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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왕국 Kingdom of Ireland | Ríoghacht Éireann |
||
잉글랜드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괴뢰국 | ||
국기 | 국장[1] | |
1542년 ~ 1801년 | ||
성립 이전 | 병합 이후 | |
아일랜드 영지 |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 |
<colcolor=#fff><colbgcolor=#00005c>위치 | 아일랜드 섬 | |
수도 | 더블린 | |
정치 체제 | 절대군주제 | |
국가 원수 | 왕 | |
언어 | 영어, 아일랜드어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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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Ríocht na hÉireann, Kingdom of Ireland, 1542~1801년 아일랜드 섬에 존재한 왕국으로 잉글랜드 왕국의 왕 헨리 8세가 아일랜드 섬의 게일인 소국들을 정복한 후 아일랜드 국왕을 자칭하면서 세웠다. 국왕은 잉글랜드 국왕이 겸했다. 일종의 동군연합인데 실제로는 아일랜드의 내정도 잉글랜드가 전담하게 되면서 이전까지는 명목상 잉글랜드의 봉신국인 소국들이 다스리던 아일랜드가 이 시점부터 사실상 잉글랜드의 영토가 되었다. 아일랜드 왕국은 처음부터 잉글랜드 왕국의 괴뢰국이었던 것이다. 다만 역설적이게도 아일랜드 섬은 이 시기에 처음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2]조선왕조실록 중 순조실록에는 ' 애란국(愛蘭國)'이라는 음역으로 기록되었다.
2. 역사
2.1. 초기 지배와 재정복
아일랜드 왕국을 세운 잉글랜드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갈아치우면서 잉글랜드는 아일랜드 가톨릭에 대한 종교 탄압을 시도했다. 이에 대항해 1569~1573년, 1579~1583년의 먼스터 반란과 1593~1603년의 9년 전쟁 등 아일랜드 가톨릭교도들의 반란이 튜더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 초기에 걸쳐 여러 차례 일어났으나 잉글랜드는 이를 모두 분쇄, 아일랜드섬 전체를 평정하였다. 이후 잉글랜드는 북부 얼스터 지방을 중심으로 개신교도들의 이주를 장려하였고 아일랜드계 토착 세력은 한동안 잉글랜드에 굴복하며 지냈다.그러던 1641년 잉글랜드가 왕당파와 의회파의 영국 내전으로 혼란에 빠지자 아일랜드의 토착 세력은 아일랜드 가톨릭 연맹을 결성하여 봉기를 일으켰고 자체적으로 정부까지 새우면서 10년 가까이 거의 독립국처럼 지냈다. 그러다가 올리버 크롬웰이 찰스 1세의 목을 치면서 잉글랜드 내전이 끝났고 크롬웰은 10년 내내 거의 독립국처럼 있었던 가톨릭 연맹을 평정하고자 아일랜드에 출병했다. 영국 내전으로 잉글랜드의 세력이 악화된 사이 아일랜드에서 폭동이 발생해 수십만 명의 잉글랜드 백성을 살해하고 신교도 교회를 불태웠다. 게다가 찰스 1세는 이 내전에서 전세가 불리해지자 이미 혼인 관계가 있었던 네덜란드에 딸을 시집보내면서 금은 등을 담보삼아 자금을 빌려 이 자금으로 프랑스 로렌 공작을 매수해 병력 1만명을 요청하고 아일랜드에도 가톨릭 신앙의 자유와 독립을 제시해 병력 1만명을 요청하려 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기 어려웠다.
크롬웰은 군대를 이끌고 아일랜드에 친정을 했는데 처음엔 살인에 관계되지 않은 반란자들은 사면령을 내렸으나 전세가 여의치 않자 조금도 사정을 봐주지 않고 아일랜드 전역을 초토화하고 살인, 방화, 약탈을 동반해 진압했다. 이때 죽어나간 아일랜드인은 수십만명에 달했다. 이 당시 가장 잔인했던 사건으로 드로이다(Drogheda)[3] 공성전이 있는데 1649년 가족들이 서로 잡아먹게 될 때까지 드로이다 성을 포위한 뒤 함락하자 같은 개신교도까지 포함해[4] 남녀를 가리지 않고 민간인 2000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아일랜드 재정복 과정에서 크롬웰이 자행한 폭력은 아일랜드인에게 뿌리 깊은 분노를 남겼다.
