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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소 구니아키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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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조선총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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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제국 제41대 내각총리대신
고이소 구니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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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 1880년 3월 22일 | ||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 | |||
사망 | 1950년 11월 3일 (향년 70세) | ||
도쿄도 도시마구 스가모 형무소 | |||
재임기간 | 제8대 조선총독 | ||
1942년 5월 29일 ~ 1944년 7월 22일 | |||
제41대 내각총리대신 | |||
1944년 7월 22일 ~ 1945년 4월 7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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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 고이소 가오루코 | |
자녀 |
고이소 쇼이치 (장남) 고이소 미치코 (장녀) |
||
학력 | 육군대학교 (22기) | ||
정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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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교 | 국가신토 | ||
약력 |
제18대 육군성 군무국장 제15대 육군차관 제7대 관동군 참모장 제12대 조선군 사령관 제15·17대 척무대신 제8대 조선총독 제41대 내각총리대신 |
||
군사 경력 | |||
임관 | 일본육군사관학교 (12기) | ||
복무 | 일본 제국 육군 | ||
1901년 ~ 1938년 | |||
최종 계급 | 대장 | ||
참전 | 러일전쟁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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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제국의 군인, 정치인.7대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1942년 8대 조선총독이 되었으며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키고 미나미 총독이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를 학도병 제도로 강화했다. 강제 징병, 강제 징용, 근로 정신대, 일본군 위안부 등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1944년 조선총독직에서 물러난 후 제41대 내각총리대신이 되어 제2차 세계 대전을 이끌었고 탄핵에 의해 총리직을 사임하였다가 1950년 종신금고로 복역 중 죽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고이소는 1880년 3월 22일, 일본 제국 도치기현 우츠노미야시에서 태어났다. 1900년 일본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04년 전임 총독인 미나미 지로와 함께 러일전쟁에도 참전하였고 1916년 육군 참모부 부원, 1932년, 관동군 참모장으로 재직하면서 관동군 사령관 무토 요부노시, 만주국 참사관 가와고에 시게루와 일만의정서를 체결하여 만주국을 관동군의 식민지로 만들었다.2.26 사건 이후 통제파 천하가 되자 본디 우가키파였던 고이소는 같은 처지였던 미나미처럼 숙청당하고 군복을 벗을 위기에 처하였다. 그러나 타테카와 요시츠구의 청탁으로 육군대장으로 진급할 수 있었고 이후 조선군 사령관을 지내다가 1942년 전임 총독 미나미 지로의 후임으로 8대 조선총독이 되었다. 1937년, 총리대신으로 임명된 우가키가 전임 히로타 내각 때 부활한 군부대신 현역무관제 때문에 육군대신을 구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뛰어다니다가 조선총독 시절 심복이었던 고이소에게 육군대신으로 부임할 것을 부탁했으나 고이소는 우가키가 이미 찍혀 있는걸 눈치까고 그를 배신한다.
2.2. 조선 총독 고이소
조선 총독이 되자 전임자의 조선 민족말살정책을 그대로 전수받아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및 한국사 교육을 전면 금지시켰으며 이를 통해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켜서 한글학자들을 체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탄압은 탄압대로 하면서 한편으로 이중적인 정책을 하여 조선인들에게 트롤링을 벌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고대사에 빠져 있었던 총독 중 한 명이었는데, 나름대로 연구한 고대사 지식을 바탕으로 단군=스사노오 설을 주장한 것이 바로 고이소였고, 이 때문에 경성제대에서는 총독이 미쳤다고 발칵 뒤집혔다.어떻게든 조선이 내지의 일부라는 자신의 논리를 증명하겠답시고 "사실 나도 조선인 혈통이다", "일본 관서지방은 거의 다 조선인 후손임을 확신한다" 따위의 아무말 대잔치를 서슴없이 벌이기도 했다. 식민사관 역시 고이소 총독 시절에 상당히 수정되어 '늘 중국에 굽신거리며 사대나 하던 조선' 이라는 기존의 비하적 사관을 지나인들의 침략에 맞서 유연한 외교로 일본인의 순수성을 사수한 조선으로 포장하기도 하며 조선인들의 환심을 사려는 동시에 내선일체를 정당화 하려는 아스트랄한 발언들을 반복하였다.
