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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메이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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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초대 | 제2대 | 제3대 | 제4대 | |
이토 히로부미 | 구로다 기요타카 | 야마가타 아리토모 | 마쓰카타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5대 | 제6대 | 제7대 | 제8대 | |
이토 히로부미 | 마쓰카타 마사요시 | 이토 히로부미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9대 | 제10대 | 제11대 | 제12대 | |
야마가타 아리토모 | 이토 히로부미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rowcolor=#C3C965> 제13대 | 제14대 | |||
가쓰라 다로 | 사이온지 긴모치 | |||
[[다이쇼 시대| 다이쇼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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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14대 | 제15대 | 제16대 | 제17대 | |
사이온지 긴모치 | 가쓰라 다로 | 야마모토 곤노효에 | 오쿠마 시게노부 | |
<rowcolor=#C3C965> 제18대 | 제19대 | 제20대 | 제21대 | |
데라우치 마사타케 | 하라 다카시 | 다카하시 고레키요 | 가토 도모사부로 | |
<rowcolor=#C3C965> 제22대 | 제23대 | 제24대 | 제25대 | |
야마모토 곤노효에 | 기요우라 게이고 | 가토 다카아키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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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25대 | 제26대 | 제27대 | 제28대 | |
와카쓰키 레이지로 | 다나카 기이치 | 하마구치 오사치 | 와카쓰키 레이지로 | |
<rowcolor=#C3C965> 제29대 | 제30대 | 제31대 | 제32대 | |
이누카이 쓰요시 | 사이토 마코토 | 오카다 게이스케 | 히로타 고키 | |
<rowcolor=#C3C965> 제33대 | 제34대 | |||
하야시 센주로 | 고노에 후미마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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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34대 | 제35대 | 제36대 | 제37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히라누마 기이치로 | 아베 노부유키 | 요나이 미쓰마사 | |
<rowcolor=#C3C965> 제38·39대 | 제40대 | 제41대 | 제42대 | |
고노에 후미마로 | 도조 히데키 | 고이소 구니아키 | 스즈키 간타로 | |
[[쇼와 시대| 쇼와 시대
전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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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42대 | 제43대 | 제44대 | 제45대 | |
스즈키 간타로 | 시데하라 기주로 | 요시다 시게루 | ||
<rowcolor=#C3C965> 제46대 | 제47대 | 제48-51대 | 제52-54대 | |
가타야마 데쓰 | 아시다 히토시 | 요시다 시게루 | 하토야마 이치로 | |
<rowcolor=#C3C965> 제55대 | 제56·57대 | 제58-60대 | 제61-63대 | |
이시바시 단잔 | 기시 노부스케 | 이케다 하야토 | 사토 에이사쿠 | |
<rowcolor=#C3C965> 제64·65대 | 제66대 | 제67대 | 제68·69대 | |
다나카 가쿠에이 | 미키 다케오 | 후쿠다 다케오 | 오히라 마사요시 | |
<rowcolor=#C3C965> 제70대 | 제71-73대 | 제74대 | ||
스즈키 젠코 | 나카소네 야스히로 | 다케시타 노보루 | ||
[[헤이세이 시대| 헤이세이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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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74대 | 제75대 | 제76·77대 | 제78대 | |
다케시타 노보루 | 우노 소스케 | 가이후 도시키 | 미야자와 기이치 | |
<rowcolor=#C3C965> 제79대 | 제80대 | 제81대 | 제82·83대 | |
호소카와 모리히로 | 하타 쓰토무 | 무라야마 도미이치 | 하시모토 류타로 | |
<rowcolor=#C3C965> 제84대 | 제85·86대 | 제87-89대 | 제90대 | |
오부치 게이조 | 모리 요시로 | 고이즈미 준이치로 | 아베 신조 | |
<rowcolor=#C3C965> 제91대 | 제92대 | 제93대 | 제94대 | |
후쿠다 야스오 | 아소 다로 | 하토야마 유키오 | 간 나오토 | |
<rowcolor=#C3C965> 제95대 | 제96-98대 | |||
노다 요시히코 | 아베 신조 | |||
[[레이와 시대| 레이와 시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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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C3C965> 제98대 | 제99대 | 제100·101대 | 제102대 | |
아베 신조 | 스가 요시히데 | 기시다 후미오 | 이시바 시게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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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노에 후미마로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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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91년 10월 12일 | ||
도쿄부 도쿄시 고지마치구 (現 도쿄도 치요다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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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45년 12월 15일 (향년 54세) | ||
도쿄도 스기나미구 자택 | |||
재임기간 | 제34대 내각총리대신 | ||
1937년 6월 4일 ~ 1939년 1월 5일 | |||
제38대 내각총리대신 | |||
1940년 7월 22일 ~ 1941년 7월 18일 | |||
제39대 내각총리대신 | |||
1941년 7월 19일 ~ 1941년 10월 18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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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부모 |
부친 고노에 아쓰마로 어머니 고노에 사와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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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 고노에 치요코 | ||
자녀 |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장녀 노구치 아키코 차녀 호소카와 요시코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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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인척 |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 양손자 고노에 다다테루[2] 이복동생 고노에 히데마로[3] 손자 아즈마 류메이[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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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타이메이심상소학교 (졸업) 가쿠슈인 중등과 (졸업) 제1고등학교 (졸업)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 / 중퇴) 교토제국대학 법학부 (법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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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 국가신토 | ||
신체 | 180cm 이상[5], O형 | ||
작위 | 공작 |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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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력 |
귀족원 의원 제10대 귀족원 부의장 제2대 일본방송협회 총재 제9대 귀족원 의장 제57대 외무대신 제13대 척무대신 제18대 추밀원 의장 농림대신 권한대행 제43대 사법대신 초대 대정익찬회 총재 제34·38·39대 내각총리대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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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정치인. 제34, 38, 39대 내각총리대신을 역임했다. 파시즘 독재정당인 대정익찬회를 조직하여 일본을 유사 파시즘 국가로 전환하는데 주된 역할을 수행했으며 해당 조직의 총재를 지냈다. 고노에가(近衛家)의 30대 가주.중일전쟁을 단순 국경 분쟁이 아니라 사실상 전쟁 수준으로 키운 핵심 인물로[6] 개인적으로는 미국과 전쟁을 벌임에 반대했다고 알려졌으나, 결과적으로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도조 히데키와 함께 태평양 전쟁을 주도했다. 패전 이후 연합군에게 처벌받을 것이 유력해지자 전범재판 출두 직전에 자살로 최후를 맞이했다.
