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43:55

베허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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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전쟁범죄와 그로 인한 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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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건의 전말
2.1. 일본군 최후의 통상파괴전2.2. 학살2.3. 처벌2.4. 학살 책임자2.5. 재판의 문제점
3. 기타

1. 개요

Indian Ocean raid (인도양 영국 상선 습격사건)
サ第一号作戦(ビハール号事件)

일본 해군 소속의 중순양함 토네함의 승조원들이 영국 상선 베허호를 습격, 격침시키고 배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1946년 5월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영국 해군 정보부의 심문을 받던 부장(副長) 준스케 미이 해군 중좌의 자백과 진술로 자세히 알려졌다.

2. 사건의 전말

2.1. 일본군 최후의 통상파괴전

1944년 2월 말에,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해군 대장 다카츠 시로 제독은 16 전대에 인도양 방면의 연합군 선박을 습격할 것과, "정보를 캐내는데 도움이 될 일부를 제외하면 포로는 필요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16전대 기함 아오바에 승선한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나오마사 해군 중장은 이 명령에 이의를 딱히 제기하지 않았다. 원래는 아시가라가 동행해야겠지만, 아시가라는 2월 25일에 16전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므로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고, 2월 27일에 출항한 함대는 16전대 기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와 오이, 구축함 5척, 그리고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시가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7전대의 토네와 치쿠마를 대신 지원받은 건데, 이게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서 토네는 3월 9일, 인도양에서 호주 멜버른에서 아연 796톤을 싣고 중간에 인도 봄베이에에 기항 후에 영국으로 향하던 상선 베허(Behar)에 국적표시를 숨기고 접근, 정선을 지시하며 나포를 시도했지만 정체가 탄로나자 베허호를 공격, 침몰시킨 후 민간인들을 포로로 잡는다.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토네의 항해장이 "(국적표시를 숨기는 건) 국제법 위반입니다"라고 진언하자,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 대좌(대령)가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이는 반만 맞는 것으로, 국제법상 군사 작전을 위해 국적을 위장하는 것은 제재가 없지만, 공격 행위를 하기 위해선 자신의 국적을 밝혀야만 한다. 때문에, 크릭스마리네의 보조순양함(상선으로 위장한 통상 파괴용 군함)과 수상함들도 격침할 상선 근처까지는 국적을 속이고 접근했다가, 발포 직전에 위장을 풀고 해군기를 게양하는 식으로 국제법을 지켰다.

베허호에서 잡힌 포로의 수는 100명이 넘었으며, 일본 위키에 따르면 115명이었다고 한다. 구조된 인원의 숫자가 출처마다 다른데, 영문 위키에서는 104명 전원을 구조했다는 설과 111명 중 108명을 구조했다는 설을 나란히 소개했다.

포로들은 토네의 승조원들에게 가혹한 학대를 당했으며, 16전대 사령관 사콘조는 베허호가 보낸 무전을 통해 연합군이 일본군의 존재를 알았으리라고 판단하고 작전을 취소한다. 토네의 어설픈 습격이 일본군 최후의 인도양 통상파괴전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셈이다. 그러나 무전을 받은 배가 너무 늦게 상부에 보고하는 바람에, 연합군의 추격은 없었다.

2.2. 학살

다음날 포로 중에 선장, 기관장, 통신사를 빼고 모두 처형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으나 마유즈미 하루오 함장이 아직 포로들을 조사중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포로 대다수가 인도인이여서 일본 상선의 선원으로 이용하고 유럽인들만 수용소로 보내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다시 포로 처형 명령이 내려왔고 준스케 중좌가 사관회의를 소집했다. 사관회의 후에 대부분의 장교가 포로 처형에 반대한다는 의견을 마유즈미 대좌에게 전달하였다.