2.2. 재정복 이후와 병합
올리버 크롬웰은 아일랜드를 재정복하고 아일랜드 내부의 핵심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정국을 주도했던 가톨릭 귀족들과 켈트족 족장들의 기반을 절멸하기 위한 포괄적인 토지 강탈과 재분배 정책을 벌였다. 크롬웰의 병사들은 아일랜드 전역을 점령하고 나서 원래 주민들은 늪지대만 가득한 쓸모 없는 땅인 서부의 코노트 지방에 가두어 버리고 나머지 주요 토지는 전부 다 자신을 따라온 부하들에게 분배했다. 이후 가난한 대다수 가톨릭 소작농을 극소수의 개신교 지배층이 착취하는 기형적인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오늘날 아일랜드의 게일어( 아일랜드어) 우세 지역이 아일랜드 서부의 코노트 일대에만 분포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또한 독실한 청교도 신자였던 크롬웰은 이 시기부터 가톨릭을 믿는 아일랜드 본토 켈트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장로교를 믿는 스코틀랜드계 켈트족[5]들을 아일랜드 섬에 데리고 온다. 원주민들인 가톨릭 아일랜드인들을 대거 내쫓고 들어온 이주민들인 개신교 스코틀랜드인들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가까운 지방인 북동부의 얼스터 지방에 모여 살면서 정착했는데 얼스터에서 이들이 토착민들보다 점점 많아지면서 그 외 아일랜드 지방과 종교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이 일은 훗날 북아일랜드 분쟁의 원인이 된다.크롬웰이 죽고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동군연합이 왕정으로 되돌아가면서 아일랜드 왕국도 부활했다. 그러나 1694년 잉글랜드 왕국의 국왕인 윌리엄 3세의 원정으로 인해 아일랜드 왕국에 대한 압제는 더욱 심해지게 된다. 이때 실시한 잉글랜드의 대아일랜드 정책은 종교 탄압과 출신 지역 차별이었다. 아일랜드의 가톨릭교도들은 공직 진출이 아예 완전히 봉쇄되었고 개신교도들도 아일랜드 출신이란 이유로 고위직 진출이 사실상 금지되었다.[6] 아일랜드는 주권을 잃고 서서히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의 일부로 동화되었는데, 18세기 후반에 미국 독립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을 계기로 고(高)교회파( 가톨릭적 특성 강조) 성공회에서 불만이 싹트기 시작했다. 곧 울프 톤[7]을 중심으로 신교-구교 연합조직인 '연합 아일랜드당'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이에 대항해 현재의 북아일랜드인 얼스터를 근거지로 삼았던 저(低)교회파( 개신교적 특성 강조) 성공회와 장로회 구성원들이 '오렌지 오더(Orange Order)'[8]를 결성했으며, 1798년에 '연합 아일랜드당'이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봉기를 일으켰으나 영국군과 '오렌지 오더'에 의해 진압되었다. 그 결과 아일랜드인들의 효과적인 통제을 위해 영국 의회는 1800년 통합법(Acts of Union 1800)을 통과시켜 영국과 아일랜드를 정식으로 하나로 합치기로 결정하면서 1801년 1월 1일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수립되어 아일랜드 왕국은 소멸하였다. 다만 자코바이트파는 이를 쿠데타 이후에 즉위한 정통성 없는 왕이 불법적으로 행한 일로 간주하여 자코바이트 왕위 요구자의 아일랜드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데 자세한 건 자코바이트 항목 참고.
