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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uantelezh Breizh(
브르타뉴어) Royaume de Bretagne( 프랑스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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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 초 ~ 938년 | |
위치 | 브르타뉴 |
수도 | 미상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언어 | 브르타뉴어, 라틴어, 프랑스어, 고대 노르드어, 갈로어, 푸아테뱅어 |
종교 | 가톨릭 |
민족 | 브르타뉴인, 프랑스인, 바이킹 |
성립 이전 | 브로그웨네드, 돔노네, 코르누아이유, 프랑크 총독령 |
개편 이후 | 브르타뉴 공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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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세기 초,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결성한 왕국. 프랑크 왕국에 복속되었다가 독립하기를 반복했고, 한때 바이킹에게 전 국토가 장악당하기도 했다가 938년 알란 2세가 공작으로서 프랑스 왕국의 봉신이 되기로 서약하면서 브르타뉴 공국으로 개편되었다.2. 역사
브르타뉴는 8세기 말까지 브리튼 섬에서 앵글로색슨족의 침략을 피해 이주한 켈트족이 건국한 돔노네, 브로그웨네드, 코르누아이유 등 작은 공국들의 집합체였다. 그러나 753년 프랑크 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건국자 피피누스 3세가 반(Vannes) 백국을 탈취한 것을 시작으로, 브르타뉴는 프랑크 왕국의 침략에 시달렸다. 778년, 카롤루스 대제는 렌, 낭트를 추가로 공략한 후 반 일대와 묶어서 브르타뉴 총독령을 신설했다. 브르타뉴 총독령은 브르타뉴인들이 프랑크 본토를 습격하는 걸 저지하는 동시에, 프랑크 왕국에 직접적으로 복속하지 않은 브르타뉴인들을 지속적으로 침략해 큰 타격을 입혔다. 특히 렌과 반 일대 사이에 둘러싸인 알레 일대는 프랑크군에게 집중적으로 습격당해 큰 피해를 입었다. 또한 카롤루스 대제는 브르타뉴 내 프랑크인을 늘리고 조공을 바치는 대가로 자치권을 부여받았던 브르타뉴인들에게 막대한 공물을 바치라고 강요했다.그러던 814년 1월, 카롤루스 1세가 사망했다. 그동안 카롤루스 대제의 강압 정책에 시달렸던 브르타뉴인들은 모르반을 브르타뉴 왕으로 추대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818년, 카롤루스 대제에 의해 프랑크 왕위에 오른 루도비쿠스 1세는 상당한 군대를 이끌고 반으로 진군한 뒤 그곳을 주둔지로 삼았다. 이후 브르타뉴로 진군해 반군의 모든 요새를 공략하고 브르타뉴 전역을 순식간에 휩쓸었다. 모르반은 루도비쿠스 1세의 공세를 피해 달아났지만 프리지악과 카하익스 사이 평원에서 초슬론(Choslon)이라는 종자에게 살해되었고, 브르타뉴인들은 루도비쿠스 1세에게 굴복했다.
822년, 브르타뉴인들은 다시 위마르크를 왕으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다. 학자들은 그의 권력이 브르타뉴 총독령의 영역에 직접 귀속되지 않은 브르타뉴 북부, 즉 돔노네 서부 지역에서 행사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당시 극심한 기근이 프랑크 왕국을 강타했기 때문에, 루도비쿠스 1세는 브르타뉴로 가려던 원정을 연기했다. 824년, 마침내 군대를 모은 그는 브르타뉴의 도시 렌으로 행차했다. 그는 그곳에서 자신의 군대를 세 군단으로 나누어 두 군달은 아들 아키텐의 피핀 1세와 루트비히 2세에게 맡겼고, 자기는 3번째 군단을 이끌었다. 이후 프랑크군은 브르타뉴로 진군해 그곳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40일간 원정을 이어간 프랑크군은 브르타뉴인들로부터 인질을 받아낸 뒤 11월 17일 루앙으로 철수했다.
