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 서유럽의 자치 조직
( 프랑스어) | Commune |
( 이탈리아어) | Comune |
( 한국어) | 코뮌; 코무네 |
고 중세( 11세기~ 12세기)부터 나타난 주민들의 자치 공동체. 11세기부터 이탈리아 북부에서부터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12세기부터는 독일 북부, 플랑드르, 프랑스, 이베리아 반도 등에도 도시가 발달하며 속속 들어서기 시작한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이미 당대에도 세간의 주목을 받았고, 흔히 '코뮌 운동'으로 불리고는 했다. 코뮌 하 도시는 주민의 자치적 의회(시참사회 또는 시의회)를 조직하고 재판관과 집정관을 선출해서 자치적인 행정을 행했다.
이런 중세 자치도시의 발달은 지역별로 다르게 나타났는데, 북이탈리아는 주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도시 하나가 곧 자치적인 국가로 발달하는 형태를 보였다. 자치성이 강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명목상으로는 신성 로마 제국의 영토였는데도 황제의 지배에 저항하는 반항적인 신민들이 되었다. 특히 11세기 이래로 시작된 신롬 황제와 교황의 대립은 주교구를 중심으로 하는 북이탈리아 도시들의 특성상 매우 뜨거운 떡밥이 되었고, 각 도시들이 구엘프(교황)와 기벨린(황제)으로 당파가 나뉘어 대립하게 만드는 결과를 만들었다. 신롬 황제도 북이탈리아에서 지배권을 안정시키고 싶어했지만, 황제들이 이탈리아로 원정만 나가면 독일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거의 모든 황제들의 노력에 악재가 겹쳐서 14세기 무렵부터는 황제들도 그냥 이탈리아를 방치하게 된다.
반면 독일 내 도시들은 쾰른처럼 주교도시가 많았는데, 이곳 도시민은 유력 영역제후나 교황파 주교후에 맞서 황제를 지지하면서 특허장을 얻으려는 움직임이 나타났으며, 주교들과의 대립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던 것은 다름아닌 주교의 가신인 가인(ministerialis/미니스테리알레)들이었다. 이들은 도시에 주재하면서 사법이나 행정업무를 담당하였으므로 상공인이나 노동자로서 거주하던 일반 도시민과 생활공동체를 공유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근원이 장원의 해방농노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있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기존 도시영주, 특히 교회와 마찰을 빚었으나, 도시 자체가 상업 발전과 제국 동역의 장악이라는 관점에서는 큰 도움이 되었기에, 황제나 제후의 지원 하에 보헤미아 등 슬라브인 지역에 대한 정복과 장악의 일환으로 도시가 적극 조성되었으며, 이주 동기를 마련하고자 여러 특권을 인정하면서 자연스럽게 코뮌과 도시법이 확산되었다.
프랑스는 지방별로 자유도시의 유형이 다르게 나타났는데, 특히 북부에 제일 먼저 코뮌 도시(ville de commune)가 나타났다. 이들 코뮌 도시도 도시영주인 주교들과 대립이나 타협으로써 자치권을 획득해나갔고, 종종 지방 유력 영주나 교회에 맞서 국왕과 제휴하고는 하였다.[1] 특히 플란데런의 도시들은 도시 간 연대에 적극적이어서 지역 백작의 공위 발생 시 후임 백작 임명을 놓고서 국왕이나 유력 제후에 맞서고 주장을 관철할만한 수준으로까지 성장하였다.[2]
스페인에선 레콩키스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무어인들에게서 정복한 도시 인구와 세수를 늘리고 전쟁터였던 지방을 재개발하기 위해 유민들을 이끌어 모으는 과정에서 스페인어로는 Fuero라 하는 도시 자치권이 제도화되면서 특히 나바스 데 톨로사 전투 이후 카스티야, 아라곤 양 왕국이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리잡았다. 이쪽의 경우 국체의 기원 자체가 변경지대 종교전쟁이다 보니 정복지 흡수, 재정착, 호구 조사 밑 행정력 확대 과정에서 아예 봉건/성직 귀족 장원의 마을들 제외하곤 작은 시골마을부터 중세 카스티야 최대의 시장터였던 메디나 델 캄포 같은 대도시까지 모두 일괄적으로 카스티야 삼부회 (cortes generales)에서 투표권이 있는 자치 주도 도시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이러다보니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비슷하게 도시 자치정부, 인근 봉건/성직 영주, 영주 산하 봉건 농민, 자치도시 산하 마을 농민 같은 각종 이해집단들이 지속적으로 충돌하면서 이를 찍어 누를 힘은 애초에 없으니[3] 강력한 중앙 행정 권력보단 대신 각종 이해집단간 중재자로서 권위를 쌓는 스페인 특유의 정치구조가 발생하게 된다.
