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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만어: Blanche-Nef
영어: White Ship
1120년 11월 25일, 노르망디 공국 바르플뢰르 항 인근 해안에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 윌리엄 애설링을 비롯한 젊은 귀족들이 탄 블랑슈네프호가 침몰한 해상 사고. 무정부시대가 벌어지는 기원이 된 사건이다.
2. 배경
1087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국의 공작 윌리엄 1세가 사망한 후, 윌리엄 1세의 아들들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잉글랜드 왕위는 차남인 윌리엄 2세에게 돌아갔고, 노르망디 공국은 장남인 로베르 2세에게 넘어갔다. 1100년 윌리엄 2세가 사냥하던 중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에 맞아 사망한 뒤, 윌리엄 1세의 막내 아들인 헨리 보클레르가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로 등극했다. 그 후 헨리 1세는 로베르 2세와 정쟁을 벌인 끝에 1106년 9월 28일 팅슈브레이 전투에서 로베르 2세를 결정적으로 물리치고 노르망디를 손아귀에 넣었다.로베르 2세는 1134년 사망할 때까지 연금되었지만, 로베르 2세의 아들인 기욤 클리토는 헨리 1세의 손아귀에서 탈출한 뒤 노르망디 내 반 헨리 성향 영주들과 주변 국가로부터 잠재적인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식되었다. 1118년, 헨리 1세의 엄격한 중앙집권제 추진에 분노한 노르망디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노르망디 동부 전역을 휩쓸었으며, 기욤 클리토를 노르망디 공작으로 받들었다. 여기에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 앙주 백작 풀크 5세도 반란군을 지원했다.
이렇듯 상황이 다급했지만, 헨리 1세는 침착하게 상황을 수습했다. 그는 가신들의 봉기를 하나둘씩 제압했고, 조카인 블루아 백작 티보 4세와의 동맹을 강화했다. 여기에 플란데런 백작 보두앵 7세가 아크라 요새를 포위공격하던 중 심각한 부상을 입고 이듬해 사망하는 행운이 따랐고, 이로 인해 반란군의 기세가 꺾였다. 1119년 6월, 헨리 1세는 자기 적장자 윌리엄 애설링과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딸 앙주의 마틸드의 결혼식을 리지외에서 벌이고 앙주 가문에 막대한 자금을 보냈다. 그 결과 풀크 5세는 헨리 1세 편으로 돌아섰고, 얼마 후 예루살렘으로 순례하면서 멘 백작령의 관리를 헨리 1세에게 맡겼다. 이제 헨리 1세는 루이 6세와 기욤 클리토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1119년 여름 백상을 침공한 헨리 1세는 8월 20일 브레뮐에서 루이 6세의 프랑스군과 맞붙어 압승을 거두었다. 1119년 10월, 루이 6세는 랭스에서 열린 공의회에 사절을 보내, 교황 갈리스토 2세의 개입을 청원했다. 그러나 교황은 두 군주 중 한 사람에게 호의를 베풀기를 거부하고 평화를 맺을 것을 권고했다. 결국 루이 6세는 헨리 1세와 평화 협약을 맺기로 하고, 양자는 1120년 6월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에 따르면,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장자인 윌리엄 애설링은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대가로 노르망디 공작으로 인정받았으며, 루이 6세는 더 이상 기욤 클리토를 돕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합의가 이뤄진 뒤, 헨리 1세는 아들 윌리엄과 함께 잉글랜드로 귀환할 준비에 착수했다. 이때 토머스 피츠스티븐이라는 인물이 헨리 1세를 찾아갔다. 그의 아버지 스티븐 피츠에이라드는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원정을 떠났을 때 탑승했던 기함 모라 호의 선장이었다. 그는 자신이 최신 기술로 건조한 아름답고 빠른 배인 블랑슈네프호에 탑승하라고 제안했다. 헨리 1세는 본인은 이미 다른 배를 타기로 했기에, 아들 윌리엄과 사생아인 링컨의 리처드, 페르슈 백작부인 마틸다 피츠로이, 그리고 많은 젊은 귀족들이 이 배를 타도록 했다.