825년 5월 루도비쿠스 1세가 엑스라샤펠에서 총회를 열었을 때, 상당히 많은 브르타뉴 영주들이 모였다. 이때 위마르크도 함께 있었는데, 다른 브르타뉴 귀족들과 함께 복종 서약을 하는 대가로 환대받고 상당한 선물을 받고 귀환했다. 그러나 위마르크는 본국으로 귀환한 뒤 루도비쿠스 1세에게 복종 서약을 위반하고 브르타뉴 총독령을 습격했다가, 낭트 백작이자 브르타뉴 총독 랑베르 1세가 파견한 부하들에게 자기 집에서 포위되어 살해되었다.
830년 1월 16일, 루도비쿠스 1세는 브르타뉴 출신의 노미노에를 반의 백작으로 세웠다. 노미노에는 루도비쿠스 1세의 충실한 신하였다. 그는 행정 및 사법 분야를 전담하면서도 주교를 조사하는 임무도 맡았으며, 833년 2월 9일 '브르타뉴의 마기스트로(magistro)'로서 루도비쿠스 1세 통치 20주년을 기념해 랑동 수도원에 기부했다. 그러던 840년 루도비쿠스 1세가 사망한 뒤 루트비히 2세, 로타리우스 1세, 그리고 샤를 2세의 내전 양상을 주시했다. 그는 처음에는 서프랑크 왕국을 통치한 샤를 2세를 지지했다. 841년 봄 네우스트리아(Neustria)[1]에서 발발한 반란에 시달리던 샤를 2세가 사절을 보내 자기를 지지하는 지 묻자, 노미노에는 그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맹세했다. 841년 후반에는 로타리우스 1세가 그에게 자기와 동맹을 맺으면 네우스트리아 일부를 주겠다고 제안했지만, 노미노에는 거부했다. 또한 842년 1월 25일 르동 수도원에 샤를 2세의 승리를 기원하기 위해 기부하기도 했다.
그러던 843년, 낭트 백작 리쿠앵이 사망한 후 전임 낭트 백작 랑베르 1세의 아들이었지만 리쿠엥에게 밀려났던 랑베르 2세가 샤를 2세에게 자기를 낭트 백작으로 선임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샤를 2세가 그 대신 아키텐의 에르보쥬 백작이었던 르노를 낭트 백작으로 선임하자, 이에 반감을 품은 랑베르 2세는 무력으로 낭트를 탈취하기로 마음먹고 노미노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아들 에리스포에에게 군대를 맡겨 낭트로 파견했다. 낭트 주민들은 브르타뉴인들이 낭트를 정복하면 위험에 처할 것을 우려해 르노에게 신속하게 개입해달라고 요청했다. 르노 백작은 푸아투에서 서둘러 달려온 뒤 도시 방어를 조직한 후, 군대를 이끌고 브르타뉴군을 무찌르러 출진했다.
르노는 메삭에서 에리스포에가 파견한 선봉대와 조우해 격파했다. 그들은 멀리서 행군하느라 탈진했기에, 승리감을 맛보며 블리앵에서 휴식을 취했다. 그 사이, 에리스포에와 랑베르 2세가 본대를 이끌고 나타나 경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적군을 843년 5월 24일에 공격해 살육했고, 르노는 전사했다. 낭트 주민들은 이후에도 랑베르 2세에게 복종하길 거부했지만, 6월 24일 바이킹을 끌어들인 랑베르 2세가 낭트를 함락한 뒤 철저히 약탈하고 낭트 대성당의 고하르 주교와 그곳에 피신한 주민들을 살해했다. 844년, 노미노에는 낭트의 주인이 된 랑베르 2세를 지원해 푸아투의 백작 베르나르 2세와 르노의 아들이자 에르보쥬 신임 백작인 에르베를 낭트 남쪽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시키는 데 일조했다. 샤를 2세가 아키텐에서 반란을 일으킨 귀족들을 진압하느라 바빠서 이에 응전하지 못하자, 노미노에는 공세를 이어가서 멘을 철저히 약탈하고 파괴했다.
