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earfix]
1. 개요
독일어: Die Weiße Rose영어: The White Rose
나치 독일에서 활동했던 비폭력 레지스탕스 단체.
2. 결성
한스 숄 1918년 9월 22일 ~ 1943년 2월 22일 |
조피 숄 1921년 5월 9일 ~ 1943년 2월 22일 |
크리스토프 프롭스트 1918년 11월 6일 ~ 1943년 2월 22일 |
쿠르트 후버 교수 1893년 10월 24일 ~ 1943년 7월 13일 |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1년에 한스 숄(Hans Scholl)과 조피 숄(Sophie Scholl) 남매가 결성했다. 이들은 뮌스터의 아우구스트 폰 갈렌 주교가 나치의 안락사 정책[1]을 비판하는 강론을 듣고 충격받아 갈렌 주교의 허락을 받아 주교의 강론 전문을 전단으로 만들어 뮌헨 대학에 뿌렸다. 하얀 장미라는 단체의 이름은 스페인 소설 "하얀 장미"에서 따온 것인데 한스 숄과 조피 숄은 게슈타포의 심문을 받을 때 자신들의 이름을 이 소설의 등장인물인 유드 네보른과 안네트 둠바흐라고 말했다. 이후 한스 숄은 전단의 표제를 하얀 장미라고 붙였고 곧 이 단체의 이름이 되었다.
이후 하얀 장미에는 한스 숄과 조피 숄 남매를 비롯해서 뮌헨 대학에 다니던 학생들인 알렉산더 슈모렐(Alexander Schmorell), 빌리 그라프(Wilhelm ,,Willi‘‘ Graf), 크리스토프 헤르만 아난다 프롭스트(Christoph Hermann Ananda Probst)와 그들의 교수였던 쿠르트 이포 테오도어 후버(Kurt Ivo Theodor Huber) 등이 가입했는데 이들 중에는 동부전선에서 귀환한 귀환병들이 있었고[2] 조피 숄은 독일청년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3. 활동과 체포, 처벌
이들은 기독교의 인내와 정의의 정신 하에서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가 패망할 것이라고 선전했다. 이들의 전단은 주로 남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배포되었는데 이는 북독일에 비해서 남독일에서 반나치 활동이 좀 더 활발한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처음 히틀러는 뮌헨 근처의 남독일에서 세력을 얻었다.
|
|
|
|
|
|
1942년 7월의 활동 이후 주춤하던 하얀 장미의 활동은 다음해인 1943년 2월에 재개되었다. 이들은 2월 18일 마지막 전단을 뮌헨 대학의 수업 종료에 맞춰 공개적으로 배포하다가 나치당원인 뮌헨 대학의 경비[9]에게 발각되었고 숄 남매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수사가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이 조직에 가담했던 다른 멤버들도 잇달아 구속되었다. 마지막 전단에서는 나치에 맞서 파업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체포되어 인민재판소에 회부되어 재판을 받았다. 한스 숄, 조피 숄,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검사보다 더 피고를 추궁하고 욕설과 모욕을 서슴치 않았던 나치의 악질 판사인 롤란트 프라이슬러에 의해 단심제로 치러진 공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한스와 조피는 재판에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념을 발언했으나 프롭스트는 남겨진 갓난아기와 아내를 참작하여 재판장에게 자비를 베풀어 줄 것을 청원하기도 하였다. 사형은 선고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두대(Fallbeil)로 집행되었으며 한스 숄은 동부전선 참전 자격으로 총살형을 요구할 수 있는지 물었으나 거절당했다. 조피 숄은 그들이 공개처형(교수형)으로 나치의 선전도구로 사용될까 봐 걱정했으나[10] 비공개 처형이란 말을 듣고 안도했다고 한다.
