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윌리엄 드 라 폴 William de la Po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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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1366년 6월 21일 | |
출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레이븐셔 오드 | |
사망지 | 잉글랜드 왕국 요크셔 킹스턴어폰헐 | |
형제 | 리처드, 존 | |
부인 | 캐서린 노리치 | |
자녀 | 마이클, 에드먼드, 월터, 토머스, 블랜치, 마가렛 | |
직위 | 양모 상인, 재무장관 남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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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잉글랜드 왕국의 양모 상인. 백년전쟁에서 프랑스 왕국과 대적하는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에게 막대한 군자금을 지원했다.2. 생애
잉글랜드 요크셔 레이븐셔 오드 출신으로 알려졌다. 부모의 신상명세는 불분명하며, 형제로 리처드, 존이 있었다. 그는 일반적으로 3형제 중 2번째로 알려졌다. 그는 형 리처드와 함께 레이븐셔 오드에서 양모 상인으로 활동하다가 1310년대에 킹스턴어폰헐로 이주했다. 이후 탁월한 상업 역량을 발휘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면서 헐 시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317년경 잉글랜드 수석 집사의 시종을 맡았으며, 1321년부터 1324년까지 헐의 시종이 되었다. 1320년대부터 가스코뉴를 둘러싸고 프랑스 왕국과 갈등을 벌이고 있던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2세에게 자금을 대출했다. 1325년경의 왕실 재정 문서에 따르면, 그는 에드워드 2세에게 1,800파운드를 대출해줬다고 한다. 또한 헐 요새를 개선하기 위한 비용으로 306파운드를 지불했다.1327년 스코틀랜드와의 전쟁에 들이는 군사비를 마련하고자 애쓰는 왕실에게 4,000 파운드를 대출해줬고, 프랑스의 이자벨 왕비와 권신 로저 모티머가 에드워드 2세를 축출하기 위해 고용한 플란데런 용병들의 급여에 쓰일 2,000 파운드를 빌려줬다. 그는 형 리처드와 함께 1329년까지 잉글랜드 왕실에 13,000 파운드가 넘는 자금을 빌려줬는데, 이는 잉글랜드 왕실에게 자금을 전통적으로 빌려줬던 피렌체의 바르디 가문이 제공한 금액과 비슷했다. 그는 이러한 대출 자금을 조성한 대가로 다양한 특권을 받았다. 1330년에 마이튼에서 영지를 받았고, 1332년 헐 시의 시장이 되어 1335년까지 직위를 역임했고, 1330년대에 의회에서 헐을 대표했다.
1330년대엔 스코틀랜드와 프랑스를 상대로 전쟁을 벌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를 위해 더 많은 자금을 지원했고, 선박을 제공해줬으며, 에드워드 3세가 양모 무역 통제를 통해 전쟁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설립한 잉글랜드 양모 회사를 왕과 함께 공동으로 관리했다. 에드워드 3세는 1338년 6월부터 1339년 10월까지 10만 파운드 이상을 빌렸다. 그러나 왕이 좀처럼 돈을 갚지 못하자, 왕실 직할지였던 버스트윅 영지 또는 홀더니스 영지를 22,650 파운드에 인수했다. 1339년 프랑스로 원정가기도 전에 파산당할 지경에 몰렸던 에드워드 3세에게 1만 파운드 이상의 거금을 마련해 빌려줘서 자금난이 일시적이나마 해소되게 하였다. 에드워드 3세는 이 공로를 인정해 그를 깃발 기사에 선임했으며, 1339년 9월 26일 재무장관 남작에 선임해 잉글랜드 재정 전반을 이끌게 했다.
그러나 1340년 형 리처드, 런던 시장이자 왕실 전문 대출업자 존 드 풀테니와 함께 체포되었다. 혐의는 양모 밀무역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해 잉글랜드 양모 회사가 파산하게 만든 것이었다. 이후 데비지스 성에 감금되었고, 영지는 압수되었다. 1344년 재판이 취소되면서 풀려났고, 새로운 회사를 설립해 에드워드 3세의 전쟁 자금 조달을 조직하는 작업에 힘을 보탰다. 1354년에 에드워드 3세로부터 양모 밀수 혐의로 규탄받고, 사면을 받는 대가로 에드워드 3세가 그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탕감하며 버스트윅 저택 소유권을 포기해야 했다. 1366년 6월 21일 킹스턴어폰헐에서 사망했으며, 사후 성 삼위일체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캐서린 노리치(? ~ 1382): 기사 월터 드 노리치의 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