845년, 샤를 2세는 아키텐의 왕을 칭한 피핀 2세와 화해하고 랑베르 2세를 낭트 백작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충성 서약을 받아냈다. 그 해 11월 샤를 2세가 3,000 가량의 병력을 이끌고 브르타뉴로 진군하자, 노미노에는 오스트 강과 아프 강의 합류 지점인 발롱 늪지대로 적군을 유인하기로 했다. 845년 11월 22일, 프랑크군은 적의 유인에 휘말려 발롱 늪지대에 들어섰다가 브르타뉴군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루아르 주에 있는 페리에르의 생피에르에트상파울 수도원장 루 드 페리에르(Loup de Ferrières, 805 ~ 862)가 그 해 11월 말에서 12월 초 사이에 보낸 편지에 따르면, 샤를 2세가 브르타뉴인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소문이 파다했고, 이로 인해 왕국 전체가 혼란에 휩싸였다고 한다.
실제로는 목숨을 건진 샤를 2세는 멘에서 군대를 재편성해 반격하려 했지만, 이내 여건이 좋지 않다는 걸 깨닫고 846년 여름에 에페르네에서 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2세는 그에게 "둑스(dux)"라는 공식 칭호를 부여하고, 그가 브르타뉴에 대한 자신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가로 조공을 바치는 걸 면제하게 해줬다. 또한 샤를 2세는 노미노에의 요구에 따라 랑베르 2세를 브르타뉴에서 좀더 멀리 떨어진 상스로 옮겼다.
생 베르탱 수도원에서 발간한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에 따르면, 노미노에는 844년과 847년에 바이킹과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하지만 그 내막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846년 12월, 노미노에는 샤를 2세가 지배하는 네우스트리아를 침공해 바이외 인근을 약탈했다. 이는 로타리우스 1세의 부추김에 따랐을 것으로 보인다. 8472년 2월, 로타리우스 1세와 샤를 2세, 루트비히 2세는 메르센에서 접견하면서, 노미노에와 아키텐 왕 피핀 2세에게 샤를 2세와의 전쟁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보내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노미노에와 피핀 2세는 샤를 2세를 계속 괴롭혔다. 849년 봄과 가을에 샤를 2세가 아키텐을 상대로 2차례 원정을 떠난 동안, 노미노에는 네우스트리아를 습격해 앙주를 철저히 약탈했다.
한편, 노미노에는 킹페르, 반, 돌 및 생폴드레옹에서 프랑크 왕국 출신 주교가 자리를 차지한 것에 불만을 품고, 848년 교황 레오 4세에게 랑동의 대수도원장인 콘워이온(Conwoïon)이 이끄는 사절단을 보내 이들 주교직을 브르타뉴인이 맡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교황은 브르타뉴인들을 환대했고, 콘워이온에게 일부 유물을 줬지만, 주교를 교체해달라는 요청은 즉답을 피하고, 단지 12명의 주교로 구성된 공의회를 개최하고 4개 주교들이 그 앞에 나타나서 심사받게 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공의회를 여는 자격이 있는 투르 대주교는 프랑크 왕국의 신하였기에, 노미노에가 원하는 공의회를 열어줄 리 없었다. 이에 노미노에는 무력으로 주교들을 축출하기로 마음먹었다. 849년 4월, 노미노에는 코에 루(Coët Louh)에 성직자와 평신도의 모임을 연 뒤 반의 수잔 주교, 킹페르의 펠릭스 주교, 돌의 살라콘 주교, 그리고 생폴드레옹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주교 등을 성직 매매 혐의를 적용해 폐위하고 브르타뉴 출신 주교로 대체하기로 결의했다. 한편, 아르투르 드 라 보더리가 인용한 낭트의 연대기에 따르면, 레오 4세는 노미노에가 공작으로서 황금 왕관을 쓸 권리를 인정했다고 한다.
