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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리는 대륙과 이웃하기는 하지만 대륙의 일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항상 잊어서는 안 된다.
볼링브룩 경
볼링브룩 경
영국은 유럽에 속하지만 유럽 대륙 본토와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있는 섬나라이다. 그래서 다른 민족의 침공에 비교적 안전했을 것이라는 인식이 있을 수 있지만 영국의 드넓은 평야는 침략자들의 구미를 당겨 영국의 역사는 그야말로 외부 정복의 향연이었다.
가장 처음 이베리아인의 이주가 있었고 그 뒤로 켈트족이 들어왔으며 그 후 로마인이 브리튼 섬 대부분을 정복해 350년 동안 지배하다 로마군이 철수하자 앵글로색슨족이 들어왔고 앵글로색슨족이 터를 잡자 그 뒤로 바이킹이 침략해왔으며 바이킹과 싸우며 대립과 공존을 겪다가 결국 1066년 노르만족이 최종적으로 브리튼 섬을 정복하면서 현대 영국의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유적으로만 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이베리아인을 제외한 켈트족, 라틴족, 앵글로색슨족, 노르드족, 노르만족은 서로 융합되어 유럽 대륙과는 차별화된 영국의 독특한 문화를 형성했다.
영국은 마그나 카르타, 명예 혁명, 권리 장전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민주주의의 시초가 되었다. 또한 산업 혁명이 최초로 일어나는 등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의 대표적인 강대국으로서 세계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 선사 시대
현생 인류의 매우 가까운 친척인종 크로마뇽인이 수만년 전부터 브리튼 섬에 살고 있었지만 이들은 마지막 빙하기 때 종적을 감추었다. 석기시대까지만 해도 브리튼 섬은 유럽 대륙과 이어져 있어 떠돌이 사냥꾼들이 가끔 드나들었는데 기원전 1만 1천년경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면서 기후가 점점 더 따뜻해져 빙하가 녹아 해수면이 점점 높아지면서 기원전 5~6천년경에 브리튼 섬이 유럽 대륙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그 후에는 유럽의 서쪽과 북쪽 해안 지대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기원전 4천년 무렵 농업을 들여왔다. 기원전 2천년대에 현재의 네덜란드 지방에서 건너온 비커족(Beaker Folk)이 나타났는데 이들이 인도유럽어족 언어를 들여왔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브리튼 섬을 장악한 것은 현재의 웨식스 지방의 족장들이었는데 이들의 호화스러운 무덤과 스톤헨지로 알려진 선돌 기념물이 지금도 남아있다. 스톤헨지는 그 당시 대표적인 순례지로 그 치유력을 믿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베리아인이라는 영국 최초의 부족이 처음 왔던 때이다.
3. 켈트 시대
기원전 8세기 무렵부터 켈트족이 브리튼 섬에 처음 등장해 구릉 지대에 성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 브리튼 섬에는 켈트 고유의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켈트족들은 돼지고기와 맥주를 즐겨 먹었고 드루이디즘 의식이 발달했다. 켈트족 특유의 토조 성채를 쌓는 등의 기술도 발전했다. 카이사르가 쓴 갈리아 전기에도 이 내용이 자세히 담겨 있다.브리튼인의 왕이라는 명목상의 상급왕도 존재했고 사람에 따라 계급도 나뉘는 등 자신들만의 사회에서 살아갔다. 이후 갈리아의 가까운 지역에서 더 많은 부족들이 이주해 오면서부터 로마의 역사가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브리튼의 여러 부족들이 나타났지만 통일된 왕조를 이루지는 못했다.
4. 로만 브리튼
( 로만 브리튼 참조)
브리튼인들이 살고 있던 브리튼 섬은 43년부터 410년까지 약 350년 동안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브리튼 섬이 로마 제국에게 받은 첫 번째 침공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이다.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쟁 도중 브리튼인들이 갈리아인들을 도와주었다는 구실로 2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브리튼을 침공해 명목상의 복속 약속과 인질을 받고 떠난다. 이후 약속대로 공물을 바치지 않자 한 번 더 침공하게 되지만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기원전 55년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침공 이후 1세기 동안이나 브리튼은 로마 제국과는 무관하게 있었다. 그러나 클라우디우스 1세 황제 때에 여러 귀족들이 새로운 땅을 지배하기를 갈망하게 되면서 브리튼은 다시 공격받게 되었다. 기원후 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는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침공해 브리튼 섬의 비옥한 평원을 정복했다.( 클라우디우스의 브리타니아 침공)
이후에 도미티아누스를 비롯한 여러 로마 황제들이 브리튼 섬 북부를 정복해 브리튼인들은 로마인들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 로마 제국에게 점령된 브리튼은 약 350년 동안 지배를 받았다.