레콘키스타가 끝나고 신대륙 발견, 각종 유럽 대륙 패권 경쟁에 끼어드는 거시적 변화가 생기면서 이베리아 도시들의 자치권과 입지도 크게 위협받게 되는데 이런 중세 자치도시들과 성장하는 왕실권력, 그리고 그 사이에 낀 군사적 실세였던 봉건 귀족들간 관계 조율 실패는 결국 1520년 압스부르고 왕조가 들어온지 얼마 안되 스페인 밖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선거를 비롯한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적 사업에 카스티야 시민들의 세금 징발 문제가 기폭제가 되면서 코뮤네로 운동이란 초대형 반란으로 이어졌다. 한때는 삼부회 투표도시 18곳 중 무려 14곳이 일시적으로나마 혁명정부에 동참할만큼 크게 불타올랐던 코뮤네로 운동은 단순한 왕실의 실정 시정 요구를 넘어 농민 해방 등 급진적인 요구를 내세우며 처음엔 왕실과 혁명 도시민들 사이 저울질하고 있었던 전통 봉건 군사 귀족들을 상대편에 몰아 넣으며 결국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자치도시들의 대규모 연대 반란을 진압한 이후 합스부르크 왕실은 한창 개신교의 위협에 맞서 대응 카톨릭 개혁을 추진하던 교회를 파트너로 삼아 점차적으로 강력한 왕권을 구축했으나, 여전히 경제적으로나 사회정치적으로나 코뮤네로 운동이 진압된 이후로도 강력한 세력을 자랑했던 자치도시들과는 어느정도 타협을 봤어야했다. 따라서 스페인 제국 시절 강력한 절대 왕정이 성장한것과 별개로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바르셀로나 백작령, 세비야 왕국 같은 각종 중세적 정치체들과 더불어 스페인의 도시들도 자치 공화국 코뮌으로 성격을 유지하다가 결국 18세기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란 한바탕 대격변을 한번 더 겪고 또 새로 들어온 보르본 왕조가 전례없는 중앙집권화 드라이브를 걸면서야 해체되었다. 이런 스페인 지방 자치단체들의 역사적 배경을 반영하여 현대 들어와 프랑코 독재정권 이후 스페인이 민주화되면서 지방자치제도를 재정비하는 과정에서 나라에서 가장 큰 광역 자치 행정구역을'자치 코뮌 (Comunidad Autónoma)'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러한 자치조직 코뮌은 고대 로마 시대부터 이어왔던 도시 자치 공동체, 공화제가 서유럽 내에서 명목이 끊기지 않고 발전하게 되는 근간이 되었다.[4][5] 또한, 이렇게 확산되는 도시 단위 자치 전통은 후대 프랑스 행정구역체계의 유래가 되었고, 도시민 전체가 참여하는 공동체라는 측면에서는 혁명기 프랑스의 공화주의나 아래 항목에서 언급되는 사회주의 정치제, 공산주의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2. 공동체
민주적, 자율적, 자치적으로 운영하는 정치적 공동체를 의미하며, 사회주의, 아나키즘, 생태주의의 궁극적 목표이다. 대표적으로 파리 코뮌이라고 할 때의 그 코뮌이다. 그 어원 및 유래는 1번 항목으로, 조금 옛날 사회과학 서적에서는 '코뮨'이라고 표기한 경우도 많았다.근본적으로 직접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현대의 산업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적용이 곤란하다. 물론 코뮌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그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사회 구조 자체를 뿌리부터 새롭게 정립하려고 한다.
넓은 의미에서 민주주의의 하나이지만, 일반적인 대의민주주의, 의회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와는 이론적 궤가 다르다. 인민민주주의에서 말하는 것도 코뮌이지만, 코뮌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인민민주주의의 전통적 이론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어서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대체로 좌파들이 선호하는 개념이지만, 우파들 중에서도 이러한 개념을 선호하는 경향들이 없지는 않다.[6] 제도권 이론에서도 경제적으로는 협동조합, 행정적으로는 거버넌스 등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실제 역사에선 중세말/근세엔 스페인의 코뮤네로 운동, 근대 프랑스에선 파리 코뮌이 있고, 2020년 미국의 캐피톨 힐 자치구역도 언론 등에선 '코뮌'으로 불리기도 하는 등 전반적으로 주로 좌파적 의제를 두고 특정 도시 공동체가 정치적 봉기나 혁명 상황에 들어가면 '코뮌'이란 표현을 종종 쓰는 편이다.