2. 가문 배경
고노에가는 일본 귀족가이던 후지와라 씨족의 혈통을 잇는 5개 가문인 고셋케(五攝家)[7] 중 하나인 섭관가로, 이 5개 가문에서 돌아가며 일본의 태정대신과 관백을 배출해 온 그야말로 황실 다음으로 최고의 명문가 집안 출생이다. 그중에서도 고노에 가문이 장자 중 장자이기에, 후지와라 씨족 전체의 당주이기도 하다.[8] 가문 내 문서에는 아직도 '후지와라노 후미마로'로 기록한다고 하니, 황족 제외 일본 최고 혈통의 장자. 일본의 역대 총리들 중에서도 혈통상으로는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 다음으로 최고인 사람이다.자손 중에 가장 유명한 사람은 후일 내각총리대신이 되는 외손자 호소카와 모리히로와 호소카와 전 총리의 동생인 일본적십자사 총재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9][10] 등이다. 다다테루는 국제적십자연맹 총재이며, 히로히토 천황의 막내동생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의 큰 사위이다. 부인 고노에 야스코와의 사이에서 고노에 다다히로(近衛忠大)라는 아들을 낳았다. 다다히로는 고준 황후의 큰오빠 구니 아사아키라(久邇朝融)의 손녀인 구니 게이코(久邇桂子)와 결혼하여 자녀 3명을 낳았다.
그 외 도쿠가와 가문과도 밀접하게 혈연이 닿아 있었다. 그의 어머니인 사와코(衍子)는 카가 번주였던 마에다 요시야스(前田慶寧)의 딸인데, 마에다 요시야스는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외손자가 된다. 마에다 요시야스의 외할머니는 오오쿠 관련 창작물에 자주 나오는 이에나리의 후궁 오미요노카타(お美代の方)이다. 즉, 고노에 후미마로는 도쿠가와 이에나리와 오미요의 4대손이 된다. 거기다 고모부는 도쿠가와 가 16대 당주 도쿠가와 이에사토다.
- (29) 고노에 아츠마로 (1863 ~ 1904) / 마에다 사와코 (1869 ~ 1891) / 마에다 모토코 (1871 ~ 1945)[11]
- (30) 장남: 고노에 후미마로 (1891 ~ 1945) / 고노에 치요코 (1896 ~ 1980)
- (31)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1915 ~ 1956) / 오타니 마사코 (1924 ~ 2017)
- (32) 양자: 고노에 다다테루 (1939 ~ ) / 고노에 야스코 (1944 ~ )
- 장남: 고노에 다다히로 (1970 ~ )
- 장녀: 노구치 아키코 (1916 ~ 2004)
- 차녀: 호소카와 아쓰코 (1918 ~ 1940) / 호소가와 모리사다 (1912 ~ 2005)
- 장남: 호소카와 모리히로 (1938 ~ ): 제79대 일본 내각총리대신
-
차남: 고노에 다다테루(1939 ~ ) -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 (1922 ~ 2012)
- 장녀: 고노에 타케코 (1897 ~ 1983)
- 차남: 고노에 히데마로 (1898 ~ 1973)
- 장남: 고노에 히데토시 (1921 ~ 1923)
- 장녀: 고노에 유리코 (1922 ~ )
- 차녀: 고노에 리코 (1926 ~ )
- 차남: 고노에 히데타케 (1931 ~ 2003)
-
삼남: 미야가와 타다토시(1935 ~ ) - 삼녀: 고노에 아키코 (1940 ~ 1945)
- 사남: 나가이 가라쿠 (1958 ~ )
- 삼남: 고노에 나오마로 (1900 ~ 1932)[12]
-
사남: 미야가와 타다마로(1902 ~ 1961) - 양자: 미야가와 타다토시 (1935 ~ )
3. 일생
3.1. 정치 입문 전
도쿄에서 유서 깊은 공가의 고셋케 중 하나인 고노에가 저택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계 혈통상 고요제이 덴노의 12대손[13]으로, 고요제이 덴노의 제4황자인 니노미야(二宮)가 외가인 고노에가로 입적되면서, 혈통이 시작되었다.[14] 어머니인 사와코[15]는 일찍 사망했고, 이후 아버지 아츠마로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이모이자 아내의 동생, 즉 처제와 재혼하였다. 그래서 후미마로는 이모인 계모 밑에서 자랐다. 오랫동안 이모이자 계모가 친모인 줄 알고 있었으나 장성해서 진실을 알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고, 이것이 그의 인격 형성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그러던 중 아버지 아츠마로가 1904년 상당한 부채를 떠안기고 죽어버리자 고작 13살에 작위를 승계하고 고노에 가문의 가주가 된다. 아버지 아츠마로는 아시아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의 기초가 되는 아시아 먼로주의를 주장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그런 아버지를 향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것으로 술회했지만 그는 총리를 재임하면서 아예 노구교 사건을 중일전쟁으로 키워버렸고, 다음 총리대에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다.
청장년 시기에 머리는 꽤나 좋았던 것으로 보이며 이로 인해 같은 명문가 출신 정치가이자 자유주의 귀족이었던 사이온지 긴모치의 신임을 얻어, 어린 나이임에도 사이온지를 따라갈 수 있었다. 외국 조약체결식이나 파리 강화 회의에 전권차석대표인 마키노 노부아키 남작의 수행원으로 참가했다. 이때 윌슨은 '이미 전 세계를 다 해처먹은 구미열강이 일본의 생존권을 핍박하면서 일본에게 후배국가의 위치를 강요하는 도구'에 불과하다고 비판하고 인종차별 철폐와 국제적 평등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이상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16] 구제 제1고등학교 졸업 후 진학한 도쿄제국대학 문학부 철학과를 중퇴하고 반수해서 교토제국대학 법학부로 학교를 옮겼으며, 도쿄제대 재학 중에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이수하는 등, 젊어서는 좌익에 가까운 행보를 보인다.[17]
그 당시 고노에가 얼마나 자유주의적이었느냐 하면, 궁중 내에서 양성애자로 소문이 퍼져나가고 있었고, 한때는 마르크스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다. 복잡한 황실 격식을 거부했고, 나중에 천황이 되는 히로히토 황태자 앞에서 다리를 꼬거나 반말을 쓰는 등[18] 여러 궁중 예절에 어긋나는 행위로 귀족 원로들에게 비판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80cm가 넘는 장신에 준수한 외모, 깔끔하고 세련된 옷차림 등으로 당시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가 좋았다고 한다. 여기에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일본 대표단의 수행원으로 유럽을 다녀온 후 "일본은 답답하고 꽉 막힌 곳이라서 싫고 유럽 이민을 가고 싶다."라고 떠들고 다녀서 일본 정계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결국 본인도 사태가 커지자 일본인은 일본에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이민설을 무마했다.