한스 숄과 조피 숄은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기 직전 각각 "자유여 영원하리" 와 "태양은 아직도 빛난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다른 멤버들이었던 쿠르트 후버와 빌리 그라프, 알렉산더 슈모렐은 두 번째 공판 이후 그해 여름까지 모두 사형에 처해졌다. 그들의 가족도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고 심지어 전단을 인쇄하는 것을 도왔거나 멤버 중 한 명인 크리스토프 프롭스트의 부인과 아이들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까지 체포해 6개월에서 1년의 실형을 선고할 정도로 하얀 장미에 대한 나치의 탄압은 극렬했다.
이때 이들의 목을 친 사람은 전설적인 사형집행인 요한 라이히하트였는데 그는 수많은 목을 쳤으나 미군정에 의해 사면된 후에는 나치 전범들의 목을 쳤다. 라이히하트는 대대로 내려오는 사형집행인 가문의 자손으로, 죽는 날까지 이들의 목을 친 것에는 아무 감정도 없고 자기 할 일을 했다고 주장하였다.[11]
이들의 활동은 쿠르트 후버 교수의 친구인 작곡가 칼 오르프에 의해서 알려졌다. 칼 오르프는 종전 직후 연합군에 전범으로 체포되었는데 자신이 하얀 장미의 창설 멤버 중 한 명이었고 쿠르트 후버 교수와 친구였다고 주장해 무죄로 석방되었지만 오늘날에는 하얀 장미의 활동과는 무관하다고 보는 게 일반적이며 심지어 그의 자식들까지 아버지의 주장을 부인했다. 칼 오르프가 살기 위해서 자신이 알고 있던 하얀 장미의 활동을 이용한 것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한편 쿠르트 후버 교수가 생전 교류했던 인물 중에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도 있다. 당시 이미륵은 나치 사상이 일본의 제국주의와 다를바 없다고 보고 같은 생각을 가졌던 후버 교수는 물론 그의 제자인 숄 남매와 반 나치 사상에 대해 토론을 해왔었다. 하얀 장미 사건 이후 이미륵은 나치 당국의 한층 엄혹해진 감시 하에서 전시 배급도 후순위로 밀리는 등 어렵게 살아갔지만 이미륵은 나치의 횡포에도 아랑곳하지 하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지켰고 도리어 어렵게 받은 배급을 후버 교수의 유가족들에게 나눠주었다. 이로써 이미륵은 얄궃게도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체제를 모두 겪었으며 양측으로부터 모두 탄압받았고 거기에 저항한 흔치 않은 이력을 지니게 되었다. 이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2019년에는 뮌헨에 후버 교수의 이름을 딴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새겨졌는데 바로 옆에는 후버 교수의 동판이 자리한다. 동판에는 이미록이 생전에 자주 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동산이 장미동산이 되리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4. 이후
1978년 청사 출판사에서 처음 발행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참고로 책 서문에 독일연방공화국 초대 대통령인 테오도어 호이스(Theodor Heuss, 1884년 1월 31일 ~ 1963년 12월 12일)의 추도문이 수록되어 있다. 관련 글
종전 후 나치의 연좌제식 탄압과 감시 속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숄 집안의 맏딸 잉에 숄이 "하얀 장미"라는 책을 출간해 이들의 활동을 널리 알렸고 전후 하얀 장미의 멤버들은 동서독 양쪽에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순수한 정신에서 나치에 반대한 활동을 한 인물들로 존경받게 되었다. 잉에 숄의 책은 한국에서도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번역되어 1970년대 출판되었는데 '아미자'라는 줄임말로 유명하며 10월 유신과 대한민국 제5공화국 시기에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운동권 대학생들의 필독서이자 입문서였다.
