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0:03:54

100인 참수 경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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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문제의 학살과 기사3. 전쟁범죄가 된 이유4. 처벌5. 기타

1. 개요

파일:attachment/100인 참수 경쟁/test.jpg

百人斬り競争

왼쪽: 노다 츠요시, 오른쪽: 무카이 토시아키

1937년 난징 대학살 당시 일본 육군의 두 장교가 포로와 민간인을 누가 더 많이 살해하는지 시합한 사건이다. 사건의 명칭은 100인 참수 경쟁이긴 하지만 두 장교 다 100명을 살해하고도 살인을 멈추지 않았고 이후에도 150인 베기, 300인 베기 등의 정신 나간 짓거리를 계속 했다.

2. 문제의 학살과 기사

파일:attachment/100인 참수 경쟁.jpg

일본 육군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츠요시(野田毅) 소위[1] 일본도(日本刀)로 누가 먼저 100명을 참수하는지를 겨뤘다고 보도되었는데, 당시 신문에 게재된 100인 참수시합의 기사는 다음과 같았다.
<1937년 11월 30일자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1보>

(제목) 100인 참수경쟁! 양 소위, 빨리도 80명.

창수(常熱), 우시(無錫)간의 40 km를 6일간에 답파한 ○○부대의 쾌속은 이것과 동일한 거리의 우시, 창저우(常州)구간을 3일만에 돌파했다. 이것은 신속, 쾌진격, 그 제일선에 선 카타기리(片桐) 부대에 <백인참수경쟁>을 꾀한 2명의 청년장교가 있다. 우시 출발 후 재빠르게도 한 사람은 56명을 베었고, 한 사람은 50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도야마 부대의 무카이 토시아키 소위(26세)- 야마구치 출신-
한 사람은 같은 부대의 노다 츠요시 소위(25세) - 가고시마 출신 -

총검도(銃劍道) 3단의 무카이 소위가 허리에 찬 보도 < 세키노 마고로쿠>를 휘두른다면 노다 소위는 무명검이지만 조상 대대로 내려온 보도라 말한다. 우시 출발 후 무카이 소위는 철로를 따라 16, 7 km를 따라 대이동하며 전진, 노다 소위는 철도노선 앞에서 전진하면서 일단 둘은 헤어졌다. 출발 다음날 노다 소위는 우시에서 80 km 떨어진 무명부락에서 적 토치카에 돌입해 4명을 베면서 선진의 이름을 떨쳤다. 이를 들은 무카이 소위는 분연히 야간에 부하들과 함께 적진[2]에 뛰어들어 55명을 베어넘겼다. 그 후 노다 소위는 횡림진에서 9명, 위관진에서 6명, 19일 창저우에서 6명, 합계 15명을 베었다. 무카이 소위는 그 후 창저우 역 부근에서 4명을 베고 기자가 역에 갔을 때 두 사람이 역전에 서 있는 광경과 마주쳤다. 무카이 소위는 난징과 단양에서 백명을 넘게 베었다고 해서 노다의 패배였다. 무카이의 칼은 56명을 베었지만 날이 상한 곳이 한 군데도 없었다. 노다 소위는 두 놈이 달아나버려 베지 못했다고 하며 대신 고관을 처치했으니 내가 성적이 더 위가 아닌가 하고 단양까지 대기록을 세우겠다고 했다.
<1937년 12월 4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3] - 제 2보>

