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09 13:36:02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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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7월 9일, 불타는 유대교 회당을 구경하는
북부집단군 병사들과 리투아니아인 주민들.

1. 개요2. 유형
2.1. 학살과 홀로코스트
2.1.1. 범죄 명령(Verbrecherische Befehl)과 교육2.1.2.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2.1.3. 개별 사례
2.1.3.1. 방첩국과 비밀 야전 경찰2.1.3.2. 폴란드2.1.3.3. 소련
2.1.3.3.1. 남부집단군2.1.3.3.2. 중부집단군2.1.3.3.3. 북부집단군
2.1.3.4. 유고슬라비아2.1.3.5. 프랑스2.1.3.6. 이탈리아2.1.3.7. 육군의 기타 인물 및 부대2.1.3.8. 해군과 공군
2.1.4. 장병들의 인식
2.2. 무차별 강간
3. 결론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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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수백만의 남성, 여성 그리고 아이들에게 안겨준 불행과 고통에 상당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들은 명예로운 직업인 군인의 명예를 실추시켰습니다. 군사적인 지침 이외에도 히틀러와 나치 동료들의 호전적인 야심은 탁상공론이고 무익했습니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명령에 복종하겠다는 군인의 맹세를 조롱했습니다. 자신들의 방어에 적합할 때는 복종해야 했다고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히틀러의 잔혹한 범죄에 직면했을 때는 불복종했다고 말합니다. 진실은 그들이 이 모든 범죄에 적극적으로 가담했거나, 침묵하고 묵인했다는 것입니다."
- 뉘른베르크 재판 당시 연합국 재판관이었던 제1대 오크시 남작 제프리 로렌스(Geoffrey Lawrence, 1st Baron Oaksey) 경이 독일군 피고인들에 대해 남긴 평가. 팀 리플리의 《독일 국방군: 제2차 세계대전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472p에서 발췌.

1. 개요

Verbrechen der Wehrmacht, 국방군의 범죄

독일 정부의 정규군인 국방군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그동안 많은 부분이 알려지지 않았다. 냉전 기간 동안 그들은 거짓 신화에 보호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과 장성들은 자신이 범죄 또는 홀로코스트와 무관하며 학살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고 스스로를 변호했다. 전범 재판에서도 다수의 장병들과 장성들은 무죄방면되었고, 징역에 처해진 이들 또한 몇 년 지나지 않아 감형받고 풀려났다. 국방군은 나치의 인종주의와는 거리를 두었으며, 프로이센 왕국군 독일 제국군의 후신으로서 국가방위 임무만을 충실하게 수행했다는 것이 그간의 통념이었다. 홀로코스트 등의 학살 범죄는 나치당과 히틀러의 사병인 친위대, 그리고 그 중에서도 수용소 경비대인 해골부대나 보안대, 게슈타포 그리고 특무대의 소행으로 여겨졌다.

현재도 일각에서는 국방군의 범죄를 부정한다. 또는 영미연합군이나 소련군의 학살과 같은, 전시 상황에서 불가피하게 벌어진 부수적인 피해라고 강변하며 홀로코스트와의 연관성을 회피한다. 이는 실제로 1990년대에 독일 전역을 순회하며 독일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던 ' 국방군 범죄 전시회'를 관람하곤 분개하던 일부 노병들의 반응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실제로는 국방군 또한 나치즘에 강하게 물들어 휘하 장병들에게 인종 청소를 강요했으며, 그게 아니라도 홀로코스트와 전쟁 범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되어 있다.

2. 유형

2.1. 학살과 홀로코스트

2.1.1. 범죄 명령(Verbrecherische Befehl)과 교육

"우리는 해독한 기생충을 제거하듯 세계 유대인들을 제거한다. 우리가 그들을 친다면, 그것은 우리 민족의 적을 격퇴하는 것일 뿐 아니라 모든 민족의 적을 무찌르는 것이다. 유대인을 제거하는 투쟁은 신이 원하는 종족의 순수함과 건강함을 위한 도덕적 투쟁이다. 그리고 새롭고 좀 더 정의로운 세상을 위한 투쟁이다."
- 1939년의 국방군 정훈교육 교재(Schulungshefte) 제5권에 실린 C.A. 호베르크 박사의 논문, '독일사 속의 유대인'의 마지막 문단.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22p에서 발췌.
"전쟁 목적은 모스크바의 통치자로 대변되는 하등 인간 빨갱이 족속을 쓸어버리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인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명 앞에 서 있다. 세상은 이 사명이 어떻게 완수되는지 목도할 것이다."
- 국방군 선전국 소식지인 "부대 소식(Mitteilungen für die Truppe)"의 기사 중 하나. 소련 침공 직후인 1941년 6월 발간된 J 12호에 수록된 문구이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8p에서 발췌.

당장 전쟁이 시작된 1939년에 국방군 지도부, 즉 육군 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와 해군 사령관 에리히 레더, 공군 사령관 헤르만 괴링은 나치당 이념을 장병들에게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내부적으로 합의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가르치기 위한 정훈교육 교재를 제작해 일선 장병과 소부대 지휘관들에게 배포했다. 상단에 있는 인용문이 바로 해당 교재에 수록된 논문을 발췌한 것으로,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며 장병들에게 주입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나치즘은 독일 국방군의 공식적인 이념이 되었다. 동 시기, 국방군 선전국(Wehrmachtpropaganda) 또한 설립되어 독일 장병들에게 인종주의를 주입했다.

국방군은 학살에도 깊게 연관되었다. 그들 자신이 직접 저지른 학살 행위 또한 상당했으며, 간접적인 조력은 더욱 심각했다. 미국 사학자 티머시 스나이더(Timothy D. Snyder)는 저서 《 블랙 어스》에서 국방군, 친위대, 보안대, 친위특무대와 질서경찰 등등은 모두 서로 얽혀 있었으므로 이들의 책임을 무 자르듯이 나누어 국방군 전투부대만 분리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가령 국방군이 친위대를 지휘하거나 친위대가 국방군에 협조 요청을 보내는 경우는 셀 수도 없이 많았다. 그리고 특무대는 다 합쳐 봐야 3000명 규모였고, 이 때문에 그들의 학살에는 현지인, 국방군, 다른 친위대 부대들, 질서경찰 등의 조력자들이 항상 따라붙었다. 특무대의 학살은 그들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과 비유대인 학살, 포로 학살, 빨치산 진압 또한 서로 밀접한 관계를 지녔기에 역시 쉽게 분리될 수 없다. 집단 총살의 경우가 특히 그러하였으며, 가스실 희생자들의 경우에도 비유대인들과 포로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세부 유형을 보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전방 부대들은 즉흥적인 포로 학대 및 학살 사건의 큰 축을 담당했다. 전방의 독일 병사들에게 있어서는 포로를, 그것도 '열등인종' 포로를 후방으로 이송하는 것은 상당히 귀찮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그냥 살해해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소련군이 침략자 독일군에게 가한 포로 학대 소식들이 들려오면서 독일군 병사들의 이런 학살 행위는 '열등인종' 적들에 대한 일종의 복수로서 정당화되었다. 가령 1941년 10월 7일 북부집단군 소속 독일 제61보병사단장 지크프리트 헤니케[1]는 휘하 병사들이 소련군에게 살해당한 독일군의 시신 세 구를 발견했다는 보고를 받자마자, 수감 중이던 소련군 포로 93명을 총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대다수의 국방군 장교단과 병사들은 치안 안정화를 담당하는 협조 요청이 들어오면 전방과 후방을 가리지 않고 보통 아주 순순히 협조했다. 상술한 것처럼 특무대들의 경우 집단군 및 그 산하 야전군들에 배속된 존재들이었으므로 국방군 지휘관 다수는 특무대의 행동을 직접 보고받았다. 본인들이 치안전쟁에 직접적으로 투입되는 일이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II. Im rückwärtigen Heeresgebiet
Kommissare, die im rückwärtigen Heeresgebiet wegen zweifelhaften Verhaltens ergriffen werden, sind an die Einsatzgruppe bzw. Einsatzkommandos der Sicherheitspolizei (SD) abzugeben.

II. 후방지역의 경우
후방사령부 작전지역에서 미심쩍은 행동으로 인해 체포된 정치장교는 특무대(Einsatzgruppe) 또는 보안대 특공대(Einsatzkommandos der Sicherheitspolizei)'에 넘긴다.
- 1941년 6월 6일, 국방군최고사령부에서 하달한 <정치장교에 대한 처우에 관한 지침(Richtlinien für die Behandlung politischer Kommissare)>. 일명 " 정치장교 명령(Der Kommissarbefehl)"이라 불리는 그것이다.

