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 성명 강요 외 다른 뜻에 대한 내용은 창씨개명(동음이의어) 문서 참고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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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b31c31> 상징 | 국기(일장기) · 국가(기미가요) |
시대 |
1910년대(
무단 통치) 1920년대~1930년대 초반( 문화 통치) 1930년대 중반 ~1945년( 민족 말살 통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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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기관 | 조선총독부( 청사) | |
언어 | 일본어 · 조선어 | |
정치 | 조선 주둔 일본군 · 일본 제국 경찰 · 조선물산공진회 · 토지 조사 사업 · 산미증식계획 · 민의창달 · 북선개척사업 · 농공병진 · 남면북양 · 농촌진흥운동 · 국가총동원법 · 전시증세령 · 내선일체 · 창씨개명 · 황국신민서사 암송 · 궁성요배 · 신사참배 · 정오묵도 · 가미다나 | |
악법 | 조선 사상범 보호관찰령 ·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 · 군기보호법 · 치안유지법 · 보안법(1907) | |
독립운동 유형 | 애국계몽운동 · 실력양성운동 · 항일무장투쟁 · 외교론 | |
주요 독립운동 | 신민회 105인 사건 · 3.1 운동 · 6.10 만세 운동 · 물산장려운동 · 광주학생항일운동 · 신간회 · 조선어학회 사건 · 일장기 말소사건 | |
주요 학살사건 | 제암리 학살사건 · 관동대학살 · 간도참변 · 화교배척사건 | |
학설 | 식민지 수탈론 · 식민지 근대화론 · 식민지 근대성론 · 자본주의 맹아론 · 근대화 회의론 · 식민사관 | |
단체 | 조선사편수회 · 식량영단 |
1. 개요
언어별 표기 | |
한국어 | 창씨개명 |
일본어 | [ruby(創, ruby=そう)] [ruby(氏, ruby=し)] [ruby(改, ruby=かい)] [ruby(名, ruby=めい)](소시카이메이) |
교과서에서는 이해가 쉽도록 '일본식 성명강요'(日本式 姓名强要)라고도 하지만 역사학계에서는 창씨개명이라고 부르며 이쪽이 정책의 본질을 더욱 잘 나타내는 명칭이다.[1]
2. 특징
조선의 성명( 姓名)을 일본식 씨명( 氏名)으로 바꾼 것이므로 창씨( 創氏), 즉 '씨'를 창제하는 일이 된다. 물론 개명(改名)이란 말을 보고 알 수 있듯 이름(名) 역시 함께 개명했다. 다만 창씨만 의무였고 개명은 자유였기 때문에 창씨만 하고 개명은 안 한 사람도 많았다.이처럼 일본의 귀족 및 무사 계급은 원래 앞에서 언급한 4대 성씨인 후지와라나 미나모토 등 성을 가진 일족의 후손들이 각자가 소유한 장원이나 저택의 지명을 따서 각각 씨명을 정하는 식으로 성과 씨를 구분해 사용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의 유명한 무가 다케다 가문은 가문의 시조가 소유한 장원이 위치한 곳이 히타치노쿠니에 있던 다케다 장(竹田莊)이었기 때문에 스스로 다케다 씨를 자처했다. 성과 씨의 차이 때문에 일본인은 예컨대 처가의 가업을 잇기 위해 사위가 씨를 바꾼다든지 하는 문제에 대해 한국보다 훨씬 덜 민감하다. 한국과 달리 씨를 바꾼다는 것에 조상을 부정한다는 의미가 훨씬 적기 때문이다.[2]
이후 메이지 시대에 와서 신분제 폐지 등 개혁의 일환으로 성 제도는 폐지되고 씨만을 사용하게 되면서 이전에는 성과 씨를 쓸 수 없었던 평민들에게도 씨가 부여되었다. 이때 씨의 개념을 조상의 근원을 나타내는 이름이 아니라 '한 가정(戶)의 구성원을 나타내는 이름'이라는 개념으로 보면서 한 가정의 구성원은 모두 씨를 통일시켜 시집온 부인은 중국이나 한국처럼 본래 성씨를 쓰지 못하고 서양처럼 남편의 씨를 따른다든지, 반대로 데릴사위로 들어간 신랑은 처가의 씨로 개성한다든지 하는 일본식 부부동성 제도가 확고해졌다.
일본에선 성은 가문의 이름, 씨는 가문이 소유한 땅의 이름을 의미하기에 성은 천황이 내리는 관직명의 개념이라 조선 사람들이 평민들도 전부 성을 갖고 있는 걸 되게 못마땅하게 봤다는 설도 있다. 성은 출생의 혈통을 나타내는 집단의 호칭이고, 씨는 동일 혈통의 사람들이 각지에 분산될 때 각 지역에 분산된 일파를 표시하기 위한 표지다. 즉, 씨는 핏줄이 아니라 땅과 연계되어 있는 개념으로, 한국의 본과 유사하다. 한국의 성은 본을 필수요로 하여 각 성마다 한 개 이상의 본관이 있고, 성과 같더라도 본이 다르면 동족으로 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은 성과 이름을 성명이라 하는데 비해, 일본은 씨명(시메이)이라고 하는데, 일본의 씨는 지명에서 따온 경우가 많다. 일본은 성씨체계가 훨씬 복잡하고 개명이나 창씨도 흔했으며, 현대 대부분의 일본인은 성이 없고 씨만 있다. 묘지의 지가 씨를 일컫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하시바까지는 단순 씨고 성은 없는 상태였다가 고노에가의 양자가 되면서 고노에라는 성을 얻고, 천황한테서 도요토미 성을 받으면서 도요토미가 된다. 일본은 1870년까지 사무라이 아래 계급에서는 성씨를 가질 수 없게 하다가, 메이지 시대인 1875년에 '성씨 의무령'에 따라 대부분의 사람들이 씨를 갖게 되면서 출신지의 지명이나 지형적 특징을 씨로 정한 것이 많아 한국이나 중국과는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다르다.
3. 배경
그 기원은 1890년대 일본에서 메이지민법(明治民法)의 제정을 통해 폐성창씨(廢姓創氏)를 이뤄낸 이토 히로부미와 우메 겐지로(梅 謙次郎) 교수가 새로운 식민지가 될 조선의 새로운 민법을 구상하던 시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둘은 조선의 서구 문명화를 구실로 조선의 성 제도를 폐지하고 일본처럼 씨 제도로 바꿀 계획을 구상했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에게 저격당하고 우메 겐지로도 급사하면서 이 계획은 흐지부지 되었다.일제가 조선을 병탄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의 정서상, 일본식 성명을 강제하면 매우 위험하다'고 여겨 이를 시행하지 않다가 1919년에 창씨정책 시안을 수립했지만 얼마 후 3.1 운동이 일어나 이 계획은 유보되었다. 이후 일본은 1923년 조선민사령을 통해 조선의 호적을 일본식 이에(家)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식 호적제도로 개편했고 1929년에 다시 2안을 수립하는 등 재차 창씨개명을 시도했지만 본국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일본 입장에서도 조선인에게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매우 많았다. 물론 도덕적, 인도적인 관점에서 반발한 것은 절대 아니고, 조선인이 일본식 성씨를 쓰고 일본에 동화되는 것, 즉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지위, 동등한 시민권을 가질 수 있다는 데 거부감을 표시한 것이다. 무엇보다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여 순수 일본인이 사라질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다.[3]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에는 "15원 50전(じゅうごえん ごじっせん)"과 같은 구절을 말하도록 시켜서 어두에서 탁음 발음 가능 여부를 악용해 조선인을 구별하여 학살했다.[4] 이렇게 언어적 차이를 이용하지 않으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뜻이다.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가 일제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도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줄어들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전쟁이 대두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일본 내부에서의 내선일체 정책의 반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니토베 이나조 도쿄제국대학 교수를 필두로 조선의 점진적 동화를 주창하는 입장 또한 지속되어 왔다. 이들은 기존 무단통치의 가혹함이 오히려 조선 지배에 악영향이 됨을 지적하고 조선에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조선인들이 자발적으로 일본을 우러러보게 한 다음 아예 일본인의 일부로 동화시켜 조선을 내지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을 2대 정무총감 미즈노 렌타로(水野 錬太郎) 등이 실정적으로 채택했으니 이것이 바로 문화통치다.
하지만 동시에 일본에서는 ' 식민지에도 자치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분화운동 역시 격렬히 제기되었고 이에 따라 동화와 자치를 동시에 추진하는 '자주협동정책'을 펼쳤다. 이는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배 방식인 연합주의를 일본 나름대로 벤치마킹한 것이었다. 프랑스도 열강 진입 초기에는 식민지에 강제적인 프랑스 동화를 강요했으나 격렬한 반발로 통치가 더 어려워지자 나중에는 동화와 거리를 두는 영국식 통치와 기존의 방식을 절충, 즉 자치와 동화의 병행 정책으로 노선을 틀었기 때문이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 말살 통치기로 접어들면 점진적 동화 정책이 사그라들고 본격적으로 일본이 야욕을 드러내더니 급진적 동화 정책으로 선회하였다. 1935년 일본의 국정교과서들은 조선인과 대만인을 일본인이라고 표기하는 등 이전보다 더욱 노골적으로 동화의 의지를 표명했다. 물론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침략의 정당성과 명분을 확보하기 위한 위선에 불과했다.
가령 관동군이 세운 괴뢰국의 사관학교였던 만주국육군군관학교에서는 당대 만주국에 국적법이 없음에도 일본인은 일계(日系), 조선·중국·대만인은 만계(滿系)로 구분하여 차별했다. 만주국 육군 군관학교에서 일본인과 다른 민족을 아예 별도로 구분해서 식사시간에조차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만치 분리교육을 했다. 이후 조선인 학생들이 항의하자 조선인을 중국인과 분리하여 일본인과 함께 일본인으로서 교육받도록 하였다.
조선인과 대만인에게 창씨개명을 시행하는 절차와 방법 등은 식민지 관습의 특수성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1910년대 후반부터 조선인에게 일본 민법의 씨 제도를 시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조선인들의 반발과 전통적인 가족제도와의 충돌 때문에 쉽게 법제화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서 대만총독부는 1930년대 초반부터 행정기관과 사법기관 등을 동원하여 대만의 ‘家’를 일본 민법에 맞게개편하고 더 나아가 대만인의 姓 관습이 일본 민법과 동일하다고 선언하는 등 일본의 씨 제도를 사실상 시행하였다. 대만이 조선보다 씨 제도를 일찍 시행할 수 있었던 배경으로는 대만 姓 관습이 일본 민법으로 전환하기에 좀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는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본정부가 각 식민지에 대하여 인적, 물적동원을 강하게 요구하면서 창씨개명을 시행할 수 있는 사회적․정책적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조선총독부는 1939년에 조선민사령 제11조를 개정하여 조선인들에게도씨 제도 시행을 법으로 강제하고 더 나아가서는 일본인식 씨명으로 변경하도록 행정적으로 단속하였다. 조선총독부가 씨 제도와 함께 일본인식 씨명도 조선인에게 강요하자 대만총독부도 일본인식 씨명의 사용을 허가하였다. 다만, 조선과는 다르게 내부적으로는 허가조건을 마련하여 일부의 대만인들에게만 일본인식 씨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조선과 대만에서는 씨 제도의 시행시기와 방법 등에서 차이가 있었고 일본식 씨명의 시행 방법도 큰 차이가 있었다. 대만에서는 씨 제도를 신관습이라는 이유로 별도의 입법절차도 없이 시행하였고 또한 일정한 조건을 충족한 자들에게 일본인식의 개성명을 허가하였다. 이에 비해서 조선에서는 법적 수단을 동원하여 강제적으로씨 제도를 시행하고 일본인식으로 씨명을 개정하도록 단속하였다.
조선과 대만 구관의 차이와 함께 각 총독부의 관습법 정책의 차이 등에서 비롯되었다. 대만총독부는 신관습 정립의 방법으로 일본 민법의 제도를 대만인에게 이식하려 했으나 조선총독부는 일본 민법을 직접 의용하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따라서 대만의 경우에는 대만 구관에 영향을 받아서 일본 민법도 일정하게 변형하여 시행하였으나 조선은 일본 민법의 조항을 그대로 시행하였다.
4. 진행
1936년 8월 전 육군대신이자 관동군 사령관인 미나미 지로가 7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천황이 조선에 방문해도 좋을 정도로 조선의 치안을 안정시키며 조선인들에게 천황 숭배 사상을 가지도록 정신을 개조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으로 만드는 것과 본토의 반대와는 별개로 조선에 징병제를 실시하고 조선 청년들에게 일본의 국방의 의무를 다하도록 교육 확보를 목표로 삼았다.[5] 그는 부임 직후 일본어의 생활화와 천황 숭배( 궁성요배)를 방해하는 다른 종교들을 탄압했으며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보다 강경책을 펼쳐 조선 내부의 독립운동 세력을 완전 독립과 자치, 좌와 우를 가리지 않고 때려잡아 조선의 표면적인 안정화를 가져왔다. 그리고 미나미 지로는 황민화와 징병 오직 한가지를 이루기 위해 반 강제적인 동화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1937년 10월 황국신민서사가 발표되었고 조선인들에게 신사참배를 의무화시켰다. 1938년 2월에 지원병제를, 4월에 조선어의 상용 및 교육 금지 정책과 더불어 일본어 보급 정책을 폈다. 5월에는 일본의 국가 총동원령을 조선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조선인의 천황에 대한 충성심 고취와 완전한 일본화를 통한 사법 행정의 일원화와 징병 및 국가 자원의 동원을 완성하기 위해 조선에 조선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다. 총독부는 이 정책이 차별을 완전히 철폐하게 만들 것이라 말했고, 그 증거로 일본식 이름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대대적으로 홍보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대만도 폐성창씨가 시행됐지만 일본 입장에서 대만은 조선에 비해 중요도가 떨어졌고 일본 본토와도 거리가 먼 곳이었기 때문에, 굳이 본토 일본인들의 반발을 감수하면서까지 적극적인 폐성창씨를 추진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대만인은 조선인과는 다르게 허가를 받은 사람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즉, 조선에선 치욕으로 여겨졌던 폐성창씨가 대만에선 일종의 특권으로 여겨졌고, 초기에 시행률이 매우 저조했었던 조선과는 달리 대만에선 일본식 성씨를 만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6]
목표 달성을 위해 일본은 먼저 조선의 지식인층을 겨냥해 수양동우회 사건과 흥업구락부 사건을 일으켜 좌우익을 망라한 조선의 수많은 지식인을 체포하고 고문을 거듭하면서 천황과 국가에 충성하는 황국신민이 되겠다는 전향서를 쓸 것을 강요했다. 매 앞에 장사 없다고 이광수를 비롯한 수백 명의 지식인이 사상 전향서를 쓰고 나서 겨우 풀려났다. 하지만 고문에도 불구하고 전향을 거부하고 구속된 조선 지식인들은 "조상을 욕되게 하는 폐성창씨를 강할 바에 차라리 우리들을 죽이라"고 미친 듯이 반발했다. 이들 대다수가 자존심이 강한 지식인들이었으니 일본식 성명의 강요가 더욱 치욕이었을 것이다. 이들의 반발에 놀란 조선총독부 경무국[7]은 미나미 지로에게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면 대규모 폭동(大規模な暴動)이 일어날 것이니, 일본식 성명을 강요하는 것을 불가능하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끝내 일본은 조선식 성을 완전히 없애는 것이 아니라 일본식의 새로운 성씨를 부여하는 것에 그치는 창씨개명으로 후퇴하는 수밖에 없었다.[8] 그렇게 1939년 11월 10일 제령 19호와 20호를 통해 창씨개명의 방침을 발표했으며 이는 1940년 2월 11일 기하여 효력을 발휘했다. 조선총독부는 기존의 '관습적 성명'과 더불어 일본식 씨명을 등재하고 일상생활에서 씨명을 쓸 것을 명령했다. 이렇게 호주의 아내와 어머니에게 집안의 성과 다른 성이 허용된 것과 달리 여자들에게도 같은 씨가 강요되었다.
조선총독부는 "6개월 안에 호주(戶主)가 의무적으로 창씨를 해야 한다"고 압력을 넣었다. 만약 호주가 응하지 않아도 직권창씨라고 하여 이름을 강제로 바꿀 계획이었다고 한다. 모든 조선인들은 제령 19호에 따른 법정창씨에 해당됐다.
총독부에서는 미나미 지로 총독의 부임 이래로 오랫동안 창씨개명을 준비해서 건국기원절[9]인 1940년 2월 11일에 맞춰서 6개월 시한을 주고 각자 스스로 창씨하라고 집중 광고를 때렸다. 총독부는 창씨개명 절차를 매우 편리하게 해 주었고 비용도 깎아 주었다.
총독부는 매우 느긋한 태도로, 조선인들이 열화와 같이 호응하며 엄청나게 신청하리라 예상하고 현장 격려 공문까지 발송했다. 하지만 2월 11일 하루 경성부에서 창씨개명한 사람은 고작 48명이었고 12일에도 겨우 43명에 불과했다. 12일 창씨 신고를 한 주요 인물로는 이광수, 이승우, 이원보, 조병상, 윤갑병, 최지환 등이 있었다. 예상보다 말도 안 되게 적은 수치에 총독부는 발칵 뒤집혔고 기존의 느긋한 태도를 버리고 전국의 유지, 지식인들에게 "모범을 보이라"고 갈구면서 창씨를 유도했지만 2월 말까지 창씨 비율은 겨우 0.26%였고 2달이 지나도 1.07%에 그쳤다.
전국의 유림과 문중의 강력한 반발로 접수율은 터무니없이 낮았고[10] 시한의 절반이 지난 5월 20일까지 창씨개명을 한 가구 수는 조선 전체 428만 2754가구 중 고작 32만 6105호(7.6%)에 불과했다. 당시 도별 창씨개명 비율은 경상북도[11] 22.8%, 충청북도[12] 12%, 충청남도[13] 9.6%, 평안북도 7.7%, 경기도[14] 7.1%, 평안남도 6.7%, 황해도[15] 6.1%, 강원도[16] 5.5%, 경상남도[17] 4.8%, 전라남도[18] 4.6%, 함경북도 3.7%, 함경남도 3.6%, 전라북도[19] 1.8% 순이었다.
인천공립중학교의 반도출신 학생은 현재 66명으로 그 중 3분의 1은 창씨개명을 마쳤으나 나머지 3분의 2가 아직 완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카지와라 교장은 내선일체 강화에 대비하여 이 제도의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적극적인 지도를 하여 늦어도 이달 중으로 완료할 것이며, 이와 동시에 인상창영, 송림, 야마토, 야마토, 츠루츠키, 쇼와, 다이쇼, 타이쇼, 기타 각 공립, 사립학교에서도 각각 지도를 철저히 하기로 하였다.
조선신보 1940년7월13일
창씨개명 제도가 발표되고 나서 교장선생님은 5분간 창씨개명의 중대한 의의를 설파하셨고, 그 결과 거의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창씨개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은 지금까지 같은 성씨가 많아 예를 들어 이씨, 김씨와 같은 성이 많아 곤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왕이면 이 기회에 품위 있고 가급적이면 모두 같은 성씨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학교 관계자들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어쨌든 창씨개명이 눈에 띄게 된 이 기회에 우리들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황국여성으로서 재출발하고자 합니다.
경성일보 1940년8월 19일
조선신보 1940년7월13일
창씨개명 제도가 발표되고 나서 교장선생님은 5분간 창씨개명의 중대한 의의를 설파하셨고, 그 결과 거의 모든 교직원과 학생들이 창씨개명의 기쁨을 경험하게 된 것은 정말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조선은 지금까지 같은 성씨가 많아 예를 들어 이씨, 김씨와 같은 성이 많아 곤란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왕이면 이 기회에 품위 있고 가급적이면 모두 같은 성씨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 학교 관계자들은 여러 가지로 고민이 많았습니다만, 어쨌든 창씨개명이 눈에 띄게 된 이 기회에 우리들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황국여성으로서 재출발하고자 합니다.
경성일보 1940년8월 19일
이런 엄청난 무반응에 열이 뻗친 총독부는 강제로 창씨개명을 밀어붙여 나머지 3개월 동안 300만 가구를 창씨개명시켰다. 이당시 분위기는 그야말로 속도전을 방불게 하였는데 마감기한을 정해놓고 이장이 사람들을 불러서 이름을 부르면 서류에 적거나 교회, 학교, 가정방문을 통해 적절한 지도를 한다고 언급되어있다. 아예 5월 9일에는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반동적인 발언을 했다는 이유로 태형을 집행하는 일도 있는 자원아닌 자원이었다. 이에 따라 창씨개명 업무가 종료된 1940년 8월 10일에 집계된 통계로는 전체의 80.3%인 320만 116가구가 창씨개명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1940년 12월 법무국 조사과에 따르면 도별 창씨 호적수의 비율은 평안북도 87.3%, 강원도 85.0%, 충청남도 84.4%, 경상남도 84.3%, 경상북도 83.8%, 함경남도 83.5%, 전라남도 80.8%, 경기도 79.0%, 황해도 77.9%, 평안남도 77.3%, 전라북도 76.5%, 충청북도 70.5%, 함경북도 64.6% 이었고 전체 400만 8925가구[20] 중 80.5%인 322만 8931가구가 창씨를 완료했다. 그 이후로도 창씨개명 신청을 받아 1941년 81.5%로 늘어났다. 당시 신문들은 경쟁적으로 "xx군 oo% 달성!" 식으로 창씨개명을 독려하는 내용을 연일 선전하며 조선중앙텔레비죤을 방불게하는 내용들로 채워졌고 총독부의 강제력을 매우 절실히 입증했다.
4.1. 강제성
북지화북교통공사와 화북전자유한공사 양사에서 반도인 신입졸업생을 알선해 달라는 신청이 총독부 학무과장에 접수되어 재직 중인 전문학교 이상 학교의 올 봄 졸업생을 엄선한다. 성대 1명, 경성고상 2명, 보성전문 1명, 총 4명을 추천하여 양사 모두 흔쾌히 승낙하며 채용조건은 창씨개명을 제1조건으로 채용 후
내지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게 되어 교통과 전기 분야에 각각 발령받게 되었는데 이는 반도청년북부지부 채용의 선두를 달리는 것으로 반도인 학도들에게 열린 빛이 될 것이다.
조선신문 1941년 4월 12일
조선신문 1941년 4월 12일
서울 집. 조선의 거의 모든 가장들이 창씨개명 문제로 근심하며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총독으로부터 말단관리에 이르기까지 당국자들은 이 문제가 어디까지나 개인의 선택에 맡겨질 일이지 결코 강제적인 일은 아니라고 단호하게 공언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당국자들이 조선인들의 창씨개명을 원하고 있으며,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언짢아하리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총독부 기관지 『경성일보』는 어제 사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창씨개명을 하는 조선인들의 수가 나날이 늘고 있다. 신(新)질서의 실현이 가능해지기 위해서는 마땅히 이렇게 되어야만 한다. 편견을 가지고 이 운동을 방해하려는 자들은 당국에 의해 ‘철퇴’를 맞게 될 것이다. 이런 자들은 민족주의와 정치적 동기-조선독립, 곧 반일(反日)주의로-로 인해 창씨개명을 반대한다.” 그러니 당국자들은 조선 이름을 고수하려는 사람들을 반일분자, 즉 불순분자로 여길게 뻔하다.
윤치호 일기 1940년 2월 1일
서울 집. 지방에서는 경찰, 군수, 면장이 주민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집을 짓거나 구입하려는 사람이 창씨개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가를 내주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학교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취학아동 증명서를 발부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40년 5월 30일
사촌동생 치영이 전해준 바로는, 미나미총독이 10월 말에 해임될 거라는 소문과 함께, 우사미, 세키야, 마루야마, 다나카, 사카다니, 유아사, 고다마, 미즈노 같은 지도자들이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데 대해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300여명의 학생 및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하거나 아버지에게 창씨개명 반대를 종용했다는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 소문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총독과 정무총감의 자리가 흔들릴 정도로 도쿄 지도자들의 반대가 거센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결코 경찰로 하여금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괴롭히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윤치호 일기 1940년 7월 5일
윤치호 일기 1940년 2월 1일
서울 집. 지방에서는 경찰, 군수, 면장이 주민들에게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하게 압박하고 있다. 집을 짓거나 구입하려는 사람이 창씨개명하지 않은 경우에는 인가를 내주지 않는다. 일부 지역에서는 소학교에 입학하려는 아이들이 창씨개명하지 않으면 취학아동 증명서를 발부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윤치호 일기 1940년 5월 30일
사촌동생 치영이 전해준 바로는, 미나미총독이 10월 말에 해임될 거라는 소문과 함께, 우사미, 세키야, 마루야마, 다나카, 사카다니, 유아사, 고다마, 미즈노 같은 지도자들이 총독부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데 대해 적극 반대하고 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고 한다. 아울러 300여명의 학생 및 청년들이 창씨개명을 반대하거나 아버지에게 창씨개명 반대를 종용했다는 혐의로 서대문경찰서에 구금되어 있다는 말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 소문들은 서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총독과 정무총감의 자리가 흔들릴 정도로 도쿄 지도자들의 반대가 거센 게 사실이라면, 그들이 결코 경찰로 하여금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청년들을 괴롭히도록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윤치호 일기 1940년 7월 5일
그리고 민심을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그 말씀은 옳은 말씀입니다만, 총독부의 윗사람은 이런저런 생각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하급자가 지방에서 활동하며 조선인에게 압력을 가할 수 있다는 말이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특히 재작년인가, 그 성씨령, 즉 이름을 바꾼다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성과가 좋아서 거의 80%까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경찰의 압박에 의해 한 것이다. 또는 학교의 학생을 이용해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었다는 불평도 들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런 쪽은 너무 무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총독 시절에는 그런 쪽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자연히 맡기고 있기는 하는 겁니까. 오늘은 그것은 어떠신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 미즈노 렌타로 <귀족원 속기록 1943년 2월 26일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 예산위원 제3분과회(내무성, 문부성, 후생성) 제2호> #
다음은 창씨개명 문제, 지원병 문제 등에 관변의 강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저희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같은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며, 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답변
특히 재작년인가, 그 성씨령, 즉 이름을 바꾼다고 하는 일이 있었는데, 성과가 좋아서 거의 80%까지 일본식으로 이름을 바꾸는 일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의 충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겠지만, 때로는 경찰의 압박에 의해 한 것이다. 또는 학교의 학생을 이용해 학부모들에게 압력을 받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되었다는 불평도 들리는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그런 쪽은 너무 무리하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전 총독 시절에는 그런 쪽에 힘을 많이 쏟았다고 합니다만, 지금은 자연히 맡기고 있기는 하는 겁니까. 오늘은 그것은 어떠신지, 그 점을 여쭙고 싶습니다.
- 미즈노 렌타로 <귀족원 속기록 1943년 2월 26일 제81회 제국의회 귀족원 예산위원 제3분과회(내무성, 문부성, 후생성) 제2호> #
다음은 창씨개명 문제, 지원병 문제 등에 관변의 강압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만, 이것은 저희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같은 말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그런 일에 대해 책임 있는 입장에 서게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에 대해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시정을 하고 싶어서 여러 가지 사실의 진상을 조사해 보았습니다만, 반드시 그런 일이 절대 없었다고 말씀드릴 수는 없으며, 일부 유감스러운 사례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제대로 운영해 나가고 싶다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 다나카 다케오(田中武雄) 당시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의 답변
창씨개명은 본인의 신청에 따라 허가하는 제도로서
내지에서는 남용을 허용하지 않는데, 조선 대만에서는 아동 입학 시 내지식 이름으로 개명하지 않으면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것으로 사실상 강제하는 것과 같은 취지를 보인다고 합니다. 또한 조선 대만에서 신문, 라디오 등 언론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도 비난을 듣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과연 조선을 다스리는데 적합한지 심히 의심스럽다. 또한 아동 입학에 대해 성을 바꾸도록 강요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는지 여부를 함께 묻고 싶습니다.
