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로버트 부르시에 Robert Bourchie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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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49년 8월 20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할스태드 스탠스테드 | |
사망지 | 가스코뉴 공국 보르도 | |
아버지 | 존 드 부르시에 | |
어머니 | 헬렌 드 콜체스터 | |
아내 | 마가렛 프리어스 | |
자녀 | 존, 윌리엄 | |
직위 | 부르시에 남작, 잉글랜드 총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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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초기에 평신도 최초로 잉글랜드 총리가 되었다.2. 생애
아버지는 옥스퍼드 백작 가문에서 법조인으로 일하다가 켄트, 서리, 서식스, 서퍽, 노팅엄셔, 더비셔, 링컨셔 등지에서 공동 항소 법원 판사로 근무한 존 드 부르시에이고, 어머니는 콘체스터 출신의 기사 존 드 콜체스터의 딸 헬렌이었다. 부르시에 가족은 에식스의 할스태드 교구에 있는 스탠스테드에서 살았으며, 나중에 로버트가 출세를 거듭하면서 확보한 재산을 토대로 여러 부동산을 인수했다.그는 처음엔 아버지를 따라 옥스버드 백작 가문에서 일하다가 1327년 즉위한 에드워드 3세의 궁정에 기용되어 프랑스에서 외교 사절단으로 활동했으며, 1328~1329년, 1330년, 1332년, 1339년에 에식스 카운티 대표 의원으로서 의회에 출석했다. 1334년에 아일랜드 영지의 대법관에 선임되었고, 1335년 에드워드 3세의 스코틀랜드 원정에 가담했으며, 1337년 백년전쟁 최초의 전투로 일컬어지는 카잔트 전투에 참전했다. 1338년 에드워드 3세의 플란데런 백국 원정에 참여했으며, 1341년 6월 3일 에식스의 할스태드 교구 내 스탠스테드에 있는 자신의 집을 요새로 개조할 수 있는 왕실 허가증을 받았다.
1340년 11월 30일 런던에 예고도 없이 도착한 에드워드 3세는 군자금을 제대로 보내지 않아 플란데런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것에 격분해 장관들을 맹비난하고, 로버트 드 스트랫퍼드 총리, 런던 시장, 재무관 윌리엄 드 라 폴, 리처드 드 라 폴 등을 제포해 런던 탑에 가두었다. 이후 부르시에를 잉글랜드 총리에 선임했다. 잉글랜드 총리 직은 주교가 대대로 맡는 직책이었는데, 그가 처음으로 평신도 신분으로 총리가 된 것이다. 그는 총리로서 100파운드의 급료를 받았다.
이후 에드워드 3세와 캔터베리 대주교 존 드 스트랫퍼드 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벌어지던 1341년 4월 27일, 그는 켄터베리 대주교에게 왕에게 복종할 것을 촉구하는 서신을 보냈다. 또한 1341년 4월 개최된 의회가 왕실 관리들의 회계를 감사해야 하고 총리와 다른 고위 관리들이 의회에서 지명되어야 하며, 법을 준수할 것을 맹세해야 한다고 청원하자, 그는 면전에서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왕은 이 조항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 조항에 구속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이 왕에 대한 충성 서약과 왕의 권한을 규정한 법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이 아버지 에드워드 2세처럼 반란군에게 폐위될 것을 우려해 귀족들과 화해하고 과세 혜택을 받는 대가로 재정, 행정에 대한 왕권 행사에 규제를 두는 법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에드워드 3세는 상황이 수습된 후인 같은 해 10월에 법령을 거부하고 스트랫퍼드 가문을 정치적으로 배척했다. 그 후 부르시에는 1341년 10월 29일에 총리 직에서 사임했지만, 이후에도 외교관과 군인으로서 에드워드 3세를 보좌했다. 1342년 브르타뉴 전선에서 부대를 지휘했고, 1346년 크레시 전투에 참전했고, 뒤이은 1차 칼레 공방전에도 참여했다.
1342년 초대 부르시에 남작 칭호를 받았으며, 1348년 11월 의회에 소환되었을 때 피어(peer: 남작 , 백작 , 공작 등 다양한 직함과 높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사람들과 같은 격을 지닌 인물)로 지칭되었으며, '부르시에 경'으로 일컬어졌다. 1349년 보르도로 가서 카스티야 연합 왕국을 대상으로 외교 임무를 수행하던 중, 그해 8월 20일에 중세 흑사병에 걸려 사망했다. 사후 할스태드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마가렛 프리어스: 헤딩엄 출신의 기사 토머스 프리어스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