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22:48:07

수리아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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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a121a><colcolor=#f2cc0c> 나바라 왕국 대립 국왕
수리아 2세
Zuria II.a Nafarroakoa
파일:몬카다 탑에 감금된 수리아 2세.jpg
몽카다 탑에 감금된 수리아 2세
호세 모레노 카르보네로 작, 1880년
가문 트라스타마라 왕조
출생 1424년 6월 9일
나바라 왕국 올리테
사망 1464년 12월 2일 (향년 40세)
프랑스 왕국 오르테즈
재위 나바라 왕국의 국왕
1461년 9월 23일 ~ 1464년 12월 2일
배우자 엔리케 4세 (1440년 결혼 / 1453년 무효화)
아버지 추안 2세
어머니 수리아 1세
형제 카를로스 4세, 후안, 레오노르 1세
이복형제 페란도 2세, 후아나

1. 개요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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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바라 왕국 대립 여왕. 아버지 추안 2세에 맞서 나바라 왕위를 주장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2. 생애

1424년 6월 9일 나바라 왕국 올리테 궁정에서 아라곤 국왕 페란도 1세의 차남 추안 2세과 나바라 국왕 카를로스 3세의 딸 수리아의 딸로 출생했다. 형제로 카를로스 4세, 후안, 레오노르 1세가 있었다. 1425년 어머니 수리아 1세가 나바라 왕위에 오른 뒤 나바라 궁정에서 지냈다.

1436년 9월 22일, 톨레도 협약에 따라 12살의 수리아와 11세의 카스티야 왕자 엔리케( 엔리케 4세)가 약혼했고 카스티야군이 빼앗았던 나바라 영토가 지참금 형식으로 나바라 왕국에 돌아왔다. 1440년 9월 16일, 어머니 수리아 1세와 함께 카스티야로 가서 엔리케 왕자와 조우해 바야돌리드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거행했다. 이후 어머니를 따라 과달레테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순례를 가면서, 남편과 카스티야 귀족들간의 분쟁을 중재했다. 1441년 어머리 수리아 1세가 사망한 뒤 아버지 후안이 어머니의 유언을 무시하고 카를로스에게 나바라 왕위를 물려주기를 거부하자, 그녀는 이를 부당하다고 여기고 카를로스 편을 들었으며 시아버지인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에게 카를로스를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수리아는 남편의 사랑을 전혀 받지 못했다. 엔리케는 그녀를 별궁에 놔두고 성관계를 한 번도 가지지 않은 채 숱한 정부를 두면서, 교회가 요구하는 성적 결합을 3년 이상 노력했는데도 불구하고 결혼을 "성적으로 완성"시킬 수 없었다며, 하느님이 이 결혼을 원하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1451년부터 나바라 왕국의 왕위를 놓고 아버지 후안과 대립하던 카를로스를 은밀히 지원하면서 아라곤 왕국과 적대 관계가 된 점도 두 부부의 불화와 관련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1453년 5월, 세고비아의 주교 루이스 바스케스 데 아쿠냐는 엔리케가 저주로 인해 성적으로 무력해진다는 이유로 엔리케와 수리아의 결혼을 무효화시켰고, 교황 니콜라오 5세 역시 같은 해 12월 이를 수락하는 교령을 반포했다.

이로 인해 남편에게 버림받은 수리아는 나바라 왕국으로 돌아왔다. 자신에 맞서는 카를로스를 도운 그녀를 불신한 후안은 그녀를 무시했고, 당시 푸아의 백작부인이었던 여동생 레오노르 역시 언니의 불행을 모른 척했다. 계모 후아나 엔리케스는 아예 카를로스와 수리아를 완전히 배제하고 자기 아들 페르난도를 나바라 국왕으로 세우기 위해 음모를 꾸몄다. 그녀는 이에 분개해 나바라 귀족들과 함께 카를로스를 지지했다. 후안은 이에 대응해 1455년 12월 3일 바르셀로나에서 카를로스와 그를 지원하던 여동생 수리아의 나바라 왕위 계승권을 박탈하고 막내딸 레오노르를 나바라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1461년 9월 23일, 아버지와 화해한 뒤 카탈루냐 총독에 부임한 카를로스가 바르셀로나에서 사망했다. 나바라 귀족들은 후안 2세가 미워하는 장남을 독살했을 거라 여기고 수리아를 나바라 여왕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수리아는 얼마 안가 후안 2세의 군대에 사로잡힌 뒤 올리테에 이송되었다. 이때 후안 2세는 딸에게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의 동생인 베리 공작 샤를과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이는 나바라 왕국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자들로부터 그녀를 멀리 떼네기 위한 계략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단호히 거부하자, 후안 2세는 몹시 분노해 레오노르와 푸아 백작 가스통 4세에게 보냈다.

수리아는 푸아 백국으로 끌려가는 동안 2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다. 하나는 자신을 납치한 아버지의 죄를 용서할 것을 하느님에게 간구하면서, 나바라 귀족들은 여동생 레오노르 또는 후손들에게 왕국을 맡기려는 어떠한 유언도 무효로 간주해달라고 요청했다. 또다른 유언장에서는 자신이 곧 살해될 것이며, 전 남편이자 현재 카스티야 국왕인 엔리케 4세를 나바라 국왕으로 지명했다.

이후 푸아 백국의 주도인 베른에 도착한 수리아는 오르테즈의 몽카다 탑에 수감되었고, 1464년 12월 2일 독살의 징후를 보이며 사망했다. 일부 역사가들은 그녀가 레오노르에게 독살당했다고 추정하고, 다른 역사가들은 후안 2세가 독살을 명령했다고 추정한다. 그녀의 유해는 레스카 성당에 안장되었다. 이후 후안 2세는 1479년 사망할 때까지 나바라 국왕을 역임했고, 레오노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바라 국왕에 등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