3.2. 정치인 생활
1916년 고작 25세에 세습 공작으로 상원의원 격인 귀족원 의원이 되어 정치 생활을 시작했다. 그때부터 자신을 비호하던 사이온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해 1922년 귀족원 내 최대 원내회파인[19] '연구회'에 가입했으나 1927년에 뛰쳐나가 도쿠가와 가문과 손잡고 상원에 '화요회'라는 독자적인 회파를 구축했다. 이 화요회는 상원 내 회파 중에서 가장 지위가 높은 화족들이 소속된 파벌이 되었으며[20], 곧 세력이 크게 확대되어 1933년 42세 나이에 귀족원 의장으로 선출될 정도로 성장했다. 한편 이때 '쇼와연구회'라는 사설 정책연구소를 설립했는데 여기 조직원에는 전직 공산주의자 출신 전향자들이 대량으로 포함되어 있었으며, 동아협동체론[21]이나 밑에서 설명할 신체제운동에 대한 설계가 여기서 이루어졌다.그때부터 줄기차게 차기 총리의 물망에 오르기 시작해, 1936년에 일어난 2.26 사건 이후에는 쇼와 덴노가 직접 고노에에게 내각총리대신으로 조각할 것을 부탁할 정도였으나 건강을 핑계로 빠져나갔다. 고노에에게 긍정적이던 황도파가 2.26 사건의 주모자로 지목되고 제거되면서 자신의 지지기반이 없어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었다.
1936년 귀족원에 출두하여 천황의 칙서를 읽고 있는 귀족원 의장 후미마로 |
오카다 내각 이후의 히로타 내각, 하야시 내각이 삽질만 하다가 결국 흐지부지되자, 결국 1937년 6월에 사이온지의 추천으로 하야시 센주로의 후임 내각총리대신에 임명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이온지는 고노에에게 많은 기대를 하여, 많고 많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정치를 펼 거라고 믿었다.[22] 실제로도 고노에가 총리에 취임하고 취한 행동이 "정당인의 지혜를 모은다"는 취지를 내세워서 중간내각 시기에 폐지되었던 각 성청의 정무관을 부활시킨 것이었고, 이것이 해당 자리에 갈 만한 소장의원들의 마음을 잡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여, 이후 2번에 걸친 총리 취임에 큰 도움이 되었다.
3.3. 내각총리대신 시절
1937년 7월 26일자 타임지 모델이 된 고노에 | 34대 총리 취임 후 |
도조 히데키와 고노에 후미마로 |
열정적으로 개혁을 외치던 고노에가 권력을 잡자마자 처음으로 한 것은 치안유지법을 위반해 잡힌 공산주의자와 2.26 사건을 일으킨 장교들을 석방조치하려는 시도였다. 사실 그 전부터 2.26 쿠데타를 일으켰던 황도파 장교들과 자주 교류하는 편이었고, 또 한편으로 전향한 공산주의자들과도 많이 교류하는 편이었는데 총리가 되자마자 이들부터 풀어줘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확보하려고 했던 것. 당연히 사이온지가 경악하며 반대해 실천하지 못했다. 그리고 한 달 후인 1937년 7월에 루거우차오 사건을 빌미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사실 노구교 사건 처음, 고노에는 전쟁 확대론을 부정하며 수습하고자 하는 의사를 내비치기는 했다. 그러나 육군대신 스기야마 하지메가 '여기서 물러나면 베이징, 텐진 등의 우리 거류민이 안전하지 못할것'이라며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중국이 물러날 것이라고 부추기자, 여기에 넘어가 오히려 육군 사단을 증파해 전선으로 보내버렸다. 거기에 육군에서 주장한 국방 예산까지 올려줌으로써 육군의 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게다가 그 정도로 끝이 아니다. 육군이 화북과 상하이에서 신나게 분탕을 치는 바람에 중국이 순순히 물러나기는 커녕 오히려 결사항전을 외치며 전쟁이 생각외로 확대되자 1937년 10월, 히로타 고키 외무대신을 통해 중화민국에 화평 교섭의 의사를 전달했으나, 중화민국이 화북에 설치된 기찰정무위원회를 유지시킴으로 명목상의 주권을 존중해줄 것을 요구하자, 장제스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육군 장성들을 유약하다고 질타하더니, 난징 함락을 기점으로 완전히 기세가 올라 "중국의 조건을 받아들이면 열강이 일본을 우습게 알 것"이라면서 전쟁의 브레이크를 박살내버렸다. 이를 본 육군 수뇌부는 내각과 군부의 입장이 바뀐 것 같다며 당황했다.
그걸 넘어 1938년 1월 16일, 1차 고노에 담화를 발표하여 "국민정부를 더 이상 상대하지 않겠다."라고 선언하고 주중일본대사 가와고에 시게루를 소환했다. 같은 달 18일에는 "국민정부를 상대하지 않겠다는 담화의 내용은 단순히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말살하겠다'는 것"이라는 보충설명까지 발표하면서 외교교섭의 가능성을 잘근잘근 밟아버렸다. 고노에의 이런 과격한 행보에 경악한 사이온지 긴모치는 여러 차례 고노에를 불러 질책하면서, "그딴 식으로 일할 것 같으면 총리를 그만 두라."라고까지 말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고노에는 그런 사이온지를 ' 뒷방 늙은이' 취급하면서 그의 조언을 무시했고, 총리대신인 본인이 상황을 장악했다고 믿었지만 실상은 군부의 손에 놀아났다. 거기에 고노에는 전쟁의 확실한 전력 지원을 위한 군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국민학교령을 발표하고 국민총동원령까지 통과시켜버렸다.
고노에의 성품을 일찍 간파한 사람은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을 역임한 유아사 구라헤이였다. 그는 고노에를 디스하며 후지산에 비겼다. "후지산을 멀리 보면 아름답지만 가까이서 보면 황량하기 그지없는 돌이 굴러다니는 황무지인데, 고노에 후미마로라는 사람의 성품이 딱 그러하다."라는 인물평을 남겼다.