샤를 2세는 랑베르 2세를 다시 낭트 백작으로 앉혀서 노미노에를 막게 했지만, 850년 랑베르 2세는 노미노에와 손잡고 멘을 함께 침공해 심각한 파괴를 자행했다. 그 해 8월, 샤를 2세는 렌으로 진군한 뒤 그곳과 낭트에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곳으로 떠난 직후, 노미노에와 랑베르 2세는 렌과 낭트의 수비대를 격파하고 두 도시를 점령했으며, 낭트의 새로운 백작 아말릭을 생포했다. 851년 3월 7일, 노미노에는 멘과 앙주를 휩쓴 뒤 방돔으로 진군해 약탈을 자행하려 했다가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 후 아들 에리스포에가 브르타뉴군 수장으로 추대되었고, 이후에도 랑베르 2세와 함께 공세를 이어갔다.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2세는 더 이상 이들을 좌시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형제이자 동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트비히 2세로부터 색슨족 파견대를 접수받은 뒤 4,000 ~ 6,000 가량의 병력을 일으켜 브르타뉴군을 쳐부수려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에리스포에는 랑베르 2세와 함께 브르타뉴로 회군한 뒤, 빌랭 강변의 쟁란트에서 진영을 세우고 적군이 오기를 기다렸다. 851년 8월 22일, 샤를 2세가 이끄는 프랑크군이 쟁란트에 도착했다. 이날 샤를 2세는 군대를 두 줄로 배치했다. 프랑크군은 후방에 배치되었고, 색슨 용병들은 전면에 배치되어 강인하기로 소문난 브르타뉴 기병대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에 에리스포에는 색슨 용병대를 향해 투창을 퍼부어서 프랑크 전선 뒤로 후퇴시키게 했다.
이후 브르타뉴 기병대는 프랑크군을 향해 투창을 퍼붓다가 적군의 대열이 흐트러졌을 때 돌격해 타격을 입히고, 반격하려 하면 후퇴하는 전술을 구사했고, 이에 참지 못한 프랑크인들이 대열을 이탈해 자기들을 추격하면 즉시 재집결한 뒤 이들을 포위섬멸했다. <앙굴렘 연대기>(Chronicon Aquitanicum)에 따르면, 브르타뉴 기병대는 앞뒤에서 투창을 능숙하게 다뤘다고 한다. 전투는 8월 23일까지 이틀간 이어졌고, 프랑크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브르타뉴군의 피해는 지극히 미미했다. 샤를 2세는 공포에 사로잡혀 8월 23일 밤에 군대 전체를 내버려두고 도주했다. 다음날 새벽에 왕이 사라졌다는 걸 깨닫게 된 프랑크군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브르타뉴군은 숙영지르 들어가서 보물과 무기를 탈취한 뒤 도주하는 적군을 추격해 가능한 한 많은 탈주병을 학살했다. 이날 투르 백작 비비앵, 궁정백 힐메라드 등 프랑크 측 고위인사들이 피살되었다.
이제 브르타뉴군을 상대로 승리할 가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한 샤를 2세는 앙제에서 에리스포에와 회담했다. <생베르탱 연대기>(Annales Bertiniani)는 이 회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노미노에의 아들 에리스포에는 앙제로 와서 샤를에게 왕족의 상징과 그의 아버지의 샘물을 섬물로 받았으며, 렌, 낭트 및 레츠를 수여받았다."
이때 체결된 앙제 협정에서, 샤를 2세는 에리스포에를 브르타뉴의 왕으로 인정하고 렌, 낭트 및 레츠가 브르타뉴의 땅이라는 데 다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 대가로, 에리스포에는 자신의 주교좌를 액타르 주교에게 돌려줬으며, 서프랑크 왕국을 더 이상 침략하지 않기로 했다.
853년, 낭트가 고드프리드가 이끄는 노르웨이계 바이킹들에게 약탈당했다. 이에 에리스포에는 덴마크 국왕 호리크 1세의 조카인 시그트리크와 연합하여 노르웨이군이 자리잡고 있던 그랑데 비세 섬을 공동으로 포위했다. 노르웨이인들은 곧 항복하고 승자에게 선물을 바쳤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은 시그트리크는 바다로 돌아가다가 르아브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임시로 상륙했다가 샤를 2세의 군대에게 피살되었다.
856년, 샤를 2세의 아들인 루이 2세와 에리스포에의 딸간의 약혼이 이뤄졌다. 샤를 2세는 이 결혼을 성사시켜서 브르타뉴인들과 더 이상 갈등을 벌이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는 에리스포에의 딸에게 파리에서 투르로 이어지는 르망 공국을 지참금으로 물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결혼이 성립되기 전인 857년 11월 12일, 에리스포에는 탈렉삭 교회 제단에서 사촌 살로몬을 포함한 브르타뉴 귀족들에게 피살당했다. 암살 이유는 명확히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서프랑크 왕국과의 결혼 동맹이 이뤄지면 더 많은 영토를 탈취하고 재물을 획득할 기회가 사라지게 된다고 여긴 브르타뉴 귀족들이 이를 막기 위해 암살을 감행했을 거라고 추정한다.
