈브레 성을 포위했다. 팅슈브레는 노르망디 남서쪽, 모르탱 백작의 국경에 있으며, 로베르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몇 안 되는 중요한 노르만 거물인 윌리엄 드 모르탱이 지키고 있었다. 이에 로베르 공작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가서 헨리 1세와 대치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에게 평생 연금을 받는 대가로 노르망디의 권력을 넘겨달라고 제안했다. 프랑스의 저명한 은둔 수도자 비탈 드 사비니도 로베르에게 형제와 화해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더 이상 헨리 1세에게 우롱당할 수는 없다고 여기고, 전투를 감행하기로 했다. 이후 벌어진 팅슈브레이 전투는 한 시간 동안 벌어진 끝에 수적으로 우월한 헨리 1세의 승리로 끝났다. 로베르의 군대 대부분은 포로가 되거나 사망했고, 로베르는 윌리엄 드 모르탱과 함께 생포되었다. 로베르 공작의 후위대를 지휘했던 로베르 드 벨렘은 탈출에 성공한 뒤, 노르망디 전역을 지배하게 된 헨리 1세에게 귀순했다. 헨리 1세는 로베르를 생포한 뒤 팔레즈로 진군해 항복을 받아낸 후, 로베르의 4살된 아들 기욤 클리토를 자신의 부하인 아크라 백작 엘리아 드 생상스의 관리하에 두도록 했다. 1106년 10월 중순, 헨리 1세는 노르만 귀족들을 리지외 회의에 소집해 충성 서약을 받아냈고, 로베르는 얼마 후 잉글랜드로 이송된 뒤 여러 곳을 전전한 끝에 카디프 성에 연금되어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

2.5. 통치

2.5.1. 노르망디 공작으로서의 통치

헨리 1세는 로베르 2세를 꺾고 노르망디를 손아귀에 넣은 뒤 윌리엄 1세 치세에 존재했던 국가 행정을 신속하게 복원했다. 로베르 2세가 노르만 귀족들에게 배포한 땅과 성은 공작의 직할령으로 반환되었다. 그는 공공 평화를 위반하는 모든 이들을 잔인하게 처벌했으며, 지역 영주들이 불법적으로 건설한 요새를 파괴했다. 공작의 권력이 급격하게 강화했으며, 재정 및 사법 시스템의 간소화로 노르망디에서 국고로의 재정 수입이 크게 증가했다. 그러나 노르망디의 여러 귀족은 이 때문에 자신들의 자치권이 심하게 침해된 것에 깊은 반감을 품고, 로베르 2세의 유일한 아들인 기욤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내세울 기회를 엿보았다.

한편,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헨리 1세가 노르망디를 공략하면서 잉글랜드 국왕의 권세가 강해지자, 이를 견제하기 위해 플란데런 백국과 앙주 백국을 끌어들였다. 1110년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노르망디 공국의 봉신으로 여겨졌던 멘 백국을 물려받았지만 헨리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했다. 또한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는 윌리엄 1세 치세 말기부터 잉글랜드-노르망디 연합에 강한 적개심을 드러냈다. 헨리 1세는 이에 맞서기 위해 자기 누이 아델의 남편이며 루이 6세의 정적인 블루아 백작 티보 2세를 동맹으로 끌어들였다.

헨리 1세의 노르망디에서의 통치 기간 대부분은 이웃 국가들과의 끊임없는 전쟁이었다. 첫번째 전쟁(1111 ~ 1113)은 매우 성공적으로 끝났다. 플란데런 백작 로베르 2세는 1111년 티보 2세가 루이 6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걸 진압하기 위해 출진했다가 모 공방전 도중 치명상을 입고 마른 강에 떨어져 익사했다. 여기에 반(反) 헨리 1세 성향의 노르만 귀족 로베르 드 벨렘은 1112년 헨리 1세에게 생포되어 잉글랜드로 끌려간 뒤 도셋의 워헴 성에 감금되어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지내야 했다. 또한 헨리 1세의 맹공으로 알랑송을 상실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멘 백작으로서 헨리 1세에게 경의를 표하기로 했다. 결국 모든 동맹이 이탈하자, 루이 6세는 어쩔 수 없이 헨리 1세와 타협하기로 했다. 1113년, 루이 6세는 노르망디 뿐만 아니라 멘과 브르타뉴에 대한 주권을 헨리 1세가 갖는 걸 인정했다.