3. 국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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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 | |||
엔리 8세 | 아이드워르드 6세 | 시반 |
모이라 1세 필리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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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왕조 | 스튜어트 왕조 | |||
아이예리쉬 1세 | 셰이머스 1세 | 카를루스 1세 | 카를루스 2세 | |
스튜어트 왕조 | ||||
셰이머스 2세 | 모이라 2세 | 윌리엄 3세 | 아녀 | |
하노버 왕조 | ||||
쇼르셔 1세 | 쇼르셔 2세 | 쇼르셔 3세 | ||
역사적 아르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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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자유국 국가원수 ·
아일랜드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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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왕조 | 재위기간 | 비고 |
헨리 8세 | 튜더 | 1542 ~ 1547 | |
에드워드 6세 | 튜더 | 1547 ~ 1553 | |
제인 그레이 | 1553 | '9일 여왕' | |
메리 1세 | 튜더 | 1553 ~ 1558 | |
엘리자베스 1세 | 튜더 | 1558 ~ 1603 | |
제임스 1세 | 스튜어트 | 1603 ~ 1625 | |
찰스 1세 | 스튜어트 | 1625 ~ 1649 | 영국 내전으로 인해 왕정 붕괴 |
찰스 2세 | 스튜어트 | 1660 ~ 1685 | 왕정 복고 |
제임스 2세 | 스튜어트 | 1685 ~ 1688 | |
메리 2세/ 윌리엄 3세 | 스튜어트/오라녜 | 1689 ~ 1694 | 공동 국왕 |
윌리엄 3세 | 오라녜 | 1694 ~ 1702 | |
앤 여왕 | 스튜어트 | 1702 ~ 1714 | |
조지 1세 | 하노버 | 1714 ~ 1727 | |
조지 2세 | 하노버 | 1727 ~ 1760 | |
조지 3세 | 하노버 | 1760 ~ 1801 | 1801 ~ 1820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 국왕 |
[1]
방패잡이 동물들이 그려진 것도 있었다.
[2]
이 점은
그레이트브리튼 아일랜드 연합왕국이
식민지로 만든
인도 제국도 비슷하다. 영국령 인도 제국이 성립되면서 인도가 사실상 처음 통일되었다.
마우리아나
무굴같이 인도에서 자체적인 통일왕조를 세운 적도 있었지만 남인도 지역은 간접통치에 그친데다가 통일 상태를 오래 유지하지도 못해서 실질적인 통일이라 평가하긴 어렵다. 물론 인도제국도 당시에는 소수의
포르투갈령과
프랑스령 지역같은 곳이
인도 아대륙 내에 존재했지만 면적과 인구를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작은 지역들이라 영국이 통일된 인도를 처음 만든 것이나 다름없다.
[3]
아일랜드 게일어 표기법은 글자만 보고는 읽기가 쉽지 않은데 /ˈdrɒhədə/ 혹은 /ˈdrɔːdə/로 드로허다 혹은 드로다 정도로 읽는다.
[4]
이는 개신교를 믿는 소수의 아일랜드인들이 오히려 가톨릭을 믿는 대다수 아일랜드인보다도 더욱 적극적으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이유들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종주국인 영국을 따라서 개신교로 개종했더니 돌아온 것은 대량학살이었으므로 영국에 대한 실망감도 그만큼 더욱 커졌을 것이다.
[5]
사실 켈트족이라 보기도 뭣한게 대부분 저지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고, 저지대 스코틀랜드는 앵글로색슨계 왕국이었던 노섬브리아 왕국의 영토였었다. 게다가 이교도 대군세 시절 덴마크계 바이킹 혈통 유입도 있었기 때문에 그냥 게르만계라고 봐도 무방했다. 심지어 켈트계 혈통이 더 강해서 깡촌 야만인이라고 무시당하던 고지대 스코틀랜드 마저 노르웨이계 바이킹의 영향을 받았었다.
[6]
토착 아일랜드인 뿐만 아니라 부계 선조가 잉글랜드계나 스코틀랜드계 이주민인 경우도 포함되었다.
[7]
개신교계 아일랜드 민족주의자.
[8]
오렌지는 윌리엄 3세의 상징색이다. 친(親)영국파인 이들의 색깔을 잘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