에리스포에를 살해하고 브르타뉴 국왕이 된 살로몬은 858년 네우스트리아 귀족들이 샤를 2세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는 걸 지원했지만, 그 해 9월 루트비히 2세가 샤를 2세를 대신해 브르타뉴로 진군하자, 루트비히 2세가 오를레앙에 머물 때 사절단을 보내 그와 협상을 벌인 끝에 평화를 맺기로 했다. 859년, 툴 인근의 사보니에르에서 열린 회담에서, 살로몬은 샤를 2세와 에리스포에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건을 확인헀다. 862년 아버지 샤를 2세에게 반기를 든 루이 2세를 돕기 위해 브르타뉴군을 빌려줬고, 바이킹을 고용해 오를레앙 , 앙주 , 투르 , 블루아의 백작인 로베르 1세의 영지를 습격하게 했다.
863년, 살로몬은 안트라메 수도원에서 샤를 2세와 평화 협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샤를 2세는 일명 '두 물 사이의 땅'으로 일컬어진 마옌강에서 사르트 강 사이의 영토에 대한 주권을 살로몬에게 양도하고, 살로몬은 샤를 2세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옛 관습”에 따라 공물을 납부하기로 했다. 하지만 살로몬은 이후에도 수년간 샤를 2세의 영지를 습격해 약탈을 자행했다. 866년, 살로몬은 바이킹 지도자 하슈타인과 동맹을 맺고 앙주, 멘, 투렌을 잇달아 약탈했다. 르베르 1세는 이들을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모았고, 푸아투 지역의 라눌프와 멘의 고드프리트와 에르베가 합세했다.
프랑크 군은 루아르 강에 있는 함대로 이동하던 중 르망을 약탈하던 덴마크-브르타뉴 연합군을 요격했다. 이어진 브리사르 전투에서 거의 모든 브르타뉴 사람과 대부분의 바이킹이 죽었고 나머지는 근처 석조 교회로 피신했다. 프랑크군은 교회를 포위한 뒤 다음날 공성병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날 저녁, 바이킹들이 휴식을 취하던 프랑크군을 급습했다. 로베르는 갑옷을 벗은 채 반격에 착수했고, 프랑크군은 공격을 격퇴했다. 그러나 로베르는 바이킹 한 명이 교회 창문에서 날린 화살에 맞아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그는 종들에 의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뒤 사흘 뒤 사망했다. 고드프리트와 에르베도 전투 중 중상을 입고 사망했고, 프랑크군은 모든 지휘관이 죽자 후퇴했다. 살아남은 바이킹들은 곧바로 배에 승선해 고향으로 돌아갔다. 867년 8월 25일, 살로몬은 샤를 2세와 콩피에뉴 조약을 체결했다. 샤를 2세는 그에게 코탕탱 반도, 아브랑챙(Avranchin) 및 채널 제도의 소유권을 양도했다. 868년, 샤를 2세는 공식적으로 살로몬을 왕으로 인정했다.