이시즈카 에이조
조선에서는 성만 존재할 뿐인데 작년 2월에 성씨 제도를 창설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인식 성으로 바꿀수 수 있게 하였고, 대만에서는 본래 성씨 제도는 있으나 호구규칙을 통해 일본인식 성으로 개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통치의 실정과 민중의 희망에 부응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강제하는 것은 통치의 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비난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조금도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대만에서는 씨 변경을 위한 사례가 아직 천백 건이 채 되지 않아 조선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국민학교령 시행에 따라 강제적으로 성을 설정하거나 변경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조선, 대만의 신문과 라디오의 단속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민중으로 하여금 원한의 소리를 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아키타 키요시 <1941년(쇼와 16년) 3월 19일 추밀원 회의>
이시즈카 에이조
조선에서는 성만 존재할 뿐인데 작년 2월에 성씨 제도를 창설하여 본인의 희망에 따라 일본인식 성으로 바꿀수 수 있게 하였고, 대만에서는 본래 성씨 제도는 있으나 호구규칙을 통해 일본인식 성으로 개명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습니다.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통치의 실정과 민중의 희망에 부응하는 취지에서 나온 것이니, 이를 강제하는 것은 통치의 본 취지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정에 있어서는 반드시 비난의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앞으로는 조금도 무리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다만, 대만에서는 씨 변경을 위한 사례가 아직 천백 건이 채 되지 않아 조선과는 조금 다른 점이 있습니다. 어쨌든 국민학교령 시행에 따라 강제적으로 성을 설정하거나 변경하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조선, 대만의 신문과 라디오의 단속에도 충분히 주의를 기울여 민중으로 하여금 원한의 소리를 내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아키타 키요시 <1941년(쇼와 16년) 3월 19일 추밀원 회의>
본 청원의 취지는 지난 쇼와 15년 2월 11일 기원절(紀元節)에 당시 총독이 조선 민령 개정에 의거하여 조선민족의 성을 일본식 성씨로 개명하는 정책을 강행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는 성을 변경하는 것은 조선반도 쪽의 자유의지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고 상당히 강제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강제하고 있는 것 같고, 이것은 물론 조선 사람들에게는 매우 악정(惡政)이라 하여 불만을 품고 있는 사실이 상당히 있는 것 같습니다.
아카오 빈의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그동안 다소 말단 관리들 사이에서 다소 이 취지를 오해한 것 같으며, 강제를 했다는 사실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나카 다케오(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제81회 제국의회 중의원 청원위원회 제8호 쇼와 18년 3월 23일> # 창씨개명 반대청원에 답변하며
아카오 빈의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그동안 다소 말단 관리들 사이에서 다소 이 취지를 오해한 것 같으며, 강제를 했다는 사실이 없지 않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 점은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나카 다케오(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제81회 제국의회 중의원 청원위원회 제8호 쇼와 18년 3월 23일> # 창씨개명 반대청원에 답변하며
내선일체 황국신민화의 진전에 따라 명실상부한 황국신민이 되기 위해 그 희망에 따라 창씨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다. 시행에 있어서 말단에 있어서는 다소 지나친 일이 없지 않으나 대다수는 그 희망에 따라 기꺼이 창씨하여 황국신민으로서의 결의를 굳게 다져 현재 내선일체 위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있다고 믿는다.
<1945년 3월 6일 내무성 관리국 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 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문서> #
<1945년 3월 6일 내무성 관리국 조선 및 대만 거주민 정치 처우에 관한 질의응답 문서> #
세상은 창씨의 기쁨을 만끽하며 내선일체 구현에 꽃을 피우고 있을 때, 때마침 이 사건은 불명예스러운 반민족적 악질 범죄로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창씨 훼방 사건의 공판이 6일 오전 10시 대전지방법원 충주지청에서 열렸으며, 검사의 장시간에 걸친 격렬한 변론에 방청석에 꽉 찬 방청객은 긴장감을 감추지 못하였다. 피고인은 ○○군 ○○면 ○○리 ○○리 ○○○○○, 검찰 구형 징역 1년, 판결선고는 9일 오전 10시, 범죄사실은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7년 6월 경성대학교를 중퇴하고 귀농 중인데 지난 3월 20일 오후 6시경 자신의 본적지 에서 동인외 3명의 면전에서 창씨에 대한 담화 중 창씨제도를 비방하고 내선일체의 대방침을 훼손하는 등 불온한 언동을 한 것. (중략) 창씨개명제도는 흥아대성업의 완수상 획기적인 것으로 실로 내선일체의 세기적 영단으로 지금 한반도 전역에 걸쳐 감격의 환호성이 넘쳐나는 현 상황에서 이런 불온한 반민족적 언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신성한 우리 국체에 대한 불경행위일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반도의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고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 또한 매우 큰 일이다 (중략) 앞으로도 악의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다.
1940년 5월 9일자 경성일보
피고인은 7년 6월 경성대학교를 중퇴하고 귀농 중인데 지난 3월 20일 오후 6시경 자신의 본적지 에서 동인외 3명의 면전에서 창씨에 대한 담화 중 창씨제도를 비방하고 내선일체의 대방침을 훼손하는 등 불온한 언동을 한 것. (중략) 창씨개명제도는 흥아대성업의 완수상 획기적인 것으로 실로 내선일체의 세기적 영단으로 지금 한반도 전역에 걸쳐 감격의 환호성이 넘쳐나는 현 상황에서 이런 불온한 반민족적 언행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신성한 우리 국체에 대한 불경행위일 뿐만 아니라 충성스러운 반도의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고 동포의 명예를 훼손하는 것 또한 매우 큰 일이다 (중략) 앞으로도 악의적인 언행에 대해서는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처해 나갈 것이다.
1940년 5월 9일자 경성일보
한반도 통치역사에 한 획을 긋고 옛 역사 사실로 거슬러 올라가 내선일체 환원을 웅변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찬란한 창씨개명 연설에 대해 '조선민족'을 운운하며 비방하고 이 경사스러운 대사에 대해 반감을 품고 비반도인적인 언행을 일삼아 마침내 충주경찰서 직원에게 발각되어 치안법 위반으로 충주 고등계의 손에 의해 엄중한 조사를 받고 있던 ○○군 ○○면 ○○리 ○○○에 대한 제1차 공판은 지난 5월 6일 대전지방법원 충주지방법원 충주지청 공판정에서 사노 입회검사의 엄중한 논고와 함께 1년의 구형을 언급했으며 피고에 대한 판결은 5월 9일 노다 판사로부터 검사의 구형대로 징역 1년을 선고받았다.
1940년 5월11일자 조선신문
1940년 5월11일자 조선신문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한국은 일본의 군사기지로 전환되었고, 모든 조직들은 군사적 성격을 갖게 되었다. 한국인들을 일본인화하기 위하여 일본인들은 일본인과 한국인 간의 결혼을 장려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결혼 비용을 제공해 줄 정도이다. 이렇게 결혼하는 사람들에게는 공적인 직위나 기타 특혜를 획득하는데서 우선권이 주어진다. 한국인들로 하여금 창씨개명을 수용하게 하고 한국어로 말하고 쓰는 것을 중지시키도록 강제하는 정치적 압력이 가해지고 있다. 이것은 3천만 한국인들을 일본의 노예로 변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노예화 정책이 추진되는 것과 동시에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1944년 1월 25일 지청천 장군과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
1944년 1월 25일 지청천 장군과 중국 언론과의 인터뷰
미나미 총독을 총독부 내외부의 거부반응을 우려한듯 강제가 아니라고 발표하였지만 그 말이 무색하게 조선인들이 자발적 참여를 해야된다고 끊임 없이 강조함으로서 강요아닌 강요를 하였다. 동시에 총독부 내부로는 각 도지사, 학무국장 등등에게 조선인들이 창씨개명을 어떻식으로 신청하게 만들라는 의미의 압박을 가하는 것을 반복하였으며 이때문에 각 도에서 창씨개명 완료율 경쟁을 하게 만들었다. 이로인해 각 도에서는 실적을 올리기 위해 온갖 수를 동원하기 시작했는데 동의없이 이름을 바꾸는 것은 기본이고[21] 각 공공기관과 도민들을 압박하기에 이르렀다.
"총독은 말로는
'억지로 시키는 것이 아니다' 라고 했지만 속마음으로는
강제로라도 시키고 싶어하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었지요” - 오노 로쿠이치로 당시 정무총감의 전후 녹취록
#
한 예로 평안북도에서는 4월 하순 각 부군에 “창씨는 관리로부터 솔선” 구호를 시달하고, 이어 평북 부윤·군수회의를 통해 '창씨상담소의 활동 촉진에 관한 건'의 지시사항을 하달했다. 또 5월 10일 평북 도내 초등·중등학교 교직원에게 '창씨는 교직원으로부터', '한 사람도 빠짐없이 직원 모두가 창씨'를 목표로 솔선 창씨할 것을 통첩했고, 6월 11일 공립학교장 273명을 소집하여 “학교 직원의 씨 창정”을 지시했다. 이어 평북 학무과에서는 7월 말 학교 아동의 창씨 상황 조사하여 창씨개명 실적이 좋지 않은 학교의 블랙 리스트를 작성하였다.[22] 이런 상황속에 4월이후 부터는 창씨개명을 반강제로 신청하게 끔 하는 궐기대회가 자주 열렸음이 신문으로 확인되며, 아직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가정과 학부모의 경우 적절한 권유와 지도를 위한 방문이 시작되었다. 이 지도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 구체적인 증거는 없지만 타인에게 창씨에 대한불만 의견을 내비쳐도 처벌하던 당시 상황[23] 그리고 본토에서 창씨개명과, 조선지원병 신청을 받을 때 온갖 압박을 가했다는 점이 문제가 될만큼 이 적절한 지도가 어떻게 이루어 졌을지는 각자 상상에 맡긴다.
한예로 설진영은 자식을 퇴학시키겠다는 압박을 받자 이에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 이를 바탕으로 일본 소설가인 가지야마 도시유키가 소재로 쓴 소설로 "족보"가 있는데 순창에 살던 설진영이라는 사람이 본인이 설씨 가문의 종손이라 면사무소 서기들이 찾아와 압박해도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했는데 그것 때문에 자기 아들이 창씨개명 안해서 학교를 못간다니까 결국 자기 자식 학교 보내려고 면사무소 가서 창씨개명하겠다는 신고서류를 작성하고나서 그 치욕을 이기지 못해 자결하는 내용으로 각색되었다.
이렇듯 당시 조선 내 학교는 대부분 총독부의 통제를 받는 공립 학교 였는데 여기다 공공기관인 면사무소, 경찰이 조선인 이름은 받아주지도 않았다는 윤치호 기록만 봐도 조선인 이름을 가진자는 공적업무에서 배제하는 현상이 일어났음을 알수 있으며 총독부는 본토에서 이 사실을 알게 될때까지 실적 부풀리기를 하기 바빳다.
진주 진양군내에는 반도인 창씨제도의 획기적인 제도로 창씨할 수 있는 사람이 임씨, 류씨와 같이 그대로의 성씨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80%가 넘고 16개 면장은 말할 것도 없고 면의원과 같은 공직에 있는 사람은 모두 창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진주시의원과 상공회의소 의원 중에 창씨하지 않은 사람이 각각 2명씩이나 있으나 모두
동일인이므로 두 명의 공직자가 여전히 구성(舊姓)을 쓰고 있다. - 조선신문 1940년 9월 30일 “진주 내의 창씨 8할강 공직자 중 2명이 구성 ”
4.2. 창씨개명 거부의 주요 불이익
아래는 창씨를 거부했을 때의 있을 수 있는 불이익의 예시다. 다만 친일 유사역사학자로 분류되는 문정창이 작성한 <군국일본 조선강점 36년>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게 문제. 다만 문정창 본인이 일제시대의 인물이고 과장이 섞여 있어도 실제 확인되는 불이익 사례와 사건들도 존재한다. 이 시기는 각 지방이 창씨개명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라면 온갖 수단을 동원하던 웃지못할 시대이기 때문에 문서화 증거라기 보다는 개인의 증언 정도로 참고만하면 된다.- 직장/노무
- 조선인 중 창씨개명을 거부할 경우 해당자를 이유불문하고 즉시 해고한다. 다만 창씨개명에 참여하면 복직할 수 있다.
- 각 직장 및 노무사(社)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의 고용 및 입사 등을 절대 금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 또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는 봉급 급여를 불허하거나 삭감해야 하며 이를 어길 경우 총독부령에 따라 엄벌에 처함과 동시에 해당 직장을 강제 폐쇄 조치한다.
- 학교/교육
- 조선인 학생 중 창씨개명을 거부한 학생의 경우 해당 학교 교장 및 교사는 해당 학생들에게 창씨개명을 할 것을 권고해야 하며 마찬가지로 교직원들도 창씨개명을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이를 어긴 교장 및 교직원은 즉시 학교에서 제명 및 해고 처리를 당하며 학생의 경우 즉시 정학 및 제적 또는 퇴학 조치를 한다. 학교 집단에서 거부할 경우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한다.
- 창씨개명 거부자는 입학을 불허하며 교육 대상에서도 전면 제외한다. 학교 중 조선 성명을 쓰는 학생의 입학을 무단으로 허가했을 경우 해당자는 엄벌에 처하며 해당 학교도 폐교 조치한다.
- 학생들은 물론 해당 학생들의 부모나 직계 가족 등도 모두 창씨개명을 해야 하며 이를 어기거나 따르지 않을 경우 가족 전원을 처벌 대상으로 올린다.
- 교통/수송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 승객은 모든 교통편 이용을 불허한다. 또한 1등석 등 객차 이용도 절대 불허한다.
- 철도 수송화물에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 역시 수송 이용을 불허하며 해당 화물은 즉시 반송 처리한다.
- 의료/복지
- 창씨개명에 협조하지 않거나 거부한 조선인은 병원 치료 대상에서 제외하며 환자 성명 기재시 일본식 성명으로 기재한다.
- 신생아의 경우 반드시 일본식 성명을 우선 기재해야 한다.
- 의사나 간호사도 반드시 조선인들은 일본식 성명을 따라야 하며 이를 거부한 병원 및 의원은 폐원 조치한다.
- 일본식 성명을 이행하지 않거나 거부한 자는 복지 정책에서도 제외한다.
- 식량 배급
- 배급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내지인과 같은 일본 성명을 따른 자를 우선으로 한다. 그렇지 않고 이에 불응하거나 협조하지 않은 자는 배급 대상에서 제외한다.
- 기타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은 총독부에서 지원하는 물자 및 배급대상에서 제외한다.
- 조선인 성명을 사용하는 자는 행정기관 민원 사무에서도 불허 대상이며 민원상담의 일체를 금한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거나 일본식 성명으로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은 불령선인,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 간주하며 군헌병과 경찰 등을 통해서 요주의 사찰(감시) 대상으로 선행한다.
- 창씨개명 제정 이후 출생한 조선인 신생아는 무조건 일본 성명으로 먼저 짓거나 단독으로 지어야 하며, 조선 성명 단독으로 짓거나 일본 성명과 병행해서 짓게 될 경우 비국민 및 무국적자로 처리하고 해당 부모는 엄벌에 처한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은 내지로 도항할 수 없다.
빠스껫 볼에서는 스포츠 구단은 유니폼에 창씨개명한 이름만 적을 수 있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선수를 구단에서 제명할 수 있다는 내용도 나왔다. 이 때문에 빠스껫 볼에서 민치호가 아사노 지코(淺野時子)라는 창씨명이 적힌 유니폼을 받은 것으로 설정된 것이다. 이외에 빠스껫 볼에서 몇몇 한국인 선수가 다나카 준페이, 요시다 다케시, 하세 료 등으로 창씨를 하기는 했다.
'창씨개명' 중 '창씨'는 강행규정을 통해 법적 강제가 있었고[24] 결과적으로 조선 전체 가호의 80%가량이 창씨를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25] 창씨개명이 진짜 '강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강요'는 했는데 '강제'가 아니라는 건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한 반론으로 공무원 채용 명단에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거나, 알려진 인물 중에 끝까지 창씨를 하지 않은 사람을 제시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런 사례는 의미가 없는데, 스스로 신고하지 않은 경우 기존의 성을 기준으로 창씨가 부여되기 때문이다. 예를들어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직원 김창영 이라는 사람이 기한 내로 창씨개명을 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나카무라 창영이 될 것 같지만 그냥 김창영이 된다. 이렇게 창씨개명을 못한 20%의 사람은 일본식 이름이 들어갈 호적에 그냥 김씨로 표기가 되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현대의 우리들이 보기에는 바뀐게 없는 것 같지만 사실상 서류상으로는 김이라는 성이 씨가 되어버리면서 창씨개명이 되어버려 이름을 지키게 된 사람이 많다. 실제로 이렇게 창씨개명(1939년) 이후의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의 조선총독부 직원록을 살펴보면 이런식으로 조선식 이름을 가진 직원들이 많이 보인다. https://db.history.go.kr/modern/jw/level.do?organCode=1940&lang=ch[26]
참고로 밑에서 나오겠지만 강제적인 성격의 법적 효력이 있는 창씨개명에 많은 사람들은 일본식 성씨를 가질 것을 압박 및 요구 받았지만 정작 친일 고위층들은 이런 방식을 통해 창씨개명에서 자신의 성과 이름을 지켜냈다.
명목상 조선총독부의 창씨개명은 절대 강제적 창씨개명이 아니였기 때문에 김씨가 김씨인 채로 창씨개명이 될 수 있었고, 창씨개명 캠페인의 영향으로 주변의 동조압박과 그 때문에 불이익을 당할 거라 생각한 80%의 조선인들은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을 하고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20%의 조선인들은 이런식으로 창씨개명이 완료 되었다. 그래서 조선총독부는 창씨개명의 결과를 100%라고 발표한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냐하면 창씨개명에 특례가 존재했는데, 일본 정부에서 창씨개명에 관해 어떠한 성이든 상관없이 사용 가능이란 조건을 내걸었기 때문이다. 밑의 저항사례들을 보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일본에는 없는 성씨들을 만들어지는데 친일고위층은 바로 이 '어떠한 성'이라는 조항을 이용하여 조선식 성도 이용 가능하단 논리로 가게 된다. 왜 이런식으로 조선식 성을 그대로 남겨 두는 예외조항이 가능했냐면 바로 일제통치 줄곧 조선인의 이름을 바꾸는 것에 대해 밑에서 보듯이 경종을 울리는 자들이 많이 존재 했었고, 덕분에 일본 내부에서는 이 제도에 대해 근심 걱정 하는 이들이 내내 있어왔었다. 애초에 창씨개명은 어디까지나 조선총독부가 주도한 캠페인이였고 일본 본토에서는 상당히 반대하는 입장이였다. 그래서 일본 정부는 이 건에 대해 어디까지나 유화적인 태도에 그쳤다. 그러나 애초에 조선식 성으로 창씨개명이 이루어 진다는 사실은 특권층 중 일부만이 이용하였고 창씨개명을 안한 대부분은 그냥 조선이름을 가질 것을 뚝심으로 밀어부쳤다.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에서 자주 하는 큰 오해와 착각 중 하나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아는 것이다. 창씨(일본식 씨를 더하는 것)는 의무제였고, 개명(이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였다. 새로운 씨를 선택해서 신고하면 그 씨를 사용하고, 아니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이 일본식 씨로 추가되었다. 당시엔 '창씨'만이 의무였고 실적의 대상이었다. '씨설정'이 원래 창씨제도의 취지이므로 '개명'만 별도로 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일본식 성과 같아 일본말로 읽을 수 있는 유(柳)=야나기, 남(南)=미나미, 임(林)=하야시, 계(桂)=가쓰라, 국(菊)=키쿠 등처럼 굳이 창씨하지 않고 개명만 한 경우는 있었다.
4.3. 친일고위층은 거부한 창씨개명
<해주>창씨제도 실시는 총후반도 민중에게 엄청난 감동의 폭풍을 일으켜 각계의 호평을 받고 있는데, 창씨자를 직업별로 살펴보면 쌀농사 소작인 56명 ▲쌀농사 자영업자 26명 ▲공무원 13명 ▲물품 판매업자 7명 ▲회사 직원 6명 ▲경찰관 3명 ▲관료 6명 ▲교직원 3명 ▲곡물 판매업 4명 ▲정미업 3명
1940년 4월 7일자 경성일보 <창씨는 소작인이 많다. 中>
1940년 4월 7일자 경성일보 <창씨는 소작인이 많다. 中>
조선의 귀족이나 부호 등 상류층은 조선 이름을 많이 쓰고 있고, 일본 성으로 개명한 것은 비율상 하층이랄까요.. 낮은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일본 이름을 붙인 사람은 모두 천한 사람이라는 식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조선총독부에서는 성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궤변이라고 반발하는 사람도 있는 것 같고, 지금 여기서 이런 것을 결정해 버리면 장래에 큰 후회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때문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취소해주셨으면 하는 것이 청원의 취지라고 생각합니다.
이리에 테츠네(入江為常)<1940년 3월 12일 제 75회 제국의회 귀족원 청원위원회> #
이리에 테츠네(入江為常)<1940년 3월 12일 제 75회 제국의회 귀족원 청원위원회> #
창씨하지 않은 거물 중에 손영목 전북도지사가 있는데, 창씨제도 발포 당시 기자단과의 기자회견에서도 창씨의 의의를 강조하고 스스로 그 모범을 보이는 듯한 입담으로 8월 10일까지 창씨절차를 밟지 않은 것을 두고 각계각층에서 여러 가지 추측이 나돌고 있지만, 일절 입을 다물고 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측근은 “자신은 집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당장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명하였는데, 효심이 깊은 지사에게 어떤 고충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은 24일 어느 자리에서 기자에게 한 왼쪽의 담화만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1940년 8월 26일자 경성일보
1940년 8월 26일자 경성일보
정작 앞장서서 창씨를 종용했던 친일 고위층 대다수는 성을 바꾸지 않았는데, 가장 어처구니 없는 점은 창씨개명을 주도한 당시 조선인 출신 도지사 2명(충북의 유만겸, 전북의 손영목)은 본인들의 성을 끝끝내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참고로 유만겸은 각도의 창씨개명 실적 1위를 기록게한 인물이다. 거기다 1940년 8월 4일자 경성일보에 따르면 조선귀족 중 최초로 창씨를 한 사례는 남작인 김영수인데, 이건 창씨개명 신청 마감 기한인 1940년 8월 10일 직전에 한 것이었다. 이후 1941년에도 창씨개명을 한 것은 남작가문 1곳이 유일했으며 종전 직전까지도 성을 바꾼건 10명 남짓 할 뿐, 조선 귀족 중 상당수가 성을 바꾸지 않았다. 애초에 총독부 운영에 직접적인 연관이 있던 고위층 친일파와 그 자체들은 총독이 직접 모범을 보이라고 압력을 가하지 않는 이상 바꿀 필요도 없을 뿐더러 족보있는 명문가 양반이라는 자존심 하나는 상당해서 이름만은 꼭 지키려고 들었기 때문이다.
총독부도 이들에게까지 굳이 강요할 필요가 없을 뿐만 아니라, 창씨를 강제하는 것이 아니라는 명분을 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결국 창씨개명을 강제해야 되었던 것은 대다수를 차지하는 밑사람들, 그중 인구가 가장 많은 소작농들이었고 일부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창씨개명의 강제성을 부정하는 근거로 쓰이긴 어렵다.
그 외 국민총력연맹 이사장이며 중추원 고문인 한상룡(韓相龍), 조선비행기회사 사장 박흥식(朴興植), 일본국회 대의사 박춘금(朴春琴), 귀족이며 자작인 윤덕영(尹德榮), 도지사가 된 김대우(金大羽) 등을 비롯해 이름난 친일파와 김석원(金錫源) · 이응준(李應俊) · 유승렬(劉昇烈) 등 고급 군인들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다. 해방 이후 반민특위에 제일 먼저 연행된 '친일파 1호' 박흥식 화신백화점 사장(조선비행기주식회사 대표)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 방응모 조선일보 사장도 10여 개의 친일단체 간부로 활동했지만 창씨개명은 하지 않았다. 간도특설대 간부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705인 명단에 포함된 김석범 역시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는데, 국립대전현충원 장군1묘역 최상단 바로 아랫줄의 적힌 그의 묘비명엔 "조상에 대한 신의로 창씨개명 아니한 오직 그 이름 김석범으로 이곳까지 왔음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적혀있다...
4.4. 광복 이후
1946년 10월 미군정에서 조선성명복구령(朝鮮姓名復舊令)을 제정하여 조선인은 창씨 개명 이전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으며 일부 제적등본(구 호적등본)에서도 해당 법령의 제정에 의거해서 수정한 흔적[27]을 찾아볼 수도 있다.[28] 모든 호적에 일괄로 정정한 사항이기 때문에 수기 호적인 시절에도 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한 정정은 그냥 도장으로 다 찍어놓은 점이 이채로운 부분.한때 대한민국 국적이나 조선적을 가진 재일교포나 중화인민공화국 또는 중화민국 국적을 가지고 있는 재일 화교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신청할 때 "당신과 같은 성씨는 일본에 없다"는 이유로 여전히 일본식의 창씨개명을 강요받았다. 그래서 성을 바꾸기 싫은 사람들은 가네다(金田), 아키야마(秋山)[29] 등 자신의 성과 같은 한자가 들어간 성을 썼다. 일본 내국인이 아니어서 생기는 불이익이 많으니 일본으로의 귀화를 결정하는 것이다. 특히 조선적을 가진 사람의 경우는 조선적 문서 참고.
다만 손정의는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면서 같은 이유로 거부당하자 '역창씨개명'을 시도했는데 일본에선 결혼하게 되면 보통 아내가 남편의 ( 데릴사위로 들어가면 그 반대) 성씨로 바뀌는 것에 착안해 일본인인 자기 아내를 손씨로 바꾸어서 일본인 중에 손씨가 있음을 증명하여 성명 한자를 그대로 두되 이름의 독음만 훈독으로 읽어서 ' 손 마사요시'가 되었다. 현재는 강희자전에 등록된 한자 + 인명용 한자 + 상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라면 얼마든지 마음대로 창씨개명할 수 있다. 단, 이름은 상용 한자 + 인명용 한자 + 가타카나 + 히라가나만 쓸 수 있다. 하지만 읽기는 마음대로 신청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한국인 중에 일본식 성씨, 예를 들어 山田, 金田, 松山 등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5. 목적
5.1. 대내외에 밝힌 목적
미나미 지로는 창씨개명을 선포하면서 '조선은 이제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다!' 라고 호기롭게 선언하면서 창씨개명을 실시하는 사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나고 조선 고유의 문화를 확립하기 위해서.
- 조선인들이 원해서.
- 조선의 성씨는 250여 종밖에 안 되는데 이는 10만여 종에 이르는 성씨를 가진 일본과 대조된다. 일본처럼 성씨가 다양해지면 선진화와 문명화를 이룩할 수 있다.
그리고 기존의 성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 기존의 성은 그대로 남고 새로운 씨를 부여할 뿐이니 오해하지 말라는[30] 설명서까지 전국에 배포했다.[31] 그리고 이광수를 비롯한 지식인들을 대거 내세워서 창씨개명을 홍보했다.
5.2. 실제 목적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 통치의 핵심은 선만일여와 내선일체, 즉 조선인의 황국신민화였다. 선만일여라는 것은 이미 매우 침략적인 표현이며, 실제로 당시 관동군 제4과와 연락하여 각종 문제로 조선의 군국화를 꾀했다. 내선일체 슬로건 실시에 있어서 가장 큰 실패는 세상에 널리 알려진 창씨개명과 국어(일본어)상용화 문제이다. 즉 조선인에게 일본의 성을 부여하여
가토 기요마사라든가
이시카와 고에몬이라든가 하는 이름을 쓰게 하는 것이다. 이름은 몸을 드러내는 것이므로 일본 이름을 쓰게 하여 그 속까지 완전한 일본인이 되게 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그 무렵은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시기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군국주의가 고조되는 단계였기 때문에 조선인 중에도 창씨개명을 희망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그 무렵 필자가 외유 중에도 유럽이나 미국에 체류하는 조선인, 중국인은 대부분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인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텔 레지스터 등에서 의외의 일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진심으로 그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다면 위원회를 만들어 허가제를 실시하면 되었을 것이다.