하드리아누스 황제 시기에는 북쪽 국경에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세워졌고 안토니누스 피우스 황제 시기에는 더 북쪽에 안토니누스 방벽이 세워진다. 그러나 안토니누스 방벽은 얼마 안 가 버려지고 하드리아누스 방벽이 로만 브리튼의 국경이 된다. 하드리아누스 장벽 북부는 훗날 스코틀랜드가 되고 남부는 잉글랜드가 된다.
로마가 점령한 브리튼은 로만 브리튼이라고 불리는데 현지 브리튼인들은 로마의 문화를 빠르게 받아들여 로만-브리튼 문화가 만들어졌다. 로만-브리튼 문화는 영국의 지명[1]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후 로마 제국이 이민족의 침략과 내전으로 혼란해지면서 410년에는 로마군이 브리튼 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5. 중세 시대
5세기 중반 브리튼 제도의 민족 분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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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일인 | 픽트족 |
브리튼인 ( 로만 브리튼) |
( 로만 브리튼 이후 참조)
브리튼인들은 410년 로마군이 떠난 뒤로 이민족의 침략을 받았다. 브리튼인의 힘만으로 버티는 것이 힘들어지자 유럽 대륙의 유틀란트반도와 북독일 저지대에 살던 앵글로색슨족 용병들을 받아들여 본격적으로 게르만족이 브리튼 섬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얼마 안가 브리튼인과 앵글로색슨족은 땅을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되었고 바돈 산 전투의 승리로 약 100년 동안 브리튼인이 앵글로색슨족의 공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나[2] 결국 북해를 건너 계속 들어오는 앵글로색슨족에게 브리튼인들이 서쪽으로 밀려나 7세기부터 훗날 잉글랜드라 불리는 땅의 지배자는 앵글로색슨족이 되었다. 브리튼인 일부는 서쪽의 웨일스와 콘월로 대피하였고 더러는 유럽 대륙으로 건너가 브르타뉴 왕국을 건설하기도 했다. 이후 앵글로색슨족의 여러 국가들은 7세기에 앵글로색슨 7왕국으로 재편되었다.
878년 데인족과 웨식스의 영토. 요크와 케임브리지 사이의 옅은 색으로 표시된 땅은 험버 강 하구 습지(The Humber Estuary)와 펜스 습지(The Fens)다.[3]
이렇게 브리튼인을 웨일스, 콘월, 브르타뉴로 쫒아내고 잉글랜드를 차지한 앵글로색슨족은 9세기에 바이킹의 침략, 이른바 이교도 대군세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앵글로색슨 4왕국 대부분이 바이킹에게 정복 당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지만 유일하게 웨식스 왕국이 살아남았고 이를 구심점으로 앵글로색슨족은 과거 브리튼인과 달리 역사의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고 버텨내는 데 성공한다.
앵글로색슨 4왕국 중 유일하게 건재했던 웨식스의 국왕 알프레드 대왕이 바이킹의 군세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여 앵글로색슨족은 간신히 영토를 지켰다. 그러다 마침내 10세기에 웨식스의 마지막 왕 애설스탠이 아직도 잉글랜드에 남아있던 바이킹 세력을 몰아내고 앵글로색슨 7왕국을 통일해 잉글랜드 왕국의 첫번째 왕이 되었다.
그 후 잉글랜드의 몇몇 재분열과 재통일이 있었으나 평화왕 에드거 1세에 이르러서는 잉글랜드의 통일이 확고해졌다. 그러나 11세기에 또 다시 바이킹 군세가 몰려와 덴마크의 왕자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를 정복, 덴마크-노르웨이-잉글랜드에 이르는 강력한 북해 제국을 건설한다. 하지만 크누트의 북해제국은 확고하게 융합되지는 못한 채 크누트 사후엔 흐지부지 분열되었고 잉글랜드 역시 참회왕 에드워드의 등극으로 다시 앵글로색슨족의 잉글랜드 왕국이 들어섰다.