한편, 살로몬은 성당과 수도원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빌랭의 막생 수도원. 플래샤텔의 생소뵈르 수도원, 게랑드의 아우뱅 수도원, 르동, 생멘르그랑, 플랑르그랑의 여러 수도원들에 막대한 기부금을 헌납했다. 또한 교황청의 권고에 따라 848년 노미노에에 의해 선임된 대부분의 브르타뉴 출신 주교들을 원래의 프랑크 주교들로 교체했다. 살로몬은 그 대가로 돌 주교구를 대주교구로 승격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이를 통해 투르 대주교구로부터 브르타뉴의 종교적 독립을 얻으려 했다. 교황청은 이에 대해 속시원한 회답을 하지 않았지만, 돌 주교구가 브르타뉴에서 사실상 대주교구로 군림하는 걸 내버려뒀다.[2]
재위 말기, 살로몬은 브르타뉴에서 사실상 무한한 권력을 누력고, 자신을 "브르타뉴 전체의 왕이자 갈리아의 주목받는 공"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에리스포에를 살해한 것에 깊은 죄책감을 품은 그는 퇴위하고 수도원에 은둔하려 했다. 그러던 874년 6월 25일, 그가 라 마르티르 수도원에서 기도드리고 있을 때, 그의 사위이자 반 백작 파스베텐, 에리스포에의 사위이자 렌 백작 구르완트, 그리고 살로몬의 조카인 리발롱이 급습했다. 당대 기록에 따르면, 그는 눈이 뽑힌 채 방치되었고, 그날 밤에 사망했다고 한다. 그의 어린 아들 기곤 역시 이날 살해되었다. 암살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현대의 일부 학자들은 브르타뉴 귀족들이 그의 강력한 권세로 인해 권력이 제약된 것에 반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추정하며, 또다른 학자들은 파스베텐, 구르완트 등이 살로몬의 어린 아들 기곤이 왕위를 세습하는 걸 막고 자기들이 왕위에 오르기 위해 정변을 일으켰으리라 추정한다.
살로몬 사후, 반 백작 파스베텐과 렌 백작 구르완트는 브르타뉴의 단독 군주가 되기 위해 격돌했다. 875년, 두 군주는 렌 인근에서 조우했다. 파스베텐은 바이킹 용병대의 지원을 받았지만, 명백한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이후 구르완트가 병에 걸리자, 파스베텐은 876년 재차 공격했다. 구르완트는 또다시 격퇴했지만 곧 사망했다. 파스베텐 역시 876년 6월에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파스베텐의 동생인 알란 1세와 구르완트의 아들 주디카엘이 브르타뉴 왕위를 놓고 대결을 이어갔다. 그러다가 888년 바이킹이 생로를 점령하고 파괴한 뒤 반 일대를 황폐화 한 후 둘로 나뉘어서 한 부대는 낭트로 향하고 다른 하나는 렌으로 향하자, 두 사람은 동맹을 맺고 바이킹에 맞서 싸우기로 했다.
주디카엘과 알란 1세는 군대를 결집한 뒤 두 바이킹 부대를 하나씩 격퇴하기로 했다. 주디카엘이 선봉대를 공격하고, 알란 1세는 후방의 바이킹을 공격하기로 했다. 그런데 주디카엘은 알란 1세와 합세하기 전에 블라베 강둑에서 바이킹과 조우했고, 합의와는 달리 독자적으로 적을 공격했다. 브르타뉴인들은 바이킹에게 큰 손실을 입히고 후퇴하도록 강요했지만, 주디카엘 본인은 적을 추격하던 중 한 바이킹의 역습을 받고 전사했다. 이에 전의를 상실한 주디카엘의 부대는 전의를 재정비한 바이킹에게 격파되었다. 얼마 후 퀴스템베르에 도착한 알란 1세는 주디카엘의 잔여 병력과 합세한 뒤 바이킹을 역공해 격전 끝에 격파하고 바이킹 대부분을 살육했다.[3]
이제 경쟁자가 없게 된 알란 2세는 군대의 추대를 받고 왕위에 올랐다. 역사 기록에서 그가 브르타뉴 왕으로 거론된 최초의 기록은 890년 앙제의 성 세르지오 수도원을 왕의 권한으로 앙제의 라이논 주교에게 양도한다는 헌장이다. 그는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2세와 협의해 그의 봉신이 되는 대가로 왕을 칭하는 걸 인정받았다. 브르타뉴는 890년 이후 알란 1세가 사망할 때까지 평화와 번영을 누렸으며, 경제는 점차 회복되었다. 이 시기에 낭트 주교 푸셰는 도시의 일부를 성벽으로 둘러싸고 대성당을 복원했다.