뿐만 아니라 현대 독일, 특히 뮌헨 시내에서는 하얀 장미단의 흔적을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뮌헨의 거대 공립 기숙사 단지인 Studentenstadt는 하얀 장미단 단원들의 이름을 딴 Christoph-Probst-Str.(크리스토프 프롭스트 길), Willi-Graf-Str.(빌리 그라프 길)에 위치해 있으며 루트비히-막시밀리안 대학교(Ludwig-Maximilians-Universität München) 역시 메인 캠퍼스 근처의 광장들을 "Geschwister-Scholl-Platz"(숄 남매 광장) 및 "Professor-Huber-Platz"(후버 교수 광장)라고 명명하였다.[12] Karlsplatz의 광장 바닥에는 하얀 장미단 단원들의 이름과 생애, 추모사, 그리고 처형당하던 당시의 신문들을 조각 형태로 찾아볼 수 있기도 하다. 2003년에는 독일 역사의 위인들을 부조로 만들어 기리는 레겐스부르크[13]의 발할라 기념사원에 반나치 운동가로는 최초로 조피 숄이 선정되어 화제가 되었으며 2012년에는 멤버 중 정교회 신자였던 알렉산더 슈모렐[14]의 희생과 수난을 기념하기 위해 해외 러시아 정교회는 그를 신순교자, 수난자로 시성하였다.
이들을 기리기 위해 여러 형태의 문화예술 작품도 창작되었는데 1983년에는 한국 출신으로 독일에서 활동하는 작곡가 박영희가 하얀 장미의 유인물과 조피 숄이 인민재판소에서 남긴 최후 변론, 쿠르트 후버가 남긴 마지막 편지 등의 문장을 조합해 '봉화(Flammenzeichen)' 라는 성악 독창곡을 발표했다.
|
뮌헨 쿠르트 후버 슈트라세에 설치된 기념 동판. 좌측은 백장미단의 리더 쿠르트 후버 교수이며 우측이 이미륵이다. |
쿠르트 후버 교수와 반나치 사상을 논의하던 사람 중에는 한국 독립운동가이자 ' 압록강은 흐른다'의 작가인 이미륵이 있었다. 당시 이미륵과 후버 교수, 그리고 언어학자인 프란츠 티어펠더 교수 셋은 자주 모여서 나치를 비판하면서 의논하곤 했다. 이미륵 본인과 주변인, 티어펠더 교수의 회고에 따르면 미륵은 후버 교수의 깊은 이해자였으면서도 그의 활동을 상당히 우려스럽게 바라본 모양이다. 결국 그가 처형당하자 이미륵은 이 시대의 가장 고귀한 사람을 잃었다며 탄식했다고 한다.
사건 이후 후버 교수의 가족들은 연좌제와 감시에 시달리면서 전시 배급도 제대로 못 받고 있었고 알던 지인들은 연루될까 두려워 이들과 연락을 끊었다.[15] 그러나 이미륵은 전술했듯이 나치의 횡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쟁이 끝날때까지 친구의 가족들을 돌봐 주었으며 후버 교수의 유가족들은 물론 독일 사람들도 이미륵을 유일하고 진정한 친구이자 고결한 사람으로 기억하게 된다. 이렇듯 이미륵은 일본 제국과 나치 독일 양쪽의 지배를 모두 겪으면서도 그에 모두 반대했던 몇 없는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다.[16] 이로 인해 2019년 뮌헨에 후버 교수의 이름을 딴 쿠르트 후버 거리에 이미륵의 기념 동판이 새겨졌으며 바로 옆에는 후버 교수의 동판이 자리한다. 동판에는 이미륵이 생전에 자주 하던 "사랑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는 가시 동산이 장미 동산이 되리라"라는 말이 새겨져 있다.
2023년에 마지막 생존자였던 트라우테 라프렌츠가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103세로 사망했다. #
5. 매체에서
백장미 | 조피 숄의 마지막 날들 |
일본에서는 TEAM D.O.C가 하얀 장미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꽃과 늑대의 제국」이라는 만화를 출판하기도 했는데 5권은 동인지로 나왔다고 한다.
