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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balt II.a Nafarroakoa | ||
가문 | 블루아 가문(샨파냐 왕조) | |
생몰년도 | 1238년 또는 1239년 ~ 1270년 12월 4일 | |
출생지 | 미상 | |
사망지 | 시칠리아 왕국 트라파니 | |
재위 기간 |
샹파뉴 백작 | 1253년 - 1270년 |
나바라 왕국의 국왕 | 1253년 - 1270년 | |
아버지 | 티발트 1세 | |
어머니 | 부르봉의 마르그리트 | |
친형제 | 엘레오노르, 페드로, 마르그리트, 베아트리체, 헨리케 1세 | |
이복 형제 | 블랑슈, 아그네스, 마르케사 길 데라다 | |
배우자 | 프랑스의 이자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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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19대 국왕.2. 생애
1238년 또는 1239년에 나바라 왕국의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인 티발트 1세와 부르봉 백작 아르캄보 8세의 딸인 마르그리트의 아들로 출생했다. 친형제로 엘레오노르, 페드로, 마르그리트, 베아트리체, 헨리케 1세가 있었고, 이복 형제로 블랑슈, 아그네스, 마르케사 길 데라다가 있었다. 1253년 아버지가 사망한 뒤 나바라 국왕이자 샹파뉴 백작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당시 나이가 14세 또는 15세로, 21세부터 통치가 가능하다고 규정한 나바라 법률 때문에 어머니의 섭정을 받아야 했다. 여기에 12명의 배심원으로 구성된 귀족 위원회의 자문을 반드시 받아야 정책을 집행할 수 있었다.설상가상으로, 나바라 왕국은 인근에서 영역을 빠르게 확장하고 있는 아라곤 왕국과 카스티야 왕국의 위협에 직면했다. 1254년 3월,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자신이 나바라의 국왕이라고 주장하며 에브로 강을 따라 군대를 집결시켜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로 쳐들어갈 준비에 착수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응하여 투델라 성 인근에서 군대를 사열시켰다.
그러다 1254년 4월 5일 하이메 1세와 티발트 2세가 에브로 강변에서 대면하여 대화를 나눈 뒤 양국간의 긴장이 완화되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국왕으로 인정받는 대신 하이메 1세를 주권자로 섬기며, 아라곤 왕국이 전쟁을 벌일 때 병력을 반드시 보내주겠다고 약속했다. 이후 두 왕은 카스티야의 알폰소 10세와 다시 만나 화해했고, 알폰소 10세는 하이메 1세를 나바라 왕국의 보호자로 인정했다.
1255년 4월 6일, 티발트 2세는 멜륀에서 프랑스 국왕 루이 9세의 딸 이자벨과 결혼했다. 그리고 이복 누이 블랑슈의 남편이며 나바라 왕위를 요구하는 인물인 브르타뉴 공작 장 1세과 협상한 끝에, 장 1세가 나바라 왕관을 포기하게 하는 대가로 총 3,000 리브르를 지불했다. 1256년 1월 1일에 카스티야 국왕 알폰소 10세의 딸 베렝겔라가 루이 9세의 아들 루이와 약혼했을 때, 카스티야 왕국은 푸엔테라비아와 산 세브스티안 항구 사용권을 나바라 왕국에 양도했다. 그 후 1257년 교회로부터 기름 부음을 받았고, 1259년 프랑스 방식으로 대관식을 치르면서 비로소 통치를 행사할 수 있었다. 티발트 2세는 아버지가 시작한 세입 개선 사업을 이어갔다. 인구 조사를 대대적으로 실시해 총 15만 명의 인구가 나바라 왕국에 거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티발트 2세는 장인인 루이 9세로부터 파리의 성 앙데르 데스 아르트 교구의 토지를 수여받고, 그곳에 '나바라 호텔'을 건설했다. 1258년에는 루쇠일 레 방(Luxeuil-les-Bains) 수도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가 그 땅을 다스리던 바르 공작의 분노를 샀다. 바르 공작은 티발트 2세와 전쟁을 벌이려 했지만, 루이 9세가 이를 금지하자 중지했다. 1259년, 티발트 2세는 루이 9세가 주관한 엥게랑 드 쿠시의 재판에 참석했다. 이때 루이 9세는 왕실 사유지에서 토끼를 사냥하던 3명의 젊은 플랑드르 귀족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1260년, 바르 공자 장과 위그 드 샬롱이 티발트 2세가 가지고 있던 루쇠일 영지를 빼앗았다. 루이 9세는 부르고뉴 공작 외드에게 티발트 2세와 바르 공국의 중재를 요청했지만, 바르 공국 측이 루쇠일을 내놓기를 끝까지 거부하면서 무산되었다. 이리하여 양자간의 전쟁이 발발해 6년간 이어졌으나 승패가 가려지지 않다가 1266년 12월 루이 9세의 중재로 휴전을 맺었다.