미나미 지로 총톡은 그것을 전 조선에 강제했다. 각지에서 여러 가지 비극이 발생했다. 예로 법원 등에서 하루 종일 피고인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호출이 없었다. 그런데 판결은 결석 재판으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법원은 창씨의 일본 이름으로 부르는데, 원래 그 이름은 본인이 개명한 것이 아니라 면장이나 주재소 순사 등이 마음대로 개명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전혀 모르거나, 혹은 실수로 잊어버린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카마타 사와이치로(鎌田 沢一郎) - 조선신화(1950년) 317-319p>
물론 그 무렵은 만주사변에서 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중대한 시기로 민족의식이 고양되고 군국주의가 고조되는 단계였기 때문에 조선인 중에도 창씨개명을 희망하는 사람이 상당수 있었다. 그 무렵 필자가 외유 중에도 유럽이나 미국에 체류하는 조선인, 중국인은 대부분 일본 이름을 쓰고 일본인이라고 칭하는 경우가 많았다. 호텔 레지스터 등에서 의외의 일본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런 경향도 있었기 때문에, 만약 진심으로 그것을 희망하는 사람이 많다면 위원회를 만들어 허가제를 실시하면 되었을 것이다.
미나미 지로 총톡은 그것을 전 조선에 강제했다. 각지에서 여러 가지 비극이 발생했다. 예로 법원 등에서 하루 종일 피고인 대기실에서 기다리다가 마침내 호출이 없었다. 그런데 판결은 결석 재판으로 유죄가 선고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법원은 창씨의 일본 이름으로 부르는데, 원래 그 이름은 본인이 개명한 것이 아니라 면장이나 주재소 순사 등이 마음대로 개명한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전혀 모르거나, 혹은 실수로 잊어버린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카마타 사와이치로(鎌田 沢一郎) - 조선신화(1950년) 317-319p>
한반도를 " 외지가 아닌 일본의 일부로 완전히 합병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었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조선의 인력과 자원을 전쟁 등에 본격적으로 투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일전쟁으로 한창 군사력이 필요하던 시절에도 일제는 조선인을 믿지 못해 군인으로 써먹는다는 선택지를 피하려고 했고 징병 대신 특별지원병제도라고 하여 철저히 검증된 조선인들만 전장에 투입했다. 조선인들을 대규모로 군대에 보내서 병사로 삼았다가는 혹시 조선인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32] 조선인 징병과 징용을 하자 일부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드디어 우리도 황국신민으로서 맡은 바 의무를 다할 수 있게 됐다.'고 한 데는 이런 배경도 있었다. 그러다가 사정이 급하니까 '이제 차별하지 않는다.'는 떡밥을 교묘하게 끼워서 조선인을 전쟁에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또 조선인이라는 정체성을 희석시켜 독립의지를 꺾기 위한 계획이었다. 표면상으로는 '일본식으로 개명한 조선인이 일본인과 동등한 대우를 받는다'고 하였지만 일본은 끝끝내 '조선 거주 조선인과 조선 거주 일본인은 병역을 지지 않는다'며 내지인과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반면 일본 거주 조선인은 병역 차원에서는 내지인으로 간주하였다. 해방 직전인 1945년에야 겨우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게만 제국의회 투표권이 주어졌다.
창씨개명은 조선식 이름을 아예 없애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일본식 이름을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창씨개명을 해도 원래 이름과 창씨개명한 이름이 나란히 호적에 오른다. 또 현재 일본에서 재일교포들이 신상을 숨기고 활동하는 것이나, 부락지명총람사건을 통해 부라쿠민의 출신지를 죽어라 캐내는 현대 넷 우익들의 모습이나, 류큐인이나 아이누 같이 일본의 정복전쟁을 통해 일본화된 지역의 토착민족이 야마토 민족계 이주민들과 갈등하거나, 생물학적으로는 아이누의 후예지만[33] 이미 문화적으로 야마토 민족에 동화될 대로 동화된 도호쿠인들이 일본 극우 세력에게 에미시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 창씨개명을 전면적으로 했어도 조선인 차별이 없어졌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가끔 일본 극우들이 '창씨개명은 조선인을 위한 정책'이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과 같은 권리를 주기 위한 관대한 조치'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같은 권리를 부여한다는 말은 같은 동원의 의무를 짊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가져다붙인 것이다. 당시 조선인들 중 진성 친일파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일본인이 되기를 혐오했다.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인'이라는 말보다 비하 단어인 왜놈이란 말이 더 통용될 정도였다.
심지어, 친일파들마저도 일부는 창씨개명을 하는 것을 싫어했고 정작 자신들은 일본인이 되기를 싫어했는데 이게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다. 친일파들 중에는 진짜 일본이 좋거나 동경해서가 아니라 일본이 대세라서 일본 편에 서서 연줄을 잡고 출세하려던 기회주의자들도 굉장히 많았다. 또한, 그런 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도 일반 조선인들처럼 일본인을 마치 일본인들이 조선인 보듯이 바라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그렇게 바라본 일본인이 자신이 되라고 하니 일부 기회주의적 친일파들에게도 창씨개명으로 일본인이 되라는 말이 그리 달갑진 않았다.
애초부터, 창씨대명은 대놓고 조선인 차별이나 다름없었다. 그 당시에나 지금이나 집안의 뿌리를 중요하게 여겼고 자식들한테 아버지의 성을 물려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관습이 있었는데, 감히 그걸 못하게 막으면 양반이든 평민이든 분노했을 일이다. 반대로 일본인들도 조선식으로 성을 바꾸라고 해도 받아들이 못하고 분노했을 일이었다. 당장에 일본에서도 데릴사위 제도가 존재한 이유가, 아들이 집안의 뿌리를 이어가고 아버지의 성을 계속 사용하기 위해서였다.
식민지 조선에서 포교활동을 하여 유의미한 정도로 조선인 신자를 확보하는 데 유일하게 성공한 일본 종교가 바로 천리교였다. 그런데 천리교에 입교한 조선인 신자들은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왜무당(일본 무당)이 되었다.'는 비난이나 욕설을 들었다는 증언이 많다.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버리는 것도 아니고 단지 종교를 받아들이는 데만도 이 정도 반발을 감수해야 할 정도였다.
5.2.1. 단순한 일본 이름 갖기가 아니다
(1) 창씨개명은 단순히 이름을 바꾸는 것만이 아니라 가족관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34](2) 창씨개명은 외지인으로서의 법적지위를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의 일본화였다.[35]
창씨제가 실시된 목적은 일본식 '家(이에)'제도를 도입하여 조선의 각 가정을 일본 천황을 종가로 하여 천황제를 지탱하는 기초로 삼는다는 것, 두가지 정치적 배경이 있게 된다. 조선의 가족제도를 서서히 내지화 해간다는 縱的展開와 함께 조선에서 皇民化政策의 실현을 통해 大戰에 동원할 징병제를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는 橫的구상이 창씨개명을 기초로 정책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집안, 형제라도 호주만 다르면 각각 다른 성으로 바꾸도록 유도하였다. 호적법에 장남은 아버지가 사망하여야 호주상속이 되지만 차남은 결혼과 함께 법적으로 분가되며 동시에 호주가 된다. 이점을 노려 형제간에도 다른 성으로 창씨개명을 유도하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과 이름을 일본어로 바꾸는 것에 그치지 않고 형제간에도 다른 성을 쓰도록 하여 우리 민족의 뿌리와 가족제도 자체를 없애려했다.
이름의 외양이나 씨제도 실시 여부와는 상관없이, 호적제도를 통해 조선인을 구별해 내서 차별을 가할 수 있는 구조는 변하지 않다. 이름의 구성원리를 성명에서 씨명으로 바꾸고 일본인 이름과 비슷하게 두 글자로 된 씨를 정하게 하되, 일본인의 것과는 구별을 두고자 했다.[36] 일제는 내선인의 구별을 위해 각각 준거법이 다른 호적을 이용하였다.[37] 민사정책의 수행과 군사, 교육 등 행정적으로도 내선인 간의 차이를 고려하여 내선간의 轉籍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창씨를 주저하게 만드는 현실적 이유로는 토지등기 문제가 있다. 특히 조선인 지식인이나 자산가, 유력자들 상당수가 주저했다. 창씨를 신고하면 호적에 기재된 법률적 이름이 바뀐다. 호적에 기재된 이름은 개인을 식별할 수 있는 유일한 칭호이며, 호적등초본은 가족관계나 개인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공증서였다. 따라서 부동산매매나 저당권설정 등을 위한 등기신청을 할 때에는 반드시 호적등초본을 첨부해야만 했다.[38] 그런데 당시의 호적등본은 호적계원이 호적부를 보고 일일이 베껴 적어야 하는 것으로, 말소사항은 기재되지 않았다. 따라서 창씨신고만 완료한 상태에서 호적등본을 발급받아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매각하거나 근저당설정을 변경하는 등의 업무를 처리할 수는 없었다. 등기부에 등재된 구성명과 호적등초본에 기재된 창씨명이 같은 인물임을 입증할 방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씨신고 후 호적등본을 지참하여 등기소를 방문해 명의변경신고를 해야 했는데, 이 때 수수료가 발생했다. 1필지당 20전(당시 경성부내 버스요금이 5전이었다)이라는 수수료는 평상시의 명의변경을 감안한 액수로서, 창씨개명으로 인해 하지 않아도 될 명의변경을 추가로 한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수수료 인하하는 등의 조치를 취할 법도 하지만, 기관에서는 이를 그냥 감수하라는 식의 태도를 보였다.
또한 소위 '지방유력자'들 상당수는 동성촌락의 문중에서 종손이나 문장(문중의 우두머리) 등의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개인소유의 토지뿐만 아니라, 종중 토지와 임야를 자신의 명의로 등록하여 관리하는, 이른바 '명의신탁'된 토지도 적지 않게 갖고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그 지방의 사족가문들이 연합하여 형성한 서원, 사우, 누정이나 각종 계가 소유한 토지, 임야의 공유자로 등기되어 자신의 문중이나 동리의 지분을 대표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에게 창씨를 신고한다는 것은 적지 않은 부담을 주었을 것이다. 자칫 실수하여 명의변경 신고를 누락하는 지번이 있을 경우, 자신의 사유재산권에 손해를 입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명의로 되어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소유가 아닌 종중토지나 공유지분에 문제가 생겨 지역사회에서 비난의 표적이 될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따라서 이들 '지방유력자' 상당수에게, 창씨는 '개성(성을 바꿈)'이냐 아니냐 하는 종족관념상의 문제임과 더불어 사유재산권에 결부된 문제이고, 종중과 동리 등 지역사회에서 차지하는 지위와도 관련되어 있는 심각한 사안이다. 그런데도 총독부는 무책임으로 일관하였다. 이러한 무사안일은 창씨는 성을 바꾸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관념적인 거부감과 결합하여 자산가나 지방유력자층의 창씨 신고율을 낮추는데 기여했다.
또한 종중창씨의 문제도 있었다. 일가친척이나 문중 단위로 모여 새로운 씨를 정하고, 이를 신문광고, 우편, 통문 등을 이용해 알려서 다른 종중원들도 그에 따라 창씨토록 하는 방식이다. 종중의 종손가 중 상당수는 일제강점기 당시 해당 지역의 지주층으로서, 우월한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지역사회에 적지 않은 영향력이 있었다. 따라서 앞에서 언급한 지주층의 창씨개명 여부는 종중이라는 종족집단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단수히 지주로서의 우월적 지위나 종손이라는 촌락사회의 위치를 넘어서, 많은 주민들의 삶에 직접적 영향을 끼치는 존재였다. 춘공기에 곡식이 떨어지거나 자식이 태어나 이름을 짓고 출생신고를 할 때, 가족 중 환자가 있어서 약재를 필요로 하는 문제에 이르기까지 지주집이나 종손댁은 머슴이나 소작인, 이웃의 일가들에게 도움을 주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해 왔다. 만일 창씨에 대해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지주가에 의존하는 친척이나 소작인들이 면직원 등의 회유와 압력에 굴복하여 창씨 신고를 했다가, 창씨에 극히 부정적인 지주가로부터 경제적, 사회적 불이익을 당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다는 의미다. 반대로 지주자가 솔선하여 창씨를 신고한다면 그 주변의 일가친척이나 소작인들도 뒤따를 개연성이 충분했다. 결국 창씨문제 역시 지방유력자이자 종손(혹은 그에 필적하는 사회적 지위를 가진 집) 이며 지주인 계층을 얼마나 포섭하느냐에 좌우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총독부는 사용가능한 갖가지 강압적 수단들을 사용해 지주층의 창씨신고를 하게 만들었지만, 종중창씨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창씨제도를 발안할 당시 '조선인들 가운데 같은 성이 많은데, 씨를 설정하면 집안 별로 다른 씨를 쓸테니 구별이 용이해질 것'을 기대했는데, 동성동본을 단위로 하는 종족집단이 같은 씨를 신고하게 되면 그 효과가 반감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씨제도를 도입한 의도 가운데 하나인 '종족집단 약화'라는 목적을 이루기 어려움을 의미했다. 급기야 법무국에서 "종중의 협의결정은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참고사항을 발표하고[39]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에 사설을 동원하여 종중창씨는 성과 씨를 혼동한 결과이므로 창씨의 정신을 어긋나게 하는 결과라고 비판하기에 이른다.[40]
1933년 당시 조선고등법원은 조선의 제사상속과 관련하여 제사는 상속이 아니고 단순히 道義上의 儀式이라고 판결하였다.[41] 즉, 호주상속과 재산상속 제도가 확립된 당시 제사상속의 관념은 先代奉祀와 조상제사를 주로 하는 도의상의 지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있다. 이는 결국 조선사회가 중시하여오던 嫡長子 중심의 제사상속을 법률상의 지위에서 배척해 버림으로써 전통의 가족관념과 家의 승계 등에 혼란을 야기하게 하였다.
부계혈통을 중심으로 제사를 상속하고 입양의 경우 同宗의 支子만을 양자로 들이면서 異姓不養원칙과 姓不變의 원칙을 고수해오던 조선의 전통법제와 관습을 크게 왜곡하며 훼손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었다.[42] 그래서 제사상속은 가족법상 조선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부계혈통의 후손들은 선조에 대한 奉祭祀를 도모하면서 지속적으로 가족 및 가문과 종중관념을 이어오게 되었던 것이다.
6. 조선인의 반응
창씨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조선식 이름을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이 문제가 조선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지체 높은 양반층에게 걱정거리다.
미나미 총독은 조선인들에게 창씨개명을 강요할 생각이 없다고 공식적으로 천명했다. 그래놓고는 똑같은 성명서에서, 만약에 조선인들이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면 기쁘겠다고 분명히 시사하는 바람에 골치만 더 아파졌다. 나는 이처럼 열광적으로 조선의 모든 것을 일본 것에 맞추어 순응하도록 강요하는 처사가 아주 부질없고 지혜롭지 못한 정책이라고 본다. 다양성이야말로 삶에서 양념 같은 것이다. 일본이 열망하는 대제국은 반드시 다민족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다민족 구성원들에게 모든 면에서 정확히 똑같아지라고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리석은 정책이 아닐 수 없다.[43][44]
윤치호 일기 (1940년 1월 4일자) #
윤치호 일기 (1940년 1월 4일자) #
유학의 영향이 아직 강하게 남아서 조상과 가문이 절대적이었던 시절이고 직관적으로 '성을 갈아버리는 행위'니 창씨개명은 '민족의 정체성'에 앞서 '가문의 정체성'과도 직결되는 문제다. 유교적 관점으로도 '충(忠)'의 대상인 왕조가 사라져버린 아노미 상태였지만, 그의 반대급부로 족보와 가문에 대한 집착 및 자부심이 굉장한 시대였다.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薛鎭永, 1869~1940)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을 경우 아이를 퇴학시키겠다는 학교의 통보를 받았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가 울자 설진영은 할 수 없이 창씨개명한 뒤 자신은 조상을 볼 면목이 없다면서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어 자살했는데 이 설진영의 이야기를 일본인 소설가 카지야마 토시유키가 <족보(族譜)>라는 소설로 발표했고, 1978년에는 임권택 감독이 이 소설을 바탕으로 영화 족보를 만들었다.
창씨개명은 명목상으로는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행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유명 인사 혹은 아이러니하게도 친일반민족행위자 등 '유·무형의 압박과 강요를 이겨낼 수 있었던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할 수 있었다. 윤치호는 "당국이 이미 창씨개명하기로 결정한 이상, 조선인들이 창씨개명하도록 반드시 조치를 취할 것이다. 그들은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저명한 조선인들을 반일분자로 블랙리스트에 올릴 것이다."[45]라고 말하며 저명한 친일파들도 오래 못 버틸 거라고 봤고 실제 페널티도 있긴 했지만 성씨를 바꾼다는 반감으로 끝까지 버틴 사람들도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고 일본 제국 육군 중장까지 오른 홍사익 외에 경술국적 중 한 명인 윤덕영, 기업인 박흥식, 방응모 등 현재 친일인사로 분류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꽤 있다.
그러나 조선의 정체성이 더 희미해진 1930년대 이후 출생자들은 이미 창씨개명에 익숙하여 오히려 조선 이름보다 일본 이름을 더 세련되게 느끼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박완서의 자전소설인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의하면 자신의 창씨개명하지 않은 보쿠엔쇼[46]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며 하나코· 하루에 같은 일본 이름이 듣기 좋아 부럽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강점기가 조금만 더 길었어도 창씨개명은 이전 세대에 비해 거부감 없이 널리 퍼졌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아메리카 원주민과 필리핀의 사례가 해당 대체역사에 가까운 대표적인 사례인데 앵글로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영미권 성명을 쓰고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이나 필리핀인들이 스페인어 성명을 쓰는 게 그 예다.[47]
창씨개명의 피해자[48] 중에는 직업 특성상 개명된 이름을 불러야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드물게는 팔순이 지나서도 서로를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었다. 또한 이렇게 창씨개명을 하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징집, 징용, 정신대 등으로 끌려간 많은 이들이 서류상으로 조선식 이름이 아닌 창씨개명한 이름으로 등록되어 21세기에 이르기까지 피해자들의 신원 파악부터 적잖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7. 논란
7.1. 부정론
창씨개명 문제에 대해 뉴라이트, 일본 내 역사수정론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관점. 해당 지적은 대표적으로 " 홍사익 등 개명하지 않은 조선인도 존재하며 무조건 강제했다기에는 헛점이 보이는 부분이 많으니 창씨는 내지인과의 차별을 막기 위함이다, 차별된 건 아니다, 더나아가 피해를 본건 소수이며 창씨개명은 강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곤 한다. # 일본어 위키 유튜브 링크 #이는 창씨개명의 강제성을 설명할 때 자주 쓰이는 문정창의 주장이 교차 검증이 충분히 되지 않은 1차 사료이기에 나타나는 주장으로서, 차별이 만연했다는 내용과 달리 달리 당시의 기사 등 역사적 사료들을 보면 창씨개명을 거부함에 따른 불이익이 일관되고 강력하게 적용되었다고 하기에는 조선인 이름이 많이 보인다는 것을 근거로 한다.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아카이브
국립중앙도서관 고신문 아카이브
아래는 이와 관련된 주장들이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직장을 얻을 수 없고, 이미 다니는 직장에서도 해고되며, 만약 해고되지 않으면 상관과 함께 해고하였고, 그 직장을 폐쇄했다?
1941년 경성중앙방송국 아나운서 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 | 1941년 보통문관합격자명단 - 매일신보 |
- 1941년 경성중앙방송국( JODK)에 아나운서로 채용된 합격자 6명[49] 중 2명 이원구[50], 허점옥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식 이름을 가진 채 아나운서에 합격했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현대의 KBS[51]에 해당하는 방송국이다. 아나운서의 직업 특성상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시청자에게 알리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였을텐데, 이러한 직책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을 임명하였다는 것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사람이 직장을 얻을 수 없다는 주장의 논리에 어느 한 부분도 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자를 고용한 이 경성중앙방송국은 폐쇄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경성중앙방송국은 해방 이후까지 건재하다가 이후 한국방송공사로 명맥을 이어간다. 심지어 한국방송공사는 아예 대놓고 창립일을 경성중앙방송국의 창립년도인 1927년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즉 KBS의 존재자체가 해당 주장이 사실무근이라는 하나의 증거인 것이다.
- 또한 보통문관(현대의 7급 공개경쟁채용시험에 해당)에도 박교남, 임행작 등 최소 2명의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가 임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직장을 얻을 수 없는데 심지어 공무직, 그것도 오늘날 7급에 해당하는 직책에 조선식 이름을 쓰는 사람을 선발했다는 이 기사는 당시에 정말로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 대해 철저한 배제와 억압이 있었는가 되짚어보게 하는 사료다.
-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학교에 입학 할 수 없다?
- 창씨개명을 거부하는 교사는 해고하고, 해당 학교를 폐교 조치했다?
1941년 경기공립중학교 합격자명단 - 매일신보 | 1941년 만주국교원시험 선내(조선출신[52])합격자 발표 - 매일신보 |
- 조강언, 이순구, 김인환, 진철수 등 조선식 이름이 상당 수 합격자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은 합격자 명단은 각 연도별, 지역별, 각급 학교별로 수천 개가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 심지어 이 경기공립중학교의 경우에는, 수도 경성에 소재하여 조선총독부의 직속 감독을 받는 학교로, 만약 창씨개명 거부자를 차별하여 학교에 입학할 수 없게 하려고 했다면 당장 직속 학교부터 시행했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자료는 1941년이 되도록,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들도 여전히 총독부 직속 학교의 입학 전형에 차별 없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심지어 합격자 선발에도 당연히 포함되었다는 객관적 증거다. 따라서 창씨개명 거부자가 학교에 입학할 수 없었다는 주장은 사실 무근이다.
- 위 주장에 따르면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교사를 해고하였다면 그 일관성에 따라 신규 채용도 당연히 금지했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로 1942년에는 일제의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에 설립한 학교의 교사를 선발하는데에도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를 다수 채용하였다. 만약 창씨개명 거부자를 채용한 학교를 폐교한다는 방침이 있었다면 만주고 조선이고 조선식 이름을 아예 채용하지 않았어야 하거나, 채용했다면 학교를 폐교했다는 기록이 있어야 하지만, 해당 자료는 교사 채용 명단에 명백히 조선식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1941년까지도 교사의 채용에도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가 상당수 채용되었다는 역사적 증거가 존재한다.
- 조선인 성명이 표기된 화물이 철도국 및 운송점에서 취급되지 않았다는 기록은 일부 존재한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조선인 승객이 모든 교통편을 이용할 수 없었다는 주장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 창씨개명을 거부한 조선인이 병원 치료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주장은 일부 병원에서 차별적 관행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강제적인 배제가 이루어졌다는 구체적인 증거는 부족하다.
1942년 치과의사시험합격자 명단 - 매일신보 |
- 의료진이 일본식 성명을 사용하지 않을 경우 폐원 조치가 이루어졌다는 공식적인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실제로 1942년 치과의사시험 합격자의 명단인데, 조선인에게도 공공 서비스 중에서도 매우 고급 기술인 치의학을 전공하고 치과의사가 될 수 있는 길이 1941년까지도 열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조선인을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어떤 식으로든 불이익을 주고자 하는 것이라면, 치과의사 자격 취득 시험을 응시하게 하고 자격을 취득하게 하여 잠재적으로 일본인의 치아 건강을 맡기는 것은 그 목적과 완전히 모순된다. 심지어 그 논리대로라면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조선인은 더더욱 제재했어야 한다. 하지만 위의 1942년 치과의사시험 합격자의 명단에서 볼 수 있듯이, 의료인이 되고자 하더라도 창씨개명이 필수는 아니었다는 점에서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보는 것이 개연적이다.
- 창씨개명 거부자는 공무에 종사할 수 없었다?
1942년 전조선순사부장 체험좌담회 명단 - 매일신보 |
- 1942년에 전조선(조선 전체)의 순사부장들이 모여 경험담을 공유하는 좌담회에 관한 기사의 일부분이다. 이 중 평양경찰서의 김래승 순사부장, 신의주경찰서의 김구향 순사부장이 조선식 이름을 사용하면서도 순사부장직을 여전히 유지하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과 일본인 순사부장들과 동등한 자격으로 좌담회에 참석하였다. 만약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자에게 불이익이 주어졌다면 일본인 순사부장들에게는 물론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 순사부장들마저도 이들과 거리두기를 했어야 개연적인데 기사의 내용을 보면 그러한 위화감이 없이 좌담회의 내용 중심으로 기사가 서술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불이익이 과연 있었는가에 대해 고찰하게 되는 지점이다. 또한 위에서 주장이 사실이라면 평양경찰서와 신의주경찰서는 진작에 각각 폐쇄했어야 했으나, 폐쇄는커녕 오히려 좌담회에 참석할 정도로 당당히 직업활동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는 증거 자료이다.
- 거부자는 불령선인, 비국민, 무국적자로 간주되었다?
1941년 조선총독부 직원록 (9페이지) - 국립중앙도서관 |
-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된 조선총독부 직원록의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조선식 이름들이 다수 보인다. 만약 조선식 이름을 유지한 자를 불령선인, 비국민이나 무국적자로 간주하였다면 이들은 총독부는커녕 일반 직장에도 취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당수의 조선식 이름을 가진 자들이 총독부의 공무원으로서 직무를 수행하였다는 역사적 증거물로부터 해당 주장은 사실이 아님을 알 수 있다.
7.1.1. 반론
창씨개명의 강제성 여부에 대해서 학계에서 다양한 논의가 있지만, 시대적 맥락을 무시하고 신문에서 조선 이름이 등장하는 단편적인 사실만을 가지고 창씨개명이 강압적인 성격을 부정하는 건 분명한 한계가 있는 주장임의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총독부는 조선인의 신고가 기한내에 완료되지 않아도 법적으로 창씨정책을 마무리하겠다는 의도를 분명히 했으며[53] '창씨개명' 중 '창씨'는 강행규정을 통해 법적 구속력이 있었다.[54] 당시 조선총독부는 관보 등을 통해 일본식 이름으로의 개명을 강력히 종용했고, 일본식 이름이 없으면 말단 선에서 각종 법적, 행정적 행위에 제약을 가하도록 묵인한 정황이 포착이되며 이는 공문서, 학교, 회사 등 공적 영역에서는 창씨명 사용이 사실상 강제되음을 시사한다. 결과적으로 신청기한 중반까지도 지지부진했던 창씨개명이 총독부 주도하에 3개월 만에 조선 전체 가호의 80%가 신청하게 되는 비정상적인 기록을 세웠고 총독부에서는 100% 창씨를 했다고 선전한 점을 생각하면 [55] 창씨개명이 진짜 ' 강제'가 아니라 할 수 없다.거기다 역사의 큰 흐름 속에서 창씨개명의 본질을 살펴 본다면 강제성은 더 명확히 지는데, 전시체제였던 일제 말기 조선인들은 철저히 총독부에 예속된 신민으로 취급받다는점, 황민화 정책에 거슬린다면 일개 연구단체도 내란죄로 감옥에 잡아 넣는 다는 점, 그리고 창씨개명, 조선지원병 자원을 압박한다는 점 등 강압적인 말살 정책이 극에 달했던 시기 였기 때문에 창씨개명에 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불이익은 인맥없는 다수의 일반인들이었고 소수의 특권층들은 이것을 전부 회피한 정황이 포착되고 있다. 창씨개명을 주로 회피한 지주층은 총독부도 어느 정도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던 부류인데, 이는 제국주의 식민통치기관들이 자신들의 체제에 협력적인 현지의 토호, 혹은 현지의 원주민들과 적대적인 민족들의 편의를 봐주며 그들과 유착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소수의 열강들이 수많은 식민지를 지배하며 유지할 수 있던 것이고 또 토호들이 지방의 왕으로 군림하며 사회적 압박을 무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식민지 특유의 사다리 걷어차기 식 교육 정책 덕분에 광복직전 1944년 중학교 학위 보유자가 전체 인구의1.41% 대학학위 보유가 0.05%이며 # 당시 고등학교까지 진학할 수 있는 여유가 되는 사람들은 총독부가 손수 신경 써주던 조선귀족, 지주 출신의 상류층 뿐이었다[56]
이것이 조선 이름이 일부 확인된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니었다고 단정 짓기는 어려운 이유다. 신문에서 만명 중 한 명 혹은 천 명 중 한 명의 사례를 가지고 와서 차별은 일부의 사례일 뿐이다, 강제한적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단편적 사실에 근거한 흑백논리적인 주장이며, '강요'는 했는데 '강제'가 아니라는 것 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창씨개명의 강제성에 대해 반론을 제기하는 측에서 자주 하는 큰 오해와 착각 중 하나가 창씨개명을 '이름과 성을 바꾸는 일'로 아는 것이다. 창씨(일본식 씨를 더하는 것)는 의무제였고, 개명(이름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였다. 새로운 씨를 선택해서 신고하면 그 씨를 사용하고, 아니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던 성이 일본식 씨로 추가되었다. 당시엔 '창씨'만이 의무였고 실적의 대상이었다. '씨설정'이 원래 창씨제도의 취지이므로 '개명'만 별도로 한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일본식 성과 같아 일본말로 읽을 수 있는 유(柳)=야나기, 남(南)=미나미, 임(林)=하야시, 계(桂)=가쓰라 등처럼 굳이 창씨하지 않고 개명만 한 경우는 있었다.