후방에서 벌어진 학살의 경우 '파르티잔 토벌전(Bandenbekämpfung)'의 성격을 띄었으며, 그 양상이 더욱 심각했다. 이름은 파르티잔 토벌전이지만 실제로는 군사 작전이라기보다 인종 청소에 가까웠다. 주로 국방군 육군 집단군들의 후방 지역(Rückwärtiges Armeegebiet)에 의해 수행되었는데 이들은 3개의 국방군 보안사단들과 수 개의 국방군 비밀 야전 경찰 제대들을 거느리고 지역 안정을 담당한 제대였다. 후방지역은 북, 중앙, 남부 집단군별로 하나씩 해서 총 세 곳이 존재했다. 후방지역 세 곳의 활동을 중앙에서 감독하던 인물은 국방군 병참감이자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 사령관 에두아르트 바그너 대장으로, 그는 국가보안본부 총수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과 함께 국방군과 친위대의 협력의 기본 토대를 놓은 인물이다. 1941년 4월 28일 두 사람은 "육군 내 보안경찰과 보안대의 특수 임무 규정"을 설정했고 이는 육군총사령관 브라우히치 원수의 명의로 예하부대에 하달되었다.

이 규정은 국방군과 친위대, 그리고 경찰이 공조하여 '토벌'을 벌이는 기초적인 협력 지침으로 기능했다. 바그너와 하이드리히의 지침으로 인해 후방지역은 같은 지역들의 친위대 및 질서경찰 사령부의 조력을 받아 국방군, 친위대, 질서경찰들을 전부 지휘할 수 있었다. "독일국방군"의 번역자인 경상대학교 사학과의 김승렬 교수에 따르면 세부적인 협력 체계는 다음과 같다: 친위대 보안대(SD)는 육군최고사령부와 협력하며, 그 산하의 친위특무대(Einsatzgruppen)는 후방사령부(Befehlshaber des rückwärtigen Heeresgebietes)와 협력한다. 실제 학살을 수행하는 특공대(Einsatzkommando/Sonderkommando)는 각 집단군과 야전군에 배속된다. 또한 국방군 집단군 사령부들은 각자의 후방 지역들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특무대는 생활과 보급, 이동에 관해서는 소속된 국방군의 지휘를 받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곳도 제재를 가한 곳은 없었다.

국방군은 본격적인 ' 최종 해결책(Endlösung)'의 수립에도 관여되어 있다. 국방군 공군의 총사령관이자 제국원수였던 헤르만 괴링은, 1941년 7월에 국가보안본부장으로서 친위대 보안대와 비밀경찰의 수장이었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에게 서신을 보내어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을 빠른 시일 내에 마련할 것을 지시하였다. 이듬해 초 하이드리히가 괴링의 명령에 따라 여타 나치 인사들을 모아 연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반제 회의다. 이곳에서 유대인 처리 방침이 절멸(Vernichtung)로 확정됨에 따라 곳곳에 절멸수용소가 세워지고 학살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2.1.2.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

"모든 장교는 유대인들이 첫째 독일인의 삶의 터전에 대한 권리와 세계에서의 독일인 위상을 침해한다는 사실을, 둘째 우리 민족을 부추겨 세계의 적들과 싸우게 하며 가장 훌륭한 우리 젊은이들이 피를 흘리게 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인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장교는 유대인 문제에 대해 분명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 '고귀한'유대인과 그렇지 않은 유대인 사이에 근본적 차이란 없다. 독일인들이 유대인의 위협을 감지하기 이전에 맺은 관계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것이든 상관없이, 정리되어야 한다. 국제적인 유대 볼셰비즘에 대한 우리의 단호한 투쟁을 통해 유대인의 진면목이 분명히 드러났다. 모든 장교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고 유대인과의 어떤 관계도 거부해야 한다. 이를 위반할 시 그 장교는 '장교로서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육군에서 퇴출될 것이다. 귀하의 부하 장교들이 이 지침을 숙지하기 바란다."
- 1942년, 육군 인사부장 루돌프 슈문트 대장[2] 의 명령.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79 ~ 180p에서 발췌.

국방군이 특히 소련 지역에서 인종 청소에 직간접적으로 가담할 수 있었던 심리적, 사상적인 이유는, 그들의 관점에서 거수자는 곧 빨치산이자 볼셰비키이며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시점에서 보면 이는 심각한 논리적 비약이지만, 적어도 당대 전선의 독일군에게 이 명제는 참이었다. 나치 독일의 관점에서 유대인들은 유럽의 문화를 좀먹고 독일 제국의 등에 칼을 꽂아, 이길 수 있던 1차 세계대전을 패전으로 몰아넣은[3] 존재였다. 1차 대전 말기 피폐한 생활에 고통받던 국민들은 사회주의에 물들고 전쟁을 보이콧하였는데, 전후 반유대주의자들은 시위대와 사회주의자들이 유대인 배후세력의 영향이나 사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를 유대-볼셰비즘(Jüdischer Bolschewismus) 음모론이라 하며, 대표적인 반유대주의 유형 중 하나로 꼽힌다.

이로서 유대인과 사회주의자는 점차적으로 동일시되었으며 나치 독일이 들어선 이후 이 경향은 더욱 심해졌다. 소련은 그러한 사회주의의 총 본산이었고, 실제로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기도 했으므로 유대인과 볼셰비키들 역시 쉽게 동일시되었다. 1941년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 역시 그런 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이 편견은 전장에서의 생존 위협과 불확실성으로 인해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볼셰비키 정부의 지원을 받는 파르티잔 유격대, 그리고 그들을 숨겨주고 먹을 것을 갖다 주는 민간인 또한 유대인과 동일시했다. 실제 민족적, 혈통적으로 그들이 유대인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표현을 빌리자면 '유격대는 곧 유대 빨갱이였고 유대 빨갱이는 곧 유격대' 였다. 다시 말해, 유대인은 독일의 을 의미했다. 소련군 정치장교가 잡히는 대로 살해할 것을 주문한 1941년 6월 6일의 ' 정치장교 명령' 또한 같은 맥락을 공유한다.

동시에 소련과 그 모태가 되는 러시아와 동유럽 자체도 독일인들이 보았을 때 유럽이라기보다는 열등한 아시아에 가까웠다.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Said)가 저서 《 오리엔탈리즘》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유럽과 아시아는 인위적으로 분리된 대립되는 관계였다. 유럽이라는 개념은 역사적으로 '아시아'에[4] 대응하는 과정에서 서쪽으로 확산되었다. 그렇기에 그 중간에 놓인 러시아와 동유럽과 슬라브족의 경우, 때에 따라서는 아시아 국가로 취급되었다. 러시아를 ' 몽골' 내지는 ' 훈족'이라고 칭하거나 오스트리아 빈의 시민들이 '아시아는 란트슈트라세에서 시작한다(Asien beginnt an der Landstraße)'라고 말하는 것은 이런 논리를 반영한다.[5] 독일인들도 이런 논리를 가졌으며, 스스로를 아시아와 접한 유럽 세계의 최전선으로 생각했다. 반대로 소련은 유대 볼셰비즘이 지배하는 아시아 국가로 간주되었다.
"...도덕적으로 부패한 열등 민족인 적을 제거하는 것만이 국방군이 유럽과, 특히 독일을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로부터 구하는 것이다."
- 독일 육군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1941년 11월 17일 내린 '동부에서의 독일군의 행동 강령'. 호트 상급대장은 당시 남부집단군 소속의 17군 사령관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작전 중이었다. 《히틀러의 장군들 1: 만슈타인 평전》 338p에서 재인용