1115년, 헨리 1세는 노르망디로 가서 귀족들이 합법적인 아들 윌리엄 애설링에게 충성 서약하도록 했으며, 뒤이어 루이 6세와 협의해 아들이 노르망디 공작 후계자임을 인정받는 대가로 상당량의 자금을 지불하기로 했다. 그러나 루이 6세는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기욤 클리토의 노르망디 공국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기로 했다. 이후 양측 군대가 각자의 국경 마을을 약탈하는 일이 빈번하게 벌어지면서 전운이 감돌았다. 1116년, 루이 6세는 플란데런 백국과 앙주 백국과 손잡고 노르망디를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1118년 아마우리 3세 드 몽포르가 이끄는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보두앵 7세가 파견한 군대와 합세해 노르망디 동부 전역을 휩쓸었으며, 기욤을 노르망디 공작으로 받들었다. 1118년 5월 1일 스코틀랜드의 마틸다 왕비가 웨스트민스터 궁전에서 사망했지만, 헨리 1세는 노르망디의 상황이 너무 심각했기에 마틸다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이렇듯 상황이 다급했지만, 헨리 1세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가신들의 봉기를 하나둘씩 제압했고, 조카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가 아크라 요새를 포위공격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듬해 사망하는 행운이 따랐고, 이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19년 6월, 헨리 1세는 자기 아들 윌리엄 애설링과 앙주의 마틸다의 결혼식을 리지외에서 벌이고 앙주 가문에 막대한 자금을 보냈다. 그 결과 풀크 5세는 헨리 1세 편으로 돌아섰고, 얼마 후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면서 멘 백작령의 관리를 헨리 1세에게 맡겼다. 이제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119년 여름 백상을 침공한 헨리 1세는 8월 20일 브레뮐에서 루이 6세의 프랑스군과 맞붙어 압승을 거두었다. 이때 그는 적 기사가 휘두른 칼에 맞았지만 탄탄한 갑옷 덕분에 경상에 그쳤다.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토가 도주한 뒤, 헨리 1세는 루앙으로 귀환했다. 1119년 10월, 루이 6세는 랭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교황 갈리스토 2세의 개입을 청원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군주 중 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거부하고 평화를 맺을 것을 권고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헨리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고, 양자는 1120년 6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윌리엄 애설링은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미래의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2.5.2. 잉글랜드 국왕으로서의 통치

잉글랜드 국왕으로서 헨리 1세는 왕권을 크게 강화하고 중앙집권적인 행정기구를 창설하기 위한 중요한 개혁을 단행했다. 왕실 의회는 보다 명확한 구조를 갖췄고, 고위 정부 직책에 대한 급료 지불 체계가 구축되면서 잉글랜드 관료주의의 출현에 기여했다. 여기에 왕실 의회의 개별 단위의 기능은 더욱 전문화되었다. 행정 분야의 주요 혁신은 재무 관리 및 법원의 최고 기관인 체스판 회의소[4] 설립이었다. 각 주의 보안관은 지역 남작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을 중단하고, 왕실 관리로 전환했으며, 지역적으로 왕실 의지의 집행을 감독하고 정부 수입을 징수하며, 정기적으로 체스판 회의소와 왕에게 보고했다. 특히 헨리 1세는 프랑스에서 전쟁을 벌이는 데 필요한 용병 부대를 유지하기 위해 방패세[5] 징수에 전력을 기울였다.

또한 헨리 1세는 수백 개의 샤이어 법정이 참회왕 에드워드 시대와 같은 장소와 간격으로 열리도록 했다. 그는 새로운 법률을 제정하지 않았고, 앵글로색슨 시대의 법률 체계를 유지했지만, 사법 행정에 지속적으로 참여하고 현지 왕실 관리의 업무를 엄격하게 감독함으로써 사법 체계를 간소화하고 법률을 도입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형태의 법적 절차, 특히 배심원 재판의 활용이 확대되었으며, '신의 심판'[6], 결투 재판 같은 구식 제도의 활용이 감소했다.