제목) 급핀치로 활약, 100인 참수 경쟁의 경과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을 시작한 ○○부대의 급선봉 카타기리 부대와 도야마 부대의 두 청년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창저우 출발한 뒤로 분전을 더하여 2일 오후 6시 단양에 입성하기까지 무카이 소위는 86명 참수하고, 노다 소위는 65명을 참수해 서로 호각인 대접전을 이루어냈다. 창저우에서 단양까지 10리 간에 전자는 30명, 후자는 40명 적을 참수했다는 것으로, 장렬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분전했다. 이번에는 두 용사가 함께 철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우진, 여성진, 능구진의 적진에 뛰어들어 적들을 베어넘겼다. 그 중에서 무카이 소위는 단양중 정문의 1차돌입을 결행했는데 노다 소위도 우측 손목에 경상을 입었지만 이 100인 참수 경쟁은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루어냈다. 기자 등이 단양 입성 후 숨을 돌릴 새도 없이 추격을 실행하는 도야마 부대를 쫓아갔지만 무카이 소위는 행군대열 속에서도 여유를 부리며 이야기하더라. 노다 녀석이 갑자기 따라와 놀랐다. 노다의 상처는 가벼워 염려하지 않았다. 능구진에서 벤 놈들의 뼈에도 나의 마고로쿠는 한 군데도 상한 곳이 없다, 아직 100명, 200명을 더 벨 것이다. 기자가 심판관이 되어 주겠다 말하더라.
<1937년 12월 6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3보>
(제목) 89-78, 백인베기, 대접전/ 용장! 무카이, 노다 양 소위!

남경을 둘러싼 100인 참수 경쟁을 시작한 두 청년 장교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소위는 무사히 입성했지만 최전선에 서서 분전했다. 입성 직전까지 전적은 무카이 소위가 89명, 노다 소위가 78명이었다.
<1937년 12월 13일 도쿄 일일신문 조간 - 제 4보>

(제목) 백인 베기 '초기록' 무카이 106-105 노다 / 양 소위들은 연장전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이라는 특이한 경쟁을 시작한 이례적인 카타키류 부대의 용사 무카이 토시아키, 노다 츠요시. 두 소위는 10일간 자금산 공략전에서 106대 105라는 레코드를 작성한 뒤 10일 정오에 서로의 칼날을 지닌 일본도를 한 손에 쥐고 만났다. 노다 왈 "이봐, 난 105명인데 너는?" 무카이 왈 "난 106명이다!" 두 소위는 서로 웃더니 결국 어디까지 누가 먼저 100명을 베었는지 묻지 않기로 하고 "이건 비겼다. 하지만 150명은 어떤가?" 하여 일치단결해 10일 이내에 150명을 참수하기 시작했다. 11일 낮에 중산릉이 내려다보이는 자금산에서 패전병 사냥에 한창이던 무카이 소위가 100인 참수에서 무승부의 결말을 위해(중략)... 두 사람은 100명을 넘기면 원래 서로의 칼을 내기로 하였다더라...(사진 상 게재)
오사카 마이니치 신문(大阪毎日新聞)
(표제) 난징을 향한 상쾌한 목 베기 경쟁
세키노 마고로쿠(關의 孫六)은 56명을 베었고, 전래의 보도는 25명을 쓰러뜨리다. 카타기리 부대의 두 소위
100인 참수를 계획한 청년장교 두 명이 있다. 이 경쟁은 무석(無錫, 우시)에서 출발할 때 시작되었는데, 한 사람은 이미 56명을 베고, 또 한 사람은 25명을 베었다고 한다. 한 사람은 무카이 도시아키(向井敏明) 소위(26)이고, 다른 한 사람은 같은 부대 노다 다케시(野田毅) 소위(25)였다. 이 두 사람은 무석입성과 시작된 주력전에서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난징에 도착할 때까지 100인 참수 경쟁을 하자고 얘기했다. 두 사람에게 "이 이야기가 신문기사로 나가면 신부 후보들이 많이 오겠네요"라고 했더니 80여 명을 벤 두 사람이 얼굴을 붉히며 쑥스러워했다.
더욱더 기가 막힌 내용은 나중에 500명 베기 약속까지 했다는 것.