11세기와 12세기 노르망디 수도자이자 역사가 오더릭 바이탈(Orderic Vital, 1075 ~ 1141/1143)에 따르면, 선원들은 윌리엄에게 와인을 마시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윌리엄은 그들에게 엄청나게 많은 와인을 공급했다고 한다. 배가 출항할 준비가 되었을 때 약 300명이 타고 있었지만, 에티엔 드 블루아를 비롯한 일부 사람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속이 안 좋았기에 나중에 다른 배를 타고 잉글랜드로 가기로 하고 하선했다. 전승에 따르면, 출항 전에 관례에 따라 축복하려고 찾아온 성직자들이 술에 취한 승객들의 조롱을 받고 쫓겨났다고 한다.
3. 경과
1120년 11월 25일 밤, 블랑슈네프호가 출항했다. 헨리 1세가 탑승한 배가 출항한 지 오래되었다는 걸 알게 된 윌리엄은 선장에게 잉글랜드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속도를 내라고 명령했다. 토머스 피츠스티븐은 지시에 따르기 위해 속력을 냈다. 그러다가 바르플뢰르 인근 해안에서 물에 잠겨있던 '퀼레뵈프(Quilleboeuf)'라는 암초와 부딪쳤고, 블랑슈네프호는 이 때문에 바다에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호원들은 급히 윌리엄 왕자를 보트에 태웠고 해변으로 피신했다. 그 때, 배에 남아 있던 이복 여동생 마틸다 피츠로이가 살려달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자, 윌리엄은 경호원들에게 보트를 돌려서 마틸다를 구하라고 명령했다. 그의 지시에 따라 보트가 돌아오자, 사람들이 가라앉는 배에서 탈출하려고 보트로 몰려들었다. 급기야 보트가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뒤집혔고, 윌리엄은 익사했다.오더릭 바이탈에 따르면 루앙 출신의 정육점 주인인 베롤드와 엑스메스 자작 길베르 당글의 아들인 고드프리 당글만이 파편에 매달려 살 수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은 간신히 버티고 있던 선장 토머스 피츠스티븐과 마주쳤다. 토머스는 그들에게 물었다.
"왕의 아들은 무사한가?"
그들이 답했다."그는 물속에 잠겼고, 다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의 형제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보이지 않습니다."
토머스는
수영을 할 수 있었지만, 윌리엄이 익사했다는 걸 알게 되자 목숨을 건진 뒤 아들을 잃은 헨리 1세의 분노에 직면하느니 차라리 죽기로 마음먹고 스스로 익사했다. 이어진 추운 밤, 고드프리는
저체온증에 걸렸고, 결국 힘이 빠지면서 깊은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반면, 베롤드는 두꺼운 모피를 입었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고, 다음날 근처를 지나가던 어부들에게 구출된 뒤 전날에 벌어진 재난을 상세히 설명했다. 그는 이후로 20년을 더 살았다고 한다.4. 희생자들
블랑슈네프호 침몰 사고로 선원 50명과 하인과 경호원을 포함한 승객 250명이 1명만 빼고 전원 익사했다. 그중 140명은 기사나 귀족이었고, 18명은 귀족 여성이었다. 사망자 중에는 윌리엄 외에도 명문 귀족 가문 후계자들이 대거 있었다. 다음은 기록상에서 전해지는 주요 희생자들이다.- 윌리엄 애설링: 잉글랜드 국왕이자 노르망디 공작 헨리 1세의 유일한 적장자.
- 링컨의 리처드: 헨리 1세의 사생아.
- 마틸다 피츠로이: 페르슈 백작 로트루 3세의 아내, 헨리 1세의 사생아.
- 리처드 다브랑슈: 아브랑슈 자작. 제2대 체스터 백작 휴 다브랑슈의 아들.
- 블루아의 마틸드: 아브랑슈 자작 리처드 다브랑슈의 아내이자 스티븐 왕의 누이.
- 오투엘 다브랑슈: 리처드 다브랑슈의 이복형제.
- 고드프리 리델: 왕실 재판관이자 리처드 다브랑슈의 처남.
- 길베르 당글: 엑스메스 자작, 리처드 다브랑슈의 사촌.
- 고드프리 당글: 길베르 당글의 아들.
- 윌리엄 비고드: 헨리 1세의 궁정 관리인, 노퍽의 보안관 로저 비고드의 아들, 초대 노퍽 백작 휴 비고드의 형.
- 모듀이트의 로버트 1세: 헨리 1세의 시종장.
- 퐁테샹프레이의 랄프: 헨리 1세의 기사. 헨리 1세의 아들인 링컨의 리처드가 레 장들리에서 프랑스군의 포로갸 되는 걸 막아낸 공적을 세웠다.