11월, 전쟁이 수렁에 빠져들자 국민정부를 말살시키겠다는 기존의 입장을 번복하고 일본이 주도하는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동아협동체론)에 협력하면 장제스 정부를 인정하고 파트너로 삼으며 전쟁을 멈추겠다는 2차 고노에 담화를 발표한다. 이후 12월, 왕징웨이 공작이 성공해 왕징웨이가 충칭을 탈출하자 일본과 중국이 선린우호, 공동방위, 경제협력을 하겠다는 3차 고노에 담화를 발표한다. 그러나 장제스가 이 담화에 대해 일본이 중국을 영원히 수하에 두려는 수작이라도 반발하면서 동아협동체론 구상은 폐기된다. 그러자, 흥아원(興亞院)[23] 문제를 구실로 1939년 1월 돌연 사퇴했다.
그의 후임 히라누마 기이치로는 지구상에서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박멸을 외치고 다니는 진성 국수주의자였다. 하지만 생각 외로 정책은 온건해서, 왕징웨이가 국민당의 정권을 잡도록 해 중국을 분열시킨 후 이를 통해 전쟁을 멈추고, 서방외교에 있어서는 독일과 함께 대소련 견제를 유지하되 동맹을 맺지 않는다는 정책으로 확대를 억제하고자 했다. 허나, 독소 불가침조약이 체결되자 자신의 외교정책의 기본 기반마저 붕괴되어버리자 세상이 미쳐돌아간다며 "구주천지 복잡괴기(歐洲天地 複雜怪奇)"[24]라고 개탄했다. 이후 할힌골 전투의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다음 총리는 아베 노부유키로 이 사람은 아예 입헌민정당, 입헌정우회, 사회대중당 등 의회의 힘을 빌려 전쟁을 억제하고자 했으나 이쯤되면 각 정당 내에서도 전쟁을 부르짖으며 군부를 찬양하는 정신나간 놈들이 당권을 잡는 바람에(...) 실패하고 오히려 내각 불신임을 맞아버린다. 다음 총리인 해군 출신의 요나이 미쓰마사[25] 총리가 어느 정도 개념있긴 했는데 군부, 정확히는 사이가 다른 나라 군대급이던 육군에서 지랄하는 바람에 반 년 만에 사임하는 사태도 있었다. 총리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후임 내각들의 정책 자문을 하면서 지내다가, 요나이 미쓰마사 총리가 육군 정책에 항의하다가 분노해서 사임하자 다시 총리직에 올랐다.
제1차 고노에 내각 당시에는 여러 원로들과 특히 사이온지의 눈치를 보던 면이 있었으나, 원로들이 연로해 점점 죽어가고 특히 1차 내각 당시 팔팔했던 사이온지도 1940년 말 죽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를 걸어 줄 대상이 사라진 고노에는 2차 내각에서 똘기의 진수를 보여준다. 게다가 2.26 사건에서 보았듯이, 이미 일본 군부 급진파들의 독단전행은 일본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곪아터지면서 발생한 것인데다가, 예전처럼 현실적인 막강한 원로들이 배후 합의를 하든 말든 알바 아니고 원로들도 간신으로 보고 죽이려 들면 그만이라서 사이온지가 아니라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개인에 불과한 원로들이 군부의 폭주를 저지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고노에는 평소에 파시스트 독일과 이탈리아에게 많은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학 시절 마르크스주의를 공부한 영향으로 경제적으로 좌경화되어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극단적으로 우경화되어 있었던 고노에는 2차 대전에서 독일과 이탈리아가 잘나가는 것을 보고는 독일, 이탈리아, 소련과 같은 전체주의, 집산주의 체제가 곧 세계를 점령할 것이라고 생각, 일본 역시 그 대열에 동참해야 한다고 보았다. 요나이 미쓰마사마저 사임하자 총리가 될 사람은 이제 고노에밖에 없다는 분위기가 무르익었고, 때가 되었다고 본 고노에는 소위 '신체제운동'이라는 것을 발족, 공산당이나 사회대중당 등 좌익 정당에 몸담았다가 천황제 찬양으로 돌아선 전향자들을 끌어들여 일본을 독일이나 소련처럼 집산주의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연이어 '일국일당운동'을 제창하며, 당시까지도 존재했던 여러 의회 정당들을 모조리 해산한 후, ' 대정익찬회'라는 범국민적 유일정치체[26]가 정치를 이끌어 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고노에는 다시 권력을 잡자 군부의 힘으로 의회를 강제해산시켰고, 신체제운동에 따라 정당들을 폐지해 대정익찬회를 만든 후, 스스로 익찬회 당수에 올라 독재체제를 완성했다. 지금까지 유보해 왔던 독-이-일 추축국 삼국동맹을 체결했고, 흔히 아는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충격과 공포의 단어가 이 시기에 탄생했다. 이때 "삼국동맹을 지켜야 하니 소련을 공격해야 한다."라고 주장해대는 일본 육군과 "자원 확보를 위해서 남방으로 진출해야 한다."라는 일본 해군이 다투기 시작했다. 하지만 적어도 고노에는 소련은 적으로 돌릴 생각이 없었다.
한편 미국은 일본 제국이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고 점령하는 데 성공하자 석유수출을 금지했다. 이에 1941년 8월 8일 도요다 외무대신이 미국외무성에 교신을 보내 미국에게 1. 미국과 교역재개 2. 필리핀 방어 중단 3. 중국, 영국,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무기수출 금지 4. 인도차이나에서 일본의 우월한 군사적,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영구적으로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반대로 일본은 1. 인도차이나 이남에 진출을 포기하고 2. 태평양에서 평화가 확립되면 인도차이나에서 철군을 하겠다고 했다. 미국은 이 현실성 없는 요구안을 거절했고, 일본이 인도차이나에서 더 내려와서 영국 식민지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에 침공을 하면 군사력을 동원해 박살을 내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이 상황에서 국내정치 면에서도 고노에는 곤경에 처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부르짖은 신체제운동에 대한 기성 우익 세력의 반감이 대단했다. 히라누마 기이치로를 정점으로 하는 소위 '관념우익'세력은 고노에의 신체제운동이 천황의 권한을 침해하는 불경한 것으로 보았으며, 공산주의식 집산주의 경제를 주장한것에도 역시 발작적으로 반응했다. 당연히 이를 바라보는 기업가들의 시선 역시 고울 리가 없었다. 전황이 나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점점 수렁으로 빠져들기만 하자 마침내 관념우익 세력의 반격이 시작되었고, 고노에는 마침내 히라누마를 내각에 입각시킨다. 이후 히라누마는 정부와 각 정부 부처에 대한 대규모 숙청을 시행, 신체제운동에 참여한 관련자들을 싸그리 일망타진해 고노에의 정치적 기반을 아예 거세시켜버렸다. 자세한 것은 히라누마 기이치로 문서를 참고하자.