내외지행정일원화 조치를 통해 조선을 일본과 동등한 법역으로 취급하려고 했으며 내선평등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는데 장기적으론 조선을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동화를 시키고 단기적으론 조선인들을 일본의 전쟁으로 대대적으로 동원하려는 술책이었다.
전임자가 제창했던 지원병 제도에 학도특별지원병 제도를 더해 조선 청년들을 적극적으로 전쟁에 동원하고자 했다. 근로정신대와 강제징용, 나아가 일본군 위안부 역시 이의 악행 중 일부로 거론된다.
후에 신민당 총재가 되는 이철승[1]이 학병거부운동을 벌이자 면담을 한 적이 있다. 그렇게 어르고 달래보려고 했지만, 계속해서 말돌리기나 하는 고이소에게 이철승은 제대로 된 대답을 받지 못했다며 일침을 가하고 돌아갔다. 대담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본은 대동아 성전(聖戰)이라고 하고,
동남아시아의 다른 나라들은 모두 독립을 인정하면서, 왜 2,000만 명의 조선(朝鮮)만 독립시키지 않습니까? 나라의 독립 없이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개죽음을 당하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목숨을 걸고 학병거부운동을 전개하겠습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 (이철승 등을 보며) 어느 학교 누구인가?
이철승: 보성전문 이철승(李哲承)입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음... 김성수(金性洙)[2] 선생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
학생들: 그러면 이번의 전문학교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 (고이소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주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과 일본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다. 그러기에 조선과 일본은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되어야 해, 제군의 말에 일리는 있어. 그러기 때문에 내가 부른 게 아닌가. 조선인들의 불만을 해소하는 게 바로 내 직책이야. (이철승 등을 보며) 어느 학교 누구인가?
이철승: 보성전문 이철승(李哲承)입니다.
고이소 구니아키: 음... 김성수(金性洙)[2] 선생은 물샐 틈 없는 인물이지...
학생들: 그러면 이번의 전문학교 정비에 보성전문도 폐쇄되는 겁니까? (고이소가 제대로 된 답변을 해 주지 않고 변명만 늘어놓자) 못 알아 듣겠습니다. 우린 이제 그만 돌아가겠습니다.
천황의 신민으로서 전쟁터에 나가서 죽을 수 있는 신성한 권리를 주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고, 징병제의 대가로 참정권을 받아야 한다는 조선인 엘리트들의 요구에 대해서 일본 정계는 언어도단이라는 것이 이때까지만 해도 지배적인 반응이었다. 사실 조선인을 일본군에 받아들임만 해도 일본군 입장에선 상당히 양보한 것이었다.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던 육군에선 이러다간 일본인은 다 죽고 출산율 높은 조선인만 남게 생겼으니, 조선인도 같이 죽어야 균형이 맞는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다. 조선인 징병 반대론자였던 도조가 42년부터 태도를 바꾸어 조선인 징병을 마지못해 밀어붙이는 판국이었고 엘리트적인 해군은 이 와중에도 조선인이나 대만인은 받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히로히토도 조선인 징병제 안건이 상주되자 "그럼 조선인들이 참정권도 달라는거 아니냐?"라고 물었을 정도로 조선인들에게 의무를 부여하면 권리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는 일본 정계의 합의된 우려였다. 하지만 1943년 카이로 선언으로 연합군이 조선의 독립을 약속하고 사이판 함락으로 도조 내각도 나가리되면서 조병옥 등 조선인 엘리트들이 조선인 총리대신이 나올 거란 보장이 없으면 재미 없다는 돌직구를 조선총독부 관리들 앞에서 날려버리고 공출로 민심이 흉흉해지면서 그야말로 조선도 못 건질 판이 되자 어떻게든 조선을 일본 제국 통치 하에 묶어두기 위해 망하기 직전에 참정권을 던져주고 조선인 귀족원 의원들을 칙임하게 되지만 몇 달 못가 조선이 해방되었다.