헨리 1세는 잉글랜드의 도시와 마을 정부의 발전을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그의 치세 아래, 잉글랜드의 대도시들은 독립적으로 세금을 징수하고 왕실 재무부 에 직접 지불할 권리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는 잉글랜드 도시의 내부 자치권을 확보하기 위한 첫번째 단계였다. 특히 헨리 1세는 런던 시민들에게 덴마크세[7], 무역 관세를 면제하고 보안관과 대판사를 선출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또한 헨리 1세는 도시와 상인 길드에 다양한 특권을 부여했고, 잉글랜드 최초의 공예 길드를 승인해 국가의 무역, 공예 및 산업 발전을 지원했다.

한편, 헨리 1세는 스코틀랜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다. 대륙의 문제로 무척 바빴던 그는 북쪽 국영의 안전을 어떻게든 보장받아야 했다. 1100년 스코틀랜드의 마틸다와 결혼한 것을 시작으로, 마틸다의 형제인 알락산다르 1세와 데이비드 1세를 초빙해 런던에서 공부하도록 했고, 잉글랜드 귀족 가문 여식을 아내로 삼도록 했다. 이 기간 동안 앵글로-노르만족의 영향력이 스코틀랜드에 적극적으로 침투하기 시작했다. 특히 1124년 집권한 데이비드 1세는 수많은 앵글로-노르만 기사들을 자신의 나라로 끌어들여 그들에게 땅을 부여하고 스코틀랜드의 국가 및 사회 시스템을 잉글랜드 봉건제로 개편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데이비드 1세는 노르망디 전선에 직접 가서 헨리 1세를 도왔으며, 그의 아내인 헌팅던의 마틸다의 권리로 잉글랜드에서 광범위한 토지를 보유하고 헌팅던 백작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127년에는 헨리 1세의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로 인정했으며, 헨리 1세 사후 무정부시대가 벌어졌을 때 마틸다가 잉글랜드 여왕이 될 수 있도록 힘껏 도왔다.

윌리엄 2세 통치 시기인 1094년, 포이스의 왕 카드완 압 블레딘(Cadwgan ap Bleddyn, 1051 ~ 1111)과 귀네드의 왕 그리퍼드 압 커난(Gruffydd ap Cynan, ? ~ 1137)이 앵글로-노르만 남작들을 거의 몰아내고 잉글랜드로부터 독립했다. 윌리엄 2세는 웨일즈 반란군을 평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공격했지만, 웨일스군이 정면대결을 피하고 산악 지대에 숨으면서 유격전을 벌였기에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114년, 헨리 1세는 노스웨일즈에 대한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회복하기 위해 공격해 봤지만, 역시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귀네드의 왕인 그리프디 압 커난이 잉글랜드 왕국을 자신의 명목상 주권자로 인정하는 선에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사우스 웨일스에서는 잉글랜드의 지배력을 강화했다. 세레디기온은 1110년 제2대 클레어 경 길버트 피츠리처드의 통치를 받았고, 브렉녹은 잉글랜드의 고위 순찰대장인 해리퍼드 백작 글로스터의 마일스의 소유가 되었다. 글래모건은 로버트 피츠하몬에게 정복되었으며, 1107년 로버트 피츠하몬이 사망한 뒤 헨리 1세의 사생아인 글로스터의 로버트가 맡았다. 현지 웨일스 귀족의 통제하에 유지되는 지역은 캔트레브[8] 몇 개로 축소되었다. 이렇듯 사우스 웨일즈는 사실상 잉글랜드의 지방이 되었다. 그러나 헨리 1세 사후 무정부시대가 한창 이어지던 1136년에, 웨일스인들이 대규모 봉기를 일으키면서 사우스웨일스에서 데허바르스 왕국이 세력을 크게 확장했고, 잉글랜드의 통치력은 크게 축소되었다.