이 기사를 쓴 기자는 나중에 사실을 알고 나서 "나는 저들이 총 든 군인들을 죽인 줄 알았다."고 해명했다. 물론 참수를 부추기거나 동조하지는 않고 그냥 이들의 일화를 취재만 한 것이라 전범재판에서도 증인으로만 출석했다. 이 기자가 연합군의 설명을 듣고 진심으로 허탈해한 것을 보면 거짓이 아닐 가능성이 큰데 당장 기사 본문도 적진에 뛰어든다든지, 토치카에 돌입한다든지, 야습을 한다든지, 고관을 베었다든지, 심지어 전투 중 경미한 부상을 입었다던지 등 적과의 교전을 상정하고 쓴 내용들이다. 그리고 정말로 그렇게만 알았다면 대단한 활약을 한 군인에게 보낸 찬양 정도로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기사 내용을 문제삼기에도 무리가 있다. 그게 정말로 적과의 전투에서 세운 진짜 전과였다면 말이다. 구르카 용병도 아니고 본토에서든 식민지에서든 마구잡이로 끌고 온 병사들이 상식적으로 총 든 상대를 칼로 100명씩 때려잡는 기행이 있을 린 없었고 실상은 포로와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단순한 학살을 경쟁하듯 한 희대의 미친 짓이었다는 것이다.[4]

일본군 러일전쟁을 치를 때까지만 해도 서양인들이 하는 건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닥치고 따라하자는 마인드 때문에 포로 대우는 비교적 신사적이었다. 러시아군 포로에 대한 대우도 훗날 후배들이 한 것에 비하면 훨씬 나았고 러시아군에 사로잡힌 자국군 포로들에게도 군사기밀을 흘리거나 하는 등 특별한 잘못이 없으면 문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다이쇼 시대 이후 야마토 정신의 우월성이 강조되고 쇼와 시대에 서구를 배척하고 전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면서 오늘날 흔히 알려진 악명 높은 포로 학대가 빈번해졌다.[5] 물론 청일전쟁 당시 중국군 상대로는 중일전쟁 수준으로 일을 벌이지 않았을 뿐이지 충분히 19세기~20세기 초 기준으로 상당히 잔인하게 굴었다.[6]

3. 전쟁범죄가 된 이유

현대전에서도 칼 들고 전장에서 적군 목베기를 한 사례가 잭 처칠, 구르카 등 여럿 있었다.[7] 대부분 무모했다고 할지언정 전쟁범죄자가 아니라 영웅 대접을 받았고 전후에도 용감한 군인으로 인정받았다.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적진 한복판에서 적군을 베고 용맹하게 싸우며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교전 중 적을 베는 것은 전쟁범죄도 아니고 훈련으로 갈고 닦은 실력이 치열한 실전에서 빛을 발했고 적이 자신을 죽이려 하니 살기 위해선 적을 죽여야 하는 정당방위일 뿐이다.

더구나 이런 공적을 세운 군인들은 이에 대해 영웅담처럼 떠들지 않고 항복한 자와 민간인에게 해코지를 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실상이 전쟁수행 능력이 없는 민간인이나 포로를 대상으로 벌인 학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사로 보도된 내용 중 거짓인 부분이 죽인 사람의 수가 아니라 죽이게 된 상황과 희생자의 신분이라는 게 문제다. 차라리 단순히 공명심에 부풀어 하지도 않은 일을 기자 앞에서 허풍을 친 정도에 불과했다면 평생 놀림감이 되었을지언정 전범으로 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순수히 전투에서 적군을 상대로 100인 참수 경쟁을 했다고 하더라도 국제법상 문제는 없으나 도의적으로 비난받을 여지는 충분하다. 전투에서 검을 사용하는 건 둘째치고, 상대가 적군이라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는 일로 경쟁하며 희열을 느낀 게 문제가 된 것. 상기한 잭 처칠과 같은 인물들도 단지 신념에 따라 총이 아닌 검을 들고 나라를 위해 싸웠을 뿐 참수 경쟁을 벌이지는 않았다. 현대의 많은 군대에서 참수 경쟁 따위를 하는 군인들은 사이코패스 취급을 받으며 기피대상이 되기 십상이다. 대부분 군인들은 나라를 위해, 또는 자신이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전쟁에서 적을 죽이지 살인이 좋아서 적을 죽이지는 않기 때문이다.[8] 애초에 적을 죽여야 하는 전장에서의 살인 행위도 내가 살기 위해 피치 못하게 벌이는 행위이지, 이게 "경쟁"이란 이름으로 유흥이나 오락거리로 삼아서 할 행위가 아니란 건 명백하다. 비슷하게 수백 명을 사살한 저격수들도 본인이 몇 명을 사살했다고 자랑스럽게 떠벌리고 다니거나 FPS 게임마냥 다른 아군 저격수와 사살 경쟁을 하지는 않았다. 저격수들이 몇 명을 죽였네 하는 것도 살인을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전투에서 아군이 적군을 몇 명 사살했다는 것처럼 객관적인 기록의 척도로써 바라보는 것 뿐이다.