2.3. 총리 고이소
41대 총리 취임 후 |
1944년 사이판의 함락으로 도조 내각이 퇴진하고 후임 총리로 데라우치 히사이치 남방군 총사령관, 하타 슌로쿠 지나(China의 일본식 발음)파견군 사령관, 고이소 이렇게 세사람이 물망에 오르게 된다. 데라우치는 최전선 사령관이니 지금 불러들이기 너무 위험하다는 이유로 가장 적합한 후보라는 의견이 대세였음에도 기각되었고 하타 슌로쿠는 중신들이 대부분 반대하여 결국 히라누마 기이치로와 요나이 미쓰마사의 추천을 받은, 가장 무난하고 힘도 없는 고이소가 총리에 오르게 된다. 고이소는 육군대신 겸직과 현역 육군대장 복직을 요청했으나 육군참모총장 우메즈 요시지로 대장에게 단칼에 거절당했고 육군성 시무국장 사토 겐료 중장으로부터 2달이면 무너질 것이라는 조롱을 듣는다.
고이소는 미군에게 일격을 가해 그 기회를 노려 대미 강화에 나선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육군 지휘부는 고이소의 의향을 따르지 않았고 최고전쟁 지도회의에서 고이소는 발언시 하타 히코사부로(秦彦三郞) 육군참모차장으로부터 "근대적 작전용병을 모르는 수상은 발언할 자격도 없다"라는 수모를 당했다.
육군성 내부에선 "이 내각은 2달 밖에 갈수 없을 것이다"라는 말이 떠돌기도 했다. 그 이유는 구니아키가 육군의 엘리트가 아니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가 육군대학에서 졸업 했을 때 성적은 55명 중에 33등이였는데다가, 20등 이하의 성적을 가지고 출세한 자는 고이소 뿐이었기 때문이다[3]. 그래서 고이소는 다른 육군의 엘리트들에게 젊었을 적부터 무시당했고 이로 인해 어느 파벌에 끼어들지 못하게 되어서 육군 내부에 그의 편이 되어줄 강력한 파벌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고이소가 승진을 한 이유도 분명했다. 고이소는 엘리트를 제외한 육군 내부에서 이상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다. 또다른 장군들과는 달리 유연하다는 평도 들었는데, 1930년 군무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성적과 달리 의외로 실력을 발휘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어디서 주워들은 지식을 씹고 뜯고 맛본 다음에 논리적이고 표현력이 좋게 연설하는게 특기였다고. 군무국장, 총독, 나아가 총리라는 어려운 자리를 버텨낸 건 그런 능력이었다. 어쩌면 인간승리. 하지만 후에서 보듯이 의외라는 정도지 임기응변 이상의 능력은 없었다.
고이소 내각 |
1944년 10월, 사이판 함락을 구실로 사임한 도조 히데키의 뒤를 이어 총리에 발탁되었다. 예비역이 된 후 조선 총독을 하는 등 오랫동안 군에서 떠나 있었기 때문에 조종하기 쉽다는 이유에서 임명된 까닭이었다. 도조 히데키가 퇴임을 받아들이는 대신 마지막까지 밀어붙인 스기야마 하지메의 육군대신 임명을 거부하지 못하는 등, 본인도 육군대장 출신이면서 육군을 전혀 통제하지 못했고, 결정적으로 육해군 모두에게 무시당하고 전과 보고도 제대로 받지 못해 전황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어 히로히토가 무어라고 물으면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했다. ( 레이테 만 해전에서의 패배를 듣고 고이소는 디시 현역 육군대장 복귀와 육군대신을 겸직을 시도하였으나 이번에도 육군의 반대를 이겨내지 못해 반대하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4]
1945년의 고이소 구니아키 |
그는 도조의 무능한 정책을 이어갔으며, 카미카제의 적중률을 높이기 위해 자폭기에 장갑을 덧대는 등 삽질은 계속 되었다. 고작 9개월의 집권 기간 동안 손발이 안 맞아 해군은 해군대로 패전하고, 육군과 해군의 알력싸움으로 골만 깊어지는 등, 되는 일이 없었다. 각 일본 육군이나 해군 내각에서도 유우부단한 고이소에 대해서 그의 능력에 대해 불신했기 때문에 전쟁을 지휘하는 지도자로는 맞지 않았다.