907년, 알란 2세가 사망했다. 이후 알렌 1세의 아들이자 반 백작인 루달, 코르누아이유 백작 구르마엘롱, 포허 백작 마튜에도이가 브르타뉴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그 결과 구르마엘롱이 권력을 장악했지만, 브르타뉴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다. 911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인 샤를 3세는 노르만 지도자 롤로가 센 강 하류 지역을 소유할 권리를 인정했다. 이 지역은 곧 노르망디로 알려진다. 이후 노르만족은 브르타뉴에 대한 공세를 벌였다. 913년경 구르마엘롱과 루달은 노르만족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되며, 노르만인들은 브르타뉴 대부분을 장악했다. 한편 마튜에도이는 919년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 왕국으로 망명해 애설스탠 왕의 보호를 받았다.
919년, 노르웨이에서 몰려온 바이킹 무리의 지도자 라게놀드가 루아르 강 유역을 습격한 뒤 낭트 백국을 장악했다. 당시 낭트는 앙주 백작과 낭트 백작을 칭한 풀크 1세가 다스렸으나, 그는 낭트가 공략당할 때 감히 바이킹을 물리칠 엄두를 못 내고 가만히 있었다. 921년 파리 백작 로베르 1세가 군대를 일으켜 낭트를 포위해 5개월간 공성전을 벌인 끝에, 라게놀드로부터 인질을 넘겨받고 기독교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는 대신 낭트를 지배하는 걸 허용하기로 했다. 이후 라게놀드는 낭트와 그 주변 지역의 공작이 되었는데, 당대 일대기에는 '남스보르크 공국'(Namsborg)으로 일컬었다.
922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샤를 3세를 전복하는 데 관여했으며, 923년 롤로와 함께 우아즈 강 유역을 휩쓸며 각지를 약탈했다. 새로운 서프랑크 국왕 라울은 롤로와 협상한 끝에, 롤로가 루앙 외에도 에모아, 베생 등지를 소유하는 걸 허용하는 대가로 평화 협약을 맺었다. 그러자 라게놀드는 자기도 영지를 받기 위해 공세를 이어가 루아르 강과 센 강 사이의 영지를 파괴했다.이에 아키텐 공작 기욤 2세, 파리 백작 겸 오를레앙 백작이며 네우스트리아 총독 위그가 연합군을 결성해 그를 저지하려 들었고, 라게놀드는 일단 브르타뉴로 철수했다.
923년, 라게놀드는 부르고뉴로 침입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에 상스의 가르니에 백작, 디종 백작 마나세 2세, 랑 그르의 조슬랭 주교, 트루아의 앙세기즈 주교가 연합군을 결성한 뒤 924년 12월 6일 칼라우스 몽스[4]에서 라게놀드에게 심각한 패배를 안겼다. 927년, 라울 왕은 롤로의 뒤를 이은 기욤 1세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낭트를 상대로 네우스트리아 총독 위그, 베르만두아 백작 에르베르트 2세와 함께 공세를 벌였다. 라게놀드는 5주간 포위된 끝에 주권을 인정받는 대가로 서프랑크 왕국의 봉신이 되는 걸 받아들였다. <성 베네딕토의 기적>(Miracles de St Benoit)에 따르면, 라게놀드는 루아르의 성 베네딕토 수도원을 약탈하려 했다가 성인으로부터 수도원을 당장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두려움을 느껴 떠난 뒤 곧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질병에 걸려서 930년경에 낭트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인다. 인콘이 뒤를 이어 그가 세운 바이킹 공국의 수장이 되었다.
931년, 생 미셸 축일 축제가 한창일 때 마튜에도이의 아들 알란 2세의 선동을 받은 브르타뉴인들이 봉기해 브르타뉴 방면 바이킹 지도자 펠레칸을 비롯한 다수의 바이킹이 살해되었다. 이에 노르망디 공작 기욤 1세는 인콘을 지원해 브르타뉴 반군을 물리치고 반란을 주도한 알란 2세를 축출했다. 933년, 노르망디 공작 기욤 1세는 서프랑크 국왕 라울에게 '해변에 위치한 브르타뉴인의 땅'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이 땅은 66년 전 샤를 2세가 브르타뉴 전임 국왕인 살로몬에게 하사한 코탕탱 반도와 아브란친이었다. 935년, 낭트에서 출격한 바이킹들은 베리를 약탈하다가 주민들에게 역공당하면서 큰 피해를 입고 패퇴했다.
