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장친위대의 기갑사단에 대한 내용은 제12SS기갑사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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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유겐트 Hitlerjugend Hitler Yout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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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 | 로고 | ||
<colcolor=#fff><colbgcolor=#DD0000> 약칭 | HJ | ||
국가 |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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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조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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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위 조직 |
독일 여자청년동맹 독일 소년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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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
10만명 (1932년) 800만명 (1940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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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청소년 조직, 준군사조직 | ||
창단 |
1922년 (유겐트분트) 1926년 7월 4일 (히틀러유겐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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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산 | 1945년 10월 10일 | ||
주요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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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HER ZU UNS! Hinein in die Hitler-Jugend (우리에게 오라! 히틀러 유겐트에 입단하시오) |
나치 독일의 당 및 관영 청소년 조직. 1922년에 설립되어, 1945년 해체되었다.
독재자들의 필수라고 할 수 있었던 독재자 우상화 교육을 위한 기관이었다. 이런 단체가 흔히 그랬듯 가족애를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는 세뇌를 유도했는데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가족에 대한 애정을 교묘히 당과 독재자에 대한 애정으로 바꾸도록 하는 수법이다. 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평범한 독일 가정의 아들이 히틀러유겐트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부터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했는데 이를 야단치자 단검을 빼들면서 자신의 충성은 오로지 총통과 나치당만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부모를 위협했다.[1]
현대에 들어서는 독재자 숭배를 위한 청소년 세뇌의 대명사로 여겨지는 데다 나치 독일의 여러 극악무도한 전쟁범죄에도 가담한 역사가 있었기 때문에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2. 역사
히틀러유겐트의 본부로 사용된 요나스 백화점(Kaufhaus Jonaß) 건물. 전후에도 살아남아 공산당의 당사로 쓰이다가 현재는 예술가를 위한 주택으로 사용중이다.
2.1. 초창기
1922년 3월에 조직되었던 '국가사회주의 청년동맹(NSDAP)'이 1926년 7월에 재건된 것이다.18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원으로 하고 돌격대(SA)의 일부로서 일종의 전체주의적 관념을 가졌으며 나치당 초반에는 이론학습을 위한 야간 모임이나 소풍·시위·선동활동을 했다. 대원의 69%는 청년 노동자와 도제, 10%는 상업 관계자, 12%는 학생이었는데 그 중에서는 실업자의 비율이 높았다. 1932년 말에는 대원이 10만 명이었으나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34년 말에는 약 358만 명으로 증가했는데 전 독일의 정치 · 종교 · 군사 · 스포츠 관계의 전(全) 청소년 단체를 해산·흡수시켜서 히틀러유겐트가 유일한 청소년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반항아들이 없지는 않았으며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스윙 청소년, 모이텐 같은 반체제 청소년 집단이 나타났다.[2]
히틀러유겐트는 크게 4단체로 나누어졌다. ①10~14세의 소년으로 조직된 독일소년단, ②14~18세의 청년으로 조직된 본래의 히틀러유겐트 ③10~14세의 소녀로 조직된 소녀단, ④14~21세의 여자로 조직된 독일여자청년동맹으로, 그 중 17∼21세의 여자는 '신앙과 미(美)단'이라는 특별조직을 만들었다.
1936년 12월 이래 전독일 청소년 남녀 전원을 강제적으로 조직하는 기관이 되었고 나치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체육·통치기관이 되었으며 점차 스포츠나 사상교육보다도 근로 봉사와 전시하의 군사 보조노동이 중시되었다. 기본적으로 히틀러유겐트 단원들은 군대식 퍼레이드 연습을 받고 기초 군사 훈련도 받았는데 이들 중 엘리트 소년단원들을 차출하여 공군의 신체 조건이 맞는 단원들은 루프트바페 양성 학교로, 나머지는 히틀러유겐트 학교에 입학시켜서 더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도록 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전쟁 초기에는 징집 영장의 발송이나 배급카드의 분배, 간단한 노동 지원 등 간단하고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맡았고 점점 전쟁이 심해지자 군용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는 이들을 돕거나 고철을 수집하거나 방공호같은 군사시설 건축 노동을 하게 되었다. 1942년 후반부터는 군사 훈련을 충분히 수료했다고 판단된 17~18세 청년들을 차출하여 무장친위대에 편입시켜 독소전쟁에 참전하도록 했다.대전 말기가 되면 이미 1943년 이후 패망의 길을 걸어가던 제3제국의 상황 덕분에 초기의 파시즘 보이스카우트에서 청소년 의용군으로 변질되어 14세 이상 소년단원들을 마구잡이로 차출하여 각종 전투 병과에 우겨 넣어 소년병으로 활동시켰는데 대공 부대에 입대해서 적군 폭격기를 사격하고 탐조등을 조종하거나 일선 부대로 보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도록 했다. 즉 18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군대에 입대시켰다.