3월 15일에 토네는 인도네시아의 탄중 프리옥 항구에 입항한 후, 생존 포로중 15명을 기함 아오바로 보낸다. 그후에도 미이 중좌는 16전대 참모장을 찾아가고 경순양함 오이의 함장 가쓰오 시바 대좌에게 협력을 요청하는 등 지속적으로 상부에 탄원을 하여 15명을 추가로 포로수용소로 보내란 지시를 받으나 준스케 부장은 함장을 속이고 30명을 수용소로 보낸다. 그 후에도 더 많은 포로를 하선을 요청했지만 묵살 당했다. 포로수용소로 보내진 인원이 얼마인지도 분명하지 않은데, 15명이란 설부터 36명이란 설까지 다양하다.

이것으로 임무는 끝나고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으며, 그 후 마유즈미 대좌는 처형에 찬성하는 하급장교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3월 18일 밤에 토네의 승조원들은 남은 포로들의 목을 벴다. 포로 살해 현장에는 함장도 동석했다. 이쪽도 인원수가 분명하지 않은데, 출처에 따라 65명이라는 설부터 80명이라는 설까지 다양하다. 당연히 전쟁이더라도 국적표시를 숨긴 채 공격한 것과 포로, 그것도 민간인을 임의로 처형하는 것은 중범죄다.

15일에 16전대 기함 아오바에 넘겨진 포로들은 자바 각지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강제노동에 종사했고 죽은 사람은 없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2.3. 처벌

"필요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포로만 남기고 나머지는 죽여라."는 명령을 내린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제독은 전쟁 중에 병사했고, 토네가 잠시나마 16전대와 같이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콘죠 제독이 책임을 뒤집어쓰고 전후 홍콩에서의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마유즈미 대좌는 징역 7년(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원래는 마유즈미 대좌가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홍콩 전범재판에서 영국군 심문관에게 "군기와 문장을 숨기고 포로 학살을 저지른 건 사실이나 작전 중에 포로를 잡거든 신속히 처리하라는 상부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다."라는 진술을 하는 바람에 사콘조 제독의 신병이 인도되어 함께 홍콩에서 재판을 받고, 본인은 징역 7년형, 사콘조 제독은 교수형이라는 엇갈린 운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실제로 학살을 자행한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다 금방 석방되었으며, 마유즈미 대좌도 고작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된 후 잘 먹고 잘 살다가 1992년에 편안하게 죽었다.

진술한 준스케 중좌는 무혐의로 석방되었으며, 전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4. 학살 책임자

학살 책임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사람은 16전대 사령관을 지낸 사콘조 제독인데, 이 사람이 과연 진짜 책임자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카츠 제독이 포로 학살을 명령할 때 사콘죠 제독이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마유즈미 대좌에게 포로 학살을 명령했다고 되어 있지만, 토네와 16전대가 입항한 날짜가 3월 15일이고 포로 학살이 벌어진 게 3월 18일인데 이 시간은 이미 임무가 해제된 시간이다. 16전대의 지휘권에서 확실히 벗어난 시점이므로 사콘죠 제독이 토네 함장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에 대해 사콘죠 제독이 아직 토네가 16전대에 잠시 있었을 때, 학살 10일 전 토네에 포로들을 수용했을 때 토네에 장시간 수용 능력이 없다고 하며 토네측에 신속히 처분할 것을 이미 명령했었다고 서술한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사콘죠 역시 재판에서 "작전 중에 포로 처분을 명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작전 후에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마유즈미는 "사콘죠 제독이 명령했었다."고 진술했다고 전한다.

사콘죠 제독이 이에 대해 미합중국 해군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고 병원선을 격침시켜 사상자를 내자 일본군 수뇌부는 미군이 인력(人力)을 상실시키고 있다며 보복할 것을 결심했다는 진술을 남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살을 자행했던 당시 일본군 내 분위기를 진술한 것일 뿐, 사콘죠가 학살 책임자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학살을 실제로 저지른 게 토네와 그 승조원들임은 분명하지만, 학살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카츠 제독이 학살명령을 내린 책임자라고 해도 그 명령이 구두로 전해졌기에 관련 문서가 남지 않았다. 재판에서 나온 증언도 서로 엇갈린다. 그래서 민간인의 즉결 처형을 처음 명령한 사람이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인지, 16전대 사령관 사콘죠인지, 토네 함장 마유즈미의 결정인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증언의 신빙성을 검토해야겠지만, 이미 한참 지나간 재판이라서 관련자가 대부분 죽었고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아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당장 생존자와 사망자의 숫자조차도 불분명할 정도로 기록이 불명확한 게 사실이다.