2.5.3. 교회와의 관계

헨리 1세가 대관식을 치른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윌리엄 2세 통치기에 로마로 망명했던 캔터베리 대주교 안셀무스를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이후 안셀무스는 헨리 1세가 잉글랜드 국왕이 된 걸 적극적으로 지지해, 헨리 1세가 로베르 2세를 물리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그는 캔터베리 대주교가 보유한 영지에 대해 왕에게 경의를 표하길 거부하고, 교회 문제에 세속 당국이 간섭하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밝혔다. 헨리 1세 역시 주교와 수도원장을 서품하기 위해 임명할 수 있는 잉글랜드 왕의 고대 특권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이미 독일과 프랑스에서 불타오르던 서임권 투쟁은 잉글랜드에서도 벌어졌다. 양자는 이따금 타협을 시도해 봤지만, 그레고리오 7세의 개혁을 열렬히 지지한 교황 파스칼 2세의 완고한 입장으로 인해 실패했다. 1103년, 안셀무스는 왕의 동의 없이는 대주교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다며 잉글랜드를 다시 떠났다. 1105년, 파스칼 2세는 왕의 서품을 받아들인 잉글랜드 주교들을 파문하고 헨리 1세 역시 파문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1107년, 헨리 1세는 한 발 물러서기로 했다. 그는 성직자들이 주교를 선출하는 자유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안셀무스는 헨리 1세로부터 서품받은 성직자들을 승인하기로 했으며, 왕이 선출된 주교와 대수도원장의 경의를 받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 합의는 주교와 대수도원장을 선출하는 과정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한 왕권에 유리했다. 그러나 1109년 안셀무스가 사망하자, 헨리 1세는 윌리엄 2세가 그랬듯이 캔터베리 대주교를 고의로 비워두고 캔터베리 주교구 수입을 국고로 인출했다. 여기에 교회가 성직매매 죄로 정죄했던 주교와 수도원장이 그들의 땅을 소유할 때 왕에게 인정받는 대가로 세금을 바치는 관행을 재개했으며, 결혼한 성직자는 왕에게 벌금을 지불하는 조건으로 직위를 유지했다. 성직자와 로마 사이의 관계는 왕의 통제하에 놓였고, 교황은 영국 교회에 대한 통제권을 사실상 박탈당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었는데도 교황청과 잉글랜드 국왕의 관계는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특히 헨리 1세의 6촌인 갈리스토 2세 재임 기간 동안, 교황은 프랑스 및 앙주 백작과 갈등을 벌이는 잉글랜드 왕국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인 모습을 보였고, 헨리 1세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교황 특사가 잉글랜드로 파견되는 걸 승인했다. 한편, 헨리 1세의 치세 동안 윌리엄 1세의 정복 이후 쇠퇴했던 수도원 운동이 부활했다. 헨리 1세는 수도원, 특히 시토회 수도원의 설립과 빈자와 나병 환자 수용소를 위한 병원의 설립을 장려했다. 그는 레딩 수도원을 직접 설립했으며, 나중에 사망한 뒤 그곳에 묻혔다.

2.6. 승계 위기

1120년 11월 25일, 화이트쉽 호가 노르망디의 바르플뢰르 항을 떠나 잉글랜드로 돌아가다가 암반에 부딪혀 최소 300명이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출자인 윌리엄 애설링과 사생아 마틸다 피츠로이, 링컨의 리처드 등이 목숨을 잃었다. 헨리 1세는 이 충격적인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앓아 누웠다가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1121년 1월 24일, 헨리 1세는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서는 자식이 끝내 태어나지 않았다.

이제 기욤 클리토가 윌리엄 1세의 마지막 후손으로서 노르망디 뿐만 아니라 잉글랜드 왕국의 상속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헨리 1세는 자기와 대적한 기욤 클리토가 그리 되기를 원하지 않았고, 자기 누이 아델의 아들인 에티엔 드 블루아를 후계자로 선포하려 했다. 하지만 많은 노르망디 귀족들은 기욤의 권리를 지지하기로 했는데, 에브뢰 백작 아이머리 3세 드 몽포르, 멜룬 백작 갈레랑 4세 드 보몽이 대표적인 기욤 지지파였다. 1122년,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딸 마틸다와 결혼했던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드의 지참금으로 보낸 자금과 멘에 있는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1세는 마틸다를 보내줬지만 지참금과 요새를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풀크 5세는 1123년 또다른 딸 시빌과 기욤 클리토의 결혼을 주선했고, 기욤 클리토를 멘 백작으로 내세웠다.

헨리 1세는 교황청에 시빌과 기욤이 가까운 친족이니 근친혼이므로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고 요청했고, 갈리스토 2세는 1124년에 이를 받아들였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을 지지하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군 내부의 이해관계가 엇갈렸고, 구심점이 될 만할 인물이 없어서 분열되었다. 1124년 3월, 헨리 1세가 파견한 왕실군은 루앙 남동쪽 부르크테롤드에서 전투를 벌여 반란군을 격파하고 주동자들을 생포했다. 프랑스 국왕 루이 6세는 반란군을 지원하려 했지만, 그 전에 반란군이 소멸되면서 무산되었다. 1124년 여름, 프랑스 왕국은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결혼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공격을 받았다. 루이 6세는 제국군을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기욤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걸 포기했다.