거기다가 총과 같은 화기를 가지고 적을 저격하거나 사살하는 행위도 아니고 검을 손에 들고 상대방에 대해 명백한 살인의지를 가지고 죽이는 행위는 인간에게 분명히 더 큰 스트레스를 주기 마련이다. 하다못해 나를 죽이기 위해 공격하는 적군을, 그것도 칼로 베어죽인 것도 아니고 총으로 사살한 군인들도 정당화는커녕 자신이 사람을 죽였다는 점으로 PTSD에 빠지기 십상인데 참수는 내 눈앞에서 내 손으로 상대를 확실하게 죽이는 행위이기에 나의 살인의지가 즉각적으로 어떤 결과로 돌아오는지 분명히 인지된다. 참수형을 행하던 사형집행인들은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기피직업으로 취급받았다. 단두대가 도입된 이유 중 하나도 이렇게 사형집행인들이 겪는 정신적인 고통을 경감해 주기 위한 점이 있었다. 현대에도 교수형이나 총살형 집행 시에도 집행인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일부러 가짜 레버나 공포탄을 끼워넣어 이를 덜어 주고 있다.

즉 대부분의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참수라는 행위, 다시 말해 직접 자기 손으로 사람을 죽이는 것 자체에 대해 부담감이나 죄책감을 가지기 마련이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순수하게 교전 중 적군의 목을 벤 군인들이 이를 영웅담으로 자랑스럽게 꺼내지 않은 것엔 이 부분도 작용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를 오락거리로 삼고 심지어 마치 게임하듯 경쟁했다는 데에서 충격을 줬다. 평범한 군인들은 어디까지나 주어진 임무와 작전을 완수하기 위해서 그 과정에서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적을 죽일 뿐, 경쟁이라는 이름 하에 오락처럼 사람을 학살하지 않는다. 그렇게 오락과 흥미로 사람을 살해하면 필연적으로는 전쟁범죄로 이어지며 그 살인 수단이 빗나갈 수도 있는 총기도 아니고 나의 살인의지가 직접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적용되는 참수라면 더더욱 그렇다. 게다가 이들은 적군도 아니고 저항의지나 능력이 없는 포로와 민간인을 상대로 이 짓거리를 저질렀다. 그래서 이들의 행위가 공분을 산 것이며 전쟁범죄로 규정된 것이다.

4. 처벌

사실 참수 경쟁에 가담한 자들은 한둘이 아니었지만 상술한 이유로 대부분은 전쟁영웅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민간인과 포로를 대상으로 참수경쟁을 벌인 이들은 소좌까지 진급하며 승승장구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일본에 숨어 살다가 GHQ의 지시를 받은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스가모 구치소를 거쳐 극동군사재판의 법정에 서게 된 무카이와 노다는 공포에 질린 나머지 100인 참수 경쟁은 신문기자들이 멋대로 지어낸 것이라고 거짓 주장[9]했지만 증거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고 살아남은 증인들도 수천 명에 달했다.

극동군사재판은 A형 전범만 다루었기 때문에 이들은 B, C형 전범으로 분류되어 현지 재판을 받기로 하고 1947년 9월 2일 난징의 국민당 정권으로 신병이 인도되었다. 무카이와 노다는 전쟁포로 학살 및 민간인 살인이 인정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1948년 1월 28일 난징의 우화대(雨花臺)에서 다나카 군키치(田中軍吉)[10]와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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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무카이 소위, 노다 소위, 다나카 군기치 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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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는 이렇게...(시신주의)

난징 대학살의 책임자인 다니 히사오(谷 寿夫) 중장은 1947년 4월 26일 난징 교외에서 총살형을 받았다. 이 자가 죽기 직전까지 구타를 당했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이 아니다. 2차 대전 전범 가운데 구타를 당했다고 기록된 인물은 일본은 치치지마 식인 사건 주동자인 다치바나 요시오 일당 5명이 유일하고[11] 독일은 카를 게브하르트. 카를 브란트[12]. 한스 프랑크가 있으며 그는 미군들에게 Running the gauntlet[13]이라는 폭행을 당했다는 기록이 있다.

