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르타뉴 공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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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FFFF><colcolor=#000000> 브르타뉴 공작 호엘 3세 Hoël 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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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호엘 3세(Hoël III) | |
출생 | 미상 | |
브르타뉴 공국 | ||
사망 | 1158년 이후 (향년 불명) | |
미상 | ||
재위 |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 | |
1148년 ~ 1156년 | ||
아버지 | 코난 3세 | |
어머니 | 잉글랜드의 마틸다 | |
형제 | 베르테, 콩스탕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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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브르타뉴 공국의 공작.2. 생애
출생년도와 출생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브르타뉴 공작 코난 3세이고, 어머니는 잉글랜드 국왕 헨리 1세의 사생아인 마틸다이다. 누이로 베르테, 콩스탕스가 있었다. 15세기 프랑스의 브르타뉴 성직자이자 역사가 피에르 르 보드(Pierre Le Baud, 1458 ~ 1505)에 따르면, 코난 3세는 1148년 9월 17일에 사망하기 전에 모든 사람이 자신의 합법적인 아들로 여겼던 호엘 3세를 사생아일 수도 있다는 이유로 작위와 영지 승계를 거부하고, 딸 베르테를 브르타뉴 여공작으로 세웠으며, 베르테와 첫 남편인 리치먼드 백작 알란 르 루의 자식인 코난 4세를 유일한 상속인으로 지명한 뒤 숨을 거두었다.호엘 3세는 아버지의 유언에 불복해 낭트에서 브르타뉴 공작으로 취임했고, 1149년 생폴 드 레옹 주교와 1152년 캉페르 주교로부터 공작으로 인정받았다. <브르타뉴 연대기>에 따르면, 그는 결국 코난 4세의 섭정이며 베르테의 두번째 남편인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에게 굴복해 브르타뉴 공작에서 사임했다고 한다. 하지만 1153년부터 다시 공작을 칭하고 브르타뉴 공작으로서 헌장을 발표했다.
1154년 코난 4세가 성년이 된 자기에게 권력을 돌려주지 않는 포허 자작 에우돈 2세에게 반기를 들었다. 그는 호엘 3세와 손잡고 에우돈 2세와 전쟁을 벌였지만 패배해 리치먼드 백국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이내 세력을 재정비해 브르타뉴로 돌아와서 1154년 12월 16일 레제 인근에서 에우돈 2세를 물리치고 브르타뉴 외곽으로 쫓아냈다. 1156년, 호엘 3세는 낭트 사람들에 의해 추방되었고, 낭트 시민들은 앙주와 멘 백작인 앙리 2세의 남동생인 조프루아 6세를 낭트 백작으로 추대했다. 이후의 행적은 전해지지 않았다.
17세기 프랑스 역사가이가 계보학자 피에르 드 기부르(Pierre de Guibours, 1625 ~ 1694)에 따르면, 호엘 3세에게는 딸이 딱 한 명 있었는데, 이름의 이니셜인 "O."만 알려졌다. 그는 이 딸을 1149년 8월 13일에 교회에 보냈다. 그녀는 나중에 노트르담 뒤 니도메를 수도원의 수녀로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