이런 삽질은 동맹국인 나치 독일에까지 전해져, 나치 독일의 총리인 파울 요제프 괴벨스는 자신의 일기에 "고이소 내각은 전쟁을 수행할 힘이 없다"라고 기록하고 " 일본이 독일보다 먼저 항복하면 독일이 단독으로 전쟁을 수행할 수 밖에 없다"고 기록을 남겼다.
고이소 내각이 무너진 결정적 원인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대신을 신뢰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판단해서 그를 축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5] 결국 고이소의 막장 운영에 지친 귀족 원로들과, 해군 출신 원로들의 연합탄핵으로 총리직에서 쫓겨나는 운명을 당했다. 이로서 고이소 내각은 1945년 4월 7일 무너져 겨우 8개월짜리의 단명 내각이 되고 말았다.
2.4. 전후와 죽음
1948년 A급 전범으로 극동국제군사재판에 불려나간 고이소는 A급 전범으로 종신형을 선고 받고 스가모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감옥에서 자신의 정치인생을 다룬 회고록을 집필하였으며, 조선총독 시기 만난 조선 정치가들에 대한 논평도 남겼는데 특히 박중양에 대해서 종잡을 수 없는 인물로 혹평했다. 그러다가 70세가 되던 1950년 스가모 구치소에서 식도암으로 사망했다.3. 별명
- 고이소 구니야키가 스스로 좋아하는 별명이자 일본군 상층부에서 고이소를 부르는 별칭은 조선의 호랑이였다. 그 이유는 가장 못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6] 이 때문인지 패전 후 연합국 측의 예비검사에 의해 심문이 이루어 졌을 때 검사가 "장군은 조선의 호랑이라 불렸지요. 이제 그 이유를 답하시오."라고 질문하자, 고이소는 "역대 조선 총독 중에서 보다시피 내가 제일 못생긴 얼굴이요, 이 얼굴이 호랑이와 비슷하지 않은가?"라고 답했다고 한다. 이 말에 검사가 웃으면서 "잘 알았소." 하며 납득했다고 한다.[7]
4. 둘러보기
[1]
10월 유신 이후 친여당 성향("
사쿠라")으로 욕을 먹긴 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엔 열혈 학생이었다.
[2]
훗날
고려대학교의 설립자 겸 초대 이사장이자
대한민국 부통령이 되는 그 인촌 김성수 맞다. 충숙공
이용익이 세운 보전을 인수하여 교장을 지냈었으며
동아일보의 창립자였다.
[3]
일본 육군은 육사와 육군 대학 시절의 성적이 이후의 출세를 결정 짓는 오늘날 시각으로는 황당한 전통이 있었다. 단, 고이소 뿐이라는 말은 대장급 한정이다. 중장의 경우에는 몇명 더 있다.
미야자키 시게사부로라던가, 일본 최악의 졸장인
도미나가 교지가 그 예.
[4]
참고로 고이소는 도조보다 선배였다. 그러나 고이소는 본인 이외에 육군에 동료 장성이 없었기에, 즉 자기 파벌이 없었기에 육군성과 참모본부의 핵심 인물들에게 무시당한 것이다.
[5]
고이소는 중일전쟁을 밀사를 통해 해결보려다가 실패한 경력이 있어 시게미쓰의 협상력을 신뢰하지 않았다.
[6]
웃기게도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미성이었다.
[7]
정작 고이소 구니아키는 이 취조 과정이 자신을 바보로 여기는 것이라고 여겼고 검사와 취조 과정을 경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