두 명 모두 유서를 남겼는데 민간인을 학살한 적은 전혀 없으며 세계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라도 처형을 면해 달라고 탄원하는 내용이었다. 양쪽 모두 '중국 만세'를 외치며 유서를 마쳤다.

5. 기타

남경을 점령했을 당시 일군의 포악성은 극에 달한 느낌이었다. 기가 막힌 일은 사람 많이 죽이기 대회까지 개최했다. 그때 사람 죽이기 내기에서 어느 일병은 일본도로 단숨에 40여 명의 무고한 중국인의 목을 베었다 하여 1등을 차지했다.
당시 상해의 일본 신문과 라디오 방송에선 그 1등한 병사를 대대적으로 찬양하고 선전하느라 북새를 떨었으니 생각하면 그들의 정신은 도저히 성한 것이 아니라 볼 수 있었다.
- 일본군의 참수 경쟁 사건에 대한 김홍일 중장의 회고. 난징 함락 당시 그는 국민혁명군 군사위원회 소속 군수설계위원이었다. 자서전 《대륙의 분노》316~317p에서 발췌.

두 사람은 당시 제16사단 제9연대 제3대대 소속이었다. 무카이는 당시 제3보병포소대 소대장(소위)이었다. 노다는 당시 대대장 부관이었는데 2차대전 중에는 특무기관[14] 요원으로서 친일 버마군을 지원하는 군사고문을 맡았다. 둘 다 패전 당시 기준으로 소좌까지 진급했다.

일본 극우들은 일본도 - 일본군도는 3명만 베도 날이 무디어지므로 이런 만행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일단 일본의 부사관과 병에게 지급되는 칼날은 똥철을 대충 두드려 만든 저질 군도가 제법 많았다고 한다. 반면 가해자들은 일반적인 일본군도가 아니라 조상에서 전해 내려오는 명검을 사용했다. 명검 마고로쿠 카네모토 에도 시대 야마다 아사에몬이 직접 시체를 여러 번 베어 가면서 최고등급 도검인 사이죠오오와자모노(最上大業物)로 분류한 물건이다. 그 외에도 장교용 군도는 장인들이 정성들여서 만들었기에 저질 군도일 가능성은 제로다.

훗날 무카이의 딸과 노다의 아내, 손녀는 아주 뻔뻔하게도 아사히 신문과 마이니치 신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해 우익 단체들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대법원에까지 상고했지만 당연히 패소했다. 당시 원고 측 변론을 맡았던 변호인은 2016년 8월 아베 정권에서 방위상 자리에 오른 이나다 도모미였으며 한국 언론에서도 극우파가 방위상이 됐다고 촉각을 세웠다. 그리고 동년 12월에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갔는데 일본 방위상으로서는 첫 참배였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마이웨이에 등장하는 구 일본군 조연들 중 일부의 극중 성이 무카이와 노다이다. 100인 참수 경쟁을 한 그 무카이와 노다에서 따 온 성인 듯. 작중에서 무카이는 일부러 살인을 자행하지는 않고 하루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그나마 생각이 있는 청년이지만 노다는 조선인들을 일부러 괴롭히는 악랄한 악역으로 나온다.

2010년에 미군이 아프간에서 일명 킬 팀이라는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사례가 있다.