애초에 창씨개명은 그 정책의 특성 상 이중성을 띌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먼저 정책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선 강제성을 가져야했지만, 대외 선전 이미지를 고려해서 이 것이 강제가 아님을 계속 강조하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이였다. 창씨개명이 강제가 아님을 선전하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제할 필요가 없는 자들에 한 해선 창씨개명을 강제하지 않았다. 조선식 이름이 차별하지 않았다는 증거로 제시된 사료들(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출처)은 경성중앙방송국, 보통문관시험, 경기공립중학교인데 이 곳들은 총독부에서 직접적 영향력을 발휘하는 곳이기에 범죄이력 조회나 사상 검증, 가계 조회 등을 거쳤다. 만주국교원시험도 마찬가지인데, 만주국의 모든 권력은 관동군에서 나왔다. 구체적으로는 관동군 제 3과와 제 4과로 불리는 곳이 정무 지도등 거의 모든 지시를 내렸다. 또한 국적법도 없었다. 입법원은 정식으로 개설조차 되지 않았다. 이런 곳에 교원으로 지원하는 이들을 사전에 조사도 하지 않고 합격자를 받았을까?
위 주장과 관련해서 이런 의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성과를 올리기 위해 창씨개명을 강요한 것은 명백하다.(위 주장에서도 이를 부정하진 못 하고 있다) 이왕 강압적으로 일본식 씨명을 이식하기로 했다면, 아예 일본인과 완전히 똑같이 만들도록 유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결과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과정에서 조선인들의 반감은 반감대로 커졌을 뿐만 아니라(심지어 신념형 친일파들조차 불만을 토로했다), 改姓(성을 고침)이라는 굴욕감을 감수하며 창씨개명을 했건만 조선인이라는 흔적이 이름에 남아서 차별은 차별대로 받지 않았는가?'
우선, 조선인 차별을 위해서는 조선식 이름 차별을 해선 안 되었다. 차별을 위해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구별되어야 하는데, 위 배경 문단에서도 이미 설명됐지만, 조선인과 일본인은 같은 동아시아인이라 외형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워 조선인과 일본인이 섞이면 알아 볼 여지가 없다. 이 때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이 바로 성명이다. 그런데 성명까지 일본식으로 바꾸고 호적을 교체한다면 더욱 조선인과 일본인을 분간하기 어려워진다.[57]역설적으로 조선인과 일본인을 구별하고 조선인을 차별하기 위해서는 조선식 이름을 차별해선 안 되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은 구분을 위해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을 쓰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였다. 1910년대에도 몇몇 친일파들이 일본에 충성한답시고 일본식으로 개명 신청을 하고 일부는 자식이 태어나자 일본식 이름을 지어 호적에 올리려고 했지만 당연히 이 자들도 예외 없이 퇴짜를 맞았다. 이는 식민통치 당시 일본인이 1등 신민으로서 조선인보다 우월한 지위를 차지해야만 했고 그런 만큼 적용되는 법률이나 형벌 등도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일본 내에서 그런 입장의 반발이 점차 사라지고 일제 정책이 조선인의 일본인과의 확실한 동화, 즉 내선일체 정책으로 굳어진 것은 최소한 1930년대 이후의 일인데, 이때조차도 보수적인 일본인들은 내선일체 정책에 반감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았다.
“조선총독부 서기 김유탁(金有鐸)은 본월 7일 가네코 요시타로(金子吉太郞)로 성과 명을 바꾸다.” 일본의 조선 강제병합 직후인 1911년 7월12일자 조선총독부 관보에 실린 기사다. 이 시기에 조선인이 일본식 성명으로 바꾸는 일이 흔치는 않았는데, 대개 자발적 개명이었다. 일부 일본 신문도 이를 두고 조선인의 동화를 보여주는 것이라며 환영했다. 하지만 정작 총독부는 당혹스러워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조선인은 피부색, 얼굴 생김새가 일본인과 비슷한 데다 일본말을 배운 상태에서 이름까지 닮을 경우 둘을 구별하는 잣대가 없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총독부 입장에서 두 민족이 동등해져서는 안 되는 노릇이었다. 결국 총독부는 1911년 10월 총독부령으로 조선인의 개명을 어렵게 하고 이미 개명한 조선인은 원래 성명으로 되돌릴 것을 종용했다. 일제 초 조선의 이름 정책은 차별화에 바탕한 지배질서 강화와 유지였다. 그리고 동일화 역시 지배질서 강화와 유지가 목적이였다. 일제가 초기에 가졌던 이름의 차별화 정책은 말기에 밀어붙인 이름의 동일화 정책과 모순되는 것 같지 않다. 시기별로 조선 통치의 필요에 따라 '타자(他者)'인 조선인들의 이름을 갖고 장난을 쳤다는 점에서는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배제'와 '동화'는 서로 배치되지 않는 짝패였다.
창씨개명에 문제가 되는 지점은 '이름(개명)'이 아니라 '성씨(창씨)'였다. 성씨가 의무제였고 이름은 선택제였다. 창씨(創氏)란, 씨를 바꾸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改名)이란 당연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총독부는 조선에 조선식 성씨를 폐지하고 일본식 성씨를 새로 만드는 폐성창씨(廢姓創氏)를 강요했지만, 극도의 반발로 '폐성창씨'의 대체어로 '개성명(改性名)'이란 용어를 대신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에게 개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중시한 것은 창씨였다. 일본의 '이에' 제도를 조선에 뿌리내리는 것이 커다란 목적이었기 때문에 씨를 신고한 사례는 전체 가구의 80퍼센트였던 데 비해, 개명 사례는 총인구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조선인은 부계 혈통에 따른 성씨(姓氏)가 있어 그것은 죽어서도 바뀌지 않는 관습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성의 3대 원칙이 있다. 첫째가 '성 불변'의 원칙이다. 둘째는 '동성 불혼'의 원칙이고 셋째는 '이성 불양'(다른 성을 가진 자는 양자로 삼지 않는다)의 원칙이다.
조선인의 '성'제도에 반해 일본에는 '씨' 제도가 있다. 그리고 씨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지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당연히 호주 이하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같은 씨를 사용한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인에게 '개명'이 아닌 '창씨'만을 문제 삼은 배경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인에게 자기들의 씨 제도를 요구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의 핵심은 호적의 '본관'란을 '성급본관'으로 변경해 옮겨 적는 대신 (새로 창설되는) '씨+명'을 법률적 호칭으로 바꾸는 것이다. 총독부는 이 점을 내세워 '성이 바뀌거나 얿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성을 바꾸거나 없애는 것이 아니라 호적에 남겨두었으며 동성동본 불혼관습은 종전과 같이 인정된다고 선전했다. 다만 새롭게 씨를 만들어 '씨+명'을 호칭으로 부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조선인의 입장에서, 대대로 이어받은 성을 부르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씨를 새로 만들어서 그것을 법률적 호칭으로 사용한다는 것은 자기의 이름이 바뀌는 것이다. 실생활 측면에서 생각한다면 '창씨는 강요가 아니며, 그대로 쓰고 싶은 사람은 신고서를 내지 않으면 된다'고 선전했지만, 씨제도가 적용되면(신고서를 내지 않아 법정창씨가 되는 경우) 여성들의 법률적 호칭은 혼인관계에 딷라 일괄적으로 변경되었다. 때문에 조선인들은 성이 바뀌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인식이 생길 수밖에 없고, 씨제도의 법적인 의미나 파급효과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창씨(씨를 새로 만듬)는 개성(성을 바꿈)과 같다고 여기기에 충분했다.
1940년 이전까지 일제는 조선에 '일본식 씨'를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식으로 개명할 수 없었으며, 이름을 통해 일본인과 조선인을 구별하고 차별할 수 있는 '차이화'를 추구했기 때문이다.[58] 1937년에 이르러서야 신생아에 한해 일본인풍의 이름만을 지을 수 있었을 뿐이다.
일본풍 창씨개명을 주장하면서까지 내선일체를 강조한 미나미 총독 자신도 법률적인 차별 철폐는 단호히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결국 내선일체란 '조선=일본'이 아니라, 조선과 일본의 차별을 인정하는 가운데 조선의 일본화를 이루어 나간다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서는 창씨개명을 하더라도 가봉을 받을 수 없으며, 조선인이 일본 본토로 전적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 점에서도 알 수 있다.[59]
창씨개명은 그들이 부르짖었던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집행된 제도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인들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선일체건 민족말살이건 모두 전시동원체제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자원이 더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조선 청년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창씨개명은 조선인 징집을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이 무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을 바꾸지 말고 하나 더 만들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 여부는 문제 삼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이름'을 '강제하였지만 차별은 없었다'는 자가당착적 위 주장은 구차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8. 사례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을 할 경우 대체로 그 집안의 문중이 모두 모여서 회의로 정했는데, 마침(?) 씨(氏)의 유래 가운데 하나가 제후의 봉토를 의미하고 이게 본관하고 의미가 비슷하므로 조금이라도 고전을 읽어 본 문중 일원들은 고전에 맞추려고 본관과 비슷하게 창씨했다. 안동 권씨(安東權氏)[60]라서 안도(安東)[61], 노(盧)씨의 시조가 용강군(龍岡郡) 출신이라 오카무라(岡村), 하동(河東) 정(鄭)씨라서 가와히가시(河東) 혹은 가와토(河東) 등으로 창씨개명한 경우가 많다. 본관을 그대로 사용한 창씨개명이 가장 흔한 편으로, 지명이니까 일본어로 읽었을 때도 그다지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안도, 오카무라, 가와히가시·가와토는 일본에도 있는 성씨이므로 위화감이 없었다. 만약 본관을 일본식 한자음으로 읽어 다소 위화감이 있다면 본관과 본래 성을 합친 이름으로 개명하기도 했다.[62] 박정희 등 고령 박씨의 다카기(高木)는 박(朴)의 목( 木)자와 고령 박씨의 고( 高)자를 따서 만든 것이다. 심영[63] 등의 청송 심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에서 글자를 따 와 아오키(靑木)로 창씨개명하였다.이는 한국인과 일본인이 가지는 성씨에 대한 인식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다. 메이지 유신 때 평민들에게 일괄적으로 성씨를 부여한 일본에서는 성이 같은 것은 그저 '우연'이지만 한국은 성씨에 대한 관념 자체가 일본과 달랐기 때문에 그 심리적 반감이 만만치 않았다. 조선 후기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성씨는 어떤 형태로든 자신의 연고와 밀접한 관계인 것이 많았다.
본래의 한국식 성씨의 본관 + 성씨와 본관을 붙여 일본식 성씨로 바꾼 것 말고도 원래 한국식 성의 글자를 파자한 사례도 있다. 예를 들어 장(張)씨는 유미나가(弓長)로 창씨개명했는데, 파자한 유미나가의 한자를 합하면 弓 + 長으로 張이 된다. 박(朴)씨의 경우 마찬가지로 朴을 파자해 기노시타(木下)로 바꾸기도 했다.[64] 일부 최(崔)씨의 경우는 한자의 산 산(山)과 새 추(隹)를 분리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일부 정(鄭)씨도 한자를 파자하여[65] 사다무라 혹은 덴오(奠邑) 등으로 창씨하였던 사례가 있다.
혹은 성씨별 시조 설화에서 의미를 따 온 경우도 있었다. 박씨의 경우 위처럼 파자한 사례도 있지만 대체로 신라 박혁거세 신화에서 따와 '신라의 우물'( 나정 참고)이라는 의미를 담아 아라이(新井)이나 마쓰이(松井)도 많이 썼다. 대표적인 인물이 재일동포 출신 중의원 의원인 아라이 쇼케이(박경재)였다. 경주 이씨는 시조 이알평이 시조설화에서 표암봉 바위에 내려온 것에서 따 와 이와모토(岩本)로 정하는 것을 고려했다고 한다.
전주 이씨는 대체로 아사모토(朝本), 미야모토(宮本), 구니모토(國本)[66]로 바꾸었는데, 이유는 조선 왕실. 종근당을 세운 이종근이 처음 만들었던 약방 이름은 '궁본(宮本) 약방'이었다.[67]
이밖에도 본래의 성씨나 본관에 일본 성씨에 굉장히 자주 들어가는 한자인 田(다), 山(야마), 原(하라), 川(가와), 村(무라), 本(모토) 등을 합성한 예는 일제강점기에 흔히 쓰인 창씨법이다. 후술될 유명인의 창씨명에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여자들의 경우 창씨개명을 할 때 이름 뒷부분에 子(코, こ)자를 붙여서 했다고 한다.[68] 남자는 원래 이름 그대로 바꾸거나 원래 이름의 한 글자에 夫(오), 郎(로), 也(야) 등을 붙여서 하는 경우가 많았다.
8.1. 창씨개명의 예외
남(南)씨· 류(柳)씨· 임(林)씨· 계(桂)씨· 오(吳)씨는 창씨개명을 안 해도 별 일 없이 넘어갔다는 듯. 일본에도 미나미(南)· 야나기(柳)· 하야시(林)· 가쓰라(桂)· 구레(吳)가 적지 않게 있어서 창씨개명이 큰 의미가 없었다. 총독부도 별 말 안 한 것 같고. # 다만 국민총력부락연맹의 이사장이었던 유대흥(柳大興)이라는 사람은 류(柳)씨이기에 창씨개명을 안 해도 되지만[69] 사람들에게 강제하는 입장이라 어쩔 수 없이 야나모토(柳本)로 창씨했는데 '나는 어쩔 수 없이 창씨개명한 것이다. 나도 창씨개명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해 경찰에게 적발되어 잡혀갔다가 친일 경력 덕에 검찰에서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거꾸로 이 때문에 애먼(?) 일본인이 조선인으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당시 조선과 조선인을 옹호하는 글을 많이 썼던 미술사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그 이름을 한국식으로 음독하면 유종열이고 위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광화문 철거를 반대하는 등 조선의 문화를 보호하는 운동을 맹렬하게 펼쳤는데[70] 그것 때문에 그를 싫어하는 일본인들이 저놈 이름하고 글쓴 거 봐도 영락없는 조선인 아니냐면서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다른 의미로 웃기는 사례로, 7대 총독 미나미 지로(南次郎, 남차랑)가 부임하자 종씨가 보위에 오르셨다면서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남원에서 일가족을 이끌고 상경한 어떤 남씨가 있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도 희성인 경우와 겹치면 이런 핑계(?)가 먹히지 않았다. 김(金)씨는 곤(金) 씨가 이미 일본에 있었지만[71] 일본에서는 희성인 데 반해 조선에서는 20%를 차지하는 아주 흔한 성이어서 조선인의 대명사로 여겨졌기 때문에 대부분은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다. 안(安)씨와 차(車)씨 역시 일본에 야스(安) 씨와 구루마(車) 씨가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성씨[72][73]다 보니 창씨개명을 했다. 당시 해당 씨가 그대로 일본에서도 통용된다는 증거를 행정을 집행하는 서기에게 제시하지 못하면 무조건 창씨개명의 대상이 되었고 고전이나 일본 사정에 통달하지 못한 일반적인 조선인이 이런 사례를 제시하기는 어려웠다.[74]
남궁(南宮)씨도 성이 2글자이고 일본식으로 읽으면 음독으로는 '난구'[75]가 되고 훈독으로는 '미나미야'[76] 정도가 되어 그럭저럭 일본 성씨하고 비슷하게 보여서 그대로 놔뒀는데도 이미 창씨개명을 한 줄 알고 아무 불이익도 받지 않고 그냥 넘어가기도 했다. 실제로 일본에도 이와테현에서 유래된 南宮씨가 있었으므로 이름만 그럴싸하면 창씨는 물론이고 개명도 하지 않아도 됐었다. 사실 남궁씨 뿐만 아니라 2글자로 된 성을 가진 사람들은 일본인과 큰 구분이 안 간다는 이유로[77] 창씨개명이 얼추 면제된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의 조선인 마라토너 손기정과 남승룡은 각각 손 기테이와 난 소류로 불리었고, 이 이름으로 메달을 받았는데, 이는 창씨개명에 해당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조선 이름을 음독으로 읽었을 뿐이기 때문이다.
8.2. 성씨별 창씨개명 상황
성씨 순위 100위 이상만 기재되었다.<rowcolor=#000,#fff> | 前 | 後 |
1 | 김(金) |
가네우미(金海、かねうみ), 가네오카(金岡、かねおか),
가네다(金田、かねだ), 가네모토(金本、かねもと), 가네시로(金城、かねしろ), 요시카네(慶金、よしかね), 가네야마(金山、かねやま), 가나에(金江、かなえ), 가네야(金谷、かねや), 가네자와(金澤、かねざわ), 가네가와(金川、かねがわ), 가네우라(金浦、かねうら), 가네하라(金原、かねはら), 가네무라(金村、かねむら), 가네이(金井、かねい), 가네키요(金淸、かねきよ), 가네모토(金源、かねもと), 가네코(金子、かねこ), 가나시마(金島、かなしま), 가네마쓰(金松、かねまつ), 가네바야시(金林、かねばやし), 가네미쓰(金光、かねみつ),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오카다(岡田、おかだ), 미쓰모토(光本、みつもと), 게이린(鷄林、けいりん) |
2 | 이(李) |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구니모토(國本、くにもと), 아사모토(朝本、あさもと),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마키야마(牧山、まきやま), 우시미네(牛峰、うしみね), 마시로(眞城、ましろ), 히라카와(平川、ひらかわ), 아오키(靑木、あおき), 니야마(丹山、に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리무라(李村, りむら), 리노이에(李家, りのいえ), 나가카와(永川、ながかわ), 기고(木子、きご), 스모다(李田、すもた). 호시야마(星山, ほしやま) |
3 | 박(朴) |
아라이(新井、あらい), 아마모토(天本、あまもと), 이모토(井本、いもと),
무라이(村井、むらい), 보쿠하라(朴原、ぼくはら), 보쿠다(朴田、ぼくだ), 보쿠자와(朴澤、ぼくざわ), 보쿠야마(朴山、ぼくやま), 보쿠무라(朴村、ぼくむら), 마쓰가와(松川、まつがわ), 다케야마(竹山、たけやま), 기노시타(木下、きのした), 기모토(木本、きもと), 기야마(木山、きやま), 기무라(木村、きむら), 다카기(高木、たかぎ), 게이린(鷄林、けいりん), 미쓰야마(密山、みつやま), 마쓰이(松井、まつい) |
4 | 최(崔) |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야마카(山佳、やまか), 가야마(佳山、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야마에(山江、やまえ), 오야마(大山、おおやま), 도야마(東山、とうやま), 와야마(和山、わやま), 즈이시로(隋城、ずいしろ), 사이(佐井、さい), 사이모토(崔本、さいもと), 야마우치(山内、やまうち), 쓰야마(津山、つやま) |
5 | 정(鄭) |
지야마(智山、ちやま), 다메카와(爲川、ためかわ),
무카에다(迎田、むかえだ),
오카와(大川、おおかわ),
가와히가시(河東、かわひがし), 미쓰시로(三城、みつしろ),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덴오(奠邑、てんおう), 데이야(鄭家、でいや), 데이무라(鄭村、ていむら), 다케하시(竹橋、たけはし),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
6 | 강(姜) | 신노(神濃、しんのう),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미구모(神雲、かみぐも), 신야마(晉山、しんやま), 오카(岡、おか), 가미야마(神山、かみやま), 간다(神田、かんだ), 도쿠오카(德岡、とくおか), 교모토(姜本、きょうもと) |
7 | 조(趙) | 도요타(豊田、とよた),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조케(趙家、ちょうけ), 미나야스(咸安、みなやす), 다카모토(高本、たかもと), 도요하라(豊原、とよ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하야시가와(林川、はやしかわ) |
8 | 윤(尹) | 히라누마(平沼、ひらぬま), 이토(伊東、いとう), 이하라(伊原、いはら), 시게마쓰(茂松、しげ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
9 | 장(張) | 하리모토(張本、はりもと)[흥덕], 유미나가(弓長、ゆみなが)[인동], 나가타니(長谷、ながたに), 다마야마(玉山、たまやま), 나가야마(長山、ながやま), 하세가와(長谷川、はせがわ), 하리마(張間、はりま), 하리노(張野、はりの) |
10 | 임(林) | 하야시(林、はやし)[비개명] |
11 | 한(韓) |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미모토(箕本、みもと), 아사카와(朝川、あさかわ),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미노하라(箕原、みのはら), 기요모토(淸本、きよもと), 기요야마(淸山、きよ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이노우에(井上、いのうえ) |
12 | 오(吳) | 구레(吳、くれ)[비개명], 구레야마(吳山、くれやま), 구레무라(吳村、くれむら),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구레시로(吳城、くれしろ), 미쓰이(三井、みつい) |
13 | 서(徐) | 다쓰시로(達城、たつしろ), 오시로(大城、おおしろ), 오카와(大川、おおかわ), 오야마(大山、おお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조카와(徐川、じょかわ), 다쓰가와(達川、たつかわ), 조다쓰(徐達、じょたつ), 요시모토(義本、よしもと) |
14 | 신(申) | 히라야마(平山、ひらやま), 히라타(平田、ひらた), 히라무라(平村、ひらむら), 사루모토(申本、さるもと), 다카타(高田、たかだ) |
15 | 권(權) | 안도(安東、あんどう), 겐토(權東、けんとう), 곤도(權藤、ごんどう), 곤야마(權山、ごんやま), 곤모토(權本、ごんもと),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
16 | 황(黃) | 기하라(黃原、きはら), 요시무라(芳村、よしむら), 히야마(檜山、ひやま), 기타(黃田、きた), 기모토(黃本、きもと), 히로타(廣田、ひろた),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히라우미(平海、ひらうみ), 나가미즈(長水、ながみず), 히로가와(廣川、ひろかわ), 마사하라(昌原, まさはら) |
17 | 안(安) | 야스다(安田、やすだ)[82], 야스모토(安本、やすもと), 안도(安藤、あんどう), 다케야스(竹安、たけやす)[83], 야스야마(安山、やすやま), 야스키(安木、やすき), 야스쿠니(安邦、やすくに), 야스하라(安原、やすはら), 아다치(安達、あだち) |
18 | 송(宋) | 노야마(野山、のやま), 무카야마(迎山、むかやま), 쓰보야마(壺山、つぼ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はら), 노다(野田、のだ), 오하라(大原、おおはら), 무네모토(宗本、むねもと), 소무라(宋村、そうむら), 온즈(恩津、おんづ), 야마모토(山本、やまもと), 기야마(木山、木山), 기가와(木川、きかわ), 소모토(宋本、そうもと) |
19 | 전(全) | 에하라(江原、えは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마쓰다(松田、まつだ), 기쿠하라(菊原、きくはら), 젠케(全家、ぜんけ), 야마다(山田、やまだ), 젠모토(全本、ぜんもと), 젠이(全井、ぜんい), 젠시로(全城、ぜんしろ) |
20 | 홍(洪) | 난요(南陽、なんよう), 도요야마(豊山、とよやま), 도쿠야마(德山、とくやま), 히로카와(洪川、ひろかわ), 히로하라(洪原、ひろはら), 도코(唐洪、とうこう), 나가야마(永山、ながやま), 미쓰이(三井、みつい) |
21 | 류(柳) |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야나모토(柳本、やなもと) |
22 | 고(高) | 다카야마(高山、たかやま), 다카시(高志、たかし), 다카시마(高島、た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코(高子、たかこ), 다카다(高田、たかだ), 다카하시(高橋、たかはし), 요코시로(橫城、よこしろ), 도라(度羅、とら) |
23 | 문(文) | 후미이와(文岩、ふみいわ), 후미히라(文平、ふみひら), 후미하라(文原、ふみはら), 후미아키(文明、ふみあき), 후미카와(文川、ふみかわ), 에시로(江城、えしろ), 난페이(南平、なんペい), 후미모토(文本、ふみもと), 후미야마(文山、ふみやま), 후미무라(文村、ふみむら) |
24 | 양(梁) | 야나가와(梁川、やながわ), 요시하라(良原、よしはら), 난바라(南原、なんばら), 야나하라(梁原、やなはら), 야나모토(梁本、やなもと) |
25 | 손(孫) | 오무라(大村、おおむら),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덴니치(天日、てんにち), 마고다(孫田、まごた), 시게야마(茂山、しげやま) |
26 | 배(裵) | 다케모토(武本、たけもと), 호시야마(星山、ほしやま) |
27 | 조(曺) | 마사야마(昌山、まさやま), 나쓰야마(夏山、なつやま), 다치야마(立山、たちやま) |
28 | 백(白) |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시라이시(白石、しらいし), 시로하라(白原、しろはら) |
29 | 유(劉) |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가와니시(河西、かわにし), 에하라(江原、えはら), 시라카와(白川、しらかわ), 노베야스(延安、のべやす) |
30 | 허(許) | 모토시마(許島、もとしま), 모토무라(許村、もとむら), 이시와타(石渡、いしわた),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타(岩田、いわた),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
31 | 남(南) | 미나미(南、みなみ)[비개명] |
32 | 심(沈) | 아오마쓰(靑松、あおまつ), 마쓰모토(松本、まつもと), 아오키(靑木、あおき) |
33 | 노(盧) | 오카무라(岡村、おかむら),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가미모토(神本、かみ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에다(上田、うえだ) |
34 | 정(丁) | 자야마(茶山、ちゃやま), 조토(丁藤、ちょうとう), 마치다(町田、まちだ), 다케시마(武島、たけしま) |
35 | 하(河) |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가와하라(河原、かわはら) |
36 | 곽(郭) | 쓰토야마(苞山、つとやま), 니시우라(西浦、にしうら), 마키노(牧野、まきの), 이와타니(岩谷、いわたに), 니시하라(西原、にしはら) |
37 | 성(成) |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나리타(成田、なりた), 나리야마(成山、なりやま) |
