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7 21:00:01

안테 파벨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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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본명 Ante Pavelić
안테 파벨리치
출생 1889년 7월 14일
파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국기.svg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동통치령 브라디나
사망 1959년 12월 28일 (향년 70세)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국 마드리드
재임기간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포글라브니크
1941년 4월 10일 ~ 1945년 5월 8일
파일:크로아티아 독립국 국기.svg 크로아티아 독립국 총리
1941년 4월 16일 ~ 1943년 9월 2일
정당 권리당 (1910년~1929년)
우스타샤 (1929년~1945년)
크로아티아 국가당 (1950년)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1956년~1959년)
서명 파일:안테 파벨리치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초기와 민족주의자 활동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2.3.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3. 여담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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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세계 대전 시기의 추축국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 괴뢰 국가 크로아티아 독립국 독재자, 그리고 학살자. 발칸의 히틀러라고 불리며 본인이 지도한 군사집단 우스타샤를 이용해 70만 명 가량의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했는데, 그 악행의 수위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SS 병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

2. 생애

2.1. 초기와 민족주의자 활동

1889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블라디나에서 크로아티아계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법률교육을 받은 후 변호사가 되었다. 1915년부터 1919년까지 크로아티아 법률당의 서기로 일했다. 당시 러시아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슬라브 민족주의를 주장하며 모든 슬라브 민족들을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의 지배하에 두려고 하였다. 그는 1919년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 달마티아의 병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 '프랑코프치'에 입당하였다.

당시 당은 요시프 프란크가 지도했고 1919년 그는 당의 비서로 활동했다. 그와 몇몇 당원들은 정치적 사태로 체포되었다가 풀려났고 자신들이 체포된 것에 대해 부당함을 주장하며 소송을 걸었으나 패하였다. 1927년 자그레브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까지 당내에서 비서로 세력을 잡으며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자 지하 비밀조직 ' 우스타샤'에 협력하여 조직을 이끌었다.

이후 이탈리아 왕국으로 조직을 옮겼으며 해외 크로아티아 교민들을 단원으로 모집하였다. 베니토 무솔리니 호르티 미클로시의 협조를 얻어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에 자체 캠프를 설치해 훈련시켰다.[1]

1934년에는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연합하여 유고슬라비아 왕국 국왕 알렉산다르 1세 루이 바르투를 암살했는데[2] 이때 알렉산다르 1세를 저격하는 데 성공한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 소속 블라도 체르노젬스키는 현장에서 경찰과 시민들에게 사살되었지만, 체르노젬스키를 지원하러 현장에 나가 있던 우스타샤 소속 백업 테러리스트 3명( 미요 바비치, 즈보니미르 포스피실, 이반 라이치)이 추가로 생포되어 우스타샤의 개입이 있었음이 들통나게 된다.[3] 유고슬라비아 프랑스 정부는 파벨리치의 소환을 요청했지만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비롯한 몇몇 간부들을 잠시 형무소에 가뒀다 꺼내 주는 걸로만 마무리했다.

2.2.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이 터지고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그는 그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이탈리아군과 함께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세웠다.

우스타샤의 수반이 된 그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고 히틀러와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공포정치를 자행했다. 그가 세운 정책에 세르비아인들을 비롯한 타 민족들은 반발하지만 그는 그들을 학살했으며 더 나아가서 크로아티아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기 위해 정교회 이슬람을 믿는 국민들을 더욱 억압했다.[4] 이런 상황에서 대표적인 투쟁 단체인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체트니크가 활동하게 되었다.

4월 15일 자그레브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인 16일 스스로 수상 겸 외무장관의 자리에 올랐다.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에 의해 모든 비 크로아트인 시민은 무국적자가 되어 버렸는데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크로아티아 독립국에서는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비롯한 학살 시설이 세워져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집시에 대한 대량학살을 실행하였다.[5] 이들 우스타샤에 의해 일어난 학살은 총폭탄은 물론 치클론 B 겨자 가스부터 가죽장갑과 칼날을 합쳐 놓은 스르보셱(Srbosjek, Србосјек)[6]이라는 농사용 칼을 필두로 한 냉병기들까지 대량으로 동원되는 등,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동원된 끔찍한 학살이었다.[7] 한편 학살 대상들에 대한 잔학한 모습과는 반대로 자신들이 크로아티아에 돌아올 수 있도록 도와준 이들이자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질적 상전들이었던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이 크로아티아의 보크사이트, 목재 등 자원과 국토를 강탈하고, 철도와 조선소를 비롯한 전략 물자를 자기들이 맡겨 놓은 것처럼 사용할 때는 이들에게 대꾸도 제대로 못 하는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1941년 6월 15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 미국 영국 선전포고한 그는 1942년 9월에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를 해임한 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1943년에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이탈리아 국적자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그는 비선에서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어 "수령(Poglavnik, 포글라브닉)"의 칭호를 얻었다.

