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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서프랑크 왕국의 왕조. 카페 왕조의 본가이자 전신이다.2. 역사
로베르 가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카롤루스 대제 시절부터 궁정을 보좌했던 에스바이 백작 로베르(Robert de Hesbaye)에게 닿는데, 에스바이 백작가는 카롤루스 대제의 아들인 '경건왕' 루도비쿠스 1세 시절부터 왕비를 배출했고, 위그 카페의 큰할아버지 외드와 할아버지 로베르 1세는 루도비쿠스 1세의 외손자들로, 카롤루스 왕조가 분할 상속으로 약화되자 노르드족인 바이킹의 침략을 격퇴하며 인망을 모아 서프랑크의 왕이 되기도 했다. 로베르 1세의 아들 대 위그(위그 르 그랑)는 독일 왕 하인리히 1세의 왕녀인 작센의 헤드비게와 결혼하여 위그 카페를 낳았다. 이런 식으로 카페 가문이 왕좌를 차지하는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시기가 아직 중세적 상속 체계가 자리잡히기 이전의 시절이었고, 군주라는 자리는 전임 군주의 명백한 직계 장자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지역 영주들이 합심해서 다른 가문 사람을 선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로베르 가문은 서프랑크에서 꽤나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이었다.[1]이후 서프랑크 왕국의 루이 5세가 후사없이 사망하면서 카롤루스 왕조의 혈통이 단절되자 로베르 왕조의 프랑크 대장군 겸 파리 백작인 위그 카페가 987년 프랑크 왕에 선출된다.
3. 이후의 역사
자세한 내용은 카페 직계 문서 참고하십시오.
[1]
다만 남프랑스의 거의 1/3을 가지고 있었던 툴루즈 가문이나 푸아티에를 중심으로 루아르 강 일대를 휘어잡고 있었던 푸아투 가문이 지배 영지와 동원 병력 규모만 놓고 보면 카페 가문보다 더 강한 집안이었다. 본문에서도 후술하듯이 카페 가문의 직할지는 초기에는 오를레앙과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일드프랑스 일대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이곳이 프랑스의 핵심이지만 당시에는 그저 좀 인구가 밀집한 지역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다만 푸아투 가문은 얼마 안 가서 단절되었고, 툴루즈 가문은 훗날 카타리파 이단 문제와 연루되어 발생한 알비 십자군의 진압 활동으로 인해 영지 지배력이 쇠퇴하면서 몰락했다. 그 밖에 다른 가문, 즉 보르도를 중심으로 남프랑스의 패권을 휘어잡은 아키텐 가문이나
필리프 1세의 숙부가 시조인 카페-부르고뉴 가문은 프랑스 동부의 핵심 요충지인 부르고뉴 일대와 동북부 플랑드르의 상당 부분, 심지어 포르투갈 왕위(14세기 후반까지 존속한
보르고냐 왕조)까지 차지했다. 그러므로 카페 가문은 존엄왕
필리프 2세 등장 이전까지는 직할 영지 규모나 군사력에서 상당한 약세를 보였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