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2-11-30 14:29:48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1. 개요2. 생애3. 여담
파일:Gregory of Tours.jpg
이름 투르의 그레고리우스 (Grégoire de Tours)
본명 게오르기우스 플로렌티우스 그레고리우스 (Georgius Florentius Gregorius)
출생 538년 11월 30일
오베르뉴 (Auvergne)
사망 594년 11월 17일
(향년 55세)
프랑스[1] 역사학의 아버지 - 루앙 고대 박물관, 투르의 그레고리우스의 1400주년 추모식(1994년)에서

1. 개요

투르의 그레고리우스는 투르의 주교이자, 프랑크 왕국 메로베우스 왕조의 역사학자이다. 비록 의도적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역사편찬 기술은 근세까지 영향을 주었고, 다수의 저서는 성인전(Hagiographie)의 비약적 성장에 기여했다.

2. 생애

외증조부(렁드흐(Landres)지방의 주교)부터 삼대의 주교를 낸 갈로-로마인 계통의 구 원로원 의원 집안에서 태어났다.[2] 563년 부사제로 임명받고, 573년에는 아우스트라시아의 왕 시기베르투스 1세의 도움으로 투르의 주교로 임명받지만, 재임 기간은 왕권 다툼으로 인한 분란으로 순탄치 못했다.

프랑크 왕국의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인 투르의 유력자로써, 정치적, 외교적 문제와 종교회의로 자주 여행을 하게 됐고, 이로 인해 글을 쓰게 되었다. 박식한 교양의 소유자로, 본업인 종교뿐만 아니라, 정치, 문학을 아우르는 다양한 주제에 대해 평론하고, 번역하고, 기록하였으며, 중세 초기 역사의 가장 중요한 증인으로 취급된다.

3. 여담

Res publica(공화국, 국가공동체)[3] 라는 용어를 자국인 프랑크 왕국도 아닌 동로마 제국에 대해서 사용했다.[4] 즉 당시 6세기 중후반 시점에서는 동로마가 제국령 밖의 서유럽에서도 마치 기독교권의 종주국과 같은 대접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한편, 8세기 후반에는 동로마 제국 대신 교황령이 '공화국'으로 지칭되었다고 한다.[5] 카롤루스 대제의 로마 황제 대관 이후 서방에서 동로마 제국을 진짜 로마로 인정하려고 하지 않게 된 것의 전조현상이 이미 나타났던 것이다.
[1] 후대 샤를마뉴의 롬바르드 및 작센 정복 시점부터 프랑크 분열 때까지의 프랑크는 프랑스만의 역사라고 하기 어렵지만, 메로베우스 왕조 때의 프랑크는 프랑스의 역사에 더욱 가깝다. [2] Transformations of Romanness의 11p, 원문: 'Gregory of Tours was proud of his senatorial family and his peers, but avoided calling them Romans.' 한편 해석해 보면 이 사람은 로마인이라는 것보다도 원로원 의원 집안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더 내세우고 싶어했다는 것인데, 어차피 로마는 동쪽이라면 모를까 서쪽에서는 이미 망했거니와, 또한 (구)로마인이라는 정체성을 우선시했다면 구도가 (구)로마인:프랑크인이 되는데, 모든 프랑크인이 지배층은 아니었지만, 프랑크 왕국인 이상 권력의 최상층은 당연히 메로베우스 왕가로 대표되는 프랑크인이었기에, 지배층 안에 들어있는 (구)로마인 또한 궁극적으로는 피지배자라는 점이 상기되는 구도라서 유리한 구도가 아니다. 반면 원로원 의원 집안 출신이라는 정체성을 우선시한다면 이런 종족적인 차이가 다소 가려짐과 동시에, 지배층:피지배층이라는 신분적인 구도가 더욱 부각되어 유리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3] 여기서 Republic이 유래한 것은 맞으나, 오늘날의 용례는 '왕이 없어야만 함'을 요구하지만, 원어 Res publica는 그렇지 않아서, 아우구스투스 이후 제정 시대에도 멀쩡히 로마를 지칭하는 용어로 쓰였다. [4] 영어 위키백과 Res publica 중 원문 'Gregory of Tours refers to res publica, it is the Eastern Empire of which he is speaking.' [5]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23p, 원문: 'Then, in the later eighth century, res publica was used for the sphere of political domination that the popes tried to carve out of former Byzantine possessi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