이때 설상가상으로 도조 히데키와 군부가 " 미국을 공격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해대는 가운데에서도, 고노에는 대미전쟁 반대 입장은 고수하면서 정작 군부를 제어하지는 않고, 거기에 미국 성질을 돋을만한 군사적 도발 조치들을 승인하고 전쟁까지 각오하는 국방방침을 통과시키는 등 대체 원하는게 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만 잔뜩 만들면서 악화시켰다. 사실 이는 2차 고노에 내각의 실권자나 마찬가지였던 히라누마가 대미 개전에 강경하게 반대하는 친미 성향이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쨋든, 이러한 의미에서 고노에는 개인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반대했을지언정 개전의 책임을 아주 무겁게 질 수밖에 없다. 이미 중화민국과 전선을 형성하는 바람에 미국과 영국과의 관계는 파탄이 났다. 거기에 인도차이나 침공을 하면 미국의 주권( 필리핀)과 영국의 주권( 말레이시아)이 침해당해 반드시 개입할 줄을 알면서도 남방의 이권에 눈이 어두워 침공했다. 미국은 7월에 영국과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 인도네시아)와 함께 석유수출금지를 포함한 대(對) 일본 수출입 금지령과 일본의 해외재산 동결령을 내렸다. 이렇게 되니 일본 석유 수입의 90%가 날라가버려 경제와 사회 전체가 난리가 났다. 결국 개전파와 미국의 등쌀에 시달리다가 총리질 못해먹겠다고 도망치듯이 사임해서 천황 히로히토마저 당혹케 하였다.
다음 총리로는 황족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을 세워 황족 내각을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군부에 속한 도조 히데키를 세워 군부를 제어해야 한다고 주장한 내대신 기도 고이치의 반대에 직면해 결국 도조가 총리가 된다.
3.4. 퇴임 이후
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이 연이어 승전을 거듭하자, 요시다 시게루 등 평화를 주장하는 관료 그룹과 손잡고 중립국의 중재 하에 유리한 조건으로 평화를 맺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히로히토의 측근 내대신 기도 고이치에게 의향을 전달했으나, 당시까지만 해도 도조를 지지한 기도가 묵살해 버리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간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고노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도조를 비판하고 나섰고, 이때문에 군부에게 비국민 소리까지 듣게 된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 등 반전 관료 그룹이나 오카다 게이스케 등 전쟁에 반대하는 중신 원로 그룹, 그리고 황도파와 손잡고 반 도조 활동을 전개한다.1944년에 도조가 사이판 전투의 책임을 지고 물러나자 도조의 사퇴에 반대했다. 근데 그 이유가 참으로 기가 막히다. 후임 총리가 무슨 죄가 있냐? 어차피 진 전쟁인데 도조놈이 끝까지 총리하다가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처형당하게 냅두자(...)[27] 이 당시 군부를 중심으로 소련과 교섭하여 중재평화의 형식으로 종전을 하려는 공작이 있었는데, 여기에 맞서 당시 반전운동을 펼치고 있었던 요시다 시게루와 결탁해 미국, 영국과의 평화협상을 하려고 했고, 천황에게는 "소련은 믿을 수 없으니, 공산주의자들이 난리를 일으키기 전에 당장 서방에 무조건 항복해야 한다." 하며 서한을 보낸 때가 1945년 초이다. 그러나 아직까지 소련과의 중재평화를 기대하며 결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히로히토가 시종장을 보내어 "나대지 마라."라고 전하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결전이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 것은 1945년 스즈키 간타로의 총리 취임 이후의 일인데, 이때 무슨 장난이었는 줄은 모르겠으나 소련의 중재에 반대하던 고노에 후미마로가 모스크바 특사로 임명되는 아이러니한 사태가 벌어졌다. 이때 거론되었던 협상 조건은 일본의 모든 식민지 한반도, 중국, 필리핀, 인도차이나 반도, 오가사와라 제도, 가라후토, 쿠릴 열도, 홋카이도, 류큐 등의 영토들을 포기하고 소련에 노동력을 제공하기 위해 일본군 장병들을 보내는 등이었다. 그러나 이미 다 이긴 전쟁을 굳이 포기할 이유가 없었던 소련은 고노에가 소련에 못 들어오게 막았고, 붉은 군대는 만주 작전을 발동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있던 고노에의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 중위는 포로가 되었다.[28]
3.5. 패전과 자살
1945년 8월 15일 히로히토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진 뒤 항복을 결정하고 옥음방송으로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직후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이 총리로 취임한 뒤 만든 내각에서는 부총리 겸 국무대신으로 입각했지만, GHQ가 일본에 들어오고 내각 자체가 유명무실해지자 요시다 시게루 등 종전 공작으로 친해진 인사들을 정계로 진출시켜 영향력을 유지했다. 연합국 쪽에 제대로 전범으로 찍혔음을 자각했는지, 형벌을 면하기 위해 잡지에 군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기고를 하기도 했다.1945년 10월 4일에 고노에는 맥아더를 만나서 " 천황과 그 주변 사람들이나 일본의 귀족( 화족) 세력, 일본의 재벌들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지 않게 하려고 노력했다." 하고 변명하거나, "전쟁을 막으려고 했던 사람들을 제거한다면 일본은 공산화될 거에요."라며 살아보려는 발버둥을 쳐보았다.
초기에 맥아더는 반공 자유주의자처럼 그럴듯하게 행세한 고노에에게 호감을 느껴 일본국 헌법을 개정하는 일을 맡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일본의 언론과 몇몇 정치인들은 고노에가 결과적으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는 책임에 대한 문제를 강하게 제기했고, 결국 1945년 말 사이토 타카오(斎藤隆夫)[29]의 연설이 고노에의 몰락을 가져오는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전쟁 책임의 문제에서, 본인의 의견으로는
도조와 고노에 이 양자에게 책임이 있다고 본다.