히틀러의 마지막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는 2002년의 다큐멘터리 '맹점'에서 하얀 장미에 대해 언급하였다.[17] 종전 직후에는 '난 그때 너무 어려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나치에 부역했던 것을 합리화했지만 길을 걷던 중 우연히 조피 숄의 동상을 보고 자신과 같은 나이에 나치에 항거한 소녀가 있었단 사실에 충격을 받아 "젊음이 죄의 변명이 되진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었다고 증언했다. 전차 에이스인 오토 카리우스가 이들을 폄하하는 발언을 했다고 알려지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그런 발언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실제로 독일군 참전자들이 이들을 곱게 보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참가자들과 달리 부정적으로 보지는 않는 데다 카리우스가 이들에 대한 폄하 발언을 했다는 증거도 없고 그냥 뜬소문일 가능성이 높다.[18]
[1]
T4 작전. 말이 안락사지 사실상의 학살이었다.
[2]
한스 숄은 의대생으로 동부전선에 실습을 나간 적이 있었다. 덕분에 당시 참혹한 전장 상황을 이미 경험했다.
[3]
Verführer
[4]
Untermenschentum
[5]
Befreiungskrieg, 반히틀러 활동을
나폴레옹 전쟁에 비유한 것.
[6]
Heil
[7]
Güter
[8]
이상의 전단 번역본들 출처: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2012, 평단)
[9]
이 인간은 전후 연합군의 지령을 받은
독일 경찰에 체포되었고 나치 협력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재판에서 자신의 업무가 대학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법 광고물 살포를 저지하는 일이고 이걸 수행했을 뿐이라고 항변했지만 5년형을 선고받았고 그대로 확정되어 1951년까지 복역했다.
[10]
무장친위대의 특임대들이 저지르고 다닌 학살로, 특히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들을 이렇게 공개처형해 놓고 목에 팻말을 걸어 매달아 놓은 채 방치해 두었다.
[11]
단두대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는 이야기지만 실제로 그는 처형 시 전통적인
프로이센 왕국 처형인 복장인 연미복에 실크햇, 가죽구두와 흰 장갑을 착용하고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극렬 나치로는 보지 않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전범 기소 시에도 제4단계인 단순가담으로 기소되었다가 약간의 형만 산 후 풀려났으며 심지어 계속 교도소에서 근무하며 나치 전범들의 목을 쳤고 전쟁 후에도 약 100여 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그런 연유인지 전후에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었다. 묘비도 호화스러운데 매우 유복한 삶을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12]
TUM과 LMU 등 뮌헨 내 주요 대학들의 메인캠퍼스가 근처에 있어 사실상 대학로 역할을 하는 Universität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볼 수 있다.
[13]
Regensburg. 뮌헨에서 기차 타고 한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가까운 도시.
[14]
출생지가 러시아이며 어머니가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딸이었다.
[15]
대표적인 사람이 후버 교수의 친구였던 작곡가
칼 오르프인데 그는 게슈타포가 들이닥치기 직전에 후버 교수에게 우연히 연락했다. 이때 후버 교수의 부인이 그에게 나치 쪽에 어떻게 손을 좀 써 달라고 빌었지만 그는 엮이기 싫어서 이를 거절했다. 결국 후버 교수는 처형당했고 후버 부인은 이후 오르프를 두 번 다시는 보지 않았다.
[16]
일본에는 저항하면서도 나치는 좋게 바라보던 독립운동가들이 몇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 국방장관
이범석과 초대 교육부(문교부) 장관
안호상(공자 한반도인설 등 대한민국의 유사역사학자의 거두라는 악명으로 각광(?) 받고 있다.)으로 두 명 다 이미륵처럼 1930년대에 독일에 있으면서 히틀러 정권을 몸소 겪었다.
[17]
이 인터뷰는 후일날 부분적으로
다운폴에서 인용되었다.
[18]
그런데 정작 대한민국에도 유명한
앗! 시리즈의 2차대전 편에선 '차라리 나치들에게 나를 잡아가달라고 하지 그랬어'라고 비꼼을 당하는 등 여러 가지로 안 좋은 소리를 듣고 있기도 하다.
오토 카리우스 입장에서는 정말 억울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