다만 사콘조 제독이 사형을 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토네와 치쿠마가 7전대 소속이고 통상파괴전을 위해 임시로 16전대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소속 전대가 달라도 엄연히 작전은 16전대의 지휘하에 했고 베허호의 포로들을 수용한 시점도 16전대에서 작전을 수행했을 때다. 비록 잠시 합류하고 이후 지휘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라지만, 총 책임자인 다카츠가 병사하고 관련 작전 포로들를 학살한 이상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므로, 같이 작전했던 16전대 사령관이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긴 하다. 비록 작전 중에 처분된 포로는 없었고 작전 후에도 그런 명령을 다시 내리지 않았지만, 작전 중 토네의 포로들을 처분(학살)을 명령한 것은 본인도 사실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부하의 잘못은 상관 책임이라는 군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2.5. 재판의 문제점

문제는 토네 함장 마유즈미 대좌가 받은 처벌이 고작 징역 7년 형이고, 그나마도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어 위키에는 마유즈미가 포로 학살을 말렸기에 형량이 낮게 나왔다는 기록이 소개되고 있지만, 정말로 마유즈미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포로들은 결박당해 호흡곤란을 일으켰고, 항의하던 베허호 선장은 구타를 당했다고 나온다. 이런 상황이 되기 전에 부하들을 단속하는 것은 함장의 책임이다. 일본군/병영부조리에 나오듯이 일본군의 군기가 엉망진창이긴 했지만, 부하의 잘못은 엄연히 상관 책임이다.

게다가 마유즈미 대좌는 전쟁범죄와 무관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는 베허호에 접근할 때 성조기를 배에 게양한 상태로 공격하여 국제법을 위반했고, 부하들의 포로학대를 방조했다. 3월 18일에 포로들을 학살하라고 직접 명령한 것도 마유즈미 대좌 본인이다. 그날 토네에 있던 포로들은 모두 학살당한 후 바다에 버려졌다. 영문 위키에 따르면 마유즈미 대좌는 그 모든 것을 지켜보았다고 한다. 이런 자가 징역 7년 형밖에 받지 않았다. 게다가 고작 4년만 형을 살고 석방되었다. 국제법 위반과 포로학대와 학살을 저지른 범죄자를 4년만에 풀어준 셈이다.

더욱 고약하게도, 실제로 포로학대와 학살을 저지른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다. 마유즈미 대좌와 토네 승조원들은 자신들의 죄값을 전혀 치르지 않았다. 살인마들에게 면죄부를 쥐어준 꼴이었다.

3. 기타

토네급 중순양함 문서에도 나왔지만, 민간인의 학살을 강행해 제정신이 아닌 만큼 함선 운영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 업적도 부진하고 트롤러급으로 편대에도 방해를 줘 패전의 원흉이 되어 일본 해군 내에서도 가장 많은 비난을 받았다. 일본 군함 역사 중 최악의 함선으로 손에 꼽힐 정도로 만악의 근원으로 남겨졌다.