1087년 노르망디 공국 공작 윌리엄 1세가 지배한 영토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죽자 노르망디 공국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주장하여 잉글랜드를 침공할 준비를 한다. 하지만 풍향 때문에 윌리엄의 상륙이 지연되었고 침공에 대비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왕 해럴드 고드윈슨은 수확기가 다가오자 징집병들을 해산시켰는데, 운이 나쁘게도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의 사주를 받은 마지막 바이킹 군주 하랄 하르드라다가 잉글랜드를 침공해왔다. 해럴드는 부랴부랴 병력을 소집해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바이킹들을 무찌르고 바이킹들에게 다시는 영국을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받고 바이킹 시대를 끝낸다. 하지만 그 후 운이 나쁘게도 윌리엄 1세 쪽으로 불던 풍향이 잉글랜드 쪽으로 바뀌기 시작하면서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침공했다. 해럴드는 하르드라다와의 전투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병력으로 윌리엄에게 맞서야 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르만족을 상대로 시종일관 우세를 점하지만 또 운이 나쁘게도 눈 먼 화살에 한 쪽 눈을 맞고 고작 재위 9개월 만에 전사하였고, 지도자를 잃은 잉글랜드군 병사들은 사기가 떨어져 결국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패배해 월리엄 1세를 왕으로 하는 노르만 왕조가 들어섰다.
이후 앵글로색슨족 왕족과 영주들을 몰아내고 노르만족 왕족과 영주들이 잉글랜드의 지배계급을 차지한다. 공작, 백작, 남작 등으로 이어지는 위계적인 작위가 있었던 유럽 대륙과는 달리 브리튼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여러 앵글로색슨 왕국이 서로 동등한 자격으로 대치하고 있었고 그 영향으로 잉글랜드 통일 이후에도 세력이 비슷한 영주들이 서로 동등한 위치에 있어서 영주들을 모두 통제하기가 어려웠는데 노르만 왕조 이후에는 프랑스와 영국 양쪽에 넓은 영토를 가진 강력한 노르만 영주들이 등장하면서 이들의 영향력이 컸다.
노르만 왕조가 헨리 1세를 끝으로 단절되고 헨리 1세의 외손자 헨리 2세(헨리 플랜태저넷)가 플랜태저넷 왕조를 개창해 잉글랜드 왕으로 즉위하면서 프랑스의 절반과 잉글랜드를 모두 지배하는 앙주 제국이 성립되었다.
헨리 2세의 아들 리처드 1세는 제3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맹활약을 했으나 결국 성지 탈환에 실패했고 내정도 파탄을 맞아 다음 왕인 존 왕은 프랑스 왕국 내의 플랜태저넷의 영지를 대부분 상실해 결지왕, 실지왕, 무영토왕이라고까지 불렸다. 이런 존 왕의 실정에 귀족들과 국민들이 존 왕을 협박해 받아낸 것이 영국 민주주의의 초석인 마그나 카르타(대헌장)이다.
이후 국왕과 귀족들의 다툼으로 헨리 3세가 반란군에 패해 포로로 잡히기도 했으나 왕세자 에드워드의 반격으로 강력한 왕권을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에드워드 1세는 의회를 최초로 소집했고 웨일스를 완전히 복속시키고 스코틀랜드를 잔인하게 정복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망치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인들의 독립 운동이 시작되었고 결국 에드워드 2세가 로버트 1세에게 패배하면서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에서 쫓겨났다. 이후 에드워드 3세 시기에 플랜태저넷 왕조가 가진 프랑스 내의 잔존 영토에 대한 지배권 문제와 프랑스의 왕위 계승 문제와 스코틀랜드의 프랑스와의 동맹 문제 등이 겹치며 백년전쟁이 일어났다. 백년전쟁이 끝나고 1455년에는 플랜태저넷 가문의 분가들인 랭커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의 왕위 계승 전쟁이었던 장미전쟁이 30년간 벌어졌다. 최종적으로 부계가 웨일스계인 헨리 튜더가 장미전쟁에서 승리를 차지해 튜더 왕조를 열었다.
6. 근세 시대
- 대영제국 시대
튜더 왕조의 마지막 여왕 엘리자베스 1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 후계자가 없어서 잉글랜드 왕국의 왕위는 스코틀랜드 왕국의 스튜어트 왕조에게 넘어갔다. 스코틀랜드 왕국의 제임스 1세가 헨리 7세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숙적인 두 국가는 제임스 1세 아래에서 동군연합을 이루게 되었다. 이후 찰스 1세 시기에는 영국 내전이 일어나서 올리버 크롬웰의 잉글랜드 연방이 들어서기도 했고 제임스 2세 시기에는 명예 혁명이 일어나서 권리 장전을 발표해 왕권을 크게 제약하기도 했다.