때문에 사상적, 역사적인 관점에서 독일과 소련의 충돌은 필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유럽의 질서를 교란하는 소련과 그 열등한 아시아적 유대-볼셰비키들은 반드시 파괴되어야 했으며, 그 땅은 독일 민족의 정당한 레벤스라움으로 개발되어야 했다. 리보니아를 지배하던 독일계 기사단의 사례, 러시아 곳곳의 농지를 개발한 독일계 러시아인, 갈리치아와 발칸 반도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 제국 등은 독일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역사적 사례가 되었다. 폴란드의 경우에도 독일의 당연한 영토였으며, 열등인종인 폴란드인들은 계도되어야 했다. 과거 폴란드 분할을 통한 지배 경험은 독일에게 역사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이는 대부분의 독일인들이 공감하던 바였으며 국방군 또한 마찬가지였다. 국방군은 나치 정부에 의해 찬란한 유럽 문명의 질서와 도덕을 보전한 우등민족의 수호자로 선전되었다. 헤르만 호트 상급대장이 말한 '유대-볼셰비즘으로 무장한 아시아의 야만행위'가 바로 이런 비약적으로 발전한 독일의 인종주의 논리를 잘 보여주며, 국방군 또한 히틀러의 인종주의 논리와 너무나도 유사한 생각을 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사상으로 무장한 군대가 동진한 결과는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인종 청소 행위로 나타났다.
'바르바로사 계획'은 처음부터 두 가지 차원에서의 섬멸전쟁을 지향했다. 작전적 측면에서는 전통적인 작전적 사고의 원칙에 따라 적군을 신속하게 섬멸하고자 했다. 여기서 섬멸은 군사적 관점에서 물리적인 말살이 아닌 전투수단인 지상군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작전적 원칙들이 세계정복을 지행하는 전쟁 속에서 유명무실화되거나 도구화되고 말았다. 군부는 1941년 3월 30일 이후에야 비로소 이러한 진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히틀러는 매우 의미심장한 어투로 이날 장군들에게, 향후의 전쟁이 서부와 북부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에서의 '통상적인 전쟁'과는 전혀 다른, 특별한 성격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공표했다. 과거 나폴레옹이 시도했듯 유럽에서 러시아의 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무너뜨리고 영국에게서 대륙에서의 주도권을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와 동시에 소련을 붕괴시키고 나아가 소련의 주민들을 말살 또는 노예화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혔다. 뿐만 아니라 이 목표는 앞으로 다가올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전쟁 목표, 즉 사상적인 '불구대천의 원수', 볼셰비즘과 유대교를 지구상에서 소멸시키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언급했다. 휘르터Hürter의 말처럼, 바야흐로 '적군의 섬멸을 지향하던 군사적 개념이 한 국가와 사상의 소멸이라는 정치적 개념으로 확장'되었던 것이다.

이에 히틀러는 장군들에게 유럽에서의 전쟁수행에 있어서 지금까지 적용된 전통적인 준칙과 규칙들을 폐기하라고 지시했다. 장군들은 곧 벌어질 전쟁이 인종적, 사상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히틀러의 요구가 지나친 것이었음을 인지했다. 할더는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번 전쟁의 양상은 서부 전역과 매우 다를 것이다. 동부 전역은 매우 혹독할 것이며 미래를 위해 이를 참고 견뎌내야 한다." 물론 히틀러가 자신의 계획을 세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폴란드 점령정책을 시행했던 친위대의 행동을 목격한 이들은 당시 생활권 확보를 위한 히틀러의 전쟁이 어떤 것이었는지 분명히 이해할 수 있었다.
- 독일 연방군 게하르트 P. 그로스 대령의《독일군의 신화와 진실》 329p ~ 330p에서 발췌

그렇다면 상술한 인종주의 논리가 독일군의 행동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 연구소의 게하르트 P. 그로스(Gerhard P. Groß) 대령이 설명한다. 그는 당시 나치 독일의 인종주의와 독일군의 전통적인 작전술적 사고가 결합했다고 파악한다. 독일식 작전술의 핵심은 기동전인데, 이는 단순한 기동뿐만 아니라 기동을 통해 적의 주력을 포위하고, 갇힌 적을 물리적으로 '섬멸(Zerstören)'하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후방에서는 그 '적'이 정규군이 아닌 파르티잔이었던 것이다. 딱히 전선이랄 것이 없는 비정규전을 수행하는데다 자생적이기까지 했던 파르티잔의 특성상, 정규군 제대와 같이 뭉쳐 있는 '주력'이라 할 것이 불분명했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국방군은 나치즘과 아주 자연스럽게 결합했다. 국방군 지휘부는 제거해도 곳곳에서 일어나는 파르티잔의 힘의 근원을 찾아 나섰고 이에 대한 답을 준 것은 상술한 히틀러의 인종주의였다. 결국 국방군은 파르티잔의 섬멸을 위해서는 인근 마을, 더 나아가 주민들, 그리고 이민족 전체에 대한 섬멸이 필요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1990년대에 국방군 전시회를 주최했던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는 이에 대해 "파르티잔 없는 파르티잔 소탕전(Partisanenkampf ohne Partisanen)이라는 기이한 상황"이라고도 말한다.

이렇듯 여러 종류의 인종적, 사상적 적대감과 급진적인 민족주의 논리가 단계적으로 누적되고, 최종적으로 군사 논리와 결합하여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독재 체제에 결합한 관료제와 전시 상황, 그리고 전선의 불확실성 속에서 하에서 급진적으로 실행된 것이 바로 독소전쟁이라는 파괴적인 절멸전쟁(Vernichtungskrieg)이었다. 독일군은 절멸전쟁을 실제로 실행하는 집행자의 위치에 있었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여겼다. 다시 말해 동부전선에서 벌어진 주민들과 공산주의자에 대한 집단 학살 행위는 유대인 대학살과도 상당한 부분을 공유하며 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국방군 역시 홀로코스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발터 폰 라이헤나우, 에리히 만슈타인, 헤르만 호트, 발터 모델 등, 유명한 독일 장군들 대다수가 이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대부분이 전후 재판정에서 자신은 비정치적 군인일 뿐이며 학살을 몰랐다고 강변했으나, 실상은 그들 또한 히틀러의 절멸전쟁이 무엇인지 가장 잘 이해하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2.1.3. 개별 사례

2.1.3.1. 방첩국과 비밀 야전 경찰
„Canaris und seine Leute wurden von Anfang an tief in die Planungen des Vernichtungskrieges verstrickt.“
카나리스와 그의 부하들은 절멸전쟁 계획을 입안하는 데 처음부터 깊이 관여했다.
- 미하엘 뮐러(Michael Mueller), <히틀러의 방첩국장 카나리스 전기(Canaris: Hitlers Abwehrchef. Eine Biografie)>에서
친위대 보안대가 협력한 대상은 정확히는 국방군최고사령부 방첩국(Abwehr) 소속의 비밀 야전 경찰(Geheime Feldpolizei, GFP)로, 국방군의 게슈타포라는 평가를 받는 조직이다. 1939년 국방군최고사령부장 빌헬름 카이텔 상급대장의 명으로 세워졌으며, 나치 독일에 반대하는 정치범, 즉 공산주의자나 유대인, 독일 점령지의 거수자들을 검거하여 고문하거나 살해했다. 업무가 겹치는 친위대 보안대와는 국방군 병참감 바그너와 보안대장 하이드리히가 협력 규정을 제정한 1941년부터 협업에 들어갔다. 후방사령부 산하에서 GFP가 친위대 및 질서경찰 사령관의 지휘를 받거나 반대로 SD가 국방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기도 하는 등, 둘 간의 차이는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사라져갔다. 실제로 이들은 1944년부터는 아예 친위대가 주도하는 국가보안본부의 관할 하에 놓이게 된다.

프랑스의 독일군 점령지들에서 벌인 색출 작업이 가장 유명하나, 이들은 발칸과 소련 및 폴란드에서도 같은 작업을 벌이면서 주민들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정치장교 명령을 집행하는 이들이기도 했다. 방첩국장 빌헬름 카나리스 해군대장은 최고사령부로부터 받은 해당 명령을 휘하 GFP에 실행하도록 지시했다. 반나치 인사였던 카나리스마저도, 개인적인 성향과 뒤에서의 쿠데타 기도와는 별개로 방첩국장이라는 직책 상 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상술한 바와 같이 카나리스의 전기 작가인 미하엘 뮐러는 카나리스와 그의 부하들 역시 히틀러의 절멸전쟁에 깊게 개입했다고 파악한다. 가령 폴란드 침공 당시 방첩국에서는 너무 많은 희생자들을 체포하여 친위특무대가 살해하도록 넘겨버렸는데, 이는 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마저도 부담감을 느꼈을 정도였다.

반론은 있다. 독일 정보기관들의 인권 침해에 대해 연구하는 기자인 에리히 슈미트-에엔붐(Erich Schmidt-Eenboom)은 친위대 보안대가 과격해질수록 카나리스와 방첩국은 그들로부터 거리를 두려고 시도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카나리스 전기의 저자 미하엘 뮐러는 아무리 그렇다고 해서 방첩국이 반나치주의자들의 집단이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방첩국에서 일한 13,000명의 장병들 중 확실한 반나치 인사는 카나리스를 포함해 고작 50명밖에 되지 않았다. 이 반나치 인사들 또한 보수적인 독일 군인이었으므로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 역시 나치의 성장에 조력하고 볼셰비키에 대한 적의로 가득 차 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
2.1.3.2. 폴란드
대전 초기인 폴란드 침공 당시만 놓고 보더라도 국방군은 폴란드 포로와 민간인을 학살하거나 인간방패로 삼는 등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폴란드 침공 당시 벌어진 전체 민간인 학살 행위의 60%가 국방군에 의해 벌어졌다. 당시 폴란드 민간인 사망자는 20만 명으로, 그 중 10만여 명은 공습으로, 2만여 명은 국방군과 무장친위대에 의해 조직적으로 학살당했다.

