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8세 다르쿠르 Jean VIII d'Harcour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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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396년 4월 9일 | |
프랑스 왕국 아르쿠르 | ||
사망 | 1424년 8월 17일 (향년 28세) | |
프랑스 왕국 베르뇌유 | ||
아버지 | 장 7세 다르쿠르 | |
어머니 | 마리 달랑송 | |
형제자매 | 마리, 잔 | |
자녀 | 루이 | |
직위 | 프랑스 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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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의 귀족, 군인. 백년전쟁에서 잉글랜드군에 맞섰으나 베르뇌유 전투에서 전사했다.2. 행적
1396년 4월 9일 프랑스 왕국 아르쿠르에서 제4대 아르쿠르와 오말레 백작 장 7세 다르쿠르와 알랑송 백작 피에르 2세 달랑송의 딸 마리 달랑송의 외아들로 출생했다. 누이로 마리, 잔이 있었다. 1417년 노르망디의 주도 루앙의 수비대장이자 누앙의 보안관에 선임되었다. 1422년 나르본 자작 기욤 2세, 생트수잔 수비대장 앙브루아즈 드 로레와 함께 노르망디 원정에 착수해 바티이에서 잉글랜드 분견대를 격파했고, 귀환하던 중 모르타뉴로 가는 길에서 잉글랜드군을 재차 격파했다.1423년 9월, 존 드 라 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 2,000명의 맨앳암즈와 800명의 장궁병이 노르망디에서 출발하여 메인과 앙주 전역을 습격했다. 그들은 세그레를 점령한 뒤 막대한 양의 전리품과 1,200마리의 황소와 소떼를 노획한 후 노르망디로의 귀환길에 올랐다. 당시 앙제에 있던 도팽 샤를의 시어머니인 아라곤의 욜란다는 자신의 영지인 앙주가 심하게 약탈당한 것에 격분해 아르마냑파 인사들 중 반 잉글랜드 성향이 가장 강한 인사들에게 당장 보복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그들은 당시 튀르네, 앙주 및 투렌의 방위 사령관을 맡고 있던 장 8세 다르쿠르에게 조속히 잉글랜드군을 추격하라고 지시했다. 때마침 생트수잔의 수비대장 앙브루아즈 드 로레가 적군이 조만간 라 브로시니에르를 통과할 거라는 메시지를 보내자, 장 8세는 앙드레 드 라발 몽모랑시, 앙브루아즈 드 로레와 함께 라 브로시니에르에서 잉글랜드군을 격멸하기로 하고 병력을 규합했다.
9월 26일 일요일 아침, 라 브로시니에르에 먼저 도착한 프랑스군 6,000명은 전투 대형을 편성한 뒤 적이 오고 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정찰병을 파견했다. 2시간 후, 양측 정찰병들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고 소규모 접전을 벌였다. 프랑스 정찰병들이 돌아가자 잉글랜드인들이 쫓아갔지만 프랑스 기병대에게 가로막히자 곧바로 물러났다. 존 드 라 폴은 적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야 파악하고 기병대로부터 병사들을 숨기기 위해 수송 마차로 이동했다.
프랑스 기병대는 지휘관들의 인도하에 잉글랜드 보병대를 공격했지만 수송 마차에 의존하여 저항하는 적을 쉽사리 뚫지 못했다. 이에 일부 프랑스 기병대가 돌아서서 수송 마차가 커버하지 못하는 적의 측면을 요격했고, 잉글랜드군은 급격히 전의를 잃고 큰 계곡으로 흩어졌고, 프랑스 보병대가 이들을 쫓아가서 무차별 학살했다. 결국 존 드 라 폴을 비롯한 잉글랜드 장교들은 항복했다. 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 1,200~1,400명이 전사했고, 많은 이들이 포로로 붙잡혔다. 당대 연대기에 따르면, 프랑스군 측에서는 기사 장 르 루 한 명만 전사했고, 종자 몇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고 한다.
라 브로시니에르 전투에서 잉글랜드군을 격멸한 뒤, 장 8세는 노르망디로 쳐들어가서 아브랑슈를 포위하고 생로 교외를 약탈했다. 하지만 솔즈베리 백작 토머스 몬타구가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오자 포위를 풀고 철수했다. 양측은 이후에도 서로의 영지를 공격해 약탈과 파괴를 자행했다. 이후 도팽 샤를에 의해 프랑스 원수에 선임된 장 8세는 1424년 파리에서 서쪽으로 약 50마일 떨어진 이브리 성을 잉글랜드군의 포위로부터 구원하기 위해 스코틀랜드군을 비롯한 용병대를 포함해 14,000~16,000명을 이끌고 출진했다.