지나사변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번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의 책임이 도조 대장에게 있다면, 지나사변의 책임은 고노에 공에게 있다. 무력한
왕징웨이를
내세운 일,
삼국동맹을 맺은 일, 이런 것들은 미국과 영국에 대한 도발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일미회담은 왜 이루지 못했는가. 도조 대장은 전범이 되었지만, 고노에 공은 아직도 궁중과 엮이고 있다. 이건 국민의 사상에 악영향을 준다. 이걸 방치하는 건 왜인가?"
사이토 타카오, 1945년 말, 국회에서.
사이토 타카오, 1945년 말, 국회에서.
이 연설이 고노에의 정치적 생명을 끝장냈다.
이 때문에 더글러스 맥아더와 GHQ는 고노에 후미마로가 일본의 새로운 헌법을 개정하는 일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막아버렸고, 고노에 후미마로의 전범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노에 후미마로의 살아보려는 발버둥은 모조리 실패하고, 1945년 12월 9일 고노에 후미마로의 체포 영장이 발부된다. 고노에는 GHQ로부터 12월 16일 스가모 형무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고노에는 쇼와 덴노가 자신을 변호해주길 바랐지만, 천황은 그렇게 해줄 마음이 없었다. 고노에가 자살하기 하루 전, 고노에는 쇼와 덴노& 고준 황후 부부와 식사를 하길 원했지만 천황 부부는 고노에의 요청을 거절했다. 고위 귀족 출신, 그것도 오섭가인 고노에는 언제든지 천황을 접견할 권한이 있었으나, 그걸 거부당했다는 것부터가 버림받았다는 증거다. 사실 전범 여부를 떠나서 히로히토의 개인적인 입장에서도 일전에 고노에가 자신에게 저지른 무례한 언사 덕에 정나미가 떨어졌을테니.
결국 고노에는 1945년 12월 16일, 스가모 형무소 출두 당일 새벽에 청산가리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54세였다. 자살하기 전날 고노에는 독일에서 돌아온 이복동생 히데마로와 친구 고토 류노스케(後藤隆之介) 등을 초대해 마지막 식사를 함께했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차남 고노에 미치타카(近衛通隆)에게 유서를 남겼다.[30][31]
나는 지나사변(중일전쟁) 이래로 많은 정치적 과오를 저질렀다. 이에 대해 깊은 책임을 느끼지만, 이른바 전쟁범죄인으로서 미국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 것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특히 나는 지나사변에 책임을 느껴 이 사변의 해결을 최대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이 해결의 유일한 길은 미국과의 양해에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일미 교섭에 전력을 다했던 것이다. 그런 미국으로부터 이제 범죄인으로 지명받게 되니 참으로 유감스럽다. 나의 뜻을 아는 사람은 알 것이다. 미국에도 나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전쟁에 동반된 흥분과 격정과 승자의 지나친 행동과 조장, 패배한 자의 고도의 굴욕과 고의의 중상과 오해에 기초한 유언비어들, 이런 것들이 섞여 있는 여론,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냉정을 되찾아 정상으로 돌아올 날이 있을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신의 법정에서 정의의 판결이 내려질 것이다.
그보다 석 달 먼저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여 스가모 형무소에 갇혀 있던 도조 히데키는 고노에의 죽음에 "그 심정을 이해한다. 깔끔하게 죽은 그가 부럽다." 하는 말을 남겼다.
그의 시체를 조사하기 위해 미 제1기병사단의 대위가 시체를 검시하고 있다. |
결국 그는 일본 총리 중에서 2번째로 젊은 나이에 총리가 되어, 가장 단명한 총리(54세)이자, 유일하게 자살로 생을 마감한 총리가 되었다. 1945년 12월 21일에 장례가 치러졌고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고노에 가문 묘역에 묻혔다. 고노에는 귀족 출신인 모리 치요코와 결혼해서 2남 2녀를 낳았는데, 차녀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을 가서 낳은 외손자 두 명 중 장남은 훗날 제79대 일본 총리가 되는 호소카와 모리히로이다.
4. 여담
- 그가 황족과 왕공족 바로 다음 가는 일본 최고 화족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얘기지만 역대 총리 중 하인과 하녀를 가장 많이 보유했다.
- 키가 무려 180cm 이상으로 추축국 지도자 중 최장신이다. 사실 연합국이건 추축국이건 168cm인 윈스턴 처칠과 무솔리니를 제외하면 당대 기준 거의 장신이었다.
- 일본 최초의 연임 총리다. 그간 일본 제국에서는 중도 사임했다가 다시 총리가 되는 일은 많았지만 연속으로 대수를 이어간 총리는 전무했다. 전후 요시다 시게루가 최초이자 현재까지 유일하게 4연임 총리의 기록을 세웠다.
- 개전 직후 "우리 집 뒤에 있는 우물에서 휘발유가 나오던데?"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한 적이 있다. 그냥 한 말인데 이걸 군부에서는 진지하게 받아들여, 물에서 휘발유를 뽑아낸다는 터무니없는 연구를 한 적이 있다.
- 몇몇 사람들은 고노에가 태평양 전쟁 전후(前後)로 미국과의 교섭에 공을 들인 것을 들어 동정어린 평가를 내린다. 그러나 사이온지 긴모치를 비롯해 대내의 신망을 저버린 것과 자신이 일으킨 행동의 여파를 생각하지 않은 무책임한 행동을 놓고 보면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입장이다.