FARC의 현 명칭이기도 하다.
3. 행정구역 단위
프랑스의 행정구역 단위 중 최소 행정단위로 프랑스 혁명 당시 행정구역 개편으로 설치되었다. 코뮌의 장을 메르(maire)[7]라고 하며 한국에서는 편의상 시장이라고 번역한다. 이후로 프랑스의 기본적인 행정구역 단위가 되었는데 근대에 지정된 코뮌 구획이 크게 변하지 않은 덕택에 프랑스 본토에만 3만 6천여개의 코뮌이 존재하며 인구수로 보았을때 보통은 한국의 읍면동 정도에 해당하는 단위이기는 하나 파리나 리옹, 마르세유처럼 인구수가 많은 코뮌이라고 해도, 상위 행정구역으로 승격하는것도 아니기 때문에[8] 한국으로 친다면 어느 행정구역에 놓을지는 애매하다.[9] 그렇지만 사람이 아예 살고있지 않은 코뮌이 아니라면 시장이나 시의원은 뽑을수있고 자치권한도 엄연히 가지고 있다.대다수 시골지역의 코뮌의 경우에는 인구수가 수백명 이하인 경우가 많아 사실상 한국의 리나 마찬가지인 경우가 많고, 아예 사람이 살지 않거나 1명만 살고 있는 코뮌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과도하게 예산이 낭비되고[10] 인구수의 차이가 너무 심해서 적절한 행정서비스를 제공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코뮌을 통폐합하는 식으로 행정구역을 개편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지만 현재까지도 큰 틀에서 개편은 일어나지 않고는 있다.
행정구역상으로 시(Ville)라는 이름을 가진 행정구역은 파리가 유일하지만, 법적인 명칭이 시가 아니더라도 인구가 어느정도 되는 코뮌은 시라고 부른다.
Insee의 정의에 의하면 인구 2,000명 이하 코뮌: 시골(village) / 2,000명~5,000명 코뮌: 부락(bourg) / 5,000명~20,000명 코뮌: 소도시(petite ville) / 20,000명~50,000명 코뮌: 중도시(ville moyenne) / 50,000명~200,000명 코뮌: 대도시(grande ville)라고 한다.
벨기에, 룩셈부르크, 앙골라, 베냉, 칠레, 스위스의 행정구역이기도 하며 이탈리아와 몰도바, 루마니아에서는 같은 어원을 가진 단어인 코무네(comune)라고 한다. 다만 나라별로 차이가 있어서 스위스, 룩셈부르크, 이탈리아에서는 최하위 자치 행정구역이라는 점과 인구수에 관계없이 코뮌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묶이는 점은 동일하며 면적 또한 작다는 점에서 프랑스의 코뮌과 동일하다. 하지만 앙골라와 칠레는 코뮌의 규모가 비교적 넓찍한 편이고 베냉은 중간급 행정구역이다. 스페인 또한 카탈루냐, 마드리드, 안달루시아 등 최대 단위의 행정구역을 '자치코뮌 (Comunidad Autónoma)'라고 부른다.
베트남의 행정구역 사[11]나 중국의 인민공사를 코뮌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4. 영화
La Commune (Paris 1871)
피터 왓킨스의 2000년작 재현 다큐멘터리. 피터 왓킨스는 1965년 페이크 다큐 워게임을 만든 감독이다. 제목 그대로 파리 코뮌을 소재로 하는 5시간 46분짜리 특대형 다큐멘터리다. 영화 스타일이 좀 특이한데, 재현 다큐멘터리가 일반적으로 리인액트 처럼 그대로 고증에 맞게 재현하는 타입이라면, 이 다큐는 1871년에 베르사유 TV 방송국 기자[12]가 코뮌에 참여한 200명 이상의 사람들을 취재하는 스타일로 되어 있다.[13]
코뮌의 참여한 사람들의 심정이나 행동들을 인터뷰를 통해 보여주며 물론 역사적 사건도 진행해야 되기 때문에 영화 후반에 이르면 떼죽음 엔딩을 향해간다. 인터뷰로 끌어가는 스타일상 현시대의 매스미디어 비판으로도 읽기도 한다.