2.3. 제2차 세계 대전 전후

이런 악행을 저지른 그는 결국 운이 다하여 이탈리아, 헝가리가 차례로 발을 빼고 1945년 나치 독일마저 함락되어 유럽 전선에서 추축국이 패하자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영국군의 추격을 피해 오스트리아를 통하여 로마로 도망쳤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인민재판소의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더 안전해지기 위하여 바티칸 시국에 숨어 있다가 아르헨티나로 도망쳤다. 처음엔 대부분의 이민자가 그렇듯 생활고 때문에 벽돌공으로 일하고 있다가 먼저 와 있던 우스타샤 전범 브랑코 벤촌이 놓아준 당시 아르헨티나 독재자 후안 페론과의 연줄로 '파블로 아라뇨스', '안토니오 세르다르'라는 가명과 함께 페론의 안보 고문이 되었다. 파벨리치는 페론을 설득하여 딘코 사키치& 나다 사키치 부부[8], 볘코슬라프 루부리치 등 크로아티아에 남아 있던 반공주의자들과 자신의 동료, 부하들을 위한 비자를 발급해 총 34,000명의 크로아티아인들과 더불어 여러 나치, 파시스트 전범들을 남미 탈출시켰다.[9]

이런 행동을 벌이면서 안전히 지내던 그는 1951년 크로아티아 독립국 망명정부를 창설하고, 1954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전직 총리인 밀란 스토야디노비치[10]를 만나 회담을 가지기도 했으며, 1956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이라는 당을 창당하는 등 해외 우스타샤 잔당들과 꾸준한 활동을 이어가다가 세르비아 이민자 블라고예 요보비치[11]에 의한 1957년 암살 미수를 경험했다.

암살을 거행한 블라고예 요보비치는 본래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출신이었다가 체트니크로 이적한 인물로 1946년 파벨리치가 바티칸 시국의 보호를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이후부터 꾸준히 그를 쫓아온 인물이었다. 전후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측에 제대로 찍힌 체트니크 경력이 있다는 사실 때문에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해군 장교 야코프 요보비치의 도움으로 아르헨티나에 이주했고, 거기서 나름 성공적인 호텔 경영인으로 살고 있었다. 요보비치는 아르헨티나에서도 세르비아 교민들을 모아 세르비아 정교회 공동체 및 세르비아인 무장 조직을 창립하여 운영하고 있었고, 교민들의 정보망과 야코프 요보비치를 비롯한 동료들의 수사를 통해 파벨리치에 대한 정보를 꾸준히 모아 가며 치밀하게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파벨리치의 결정적 목격담을 확보한 이후 크로아티아 독립국 건국 기념일 전날인 4월 9일에 거사를 치르기로 하려 했으나, 최종적으론 하루 연기하여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건국 16주년이었던 4월 10일로 결정한다.