38 | 차(車) | 구루마다(車田、くるまだ), 나가타(永田、ながた), 다카타(高田、たかた), 도도로키(轟、とどろき) |
39 | 주(朱) | 아케모토(朱本、あけもと),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네이노(寧野、ねいの) |
40 | 우(禹) | 니야마(丹山、にやま), 우모리(宇森、うもり) |
41 | 구(具) | 아야시로(綾城、あやしろ), 아야하라(綾原、あやはら), 아야베(綾部、あやべ), 아야모토(綾本、あやもと), 구하라(具原、ぐはら) |
42 | 신(辛) | 가라시마(辛島、からしま), 시게미쓰(重光、しげみつ), 미카와(三川、みかわ) |
43 | 임(任) | 도요카와(豊川、とよかわ) |
44 | 전(田) | 다무라(田村、たむら), 사와다(澤田、さわだ), 다나카(田中、たなか), 타가와(田川、たがわ) |
45 | 민(閔) | 빈하라(閔原、びんはら), 모토시로(本城、もとしろ), 이와무라(岩村、いわむら),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가도후미(門文、かどふみ) |
46 | 유(兪) | 유하라(兪原、ゆは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기젠(杞前、きぜん), 유무라(兪村、ゆむら) |
47 | 유(柳) | 야나기(柳、やなぎ)[비개명], 야나기사와(柳澤、やなぎさわ), 야나기가와(柳川、やなぎがわ), 야나기와라(柳原、やなぎわら) |
48 | 나(羅) |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
49 | 진(陳) | 진나이(陳內、じんない), 진카와(陳川、ちんかわ), 진다(陳田、ちんだ), 미쓰야마(三山、みつ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50 | 지(池) | 이케다(池田、いけだ) |
51 | 엄(嚴) | 이와모토(岩本、いわもと), 나시로(奈城、なしろ) |
52 | 채(蔡) | 사이하라(蔡原、さいはら), 사이카와(蔡川、さいかわ), 히라오카(平岡、ひらおか), 히라마쓰(平松、ひらまつ), 히라모토(平本、ひらもと), 사카와(佐川、さかわ) |
53 | 원(元) | 모토무라(元村、もとむら), 하라모토(原元、はらもと), 하라무라(原村、はらむら), 하라야마(原山、はらやま) |
54 | 천(千) | 지하라(千原、ちはら), 지다(千田、ちだ), 지바(千葉、ちば) |
55 | 방(方) | 가타야마(方山、かたやま) |
56 | 공(孔) | 교쿠하라(曲原、きょくはら), 고무라(孔村、こうむら), 히하라(檜原、ひはら), 마사하라(昌原、まさはら), 고베(孔部、こうべ) |
57 | 강(康) | 야스하라(康原、やすはら), 야스히로(康宏、やすひろ), 야스다(康田、やすだ), 야스나리(康成、やすなり) |
58 | 현(玄) | 겐부(玄武、げんぶ),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
59 | 함(咸) | 나리모토(成本、なりもと), 간네(咸根、かんね), 간하라(咸原、かんはら), 에하라(江原、えはら), 가와모토(河本、かわもと),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
60 | 변(卞) | 벤다(卞田、べんだ), 구사타니(草溪、くさたに),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
61 | 염(廉) | 미즈하라(瑞原、みずはら), 우메하라(梅原、うまはら), 다치하라(立原、たち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
62 | 양(楊) | 야나기(楊、やなぎ)[비개명], 기요미즈(淸水、きよみず), 기요하라(淸原、きよはら), 와다(和田、わだ), 야나기하라(楊原、やなぎはら) |
63 | 변(邊) | 하라베(原邊、はらべ), 하라카와(原川、はらかわ) |
64 | 여(呂) | 미야하라(宮原、みやはら), 미야모토(宮本、みやもと), 로이(呂井、ろい) |
65 | 추(秋) | 아키야마(秋山、あきやま), 아키타(秋田、あきた), 아키히타(秋常、あきひた) |
66 | 노(魯) | 에무라(江村、えむら), 에모토(江本、えもと), 하나무라(華村、はなむら) |
67 | 도(都) | 미야코(都、みやこ)[비개명], 미야코다(都田、みやこだ), 쓰모토(都本、つもと), 미야코가와(都川、みやこがわ) |
68 | 소(蘇) | 구사카(草禾、くさか), 이소(伊蘇、いそ), 와다(和田、わだ), 아키타(秋田、あきた) |
69 | 신(愼) | 마야마(眞山、まやま), 마하라(眞原、まはら) |
70 | 석(石) | 이시하라(石原、いしはら), 이시카와(石川、いしかわ), 이시무라(石村、いしむら) |
71 | 선(宣) | 요시카와(宣川、よしかわ), 나카하라(中原、なかはら) |
72 | 설(薛) | 다마가와(玉川、たまがわ),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히로모토(弘本、ひろもと), 오야마(大山、おおやま) |
73 | 마(馬) | 기가와(木川、きがわ), 아리마(有馬、ありま), 우마노(馬野、うまの), 바바(馬場、ばば) |
74 | 길(吉) | 요시모토(吉本、よしもと), 요시다(吉田,よしだ), 데라사이(寺再、てらさい), 엔요(延陽、えんよう) |
75 | 주(周) | 슈모토(周本、しゅうもと), 도쿠하라(德原、とくはら) |
76 | 연(延) | 노부하라(延原、のぶはら), 나카야마(中山、なかやま), 나카모토(中本、なかもと), 노베야마(延山、のべやま) |
77 | 방(房) | 후사하라(房原、ふさはら) |
78 | 위(魏) | 나가모토(長本、ながもと) |
79 | 표(表) | 오모다(表田、おもだ), 야마자키(山崎、やまざき), 신카와(新川、しんかわ) |
80 | 명(明) | 아카시(明石、あかし), 아케가와(明川、あけがわ), 아카치(明地、あかち), 다치모리(日月、たちもり) |
81 | 기(奇) | 이와사키(岩崎、いわさき) |
82 | 반(潘) | 요네다(米田、よねだ), 가와무라(河村、かわむら) |
83 | 라(羅) | 도미타(富田、とみた), 우에무라(上村、うえむら), 마쓰시마(松島、まつしま) |
84 | 왕(王) | 오모토(王本、おうもと), 오지마(王島、おうじま), 마쓰다(松田、まつだ), 마쓰시로(松城、まつしろ), 오야마(王山、おうやま),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85 | 금(琴) | 고토가와(琴川、ことがわ), 가네다(金田、かねだ), 이마다(今田、いまだ) |
86 | 옥(玉) | 오하라(大原、おおはら) |
87 | 육(陸) | 구다시로(管城、くだしろ), 구가미(陸海、くがみ) |
88 | 인(印) | 시루시마(印島、しるしま), 다카키(高木、たかき), 다카무라(高村、たかむら) |
89 | 맹(孟) | 니하라(新原、にいはら), 마쓰오카(松岡、まつおか),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
90 | 제(諸) | 에가와(穎川、えがわ), 우루시바라(漆原、うるしばら) |
91 | 모(牟) | 무타(牟田、むた), 다니모토(谷本、たにもと) |
92 | 장(蔣) | 기바야마(牙山、きばやま), 마쓰야마(松山、まつやま), 구니모토(國元、くにもと) |
93 | 남궁(南宮) | 난구(南宮、なんぐう)[비개명] |
94 | 탁(卓) | 다카야마(卓山、たかやま), 미쓰야마(光山、みつやま) |
95 | 국(鞠) | 아오야마(靑山、あおやま), 아오타(靑田、あおた) |
96 | 여(余) | 요시카와(宜川、よしかわ), 도미모토(富本、とみもと) |
97 | 진(秦) | 하타(秦)[비개명], 난바라(南原、なんばら), 마쓰바라(松原、まつばら), 오쿠라(大倉、おおくら), 도요타(豊田、とよた) |
98 | 어(魚) | 우오카와(魚川、うおかわ), 우오니시(魚西、うおにし), 니시카와(西川、にしかわ), 우오누마(魚沼、うおぬま) |
99 | 은(殷) | 고슈(幸州、こうしゅう), 마쓰에(松江、まつえ), 에모토(江本、えもと) |
100 | 편(片) | 가타야마(片山、かたやま), 가타모토(片本、かたもと) |
8.3. 저항 사례
한편 일부 조선인들은 창씨개명에 아주 심한 반감을 느껴서 얌전히 창씨개명을 당하는 대신 DQN 네임 저리가라 할 정도로 온갖 개드립, 비웃음, 풍자가 섞인 개명을 하면서 언어유희와 역관광을 꾀했다.- 이름이 '전병하(田炳夏)'인 한 농부는 자신의 성에 농사를 의미하는 농(農)을 붙여 '전농병하(田農炳夏)'라고 신고했다가 경찰서로 끌려갔다. 평범해 보이지만 이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덴노 헤이카. 즉,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천황 폐하와 비슷해지는 것이다. 정확하게는 天皇陛下는 てんのうへいか(Tennō Heika)이고 田農炳夏는 でんのうへいか(Dennō Heika)로 청음과 탁음의 차이가 있지만 일본식 말장난인 고로아와세에서는 청탁음이 무시되므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는 창씨명이었다.
- 어떤 고등학생은 창씨개명 강요에 반항하는 뜻에서 쇼와 덴노의 황태자 책봉 이전 칭호와 이름을 합친 '미치노미야 히로히토'(迪宮裕仁)라고 개명을 하려 했다가 역시 경찰서에 끌려갔다. 우연치 않게도 쇼와 덴노가 황태자 책봉 전에 쓴 어칭호 미치노미야가 조선어로 미친놈이야와 비슷하여 미친놈이야 히로히토라고 하여 히로히토 천황을 비아냥거리는 뜻도 가질 수 있다.[92]
- 조선총독부로 '덴노조쿠 미나고로시로(天皇族 皆殺郞, 천황족개살랑)', '쇼와 보타로(昭和 亡太郞, 소화망태랑)'라는 이름으로 개명해도 좋냐는 엽서가 날아온 적도 있다고 한다. 전자는 천황 집안 다 죽인다는 뜻의 天皇族 皆殺에 인명에 쓰이는 郞(로)를 붙인 것이고 후자는 쇼와 망해라라는 뜻인 昭和亡에다가 장남의 이름에 쓰이는 太郞( 타로)를 붙인 것이다.
- 비슷한 경우로, 어떤 사람들은 창씨개명을 실시한 총독의 이름이 ' 미나미 지로(南次郎)'인 것을 보고 '내가 총독보다 형님이구만'이라는 뜻으로 '미나미 타로'(南太郞)로 창씨개명했다. 물론 처음엔 넘겼다가 뒤늦게 알아차린 총독부는 퇴짜를 놓는다. 일본에서 太郞(타로)와 次郞(지로)는 각각 장남과 차남에게 붙이는 이름이다.
- 당시 유명한 만담가인 신불출은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라고 지었는데 이는 畜生을 파자한 것으로 세로로 써서 읽으면 딱 축생이다.[93] 한국어에서는 그냥 짐승이라는 뜻이지만, 일본어에서는 " 개자식, 개 같다" 등의 욕으로 사용한다. 당시에는 세로쓰기가 더 흔했으므로 이에 맞춘 고품격 개드립이었고 이를 늦게 알아차린 총독부에선 역시 퇴짜를 놓았다. 드라마 《 야인시대》에서도 신불출이 개그 소재로 창씨개명을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로 이름을 정한 일화를 보여주기도 했다. (34초부터) 공연 후 미와 경부가 찾아온다.
- 역시 신불출의 이야기. 첫 번째 개명인 구로다 규이치가 퇴짜 맞은 후에 2번째로 이름을 江原野原(강원야원)이라고 지었는데 이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에하라 노하라. 즉 추임새인 '에헤라 놓아라'와 발음이 비슷하게 만든 것이며 이 역시 일본을 디스하는 의미다.
- 시인 이영철은 창씨개명의 성을 만요가나 식으로 가나다(加那多)로 지었다. 일부러 한국어의 가나다 어순을 내포하여 지은 것으로 보인다.
- 한술 더 떠서 한 마을 전체가 짜고 마을 사람 전원이 같은 성과 같은 이름으로 통일해 버리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성과 이름을 통일시켜 버리면 조선총독부 입장에서는 조세 징수나 행정 절차상 귀찮은 일이 많아지므로 일부러 의도했다고도 볼 수 있다.
- 어떤 사람은 한 가지 한자로 통일하거나 뜻은 달라도 발음이 같은 한자로 개명하여 총독부를 조롱한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高高高高(4번이나 높은 사람) 라던지.
- 전술한 항일 또는 풍자의 목적으로 지은 이름 외에도 일부러 성의 없이 대충 지을 의도로 청산백수(靑山白水, 아오야마 시라미즈) 내지는 산천초목(山川草木, 야마카와 구사키)이라고 지은 사례도 있었다.
- 경상남도 양산군의 금융조합 직원 엄이섭(嚴珥燮)은 자신의 엄이섭(嚴珥燮)이란 이름 끝에 야(也)자만 붙여서 "엄이섭야"(嚴珥燮也)라는 이름으로[94] 개명 신고를 하여 모든 가족의 성 2글자가 "엄이"(嚴珥)[95]로 변하게 되었는데 이것을 통해 창씨개명을 풍자·조롱하였다.
9. 창씨개명 사례 목록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 반드시 모두 친일반민족행위자인 것은 아니다. 1941년 기준으로 조선인의 81.5%가 창씨개명을 했는데 그렇다면 절대 다수의 조선인이 친일파란 뜻이 된다. 당시 거부자에 대한 엄청난 불이익 때문에 학교 진학 및 취직 등 현실상 어쩔 수 없이 했던 사람이 대다수이며 당시 미취학 아동이라 사실상 저항할 수 없었던 입장의 사람[97]도 상당수다. 항일 독립운동가 중에도 창씨명을 가진 사람은 많다. 대개가 일본인이나 친일파로 위장하기 위해 창씨개명한 경우이며, 위에서 보듯이 창씨개명을 지시한 조선총독부와 일본 정부를 조롱하기 위해 일부러 욕설로 창씨명을 만들기도 했다.반대로 창씨개명의 자발성을 홍보하기 위해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중에도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경우 역시 종종 있다. 대표적으로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제2차 세계 대전의 전범으로 기소되어 처형된 홍사익이나 일본 중의원 정치인과 정치깡패로 활동했던 박춘금 등이 있다.
아래의 목록에는 8.15 광복 이후에 활동을 한 사람도 있는데, 대부분은 재일 한국인으로 일본에서 나고 자란 탓에 현실적인 이유로 일본 귀화를 선택해야했던 경우에 속한다. 당연히도 이는 타국 귀화자들의 통상적인 개명과 같은 경우이므로 비난의 여지가 없다. 물론 일본의 우경화에 동조하는 신친일파의 사례가 없진 않으나, 모든 일본 귀화자가 이런 경우라고 보는 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일 뿐이다.
인물 성씨 기준으로 가나다순 정렬. 창씨개명 원리는 옆에 쌍점(:)을 붙이고 적으며 그 밖의 부연 설명은 창씨개명 원리 설명 뒤에 추가하기 바란다.
이름 표기 시 표준 외래어 표기법을 준수하여 표기하며 일제강점기 이후 출생한 현대 인물들은 이곳에 작성하지 말 것.
개명된 이름은 모두 리다이렉트 처리 바람.
===# ㄱ #===
- 갈홍기 - 가쓰라기 히로키(葛城弘基): 갈/홍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강경식 - 오야마 가즈히코(大山壽良;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주라(大山壽良; 이름 부분을 음독)
- 강관겸 - 아리타 쇼켄(有田彰顯)
- 강간난 - 미야마 사이라이(三山再來)
- 강낙원 - 미쓰이 라쿠엔(三井洛遠): '낙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대극 - 다마노 다이쿄쿠(玉野大極): '대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대련 - 이하라 가오루(渭原馨)
- 강덕식 - 도쿠오카 도쿠우에(德岡德植)
- 강도희 - 오야마 미치히로(大山道熙)
- 강동모 - 히사카와 마히라(久川眞平; 이름 부분을 훈독), 히사카와 신페이(久川眞平; 이름 부분을 음독)
- 강동진 - 오야마 도친(大山東鎭): '동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덕상 - 시나노 사토루(信濃智)
- 강덕재 - 다니야마 미키오(谷山樹雄)
- 강두안 - 가미노 도시오(神農敏男)
- 강만길 - 교다 만키치(姜田萬吉): 강/만길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강면욱 - 신노 다케시로(新農武四郎)
- 강번 - 도요타 한(豊田藩): '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보형 - 도리야마 가오루(鳥山馨): ‘형’(馨)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강봉원 - 이가와 호엔(渭川奉遠)
- 강상규 - 오야마 요시후미(大山祥奎;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쇼케이(大山祥奎;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야마 다카미(大山隆實)
- 강상수 - 이가와 소슈(渭川相秀)
- 강석애 - 가즈나가 미요코(和永美代子)
- 강석영 - 히라야마 요시나가(平山義永;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기에이(平山義永;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선이 - 히로타 센이(廣田先伊)
- 강성근 - 오카모토 기요네(岡本聖根; 이름 부분을 훈독), 오카모토 세이콘(岡本聖根;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성문 - 마쓰오카 기요후미(松岡聖文;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오카 세이분(松岡聖文;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성인 - 하나다 요시키치(花田芳吉)
- 강수성 - 오가와 고지(小川浩二)
- 강숙영 - 가미카와 요시코(神川淑子)
- 강신애 - 간다 마사요(神田雅代)
- 강신혁 - 도모야마 신카쿠(友山信赫)
- 강양원 - 이소타케 요겐(磯竹陽元): ‘양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열수 - 가쿄 에쓰히데(華姜悅秀)
- 강영옥 - 에가와 나가타마(江川永玉; 이름 부분을 훈독), 에가와 에이교쿠(江川永玉;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영준 - 교모토 나가토시(姜本永俊; 이름 부분을 훈독), 교모토 에이슌(姜本永俊; 이름 부분을 음독): 강/영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강영철[98] - 오바타 미노루(小畑實)
- 강영후 - 이와모토 나가아쓰(岩本永厚;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모토 에이코(岩本永厚;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옥란 - 마쓰다 아키에(松田明惠)
- 강요신 - 마가에시 다카오미(馬返堯臣)
- 강용옥 - 나가시마 노조무(永島望)
- 강이황 - 오카 도시아키(岡利晃): 본인의 조선식 성명에서 한자 표기만 일본식으로 읽을 수 있도록 개명하였다.
- 강재숙 - 오야마 아리토시(大山在淑;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자이슈쿠(大山在淑; 이름 부분을 음독): ‘재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재호 - 혼고 기미야스(本鄕公康)
- 강정출 - 도모야마 데이슈쓰(友山貞出)
- 강종근 - 마쓰모토 소콘(松本琮根)
- 강주환 - 신노 가네아키(新農周煥; 이름 부분을 훈독), 신노 슈칸(新農周煥; 이름 부분을 음독)
- 강중인 - 도쿠다 나카히토(德田仲仁; 이름 부분을 훈독), 도쿠다 주진(德田仲仁; 이름 부분을 음독): '중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천룡 - 오카야마 미치오(岡山道雄)
- 강철모 - 오야마 데쓰보(大山哲模): '철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태봉 - 니시무라 다이호(西村太奉): ‘태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태하 - 노다 다이카(農田太河): '태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태호 - 교모토 히데지로(姜本秀次郎)
- 강호원 - 다마오카 고엔(玉崗鎬遠): ‘호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홍식 - 이시이 데루오(石井輝男)
- 강휘봉 - 다마가와 이호(玉川彙鳳): ‘휘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강흥수 - 오카다 히로지(岡田廣治)
- 경천중 - 우에하라 가와시게(上原川重; 이름 부분을 훈독), 우에하라 센주(上原川重; 이름 부분을 음독)
- 계경찬 - 게이탄 게이산(桂丹景燦): 성씨에 丹을 넣어 창씨하고, '경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계정식 - 가쓰라 사다타네(桂貞植; 이름 부분을 훈독), 가쓰라 데쇼쿠(桂貞植; 이름 부분을 음독): '정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계창업 - 가쓰라 쇼교(桂昌嶪)
- 계철순 - 가쓰라 데쓰오(桂哲雄): '철'(哲)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고강순 - 다카야마 고준(高山江順)
- 고계부 - 야마다 기후(山田季婦): ‘계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광만 - 다카미네 게이미쓰(高峰啓光)
- 고긍명 - 다카 노부아키(高亘明;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 고메이(高亘明; 이름 부분을 음독)
- 고담룡 - 다카다 유세이(高田湧淸)
- 고두평 - 다카야마 히로마사(高山博雅;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야마 하쿠가(高山博雅; 이름 부분을 음독)
- 고병간 - 다카히라 미키야스(高平幹康;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히라 간코(高平幹康; 이름 부분을 음독): '간'(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병하 - 다카시마 헤이카(高島丙夏)
- 고봉환 - 다카오카 호칸(高岡鳳煥)
- 고시현 - 다카다 고지(高田幸治)
- 고시형 - 다카야마 이사오(高山勳)
- 고영주 - 다카다 요시코(高田吉子)
- 고운덕 - 다카이 구모노리(高井雲德;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이 운토쿠(高井雲德; 이름 부분을 음독)
- 고웅주 - 다카가키 유추(高垣雄柱): '웅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원훈 - 다카모토 군(高元勳): 이름 전체의 한자는 그대로 유지했으나 성씨를 고원, 이름을 훈으로 바꾸어 개명하였다.
- 고은 - 다카바야시 도라스케(高林虎助): 성씨인 고(高)에 림(林)을 붙여 창씨.
- 고일청 - 다카미네 가즈키요(高峰一淸;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미네 잇세이(高峰一淸; 이름 부분을 음독): 고/일청으로 나눈 뒤 성씨에 峰를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은 '일청'을 그대로 사용.
- 고재호 - 나가사와 아리타카(長澤在鎬): '재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고종익 - 다카시마 무네마스(高島宗益) / 다카야마 무네마스(高山宗益): '종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현숙 - 소오 스미코(宋尾澄子)
- 고현정 - 다카야마 히데마사(高山秀政)
- 고홍석 - 다카야마 고샤쿠(高山洪錫):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홍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고흥렬 - 다카모토 겐이치(高本健一)
- 고희준 - 다카시마 하지메(高島基;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시마 기(高島基; 이름 부분을 음독)
- 공무길 - 고베 유키미(孔部志美)
- 공용석 - 나카하라 요샤쿠(中原庸錫)
- 공태숙 - 오카야마 온코(丘山恩子)
- 곽기종 - 니시하라 유이치(西原祐一)
- 곽석찬 - 이와타니 게이스케(岩谷啓助)
- 곽인호 - 야스모토 린코(保元麟浩): '인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곽정근 - 야마시로 마사오(山城正雄)
- 곽종원 - 이와타니 가네모토(岩谷鐘元;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타니 쇼겐(岩谷鐘元; 이름 부분을 음독): '종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곽진근 - 마키노 미치오(牧野道雄)
- 곽태진 - 쓰토야마 다이친(苞山泰珍): 본관인 현풍(玄風)의 옛 지명인 포산(苞山)으로 창씨하고, '태진'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구근회 - 아야시로 지로(綾城次郞) / 아야시로 긴카이(綾城謹會)
- 구동욱 - 아야스 히데노부(綾洲秀信; 이름 부분을 훈독), 아야스 슈신(綾洲秀信; 이름 부분을 음독)
- 구연직 - 구미치 노부오(具道信夫; 성씨 일부를 훈독), 구도 노부오(具道信夫; 성씨 일부를 음독)
- 구연호 - 마쓰모토 후미히로(松本文弘)
- 구용서 - 구하라 이치로(具原一郞): 구에 原을 붙여 창씨했다.
- 구인회 - 구하라 린카이(具原麟會)
- 구자경[99] - 다케야마 기요시(竹山淸)
- 구자성 - 구시마 지세이(具島滋性)
- 구자옥 - 구쓰이에 시게타마(具家滋玉; 이름 부분을 훈독), 구쓰이에 지교쿠(具家滋玉;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家'를 붙여 창씨하고, '자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글자 그대로 구씨 집안의 자옥이라는 의미.
- 구자훈 - 구하라 시게히코(具原茂彦)
- 구현서 - 시로모토 겐쇼(城本賢書): ‘현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국기표 - 기쿠모토 기효(鞠本基杓)
- 국중일 - 기쿠타 시게요시(菊田重吉; 이름 부분을 훈독), 기쿠타 주키치(菊田重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국채준 - 아키야마 사이준(秋山採準): ‘채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각 - 사와다 가쿠(澤田慤)
- 권갑춘 - 야스하라 히데하루(安原秀春;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하라 슈슌(安原秀春; 이름 부분을 음독): 본명에서 마지막 한자인 ’춘‘(春)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길용 - 안도 요시타쓰(安東吉龍; 이름 부분을 훈독), 안도 기치류(安東吉龍; 이름 부분을 음독)
- 권목용 - 곤도 보쿠류(權藤穆龍): 성씨에 藤을 넣어 창씨하고, '목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범락 - 고모토 한라쿠(幸元範洛)
- 권병석 - 구니모토 헤이샤쿠(國本炳錫)
- 권병선 - 야스모토 헤이젠(安本柄善): ‘병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상로 - 안도 쇼로(安東相老): 본관인 ' 안동'을 따서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상로'를 그대로 사용.
- 권상학 - 야스나가 소카쿠(安永相鶴) / 야스미즈 소카쿠(安水相鶴): '상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영목 - 안도 야스마키(安東寧牧; 이름 부분을 훈독), 안도 네이보쿠(安東寧牧; 이름 부분을 음독)
- 권영배 - 우타지 유조(歌路勇三)
- 권영세 - 야스하라 기요사다(安原淸禎;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하라 세이테이(安原淸禎; 이름 부분을 음독)
- 권오준 - 도켄 세이이쿠(東權正昱)
- 권오직 - 마쓰나가 고쇼쿠(松永五稷): '오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오직[100] - 고다 고쇼쿠(幸田五稷)
- 권원수 - 안도 겐슈(安東元洙)
- 권원호 - 야스다 모토히로(安田元浩;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다 겐코(安田元浩; 이름 부분을 음독)
- 권윤옥 - 안도 인교쿠(安東允玉)
- 권이수 - 안도 리슈(安東利洙)
- 권이원 - 나가노 니겐(永野二元): '이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이창 - 오카다 가네마사(岡田鼎昌; 이름 부분을 훈독), 오카다 데이쇼(岡田鼎昌; 이름 부분을 음독)
- 권일 - 곤도 요시로(權藤嘉郎)
- 권재우 - 가야마 다카오(香山隆雄)
- 권중돈 - 곤다 나카토시(權田仲敦; 이름 부분을 훈독), 곤다 주톤(權田仲敦; 이름 부분을 음독): 권/중돈으로 분리하여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권중석 - 이시카와 시게스즈(石川重錫; 이름 부분을 훈독), 이시카와 주샤쿠(石川重錫; 이름 부분을 음독): '중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중수 - 오야스 시게미쓰(太安重光; 성씨 부분을 훈독), 다이안 시게미쓰(太安重光; 성씨 부분을 음독): '중'(重)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권중식 - 야마모토 시게오(山本重夫) / 야마모토 쇼스케(山本昇佑): 중(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중환 - 겐토 히로시(權堂弘): 성씨 앞에 '堂'을 넣어 창씨하였다.