1945년에는 아예 14세 이하 소년들조차 군인처럼 취급해서 포위망을 뚫고 들어오는 연합군을 상대로 참호를 파고 부상자를 구하고 불을 끄고 전투를 벌이는 등의 고된 일을 해야 했는데 물론 이 상황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면 무조건 총살이었다. 사실 이때 쯤 되면 막나가는 히틀러가 모든 독일인은 전투원이라고 선언하고 유아에서 노인까지 전투에 투입하고 이를 거부하면 친위대가 즉결처분하고 다녔다.
1943년에는 아예 1926년에 태어난 히틀러유겐트 출신 소년들만을 모아 제12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를 창설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을 글라이더로 훈련시켜 제트 전투기 He 162에 태워 연합군 중(重)폭격기들을 요격하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해당 제트 전투기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결국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독일 재무장 선언을 한 이래 독일 공군은 신체조건을 만족하는 소년단원들을 항공기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때는 적어도 연습기를 동원하는 등 그럭저럭 갖춘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지만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공군 파일럿이 급해진 독일 공군은 교관들조차도 전선에 투입하거나 비행기를 띄울 줄만 알면 바로 전선으로 투입하면서 훈련 수준도 어이없을 정도가 되어 버렸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러더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하는 독일기를 왕왕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착륙 도중에 전멸하고 마는 상황이었다.
이는 결국 루프트바페 베테랑 파일럿들에게도 상당히 큰 피해로 돌아갔는데 비행 편대 형태가 아예 초장부터 신입 파일럿들이 제거 되면서 망가졌고 편대 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압도적 수적 열세 속에서 동료기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각자 연합군과 소련 공군을 상대하게 되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무리 베테랑 조종사라고 해도 압도적 수적 열세와 동료기들의 지원 부재, 그리고 만만치 않은 상대 공군 앞에서는 하나 둘 격추당했다.
3. 역대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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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fff> 초대 | 제2대 |
발두어 폰 시라흐 | 아르투어 악스만 |
히틀러유겐트의 단장은 국가 유겐트 지도자(Reichsjugendführer)라고 불렸으며 부단장은 간단히 참모지도자(Stabsführer)라고 불렸다. 히틀러유겐트가 만들어지자마자 단장 직위가 만들어진 것은 아니고 1931년 단체 규모가 커지자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측에서 단장 직위를 신설했고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한 후 공식적인 정부 직위로 자리잡게 되었다.
초대 단장을 맡았던 발두어 폰 시라흐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았는데 교도소에서 풀려난 후 나치 전범 출신중에서는 드물게[3] 자신의 죄를 뉘우쳤으며 유겐트를 추모하는 행보를 보이다가 1974년에 사망하였다.
4. 단체 분위기
초창기에는 그래도 입단시에 주말을 활용하여 시골 소년들이 도회지 등으로 소풍, 견학을 가기도 하고 리조트 등의 시설을 즐길 수도 있어 지루한 일상의 탈출구로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기도 했지만 전쟁이 격화되면서 휴양 시설 등이 파괴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되면서 이용할 기회가 줄어들고 힘들고 지겨운 군사 훈련이나 노동에 동원되는 게 일상이 되자 점차 기피 대상이 되어 갔다.히틀러유겐트 학교들은 독일 국방군에서는 척결된 병영부조리를 그대로 가져와서 시행하기도 했다. 히틀러유겐트 학교를 배경으로 한 독일의 영화 나폴라에서 묘사되지만 히틀러유겐트 교육은 상당히 가혹했다. 물론 독일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는 그 이상으로 더 엄격하고 힘든 훈련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병영부조리도 적었다. 하지만 히틀러유겐트 쪽은 상당히 가혹행위가 심각했는데 윗 학년 소년단원들이나 히틀러유겐트 교관들이 군기 잡겠답시고 공개 망신이나 가혹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5. 현대의 평가
몇몇 고령의 독일 노인들은 한때 유겐트 소속임을 부끄럽게 여겼고[4]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고 회상한다.사실 당시에는 청소년이면 강제로든 자의로든 동원되었다 보니 적극적으로 친나치적 행보를 보이지 않는 이상[5] 단순히 '당시 히틀러유겐트 소속이었다'는 이유로 그렇게까지 까이는 편은 아니다. 귄터 그라스나 베네딕토 16세가 유겐트 소속이었다는 게 밝혀졌을 때 잠깐 논란이 되긴 했지만 딱 그 정도로 끝난 것도 이 때문이다.