1125년, 헨리 1세는 조카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125년 5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이듬해 딸 마틸다를 잉글랜드로 소환한 뒤 자신이 아들을 두지 못한 채 죽는다면 마틸다가 자신을 계승할 거라고 선언헀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1127년, 플란데런 백작 샤를 1세가 후계자를 두지 못한 채 사망했다. 이에 루이 6세는 기욤 클리토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선임했다. 그 후 기욤은 헨리 1세로부터 노르망디를 되찾기 위해 부유한 플란데런 도시들에 막대한 세금을 부과해 잉글랜드군과의 전쟁을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이때 그는 건물에 대한 새로운 세금과 박람회 거래 수수료를 부과했으며, 각 도시의 정치에 깊게 간섭하려 했다. 이에 시민들은 강한 불만을 품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국의 주요 무역 상품인 직물 제조업에 가장 중요한 원재로인 양모를 공급하는 국가인 잉글랜드에 대한 기욤의 적대 행위는 플란데런 상인들의 이권을 위협했다. 이에 플란데런인들은 티에리 드 알자스를 플란데런 백작으로 세우기로 마음먹었고, 헨리 1세로부터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얻었다.

1128년 2월, 생오메르와 겐트 주민들이 기욤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 뒤이어 브뤼헤가 3월에 반기를 들었고, 도 5월에 반란을 일으켰다. 오직 플란데런 백국 남쪽의 소규모 지역만이 기욤의 통제하에 남았다. 이에 기욤은 브뤼헤를 공격했고, 6월 21일 악풀 전투에서 티에리 드 알자스의 노르만-로렌 연합군을 격파했다. 이후 브라반트 변경백 조프루아 1세의 군대와 합세한 뒤 7월 12일 티에리 드 알자스가 피신한 알스트를 포위했다. 그러나 기욤은 공방전을 치르던 중 석궁에 치명상을 입었고, 1128년 7월 28일 2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기욤 클리토가 이렇게 죽어버리자,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평화 협정을 맺고 1123년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체포되어 이때까지 수감 중이던 노르망디 귀족들을 석방했다.

1128년 6월 17일, 헨리 1세의 딸 마틸다와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이 성립되었다. 사실 마틸다는 한때 신성 로마 황후였던 자신이 일개 백작의 아내가 된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겨 조프루아 5세와 결혼하길 무척 꺼렸지만, 마틸다가 여왕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려면 앙주 가문을 아군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확신한 헨리 1세의 강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의 결혼은 처음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는 듯했다. 부부는 잘 지내지 못했고, 마틸다가 지참금으로 가져와야 할 노르만 요새들은 좀처럼 정해지지 않았다. 그러다가 1133년과 1134년에 두 아들 헨리와 제프리가 각각 출생하면서, 헨리 1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2.7. 말년과 사망

헨리 1세의 통치 마지막 몇 달은 헨리 1세와 조프루아 5세와 마틸다 부부 간의 관계 악화로 점철되었다. 1135년 초,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그 해 가을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곧바로 노르망디로 향했다.

1135년 11월, 헨리 1세는 리용라포레에서 사냥하다가 급병에 걸렸다. 12세기 헌팅던 대주교이자 연대기 작가 헌팅던의 헨리(Henry of Huntingdon, 1088 ~ 1160)에 따르면, 헨리 1세가 의사의 조언을 무시하고 칠성장어를 과도하게 먹었기 때문에 병에 걸렸다고 한다. 헨리 1세의 상태는 일주일 동안 크게 악화되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깨닫고, 루앙 대주교 위그 다미앵, 사생아인 글로스터의 로버트를 포함한 궁정의 주요 인사들을 소환한 뒤 자기가 일생 동안 쌓았던 부채를 갚아줄 것이며, 반군에 대해 취한 제재를 취소하라고 지시했다. 1135년 12월 1일 67세의 나이로 사망했고, 그의 유해는 루앙으로 옮겨져 방부 처리된 뒤, 잉글랜드로 이송되어 레딩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내장은 발몽의 노트르담뒤프레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헨리 1세의 사망이 공표되었을 때,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는 앙주에 있었고, 노르망디에서 벌어진 반란을 지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더욱이, 헨리 1세의 원정에 동행했던 귀족들은 고인이 된 왕이 매장될 때까지 노르망디에 머물겠다고 맹세했고, 이 때문에 즉시 잉글랜드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 노르만 귀족은 블루아 백작 티보 4세를 왕으로 옹립할 지를 논의했다. 그러던 중 티보 4세의 형제이며 한때 헨리 1세에 의해 왕위 계승 후보로 고려되었던 에티엔 드 블루아가 소규모 병력을 이끌고 불로뉴에서 영국 해협을 건넌 뒤 런던에 입성했고, 1135년 12월 22일 윈체스터 주교인 남동생 앙리 드 블루아와 노퍽 백작 휴 드 비고의 지지를 받으며 잉글랜드의 스티븐 왕으로 즉위했다. 이에 마틸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항소한 후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잉글랜드로 진격하면서, 장장 18년간 잉글랜드 왕국을 대혼란과 파괴로 몰아넣을 무정부시대의 막이 올랐다.