또한 적어도 3천여 명 이상의 폴란드 포로들이 학살당했으며, 적게는 수십여 명 규모에서, 많게는 쳉스토호바(Częstochowa) 학살처럼 1천여 명이 넘게 학살당하는 일도 잦았다.[6]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100 polakow za 1 niemca'(독일인 1명당 폴란드인 100명) 학살이다. 독일군은 폴란드 국내군이 SS장교 1명과 독일 경찰을 암살한 것을 복수하기 위해 폴란드인을 100명을 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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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3. 소련
독소전쟁 당시 소련 지역은 국방군이 자행한 집단 학살이 가장 심각한 지역 중 하나였다. 본 문서에서는 북부, 중앙, 그리고 남부의 세 독일 집단군 구역을 중심으로 설명한다.
2.1.3.3.1. 남부집단군
파일:Walter Karl Ernst August von Reichenau.jpg
▲ 남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
"유대-볼셰비즘 체제에 맞서 싸우는 야전군의 근본적 목표는 유럽 문화에 스며든 아시아의 영향을 제거하고 그 힘을 뿌리 뽑는 것이다. 이것은 장병들이 전통적인 군사 의무 이상의 사명을 수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유럽에서 우리 장병은 전쟁의 규칙에 따른 전투에만 전념할 것이 아니라 또한 철저한 종족 이념을 전달하는 자로서 우리와 종족적으로 연관된 사람들 및 우리에게 가해진 야만적 행위를 가차 없이 응징해야 할 것이다."
- 1941년 10월 10일 하달된 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

룬트슈테트의 남부집단군의 경우, 전쟁 직전 키이우 방면의 소련군 사령관이었던 게오르기 주코프가 만반의 대비를 해 놓은 덕에 진격 속도가 매우 느렸다. 바꾸어 말하자면 남부집단군 최전선 부대가 어느 한 지역에 머무르는 시간이 길었으며, 때문에 학살 사건에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 그리고 남부집단군 산하의 제6군 사령관이자 룬트슈테트의 뒤를 이어 남부집단군 사령관에 오르는 라이헤나우는 " 강조 명령"으로 알려진 인종청소 장려 공문을 국방군 전체에 배포했다. 집단군사령관 룬트슈테트와 제17군 사령관 호트는 이에 동조했으며 만슈타인은 학살을 방임했다. 거기다 정치장교 명령까지 더해지자 남부집단군 구역에서는 전후방 가리지 않고 파괴 행위가 남발되었다. 이 천인공노할 강조 명령은 6군 사령관으로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부임하고 나서야 폐기되었지만 남부집단군의 전쟁 범죄 행위는 기 사예르의 잊혀진 병사에도 나오듯 계속 되었다.

그 유명한 바빈야르 학살이 바로 남부집단군이 가담한 사건으로, 국방군의 유대 볼셰비즘 논리가 홀로코스트에 있어 어떻게 동작했는지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키예프 전투 당시 소련군 남서전선군의 강력한 저항을 맞닥뜨렸던 독일 남부집단군 소속 제6군은, 도시를 점령한 이후 소련 정치장교들과 NKVD 잔당들이 도시 곳곳에 숨겨 놓고 기폭시키는 폭발물들에 시달렸다. 결국 9월 24일 독일군 사령부 근처에서까지 폭탄이 터져 수십 명이 사상당하자 독일군들은 키예프의 유대인들을 볼셰비키로 간주하여 전부 살해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리기에 이른다.

이틀 뒤인 9월 26일의 회의에서 라이헤나우와 제6군 참모부는 프리드리히 예켈른 SS대장의 특무대 C를 불러 대처 방안을 마련하기를 지시했고, 이로 인해 벌어진 것이 바로 바빈야르 학살이다. 총살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은 특무대 C와 우크라이나인 협력자들이 맡았으나 이를 계획한 것은 제6군이었던 것이다. 장병들 역시 키예프 유대인들을 이송하는 작업에 투입되었다. 유대 볼셰비즘 논리에 따라, 정치장교와 NKVD와는 아무 상관이 없던[7] 우크라이나 유대인 3만명이 바빈야르 골짜기에서 무더기로 살해당했다.
2.1.3.3.2. 중부집단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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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 벨라루스 고멜 지역에서 민간 가옥을 파괴하는 중부집단군 병사들.
"한 마을에서 고의적인 파괴 및 방해 행위가 발생했다면, 해당 마을에 사는 유대인 전체를 몰살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사태를 일으킨 이들, 아니 적어도 그들의 배후 세력만큼은 확실히 척결할 수 있다."
- 독일 육군 구스타프 폰 마우헨하임 게난트 베흐톨샤임 소장이 밝힌 대파르티잔 작전 방침. 베흐톨샤임 소장은 1941년에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에 소속된 제707보병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그는 707사단 외에도 질서경찰 부대 및 리투아니아인 보조부대까지 거느렸으며, 1943년까지 벨라루스의 대파르티잔 작전을 수행하면서 대량 학살과 파괴 행위를 자행했다. 티머시 스나이더의 《 피에 젖은 땅》 421p에서 발췌.

중부집단군의 경우, 작전 시작 이후 얼마간은 파괴 행위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티머시 스나이더에 따르면 이는 역사적으로 딱히 정치적 실체를 가져본 적 없던 벨라루스의 특성 상, 독일이 이용할 만한 현지 정치권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르투어 네베가 이끌던 해당 지역의 특무대 B는 자신들의 학살에 조력할 협력자들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곧 현지 협력자들의 빈자리를 중부집단군 부대들과 친위대 및 질서경찰들로 채워넣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 중에서도 프리퍄티 습지는 독일 점령 지역 중 가장 파괴 행위가 심각한 지역으로 탈바꿈한다.

페도어 폰 보크, 귄터 폰 클루게 에른스트 부슈, 발터 모델과 같은 중부집단군 사령관들은 벨라루스 파르티잔 토벌전을 제지하지 않은 책임을 지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중부집단군은 반 히틀러 성향이 가장 강한 부대로, 나치즘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훗날 히틀러 암살 시도에 중핵을 맡는 이들이 다수 분포했다. 그게 아니더라도 모델이나 클루게같은 인물들은 히틀러에게조차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 또한 파르티잔 토벌전에 있어서는 질서경찰과 친위대의 학살을 방조하거나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가령 1941년 9월 24일에 중부집단군 사령부에서 열린 모길료프[8] 회의에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 사령관 막스 폰 솅켄도르프 대장은 휘하 사단장들과 함께 친위대원들의 '학살 특강'을 들었다. 당시 참석한 친위대 측 인원은 특무대 B의 아르투어 네베, 하인리히 힘러의 대리인 자격으로 참여한 벨라루스 지역 고위 친위대 및 경찰 지도자 에리히 폰 뎀 바흐-첼레프스키, 그리고 무장친위대 기병여단[9] 사령관 헤르만 페겔라인 등이었다. 그들은 국방군 장교들에게 유대인 및 파르티잔 학살의 필요성을 역설함과 동시에 그 방식에 대해서도 강의했고, 시범까지 보여 주었다. 다음 날 인근의 크냐지치(Княжицы) 마을로 이동한 그들은 질서경찰 322대대가 실제로 마을을 포위하고 주민들을 색출하는 모습을 참관했다. 해당 마을에서는 거수자나 파르티잔 가담 여부가 의심되는 사람이 단 하나도 나오지 않았으나, 그들은 32명의 민간인들을 처형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자였다.

이후 중부집단군 후방 지역은 적극적으로 학살에 가담한다. 1942년 3월 26일부터 동년 4월 6일까지 이어진 밤베르크 작전(Unternehmen Bamberg)이 가장 대표적인 예시이다. 당시 중부집단군 후방지역의 제707보병사단은 슬로바키아군, 그리고 질서경찰 제315전투대대와 함께 파르티잔 진압 작전을 개시하여 약 4400명 가량의 ' 파르티잔'을 제거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확인된 사망자만 4396명이며 학계에서는 실종자 등 집계에 잡히지 않은 경우까지 감안하면 희생자가 6000명 이상일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막상 수거한 무기는 47정의 소화기 뿐이었고, 독일군은 다 합쳐서 7명의 인명피해밖에 입지 않았다. 이는 매우 비정상적인 수치로, 이는 그들이 살해한 4400명의 '파르티잔'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상태인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1943년 3월에 있었던 들소 작전(Unternehmen Büffel)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제프 전투의 일부였던 해당 작전을 통해, 발터 모델의 제9군 30만 명은 소련군의 포위를 떨쳐내고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탈출을 위한 퇴각로 정리 과정에서 그들은 약 3000명 가량의 '파르티잔'들을 사살하였는데, 막상 수거한 무기는 277정의 소총과 41정의 권총, 61정의 기관총 등 극히 소수였다. 역시 이는 9군이 살해한 이들 중 절대 다수가 실제로는 비무장 민간인이었음을 의미한다.