- 이보 2세 드 그랑메닐과 기욤 드 그랑메닐: 제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이보 드 그랑메닐의 두 아들.\
- 헤리퍼드 주교 제프리
- 쿠탕스의 주교 로저의 아들 윌리엄과 그의 형제 및 세 조카.
- 테오도리쿠스: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의 친척.
5. 영향
사건 다음날, 잉글랜드 해안에 도착한 귀족들은 블랑슈네프호에 탑승했던 승객들이 침몰 사고로 몰살당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그들은 헨리 1세의 분노를 살 것을 우려해 이 참사를 알리기를 무척 꺼리다가, 헨리 1세가 아이한테 화를 내진 않을 거라 여기고 어느 소년을 시켜서 헨리 1세에게 이 소식을 전하게 했다. 헨리 1세는 이 참담한 소식을 듣고 며칠간 앓아 누웠다가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연대기 작가들에 따르면, 헨리 1세는 이후로 다시는 웃지 않았다고 한다.하나뿐인 적자를 잃은 헨리 1세는 어떻게든 다시 합법적인 후계자를 낳기 위해 하부 로타링기아 공작이자 루뱅, 브뤼셀, 브라반트 백작 고드프리 1세 드 루뱅의 딸인 루뱅의 아델리자와 재혼했지만, 끝내 자식을 낳지 못했다. 1122년,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딸 마틸드와 결혼했던 윌리엄 애설링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틸드의 지참금으로 보낸 자금과 멘에 있는 요새의 반환을 요구했다. 헨리1세는 마틸드를 보내줬지만 지참금과 요새를 돌려주기를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풀크 5세는 1123년 또다른 딸 시빌과 기욤 클리토의 결혼을 주선했고, 기욤 클리토를 멘 백작으로 내세웠다. 1123년 노르망디에서 기욤 클리토를 지지하는 새로운 봉기가 발발했고, 앙주 백작 풀크 5세는 헨리 1세에게 등을 돌리고 프랑스 국왕 루이 6세와 함께 기욤 클리토가 1128년에 사망할 때까지 지원했다. 헨리 1세는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1125년 조카인 에티엔 드 블루아와 불로뉴 여백작 마틸드의 결혼을 주선하는 등 에티엔을 후계자로 점찍는 듯한 행보를 보였다.
그러던 1125년 5월 23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가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한 헨리 1세는 이듬해 하인리히 5세의 왕비였던 딸 마틸다를 소환한 뒤 마틸다가 자신을 계승할 거라고 선언했다. 1126년 크리스마스, 잉글랜드 귀족들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에 초대되어 마틸다와 그녀의 미래 후계자에 대한 충성을 맹세했다. 하지만 여자가 왕위 계승 후보로 나서는 건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궁정 신하 상당수는 여왕의 등극에 반대했고, 루이 6세는 마틸다의 왕위 계승자로서의 지위에 단호히 이의를 제기했다. 헨리 1세는 마틸다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앙주 백작 풀크 5세의 장남 조프루아 5세를 마틸다의 새 남편으로 삼았다.
1135년 초, 마틸다는 아버지에게 노르망디에 있는 왕실 성을 넘겨주고 노르만 귀족들에게 지금 즉시 자신과 조프루아 5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헨리 1세는 이걸 받아들일 경우 조프루아 5세가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영구적으로 확립할 것을 우려해 격렬하게 거부했다. 얼마 후, 노르망디 공국 남부에서 퐁티외 백작 기욤 1세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마틸다와 조프루아 5세 부부가 지원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헨리 1세는 반란을 진압하고 노르망디에서 자신의 권위를 재확립하기 위해 노르망디로 향했지만, 1135년 12월 1일에 급병에 걸려 사망했다. 이에 귀족들은 아버지에게 반기를 든 것으로 추정되고, 앙주 백국에 머물고 있는 데다 임신 중이라서 잉글랜드로 거동하기 힘든 마틸다 대신해 에티엔 드 블루아를 스티븐 왕으로 옹립하기로 했다. 이에 마틸다가 교황 인노첸시오 2세에게 항소한 후 추종자들을 끌어모아 스티븐 왕에게 도전하면서, 장장 15년간 잉글랜드 왕국을 대혼란과 파괴로 몰아넣을 무정부시대의 막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