935년, 랑드베네크의 수도원장이었다가 바이킹을 피해 해외로 달아났던 장은 브르타뉴로 돌아온 뒤 접근하기 어려운 해안 바위에 피난했던 주민들을 끌어모은 후, 크로종의 지역 족장인 아말고드(Amalgod)와 웨데노크(Wethenoc)의 지휘 아래 바이킹에 저항하도록 했다. 그 후 그는 잉글랜드로 가서 알란 2세에게 상황을 알린 뒤, 그에게 충성을 바칠 테니 브르타뉴를 바이킹의 압제에서 구원해달라고 호소했다. 그는 이를 받아들이기로 하고, 잉글랜드 국왕 애설스탠으로부터 지원받은 뒤 936년 돌(Dol)에 상륙했다. 이후 생브리외 만으로 진군하며 브르타뉴인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 후 바이킹과 격전을 이어간 끝에 937년 낭트를 탈환했고, 938년 서프랑크 왕국의 국왕 루이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한 뒤 "Brittonum dux(브르타뉴 공작)"의 칭호를 수여받았다. 이후 브르타뉴 군주들은 서프랑크 왕국과 프랑스 왕국의 봉신인 '브르타뉴 공작'으로 군림했다.
3.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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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르타뉴 반란군 지도자
- 모르반(? ~ 818): 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1세에 맞서 항거한 브르타뉴 지도자.
- 위마르크(822 ~ 825): 프랑크 왕국의 루도비쿠스 1세에 맞서 항거한 브르타뉴 지도자.
- 노미노에(845 ~ 851): 생전에 브르타뉴 공작 칭호만 받았지만, 당대 및 후대인 모두로부터 브르타뉴 왕국의 실질적인 건국자로 간주되었다.
- 에리스포에(851 ~ 857): 프랑크 국왕으로부터 브르타뉴 국왕으로 인정받은 최초의 군주. 살로몬에게 암살당했다.
- 살로몬(857 ~ 874): 영토를 대거 확장하는 등 브르타뉴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말년에 암살당했다.
- 브르타뉴 왕위 계승 분쟁(874 ~ 876)
- 파스베텐(874 ~ 876): 851년부터 반(Vannes) 백작 역임. 브르타뉴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 구르완트(874 ~ 876): 브르타뉴 북부[5]의 백작 역임. 브르타뉴 왕위를 놓고 경쟁했다.
- 알란 1세(877 ~ 888): 반 백작. 파스베텐의 뒤를 이어 주디카엘과 대적했다.
- 주디카엘(876 ~ 888): 브르타뉴 북부 백작. 구르완트의 뒤를 이어 알란 1세와 대적했다.
- 알란 1세(890 ~ 907): 주디카엘 사후인 890년부터 브르타뉴 국왕을 칭했다.
- 구르마엘롱(908 ~ 913): 코르누아이유 백작. 알란 1세의 사위인 포허 백작 마튜에도이와 알란 1세의 아들인 반 백작 루달을 상대로 각축전을 벌인 끝에 908년부터 브르타뉴의 명목상 국왕이 되었지만, 브르타뉴를 통합하는 데 실패했으며, 바이킹의 공세에 직면했다.
- 바이킹의 지배기(913 ~ 937)
- 알란 2세(936 ~ 938): 936년부터 브르타뉴 국왕을 칭하고 바이킹을 수년간 몰아붙인 끝에 축출했다. 938년 프랑스 왕국의 국왕 루이 4세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이 되었다.
[1]
아키텐에서
영국 해협에 이르는 프랑스 북부 지역.
[2]
119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가 투르 대주교가 브르타뉴 주교단을 통제한다고 확정지으면서, 이 논쟁이 종식되었다.
[3]
1907년, 브르타뉴 지역 연합은 퀴스템베르 마을에 5m 길이의 비석을 세워 승리를 기념했다.
[4]
밀리 라 포레와 바르비종노트 사이에 있는 샬몽일 것으로 추정된다.
[5]
전승에 따르면
렌 백작이었다고 하지만, 이를 입증할 역사 기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