그 외에도 모델은 노동 적령기의 남성과 식량을 차출하고, 우물에 독을 풀고, 마을을 파괴하라고 지시했다.[10] 르제프를 탈환한 소련군의 보고서에 따르면 지역에 있던 대다수의 건물들이 파괴되었으며,[11] 이 세 도시에서만 15000명이 강제 노동을 위해 독일로 수송되었다.[12] 철도 거점과 1,000km에 달하는 철로, 전주와 1,300km의 전화선과 전선이 파괴되었다. 소련은 발터 모델을 전범으로 선포하고 법정에 세울 생각이 만반이었으나, 모델이 항복하지 않고 자살하면서 무산된다. 이는 민간인 피해를 고려하지 않는 전형적인 나치 독일식 빨치산 토벌전이었다. 이러한 진압 작전들은 1944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벨라루스가 해방될 때까지 이어졌다.
2.1.3.3.3. 북부집단군
"모든 전투 행위는 적을 가차 없이 그리고 완전하게 절멸하려는 확고한 의지로 수행되어야 한다. 특히 오늘날 러시아 볼셰비즘 체제를 지지하는 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 1941년 5월, 에리히 회프너 상급대장의 연설. 당시 그는 북부집단군 휘하 제4기갑군 사령관이었다. 볼프람 베테의 《독일국방군》 135p에서 발췌.

한편 가장 진격 속도가 빨랐던 북부집단군의 경우 전방 부대들이 집단토벌에 연관된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학살에 무관하다는 소리는 전혀 아니다. 발트 3국 지역 주민들 중에서는 친위특무대와 협력하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국방군 장병들이 동원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적었을 뿐이다. 가령 북부집단군 사령관 빌헬름 리터 폰 레프 원수는 자신 휘하 후방 지역의 학살을 보고받았음에도 방임했다. 또한 그는 레닌그라드를 포위하고 기근을 유도하는 작전을 입안하였다. 레프는 레닌그라드 공방전 당시 900일 간 벌어졌던 끔찍한 참상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 북부집단군 휘하의 야전군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회프너와 레프의 후임 사령관인 게오르크 폰 퀴힐러는 아예 한 술 더 떠 절멸전쟁을 긍정했다. 그들이 휘하 병력들에게 내린 지침들은 라이헤나우 명령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특히 회프너의 경우 무장친위대 제3기갑사단 "토텐코프"가 벌이는 학살을 매우 비판적으로 바라보던 인물이었으나 정작 그 역시 인종주의적인 명령을 내림으로써 휘하 장병들의 학살을 조장했다. 특무대 A는 전혀 제지를 받지 않았고, 오히려 상부에는 북부집단군이 잘 협조한다는 보고까지 올렸을 지경이었다. 가령 1941년의 리예파야 학살 당시 북부집단군 장병들은 시내에서 벌어진 집단 총살에 깊게 관여되어 있다. 그리고 리예파야에 주둔한 독일 해군 병력들은 친위특무대와 라트비아인 보조인력들이 해변 사구에서 벌이는 학살을 '관람'했다. 이는 당시 현장에 있었던 독일 해군 중사 라인하르트 비너에 의해 촬영되어, 영상으로도 남아 있다.
2.1.3.4. 유고슬라비아
또 다른 치안전쟁이 벌어지던 발칸 반도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세르비아에 있던 12군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프란츠 뵈메의 경우 별다른 명령이 내려오지 않았음에도 휘하 사단들을 동원해 세르비아 유대인들을 거의 쓸어버린 인물들이다. 1941년 10월 15일에서 같은 달 20일까지 벌어진 크랄례보 학살(Kraljevo massacre)이 대표적 예시다. 당시 티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과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가 독일군에 저항 중이었고, 독일군은 이들을 박멸하기를 원했다. 역시 유고슬라비아에서도 독일은 공산주의자와 유대인, 민주주의자를 싸잡아서 타겟으로 지목했고, 리스트 원수 휘하의 독일군은 다수 지역에서 우스타샤 독일 공군 Ju 87 급강하폭격기대의 협조를 얻어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

크랄례보 학살도 그 중 하나였다. 제342보병사단과 뵈메 대장이 이끄는 제18산악군단이 주도하였는데 제18군단 대부분은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출신자들이었고, 때문에 그들은 세르비아에 대한 감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뵈메 대장은 크랄례보 학살을 앞두고 이는 세르비아인들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을 암살한 것에 대한 복수라고 천명했을 정도였다. 거기다 그들은 당대 오스트리아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도 가지고 있었다. 크랄례보 학살에서만 3000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대부분은 민간인이었다. 1943년 이후 F 집단군이 형성되고 막시밀리안 폰 바익스가 부임한 이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2.1.3.5. 프랑스
2.1.3.6. 이탈리아
2.1.3.7. 육군의 기타 인물 및 부대
1937년 2월, 그는 히틀러유켄트 단장인 발두르 폰 시라흐의 연락장교로 임명되었다. 비록 그가 나치당에 가입하지 않았지만, 나치당의 강령을 가르치는 2개의 9일간 교육과정에 참석했으며 두 과정 모두 '유대인 문제'에 대한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의 정서는 강력하게 히틀러를 지지하는 쪽이었으며, 그 연장선에서 나치당에도 동조했다.
위대한 3인의 전사들 3장 p97
에르빈 롬멜의 경우에는 서유럽과 아프리카에서만 싸웠기에 이런 '절멸전쟁에 대한 책임'은 다른 장군들과 비교해 아주 적었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롬멜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몰랐다는 롬멜 신화의 주장 역시 매우 설득력이 적다. 홀로코스트 백과사전에서는 롬멜에 대해 확고한 나치즘 신념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으나, 다른 국방군 장성들처럼 나치와 공통의 목적을 공유했던 인물이라고 평가한다. 롬멜 전기를 다룬 위대한 3인의 전사들에서도 롬멜이 히틀러 유켄트 단장의 연락장교로 임명되며 장교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유대인 탄압의 정당성을 포함한 나치즘 사상 교육을 이수하였던 점, 1934년 힌덴부르크 사망 이후 국방군 장교들에게 히틀러가 요구한 충성 맹세에서 거리낌 없어했다는 점에서 롬멜이 나치즘에 반대하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그의 아프리카 군단에도 ' 친위특무대 이집트'가 배속되었으며, 그들의 목적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세력을 절멸시키는 것이었다. 비록 고작 24명밖에 되지 않았던데다 대부분의 특무대원들은 그리스를 떠난 적이 없으나, 당장 자신의 부대에 특무대가 명목상으로나마 배치된 마당에 롬멜이 홀로코스트에 대해 몰랐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당장 특무대 이집트의 사령관은 1941년에 동부전선에서 가스 밴 계획을 최초로 제안했던 사람이기도 했던 발터 라우프 SS대령이었다. 만일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제2차 엘 알라마인 전투에서 롬멜을 격파하지 않았으면 친위특무대 이집트는 준비를 바치고 실제로 중동에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그 외 하인츠 구데리안의 경우에도 홀로코스트 참여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으나, 그 역시 전후 자서전에서 극구 부정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육군참모총장으로서 학살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보인다. 그 외 실제 병력을 지휘하는 병과대장급 이하 장교단은 보다 직접적으로 토벌에 관여된 경우가 많다. 상술한 바그너와 쉥켄도르프 같은 후방지역 사령관들이 그 예시다.
2.1.3.8. 해군과 공군
독일 해군 공군의 경우 육군과 같이 조직적인 학살에 관여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역시 위의 문단들에서도 간간히 언급되었듯 개별 사례들로서는 학살에 가담한 사례가 존재한다. 나치즘 교육이 해군과 공군을 피해간 것도 아니었으며, 절대적인 횟수외 비율이 적었을 뿐 육군과의 공조 및 주둔지 인근에서 벌어지는 학살에 이들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했다. 또한 강제노동 등의 간접적인 관여로는 이들 역시 확실히 연관되었다.

해군의 경우, 민간 선박까지 포함한 무차별적인 공격 행위가 가장 대표적인 전쟁 범죄로 꼽힌다. 그 외에도 사령관 카를 되니츠 원수는 유보트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유대인들을 포함한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는 것을 묵인했다. 그는 이 혐의 때문에 전후 10년 가량 복역했다.

집단 학살에 해군 장병들이 직접적으로 연관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여기에는 독일 해군의 주 활동 지역이 북해 대서양이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영국 해군과의 대결을 위해 주된 해군 전력과 기지들이 서유럽 해안에 전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독소전쟁이 벌어지던 발트 해 일대로 보내진 해군 병사들이 학살에 연관된 경우는 소수 존재했다. 상술한 리예파야 학살이 대표적인 예시다.
파일:external/www.pablopicasso.org/guernica3.jpg
파블로 피카소의 《 게르니카(Guernica)》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 콘도르 군단이 벌인 게르니카 폭격의 참상을 그려냈다.