6. 상징
6.1. 유겐트 단검
Das HJ-Fahrtenmesser[6]단원이 부모에게 단검을 뽑아 반항한 에피소드 등에서 언급되는 히틀러유겐트 단검은 꽤 유명하다. 히틀러유겐트에서는 단원들에게 단검을 지급했는데 피복류에 신경 많이 쓴 것으로 유명한 나치 독일 시기 물건답게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이다. 어린 소년들에게 번쩍거리고 멋지게 생긴 칼은 상당히 탐나는 장난감이었다. 칼날에 "Blut und Ehre" 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피와 명예" 라는 뜻의 나치 구호다.
유겐트 단검은 물량이 많았기 때문에 전후에는 연합군이나 소련군에게 노획되어 기념품이 되기도 했고 나치 장식만 떼어내고 팔아치우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차거나 입대하거나 등의 사유로 나가면 단검을 반납하지 않아도 됐으므로 전장에서 계속 갖고 다니던 이들의 것들이 많이 노획되기도 했다.
히틀러유겐트 단검은 2차대전 이후에도 오랫동안 독일 보이스카우트용 칼로 사용되었는데 보이스카우트용으로 나온 버전은 로고가 Fleur-de-lis로 바뀌었고 디자인도 살짝 다르다. 전후 보이스카우트 버전은 독일의 Linder Solingen에서 패스파인더(pathfinder)라는 이름으로 아직 생산 중이기 때문에 지금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6.2. 단가
자세한 내용은 전진하라 전진하라 문서 참고하십시오.7. 히틀러유겐트 출신의 유명 인물
- 클라우스 폰 암스베르크 - 네덜란드의 베아트릭스 전 여왕의 부군이다.
- 교황 베네딕토 16세 - 히틀러유겐트에 소속되어 대공포대에 복무한 경력이 있다.
- 니클라스 루만 - 베네딕토 16세처럼 히틀러유겐트에 소속되어 대공포대에서 복무했고 연합군에 붙잡혔는데 반강제로 히틀러유겐트에 가입한 터라 행진도 싫었고 인사법은 더더욱 싫었고 덤으로 나치 정권의 끔찍한 자기홍보도 싫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는 부모의 영향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치 때문에 장사가 안 된다고[7] 욕을 하기도 했고 어머니는 스위스계라 스위스에 잘 놀러가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
헬무트 슈미트- 청소년 시기에 급속도로 세를 불려나가던 나치당과 아돌프 히틀러에 심취하여 1930년대 초반 부모를 속여 유겐트에 가입하려고 한 적이 있었지만 이는 실패했고 결국 부모님은 헬무트에게 알려주지 않은, 숨겨진 유대인의 혈통에 대해 언급하였다고 한다.겸사겸사 존내 쳐맞았다고 한다.헬무트 슈미트의 말에 의하면 이때부터 국가사회주의와 전체주의 사상에 회의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하며 결국 서독의 진보 정치인이 되어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총리가 되었다.
-
강세형- 한국인으로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3년 동안 히틀러유겐트 소속으로 있었으며 해방 이후 히틀러유겐트를 본뜬 준군사조직인 대한청년단의 훈련학교장을 맡았다. 이범석에게 나치즘(혹은 파시즘)에 대한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준 철학자다. 해방 이후 이범석에 대한 철학적 영향력은 연구를 통해 입증되었으며 해방 이전 이범석에게 나치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심어준 조선인 독일 유학생으로 추정되고 있다.
8. 매체에서
- 스트라이커즈 1945의 린 바일러( Bf109 조종사)도 히틀러유겐트 출신이라고 한다.