-
그의 이복동생인 고노에 히데마로는 일본인으로는 최초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자기 돈 주고 사서 지휘했으며, 1926년에는 NHK 교향악단의 직계 모체인 신교향악단을 창단하고 초대 상임 지휘자를 역임하며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4번을 세계 최초로 전곡 녹음하는 등 일본 관현악단 역사의 초기에 큰 업적을 남긴 인물로 유명하다.[32] - 고노에 후미마로의 사후 가문의 가주는 원칙대로라면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가 되어야 하나 그는 후미마로가 죽을 당시에 소련이 만주 진공때 포로로 잡혀버린 상태[33]였으며 차남 미치타카는 이복동생 히데마로의 양자[34]가 되었고 장녀인 고노에 아키코는 고준 황후의 외가인 시마즈 공작가문에 시집을 가서 2남 1녀를 낳고 잘 사는 듯 했으나 1945년 시마즈 가문에 자주 들락거리던 안마사 노구치와 눈 맞아서 자녀들을 놔두고 도망치는 사건을 일으켜 고노에가의 이름에 먹칠한 탓에[35], 결국 차녀 고노에 아쓰코가 호소카와 가문에 시집가서 낳은 차남 호소카와 모리테루(고노에 다다테루)를 고노에 후미타카의 사후양자로 들이는 식으로 고노에 가문을 이었다.[36]
5. 대중매체
- 2008년, TBS에서 1부 다큐멘터리와 2부 드라마로 구성된 2부작 특집극 '그 전쟁은 무엇이었는가 일미개전과 도조 히데키'(あの戦争は何だったのか 日米開戦と東条英機)에 등장한다. 배우는 야마구치 유이치로.[37] 육군대신이자 개전파인 도조는 빨리 개전 하라며 고노에 총리를 압박하고 있었고, 이에 고노에 내각은 버티지 못하고 총사퇴를 해버린다.
- 영화 도라 도라 도라의 초반부에서 등장한다. 수상관저에서 도조 히데키 총리, 마츠오카 요스케 외무대신과 대미 개전을 할 것인지를 두고 이야기를 나눈다.
- 다자이 오사무의 소설 여학생에도 이름이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신문에 실린 사진을 본 주인공이 "이마가 이상하게 생겨서 호감 안 가는 얼굴이다."라고 깐다.
- 2014년작 영화 엠페러(Emperor)[38]의 초반부에서 더글라스 맥아더의 부관 펠러스 준장을 만나 히로히토 천황의 전쟁 책임에 대해 추궁받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나름 카리스마 있게 연합국도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침략전쟁을 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지만, 전반적으로 일본 측 인물들을 미화한 영화 특성상 실제 고노에의 모습과는 거리가 있다.
- 영화 스파이의 아내에서 고노에가 삼국 동맹 조약 체결을 알리는 라디오 뉴스가 지나간다.
- 드라마 야인시대의 등장인물 고노에가 이 자를 모티브로 한것으로 보인다.
- 2019년 3월 9일 방송된, [다큐] 영상의 세기 PREMIUM 제12부 - 쇼와(昭和) 격동의 총리들[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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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세기 현대 기준 일본에서 Ethnic nationalism이 아닌 단순 Nationalism을 지칭할 때에는 '민족주의'(民族主義)라는 용어보다는 '내셔널리즘'(ナショナリズム)이라는 용어가 선호된다. 일본에서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Ethnic nationalism을 의미하는데, 이는 과거 천황제 파시즘과 결합해
야마토 민족의 우월성을 내세웠던 극우 민족주의를 연상시키는 데다가, (야마토 민족이 아닌)
류큐인이나
아이누인같은 전통적 일본 내 소수민족까지 배제하기 때문에 현재의 주류 보수우익에서 거리를 두는 편이다. 보수주의/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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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 해외에는 Konoye로 많이 알려졌다.
[2]
호소카와 모리히로의 친동생으로 본래 이름은 호소카와 모리테루다. 외백부인 고노에 후미타카의 양자로 들어가서 현재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3]
近衛秀麿(1898~1973), 일본의 원로 작곡가이자 지휘자. 당대 유명 작곡가인
야마다 코사쿠와 함께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도쿄교향악단을 설립했다.
[4]
장남 고노에 후미타카의 서자.
[5]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일본 역대 총리 중 최장신으로, 현재 기준으로도 장신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장신이다.
[6]
중일전쟁은 원래 사고로 시작된 국경분쟁 수준이었으나, 고노에와
육군성의 주도하에 대규모 전쟁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때문에 전후 연합국 측에서도 태평양 전쟁의 최고책임자는 도조, 중일전쟁의 최고책임자는 고노에로 지목하였다. 도조 히데키 대에 태평양 전쟁이 터지고 일본이 패망 직전까지 몰리긴 했는데 도조 히데키가 전국을
병영국가화 한 핵심적인 법적 근거인
국가총동원법도 이 시기에 공표될 정도였다. 이 밖에 그 유명한
난징대학살도 이 사람의 임기 중에 이루어진 것도 특기할 수 있다.
[7]
오섭가는 고노에, 다카츠카사(鷹司), 이치조(一条), 니조(二条), 구조(九条)를 말한다. 이들은 태정대신과 관백을 대대로 독점해왔는데, 그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관백자리에 앉기 위해서 우두머리인 고노에가의 양자로 들어갔다. 이 때문에 일본제국에서 황족 바로 다음으로 치던 가문들로,
제2차 세계 대전 패배 직전까지 일본 직계 황족은 고셋케나 같은 황족끼리만 결혼할 수 있었다.
[8]
정확히는 후지와라 북가 계열의 당주. 후지와라 전체에서는 남가가 종가이다. 하지만 남가 계열은 몰락했기 때문에 북가의 종가인 고노에가 실질적인 후지와라 씨족 전체의 당주로 취급받는다.
[9]
본명은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煇).
[10]
네이버에서 이 사람을 검색하면 아버지가 고노에 후미마로라고 되어있는데, 고노에 후미마로는 아버지가 아니라 외조부다.
히고 호소카와 가문(肥後細川家)의 자손이었던 모리테루가 고노에 가문을 잇게 된 이유는 고노에 후미마로의 유일한 적자 고노에 후미타카가 패전 후
소련에서 포로 생활하던 중 죽었기 때문에, 모리테루를 죽은 후미타카의 아들로 입양시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을 호소카와 모리테루(細川護煇)에서 고노에 다다테루(近衛忠煇)로 개명했다.
[11]
사망한 날이 정확히 1945년 8월 15일로, 아들의 실책이 광복에 영향을 준 것을 감안하면 기막히는 우연이다.
[12]
1926년 26살에 가와시마 미에와 결혼했으나 지병으로 후사 없이 요절.
[13]
이 항렬이면,
아키히토 상황의 24촌 족형이며,
나루히토 천황의 25촌 족백부이다.
[14]
이 혈통의 직계는 후미마로의 아들인 후미타카가 자식없이 죽으면서 부계로는 단절된다.
[15]
衍子. 카가 번주이던 마에다 요시야스(1830~74)의 셋째 딸.