반면 공군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사령관 헤르만 괴링부터가 초기부터 활동한 핵심적인 나치로서 히틀러 정권의 2인자라는 점이 한몫 했다. 그는 공군 제국원수로서 육군의 브라우히치 및 해군의 레더와 함께 국방군에 나치 이념을 주입한 3인 중 하나였으며, 4개년 계획부의 장관으로서는 강제수용소에서 노예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이용했다. 동시에 친위대와 협조하여 유대인 이주청을 설립해 홀로코스트의 핵심적인 이송 시스템을 마련하도록 했다. 상술한 것처럼 반제 회의 개최에 개입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직접적인 연관 역시 해군에 비해 더 극심했다. 독일 공군은 스페인의 게르니카 폭격을 시작으로 폴란드와 영국 등지를 전략 폭격하며 민간인들을 대량 살상했다. 또한 육군을 보조하는 전술공군이었던 당대 독일 공군의 특성 상, 육군이 파르티잔 토벌전에 공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가령 동부전선에서 독일 공군의 조종사들은 육군과 발맞춰 의도적으로 민간인들이나 민간 시설, 심지어는 의료 시설들을 공격했다. 알베르트 케셀링 원수와 같은 고위 공군 장성들 역시 육군 장성들과 마찬가지로 집단 처형을 묵인하거나 조장했다. 케셀링은 이 때문에 유죄가 인정되어 사형 판결을 받기도 했다.

한편 공군의 지상전력, 가령 공군 야전사단 등은 직접적인 학살 현장에 연관되는 비중이 항공대에 비해 훨씬 높았다. 육군 부대와 마찬가지로 이들 역시 학살에 종종 조력하거나 단순히 방관하기도 했다. 또한 일부 나이 많은 병사들은 강제수용소의 간수로 복무하기도 했다. 주로 노동수용소들이었으나, 1944년 이후에는 그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에서도 인원 부족으로 인해 공군에서 간수들을 모집했다. #

2.1.4. 장병들의 인식


▲ 루스 베커만 감독의 기록영화 "전쟁의 이면(Jenseits des Krieges)" 의 한국어 번역본. 1995년 오스트리아 에서 개최된 국방군 범죄 전시회의 모습과 관객들, 특히 과거 국방군으로 참전하였던 노병들의 다양한 반응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청 기록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점에 주목할 만하다. 이 기록들을 보면, 대다수 군인들이 유대인 학살 과정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심지어 오늘날까지 연구자들이 전혀 발견하지 못했던 측면들까지 언급하곤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 내용과 자신의 행동을 전혀 결부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국방군 부대들이 허다한 전쟁 범죄를 저질렀고 점령지에서 유대인의 조직적 처형에 여러 방식으로 관여했음을 대다수 군인들은 2차 세계대전 중 이미 알고 있었다. 즉 국방군 군인은 처형을 직접 수행하거나, 참관하거나, 공범이나 보조 인력이나 소문의 전달자로 거기 관여했다.
- 죙케 나이첼과 하랄트 벨처의 《나치의 병사들》 165p에서 발췌. 나이첼과 벨처는 독일 장병들의 심리를 연구한 대표적인 학자들이다. 그들의 연구는 영국군이 독일군의 대화를 도청하여 텍스트화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학살에 대한 대다수의 국방군 장병들의 인식 역시 깨끗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는 포츠담 대학의 군사사학자 죙케 나이첼(Sönke Neitzel)과 플렌스부르크 대학의 사회학자 하랄트 벨처(Harald Welzer)가 바탕으로 진행한 연구가 잘 설명해 준다. 그들의 저서 《나치의 병사들》에 따르면, 다수의 국방군 장병들은 후방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하여 아주 잘 알았다. 목격자들의 대다수는 학살을 방관하거나 구경하였으며, 가담하기도 했다. 실제로 현장을 목격하지 않은 이들 또한 소문을 통해 학살 소식을 잘 알고 있었으며, 심심풀이 땅콩마냥 동료들과의 잡담 주제로 써먹었다.

다만 이것이 본인의 나치즘 사상을 표출하며 학살을 수행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떠드는 이들이 절대 다수였다는 것은 아니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런 반유대주의 확신범도 있었으나 '끔찍하다'와 같이 학살과 토벌에 대해 부정적인 인상을 남기는 이들 또한 적지 않았다. 그리고 다수는 학살에 대해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얼핏 이는 국방군 장병들이 나치 이념과 정 반대의 반응을 보이는 것 같지만, 세부적으로 들어가보면 조금 다르다.

나이첼과 벨처는 이에 대해, 국방군 병사들이 자신이 관여하거나 보고 들은 학살에 대해 제3자의 입장, 다시 말해 목격자나 소식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입장을 고수함으로써 자신의 위치를 모호하게 남겨두는 행위라고 지적한다. 자신은 이러한 사건의 목격자일 뿐, 주도적 행위자가 아니었음을 강조하며 책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목격하거나 참여한 학살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하는 이들조차, 실제로 그 자신이 그 현장에서 학살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했는가에 대해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심지어는 친위대의 학살에 대해 비판적으로 말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간접적으로 조력했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그리고 동시에 다수의 장병들은 '아시아와 볼셰비키의 위협'에 맞서 싸운 국방군의 노고가 비판을 받을 경우에는 불쾌한 반응을 보이거나 항변하면서 비판을 차단하고는 했다. 이는 전쟁 중, 그리고 전쟁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국방군 장병들이 나치당과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인종주의 논리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나치즘에 대해 부정적으로 반응하면서도 막상 자신들의 '파르티잔 토벌'에 대해서는 자랑스럽게 말하는 모순된 반응을 보이기도 했는데, 이는 자신들이 벌인 학살을 비무장 인원에 대한 학살이 아닌 정당한 '군사 작전'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었다.

2.2. 무차별 강간

소련군이 저지른 베를린 강간의 임펙트에 묻힌 감이 없잖아 있지만, 동부전선의 국방군 역시 그보다 훨씬 더한 전방위적이고 잔혹한 강간을 자행했다. 동부전선에서는 독소전쟁이 벌어졌을 때 수많은 소련 민간인 여성들과 소련군 간호사와 간호병, 그리고 기타 여군들이 포로로 사로잡힌 채 강간의 희생양이 되었고, 그 뒤에는 대부분 살해당한 채 길거리에 버려졌다. 국방군에 저항하던 여성 파르티잔은 아예 강간 후에 고문을 가한 후 죽이는 일도 비일비재였다.
  • 스몰렌스크, 러시아 : 독일군 사령부가 장교들을 위한 매음굴을 개설하였다. 수백명의 여성들이 팔이나 머리채가 잡혀 끌려가 강제로 매춘부가 되었다.
  • 르비우, 우크라이나: 독일군이 공공 공원에서 옷 공장에서 일하는 32명의 여성들을 집단으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이를 막으려 하던 사제 또한 살해했다. 독일군은 리비우에서 유대인 여성들 또한 강간했으며, 임신하면 쏴 죽였다.
  • 바리사우, 벨라루스: 독일군을 피해 달아나던 75명의 여성들이 사로잡히자 독일군은 그 자리에서 36명을 죽여버렸다. 그 후 독일군은 16살 L.I.멜츠코바를 숲으로 끌고 들어가 집단으로 강간했다. 다음으로 끌려간 여성이 발견한 것은 표지판에 못박혀 죽어가는 멜츠코바였다. 독일군은 그 여성 앞에서 멜츠코바의 가슴을 잘라냈다.
  • 케르치, 크림 반도: 사로잡힌 여성들은 강간당하고 고문을 받았다. 그다음엔 잔혹하게 죽였는데 가슴을 잘라내고, 배를 가르고, 사지를 자르고, 안구를 파냈다.[13] 나중에 1941년 12월 케르치를 탈환한 소련군은 주위를 둘러보다 알아볼 수도 없게 훼손된 젊은 여성들의 몸뚱아리가 교도소 뜰에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경악을 금치못했다. 1942년 1월, 집단 매장터가 다시 조사됐는데, 바게로보 마을 외곽의 길이 1km, 너비 4m, 깊이 2m의 대전차호에 여성, 아이, 노인, 청소년 7000명의 시체가 가득 메워져 있는 매장터를 발굴하였다.