7. 근대 시대
- 대영제국 시대
7.1.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1707년에는 연합법으로 잉글랜드 왕국과 스코틀랜드 왕국이 완전히 합쳐져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 시기는 조지라는 이름의 왕들이 연달아 즉위해서 조지 시대라고 부르기도 한다. 산업 혁명이 시작되었다고 여겨지는 시대였고 7년 전쟁의 승리로 프랑스의 북아메리카 식민지를 획득해 영토를 크게 넓히기도 했다. 조지 시대는 여러 모로 바로 다음 시대인 빅토리아 시대의 번영의 초석을 놓은 시대였다. 반면 1775년에는 미국 독립 전쟁이 일어나 13개 식민지들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해 나가기도 했다. 이 북미 식민지는 미국으로 이어진다.7.2.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
1801년에는 그레이트브리튼 왕국과 아일랜드 왕국을 하나로 합쳐 국호를 그레이트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고쳤다.조지 시대가 끝난 후 빅토리아 시대에는 산업혁명이 가장 활발하게 일어났고 막강한 해군력과 여러 식민지를 바탕으로 전세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1년 대영제국의 최대 강역 |
이 시기의 영국은 대영제국이라고 불렸지만 영국 국왕은 한번도 황제를 칭해본 적이 없었다.[4] 대영제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제국주의 시절의 식민지 제국(colonial empire)으로서의 의미가 강했고, 영국 국왕의 칭호 중 하나에 정식으로 황제가 생긴 것은 무굴 제국의 멸망 이후에 인도 제국의 황제를 겸하면서부터이다.[5]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정복했던 국가로 '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불리기도 했다.[6]
대영제국도 식민지에 큰 영향을 남겼는데 표면적으로는 모든 인종이 법 앞에 평등하다고 간주하기도 했지만 현실에서는 열등한 유색 인종들에게는 아직, 어쩌면 영원히 스스로를 다스릴 자격이 없다는 원칙이 적용되기도 했다. 아메리카 인디언 학살, 오스트레일리아의 원주민 학살, 중동/아프리카 지역의 내전 등의 분쟁과 인종주의적인 문제도 일으켰다. 하지만 동시에 기존에 뿌리내린 봉건적 악습들이 폐지되고 영국의 법과 제도적 전통이 정착하면서 그러한 혜택은 식민지 시대 이후 독립 후에도 꾸준히 이어지게 되었다.
7.3. 조지 5세 시대
제1차 세계 대전 승전 직후에는 패전국들의 식민지를 추가로 획득하면서 대영제국 영토는 사상 최대로 넓어졌다.그러나 1922년에 독립을 요구하던 아일랜드를 아일랜드 자유국이라는 이름의 자치령으로 지정해 사실상 독립을 허용하고 1922년에 국호를 지금의 그레이트브리튼 북아일랜드 연합 왕국으로 고쳤다.
다른 식민지들도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영국에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준 대가를 요구하거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점차 차별 대우에 대한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들을 달래기 위해 1931년에는 자치령의 권한을 대폭 확대한 웨스트민스터 헌장을 제정해 자치령에 군사권과 외교권까지 주었지만 이 정도로 각 식민지의 독립 열기를 잠재우기는 어려웠다.
7.4. 조지 6세 시대
대공황은 영국에 큰 타격을 입혔다. 중공업과 광업 분야의 피해가 심각했으며 식민지를 통한 해결도 제한적이었다. 한편 독일이 세를 불릴 때인 1938년, 네빌 체임벌린은 체코의 독일계 영토 포기에 동의하는 뮌헨 협정에 서명했지만[7] 전쟁을 조금 늦출 뿐이었고,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후 몇 달 동안의 가짜 전쟁을 거쳐 독일이 북쪽과 서쪽으로 본격적인 침공을 개시하자, 유럽에 배치된 영국군은 낡지만 신뢰성 있는 장비에 힘입어 전술적으로는 나쁘지 않은 경과를 여러 번 거두었지만 전략 면에서는 독일에 밀렸기에 시간 벌기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했고 결국에는 독일군에 쫓겨 본토로 돌아갔다.됭케르크에서 시간을 번 영국 공군은 독일 육군의 교두보 확보를 막기 위해, 진격해 오는 루프트바페에 맞서 싸웠고, 이 과정에서 여러 도시가 폭격을 맞고 불탔지만 결국에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즈음 이탈리아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침공했지만, 영국의 선전과 이탈리아의 졸전이 맞물려 이탈리아가 독일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영국 역시 롬멜의 군대 앞에 밀렸으나 미국의 도움을 받아 북아프리카를 탈환한다. 이후 미군과 함께 영국군은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남프랑스, 벨기에, 독일 등지를 차례로 탈환하고 승전을 맞는다.