- 권쾌복 - 요시다 가이후쿠(吉田快福): '쾌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권태선 - 마쓰모토 야스노리(松本泰宣;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모토 다이센(松本泰宣; 이름 부분을 음독)
- 권태술 - 안도 마사스케(安東正祐; 이름 부분을 훈독), 안도 세이유(安東正祐; 이름 부분을 음독)
- 권혁민 - 안도 요시쿠라(安東義倉; 이름 부분을 훈독), 안도 기소(安東義倉; 이름 부분을 음독)
- 권혁수 - 곤야마 가쿠주(權山赫壽): 권/혁수로 분리한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권혁조 - 곤도 데쓰로(權藤哲郎)
- 금수창 - 마쓰다 히데마사(松田秀昌;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다 슈쇼(松田秀昌; 이름 부분을 음독)
- 금홍식 - 마쓰다 나가토시(松田永俊;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다 에이슌(松田永俊; 이름 부분을 음독)
- 기영도[101] - 도쿠야마 히데요(德山英世): ‘영’(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기지석 - 고다 지샤쿠(幸田智錫)
- 길창덕 - 요시모토 마사아키(吉本昌悳;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모토 쇼토쿠(吉本昌悳;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 부분은 '창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길호순 - 요시모토 고준(吉本浩順): 길/호순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갑수 - 가네미야 마코토(金宮允)
- 김갑순 - 가네이 고준(金井甲淳): 성씨에 '井'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 부분은 '갑순'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김건배 - 스즈카와 노부히로(鈴川展弘)
- 김건호 - 가네우미 다케타카(金海健鎬;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겐코(金海健鎬; 이름 부분을 음독): 김/건호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걸명 - 가네나가 도시아이(金永俊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나가 준카이(金永俊會;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관 - 가나자와 다케이치로(金澤竹一郎)
- 김관수 - 기시모토 간(岸本寬): 관(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관식 - 가네모토 간쇼쿠(金本觀植): '관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관현 - 가네미쓰 후쿠오미(金光副臣)
- 김경남 - 가네모토 다카오(金本敬男)
- 김경동 - 가네다 게이토(金田敬東)
- 김경림 - 요시하라 도시요시(吉原敏吉;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하라 빈키치(吉原敏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배 - 가네모토 요시마스(金本慶培;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게이바이(金本慶培;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섭[102] - 가네모토 게이쇼(金本慶燮): 김/경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경섭[103] - 가네시로 게이쇼(金城景燮)
- 김경수 - 가네오카 도미모토(金岡富源;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오카 후겐(金岡富源;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승 - 가네시로 게이쇼(金城景承): 김/경승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경운 - 가네모리 가게구모(金森景雲;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리 게이운(金森景雲;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경재[104] - 가네자와 히데오(金澤秀雄)
- 김경주 - 가네야마 게이주(金山敬注): 김/경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경진 - 가네코 노리미키(金子典幹) / 가네코 게이친(金子慶鎭): 김/경진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子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고운 - 가네모토 미쓰히로(金本光弘)
- 김광국 - 가나자와 미쓰쿠니(金澤光國;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자와 고코쿠(金澤光國;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광섭 - 가네보시 고쇼(金星珖燮)
- 김괴세 - 가네야마 기세(金山槐世): 김/괴세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굉가 - 가나자와 히로요시(金澤宏佳;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자와 고카(金澤宏佳;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교성 - 가네모토 미치나리(金本敎成;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교세이(金本敎成;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귀만 - 가나자와 다카카즈(金澤貴萬)
- 김귀성 - 가네야마 세이타로(金山成太郞)
- 김규년 - 가와모토 구니모토(川本國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와모토 고쿠겐(川本國元;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규석 - 가네야마 게이세키(金山圭奭): 김/규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규옥 - 가네다 후미타마(金田奎玉;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게이교쿠(金田奎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규환 - 가나가와 후미테루(金川奎煥;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가와 게이칸(金川奎煥;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근배 - 가네우미 곤바이(金海根培): '근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근영 - 가네모토 곤에이(金本根英)
- 김근익 - 가네오카 시게아키(金岡茂明)
- 김금동 - 가네시마 이마아쓰(金島今同;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시마 곤도(金島今同;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금련 - 가네모토 미사코(金元美沙子)
- 김금암 - 가네하라 이마이와(金原今岩;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하라 곤간(金原今岩; 이름 부분을 음독)
- 김기수[105] - 가네다 모토히데(金田基秀;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기슈(金田基秀; 이름 부분을 음독): 김/기수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기수[106] - 가나자와 기슈(金澤基洙)
- 김기정 - 다카스 데이이치(高洲定一)
- 김기진 - 가네무라 야미네(金村八峯):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팔봉'을 이름으로 사용. 호, 필명을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기태 - 가네자와 데루마사(金澤輝昌)
- 김기택 - 미쓰토미 센이치(光富仙一)
- 김기홍 - 가나가와 기코(金川基鴻): 김/기홍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길준 - 가네우미 요시토시(金海吉俊;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기치슌(金海吉俊;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낙순 - 가네다 라쿠준(金田洛淳): 김/낙순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낙헌 - 가네도쿠 사카노리(金德榮憲;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도쿠 에이켄(金德榮憲;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남규 - 가네야마 난케이(金山南奎)
- 김남섭 - 가네무라 난쇼(金村南燮)
- 김달호 - 가네바시 다케시(金橋健;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바시 겐(金橋健;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대봉 - 가네모토 다이호(金本大奉)
- 김대중 - 도요타 다이추(豊田大中): 김해 김씨인 데다 흔한 김씨들의 창씨 이름과는 다른 ' 도요타'를 사용한 것이 다소 특이하다. 곡창지대인 전라도의 특성을 따서 창씨했다는 얘기가 퍼져있었으나, 사실과 다르다. 도요타로 창씨한 정확한 이유는 불명이다.
- 김덕만 - 가네시로 노야(金城野谷)
- 김덕필 - 가네오카 도쿠이치(金岡德一)
- 김도인 - 가네하라 미치히토(金原道仁;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하라 도지(金原道仁;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돈희 - 가네에다 도오루(金枝亨)
- 김동기 - 가네시로 도키(金城東起)
- 김동락 - 가네우미 도라쿠(金海銅洛)
- 김동린 - 기쿠시 도린(菊史東麟)
- 김동만 - 미쓰모토 도완(三本東灣)
- 김동선 - 마쓰오카 요시아키(松岡義明)
- 김동원 - 가네오카 히가시모토(金岡東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오카 도겐(金岡東元; 이름 부분을 음독): 김/동원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윤 - 가네모토 도준(金本東潤)
- 김동인 - 곤도 후미히토(金東文仁): 김동/인으로 분리하여 '김동'으로 창씨한 다음, '인' 앞에는 문학을 뜻하는 文을 넣었다. 다만, 이에 대해서는 한자는 같지만 金이 빠진 東文仁이라는 기록도 발견되기 때문에 곤도가 아니라 히가시(東), 혹은 가네히가시(金東)라고 읽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 김동일 - 가네모토 도이치(金本東一)
- 김동진 - 가네모토 도신(金本東進): 김/동진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하 - 가네모리 다케오(金森武雄): 성씨는 金 뒤에 森을 넣어서 창씨했다.
- 김동현 - 가네야 도겐(金谷東炫): '동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동화 - 가네가와 도카(金河東華): 김/동화로 나눈 뒤 성씨에 河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동환 - 시로야마 아오키(白山靑樹; 이름 부분을 훈독), 시로야마 세이주(白山靑樹;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동회 - 가네하라 안도(金原安東)
- 김동훈 - 가네하라 구니미쓰(金原邦光)
- 김두섭 - 가네우미 마스아키(金海斗燮;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도쇼(金海斗燮;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두일 - 히라카와 도이치(平川斗一): '두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정 - 가네코 도사다(金子斗禎):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고, '두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찬 - 가메오카 도산(龜岡斗贊): '두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하 - 가네야마 도미카와(金山富河;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후카(金山富河; 이름 부분을 음독): '하'(河)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두환 - 가네시로 도칸(金城斗煥)
- 김두희 - 가네타마 요시오(金玉吉男)
- 김득용 - 긴바 무네노리(金馬宗範) / 곤 다이스케(金大輔) / 곤 다이스케(金大補)
- 김득중 - 가네무라 미에코(金村美惠子)
- 김득천 - 가네모토 도쿠텐(金源得天)
- 김만암 - 가네미쓰 반간(金光萬岩): 김/만암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만열 - 가네무라 만레쓰(金村萬烈)
- 김매채 - 가네야마 마이사이(金山賣采): 김/매채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명기[107] - 도요카와 아키오(豊川明雄): ‘명’(明)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명돌 - 가네시로 노리이시(金城命乭;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시로 메이세키(金城命乭; 이름 부분을 음독 1), 가네시로 메이토루(金城命乭; 이름 부분을 음독 2)
- 김명연[108] - 가네하라 아키후치(金原明淵;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하라 메이엔(金原明淵; 이름 부분을 음독): 김/명연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명윤 - 가네무라 에이이치(金村榮一)
- 김명제 - 가네시로 아키스미(金城明濟;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시로 메이사이(金城明濟;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명준 - 가네다 아키라(金田明): '명'(明)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명화[109] - 시게무라 요시아키(重村吉昭)
- 김무근 - 야마모토 다카시(山本隆司)
- 김무득 - 가네오카 보토쿠(金崗戊得) / 가네오카 시게오(金崗繁雄)
- 김묵 - 우미하라 메이테쓰(海原明哲)
- 김문원 - 이와타 후미모토(岩田文元;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타 분겐(岩田文元;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문집 - 오에 류노스케(大江龍之助): 대구에서 나서 일본 에도에서 공부하고 서울 용산구에 살았다는 뜻을 담아 창씨했다.[110]
- 김방수 - 가네미쓰 나리쓰네(金光成恒;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세이코(金光成恒;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백일 - 가네자와 도시미나미(金澤俊南;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자와 슌난(金澤俊南;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범용 - 가네모토 다다타쓰(金本凡龍;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본류(金本凡龍;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범천 - 가네모토 노리타카(金本範天;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한텐(金本範天;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범희 - 가나타니 노리히로(金谷範熙; 성씨 부분 일부를 훈독 1,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타니 한키(金谷範熙; 성씨 부분 일부를 훈독 1, 이름 부분을 음독), 가나야 노리히로(金谷範熙; 성씨 부분 일부를 훈독 2,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야 한키(金谷範熙; 성씨 부분 일부를 훈독 2, 이름 부분을 음독)
- 김법룡 - 가가와 도카(香川東華) / 가네이 호류(金井法龍): '법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병남 - 가네마쓰 헤이난(金松丙南): 김/병남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松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병수 - 가네코 히데오(金子英雄)
- 김병준[111] - 가네무라 겐이치(金村憲一)
- 김병준[112] - 야스야마 헤이슌(安山秉俊)
- 김병진 - 구로사와 다로(玄澤太郞)
- 김병욱 - 나가타 다네히데(永田種秀)
- 김병일 - 야스모토 가즈오(安本一雄)
- 김병제 - 가네오카 헤이사이(金岡秉濟): '병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병진 - 구로사와 다로(玄澤太郞)
- 김병채 - 가네모토 젠이치로(金本善一郞)
- 김병태 - 가네무라 야스오(金村泰男): '태'(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병화[113] - 긴스 모리요시(金洲守誼)
- 김병희 - 가네다 마사오(金田正夫)
- 김보영 - 가네코 마사에(金子雅枝)
- 김복산 - 히로카와 후쿠야마(廣川福山)
- 김복준 - 도요카와 후쿠슌(豊川福濬)
- 김봉녀 - 가네다 호메(金田鳳女) / 다마무라 호메(玉村鳳女)
- 김봉두[114] - 가네다 호지(金田奉次): ‘봉’(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봉렬 - 가네무라 호레쓰(金村鳳烈)
- 김봉일 - 미야모토 호이치(宮本鳳一)
- 김봉학 - 마쓰오카 히데오(松岡秀雄)
- 김사연 - 곤 시엔(金思演)
- 김삼규 - 시미즈 기요요시(淸水淸吉; 이름 부분을 훈독), 시미즈 세이키치(淸水淸吉; 이름 부분을 음독) / 시미즈 기타로(淸水畿太郞)
- 김삼만[115] - 마쓰무라 산반(松村三萬): ‘삼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삼천 - 가네무라 산텐(金村三天)
- 김상렬 - 가네우미 소레쓰(金海相烈): 김/상렬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상만 - 쓰키시로 겐신(月城健進)
- 김상윤 - 에하라 쇼준(江原尙潤): '상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상준 - 가나가와 아이토시(金川相俊;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가와 소슌(金川相俊; 이름 부분을 음독): 김/상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상태 - 아오야마 히데아키(靑山秀章; 이름 부분을 훈독), 아오야마 슈쇼(靑山秀章;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상형 - 가네코 소쿄(金子相亨): 김/상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상회 - 도요하라 이나오(豊原以尙): '상'(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생려 - 가네야마 이쿠요시(金山生麗;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세이레이(金山生麗; 이름 부분을 음독): 김/생려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석범 - 가네야마 아키라(金山照): 金에 山을 넣어 가네야마(金山)로 창씨하였다.
- 김석원 - 가네야마 샤쿠겐(金山錫源): 김/석원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석태 - 가미바야시 마코토(神林誠)
- 김선비 - 가네무라 요시에(金村佳枝)
- 김선웅 - 가나타니 요시오(金谷善雄; 성씨 부분을 훈독 1), 가나야 요시오(金谷善雄; 성씨 부분을 훈독 2)
- 김선익 - 가이가네 류운(海金龍雲)
- 김선태 - 가네자와 젠타(金澤善太): 김/선태로 분리하여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성구[116] - 가네무라 세이큐(金村性九)
- 김성구[117] - 게이시마 세이큐(慶島成球)
- 김성근 - 가네바야시 세이콘(金林星根): 성씨인 '金'에 '林'자를 넣어 창씨했다. 재일교포 출신. 선수들을 혹사시키는 잘못된 훈련법 때문에 비난이 쏟아지자, 그의 창씨개명한 이름이 사실상 그에 대한 멸칭으로 쓰이고 있다. 세이콘 드립 문서 참조.
- 김성기 - 가네하라 히데아키(金原秀陽;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하라 히데오(金原秀陽; 이름 부분 일부를 음독)
- 김성률 - 가네코 요시오미(金子義臣)
- 김성민 - 미야하라 소이치(宮原惣一)
- 김성제 - 가네무라 세이자이(金村聲濟)
- 김성태 - 가네시로 세이타이(金城聖泰): 김/성태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성환 - 가네히라 세이칸(金平聖煥): 김/성환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平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세기 - 가네무라 세이키(金村世基)
- 김세록 - 가네모토 세이로쿠(金本世祿): 김/세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세완 - 가나가와 엔(金川遠):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소복 - 가나자와 고후쿠(金澤小福)
- 김소영 - 곤 게이토쿠(金惠得): 본명인 '혜득'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김수길[118] - 히로모토 모리요시(廣本守吉; 이름부분을 훈독), 히로모토 슈키치(廣本守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수길[119] - 가네야마 히데요시(金山壽吉;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주키치(金山壽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수민 - 가네아마 히데토시(金天秀敏;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아마 슈빈(金天秀敏;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수백 - 가네야마 미즈토미(金山水福;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스이후쿠(金山水福; 이름 부분을 음독): '수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수암 - 가네시로 히사이와(金城壽岩)
- 김수웅 - 가네오카 히데오(金陵秀雄): 김/수웅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陵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수현 - 가나가와 주겐(金川壽鉉): 김/수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순룡 - 가나자와 준류(金澤順龍)
- 김순선 - 가나타니 가즈요시(金谷順善; 성씨 부분을 훈독 1), 가나야 가즈요시(金谷順善; 성씨 부분을 훈독 2)
- 김순진 - 가네모리 가즈타쓰(金森順辰)
- 김순흥 - 가네모토 준쿄(金本淳興): 김/순흥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승원 - 마쓰야마 마사오(松山政雄)
- 김시권 - 기쿠야마 지켄(菊山時權): '시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시명 - 가네코 도키아키(金子時明;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코 지메이(金子時明;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고, '시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시묵 - 가네하라 지모쿠(金原時默)
- 김시욱 - 야스야마 도키아사(安山時昱;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야마 지이쿠(安山時昱; 이름 부분을 음독): '시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신애[120] - 사토 신아이(佐藤信愛): ‘신애’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신재 - 호시 신사이(星信載)
- 김양준 - 가네야마 세이스케(金山成祐)
- 김양태 - 고바야시 마사오(小林眞男)
- 김억 - 기시 세이오(岸曙生): 자신의 호인 안서(岸曙)[121]를 창씨명에 반영한 것으로 추정된다.
- 김언수 - 가네미쓰 지하루(金光千日)
- 김오섭 - 가네모토 고로(金本五郎): '오'(五)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김양현 - 가나가와 료켄(金川良鉉): 김/양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억배 - 가네마쓰 히데무네(金松秀宗)
- 김억석 - 가네미쓰 오쿠세키(金光億石)
- 김연복 - 가나에 엔후쿠(金江演福)
- 김영균 - 가네시로 나가히토(金城永均;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시로 에이킨(金城永均;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영기 - 가나가와 마스히로(金川益大) / 가나가와 네이키(金川寧起): 김/영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덕 -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德): 성씨인 金에 본관인 언양의 彦을 넣어 창씨했다. 재일교포 출신. 이름 부분은 '영덕'을 그대로 사용.
- 김영도 - 가네야마 에이도(金山榮道): 김/영도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동[122] - 가나가와 에이토(金川榮東): 김/영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두 - 미쓰야마 에이토(光山永斗): ‘영두’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영득 - 가네야마 레이토쿠(金山靈得)
- 김영만 - 가네우미 나가카즈(金海永萬;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에이만(金海永萬;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영무 - 가네다 히데타케(金田英武;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에이부(金田英武; 이름 부분을 음독): 김/영무로 분리하고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배[123] - 후루미 아키라(古海洸)
- 김영배[124] - 가네다 기요우미(金田淸海;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세이카이(金田淸海;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영삼 - 가네무라 고스케(金村康右): 성씨인 金에, 흔한 일본식 성씨의 접미사인 村을 합성한 창씨. 가네다, 가네야마 등과 함께 김씨들이 흔히 사용한 창씨다.
- 김영상 - 가네미쓰 히로스케(金光浩助)
- 김영선 - 가네야마 나가요시(金山永善;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에이젠(金山永善; 이름 부분을 음독): 김/영선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섭 - 가네미쓰 나가카즈(金光永燮;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에이쇼(金光永燮; 이름 부분을 음독): 김/영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수[125] - 미쓰야마 도겐(光山東源)
- 김영수[126] - 요무라 쓰쓰미쓰(陽村包光) / 요무라 에스이(陽村映遂): 자신의 법명인 포광(包光)과 '영수'(映遂)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영수[127] - 마쓰야마 히로노리(松山博則)
- 김영수[128] - 가네다 가쿠슈(金田學洙)
- 김영은 - 에야마 기누코(江山絹子)
- 김영진 - 가네하라 에이친(金原榮珍)
- 김영호 - 가네야마 하라미치(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겐도(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영환 - 가네야마 다카시(金山隆)
- 김영희 - 가나야 에이키(金谷永熙)
- 김옥향 - 가네바야시 다마사토(金林玉鄕;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바야시 교쿠쿄(金林玉鄕;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용구 - 가네다 요큐(金田容九)
- 김용범 - 가네다 시게오(金田茂男)
- 김용서 - 가나자와 요즈이(金澤鏞瑞)
- 김용식 - 가네모토 요쇼쿠(金本溶植):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용식'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김용일 - 가나야 요이쓰(金谷容逸): 김/용일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용제 - 가네무라 류사이(金村龍濟): '용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용주 - 가네다 류슈(金田龍周): '용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용진 - 가네미쓰 히라후(金光比羅夫)
- 김용창 - 가네야마 다케토(金山武登)
- 김용환 - 가네야마 류칸(金山龍桓)
- 김윤복 - 마쓰모토 기요시(松本淸)
- 김윤정 - 세이도 긴지로 (淸道金次郞): 성씨는 본관인 청도 김씨에서 따왔으며, 이름인 긴지로는 본래 성씨인 김씨에서 따와 지은 것으로 추측된다.
- 김영만 - 가네모토 에이만(金本榮晩)
- 김영준 - 가나야 히데토시(金谷英俊;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야 에이슌(金谷英俊; 이름 부분을 음독): 김/영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진 - 가네코 에이진(金子英鎭): 김/영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영호 - 가네야마 하라미치(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엔도(金山原道;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영희 - 가네야마 에이키(金山泳喜): 김/영희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옥균 - 이와타 슈사쿠(岩田秋作) / 이와타 산와(岩田三和)[129]
- 김용국 - 미쓰야마 우겐(光山宇顯): 광산 김씨의 본관을 가져와 창씨하고 이명인 '우현'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용규 - 가고쿠비 나카노부(駕首中信)
- 김용숙 - 나가하라 후미코(永原富美子)
- 김우영 - 곤 아메히데(金雨英; 이름 부분을 훈독), 곤 우에이(金雨英;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우현 - 가네미쓰 우겐(金光禹鉉):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고, '우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우진 - 가네모토 다카오(金本隆夫)
- 김운배 - 가네우미 구모마스(金海雲培;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운바이(金海雲培;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운중 - 스기하라 구모나카(杉原雲仲; 이름 부분을 훈독), 스기하라 운추(杉原雲仲; 이름 부분을 음독): ‘운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운천 - 가네다 운텐(金田運天) / 가네다 운타(金田運大)
- 김원근 - 가네우미 모토네(金海元根;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겐콘(金海元根; 이름 부분을 음독): 김/원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원배 - 가이가네 모토마스(海金元培; 이름 부분을 훈독), 가이가네 겐바이(海金元培;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원식 - 노자와 고지(野澤幸二)
- 김원태 - 가가와 모토야스(賀川元泰; 이름 부분을 훈독), 가가와 겐타이(賀川元泰; 이름 부분을 음독): '원태'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원표 - 가네미쓰 겐샤쿠(金光源杓)
- 김유성 - 가네하라 젠이치(金原善一)
- 김유현 - 가네오카 시즈코(金岡靜子)
- 김윤덕 - 가나자와 인토쿠(金澤允德)
- 김은호 - 쓰루야마 마사타카(鶴山殷鎬): '은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을용 - 게이린 센세이(鷄林仙靑)
- 김응빈 - 가네자와 마사아키(金澤應彬;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자와 오힌(金澤應彬; 이름 부분을 음독): '응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응수 - 미쓰시로 오슈(光城應洙): '응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응선 - 야스야마 오센(安山應宣): ‘응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응순 - 아라모리 가즈오(新森一雄)
- 김응철 - 가나자와 오테쓰(金澤應喆)
- 김응화 - 가네야마 오카(金山應和)
- 김의용 - 아이다 노리요시(藍田宜義)
- 김이오 - 가네코 니고(金子二五): 김/이오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이조 - 가네무라 이소(金村伊祚)
- 김인순 - 가네야마 오와(金山應和)
- 김인승 - 가네시로 진쇼(金城仁承): '인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인엽 - 긴노 진이치로(金納仁一郎) / 긴노 히토(金納仁)
- 김인영 - 가네무라 진에이(金村仁泳): 김/인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인오 - 가네야 진고(金谷仁梧): 김/인오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인재 - 야스카네 히라요시(安金平吉;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카네 헤이키치(安金平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인진 - 마쓰야마 진친(松山仁鎭)
- 김인홍 - 가나자와 후미코(金澤富美子)
- 김일희 - 가네시로 기요마사(金城淸政)
- 김장섭 - 가네야마 조쇼(金山長渉) / 가네야마 히로노부(金山博信): 김/장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장현 - 가네모리 다카히로(金森荘浩;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리 소코(金森荘浩; 이름 부분을 음독): '장'(荘)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재권 - 가네무라 아리노리(金村在權;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무라 자이켄(金村在權;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재규 - 가네모토 겐이치(金本元一): 가네모토(金本) 역시 당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이다.
- 김재선[130] - 사이야마 아리요시(崔山在善; 이름 부분을 훈독), 사이야마 자이젠(崔山在善; 이름 부분을 음독): ‘재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재수 - 오야마 자이슈(大山在洙)
- 김재숙 - 호시노 요시코(星野淑子)
- 김재열 - 가네보시 무네아키(金星宗明)
- 김재영 - 가네모토 아리히데(金本在英;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자이에이(金本在英;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재익 - 가네다 자이요쿠(金田在翊)
- 김재천[131] - 가네미쓰 자이덴(金光在天): 김/재천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재홍 - 가네미쓰 도모우미(金光智海;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지카이(金光智海;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정규 - 가네시로 세이케이(金城正珪)
- 김정렬 - 가가와 사다오(香川貞雄): 이름인 사다오는 원래 이름자인 정렬에서 따 온 듯.
- 김정렴 - 다마이 마사토(玉井正人)
- 김정석 - 가네야마 쓰구노리(金山韶能;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쇼노(金山韶能;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정섭 - 가네시로 마사사와(金城昌澤)
- 김정수 - 가네호시 가쓰테루(金星勝照)
- 김정숙 - 고노 지에코(香野千惠子)
- 김정숙 - 가네오카 사다코(金岡貞子)
- 김정일 - 가네야마 세이니치(金山正日)
- 김정진 - 가네모토 마사시즈(金源正鎭;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세이친(金源正鎭; 이름 부분을 음독): 김/정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정화 - 가나자와 쇼스케(金澤正弼)
- 김정혁 - 나쓰메 다다시(夏目正)
- 김정희 - 가네이 기이치(金井喜一)
- 김제영 - 가나타니 에이조(金谷榮三; 이름 부분을 훈독 1), 가나야 에이조(金谷榮三;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건 - 유키 쇼켄(結城鍾健)
- 김종구 - 가나가와 하루노리(金川治德)
- 김종국[132] - 가나자와 가네쿠니(金澤鍾國;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자와 쇼코쿠(金澤鍾國;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국[133] - 가네야마 도시오(金山敏夫)
- 김종대 - 가네코 쇼다이(金子鐘大): 김/종대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배 - 가네나가 에이타(金永榮太)
- 김종백 - 가네다 추조(金田忠藏)
- 김종빈 - 가네미쓰 무네아키(金光宗彬;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쇼빈(金光宗彬;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삼 - 노베카네 쇼조(延金鍾三)
- 김종석 - 가네이 가네히사(金井鐘久;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이 쇼쿠(金井鐘久; 이름 부분을 음독): 종(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종순 - 가네하라 쇼준(金原鍾淳): 김/종순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순 - 오바야시 소준(大林宗順): ’종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종완 - 가네모토 가네마사(金本鍾完;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쇼칸(金本鍾完;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원 - 가네야마 무네모토(金山宗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슈겐(金山宗元; 이름 부분을 음독): 김/종원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윤 - 마쓰우라 우루(松浦潤;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우라 준(松浦潤;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준 - 가네오카 쇼준(金岡鍾準): 김/종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필 - 가네무라 슌에이(金村俊英): 김영삼과 마찬가지로 김씨들의 흔한 창씨명. 그의 공주고등보통학교 시절 학적부에는 1940년 4월 18일이라는 창씨개명 날짜까지 정확하게 남아있다. 1997년 대선 당시 기사
- 김종한[134] - 쓰키다 시게루(月田茂)
- 김종한[135] - 가네모토 가네쿠니(金源鍾漢;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쇼칸(金源鍾漢;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종흡 - 가네모토 쇼큐(金本鍾翕): 김/종흡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종희[136] - 가네자와 쇼키(金澤鍾熙): 김/종희로 분리하여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주혁 - 가네무라 슈호(金村周邦): '주'(周)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주홍 - 가나자와 요시히로(金澤柱洪;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자와 추코(金澤柱洪;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준길 - 가나타니 슌키치(金谷俊吉; 이름 부분을 훈독 1), 가나야 슌키치(金谷俊吉; 이름 부분을 훈독 2)
- 김준보 - 고이즈미 슌스케(小泉俊輔): '준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준열 - 가네무라 슌레쓰(金村俊烈)
- 김준엽 - 구니하라 쓰네히로(國原常廣) : 장준하와 함께 학병으로 징집되어 중국 전선으로 끌려갔다가 충칭으로 탈출한 그 사람 맞다. 살아생전에는 창씨개명 여부를 전혀 밝히지 않았으나 사후 학병으로 징집될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國原常廣라고 씨명이 적혀져 있는 게 밝혀졌다.