무엇보다 국방군 지도부는 전쟁이 시작되기 전부터 '소련 민간인에게 범죄를 저지른 장병들을 적극 적발 및 처벌할 필요가 없다'는 방침을 세웠고 그런 마당에 군인은 물론 민간인이라고 성폭행의 마수에서 벗어날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물론 처벌이 있기도 했으나 가벼웠다. 따라서 독일 장병들은 마치 가로수의 열매를 따먹듯 점령지의 여성들을 겁탈했으며 그것을 마치 자랑거리인 양 떠들고 다녔다. [14]
윌루스: " 바르샤바에서 우리 장병들은 여자들이 있는 한 건물 앞에서 길게 늘어서 기다려야 했다. 무작위로 첫 번째 방이 가득 찼고 그 사이 밖에서는 트럭 하나를 다 채울 정도의 사람들이 줄서 기다렸다. 여자 한 사람마다 시간당 14명에서 15명의 남자를 상대해야 했다. 그들은 이틀마다 여자들을 교체했다.
뮐러: 제가 하르코프[15]에 있었을 때, 시가지를 제외하고는 모든 게 부서져 있었습니다. 정말 멋진 도시였고, 멋진 추억들도 많았죠. 거기 사람들은 학교에서 배운 독일어를 약간 구사할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타간로크[16]에는 멋진 극장들과 멋진 해안 카페들이 있었죠. 전 트럭을 타고 여기저기를 돌아다녔습니다. 어딜 보든 여성들이 강제 노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파우스트: "오, 세상에!"

뮐러: "정말 쭉 빠진 환상적인 소녀들이 도로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옆으로 차를 몰고 가서, 강제로 트럭에 태우고 마구 겁탈한 뒤 밖으로 내던졌죠. 이야, 정말 엄청나게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출처

영문 위키피디아에 인용된 1942년 독일 국방군 기록에 따르면 소련 한 국가에서만 1천만 건이 넘는 집단 강간과 간살(강간 후 살해)이 발생했다. 해당 보고서에서는 독일 군인과 소비에트 연방 국가의 여성 사이에 생긴 신생아 75만 명 가량을 독일인 혈통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혼혈아들의 출생 증명서에 프레드리히, 루이즈 등의 독일식 이름을 중간에 끼워넣는 정책을 계획되었던 적도 있다. 슬라브인들을 아리아인으로 교체하기 위한 인종 청소가 목적이었다. 그나마 요식 행위로 한 얘기지만 뒤늦게 '독일인에 대한 보복 금지'를 공표한 스탈린과 기강 해이가 조직력 붕괴로 이어지기 전에 보복 행위자들을 즉결 처형하고 효수한 NKVD 정치장교들 덕택에 동독인 전원이 소련인 부친을 가지진 않았다.

서부전선인 프랑스, 네덜란드, 노르웨이, 덴마크 등지에서는 독일군 수뇌부가 독일군의 이미지를 관리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을 억제하기 위해 강간 등의 대민 범죄를 단속하였기에 독일군의 강간과 학살로 아비규환이 된 동부전선에 비해 강간 피해가 상대적으로 매우 적었으나[17][18][19] 전쟁 말기, 1944~5년경에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지며 군기강이 해이해지고 병사들의 스트레스가 극에 달하자 서부전선에서도 강간율이 치솟았으며 이에 수뇌부도 사실상 손을 놓고 처벌을 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에서의 피해가 극심했으며 강간과 동시에 민간인 및 포로 학살, 약탈 및 방화가 무자비하게 자행되었고 전례 없던 대민 범죄에 반발한 서부 전선의 네덜란드와 프랑스 등지의 민간인의 레지스탕스 활동이 급증하는 계기를 불러왔다. 독일군의 강간은 전후에도 여파를 남겼는데 독일에게서 해방된 서부 유럽 국가에서는 강간 피해 여성들이 독일군과 잔 여성으로 매도되어 지역 주민들에게 린치당하는 2차 가해가 벌어지면서 그 폐해가 매우 심각했다. [20]

무차별적인 강간 뿐만 아니라 점령지의 여성들을 반강제로 동원하여[21] 일본군의 위안부와 상당히 유사한 시스템의 위안소(또는 매음굴)을 운용하기도 했다. 관련 기사 피해 여성은 대부분은 소련, 폴란드를 비롯한 동유럽 출신이었으나 나치 독일이 '비교적' 관대하게 대우한 서북유럽 출신 여성들도 예외는 아니었다.[22]. 독일군 수뇌부는 장병들간의 동성애를 막고 성병을 예방하기 위한 차원으로 위안소를 도입했으며 위안소를 이용하는 장병들에게 콘돔이나 성병 예방 키트, 설문지를 보급하고 장병들에게 위안소 이용을 '권장'하는 등 매우 시스템적으로 위안소 체계를 운용하였으며 독일군 장병들이 남긴 수기에도 해당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성노예로 희생된 여성들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 급료는 거의 지급되지 않았고 하루에 한 명의 여성이 수십 명의 남성을 상대해야 했으며, 가슴이나 팔뚝에 훤히 보이는 '야전 매춘부'(Feldhure) 문신을 새겼으며 임신을 방지하기 위해 마취 없이 강제로 불임 수술을 시켰다. 성병이나 임신이 발생했을 경우 대부분 즉각 살해되었다. 전후 독일군 위안소에서 살아돌아온 소수의 여성들마저도 '독일군과 몸을 섞은 불결한 여성' 취급을 받아 사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았고 이는 사회의 멸시와 냉대를 두려워한 피해 여성들이 전후에도 피해 사실을 극력 함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의 위안소 운용은 일본군 위안부와는 다르게 현대에도 별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이 자행한 성 범죄에 관해서 무려 400쪽 분량으로 다룬 권위적인 논문으로 Victims, Heroes, Survivors: Sexual Violence on the Eastern Front During World War II가 있다.미네소타 대학의 Wendy Jo Gertjejanssen이 쓴 것으로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되어 있다(최하단의 full text 클릭). 단순히 강간만을 다룬 것이 아니라 매음굴 같은 주제도 다루었다. 내용이 매우 어려우나 전문적으로 알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읽어 보면 좋은 논문이다.

잘못 알려진 상식을 있는 그대로 믿는 자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나치의 인종적 편견 때문에 독일 국방군은 민간인 학살은 했지만 강간은 빈도가 드물었다고 주장한다. 살인과 성범죄의 죄중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슬라브인은 짐승이나 다름없는 존재라는 나치의 세뇌 때문에 장병들에겐 타인종과의 성접촉이 수간으로 인식되어 강간을 피했을 거라는 논리인데,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국방군은 슬라브인을 인간으로 안 본 것이 아니고 단지 위대한 아리아인인 자신들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봤을 뿐이다. 그리고 애초에 타인종과의 성접촉을 수간으로 인식하는 것도 지극히 인종차별적인 사고방식이라서 결코 좋게 보기 힘들며, 그에 따라 결코 나치 독일을 옹호하기 위한 근거가 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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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결론

파일:ausstellung-verbrechen-der-wehrmacht_foto_LEMO-F-6-189_uls.jpg
▲ 1997년 2월 26일, 뮌헨 시립 미술관(Rathausgalarie)에서 시민들이 "국방군 범죄 전시회(Wehrmachtausstellung)"를 관람하고 있다.
수백만의 국방군 병사들이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범죄에 연루되었습니다. 친위대와 비교하자면, 25만 명의 친위대원들이 홀로코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있었죠. 독일에서는 모든 논의가 홀로코스트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동부전선에서 소련인 2,600만 명 이상을 죽인 1,000만 명의 국방군 병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훨씬 꺼립니다. 모든 독일인들의 친지 중 서너 또는 너덧 명은 바로 이 일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Millionen Wehrmachtssoldaten waren an den Verbrechen der Wehrmacht beteiligt - im Unterschied zu den etwa 250.000 SS-Leuten, die für den Holocaust verantwortlich waren. Mit dem Gedenken an den Holocaust hat es in Deutschland funktioniert. Aber mit den zehn Millionen Soldaten an der Ostfront, die mehr als 26 Millionen Sowjets umgebracht haben, war der Widerstand in der Gesellschaft sehr viel größer. Jeder hatte drei, vier, fünf Verwandte, die daran beteiligt waren.
- 독일 사학자 한네스 헤어(Hannes Heer), 도이체 벨레와의 2020년 인터뷰에서. #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국방군은 히틀러의 범죄에 크게 기여했다. 일반적으로 나치 이념과 반유대주의, 그리고 슬라브인과 볼셰비키에 대한 적개심은 독일 사회 뿐만 아니라 국방군에도 고루 퍼져 있었다. 국방군 수뇌부는 이러한 적개심과 인종주의에 기반한 교육과 학살 명령을 휘하 장병들에게 지시했다. 주요 학살 사건에서 국방군 부대들과 지휘관들은 필요하다면 친위대나 경찰, 그리고 지역민들과 협조하였다. 그리고 유대인 학살은 나치즘과 반유대주의 확신범에 의해서만 수행된 것이 아니므로 설사 나치즘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직간접적으로 홀로코스트와 학살에 관여되었다. 여기에는 전쟁 속에서 급진화되는 국가와 군대라는 위계 질서, 그리고 불확실성이 짙게 깔린 전장에서의 군사 논리 등의 다양하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작용했다.