3. 가족

3.1. 왕비

  • 스코틀랜드의 마틸다(1080 ~ 1118):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
  • 루뱅의 아델리자(1103 ~ 1151):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

3.2. 자녀

자녀 이름 출생 사망 배우자/자녀
스코틀랜드의 마틸다[9]
(Matilda of Scotland)
1녀 신성 로마 제국 황후 마틸데
(Matilda, Holy Roman Empress)
1102년 2월 7일 1167년 9월 10일 하인리히 5세
조프루아 5세
슬하 3남[10]
1남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애설링
(William Ætheling, Duke of Normandy)
1103년 8월 5일 1120년 11월 25일 앙주의 마틸드[11]

3.3. 정부와 사생아

  • 알세스터의 시빌라 코벳(1077 ~ 1157): 알세스터 영주 로버트 코벳의 딸. 헨리 1세의 정부. 나중에 잉글랜드 내각 장관 허버트 피츠허버트와 결혼했다.
    • 노르망디의 시빌라(1092 ~ 1122): 스코틀랜드 국왕 알락산더르 1세의 부인.
    • 윌리엄 콘스타블(1105 ~ 1187년 이후)
    • 레지널드 드 던스턴빌(1110 ~ 1175): 콘월 백작.
    • 잉글랜드의 군드레드(1114 ~ 1146): 헨리 드 라 포메로이의 부인.
    • 잉글랜드의 로헤세(1115 ~ ?): 윌리엄 드 트레이시의 부인.
  • 에디스 포네(? ~ 1129년 이후): 그레이스토크 영주 시걸프슨의 딸. 1120년 로버트 도일리와 결혼했으며, 1127년 오스니 섬에 아우구스티노회인 오스니 수도원을 세우는 데 일조했다.
    • 로버트 피츠에디스(1093 ~ 1172): 오크햄튼 봉건 영지의 상속녀이자 윌리엄 드 쿠르시 의 과부인 마틸다 다브랑슈와 결혼했다.
    • 윌리엄 드 트레이시(1097 ~ 1140)
    • 아델리자 피츠에디스(? ~ ?): 형제 로버트와 함께 헨리 1세의 헌장에 언급되었다.
  • 안스프리드(? ~ ?)
    • 링컨의 리처드(1101년 이전 ~ 1120년 11월 25일): 화이트쉽 호 침몰 사고 때 윌리엄 애설링과 함께 익사했다.
    • 줄리아나(1103 ~ 1123): 브레퇴유 백작 외스타슈 드 브레퇴유의 부인.
    • 쿠츠 피츠로이(? ~ ?): 버크셔의 애빙던 수도원의 수도사.
  • 에디트(? ~ ?)
    • 마틸다 피츠로이(1103년 이전 ~ 1120년 11월 25일): 페르슈 백작 로트루 3세의 부인. 화이트쉽 호 침몰 사고 때 윌리엄 애설링과 함께 익사했다.
  • 네스트 퍼치 리스(1085 ~ 1136): 웨일스의 데허바르스 국왕 리스 압 튜드워의 딸. 당대 최고의 미녀로 손꼽혔으며, 헨리 1세의 정부가 되기 전에 케루 영주이자 펨브로크 성 사령관인 윈저의 제럴드와 결혼해 세 아들과 딸 하나를 낳았다. 1136년 제럴드가 사망한 뒤 잉글랜드 순찰대장 에티엔과 재혼, 후임 순찰대장 하이트와 삼혼했으며, 알려지지 않은 남자로부터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두었다.
    • 헨리 피츠로이(? ~ 1157): 나버스 영주.
  • 이사벨라 드 보몽(1105 ~ 1172): 초대 레스터 백작 로버트 드 보몽의 딸. 펨브로크 백작 길버트 드 클레어의 부인.
    • 이사벨라(1120 ~ ?)
  • 고티에 드 겐트의 자매 또는 딸
    • 길버트 피츠로이(? ~ 1142년 이후)
  • 알려지지 않은 정부
    • 로버트 피츠로이(1090 ~ 1147): 초대 글로스터 백작. 마틸다의 잉글랜드 여왕 등극을 위해 스티븐 왕과 대적했다.
    • 윌리엄 드 트레이시(1090년대 ~ 1135년 이후)
    • 메이블(1094 ~ ?): 기욤 3세 드 구에의 부인.
    • 잉글랜드의 마틸다(? ~ ?):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의 부인.
    • 앨리스 피츠로이(? ~ 1141년 이전): 몽모랑시 영주 마티유 1세 드 몽모랑시의 부인.
    • 콘스탄스 피츠로이(? ~ 1154년 이후): 조보몽과 생트수잔 자작 로슬랭 드 보몽오멘의 부인.
    • 모드 피츠로이(? ~ ?): 몽타빌리에 수녀원의 수녀.
    • 엠마 드 라발(? ~ 1152년 이후): 라발의 영주 기 3세 드 라발의 부인.
    • 엘리자베스 피츠로이(1120년 이전 ~ ?): 갤러웨이 영주 퍼거스 드 갤러웨이의 부인.
    • 시빌 드 팔레즈(? ~ ?): 보두앵 드 볼러스의 부인.
    • 애들레이드(? ~ ?)