- 김준영 - 아사히나 노보루(朝比奈昇)
- 김준평 - 가네미쓰 슌페이(金光凖枰): 김/준평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준회 - 가네나가 슌카이(金永俊會)
- 김중식 - 가네모토 고키(金本行生)
- 김중원 - 가네미쓰 나카모토(金光中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추겐(金光中元;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중일 - 마쓰바라 시게루(松原茂)
- 김중해 - 가네다 모리히라(金田守平;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다 슈헤이(金田守平;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중현 - 가나자와 추겐(金澤仲鉉)
- 김진기 - 가네우미 진키(金海鎭琪): 김/진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민 - 가나에 신빈(金江振玟): 김/진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江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수 - 가네마쓰 신슈(金松晉洙) / 마쓰미야 신슈(松宮晉洙): '진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진수 - 가네시로 진슈(金城珍洙): 김/진수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진옥 - 스즈타 도키(鈴田洞喜)
- 김진탁 - 하치다 신(八田晉): '진'(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진홍 - 가나야 진코(金家鎭弘)
- 김찬흠 - 도요야마 아리토요(豊山有豊)
- 김천석 - 가나가와 지이시(金川千石;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가와 센샤쿠(金川千石; 이름 부분을 음독): 김/천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찬용 - 가이시 아키히토(加石燦一; 이름 부분을 훈독), 가이시 산이치(加石燦一;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찬욱 - 시미즈 겐(淸水源)
- 김찬하 - 마쓰오카 히데아키(松岡秀明)
- 김창곤 - 가네시로 쇼콘(金城昌坤)
- 김창두 - 가네야 쇼토(金谷昌斗), 가네야 야스히라(金谷康平): 김/창두로 분리하여 성씨에 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창문 - 기요카제 히데마사(淸風秀正)
- 김창문[137] - 가네무라 마사후미(金村昌文)
- 김창수[138] - 가네야마 사토시(金山敬;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게이(金山敬;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창순 - 가나자와 마사토시(金澤昌順)
- 김창영 - 가네미쓰 마사나가(金光昌永;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쇼에이(金光昌永; 이름 부분을 음독): 김/창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창한 - 가네야마 마사이치(金山昌市): 창(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창환[139] - 가네다 쇼칸(金田昌煥)
- 김창환[140] - 가네시로 쇼칸(金城昌煥)
- 김천동 - 구니모토 쇼슈(邦本昌洙)
- 김천애 - 류미야 덴아이(龍宮天愛): '천애'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철성 - 아라시 데쓰세이(嵐鐡聲)
- 김철억 - 가네시로 데쓰오쿠(金城鐵億)
- 김철용 - 가네우미 데쓰류(金海喆龍)
- 김청암 - 가나가와 세이안(金川青庵): 김/청암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춘득[141] - 미쓰나리 다케시(光成健)
- 김춘범 - 가네우미 하루노리(金海春範;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우미 슌호(金海春範;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충선 - 가네미쓰 다다요시(金光忠善;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미쓰 추젠(金光忠善; 이름 부분을 음독)
- 김치봉 - 니무라 다이(新村大)
- 김탁봉 - 니무라 다이(新村大)
- 김태동 - 가네코 다이도(金子泰東): 김/태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子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석 - 가네무라 다이샤쿠(金村泰錫): 김/태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욱 - 기쿠다 가즈오(菊田一夫)
- 김태진 - 시마 간(志摩貫)
- 김태집 - 가네이 다이슈(金井泰潗): 김/태집으로 분리하고 성씨에 井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호 - 가네야스 다이코(金安泰昊): 김/태호로 분리하여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태흡 - 가네야마 다이코(金山泰洽): 김/태흡으로 나눈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택기 - 우미시마 사와키(海島澤基)
- 김택년 - 아키타 도미조(秋田富造)
- 김택림 - 가네미쓰 히로시(金光博)
- 김채열 - 가네야마 사이레쓰(金山采烈): 김/채열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판권 - 무네오 지로(棟尾次郞)
- 김필상 - 가나가와 히쓰소(金川弼相): 김/필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하경 - 기요이 간(淸井桓)
- 김하섭 - 가네모토 가쇼(金本夏渉) / 가네모토 야스타미(金本安民): 김/하섭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本'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학성 - 가네자와 가쿠세이(金澤學成) / 가네자와 도시미쓰(金澤俊光): '학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학응 - 가네코 가오루(金子薰;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코 군(金子薰;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학인 - 다카야마 가쿠닌(高山學仁)
- 김학해 - 요시카네 마나미(慶金學海)
- 김한 - 호시무라 히로시(星村洋)
- 김한규[142] - 가네코 구니후미(金子漢奎;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코 간케이(金子漢奎; 이름 부분을 음독): 김/한규로 분리하고 성씨에 '子'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한경[143] - 가네모토 노리하루(金本憲治;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모토 겐지(金本憲治;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한경[144] - 가나자와 도쿠미쓰(金澤德光)
- 김한목 - 히라노 구니아쓰(平野漢睦;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노 간보쿠(平野漢睦; 이름 부분을 음독): '한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한송 - 가네야마 구니마쓰(金山漢松;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야마 간쇼(金山漢松; 이름 부분을 음독): 김/한송으로 나눈 뒤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한승[145] - 가네코 간케이(金子漢奎): '한'(漢)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한승[146] - 이와이 도요키치(岩井豊吉)
- 김한용 - 야마시타 간요(山下漢用)
- 김해송 - 가네야마 마쓰오(金山松夫): '송'(松)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김해룡 - 가나에 다쓰오(金江龍雄): 룡(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행도 - 가네다 고도(金田幸道) / 가네다 다쓰도(金田達道): 김/행도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현무 - 가나미야 아키타케(金宮顯武;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미야 겐부(金宮顯武;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현문 - 가나가와 아키후미(金川顯文;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가와 겐분(金川顯文;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현수 - 가나가와 아키히데(金川顯秀;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가와 겐슈(金川顯秀;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형근 - 가네하라 교콘(金原亨根): 김/형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를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형록 - 가네무라 요시히사(金村嘉久;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무라 가쿠(金村嘉久; 이름 부분을 음독)
- 김형뢰 - 가네다 게이라이(金田炯雷)
- 김형식 - 가네노부 에이쇼쿠(金延瀅植)
- 김호서 - 가나자와 요즈이(金澤鏞瑞)
- 김홍걸 - 도요카와 히로시(豊川弘): '홍'(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홍근 - 가네우미 고콘(金海洪根)
- 김홍석[147] - 게이시마 고샤쿠(慶島洪錫): ‘홍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홍식 - 오카다 히로마사(岡田弘政): 홍(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홍준 - 가네자와 고이치(金澤洪一): '홍'(洪)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화식 - 가네자와 가쇼쿠(金澤華植): 김/화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화준 - 가네우미 가슌(金海化俊): 김/하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海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현길 - 가네모토 겐키치(金本顯吉): 김/현길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형숙 - 가네미야 에이슈쿠(金宮瀅淑): 김/형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宮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활란 - 아마기 가쓰란(天城活蘭): '활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김후식 - 히라타 고쇼쿠(平田厚植)
- 김흥덕 - 가네모토 고토쿠(金本興德)
- 김흥렬 - 가나가와 교레쓰(金川興烈): 김/흥렬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희덕 - 가네오카 기도쿠(金岡熙德): 김/희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김희영 - 가네코 마사오(金子政雄)
- 김희운 - 가나야 류지(金谷龍治)
- 김희찬 - 가네하라 니세이(金原二正)
- 김희철 - 가네모토 기테쓰(金本喜哲): 김/희철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ㄴ #===
- 나광열 - 도미타 고레쓰(富田光烈)
- 나정윤 - 마쓰시마 마사노리(松島正綸): '정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나지강 - 와지마 히데쓰나(和島秀綱; 이름 부분을 훈독), 와지마 슈코(和島秀綱; 이름 부분을 음독): '강'(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나항윤 - 도미타 쓰네미쓰(富田恒滿): '항'(恒)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남광해 - 다니가와 미쓰우미(谷川光海; 이름 부분을 훈독), 다니가와 고카이(谷川光海; 이름 부분을 음독)
- 남계룡 - 미나미 도모오(南智夫)
- 남기원 - 마쓰오카 기엔(松岡基瑗)
- 남만희 - 마쓰다 기치지로(松田吉次郞)
- 남백우 - 미나미 모모스케(南百祐)
- 남상도 - 요시모토 아이미치(宜本相道;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모토 소도(宜本相道; 이름 부분을 음독) / 요시키 야스하루(宜木泰治;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키 다이치(宜木泰治; 이름 부분을 음독)
- 남상은 - 미나미 준조(南淳三)
- 남학봉 - 미나미 가쓰마사(南勝允) / 미나미 가쓰히로(南勝博)
- 남흥우 - 미나미 이(南煒)
- 노기주 - 에모토 마사아키(江本正明; 이름 부분을 훈독), 에모토 쇼메이(江本正明;이름 부분을 음독)
- 노덕술 - 마쓰우라 히로(松浦鴻): 한자 鴻에는 기러기라는 뜻도 있지만 넓다는 뜻도 있어서 히로라고 읽은 것이다.
- 노병한 - 오카무라 헤이칸(岡村秉漢): 성씨는 노씨의 시조가 평안남도 용강군 출신이어서 오카무라로 지은 것이며, '병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봉익 - 다마우라 요시아키(玉浦義明)
- 노상구 - 에모토 요시오(江本吉男)
- 노성석 - 미즈하라 아키라(瑞原聖): '성'(聖)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수산 - 다무라 도시야마(田村壽山; 이름 부분을 훈독), 다무라 주산(田村壽山; 이름 부분을 음독)
- 노승구 - 오카무라 쇼타로(岡村承次郞)
- 노영목 - 미쓰야마 에이보쿠(光山永穆)
- 노영빈 - 도요카와 나가타케(豊川永斌; 이름 부분을 훈독), 도요카와 에이힌(豊川永斌; 이름 부분을 음독): '영빈'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노영철 - 오카무라 나가요시(岡村永義; 이름 부분을 훈독), 오카무라 에이기(岡村永義; 이름 부분을 음독)
- 노영한 - 오하라 지로(大原次郎)
- 노용호[148] - 오카무라 류코(岡村龍鎬): 성씨는 노씨의 시조가 용강군 출신이어서 오카무라로 지은 것이며, '용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익형 - 미즈하라 마스나오(瑞原益亨; 이름 부분을 훈독), 미즈하라 이쿄(瑞原益亨; 이름 부분을 음독): '익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재용 - 로야마 아리히로(盧山在容; 이름 부분을 훈독), 로야마 자이요(盧山在容; 이름 부분을 음독)
- 노재환 - 미쓰미네 사이칸(光峯載煥)
- 노주봉 - 도요카와 모리히로(豊川守弘)
- 노준영 - 도요카와 가즈키요(豊川一淸)
- 노창성 - 야하타 마사나리(八幡昌成; 이름 부분을 훈독), 야하타 쇼세이(八幡昌成; 이름 부분을 음독): '창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창안 - 도미야마 소간(富山蒼顔): '창안'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노태수 - 후지타 다이슈(藤田泰洙)
- 노태식 - 도요카와 다이쇼쿠(豊川台植) / 도요카와 도요키치(豊川豊吉): '태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태흠 - 나가부치 다이킨(長淵台欽): ‘태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하순 - 미쓰야마 가준(光山夏淳): ‘하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노학성 - 오카무라 가쿠세이(岡村學成)
- 노환 - 안도 다케오(安東桓雄): ‘환’(桓)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ㄷ #===
- 도계탁 - 야마네 게이타쿠(山根桂鐸): ‘계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도영학 - 미야코 나가지로(都永次郞; 이름 부분 일부를 훈독), 미야코 에이지로(都永次郞; 이름 부분 일부를 음독)
===# ㄹ #===
- 류장렬 - 도요카와 마스요시(豊川益吉)
- 류광수 - 야나기 가쓰코(柳勝子)
- 류언년 - 다카야마 겐넨(高山言年)
- 리극로 - 요시모토 고쿠로(義本克魯)
- 리덩친(이등흠) - 이와사토 다케노리(岩里武則)
- 리덩후이(이등휘) -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
- 리면상 - 마치무라 벤소(街村冕相)
- 리송운 - 미야모토 마쓰쿠모(宮本松雲; 이름 부분을 훈독), 미야모토 쇼운(宮本松雲; 이름 부분을 음독)
===# ㅁ #===
- 마성만 - 하세가와 다카야스(長谷川高保)
- 마원필 - 요시다 겐스케(吉田元弼)
- 맹건호 - 다케우치 겐조(武内健三): 이름 부분의 중간 글자인 ‘건’(健)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맹승재 - 마쓰바라 가즈히데(松原一秀)
- 맹영옥 - 마쓰바라 가즈모리(松原一盛)
- 맹용복 - 신쇼 요후쿠(新昌用福)
- 명인화 - 아카시 린카(明石麟華): '인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문경호 - 후미히라 교코(文平京浩): ‘경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문동호 - 후미모토 히가시타카(文元東鎬; 이름 부분을 훈독), 후미모토 도코(文元東鎬; 이름 부분을 음독) / 후미모토 요시무네(文元義宗; 이름 부분을 훈독), 후미모토 기쇼(文元義宗; 이름 부분을 음독): 문/동호로 분리한 뒤 성씨에 元을 넣어 창씨하였다.
- 문명기 - 후미아키 기이치로(文明琦一朗): 문명/기로 분리한 뒤, 琦에 일본식 이름인 一朗를 붙여 창씨했다.
- 문명호 - 후미하라 다케시(文原武)
- 문명훤 - 후미타케 메이켄(文武明煊)
- 문병갑 - 마쓰다 헤이코(松田炳甲): ‘병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문선명 - 에모토 다쓰아키(江本龍明; 이름 부분을 훈독), 에모토 류메이(江本龍明; 이름 부분을 음독): 이름은 개명 전 이름인 용명(龍明)을 그대로 사용.
- 문수용 - 이와모토 슈요(岩本守用)
- 문승모 - 후미나가 쇼보(文永昇謨): 문/승모로 분리하여 성씨 앞에 '永'를 넣어 창씨하였다.
- 문원태 - 히라후미 다다오(平文忠勇)
- 문예봉 - 하야시 데이겐(林丁元): 본명인 '정원'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문용채 - 스구타 고이치(直田剛一)
- 문이정 - 기타하라 후미타카(北原文剛): 이름 부분에 자신의 성씨인 文을 넣어 개명한 것으로 추측된다.
- 문일현 - 이와하라 잇켄(岩原一鉉)
- 문종구 - 히라후미 가네카메(平文鐘龜;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후미 쇼키(平文鍾龜; 이름 부분을 음독): 문/종구로 분리하여 성씨 앞에 平을 넣어 창씨하였다.
- 문태순 - 분노 야스오(文野泰雄)
- 문학명 - 히라이와 가쿠메이(平岩學明): '학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문학준 - 헤이본 가쿠슌(平凡學俊)
- 문한우 - 후미야마 간우(文山漢雨)
- 민건식 - 빈하라 다케나오(閔原健植; 이름 부분을 훈독), 빈하라 겐쇼쿠(閔原健植; 이름 부분을 음독): 민/건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민경숙 - 빈모토 요시코(閔元淑子)
- 민대진 - 이와무라 다이친(岩村大鎭)
- 민병덕 - 하치야마 헤이도쿠(鉢山丙德): '병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병도 - 히라노 가즈코(平野和子)
- 민병삼 - 이와무라 도쿠타로(岩村德太郎)
- 민병준 - 우카와 하지메(宇川甫)
- 민병희 - 미네무라 아키코(峰村昭子)
- 민신원 - 아키하라 노부코(秋原信子)
- 민영학 - 오카다 에이카쿠(岡田泳學): '영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재기 - 시바야마 기(芝山祺): 이름 부분 중에서 맨 마지막 글자인 '기'(祺) 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민칠봉 - 기요하라 시치호(淸原七奉)
===# ㅂ #===
- 박공진 - 후쿠다 모리스케(福田盛助)
- 박관수 - 고토카와 히로시 (琴川寬; 이름 부분을 훈독), 고토카와 간(琴川寬; 이름 부분을 음독): '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광명[149] - 아라이 미쓰아키(新井光明; 이름 부분을 훈독), 아라이 고메이(新井光明; 이름 부분을 음독): ‘광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광수 - 마쓰야마 미쓰히데(松山光秀)
- 박광진[150] - 히가시카와 미쓰타쓰(東川光辰; 이름 부분을 훈독), 히가시카와 고신(東川光辰; 이름 부분을 음독): ‘광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경석 - 야마모토 게이샤쿠(山本經錫): '경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경호 - 가무라 미노루(香村實)
- 박계남 - 후미하라 기오(文原癸男)
- 박계중 - 아라이 게이주(新井桂重)
- 박금석 - 이시카와 미쓰오(石川光雄)
- 박금철 - 아라이 긴테쓰(新井金喆)
- 박기순 - 기모토 모토유키(木本基順; 이름 부분을 훈독), 기모토 기슌(木本基順; 이름 부분을 음독)
- 박기평 - 요시모토 깃페이(善元基平)
- 박기홍 - 미쓰시로 도시오(密城俊夫)
- 박기효 - 미쓰이 모토요시(三井基義)
- 박기환 - 마쓰시타 잇세이(松下一晟)
- 박길하 - 아오키 깃카(靑木吉夏)
- 박남규[151] - 오토모 사네오미(大朝實臣): 창씨명인 '大朝'는 창씨개명 정책이 시행된 1940년의 새해를 의미하고, 이름 부분의 '實臣'은 천황 앞에 진실된 신민으로 살겠다는 각오를 담았다.
- 박내순 - 도쿠가와 라이준(德川來淳): ‘내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노승 - 이와모토 이사기(岩本潔)
- 박노진 - 아라이 아키후미(新井章文)
- 박노태 - 이노우에 로타이(井上魯胎): '노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대륜 - 샤쿠무네 오와(釋宗大輪; 이름 부분을 훈독), 샤쿠무네 다이린(釋宗大輪; 이름 부분을 음독): 석가모니를 따른다는 의미를 담아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대륜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박도동 - 가쿠쿄 엔키치(赫居炎吉)
- 박도수 - 요시다 게이타쿠(吉田景宅)
- 박도순 - 아라이 도준(新井道淳): '도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동렬 - 요시모토 도레쓰(善元東烈)
- 박동익 - 보쿠하라 도스케(朴原東翼; 이름 부분 일부를 훈독), 보쿠하라 도요쿠(朴原東翼; 이름 부분 일부를 음독):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동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동일 - 교타니 도이치(京谷東一)
- 박동주 - 니이 도슈(二井東珠)
- 박동훈 -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
- 박두영 - 야마시타 도에이(山下斗榮): '두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득순 - 마쓰모토 도쿠준(松本得順)
- 박래수 - 다쓰이 다케토시(辰井武俊)
- 박래은 - 아오키 시게오(靑木茂雄)
- 박만봉 - 아라이 가즈토모(新井萬奉; 이름 부분을 훈독), 아라이 만호(新井萬奉; 이름 부분을 음독)
- 박명근 - 마쓰이 시게아키(松井繁明)
- 박몽득 - 기무라 히데마로(木村英鈺; 이름 부분을 훈독),기무라 에이교쿠(木村英鈺; 이름 부분을 음독): 이명인 ‘영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무병 - 가쿠가와 부헤이(赫川武丙): ‘무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명석 - 도리바야시 메이세키(鳥林命石), 도리바야시 겐유(鳥林健勇): '명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범집 - 히가시바야시 마스노리(東林益範; 성씨 일부를 훈독), 도바야시 마스노리(東林益範; 성씨 일부를 음독): '범'(範)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박병득 - 아라이 아키히데(新井炳秀; 이름 부분을 훈독), 아리이 헤이슈(新井炳秀; 이름 부분을 음독)
- 박병무 - 아라이 아키타케(新井炳武; 이름 부분을 훈독), 아라이 헤이부(新井炳武; 이름 부분을 음독)
- 박병운 - 다카기 하루미쓰(高木春光;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기 슌코(高木春光; 이름 부분을 음독)
- 박보양 - 에하라 모토요(江原基陽): '양'(陽)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박봉식 - 후쿠다 다케오(福田竹男)
- 박봉원 - 기무라 기치스케(木村吉助)
- 박봉진 - 기야마 호친(木山鳳鎭): '봉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봉호 - 신모토 도모타카(新本奉鎬)
- 박병성 - 다카모토 헤이세이(高本炳成): ‘병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백중 - 기타 햐쿠주(木田百仲): ‘백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상근 - 하야시 에이이치(林暎一) / 하야시 에이이치(林榮一)
- 박상열 - 신모토 에이이치(新本榮一)
- 박상준 - 호자와 쇼준(朴澤相駿): 박/상준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澤을 넣어 창씨하였다. 이름은 그대로 '상준'을 썼다.
- 박상칠 - 미야모토 쇼시치(宮本相七)
- 박성신 - 오미치 사네노부(大道誠信; 이름 부분을 훈독), 오미치 세이신(大道誠信;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성옥 - 다카기 나리타마(高木成玉;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기 세이교쿠(高木成玉;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성학 - 기무라 세이가쿠(木村聖學)
- 박성환 - 아라이 다비지(新井旅路)
- 박순임 - 하야시다 준닌(林田順任) / 보쿠 사다코(朴貞子)
- 박승범 - 하루카와 가쓰노리(治川勝範)
- 박승직 - 미키 쇼쇼쿠(三木承稷): 성씨 박(朴)에서 木을 가져와 창씨, 이름 부분은 "승직"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박승하 - 오하라 미쓰미네(大原光峰)
- 박승하 - 히로키 준사이(廣城純才)
- 박씨동 - 기무라 시도(木村氏童)
- 박연서 - 보쿠모토 후치미즈(朴本淵瑞; 이름 부분을 훈독), 보쿠모토 엔즈이(朴本淵瑞; 이름 부분을 음독): 박/연서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박영대 - 오무라 유키요시(大村幸良)
- 박영빈 - 기야마 나가타케(木山永斌; 이름 부분을 훈독), 기야마 에이힌(木山永斌; 이름 부분을 음독) / 기야마 나가이치로(木山永一郎; 이름 부분을 훈독), 기야마 에이이치로(木山永一郎; 이름 부분을 음독): '영빈'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영순 - 기무라 하루모토(木村春元; 이름 부분을 훈독), 기무라 슌겐(木村春元;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영이 - 후쿠이 아사히(福井旭; 이름 부분을 훈독), 후쿠이 교쿠(福井旭;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영준 - 마쓰모토 노리타케(松本憲武)
- 박영효 -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152]
- 박영희 - 요시무라 고도(芳村香道)
- 박영희 - 가쿠타 모토오(赫田元雄)
- 박용기 - 아라이 요키(新井用基)
- 박용섭 - 기야마 가쓰오(木山勝雄)
- 박용익 - 미무라 후미오(美村文雄)
- 박용학 - 모리야마 류가쿠(森山龍學)
- 박용현 - 아라이 류겐(新井龍鉉): 창씨는 박씨의 시조 설화의 내용을 취하여 '신라의 우물'이라는 의미의 아라이(新井)로 창씨한 것. '용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용호 - 기노시타 다쓰히로(木下龍浩; 이름 부분을 훈독), 기노시타 류코(木下龍浩;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용희 - 신모토 요기(新本容羲)
- 박원길 - 모리모토 모토요시(森本元吉; 이름 부분을 훈독), 모리모토 겐키치(森本元吉;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원서 - 다카모토 모토미즈(高本元瑞;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모토 겐즈이(高本元瑞;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윤경 - 아라이 준케이(新井潤慶): ‘윤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윤진 - 후쿠다 인신(福田允進): '윤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완 - 쓰루카와 간(鶴川浣):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구 - 아라이 모토히사(新井源久; 이름 부분을 훈독), 아라이 겐큐(新井源久; 이름 부분을 음독): ‘원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묵 - 이노우에 겐모쿠(井上源默): ‘원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석 - 도쿠다 모토쿄(德田元教): '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원찬 - 아라이 엔산(新井圓讃)
- 박을수 - 마쓰이 미치오(松井三千雄)
- 박이순 - 오하라 가즈오(大原一夫)
- 박이순 - 아라이 이준(新井彜淳) / 아라이 히로시(新居廣): '이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인덕 - 나가카와 진도쿠(永河仁德): '인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인종 - 아라이 닌쇼(新井仁鍾)
- 박인화 - 신모토 린카(新本麟和)
- 박임항 - 쓰루야마 하야시쓰네(鶴山林恒; 이름 부분을 훈독), 쓰루야마 린고(鶴山林恒; 이름 부분을 음독): '임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일석 - 아라이 닛세키(新井日碩): '일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재수 - 아라이 아리히데(新井在秀; 이름 부분을 훈독), 아라이 자이슈(新井在秀;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재준 - 다카모토 아리토시(高本在俊;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모토 자이슌(高本在俊;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정서 - 아라이 고쿠쇼(新井圀緖): '서'(緖)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욱 - 아오키 쇼이쿠(靑木晶昱): '정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희 -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본관인 고령(高靈)에서 高를 따고, 朴에서 木을 따 창씨하였다. 고령 박씨들의 흔한 창씨법. 이름 부분의 마사오(正雄)는 본명에서 正 을 가져오고, 일본식 남성 이름인 雄 자를 붙여서 창씨.[153]
- 박제안 - 야스타니 마사오(安谷正雄)
- 박종근 - 아라이 소콘(新井宗根)
- 박종기 - 아라이 쇼키(新井鍾基)
- 박종용 - 보쿠시로 소요(朴城宗用)
- 박종을 - 아라이 겐스케(新井堅輔)
- 박종렬 - 요시이 무네타케(吉井宗烈)
- 박준병 - 니하라 아키오(新原昭男)
- 박중양 - 호추 시게요(朴忠重陽) / 야마모토 신(山本信): 박(朴)에 忠을 넣어 창씨하고, '중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재상 - 후지이 야스히사(藤井康久)
- 박재홍(1892) - 마스나가 히로시(增永弘): '홍'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정수 - 오야마 사다모리(大山定守): '정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제륜 - 나카하라 마사미치(中原正道)
- 박제선 - 요시무라 사이센(芳村齊璿): '제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제승 - 마쓰야마 사이쇼(松山齋昇): '제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중면 - 다케카와 쇼켄(竹川昌鉉) / 다케카와 주벤(竹川重冕)
- 박지근 - 마쓰야마 기요시(松山淸)
- 박진덕 - 다케야마 진토쿠(竹山鎭德)
- 박찬오 - 마쓰바라 히로시(松原愽)
- 박찬하 - 마쓰오카 히데아키(松岡秀明;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오카 슈메이(松岡秀明; 이름 부분을 음독)
- 박태산[154] - 마쓰야마 다이산(松山泰山): ‘태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찬범 - 시카노 가이덴(鹿野階傳)
- 박찬웅 - 미야모토 산유(宮本贊雄): '찬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창규 - 신모토 쇼케이(新本敞奎)
- 박창화 - 오바라 마사카즈(小原昌和): '창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철[155] - 무라이 데쓰(村井澈): '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철희 - 다케야마 뎃키(竹山喆熙): '철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춘근 - 보쿠시로 하루네(朴城春根; 이름 부분을 훈독), 보쿠시로 슌콘(朴城春根; 이름 부분을 음독): 박/춘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박춘도 - 가네시로 하루모모(金海春桃;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시로 슌토(金海春桃; 이름 부분을 음독)
- 박춘식 - 우미노 하루키(海野春樹): 이름 부분의 春은 본인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추측된다.