물론 징병된 1700만명의 국방군 장병들의 인식과 범죄 가담 스펙트럼을 완전히 일반화할 수는 없다. 라이헤나우 원수의 강조 명령을 폐기했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처럼 학살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존재했고, 위조 신분증을 발급해 유대인들을 구해내다 걸려 처형당한 안톤 슈미트 중사처럼 학살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도 있으며, 유대인들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친위대원들과 충돌까지 불사했던 막스 리트케 소령과 알베르트 바텔 중위 같은 극소수의 저항자도 분명 있었다. 빌헬름 카나리스 대장과 같이 실제 집단 학살 수행에 깊게 관여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유대인들을 구해내고 증거를 수집하며 학살을 막으려 시도했던 복합적인 인물도 있다.

그러나 이들은 양심을 지킨 소수의 위대한 반례나 종합적 평가의 대상이 될 수 있을지언정 전체 국방군의 혐의를 뒤집을 수는 없다. 독일 연방군 군사사연구소와 프라이부르크 대학 소속 군사사학자 볼프람 베테(Wolfram Wette)의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국방군 복무자 1700만명 중 구조적으로 저항한 사례는 단 100건 뿐이었다.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대부분의 장병들의 반발과 저항은 대부분 학살 소식을 전하며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수준에 머물렀고, 그런 그들조차 방관자로서의 책임까지 벗을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국방군과 다수의 장병들 역시 전쟁 범죄 책임을 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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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최종 계급 보병대장. 1943년 소비보르 절멸수용소 봉기 진압작전에 참여한 인물이기도 하다. 전후 소련 NKVD에 잡혀 옥중에서 사망했다. [2] 슈문트 대장은 국방군 내에서 나치즘 사상에 취해 있던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1944년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 당시 폭탄 바로 앞에 있었고, 중상을 입어 사망했다. [3] 1917년 동부전선에서 러시아 제국이 패망한 후, 독일 제국을 비롯한 동맹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맺어 유럽 러시아의 절반 가량을 점령한다. 이 영역은 1941년 국방군이 바르바로사 작전으로 점령한 영역만큼이나 거대했다.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독일 제국은 패하는 그날까지 자국 국경 내에 적군을 들이지 않았다. 결국 독일 국민들 중에서는 서부전선이 멀쩡하고 동부에서는 이기기까지 했는데 왜 자신들이 패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물론 그런 외연적 팽창과 달리 내부적으로 독일 제국은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으므로, 협상장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전후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쉽게 망각되었다. [4] 여기서 아시아라는 개념은 시대별로 다르다.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아나톨리아만을 의미하였으나 점차 종교적, 문화적인 속성을 띄면서 동쪽으로 확장되었다. 근현대에 와서는 '동쪽, 비기독교, 비과학적, 감정적' 등의 다양한 수식어들이 종합된, '비유럽적'인 유라시아 대륙 국가들을 싸잡는 개념으로 정착한다. [5] 란트슈트라세는 시의 제3구를 지칭한다. 벨베데레 궁전이 있는 등 오스트리아의 정치적 중심지로서 2차례의 빈 공방전이 일어난 장소이기도 하다. 이 동쪽이 아시아라는 표현은 빈이야말로 유럽의 최전선이며, 그 너머의 헝가리, 그리고 오스만의 영향을 받은 발칸 반도는 유럽도 아니라고 비하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6] 독일군은 폴란드군 포로를 소련군 포로 못지 않게 매우 잔인하게 대우하고 학살하였다. 폴란드 역사학자와 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단순 총살이 자비로 보일 정도로 잔악한 학살이 이루어졌다. 무차별 구타를 가해 죽이거나, 총검 연습용으로 포로를 나무에 묶어놓고 난자하거나, 구덩이를 파고 폴란드군 포로들을 밀어 넣고 기름을 끼얹은 뒤 산채로 불태워 죽였고, 강가 구석에 포로들을 몰아놓고서는 무차별 기관총 사격을 가해 포로들을 익사하거나 사살당하게 만들었고, 작은 건물에 포로들을 집어넣고 수류탄을 내부로 던져넣어 죽이는 등 매우 비인간적인 방식으로 포로를 학살했다. [7] 오히려 키예프 유대인들은 독일 침공 전 대숙청 시기에는 부농, 폴란드인들과 함께 NKVD의 주된 탄압 대상이었다. [8] 현 벨라루스 마힐료우. 당시 중부집단군 사령부가 위치해 있었다. [9] 무장친위대 8사단 "플로리안 가이어"의 전신. [10] Вели́кая война́ (2013) [11] 뱌즈마: 5500채의 건물들 중 51채, 그차즈크: 1600채 중 300채, 르제프: 5400채 중 500채 생존. [12] 《Hitler's Commander: Field Marshal Walther Model》 스티븐 H. 뉴튼 [13] 구체적인 동기는 불명이나 독일군은 강간을 저지른 직후 피해 여성의 신체를 끔찍하게 훼손하여 죽이는 경향이 전쟁 내내 매우 두드러졌다. 독일군 참전 병사의 수기에 따르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벌거벗고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시체를 보는 건 다반사였다. 그들은 때로는 나무에 목이 매달려 있었고, 음부에 총검이나 막대기가 꼳혀 있었고, 고깃덩이처럼 토막이 나고 내장이 모두 드러나있었고, 건물이나 차량에서 내던져져 머리가 깨져 있었다. 동료 병사들은 그들에 대해 아주 조금의 연민이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라고 묘사할만큼 당시의 참상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출처: https://junsv.nl/ostdeutsche-gerichtsentscheidungen [14] 영국군 포로 수용소에서 독일군 포로들의 대화를 비밀리에 감청했고 이를 이후에 독일의 역사학자 죈케 니첼 (Sönke Neitzel)이 해당 감청 기록을 집대성하여 정리했다. 해당 자료를 보면 독일군 포로들은 서로 낄낄대며 여성을 잔혹하게 강간하고 학살한 만행을 무용담처럼 떠들어댔으며 그들의 입으로 여러 끔찍한 사례가 언급된다. [15] 현재의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즉 당시의 소련 영토. 제2차 하르코프 공방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이 벌어진 곳이다. [16] 러시야 영토 [17] 물론 전쟁 말기 이전에도 서부전선에서의 강간은 분명히 자행되었으며 독일군 수뇌부는 이에 대해 형식적인 처벌은 했다. 그러나 강간죄가 군법상 총살형까지 가능했던 것과는 달리 군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죄목만이 대부분 적용되어 처벌은 무겁지 않았고 범죄를 저지른 병사를 다른 지역이나 부대로 전출시키는 데에 그쳤다. [18]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독일군은 폴란드인 여성을 상대로 수많은 강간을 저질렀으나 그 중 기소된 사례는 고작 1건이였는데 이는 부스코즈두루이(Busko-Zdrój)에서 유대인 여성 1명을 독일군 병사 3명이서 집단 강간한 사례였는데 이마저도 황당하게도 피해자가 유대인이였다는 이유에서 기소되었던 것이였으며 죄목 역시 강간이 아닌 인종 모독죄(Rassenschande)였다. [19] 물론 강간죄로 적발되어 즉결처형된 병사가 존재하기는 하나 극소수에 불과했으며 총살형을 선고받더라도 이후 감형되어 형벌 부대에 보내지거나 영창을 사는 것이 전부였다. 독일군 수뇌부가 자체적으로 처형한 병사들의 죄목은 대부분 탈영(적전 도주 포함)이나 명령 불복종이였으며 황당하게도 민간인이나 포로 학살 같은 전쟁 범죄 행위의 수행을 거부한 병사를 명령 불복종으로 간주하여 처형한 사례도 존재한다. 이와 매우 유사한 처형 사례는 일본군에게서도 다수 존재한다. [20] 프랑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덴마크 역시 나치 독일의 치하에서 해방된 직후 독일군과 잔 여성들을 색출하며 린치를 가하고 공개적으로 모욕을 주는 행위를 가하였는데 독일군에게 강간을 당한 여성들마저도 이러한 피해를 당하면서 사회적 병폐가 매우 심각했다. 관련 기사 [21] 전쟁 이전부터 자발적인 매춘부였던 여성은 극소수였고 대부분은 일자리를 알아봐준다는 명목으로 여성들을 속여 매음굴에 가두었으나 그럼에도 인원이 충당되지 않았을 경우에는 마을이나 길거리에 들이닥쳐 눈에 띄는 여성을 닥치는대로 강제로 끌고가는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22] 프랑스, 노르웨이, 벨기에 ,네덜란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