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 |
우다르 1세 드 렌티 Oudart I de Rent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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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도 | 미상 ~ 미상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 |
아버지 | 보두앵 1세 드 랜티 | |
어머니 | 거트루드 드 플라비 | |
아내 | 잔 카트린 | |
자녀 | 우다르 2세, 마리, 장 | |
직위 | 엠브리, 컬루, 아프린게의 영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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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 시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를 오갔다.2. 생애
프랑스 왕국의 아르투아 출신으로, 아버지는 렌티의 영주인 보두앵 1세 드 랜티이며, 어머니는 엑상에르니의 여성 영주인 거트루드 드 플라비였다. 그는 로베르 3세 다르투아의 추종자로, 로베르 3세가 프랑스 국왕 필리프 6세에게 추방되었을 때 동행했으며, 이후 로베르 3세가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의 지원하에 플란데런 전선 및 프랑스 전선에서 활동할 때 동행했다. 그러나 1347년 플란데런군을 이끌고 작전을 수행하다가 프랑스군에게 패배한 뒤, 필리프 6세의 사면을 받고 프랑스 편으로 돌아섰다.1349년 12월, 프랑스 북동부 사령관 조프루아 드 샤르니는 칼레를 기필코 되찾기로 마음먹고, 칼레 성문 한 곳의 열쇠를 소지하고 있던 파비아 출신의 랑고르바르드인 용병대장인 아이머리(Aimery)에게 2만 에퀴(약 3500 파운드)를 제공하는 조건으로 프랑스군이 칼레 시에 진입하도록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1350년 1월 1일 밤, 우다르는 조프루아의 지시에 따라 프랑스 장병 100명을 이끌고 2만 에퀴가 든 자루를 짊어지고 칼레 성벽을 기어올라갔다. 아이머리는 그들로부터 금을 수령한 뒤 프랑스인들을 성채로 이끌었다. 그러나 잠시 후 숨어있던 잉글랜드군이 튀어나와 그들을 덮쳤고, 우다르와 프랑스 장병 100명은 즉시 항복했다. 이후 조프루아 역시 칼레 성문 밖에 이르렀다가 잉글랜드군의 공격으로 생포되었다.
이후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난 우다르는 1364년 투르네 주지사를 맡았고, 1370년 프랑스 무관장 베르트랑 뒤 게클랭의 부관으로서 잉글랜드군을 축출하는 원정에 참여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는다.
3. 가족
- 잔 카트린: 아쟁쿠르의 영주인 프랑수아의 딸.
- 우다르 2세 드 렌티: 잔 드 부르농빌의 남편.
- 마리 드 렌티: 위그 드 리카메츠의 아내.
- 장 드 렌티: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