지구 반대편인 태평양에 배치된 영국군은 해군과 구르카를 제외하면, 식민지 치안 부대 정도로 부실했던 탓에 일본 육군이 동남아시아를 침공하고 일본 해군의 예상 외의 공격에 해군이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자 나름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항복하거나, 오스트레일리아로 철수했다. 이후 태평양의 영국군은 전열을 가다듬고 미얀마 등의 아시아 각지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으며 구레 군항 공습에도 한몫했고, 보르네오 탈환은 영국군이 주역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세계를 미국과 소련이 주도하기 시작했고 영국은 상대적으로 영향력이 줄어들었다.
종전 이후 처칠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은 노동당 정부는 식민 제국의 시기는 지나갔다고 생각하고 제국의 보석이라 불리던 인도의 독립을 약속했던 1948년보다 이르게 승인했는데 이는 끝까지 식민지를 유지하려 20세기 후반까지 미련이 있었던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등과 대비되는 처사였다. 1951년에 와서는 보수당조차 후에 '변화의 바람'이라 불리게 되는 식민지 정책을 수용하기에 이르렀고 최대한 평화롭게 식민지의 권력을 현지의 민주 정부에게 주려고 했다.[8] 결국 영국 본토 외의 제국의 국민은 크게 줄어들게 되었고 남은 국민의 절반 이상은 홍콩인들이었다.
8. 현대 시대
8.1. 엘리자베스 2세 시대
중동전쟁에서는 사실상 영국의 위장 식민지였던 이집트를 독립시킨 나세르가 영국의 소유였던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프랑스, 이스라엘과 협공을 펼쳤으나 미국과 소련의 입김에 발을 뺄 수밖에 없었다. 이 수에즈 전쟁은 구시대의 제국인 영국과 프랑스의 위신을 무너뜨린 대표적인 사건이었는데 2차 대전 이후 미소 양강이 부상하며 미국(을 주축으로 한 서방)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공산 국가)의 대결이 국제 사회의 가장 큰 축이 되었지만 그래도 미국보다 약간 아래로 취급해주기도 했고 자유 진영에서 미국 다음의 강대국으로 생각되었던 영국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과 소련에게 대들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버린 국가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어쨌거나 이를 통해 프랑스와는 달리 그다지 추악한 신세는 (설사 상대적일지라도) 겪지 않게 되었다.전후에는 노동당 정부가 앞세운 요람에서 무덤까지(from the cradle to the grave)로 널리 알려진 복지 정책을 펼쳐 영국 국민들의 삶의 질은 세계 최상위였고 1948년부터 전 국민을 상대로 무상의료가 시작되었다. 영국은 당시 산업이 발전하던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느리기는 했지만 큰 위기는 겪지 않고 있었다. 그렇지만 스털링 지역을 유지하려고 파운드화를 지나치게 고평가해 수출 경쟁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오일 쇼크가 일어나 1970년대 후반부터 IMF의 지원을 받았다. 1970년대에 오면서 대영 제국은 본격적으로 소멸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식민지들이 독립해나간 것도 있지만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EEC)에 가입하면서 대영 제국 국가들 사이에 있던 관계가 변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이전에는 영국과 영국에 법적[9]으로 종속된 국가들인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의 국가와의 무역이나 인적 자원 이동에 상대적으로 큰 제한이 없었다. 이 국가들은 프랑스의 주요 수출품과 겹치는 농산물이나 축산 제품들을 영국에 주로 판매했는데 일단 규모가 다르고 관세도 없으니 가격이 상대적으로 프랑스산에 비해 저렴했다. 그래서 자국의 농업이 위축되는 것을 바라지 않던 프랑스는 영국이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했고 영국은 과거 대영 제국에 속했던 국가들과 유럽 중 하나를 택해야 했는데 결국 유럽을 선택하기로 결정하고 1973년에 유럽 경제 공동체에 가입했다. 이 영연방 소속의 국가들은 대양을 건너야 있는 영국 경제에 상당수 의존해서 후폭풍은 엄청났다.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영국과 법적 종속 관계를 청산하기로 결정하고 캐나다는 1982년, 호주와 뉴질랜드는 1986년에 법 제정을 통해 윈저 왕조 치하의 (영국과 동등한) 입헌군주제 주권국들이 되었다.