아라시 전쟁범죄를 일으킨 만큼 아군 편대한테도 피해를 끼쳐서 패전의 원흉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독일은 1943년 9월에 '통상파괴작전에서 배만 부수고 승무원들은 살려주니까 작전의 효과가 생각보다 안 나오네?'라고 생각하고 일본에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을 경우, 승무원도 전멸시켰으면 한다."라고 의뢰한 바가 있다.[1] 일본어 위키가 출처이므로 가려들어야겠지만, 일본군 잠수함 이8이 1944년 3월 26일과 7월 2일에 두 번씩이나 연합군 화물선을 격침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짓거리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영문위키 이8 일본어위키 이8을 참고하자.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임을 독일에게 모조리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건 무책임한 행위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요구를 반드시 수용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 아니다. 차라리 독일이 일본을 협박했다거나 천황이 독일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일본의 책임이 사라질 수 없다. 물론 그와 별개로 독일도 일본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의 근거로는 적합하겠지만 말이다.[2] 물론 독일측에서 날아온 학살 명령을 같은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에 참여한 크릭스마리네 몬순 함대는 처음부터 지키지도 않았으며, 라코니아 사건에서 국제법 준수하다 통수 맞은 전적도 있어서 나름대로 할 말이 없진 않았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작전상 포로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적군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서도 학살을 벌이지 않은 상황도 얼마든지 있었다. 진주만 공습과 바탄 죽음의 행진 등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던 미군조차도 가능하면 포로를 확보하려 했었고, 무자비한 포로 학살을 거의 저지르지 않은 게 그 예다. 오히려 미군의 포로 대우는 당시 연합군과 추축군을 통틀어서 가장 나은 편이었다. 사망률만 따지면 영국군에게 살짝 밀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사콘죠 제독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엄, 청결하고 전형적인 군인다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학살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라는 주장도 있었다.

마유즈미 대좌는 1945년 1월까지 토네 함장을 지냈으며, 레이테 만 해전에도 구리다 함대의 일원으로 참전했지만 사마르 해전에서 미군 구축함 USS 히어만과 싸우던 토네의 자매함 치쿠마가 미군의 공습으로 박살나자 토네를 몰고 히어만에게 덤벼들었다가 공습을 받자마자 꼬리를 말고 후퇴했다. 구리다 함대의 군함과 승조원들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졸전을 했고, 구리다 제독은 임무 완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구리다 턴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유즈미 대좌와 토네 승조원들은 졸전을 벌임으로서 구리다 제독에게 불명예만 잔뜩 안겨주고 작전을 말아먹는데 일조한 셈이다.

이때 레이테 섬 돌입 임무를 완수한 16전대는 탈출하다가 미군의 공격으로 괴멸되었는데, 이 때문에 구리다 함대에게 가해지는 압력이 약해졌고, 그 덕에 구리다 함대의 장병들은 더 많이 살아 돌아갈 수 있었다. 이때 16전대의 지휘관은 사콘조 제독이었다. 그가 마유즈미 대좌와 토네 승조원들의 목숨을 구해준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전후에 베허호 사건의 재판이 벌어졌을 때, 마유즈미는 사콘조에게 베허호 사건의 모든 책임을 다 떠넘겼다. 구리다 제독도 구리다 턴을 시전한 죄로 온갖 욕을 먹었다. 전함과 중순양함을 타고도 구축함한테 패배하는 못난 부하들 때문에 임무에 실패했는데, 모든 책임을 구리다가 전부 덮어쓴 것이다. 이래놓고도 마유즈미는 전후에 일본군 수뇌부의 작전이 잘못되었다며 비난했다.

마유즈미는 전후에도 일본 해군의 항공주병 전환은 잘못되었고 함포 중심의 함대결전사상으로 가야 했다고 주장했으며, 일본 해군의 원거리 포격 명중률은 미군의 3배라고 발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연히 현실은 안 그랬지만, 마유즈미는 죽을 때까지 이 두 가지 주장을 끝까지 관철했다.

추가적인 정보는 영문위키 베허호 사건 일본위키 베허호 사건을 참조. 관련 서적으로 해상학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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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타코츠보야 제독의 결단에서도 해당 설을 차용하고 있다. [2] 포로에 대한 부당한 대우, 민간인 학살, 전쟁범죄 등에서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다를 바가 없는 악랄한 수준이기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