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30 15:22:57

그래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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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Graignes massacre
프랑스어: Massacre de Graignes
독일어: Massaker von Graignes
1. 개요2. 상세3. 여담

1. 개요

1944년 6월 11일 그래뉴 전투 종결 직후 무장친위대 제17SS기갑척탄병사단이 포로로 잡은 미군 병사 17명과 프랑스 마을 주민 44명을 학살한 사건이다.

2. 상세

그래뉴 전투에서 끈질기게 저항한 끝에 미군 제507공수연대는 전투에서 15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카랑탕에서 미군과 전투중인 팔슈름예거를 지원하기 위해 해당 방향으로 진군하던 SS를 중도에 가로막아 수백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탄약이 부족해지자 어쩔 수 없이 후퇴하게 된다.

미처 후퇴하지 못한 군의관 에이브러햄 소피안 대위와 거동이 불편한 중상자들은 그들이 임시 구호소로 사용한 교회 건물에 백기를 걸고 독일군에게 항복했다. 총 17명의 미군들이 포로로 붙잡혔으며 소피안 대위와 휘하 2명의 의무병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부상병이였다.

독일이 서명한 제네바 조약에 따라 이들은 엄연히 포로로써 보호받을 권리가 있었고 소피안 대위도 구호소에 총검을 들이밀며 들이닥친 독일군에게 대원들 대부분이 부상자라는 이유에서 인도적인 포로 대우를 호소했으나 국제조약을 장식으로 여기던 SS에게는 소용이 없었고 더불어 미군의 끈질긴 저항에 수백명의 사상자를 내며 졸전을 벌였던 SS는 보복으로 붙잡은 포로들을 두 무리로 나누어 후방에 인계하지 않고 학살했다.

첫 번째 무리에 속한 5명의 포로들은 마을 인근 연못으로 끌고 가서 총검으로 찔러 죽였고 시신은 연못 바닥에 던졌다. 이후 이 시신들은 마을 주민들에 의해 수습되었다. 두 번째 무리에 속한 9명의 포로들은 르 메닐-앙고(Le Mesnil-Angot) 마을 근방의 평원으로 압송되었고 독일군은 그곳에서 포로들에게 직접 그들의 무덤이 될 구덩이를 파게 강요했고 이후 구덩이가 모두 파지자 독일군은 포로들을 무릎 꿀힌 뒤 한명 한명씩 머리에 총격을 가해 처형하였다. 이후 일부 독일군은 처형된 미군 포로의 시신에서 군화를 포함한 쓸모있을 만한 보급품들을 가져갔다.[1]

부상을 입지 않은 상태에서 포로로 잡힌 소피안 대위와 그의 의무병 2명은 바로 처형되지는 않았으나 독일군에게 억류되어 몇 시간 동안 정보 수집을 위한 심문을 받은 뒤 근방의 초원에서 총살형으로 처형되었다.[2] 이리하여 총 17명의 미군 포로들이 독일군에게 학살당했다.

SS의 광기는 전쟁포로 학살에 그치지 않았고 미군 협력자들을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인근 마을을 습격하여 프랑스 마을 주민 44명을 학살하고 그들의 시체를 불태웠으며[3] 방화, 약탈, 강간을 자행하여 마을을 초토화하였다. 이러한 독일군의 만행으로 159채에 달하는 가옥이 전소되었다.

3. 여담

그래뉴 전투에 참가한 182명의 미군 중 전사한 15명과 포로로 잡힌 17명을 제외한 150명의 미군 병사들이 낙오되어 마을에 산개되어있었는데 잘못된 방향으로 길을 택해 포로로 잡힌 일부 병사들을 제외하고[4] 대부분의 이들은 마을주민의 도움으로 살아남아 이후 전선으로 무사히 복귀했다.

말메디 학살과 마찬가지로 독일군이 미군 포로를 상대로 자행한 학살극이나 전자에 비하면 인지도가 극히 떨어지는 경향이 있다. 학살이 벌어졌을 당시에는 한창 전쟁중이라 이 사건은 미군 상층부에게 제대로 전달이 되지 않았으며 전후에도 이 학살을 자행한 어떤 SS 병사나 장교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외에도 D-Day 직후 프랑스 현지인들이 독일군이 미군 낙오병을 찾는데 매우 열심이었고 SS에게 붙잡힌 미군 포로들이 즉결처분 당하는 사례를 빈번히 목격했다는 증언을 토대로 알려지지 않은 독일군의 미군 포로 학살이 더 있을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현재 그래뉴에서는 매년 희생된 프랑스 민간인들과 미군 포로들을 기리는 추도식을 진행하고 있다. 미군 포로의 유족이나 후손들도 자주 해당 추도식에 참여하고 있다.
파일:graignes memorial.png
그래뉴에서 전사한 미군과 학살당한 미군 포로, 프랑스 마을 주민들을 기리는 추모비이다.


[1] 당시 독일군 사이에서는 전투 중 사살했거나 포로로 잡았다가 처형한 미군의 시신에서 외투, 장화 등의 보급품을 취하는 것이 유행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말메디 학살과 발하우젠 학살을 포함해 독일군이 미군 포로를 학살하는 사건마다 빼놓지 않고 일어났다. 이 때문에 미군의 보급품을 지니고 있다가 미군에게 포로로 잡힌 독일군은 심하면 그 자리에서 즉결처분 당하거나 운 좋으면 구타 등의 가혹행위를 당하고 목숨만 부지했다. 이는 영화 퓨리에서도 묘사된 바 있는데 포로로 잡힌 독일군 병사가 미군 외투를 입고 있었다는 이유로 즉결처분 당한다. [2] 이들의 시신은 길게 자란 풀에 가려진 탓에 1945년 3월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나 이후 미군에게 수습되어 본국으로 이송되었다. [3] 일부 주민들은 미처 건물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 산 채로 타 죽기도 했으나 SS는 당연히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4] 이들은 운좋게도 SS가 아닌 독일 국방군이나 다른 부대에게 포로로 잡혀 목숨을 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