1982년에는 포클랜드 전쟁에서 승전하며 체면은 지켰지만 그걸로 과거의 대영 제국의 위세를 다시 드높이기에는 무리였다. 비슷한 시기에 영국은 식민지들의 주민이 식민지 주민이라는 자격만으로 영국 시민권을 쉽게 받을 수 없게 법을 제정하고 난 뒤에 중국의 덩샤오핑과 홍콩 반환 교섭을 진행했다. 1982년부터 시작된 교섭은 1984년 홍콩 반환과 관련된 중영공동성명을 통해 덩샤오핑이 구상한 일국양제 원칙이 관철되어 사회주의 체제를 홍콩에 적용하지 않고 기존 자본주의 시스템을 그대로 유지하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어 홍콩이라는 영국의 마지막 식민지는 이렇게 해체되었다. 반환식은 영국의 통치력이 미치는 마지막 날인 1997년 6월 30일 홍콩 컨벤션센터에서 열렸고 찰스 왕세자와 당시 영국 총리였던 토니 블레어를 비롯한 영국의 최고위 인사들이 참여했다. 밤 11시 58분에 조용히 영국의 국가인 God Save the Queen이 연주되는 사이에 유니언 플래그가 홍콩에서 내려지기 시작해서 유니언 잭과 식민지 기가 완전히 내려진 7월 1일 0시에 오성홍기와 새로 만들어진 홍콩 특별 행정구 기가 중국의 국가와 함께 울려퍼지면서 홍콩에 올라가면서 영국의 식민지 경영, 이른바 대영제국의 시대는 공식적으로 막을 내린다.
이후 21세기가 개막되면서 영국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1973년 유럽 연합(EU) 가입 이래 제한적이나마 유럽 대륙과 발걸음을 맞춰가고 있었지만 내부적으로는 탈퇴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고, 2016년에 실시된 국민투표 결과 51.9%의 유권자가 탈퇴에 찬성함으로써 공식적으로 브렉시트를 선언하고, 2020년 1월 31일자로 유럽 연합에서 탈퇴하게 된다. 이에 따라 유럽연합 잔류시 더 이익을 보는 스코틀랜드 지역이 투표결과에 반발하면서 2014년에 부결되었던 독립투표를 재추진하게 되는 등 영국 사회 전반이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는 중이다.
8.2. 찰스 3세 시대
현재 영국은 브렉시트 이후의 혼란, 유럽에서 건너온 난민 문제, 크게 오른 물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등의 새로운 이슈들을 맞았다. 이 문제들을 해결하는 것이 찰스 3세 시대의 총리들에게 주어진 과제이다.9. 관련 문서
[1]
예를 들어 영국의 지명 중
윈체스터같이 뒤에 체스터가 붙는 도시는 과거 로마군의 야영지나 성채(Castrum/Castra(복수형)이 구개음화가 일어나 chester가 됨)였던 곳이 도시로 발전한 것이다.
[2]
몇몇 기록에 따르면 이 전투의 브리튼인 지휘관이
아서 왕이라고 한다.
[3]
이 습지들은 오늘날에는 대부분 개간되었다.
[4]
유럽에서의 황제(Emperor)란
기독교의 수호자이자
로마 제국의 지배자라는 의미와 통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교회를 통해
동로마 제국 계승을 표방한
러시아 제국과
가톨릭을 통해
서로마 제국 계승을 표방한
신성 로마 제국 정도가 황제라는 칭호를 썼다.
[5]
영국은 그 이전부터
인도를 거의 완전히 통치하고 있었지만 1872년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 여제 칭호를 사용하기 전에는 이미 세력이 약해진
무굴 제국의 황제가 명목상 인도의 황제였고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6]
뉴질랜드와 영국 사이의 시간차는 12시간으로 정반대에 있어서 대영제국에서 완벽히 해가 지는 것을 보는 것은 일반적으로 불가능했다.
[7]
흔히 체임벌린의 실책으로 해석되지만, 당시 영국 국민들은
큰 전쟁을 겪거나 참전자들에게 들었던 터라 전쟁에 대한 반대 여론이 짙었고 체임벌린 역시 국민 여론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8]
이 정책에 대해 이미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펴면서 흑인들은 미개해 자치할 능력이 없다고 본
남아프리카 연방의 지배층들은 크게 반발했고 결국 1961년
영연방을 탈퇴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되었다.
[9]
영국의 의회에서 저 국가들의 법을 제정하거나 그 국가들의 의회에서 만든 법안을 부결시키는 것도 가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