1267년, 리니의 영주 발레랑 드 뤽상부르리니가 앞으로는 티발트 2세에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선언했다. 이에 본래 리니 영지의 주권자였던 바르 공작 티보 2세가 본노해 동맹을 맺고 있던 프랑드르 백작 기 드 담피에르, 메츠 주교와 함께 1267년 7월 5일 리니를 공략했다. 티발트 2세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바르 공국을 침공해 슈와쇨을 황폐화했다. 이후 양자는 1267년 10월 루이 9세의 중재에 의해 화해했다. 티발트 2세는 리니의 주권자로 인정받았고, 바르 공국과 샹파뉴 백국은 프랑스 국왕에게 더 이상 분쟁을 벌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아라곤 국왕 하이메 1세는 티발트 2세에게 6만 리브르를 바치고 5개 요새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이에 분개한 티발트 2세가 아라곤 왕국과 전쟁을 벌였다. 이후 양자는 곧 화해했고, 하이메 1세가 라틴 제국을 회복시키기 위한 원정에 착수할 때 티발트 1세가 라틴 제국 영토의 1/4를 미리 부여받았다. 1269년에는 루이 9세의 동생이자 앙주 공작 샤를이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카를루 1세를 자처한 뒤 혼란에 빠진 시칠리아를 진정시키는 일에 참여했다.
티발트 2세는 나바라 왕국의 부르주아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받아내는 대가로 그들에게 도시에서 자치를 행사하고 정책 결정에 관여할 권리를 부여했다. 여기에 팜플로나의 푸에로스를 란츠로 확장했고, 에스텔라를 티에바스와 토랄바 델 리오로 확장했다. 1269년에는 에스피날 시를 건설했다.
나바라 왕국의 수도 팜플로나는 산 세르닌, 산 니콜라스, 그리고 나바레리아의 3개 자치구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들 자치구들은 사회적, 문화적으로 매우 뚜렷한 특징들을 갖추었으며, 서로간의 분쟁이 심했다. 티발트 2세는 남부 프랑스 출신이 많은 산 니콜라스 자치구를 지지해 현지 주민들을 통제하려 했다. 그러나 다른 2개 자치구들이 이에 반감을 품고 1258년 산 니콜라스 자치구를 습격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건물을 파괴했다. 티발트 2세는 폭동 주모자들을 모조리 처형해 치안을 정비했고, 1266년 자치구들을 하나로 통합하기 위해 대규모 회의를 개최했으나 합의에 실패했다.
1270년 7월, 루이 9세의 제8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해 튀니스 원정을 떠났다. 그는 떠나기 전에 동생 헨리케를 나바라 총독으로 선임하고 이자벨 왕비와 함께 마르세유에서 출발했다. 이후 원정군은 튀니스를 포위했지만, 루이9 세가 8월 25일에 이질에 시달리다가 사망하면서 기세가 꺾였다. 티발트 2세는 시칠리아 국왕 카를루 1세와 함께 전투를 이어갔지만 튀니스 공략에 실패했고, 1270년 11월 11일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그러나 11월 14일 시칠리아의 트라파니에 상륙한 직후 전염병에 걸렸고, 12월 4일에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내 이자벨 역시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몇 달 후에 사망했고, 프로뱅스에 묻혔다. 그는 생전에 아들을 낳지 못했기에, 남동생 헨리케가 헨리케 1세로서 나바라 국왕 및 샹파뉴 백작에 선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