- 베를린 공방전을 다룬 영화 《 다운폴》에서 유겐트 소속의 소년·소녀들이 8,8cm FlaK를 맡는 장면이 나온다. 이 중 알프레드 체크를 모티브로 한 단원인 페터 프란츠가 판처파우스트 대전차로켓으로 소련군 전차를 격파한 공로를 인정받아 히틀러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1945년의 히틀러가 알프레드를 만난 사진을 본뜬 듯하다.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페터를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마지막 포탄을 쏜 이후 모두 자살을 하거나 사살당한다. 그러나 페터의 가족들도 그라이프 코만도들에게 죽고, 페터는 떠돌아 다니다가 트라우들 융에를 만나 호수에 버려진 자전거를 꺼내서 타고 소련군이 점령한 베를린을 빠져나간다.
-
영화
지옥의 영웅들.
사무엘 풀러가 감독한 전쟁 영화로 원제 The Big Red One은 미 제1보병사단의 부대 상징이며 별명이다. 특공 대작전으로 알려진
리 마빈이 양차 대전을 다 겪은 고참 부사관으로 나왔으며,
스타워즈의
루크 스카이워커로 유명한
마크 해밀도 비중 있게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한 어린 히틀러유겐트 저격수가 주인공 분대원 한 명을 사살한다. 분대장이 저격수를 생포하여 다른 분대원 앞에 끌고 오자 그들은 모두 흥분하여 그 소년병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분대장이 "누가 죽일거냐?" 라고 묻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결국 분대장은 소년병을 죽이는 대신 볼기를 손으로 계속 때리는 벌을 내린다. 소년은 호되게 맞으면서 계속 히틀러 만세를 외치지만
이후 울면서 아빠를 찾는다. 전쟁의 참혹함을 말해주는 상당히 인상적이면서도 씁쓸한 장면이다.
이 와중에 위 영상에 댓글에는 미군이 이런식으로 소년들을 세뇌 한다라는 드립이 댓글로 있다.[8]
- 공작왕에서는 히틀러유겐트로서 행불되어 버린 게 25만명이나 된다라고 나온다. 지크프리트 폰 미드가르트가 이끄는 네오나치항 공작이 겨루게 되는데 실상은 미드가르트는 페이크 보스였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의 흑기사 이야기에서는 전쟁 막바지에 나치당 관료가 보충병이라며 히틀러유겐트 소년병들을 주인공인 에른스트 폰 바우어 대위에게 데리고 오자, 선임 소년병과 나치당 관료를 두들겨 패며 어린애들은 집으로 가라고 호통친다. 이에 나치 관료가 이 사실을 당에 보고하겠다고 협박하자 주먹을 날리며 "멍청한 말 하지 말아. 자네보다 먼저 이반이 베를린에 도착할 거야." 라고 받아치기도 했다.
- 영화 《모뉴먼츠 맨:세기의 작전》에서는 미술품 회수부대원 두 명이 건너편 폐건물의 소총수의 견제질에 당황하다가 소총수를 잡기 위해 건물에 진입한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소총수의 정체는 히틀러유겐트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유겐트 포로들에게 히틀러가 꿍쳐둔 미술품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 CSI : NY 시리즈에서는 히틀러유겐트였는데, 나치에 가담하여 여러 사람들을 죽이고 수십 년 동안 미국에서 생활한 범인이 잡히는 장면이 나온다.
- 장갑척탄병에서 주인공 프란츠가 SS 소위로 승진한 후 히틀러유겐트 사단으로 전속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다.
- 울펜슈타인: 더 뉴 오더에 언급되는 프라우 엥겔 산하의 'SS 소녀친위대'는 히틀러 유겐트의 분파라 할 수 있다.
- 울펜슈타인 2: 더 뉴 콜로서스에서는 히틀러 유겐트를 주인공으로 한 시트콤 "Trust in Brother"가 방영 중이라고 한다.
-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상륙 작전이 끝난 직후 카파조가 멜리시에게 기념품이라며 시체에서 노획한 히틀러 유겐트 대검을 건네고 안식일에 빵 자르는 칼이라며 잠시 흐느낀다.