1957년 4월 10일 밤 요보비치는 파벨리치의 집 근처인 부에노스아이레스 교외 엘 팔로마에서 잠복하다가, 파벨리치가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발견하여 파벨리치를 쫓았다. 요보비치의 진술에 의하면 파벨리치는 누군가 자신을 쫓는 것을 알아채고 7~8미터 정도를 남긴 채 뒤돌아서 ' 너희 세르비아계 유대인 공산주의자 엄마 엿먹어라!'는 욕설과 함께 먼저 총을 쏘았다고 한다. 요보비치 역시 이에 맞서 파벨리치를 향해 뛰어가 2~3미터 떨어진 곳에서 파벨리치의 등과 쇄골을 맞추는 데 성공한다. 파벨리치는 총에 맞고 비틀거리며 서류 가방을 떨어뜨린 채 쓰러졌다. 요보비치는 원래 파벨리치를 흠씬 두들겨 패고 서류가방을 뺏으려 했으나, 돈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처럼 보일까봐 차라리 살려서 재판을 받게 하는 것이 낫다고 결정하여 서류가방과 파벨리치를 그대로 두고 피신했다. 한밤중에 워낙에 급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 주위 아르헨티나 민간인들은 술 취한 취객들이 서로 총을 난사한 줄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요보비치는 이 일을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1999년 사망 직전에야 유고슬라비아를 다시 방문하여 암필로히예 대주교를 만나 자신이 파벨리치를 쐈다고 고백했다.

파벨리치는 이 일 때문에 중상을 입어 병원에 실려갔다. 파벨리치는 척추에 제대로 총알이 박혔음에도 병원을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노력했지만, 그 동안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병원에서 본래 신분이 들통나고 만다. 사실 파벨리치는 2년 전 1955년, 뒷배 후안 페론이 로나르디와 아람부루의 군사 쿠데타로 권좌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이미 아르헨티나 정부의 비호를 잃은 상황이었고, 새로 들어선 아르헨티나 군부정권은 본래의 거물 신분까지 드러나게 된 이 전직 페론 정권 인사를 더 이상 국내에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결국 파벨리치가 총상을 입은지 2주 되는 때 유고슬라비아 비밀경찰 국가안보국(UDBA)의 꾸준한 조작으로 아르헨티나가 유고슬라비아에 파벨리치의 신병을 인도하기로 하여 파벨리치는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병원을 황급하게 뛰쳐나와 또 다시 정처없는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다.

갈 곳을 잃은 그는 칠레 산티아고에 4주간 머문 것을 시작으로 파라과이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7개월 간을 총상 때문에 시름시름 앓으며 망명 생활을 하다가 최종적으론 1957년 11월 29일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프랑코 정권 스페인에 정착한다.[12] 파벨리치는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도움을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스페인 당국은 파벨리치가 다시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13] 결국 파벨리치는 가족과 함께 비밀리에 숨어 살면서 크로아티아 해방 운동의 후임자를 정하고 각지에서 온 손님들을 맞이하며 살다가 결국 1957년 요보비치에게 얻었던 그 중상이 다시 악화되어 스페인국 마드리드 알레만 병원에서 1959년 12월 28일 사망했다.

