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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국왕 살로몬 Salom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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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름 | 살로몬(Salomon)[1] | |
출생 |
미상 브르타뉴 |
|
사망 |
874년
6월 25일 브르타뉴 왕국 라 마르티르 |
|
재위 | 브르타뉴 왕국의 왕 | |
857년 ~ 874년 | ||
아버지 | 리왈론 | |
배우자 | 웬브리트 | |
자녀 | 프로스트론, 리왈론, 기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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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왕국의 국왕. 영토를 확장하고 바이킹의 침략을 물리쳤지만, 말년에 암살당했다. 후대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2. 행적
그의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이스라엘 왕국의 국왕 솔로몬에서 유래했다. 그의 아버지는 노미노에의 형제 또는 친척으로 추정되는 포허 백작 리왈론이다. 그에게는 코르누아이유 백작이자 반(Vannes) 백작 리벨론이라는 형제가 있었다.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에 따르면, 그는 852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한 뒤 낭트, 렌, 레츠 일대를 브르타뉴 국왕 에리스포에의 주권 아래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 때부터 살로몬은 브르타뉴에서 발간된 문서에 최종적으로 서명하거나 동의하는 등 궁정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인물이 되었다.857년 11월 12일, 에리스포에는 탈렉삭 교회 제단에서 사촌 살로몬을 포함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피살당했다. 암살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에리스포에가 지난해에 샤를 2세의 아들인 루이 2세와 자기 딸을 약혼시키고 더 이상 전쟁을 벌이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브르타뉴 귀족들이 더 많은 영토를 탈취하고 재물을 획득할 기회가 사라진 것에 불만을 품고 살로몬을 내세워 암살을 감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858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샤를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걸 지원했지만, 그 해 9월 루트비히 2세가 샤를 2세를 대신해 브르타뉴로 진군하자, 루트비히 2세가 오를레앙에 머물 때 사절단을 보내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를 맺기로 했다. 859년, 툴 인근의 사보니에르에서 열린 회담에서, 살로몬은 샤를 2세와 에리스포에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건을 확인했다. 862년 아버지 샤를 2세에게 반기를 든 루이 2세를 돕기 위해 브르타뉴군을 빌려줬고, 바이킹을 고용해 오를레앙, 앙주, 투르, 블루아의 백작인 로베르 1세의 영지를 습격하게 했다.
863년, 살로몬은 안트라메 수도원에서 샤를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일명 '두 물 사이의 땅'으로 일컬어진 마옌강에서 사르트 강 사이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살로몬에게 양도하고, 살로몬은 샤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옛 관습”에 따라 공물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살로몬은 이후에도 수년간 샤를 2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866년, 살로몬은 바이킹 지도자 하슈타인과 동맹을 맺고 앙주, 멘, 투렌을 잇달아 약탈했다. 르베르 1세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았고, 푸아투 지역의 라눌프와 멘의 고드프리트와 에르베가 합세했다.
프랑크 군은 루아르 강에 있는 함대로 이동하던 중 르망을 약탈하던 덴마크-브르타뉴 연합군을 요격했다. 이어진 브리사르 전투에서 거의 모든 브르타뉴 사람과 대부분의 바이킹이 죽었고 나머지는 근처 석조 교회로 피신했다. 프랑크군은 교회를 포위한 뒤 다음날 공성병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바이킹들이 휴식을 취하던 프랑크군을 급습했다. 로베르는 갑옷을 벗은 채 반격에 착수했고, 프랑크군은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바이킹 한 명이 교회 창문에서 날린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종들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뒤 사흘 뒤 사망했다. 고드프리트와 에르베도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사망했고, 프랑크군은 모든 지휘관이 죽자 후퇴했다. 살아남은 바이킹들은 곧바로 배에 승선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867년 8월 25일, 살로몬은 샤를 2세와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2세는 그에게 코탕탱 반도, 아브랑챙(Avranchin) 및 채널 제도의 소유권을 양도했다. 868년, 샤를 2세는 공식적으로 살로몬을 왕으로 인정했다.
한편, 살로몬은 성당과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빌랭의 막생 수도원. 플래샤텔의 생소뵈르 수도원, 게랑드의 아우뱅 수도원, 르동, 생멘르그랑, 플랑르그랑의 여러 수도원들에 막대한 기부금을 헌납했다. 또한 교황청의 권고에 따라 848년 노미노에에 의해 선임된 대부분의 브르타뉴 출신 주교들을 원래의 프랑크 주교들로 교체했다. 살로몬은 그 대가로 돌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통해 투르 대주교구로부터 브르타뉴의 종교적 독립을 얻으려 했다. 교황청은 이에 대해 속시원한 회답을 하지 않았지만, 돌 주교구가 브르타뉴에서 사실상 대주교구로 군림하는 걸 내버려뒀다.[2]
재위 말기, 살로몬은 브르타뉴에서 사실상 무한한 권력을 누렸고, 자신을 "브르타뉴 전체의 왕이자 갈리아의 주목받는 공"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에리스포에를 살해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품은 그는 퇴위하고 수도원에 은둔하려 했다. 그러던 874년 6월 25일, 그가 라 마르티르 수도원에서 기도드리고 있을 때, 그의 사위이자 반 백작 파스베텐, 에리스포에의 사위이자 렌 백작 구르완트, 그리고 살로몬의 조카인 리발롱이 급습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이 뽑힌 채 방치되었고, 그날 밤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아들 기곤 역시 이날 살해되었다. 암살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브르타뉴 귀족들이 그의 강력한 권세로 인해 권력이 제약된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파스베텐, 구르완트 등이 살로몬의 어린 아들 기곤이 왕위를 세습하는 걸 막고 자기들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으리라 추정한다. 그 후 브르타뉴 왕국은 심각한 내전에 휘말렸다.
3. 가족
- 웬브리트: 브르타뉴 귀족의 딸이라고만 전해진다.
- 프로스트론(? ~ ?): 반 백작 파스베텐의 아내.
- 리왈론(? ~ 871 이후): 871년 7월 9일에 살로몬이 르동 수도원에 기부했을 때 발표된 헌장에 이름이 언급되었다. 이후에 기록이 전해지지 않은 걸 볼 때 얼마 안가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기곤(? ~ 874): 874년 아버지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을 뻔했지만 아버지가 암살당했을 때 함께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