이브리 주민들은 결사적으로 항전했지만 식량이 고갈될 기미를 보이자 1424년 8월 14일까지 구원군이 오지 않으면 항복하겠다고 약속했다. 잉글랜드군 총사령관 베드퍼드 공작 존은 이브리 성으로 전군을 집결시킨 뒤 이곳을 구하러 오는 적군을 섬멸한 후 앙주와 메인으로 진격하려 했다. 프랑스군은 이브리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노낭쿠르에 이르렀지만, 베드퍼드 공작의 군대가 이브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심각한 논쟁에 휩싸였다.
장 8세를 비롯한 프랑스 장성들은 크레시 전투, 푸아티에 전투, 아쟁쿠르 전투 등 대규모 야전에서 참패를 겪은 아픔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적을 압도하는 전력을 가지고 있거나 지형상 절대 우세하는 등 승리를 보장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면 잉글랜드군과의 전투를 회피하려 했다. 그들은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여겼기에 이브리를 구하지 않기로 했다. 반면 스코틀랜드인들은 잉글랜드와의 오랜 전쟁을 치르면서 반 잉글랜드 정서가 매우 극렬했고, 1421년 보제 전투에서 자신들이 맹활약해 잉글랜드군을 궤멸시켰기 때문에 잉글랜드군과 대규모 야전을 벌일 때 승산이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크라방 전투 때 프랑스인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최선을 다해 싸우던 동족들이 몰살당했다고 여겼기에 프랑스인들을 불신했다.
격렬한 논쟁 끝에, 도팽 샤를로부터 지휘권을 부여받은 장 8세의 뜻대로 이브리를 구원하지 않기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대신, 베르뇌유를 시작으로 노르망디 국경지대에 있는 잉글랜드 요새들을 공략하기로 합의했다. 하지만 가까운 곳에 잉글랜드 본대가 있었기 때문에, 베르뇌유를 무력으로 공략하기는 어려웠다. 이에 스코틀랜드인들이 기발한 꾀를 고안했다. 그들은 동포의 목에 갈고리를 씌운 뒤 피를 잔뜩 묻힌 후 베르뇌유 성채로 데려가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으며 이들은 겨우 살아남은 포로라고 소개했다. '잉글랜드 포로'로 가장한 스코틀랜드인들이 목놓아 통곡하며 "이제 잉글랜드는 끝났다. 우리는 패망했다."라고 소리지르자, 베르뇌유 수비대와 시민들은 정말로 잉글랜드군이 궤멸되었다고 착각하고 프랑스군에 귀순했다.
한편, 8월 14일 이브리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베드퍼드 공작은 다음날 베르뇌유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가능한 한 빨리 그곳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3,000명의 부르고뉴 파견대를 피카르디에 별도로 보내 별도의 군사 작전을 수행하게 했다. 8월 16일 잉글랜드군이 베르뇌유 외곽에 도착했을 때, 많은 노르만인들이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위세를 떨치는 것을 보고 잉글랜드군에서 이탈해 노르망디로 돌아갔다.
한편,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잉글랜드군이 근처에 이르자 이들과 맞붙어야 하는지를 놓고 다시 논쟁을 벌였다. 아치볼드 더글러스를 비롯한 스코틀랜드인들은 아군이 수적으로 절대 우위이며 저들은 멀리 행군하느라 지쳤으니 승리할 수 있다고 강력히 주장했고, 프랑스 장군들 중에서도 많은 이가 이에 설득되었다. 그럼에도 장 8세는 교전을 섣불리 벌였다가 일을 망칠까봐 망설였지만, 이번에도 싸우지 않는다면 프랑스를 떠나겠다는 스코틀랜드인들의 위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기로 했다. 이리하여 8월 17일 벌어진 베르뇌유 전투에서,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은 궤멸되었고 장 8세는 전사했다. 사후 라소세의 생루이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그는 생전에 결혼하지 않아 적법한 자식을 두지 못했지만, 사생아로 루이(1424 ~ 1479)가 있었다. 루이는 베지에 주교, 나르본 대주교, 바이외 주교를 거쳐 예루살렘 총대주교를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