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프랑스 폭동 Crise du 6 février 1934 6 February 1934 Crisis | Veterans' Rio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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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폭동 당시의 콩코르드 광장 | |
일시 | |
1934년 2월 6일 | |
장소 | |
[[프랑스 제3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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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인 | |
스타비스키 사건 경찰총장 장 키아프 해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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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 및 교전 세력 | |
프랑스 극우 단체들 |
[[프랑스 제3공화국| |
지휘관 | |
나폴레옹 6세 프랑수아 드 라 로크 샤를 모라스 피에르 태탱제 마르셀 뷔카르 |
알베르 르브룅 에두아르 달라디에 |
피해 | |
15명 사망, 2,000여명 부상 | |
결과 | |
에두아르 달라디에 사임 프랑스 제3공화국의 정치 대립 격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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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4년 2월 6일 프랑스 제3공화국 파리의 콩코르드 광장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反)민주주의 폭동. 전간기 프랑스 제3공화국의 혼란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이다. 폭동에 참가한 극우 단체들에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용사들이 몸담고 참여했다는 점으로 인해 "참전용사들의 폭동"이라는 이름이 쓰이기도 한다.악시옹 프랑세즈, 불의 십자단을 비롯한 프랑스의 극우 단체들을 주축으로 된 시위가 폭력사태로 번지며 일어났으나 사건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견이 갈리는 편이다. 일부, 특히 좌익 성향의 인물들은 해당 사건을 프랑스에서 시도된 파시스트 쿠데타 시도였다고 평하는 반면 조엘 콜튼[1]이나 르네 레몽과[2] 같은 사학자들은 시위대는 정권을 탈취할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에는 어려울 정도로 조직성, 단결이나 지도부가 부재했다고 평가한다.
2. 상세
2.1. 배경
프랑스에 대공황으로부터의 영향은 1931년 경부터 두드러지는데 바이마르 공화국이나 폴란드 제2공화국만큼은 아니어도 대공황으로 인한 공화정 지지 중산층이 대거 몰락하면서 정치혼란이 심화되고 프랑스 내 반민주주의 세력들( 프랑스 공산당, 프랑스 극우파)은 이를 이용해 세력을 대거 확장했다.동시기에 일어난 다수의 정치/금융 사건사고들은 프랑스의 정치 혼란을 더욱 심화시키고 반민주주의 세력들의 성장을 불러왔다. 1928년에는 본인 소유 언론사를 이용해 친우들의 페이퍼 컴퍼니들로의 투자를 종용한 유대계 프랑스인 사기범 마르테 아나우(Marthe Hanau)가 체포되었고 1932년에 재판받았으며 1930년에는 그룹 산하 회사들로 그룹의 다른 회사들의 주식을 구매하는 주가 조작을 한 기업가 알베르 우스트릭이 체포되었고 회사는 도산했다.
이러던 와중 1933년에 스타비스키 사건이 발생했는데 1933년 12월 러시아 출생 폴란드계 유대인 세르주 알렉상드르 스타비스키(Serge Alexandre Stavisky)가 프랑스 서남부의 소도시 바욘에서 거짓말과 속임수로 많은 정재계 인사들 사이에서 거액의 뇌물을 수수하고 그것으로 불량 채권을 발행하도록 하여 거액의 돈을 갈취했던 것이다. 당시 급진당 내각의 알베르 다리미에 사법장관을 비롯한 많은 정계 인사들의 연루가 공개되어 정계 부패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었다. 급진당 내각이 대처로 한 첫 활동은 당시 파리 경시총감 장 키아프(Jean Baptiste Pascal Eugène Chiappe)의 해임이었는데 사유는 스타비스키의 도피를 도와준 것이었지만 장 키아프는 오랫동안 파리에서의 시위들에서 의도적으로 우파 시위대를 감싸고 좌파 시위대들을 편향적으로 처벌했다는 비판을 받던 인물이라 우파 계열에서는 급진당 내각이 이 사건을 명분으로 키아프를 제거한다고 의심해 행동에 나섰다.
2.2. 전개
극우 단체들과 우파동맹의 시위는 기존에도 산발적으로 이뤄져 왔고 스타비스키 사건에 관련한 시위도 1934년 1월부터 계속되었다.1934년 2월 6일 파리 전역에서 시위하던 극우 단체들과 우파동맹이 프랑스 국민의회 건물인 부르봉 건물 앞인 콩코르드 광장에 집결하기 시작하면서 파리 경찰은 콩코르드 광장 앞 콩코르드 다리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의 시위대 집결을 저지하기 시작했다. 시위대는 저지하는 경찰들에게 돌 등을 던지면서 공격했고 시위대 일부의 무장 상태가 확인되자 시위대에 발포했다. 충돌은 수 시간 동안 지속되어 새벽 2시가 넘어서야 완전히 잠잠해졌다.
강 이서에서 넘어와 콩코르드 광장에서 충돌한 시위대는 극우파가 주축이었으나 강 이동에서 콩코르드 광장으로 집결하던 이들은 우파였고 급진당 정부를 불신하되 공화정은 지지하였으며 강 이동에서의 시위대는 별다른 충돌 없이 해산했다.
또 이 충돌 자체에도 당시 시위에 참여한 단체들 중 악시옹 프랑세즈는 콩코르드 다리에서 적극적으로 경찰과 충돌한 반면 불의 십자단은 질서를 주문한 프랑수아 드 라 로크의 명으로 경찰과 시위대의 충돌에서 물러섰는데[3] 이는 악시옹 프랑세즈 단원들이 이 폭동의 시위대 사망/부상자 다수를 점한다는 것이 뒷받침한다.
2.3. 영향
폭동의 밤,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공공질서 수복에 관한 명령을 내리면서 비상사태 선언도 고려했지만 실제로 선언하지는 않았으나 다음날 자당 의원들과 법무부, 경찰이 달라디에의 사건 후속대책 집행을 거부하면서 달라디에는 사임을 결정했고 2월 9일 이뤄졌다. 이는 프랑스 제3공화국 사상 최초로 총리가 직접적으로 시위에 의해 사임한 사태였다.그 결과 후임 총리로는 과거 대통령이었던 가스통 두메르그가 정해지면서 우파와 중도파를 아우르는 '국민통합정부'를 표방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성향의 정당들을 제외한 모든 원내정당의 참여가 들어간 내각을 형성했다.
폭동 후 프랑스 좌익은 2월 6일의 사태를 파시스트에 의한 쿠데타 시도로 확신하였으며 의사표명에 나섰다. 달라디에가 사임하던 2월 9일 프랑스 좌익도 시위에 나섰는데 여기서 경찰과의 충돌로 9명이 사망했다. 2월 12일, CGT는 1일 총파업을 결의했다. 본 사건으로 파시스트 쿠데타에 대한 위협을 느낀 프랑스 좌익들은 다수의 반파시스트 단체들을 만들었다.
한편 우익 세력에서도 본 사태로 우경화와 극우화가 일어났다. 본 사태의 대처에서 상당수의 우익 인사들은 민주주의에 환멸을 느껴 극우로 전향해 전간기 프랑스의 정치 분쟁의 격화에 이바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