[16]
다만 이때 고노에의 주장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의 입장에서 이상적인 주장이었다. 그가 주장한 황인종에 대한 인종차별 철폐와 아시아 민족의 연대 대상에 당연하게도 조선인, 대만인 등 식민지 피지배 민족은 포함되지 않았다. 또한 그가 희망했던 국제적 평등과 그에 따른 세계평화 역시 일본과 독일 등 후발주자에게도 식민지 획득을 통한 생존권이 부여됨으로써 확보되는 제국주의적 인식에서의 평등과 평화에 불과하였다.
[17]
도쿄제대는 그 시절 마르크스 관련 사상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18]
고노에가 히로히토보다 나이가 10살 많긴 하지만, 황태자 앞에서 다리를 꼬고 반말을 썼으니 매우 무례했던 것이다.
[19]
전체 귀족원 400석 중 연구회에 속하는 의석이 140석이었다.
[20]
회파 가입 기준이 작위가 후작 이상일 것(...)이었다.
[21]
중화민국 정부를 인정하되 서구의 패권주의나 자유주의, 자본주의를 극복해 일본이 주도적으로 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경제적, 정치적 공동체를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22]
고노에는
이누카이 쓰요시 총리가
5.15 사건으로 암살되었을 때, 총리 추천권을 가진 사이온지를 찾아가서 "강력한 정당내각을 만들거나 아니면 군부에게 내각을 만들고 엉망으로 굴러갈 경우 군부세력을 이것을 빌미로 제거하자"고 강경한 주장을 폈다.
[23]
군부가 대만주, 대중 문제와 외교 문제를 한꺼번에 통합하기 위해서 세운 기관으로, 외무대신
우가키 가즈시게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24]
"
유럽 천지가 복잡하고 괴기하다.", 즉 '유럽 돌아가는 꼬라지가 괴상망측하다'는 뜻이다.
[25]
해군 대장 출신. 해군대신과 총리 재임기간 동안
독일-
이탈리아의
삼국동맹을 반대하고 대미 화평을 주장해서 육군과 충돌했다.
야마모토 이소로쿠의 강력한 후원자였다.
1944년
도조 히데키가 사임하자 다시 해군대신을 맡아서 화평교섭에 나섰고 항복 선언을 주도했다.
[26]
공식적으로는 정당이 아니다
[27]
실제로 후임 총리인
고이소 구니아키가
옥사했으나. 이건 당사자가 악질 전범이라 그랬던 거고 그 다음이자 전전 최후의 총리인
스즈키 간타로는 이런 고초를 겪지 않았다.
[28]
후미타카 중위는 이후 1956년경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29]
만화가
사이토 타카오와 동명이인(1870년 9월 13일~1949년 10월 7일). 그는 13선 중의원으로서 반전(反戰)적 입장을 취하여, 초대 조선총독인
데라우치 마사타케 전 총리대신의 아들
데라우치 히사이치 육군대신과 격렬한 언쟁을 벌이기도 하였다. 강경한 반전 태도 때문에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이후 의회에서 대놓고 반전 연설을 하였고, 이 연설 때문에 중의원에서 제명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지만 그 다음 선거에서 오뚜기처럼 일어나 당선되었다. 당연히 타카오의 입장에서 고노에의
박쥐스러운 처신은 분노를 자아내기에 충분했으리라.
[30]
죽기 직전의 일화가 있는데 평소에 얼마나 마음이 약했는지 알 수 있다. 일화에 따르면 출두 하루 전날, 동생 히데마로는 형수 고노에 치요코와 함께 형의 저택 안에서 독약을 찾아다녔다. 히데마로는 마음이 약한 형이 자살한다면 권총은 사용하지 않을 것이고, 독약을 쓰더라도 괴로워하지 않고 즉사할 청산가리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차남 미치타카까지 합세해 청산가리를 찾고자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자택 어디에도 청산가리는 없었다. 그래서 마지막 식사가 끝난 후 형이 목욕하러 들어간 차, 형의 옷을 뒤졌지만 거기에도 독은 없었다. 안심한 히데마로와 치요코는 그만 잠들었다. 새벽 6시에 일어난 치요코가 남편의 방에 불이 켜졌음을 보고 들어갔더니 이미 후미마로는 숨진 뒤였다. 그는 목욕 중에도 청산가리를 몸에서 떼지 않았던 것이다.
[31]
고노에 미치타카의 회상에 따르면, 그는 새벽 2시경까지 아버지의 방에 머물며 대화를 나누었다. 날이 밝으면 스가모 형무소에 출두하실 것이냐 묻자, 아버지 후미마로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불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기만 했다고 한다. 이에 불길함을 느꼈는지 미치타카는 아버지에게 무엇인가 써 달라고 부탁했고, 오늘 밤은 같이 자자고 권했으나, 후미마로는 유서를 써 미치타카에게 건넨 뒤, '누군가 같이 있으면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로 물리쳤다고. 이후 미치타카는 아버지가 남긴 유서를 가지고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시라며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것이 아버지 후미마로와의 마지막 시간이 되었다.
[32]
여담으로 고노에는
안익태가 도쿄고등음악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스승이기도 한다.
[33]
후미타카는 1956년 시베리아 수용소 내에서 사망한다. 참고로 후미타카는 1944년
데이메이 황후의 조카딸인 오타니 마사코(2017년에 사망)와 결혼하나 갓 신혼을 즐길 무렵에 포로로 잡히는 바람에 둘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천한 출신의 여성에게서 서자 아즈마 류메이(각본가 겸 배우)가 태어났으나 아즈마 류메이와 고노에가의 교류는 없다시피했다고 한다.
[34]
원래 히데마로의 장남이 있었으나 관동대지진에 의하여 사망해 이들의 가독을 잇기 위하여 입양 보낸 것이였다.
[35]
물론 그렇지 않았더라도 이미 아키코의 장남이 6살의 나이로 요절하고, 차남이 시마즈 가를 이었기에, 최종적으로 다다테루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36]
고노에 다다테루의 형은 훗날 제79대 일본 총리를 지내는 호소카와 모리히로다.
[37]
배우의 키가 186cm인데, 고노에가 장신이라는 것을 반영한 캐스팅인듯 하다.
[38]
국내에서는 '맥아더: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 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하였다.
[39]
쇼와(昭和) 격동의 시대, 목숨을 걸고 일본의 방향타를 잡은 총리들의 고난과 갈등의 이야기를 영상 매체 발명 후 기록된 영상들을 수집하여 대표적인 총리 4명을 통해서 바라본 다큐멘터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