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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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조프루아 1세 Geoffroi 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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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프루아 1세와 하와이즈의 결혼식 | ||
이름 | 조프루아 1세(Geoffroi I) | |
출생 |
980년경 브르타뉴 공국 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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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008년
11월 20일 브르타뉴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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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위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 |
992년 ~ 1008년 | ||
아버지 | 코난 1세 | |
어머니 | 에르망가르드 당주 | |
형제 | 주디트 | |
배우자 | 하와이즈 | |
자녀 | 아델, 알란 3세, 에우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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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2. 행적
980년경 브르타뉴 공국의 도시인 렌에서 당시 렌 백작이며 990년부터 브르타뉴 공작을 역임한 코난 1세와 앙주 백작 조프루아 1세의 딸인 에르망가르드 당주의 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주디트[1]가 있었다. 992년 6월 27일, 아버지 코난 1세가 브르타뉴로 쳐들어온 앙주 백작 풀크 3세와 콩퀴어뤼일 전투에서 맞붙었다가 패사했다. 그 후 조프루아 1세는 12살의 나이에 브르타뉴 공작에 선임되었지만, 실제로는 렌, 반, 및 브르통 일대의 상당 부분만 상속받았고, 나머지는 앙주 백국, 블루아 백국, 노르망디 공국 등 이웃 영주들의 영향권에 속했다. 어머니 에르망가르드가 아직 어린 조프루아 1세를 위해 섭정을 맡았는데, 블루아 백작과 노르망디 공국의 압박으로부터 주권을 지키기 위해 친형제인 풀크 3세가 브르타뉴 공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걸 받아들였다.992년, 풀크 3세는 낭트 백작으로 호엘 1세의 사생아인 주디카엘을 선임한 뒤 자신의 가신인 투아르 자작 아이메리 3세의 감독하에 뒀다. 하지만 994년, 에르망가르드가 군대를 파견해 주디카엘을 굴복시키고 조프루아 1세에게 경의를 표하도록 했다. 1004년, 낭트 백작 주디카엘이 사망했고,[2] 블루아 백작 에르베도 같은 시기에 사망했다. 당시 성년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던 조프루아 1세는 이 기회를 틈타 낭트에 대한 자신의 권력을 확보하기 위해 렌 출신의 기사 고티에 2세를 낭트의 새로운 주교로 세우고 주디카엘의 어린 아들 부디크의 섭정으로서 통치를 행사하도록 했다.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에 강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앙주 백국으로부터 독립하기를 간절히 희망했다. 하지만 아버지 대부터 렌 정권을 지원했던 블루아 백국은 새 백작인 외드 2세가 동쪽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기에 별다른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엇다. 이에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동맹을 맺기로 마음먹고, 리샤르 2세의 누이인 하부이즈와 결혼하기로 했다. 여기에 더해, 여동생 주디트를 리샤르 2세의 아내로 삼게 함으로써, 양국간의 관계를 두텁게 다졌다. 한편, 그는 아버지 코난 1세와 마찬가지로 몽생미셸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고, 생멜루아르데옹드 및 생브누아데옹드의 수도자들에게 수입을 제공했다.
조프루아 1세는 브르타뉴 공국에서 그동안의 전란으로 파괴된 수도원들을 복구하기 위해 생브누아쉬르루아르 수도원장이며 훗날 부르주 대주교가 될 고즐린 드 플뢰리에게 이 작업을 수행할 수 있는 수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1008년, 고즐린은 브르타뉴 출신의 수도자 펠릭스를 보내 그 임무를 맡겼다. 그 후 조프루아 1세는 로마를 목표로 순례를 떠나기로 마음먹고, 펠릭스에게 아내와 두 아들을 보필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순례를 떠난 그는 파리를 들러서 프랑스 국왕 로베르 2세에게 경의를 표했다. 이후 로마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던 1008년 11월 20일 갑작스럽게 사망했는데,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사후 몽생미셸 수도원에 안장되었고, 장남 알란 3세와 차남 에우돈이 브르타뉴의 공동 공작이 되었다.
3. 가족
- 하와이즈(? ~ 1034):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1세의 딸, 리샤르 2세의 누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