워낙 긴 상영 시간 때문에 광매체 발매는 저조한 편. 그래도 축약본은 DCP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
대표적으로
부빈 전투 당시 프랑스 국왕
필리프 2세 하에서 종군하였던 '민병'들이 유명하다. 후대에 프랑스가
공화국이 되었을 때, 이 코뮌의 군대와 시민군 간 연관성에 주목하여 재발굴과 선전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2]
12세기 초 백작인 '선량한 카럴'(Charles I the good)이 자식 없이 봉신 가문인 에렘발드(Erembald)에 살해당하자, 프랑스 국왕 등의 지지 하 먼 친족인
노르망디 가문 구성원이자 정복왕 윌리엄 1세의 장손인 윌리엄 클리토(William I Clito)가 백작위를 계승하였는데, 막상 플란데런 사람들은 알자스 가문의 티에리(Thierry)를 지지하였다. 플란데런의 여러 도시는 에렘발드에 대한 진압과 체포를 주도하였으며, 일단 클리토의 계승을 인정하는 순간에도 집단행동으로써, 즉 코뮌을 결성하여 클리토의 권한 행사에 제약을 가하였다. 그러나 얼마 못가 이행이 불만족스럽다고 여긴 도시들이 상호 협의와 공조 하 봉기하였고, 클리토는 겨우 1년 남짓 통치하다가 반란 진압 중 입은 부상의 악화로 죽고 말았다. 차기 백작위는 플란데런 도시의 의도대로 알자스 가문에게로 넘어갔다.
[3]
아라곤의 왕들은 기본적으로 먼 옛날 샤를마뉴 시절 프랑크 왕국의 최남단 히스파니아 변경백 지방 영주 따까리에서 시작했고, 카스티야는 이보다 더 일천한 그냥 이슬람 세력에게 정복당하지 않은 북부 아스투리아스 기독교 귀족들 중 지도자 대충 옹립한걸로 왕사가 시작했다. 기원이 이리 한미했던 만큼 중세 이베리아 반도에선 오히려 그나마 작지만 통제가 확실하게 되는 자국 내에선 권위를 비교적 일찍 확립한 포르투갈이 왕권이 그나마 강했고 카스티야, 아라곤 양쪽은 카톨릭 공동왕 시절이 돼서야 비교적 강력한 왕실 권력이 기지개를 펴게된다
[4]
실제로
교황이 거처하던
로마에서 발생한 코뮌 운동의 주도자들은
고대 로마의 오랜 전통, 즉
원로원과 도시자치를 발굴하여 명분으로 삼기도 하였다.
[5]
이 문장을 왜
서유럽 내로 한정하느냐면, 망해버린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멀쩡하게 건재하였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통념(특히 교과서적 설명)과는 달리
시민주권
이념과 공화주의적 법제를 유지하였기 때문이다.
[6]
특히 미국 같이 애초에 근대 이전부터 내려온 국교회, 왕실, 귀족단 같은 전근대적 보수세력이 아예 없거나, 그 나라의 근현대사에서 아예 소멸해버려서 보수우익도 어쨋든 공화정 정치체 자체는 받아들이는 나라에선 우익
공화주의자들 또한 프랑스 혁명을 비롯하여 민중의 정치적 자발성 자체는 긍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7]
영어로는 mayor.
[8]
다만 인구수가 많다는 점은 감안하여
자치구는 설치할수있다.
[9]
거주 인구가 1,000명 이상이든 이하든 별도의 명칭 없이 코뮌으로 분류되기 때문이다. 1,000명 이상 코뮌의 선거제도는 1,000명 이하 코뮌과 조금 다르다.
[10]
시장이 3만 6천여명에 코뮌의원수가 20만에 육박하는 상황이니 이런 의견이 나오는것이 이상한일이 아니기는 하다.
[11]
한국으로 치면 면에 대응된다.
[12]
물론 TV가 실제로 발명된건 1920년대이고, 프랑스에서 TV방송이 시작된건 1935년의 일(
TF1)이다. 이 부분은 그냥 감독의 의도로 넘어가자.
[13]
그와 동시에 참가한 배우들이 중간중간 상황을 연기하다가도 인터뷰 형식을 통해 배우 본인의 생각을 말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