- 조조 래빗은 타이카 와이티티가 감독한 히틀러 유겐트를 주요 소재로 다룬 영화이다. 10살짜리 유겐트 소년이 인간성과 나치즘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장하는 내용을 그린다. 2차대전 말기 유겐트가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를 블랙코미디가 들어간 시선으로 꽤 자세하게 다룬다. 비슷한 시기와 배경을 다룬 몰락과는 달리 비교적 밝은 분위기인만큼 어느정도 순화되어 묘사된 편이나, 궁지에 몰린 나치독일이 유겐트 단원들에게 폭탄을 쥐어주며 소련 탱크로 달려가 자폭하라고 내모는 등 잔인한 짓을 저지른 사실 또한 거의 정확하게 묘사하였다.
- 나폴라의 배경이 되는 알렌슈타인 학교.
- 1959년에 전쟁 말기를 다룬 '죽음의 다리(Die Brucke)'가 제작되었으며,[10] 2008년 리메이크 되었다.
- 히틀러의 아이들에 전반적인 이야기들과 역사, 현대에도 괴로움 속에 살아가는 내용이 담겨 있다.
- 제0시 대통령을 죽여라라는 웹툰에서 대통령 직속 경호원인 주인공이 히틀러 유겐트 단검과 유사한 검을 소지하고 있다. 회상에서는 13세 때 대통령에게 하사받은거라고 나오는데 주인공은 당시 머리가 헤집어져서 기억이 온전치 못하고, 거짓 기억들이 섞여있는 것으로 볼 때 확실하지 않다.
- Why? 세계 대전과 전후의 세계에선 전쟁신 마르스가 보낸 전령인 요제프가 히틀러 유겐트였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9. 여담
- 추축국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유겐트 역시 일독교류의 일환으로 일본에 방문했는데 이때 일본 제국측에서 이들을 환영한답시고 만세 히틀러유겐트(aka 독일청년단 환영의 노래)라는 환영가를 써주기도 했다.
- 조선에서는 일제 말기 친일로 완전히 전향했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도 히틀러유겐트를 여러 번 다루기도 했다. 그 중 소년조선일보에서는 세계의 어린이 지면에서 "독일의 미래를 질머진 힛틀러-유겐트; 나치쓰 혼으로 길러지는 육백만 어린이"라는 타이틀 아래 유겐트를 긍정적으로 소개하는 기사에 지면 상당수를 할애했다.
- 나치에 직접적으로 가담했던 조직들 중 연령대가 가장 낮았기에 상당수의 히틀러유겐트 출신 인물들이 21세기 들어서도 생존해 있었다. 국방군이나 친위대원들중 가장 젊은 축에 속했던 군인들도 대부분 1920년대생이었지만 히틀러유겐트 단원들은 1930년대생도 있었다. 하지만 2020년대 들어 어느덧 이들의 나이도 80대 후반에서 90을 넘기고 있다. 이들마저 모두 사망하면 나치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던 인물들은 모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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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체된 단체 | 삼족오 소년소녀대 · 화랑 · 히틀러유겐트 |
[1]
조지 오웰의
1984에는 주인공 옆집에 사는 파슨스의 아이들이 비슷한 식으로 권총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자녀들에 의해 신고당하고 증발될 것이다" 라는 주인공의 독백과 나중에는 실제로 파슨스가 아이들에게 반정부적인 잠꼬대를 신고당해 애정부에 끌려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하다.(E. L. Doctorow, On the Brink of 1984)
[2]
1993년 영화
스윙키즈를 보면 이들 반나치 청소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저항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
[3]
대부분의 나치 독일 전범들은 자신의 행위가 옳았다는 태도를 취하거나 아예 몰랐다고 항변했지 진짜로 자신의 죄를 반성한 경우는 드물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
루돌프 회스, 군수 장관
알베르트 슈페어 등이 속죄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정말로 속죄한 것인지는 현재까지도 논란이다.
[4]
니콜라스 루만이 대표적이다. 유겐트 소속 당시에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5]
예컨대 히틀러유겐트 가입이 강제화되지 않던 1930년대 초반 가입하고 이후 친위대로 가입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미하엘 비트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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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스 히틀러유겐트 파어텐메사" 정도로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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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네부르크에서 양조장과 더불어 펍을 운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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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at shows US how a child's mind can be manipulated.The system can be a mindben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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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히틀러유겐트 라는 제목으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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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의 감독을 맡은 베른하르트 비키는 훗날 1962년작 '지상 최대의 작전'의 독일 파트를 감독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