헨리 1세는 최소 20명이 넘는 사생아들을 자기 자식들로 인정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받고 각자 어엿한 왕족으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 대중 매체

HBO의 8부작 드라마 대지의 기둥에서는 원작이나 실제역사와는 달리 교회와 스티븐 왕의 공모하에 독살당하는 것으로 나온다.
[1] 스코틀랜드 국왕 말 콜룸 3세의 딸로 어머니 웨식스의 마거릿을 통해 알프레드 대왕의 후손이기도 하다. [2] 글로스터 백작에 봉해졌고 무정부시대 때 이복여동생 마틸다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며 스티븐 왕에게 대적해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사실상 총사령관 노릇을 했다. 마틸다도 이런 로버트를 극진히 여겨서 스티븐을 포로로 잡아 폐위시키면서 전쟁에서의 승리를 눈앞에 두었을 때 스티븐의 아내 불로뉴의 마틸다가 군사를 일으켜 로버트를 생포하고 스티븐과의 포로 교환을 요구하자 어떻게든 로버트를 구하기 위해 협상에 응하여 스티븐을 살려보낼 줄 정도였다. [3] 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버킹엄 백작이자 노르망디 롱그빌의 영주 고티에 기파르의 미망인인 아녜스 드 리베몽이 공작부인이 되기 위해 시빌을 독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현대 학자들은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4] Exchequer. 체스 판을 닮은 체크무늬 천을 이용해 지방 당국이 보낸 현금영수증을 세고 확인하는 방식에의 유래한 중세 중앙 기관. 주 업무는 국가 재정 관리였고, 행정, 사법 기능도 상당부분 수행했다. [5] Scutage, 병력 제공 및 병역 이행 의무를 면제하는 대신 바치는 세금 [6] jūdicium Deī, 불과 물의 시련으로도 일컬어진다. 피고인에게 물속이나 불속에 뛰어드는 등 위험한 행동을 하도록 한 뒤, 그 결과에 따라 유죄 또는 무죄를 판가름하는 재판. [7] Danegeid, 덴마크 바이킹에게 바칠 공물을 모으거나 이들에 맞서기 위한 국방비를 급히 마련하기 위해 거둬들이는 세금 [8] Cantrev, 중세 웨일스의 행정 구역 [9] 말 콜룸 3세의 딸이다. [10] 헨리 2세 [11]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딸. 위에 나온 매형 조프루아 5세의 친누나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