3. 여담

  • Hearts of Iron 4에서 독일과 유고슬라비아가 전쟁을 할 때 발생하는[14]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4.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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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둘 다 맨 입으로 지원해 준 것은 당연히 아니었고, 이들을 이용해 이탈리아는 로마 시절 달마티아 해안 고토를 얻기 위해,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 당시 유고슬라비아 측에 강제로 할양한 영토를 되찾기 위해 일종의 투자를 감행하였다. 이탈리아와 헝가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 이후 둘 다 유고슬라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 독립국 강내에 속한 영토까지 알뜰하게 가져가는 데 성공한다. [2] 당시 프랑스가 친 유고 성향이긴 했지만 루이 바르투는 원래 타겟이 아니었다. 하지만 바르투는 온몸을 던져 국왕을 지키려다 팔에 흉탄이 명중하여 치명상이 되었고, 결국 이것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고 말았다. [3] 체르노젬스키와 바비치, 포스피실이 거사 전 셋이 같이 찍은 사진이 지금도 남아 있다. 이들은 체르노젬스키가 사살당한 후 마찬가지로 프랑스 경찰에 붙잡혀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프랑스 침공이 일어나자 독일 국방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 크로아티아로 돌아가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들 중 바비치와 포스피실은 1941년 동헤르체고비나 봉기 진압에 투입됐다가 전사한다. [4] 이때 불시검문으로 세르비아 사람을 비롯한 타민족을 단속할 때 구별하는 방법 가운데 성호를 그어 보게 하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가톨릭과 정교회가 성호 긋는 법이 다르다는 점을(머리에서 아래로 내린 손을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돌리며 손가락도 정교회는 세 개, 가톨릭은 다섯 개를 모은다.) 악용해 성호를 그어 보게 하고 정교회식으로 긋는 사람들을 세르비아인, 즉 비가톨릭으로 간주해 죽여 버린 것이다. 벌거벗은 세계사 40회(2022년 3월 29일자 방영분)에서 이 일화가 소개되었다. # [5] 보스니아 내전과는 다르게 당시의 보슈냐크인들은 파벨리치 자신이 어렸을 적 보스니아 지역에 살면서 무슬림 학교 막탑(maktab)에 다니며 무슬림 전통과 교훈을 교육받았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들을 '무슬림 크로아티아인', '크로아티아인의 피를 지키는 종교' 취급을 해 주며 띄워줬기 때문에 일단은 우스타샤의 학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학살만 안 당했을 뿐이지 개종의 압박은 꾸준히 들어왔다. [6] '세르비아인 절단기(Serbcutter)'이라는 뜻이다. 원래는 독일 회사에서 생산하던 밀 자르는 칼이었지만 크로아티아에 납품된 물건들이 뻔질나게 학살에 이용되다보니 이런 살벌한 별명이 붙어버렸다. [7] 세르비아인들의 눈을 뽑아서 모아놓거나,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고 자궁을 절제하여 죽이는 일도 있었다. 우스타샤 대원들은 희생자들에게 잘라낸 눈과 혀 등으로 만든 장식 목걸이를 만들어 착용하고 다니기도 했다. [8] 파벨리치는 사키치 부부가 아르헨티나에서 낳은 아들 2명의 대부가 되어주기도 했다. [9] 이렇게 남미를 비롯한 세계 곳곳으로 도피하는 데 성공한 딘코 사키치와 같은 우스타샤 잔당들은 소싯적 그랬던 것처럼 1955년 스페인에서 다시금 크로아티아 국민 저항(HNO)이라는 테러 조직을 만들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 인사들을 상대로 암살 및 테러를 저지르며 자신들을 추격하는 유고슬라비아 비밀경찰 국가안보국(UDBA)과 혈투를 벌이고, 미국, 스페인, 아르헨티나 등에 잔존한 우스타샤 잔당들을 서로 연결하였다. 이들은 파벨리치가 피살당한 후에도 계속 활동하여 1970년대까지 암살, 파이프 폭탄 테러, 하이재킹 등을 이어나갔다. 야트 항공 367편 폭파 사건도 이런 잔당 세력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1962년에서 1982년 사이 적어도 128건의 유고 민간인을 상대로 일어난 테러가 이들 잔당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10] 세르비아인이었다. 만난 이유도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의 역사적 화해를 논하겠다고 만난 것이었다. 이 둘의 만남은 큰 논란을 불러왔지만 별로 큰 결실은 없었다고 한다. [11] 몬테네그로 출신 세르비아인으로 처음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서 활동하다 나중에 체트니크로 이적했고, 영국과 협상하러 타란토에 있던 중 연합국 테헤란 회담으로 체트니크 대신 파르티잔을 전격 지원한다는 정보를 듣고 이탈리아에 그대로 체류하기로 한다. 이때 영국 정보부와 협업하며 랜돌프 처칠과 만나기도 했다. [12] 파벨리치가 스페인으로 간 건 1959년 후반에야 겨우 알려졌다. 당시에는 파벨리치가 파라과이 알프레도 스트로에스네르를 지원하러 갔다는 이야기가 정설 취급을 받았다. 참고로 스트로에스네르는 희대의 페도필리아이자 극악무도하기 그지없는 아동 성폭행범이었다. [13] 1950년대 당시 프랑코는 내부 반대파들을 대부분 억제하는 데 성공하자, 눈을 밖으로 돌려 마셜 플랜에서조차 배제된 스페인을 어떻게든 국제 무대로 다시 돌려놓기 위해 히틀러에 협력한 파시즘 잔당이라는 인식을 씻어내고 6.25 전쟁에 파병 의사를 보내는 등 서방 세계의 눈에 다시 들고자 분투하던 중이었다. 그런 와중에 한 사람도 아니고 몇만 단위를 학살한 전직 나치 학살자를 자국에 모시고 있다고 전 세계에 광고를 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14] 크로아티아의 이념이 파시스트인 상태로 독립해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