일본 만화 원피스 갓 밸리 사건에서 천룡인들이 점령한 나라의 주민과 노예들을 인간 사냥하는 것을 대회로 열어 즐긴다는 설정이 나왔다. 원피스의 작가인 오다 에이치로의 평소 성향이 일본 제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사실은 무카이 소위는 포병 소대장, 노다 소위는 대대의 부관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투 도중 적과의 백병전에서 적 군인을 벤 것이 아니라 후방에서 포로나 민간인을 베었다는 것. [2] 이 포인트가 중요한데, 기자도 차마 민간인과 전쟁포로를 100명 먼저 죽이겠다는 경쟁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적진에서 적군을 칼로 100명 죽이는 경쟁으로 알았던 것이다. [3] 도쿄일일신문은 동명으로 조간지와 석간지 2종류가 있다. 조간이라고 기재한 것은 동명의 석간지와 구분하기 위한 것이다. 이 신문은 일본의 3대 일간지가 되는 마이니치 신문의 전신이다. [4] 더군다나 당시 기자들은 전쟁터에서 실제로 같이 뛰어다니며 기사를 쓰기보다는 전투가 끝나고 난 뒤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를 옮겨 쓰는 경우가 많았으며 이 기사를 쓴 기자 역시 정말로 노다와 무카이의 허풍에 속아서 이들이 교전 중 적군을 죽인 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 기자가 직접 그 현장을 목격했다면 이들이 토치카에서 뛰어가는 모습이나 다른 장면을 세세하게 적었을 텐데 그냥 몇 명 베었다는 이야기만 서술한 것을 보면 정말로 진상을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일본 제국은 러일전쟁 이전부터 언론통제와 탄압이 심했으며 제국군의 타국 침공에 대한 명분과 선전을 강요하였다. 이후 군국주의로 돌아선 이후에는 바른 말 하는 기자들을 체포하거나 강제 징집하여 사지로 내몰았으며 모든 사설을 국가가 검열을 했다. [5] 애초에 메이지 유신의 명분이 일본(천황)을 위협하는 서양을 몰아내자(양이)는 것이었으니 힘을 기르기 위해 서양은 따라하되 힘을 길렀다면 일본의 근본을 중요시하게 되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6] 도고 헤이하치로만 해도 청일전쟁 당시 고승호를 격침한 뒤 국제법 조문을 유리하게 해석해 영국인 선원만 구출하고 청군은 방치했다. 다만, 당시 영국은 일본의 매우 중요한 동맹이었기에 영국인의 경우 일본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구출해야 했을 것이다. 이것은 그나마 국제법에 근거했고 중국이 꼼수를 쓴 것이라고 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청일전쟁 과정에서 뤼순 요새를 점령한 후에는 중국인을 1천 ~ 6만 명 가량 학살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7] 참고로 잭 처칠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활과 클레이모어만 들고 전장을 돌아다닌 미친 사람이었다. [8] 베트남 전쟁이나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민간인 마을에 쳐들어가 학살한 인간들도 좋은 취급 받지 못하고 반인륜적인 전범이라는 낙인이 찍혔다. [9] 재판 자료에 따르면 무카이는 자신이 포병대장이라 후방에 머물려야 하고 전쟁 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어 기사에 나오는 현장 중 몇 곳은 가지도 않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게 포로 참수를 못 할 이유는 아니었고 부상을 입었다는 말도 위증일 확률이 높다. [10] 민간인과 포로를 300명 이상 학살한 전범. [11] 일본어 위키백과에는 미군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어 심각한 학대를 당했다고 서술되었다. 심지어 같이 수감된 일본군 장성들에게도 저 놈은 신사에 자리가 없을뿐더러 사람이 아니라서 때려도 된다는 이유로 흠씬 두들겨 맞았다. [12] 이 두사람이 얻어맞는 소리 때문에 파울 하우서가 잠을 잘 수 없었다고 한다.카를 브란트는 교수형 당일에도 두들겨 맞았다고. [13] 타워 디펜스 비슷하게 피해자가 두 줄로 나뉘어 선 가해자들 가운데를 달려가면 가해자들이 피해자를 몽둥이로 구타하는 방식이다. 고대 로마 시절에도 시행된 기록이 있는 유서 깊은 군 형벌 중 하나. [14] 일본군 군사정보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