- 박춘학 - 아라이 슌가쿠(新井春學)
- 박태경 - 무라카미 유키치(村上勇吉)
- 박판암 - 아라키 마사시게(新木昌茂)
- 박팔남 - 기모토 하치오(木本八男) / 기모토 야나(木本八南)
- 박필병 - 마쓰이 히쓰헤이(松井弼秉): '필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학신 - 히로이와 가쿠신(廣岩鶴信)
- 박학원 - 아라이 가쿠겐(新井學元)
- 박현명 - 아라이 겐메이(新井炫明): '현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형균 - 마쓰가와 에이킨(松川瀅均) / 마쓰가와 교가이(松川匡開): '형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형동 - 마쓰이 교토(松井亨東): '형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형일 - 아라이 교이치(新井亨一)
- 박호근 - 나가이 다카하루(永井孝治)
- 박홍기 - 마쓰오카 고키(松岡洪基)
- 박화진 - 아라이 가즈로(新井和郞): '화'(和)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박흥길 - 닛타 고키치(新田興吉)
- 박흥렬 - 보쿠무라 고레쓰(朴村興烈)
- 박흥식[156] - 시로미야 에모토(城宮惠本)
- 박희열 - 마쓰바라 도시키미(松原俊卿;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바라 준쿄(松原俊卿; 이름 부분을 음독) / 마쓰바라 도시사토(松原俊鄕;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바라 준쿄(松原俊鄕; 이름 부분을 음독)
- 반금출 - 요네다 이마데(米田今出; 이름 부분을 훈독), 요네다 곤슈쓰(米田今出; 이름 부분을 음독)
- 반영균 - 요네다 에이킨(米田榮均)
- 방규환 - 도야마 기요시(頭山淸)
- 방순원 - 가타야마 준겐(方山順元): '순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방연환 - 가타야마 젠칸(方山然煥)
- 방용모 - 가타야마 요보(方山容模): 방/용모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방용필 - 마쓰모토 시게아키(松本重喆;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모토 주테쓰(松本重喆; 이름 부분을 음독)
- 방의묵 - 마쓰카타 기모쿠(松方義默)
- 방인식 - 도요타 노부히로(豊田修弘)
- 방준경 - 야스다 유키테루(安田行輝)
- 방중원 - 야마카와 주엔(山川重遠): ‘중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방진태 - 후사무라 게이노스케(房村敬之助)
- 배갑수 - 호시노 마사미쓰(星野正光; 이름 부분을 훈독), 호시노 세이코(星野正光; 이름 부분을 음독)
- 배삼문 - 곤야마 미쓰후미(昆山三文)
- 배상명 - 가마타 사치아키(蒲田祥明) / 요시무라 사치아키(芳村祥明): '상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상하 - 호시노 소카(星野相河): '상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영숙 - 다케모토 도요코(武本豊子)
- 배영춘 - 다케모토 에이이치(武本榮一): 영(榮)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정자 - 다야마 사다코(田山貞子):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종국 - 다케타니 시게오(武谷茂男)
- 배창 - 하이모토 마사오(裵本昌生; 이름 부분을 훈독), 하이모토 쇼키(裵本昌生; 이름 부분을 음독)
- 배학보 - 호시야마 가쿠호(星山鶴甫): '학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배환익 - 호시야마 간에키(星山煥益)
- 백낙승 - 시라카와 라쿠쇼(白川樂承): 백/낙승으로 분리한 후 성씨에 '川'을 붙여 창씨하고, '낙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낙주 - 마쓰바라 운키(松原雲起)
- 백낙준 - 시라하라 라쿠준(白原樂濬): 백/낙준으로 분리하여 성씨 뒤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백남로 - 시라카와 난로(白川南老)
- 백남선 - 시라카와 요시오(白川吉男) / 시라카와 난센(白川南璇)
- 백남순 - 이즈미하라 히데오(泉原英雄)
- 백두진 - 시라카와 미노루(白川實): 원래의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했다.
- 백상기[157] - 시라카와 쇼키(白川湘基): 백/상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백석 - 시라무라 기코(白村夔行): 이름 '기코'는 백석 시인의 본명 '기행'을 그대로 썼다. 시라무라는 본래의 성씨인 白에, 일본식 성씨인 村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에서 외국어 번역 촉탁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자 사직한 이력이 있었다. 그러나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제통치의 현실 앞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 백석순 - 시라하라 유키에(白原幸枝; 이름 부분을 훈독 1), 시라하라 사치에(白原幸枝; 이름 부분을 훈독 2)
- 백선엽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시라카와는 앞서 백석 시인처럼, 본래의 성씨에 일본식 성씨인 川을 합성한 흔한 창씨법이다.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폭사시킨 일본 육군대장 이름과 같다. 우연의 일치일 수도 있지만, 요시노리가 당대의 유명인사였다는 점과 창씨개명 시점 등으로 미루어 볼 때 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것일 수도 있다. 백선엽의 창씨명은 본인이 거론하거나, 거론된 적 없었다. 해방 이후 조선 이름으로 복구시키는 법령까지 나온 마당에, 치욕스러운 창씨명을 본인도 굳이 이야기할 필요를 못느꼈을 것이다. 그러다 '간도특설대'의 저자 김효순이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만주군 옌지헌병분단장 소네하라 미노루의 회고록에서 발견하여 알려졌다.
- 백선옥 - 다나카 요시타마(田中善玉; 이름 부분을 훈독), 다나카 젠교쿠(田中善玉; 이름 부분을 음독)
- 백시영 - 미즈하라 야스오(水原康雄)
- 백영엽 - 시라이시 에이요(白石永燁)
- 백용철 - 시라이시 류테쓰(白石龍喆)
- 백윤화[158] - 시라카와 마사카즈(白川允和; 이름 부분을 훈독), 시라카와 인와(白川允和; 이름 부분을 음독): 백/윤화로 나눈 뒤, 성씨에 川을 넣어서 창씨하였다.
- 백은규 - 시라이시 가네카즈(白石銀圭; 이름 부분을 훈독), 시라이시 긴케이(白石銀圭; 이름 부분을 음독)
- 백인원 - 시라카와 소슈(白川宗洙)
- 백종득 - 미즈하라 소토쿠(水原綜得): ‘득’(得)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백중빈 - 시라카와 도요쓰쿠(白川豊造; 이름 부분을 훈독), 시라카와 호조(白川豊造;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川'를 넣어 창씨하였다.
- 백찬석 - 시라카와 세이겐(白川淸元)
- 백철 - 시라야 요테쓰(白矢世哲): 본명인 '백세철'을 이용해 '백/세철'로 분리하고 성씨 뒤에 '矢'를 넣어 창씨하였다.
- 백춘기 - 마쓰하라 하루키(松原春基)
- 백판엽 - 시라카와 사다아키(白川判燁; 이름 부분을 훈독), 시라카와 한요(白川判燁; 이름 부분을 음독)
- 백한성 - 미즈하라 쓰루히토(水原鶴人)
- 백홍석 - 도쿠가와 에이이치(德川榮一)
- 변기엽 - 하라베 기요(原邊基燁): 변/기엽으로 분리하여 이름 앞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변설호 - 호시시타 에이지(星下榮次)
- 변옥주 - 다나카 마모루(田中護)
- 변홍규 - 벤다 고케이(卞田鴻圭): 변/홍규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봉길옥 - 가와모토 요시타마(河本吉玉)
- 부승림 - 도미나가 구니마사(富永國正)
- 부완혁 - 오야마 조부(大山丈夫): 일본어로 '괜찮다'라는 뜻의 다이조부(大丈夫) 중간에 산 산(山)자를 넣어 창씨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 ㅅ #===
- 사경욱 - 시무라 다카후미(史村敬郁): 사/경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사광욱 - 시무라 미쓰후미(史村光郁): 사/광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상호[159] - 나오카와 고키치(尙川灝吉): 본명인 “尙灝"의 한자에서 尙에 川을, 灝에 吉을 각각 넣어 작명하였다.
- 서광제 - 다쓰시로 미쓰하루(達城光霽; 이름 부분을 훈독), 다쓰시로 고사이(達城光霽; 이름 부븐을 음독)
- 서극형 - 하라다 히로나리(原田桂成; 이름 부분을 훈독 1), 하라다 요시나리(原田桂成; 이름 부분을 훈독 2), 하라다 게이세이(原田桂成; 이름 부분을 음독)
- 서기석 - 다테 요시마사(伊達義正)
- 서기영 - 오시로 에이지(大城榮二): 본명에서 마지막 한자인 '영‘(榮)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기홍 - 오카 모토히로(大岡基弘; 이름 부분을 훈독), 오카 기코(大岡基弘; 이름 부분을 음독): '기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대근 - 조사와 다이콘(徐澤大根)
- 서병조 - 오미네 헤이초(大峯丙朝): '병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상교 - 오다치 나오노리(大達尙敎; 이름 부분을 훈독), 오다치 쇼쿄(大達尙敎; 이름 부분을 음독)
- 서상익[160] - 오하라 우헤이(大原宇平)
- 서상익[161] - 도시카와 쇼요쿠(利川商翊)
- 서상일 - 오시로 나가요시(大城永吉; 이름 부분을 훈독), 오시로 에이키치(大城永吉; 이름 부분을 음독)
- 서상훈 - 조카와 소쿤(徐川相勛): '상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성극 - 도시카와 쓰네오(利川恒雄)
- 서수암 - 우에무라 산키치(上村三吉; 성씨 부분을 훈독 1), 가미무라 산키치(上村三吉; 성씨 부분을 훈독 2)
- 서은숙[162] - 조시로 온슈쿠(徐城恩淑): 서/은숙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城을 붙여 창씨하고, '은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인효 - 오야마 히토타카(大山仁孝;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진코(大山仁孝; 이름 부분을 음독): ‘인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정구 - 마스다 나오타마(益田庭球; 이름 부분을 훈독), 마스다 데이큐(益田庭球; 이름 부분을 음독): ‘정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정국 - 요시나가 게이스케(吉永圭佑)
- 서정인 - 오우라 마사토라(大浦正寅; 이름 부분을 훈독), 오우라 세이인(大浦正寅; 이름 부분을 음독): '정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정주 - 다쓰시로 시즈오(達城靜雄): 본관인 ' 달성'으로 창씨했다. ' 달성'을 일본어식으로 읽어도 위화감이 없으므로, 본관이 그대로 창씨로 사용되었다.
- 서정철 - 오시로 데이테쓰(大城廷哲): '정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서중석[163] - 오야마 가즈사카(大山一榮;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이치에이(大山一榮; 이름 부분을 음독)
- 서진달 - 다쓰모토 스즈타쓰(達本錫龍; 이름 부분을 훈독), 다쓰모토 샤쿠류(達本錫龍; 이름 부분을 음독)
- 서춘 - 오카와 요시타네(大川慈種; 이름 부분을 훈독), 오카와 지구사(大川慈種;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카와 도요쓰구(大川豊注)
- 서항석 - 마쓰오카 쓰네스즈(松岡恒錫; 이름 부분을 훈독) , 마쓰오카 고샤쿠(松岡恒錫; 이름 부분을 음독): '항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석명선 - 이시카와 메이센(石川明瑄): 성씨에 川을 붙여서 창씨하고, '명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석봉련 - 이시야마 모토하루(石山元治; 이름 부분을 훈독), 이시야마 겐지(石山元治; 이름 부분을 음독)
- 석종진 - 이시모토 히데오(石本秀夫)
- 선우렴 - 오하라 렌조(大原廉三): '렴'(濂)에서 한자를 따 와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설재봉 - 나가모토 자이호(長本在鳳): ‘재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성백우 - 나리타 햐쿠구(成田百愚)
- 성백현 - 나리타 햐쿠켄(成田百鉉)
- 성순경 - 나리타 기요요시(成田舜慶; 이름 부분을 훈독), 나리타 슌케이(成田舜慶; 이름 부분을 음독)
- 성일영 - 나리타 가즈나가(成田一永): 성씨에 田를 넣어 창씨하고, 일영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성정수 - 나리타 데이슈(成田禎洙):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고, '정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성현호 - 이시하라 마사오키(石原賢興; 이름 부분을 훈독), 이시하라 겐코(石原賢興; 이름 부분을 음독)
- 소완규 - 고바야시 에이지(小林英司)
- 소진문 - 아리소 시즈후미(有蘇鎭文; 이름 부분을 훈독), 아리소 진분(有蘇鎭文;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有를 넣어 창씨하고, '진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소진섭 - 소가 진쇼(蘇我鎭燮) / 도쿠히라 진쇼(德平鎭燮) / 도쿠히라 마사히코(德平雅彦): 소/진섭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我를 넣어 창씨하였다.
- 소진우 - 이소 미쓰미네(伊蘇三峰)
- 소진은 - 이소 마사미네(伊蘇正峰)
- 손계조 - 마쓰다 게이조(松田啓照): '계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기욱 - 마쓰히라 모토후미(松平基郁;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히라 기이쿠(松平基郁; 이름 부분을 음독): '기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동욱 - 나가우라 도교쿠(永浦東頊): '동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명조 - 시게무라 메이소(茂村命祚)
- 손명준 - 게이자키 슌이치(慶崎俊一)
- 손문헌 - 마쓰하라 후미노리(松原文憲)
- 손분조 - 미쓰모토 분소(三本分祚): '분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석도 - 마고다 무네아키(孫田宗明; 이름 부분을 훈독), 마고다 소메이(孫田宗明;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양섭 - 나가마쓰 아키카즈(永松亮燮; 이름 부분을 훈독), 나가마쓰 료쇼(永松亮燮; 이름 부분을 음독): "양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영목 - 마고나가 야스시(孫永穆)
- 손영철 - 미쓰야마 에이테쓰(密山永喆)
- 손응린 - 마고다 오린(孫田應麟): 손/응린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장청 - 마쓰모토 조세이(松本長靑): ‘장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재호 - 마쓰시마 아리타카(松島在鎬)
- 손정규 - 이바라 게이(伊原圭) / 이바라 사다다마(伊原貞圭): '정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정룡 - 히라카와 류지로(平川龍次郎): '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정봉 - 마고모토 세이호(孫本正鳳)
- 손조봉 - 고야마 소호(湖山祚鳳): '조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종구 - 이하라 쇼큐(伊原鍾九) / 이하라 겐코(伊原鉉光)
- 손종권 - 마쓰다 유키마사(松田行正)
- 손재박 - 요시모토 히로시(吉本博)
- 손재하 - 히로가와 헤이나리(廣川平成) / 히로하라 헤이나리(廣原平成)
- 손지현 - 마고나가 히가시(孫永東; 이름 부분을 훈독), 마고나가 도(孫永東; 이름 부분을 음독)
- 손창식 - 마고다 마사타네(孫田昌植): '창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창윤 - 도쿠토미 쇼준(德富昌潤) / 도쿠토미 준요(德富潤世): 첫번째 창씨명은 ‘창윤’을, 두번째 창씨명은 '윤'(潤)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손택룡 - 도미하라 사와타쓰(富原澤龍)
- 손홍원 - 노무라 고엔(野村弘遠): '홍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손홍준 - 마고조노 아키미쓰(孫園禮光; 이름 부분을 훈독), 마고조노 레이코(孫園禮光;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園을 넣어 창씨하였다.
- 손홍팔 - 나가우라 고하치(永浦洪八): '홍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금선 - 후쿠자와 레이코(福澤玲子)
- 송기종 - 야마모토 기쇼(山本基鍾): ‘기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남운 - 마쓰쿠니 엔요(松邦瑗容)
- 송남헌 - 마쓰바라 쇼이쓰(松原秀逸)
- 송몽규 - 소무라 무케이(宋村夢奎): 성씨인 宋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몽규"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문헌 - 야마기 후미노리(山木文憲;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기 분켄(山木文憲; 이름 부분을 음독): '문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문화 - 야마모토 분카(山本文華): '문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병주[164] - 온즈 아키모리(恩津明森)
-
송병준 - 노다 헤이지로(野田平治郞): 조선인 최초로 창씨개명을 하게 된 인물이라고 알려졌으나 이동인이 훨씬 빠르다. 다만 이 이름을
경술국치 이전부터 이미 사용한 것은 사실.
그러면서 조선 이름이 촌티가 난다고 변명을 늘어뜨린다(…)어쨌든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그를 '노다(野田) 영감', '야전(野田) 대감'이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 송병포 - 마쓰모토 잇페이(松本一兵)
- 송병하 - 쓰네야마 헤이카(常山炳夏): ‘병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석하 - 다케하라 히로요시(武原弘慶)
- 송승조 - 노야마 쇼소(野山承祚)
- 송양호 - 도미야마 요코(富山良浩): '양호'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송영 - 야마카와 미노루(山川實)
- 송용연 - 소야마 다쓰부치(宋山龍淵; 이름 부분을 훈독), 소야마 류엔(宋山龍淵; 이름 부분을 음독)
- 송원홍 - 마쓰바라 마사아키(松原正明)
- 송인숙 - 미쓰이 마사키요(三井仁淑)
- 송인채 - 마쓰야마 인사이(松山寅采): ‘인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인태 - 오하라 도라히코(大原寅彦): '인'(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정섭 - 로야마 마사아키(郎山正燮)
- 송주순 - 미쓰이 주자부로(三井柱三郎): '주'(柱)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송종헌 - 노다 가네노리(野田鍾憲): '종헌'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송지영 - 야마모토 시에이(山本志泳): '지'(志)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송지학 - 마쓰모토 유키타카(松本之學;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모토 노가쿠(松本之學; 이름 부분을 음독)
- 송찬도 - 나카하라 산도(中原燦道) / 나카하라 요시히로(中原祥愽): '찬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창근 - 온치 쓰부라(恩地圓) / 온치 쇼콘(恩地昌根): ‘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춘례 - 구니모토 슌이(國本春伊): ‘춘‘(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태옥 - 노야마 야스타마(野山泰玉; 이름 부분을 훈독), 노야마 다이쿄쿠(野山泰玉; 이름 부분을 음독)
- 송태호 - 아사노 히토타카(淺野仁鎬; 이름 부분을 훈독), 아사노 진코(淺野仁鎬; 이름 부분을 음독) / 아사노 린코(淺野鱗鎬) / 아사다 히토타카(淺田仁鎬; 이름 부분을 훈독), 아사다 진코(淺田仁鎬; 이름 부분을 음독)
- 송한룡 - 쇼도 구니타쓰(正堂漢龍; 이름 부분을 훈독), 쇼도 간류(正堂漢龍; 이름 부분을 음독): '한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송해 - 기무라 후키(木村福): 나무 목(木)은 송(宋)씨에서 따와 村을 붙여 일본의 흔한 성씨인 기무라로 만들고, 복(福)은 본명인 '복희(福熙)'에서 따 왔다.
- 송화식 - 오하라 가쇼쿠(大原和植): '화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격호 - 시게미쓰 다케오(重光武雄): 신씨들은 본관이나 성씨의 합성명이 흔한 것과 달리, 주역의 간지를 따라 창씨한 예가 많다. 그에 따르면 신(辛)은 중광이 되는데, 중광을 일본어로 읽으면 일본에서 흔한 성씨인 시게미쓰가 되므로. [165]
- 신경균 - 오조라 게이킨(大空敬均), 오조라 히사아키(大空久晃): ‘경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계선 - 마모토 게이젠(眞本啓善): '계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기석 - 이와타 기세키(岩田基碩): ’기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기섭 - 히라야마 모토카즈(平山基燮;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기쇼(平山基燮; 이름 부분을 음독): ‘기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기성 - 히라야마 오나리(平山大成;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다이세이(平山大成; 이름 부분을 음독)
- 신동하 - 시게미쓰 도카(重光東夏): 주역의 간지를 취해 시게미쓰로 창씨하고, '동하'를 이름으로 썼다.
- 신병철 - 히라야마 헤이테쓰(平山炳喆): '병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병현 - 히라야마 에이지로(平山榮次郞): 본관인 ' 평산'을 따서 창씨했다.
- 신불출 - 구로다 규이치(玄田牛一),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특이하게도 두 번이나 창씨개명한 경우. 처음에는 일본어 욕인 칙쇼(畜生)를 파자해서 창씨개명하고 신고했으나 당연히 퇴짜를 맞았고, 그 다음에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추임새인 '에헤라 노아라'를 일본어로 음차해서 재차 창씨개명했다. 당연히 트롤링이 목적이었다. #
- 신봉조 - 가라시마 준(辛島純): 성씨 뒤에 '島'를 붙여 창씨하였다.
- 신상묵 -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 주역의 간지인 중광(重光)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신상초 - 히라야마 마사오(平山正生): 성씨는 본관에서 따와 창씨한 것으로 보인다.
- 신석린 - 히라바야시 린시로(平林麟四朗): '린'(麟)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신석우 - 이시카와 스즈아메(石川錫雨)
- 신석호 - 데라타니 슈조(寺谷修三; 성씨 부분을 훈독 1), 데라야 슈조(寺谷修三; 성씨 부분을 훈독 2)
- 신숙범 - 나오야마 슈쿠한(直山淑範), 도쿠야마 슈쿠한(悳山淑範): '숙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양재 - 마야마 히로유키(眞山博行)
- 신영화 - 히라야마 에이와(平山永和): 평산 신씨의 본관을 창씨명으로 사용하고, '영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용균 - 히라야마 요킨(平山鎔均): 평산 신씨의 본관을 가져오고, '용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신용욱 - 마하라 가쓰히라(眞原勝平)
- 신윤영 - 히라노 모토다(平野源田)
- 신우선 - 오타니 유젠(大谷佑善): '우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원배 - 유키하라 겐바이(幸原元培): '원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응균 - 히라야마 가쓰토시(平山勝敏)
- 신익균 - 히라야마 요쿠긴(平山益均): '익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재모 - 구니모토 사이보(國本宰模): '재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정균[166] - 히라야마 데이킨(平山貞均): '정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정균[167] - 히라야마 다케요시(平山雄義)
- 신태악 - 미카와 다이가쿠(三川泰嶽) / 미카와 기요시(三川淸): '태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창씨는 본래 성씨인 신(辛)을 파자한 것으로 추정.
- 신태영 - 히라야마 스케히데(平山輔英;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호에이(平山輔英; 이름 부분을 음독): '영'(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태제- 마사오카 겐이치(正崗憲一)
- 신태진 - 히라야마 다이진(平山泰鎭): '태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태천 - 데이오카 소이치(鄭崗宗一)
- 신태호 - 시게미쓰 쓰네마루(重光常圓), 시게미쓰 다이코(重光太浩): 신(辛)씨들의 창씨명인 시게미쓰(重光)로 창씨하고, '태호'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후식 - 히가시하라 고쇼쿠(東原厚植): '후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현구 - 신 교쿠(申鈺)
- 신현규 - 히라야마 히사오(平山久雄)
- 신현준 - 우다가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
- 신현확 - 히라바야시 유쿠니(平林佑國)
- 신희련 - 히라야마 히로타카(平山熙崇;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기수(平山熙崇; 이름 부분을 음독): 희(熙)를 이름에 사용하였다.
- 신흥섭 - 히라야마 오키카즈(平山興燮;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교쇼(平山興燮; 이름 부분을 음독): ‘흥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신흥우 - 다카타마 오키아메(高靈興雨;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타마 교우(高靈興雨; 이름 부분을 음독): 창씨는 본관인 고령을 가져와 사용하였다.
- 심동구 - 아오키 도큐(靑木同求): '동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심상징 - 마쓰오카 스케아키(松岡相徵;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오카 쇼추(松岡相徵; 이름 부분을 음독)
- 심선택 - 아오마쓰 센타쿠(靑松璿澤): '선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심영 - 아오키 진에이(靑木沈影): 예명인 '심영'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창씨만 하고, '심영'은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아오키(靑木)라는 창씨는 본관인 청송(靑松)을 변형한 것. 실제로 다른 심씨들은 본관 그대로를 따와 아오마쓰라고 지은 사례도 있다.
- 심의윤 - 센카 기준(仙化宜潤): ‘의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심재봉 - 마쓰모토 요시히라(松本吉平;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모토 기치헤이(松本吉平; 이름 부분을 음독)
- 심재인 - 아오마쓰 다다마사(靑松忠正)
- 심정섭 - 아오마쓰 노부오(靑松信男)
- 심종석 - 아오키 미치아키(靑木道明)
- 심좌보 - 아오키 사스케(靑木佐輔)
- 쑨원(손문) - 나카야마 쇼(中山樵): 쑨원이 일본에 망명해 있을 때 도쿄의 히비야 공원 근처에 살았는데, 그 근처에 나카야마(中山)라는 저택이 있었고 이 글자를 마음에 들어하여 자신의 호와 창씨명으로 썼다. 중 국에서는 쑨원이란 본명보다는 창씨에서 유래한 호를 붙인 '쑨중산 선생'으로 더 많이 부른다. 이외에도 나카야마 지로(中山二郎), 다카노 나가오(高野長雄)로 사용한 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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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규용 - 야스하라 게이요(安原圭瑢): 안/규용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광수 - 가메무라 마사노리(龜村正經)
- 안기영 - 야스다 다다카즈(安田産收;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다 산슈(安田産收; 이름 부분을 음독)
- 안기찬 - 야스다 기산(安田基燦)
- 안덕윤 - 야스모토 노리타네(安本德胤;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모토 도쿠인(安本德胤; 이름 부분을 음독): 안/덕윤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동원 - 야스다 도겐(安田東元)
- 안배항 - 노부야스 나가테루(信安永照)
- 안병구 - 안도 헤이큐(安藤秉九)
- 안병균 - 야스다 헤이킨(安田秉均)
- 안병기 - 야스다 헤이키(安田炳耆): 안병기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병범 - 가메무라 사다노부(龜村貞信)
- 안병수 - 야스다 헤이슈(安田炳秀)
- 안복순 - 야스다 준코(安田順子)
- 안상덕 - 야스쿠니 쇼토쿠(安國商悳): 안/상덕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國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상현 - 야스무라 쇼켄(安村湘鉉)
- 안석주 - 야스다 사카에(安田榮): 성씨 뒤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성 - 야스다 사카에(安田盛;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다 조(安田盛;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田를 넣어 창씨하고, '성'(盛)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성대 - 야스다 세이타(安田聖大)
- 안세경 - 야스다 세이쿄(安田世京): 안/세경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소주 - 야스다 쇼슈(安田小周)
- 안용대 - 야스다 류타(安田龍大):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고, '용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용백 - 다케야마 류하쿠(竹山龍伯): '용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용봉 - 야스이에 다쓰타카(安家龍鳳;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이에 류보(安家龍鳳;이름 부분을 음독): 안/용봉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家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영일 - 아베 히데키(安部英樹): '영'(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정삼 - 안도 세이산(安藤正三): 안/정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藤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종철 - 히로야스 쇼테쓰(廣安鍾哲): 성씨에 廣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은 '종철'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안종화 - 야스다 다쓰오(安田辰雄)
- 안창복 - 야스다 마사토미(安田昌福;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다 쇼후쿠(安田昌福; 이름 부분을 음독)
- 안창환 - 야스카와 마사아키(安川昌煥;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카와 쇼칸(安川昌煥; 이름 부분을 음독): 안/창환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철수 - 야스다 데쓰슈(安田哲洙)
- 안춘형 - 야스이 도오루(安井亨): 성씨에 井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 부분의 ‘형’(亨)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안치대 - 아다치 노부오(安達信雄)
- 안치준 - 아다치 무네노리(安達致準; 이름 부분을 훈독), 아다치 지준(安達致準; 이름 부분을 음독): 안/치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達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치호 - 야스다 무네타카(安田致鎬)
- 안태한 - 다케가와 다이칸(竹川泰漢): ‘태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한수 - 마쓰오카 간주(松岡漢壽)
- 안형식 - 야스나카 에이쇼쿠(安中瀅植): 성씨에 中을 넣어 창씨하고, '형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효승 - 야스무라 고쇼(安村孝昇): 안/효승으로 분히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안흥국 - 마쓰다 오키쿠니(松田興國;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다 고코쿠(松田興國): ‘흥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안희환 - 야스모토 기칸(安本熙煥)
- 양국진 - 나카하라 구니시즈(中原國鎭; 이름 부분을 훈독), 나카하라 고쿠친(中原國鎭; 이름 부분을 음독): '국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봉석 - 야나가와 호샤쿠(梁川鳳錫)
- 양봉화 - 야나가와 호카(梁川鳳華): '봉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성근 - 난바라 세이이치(南原成一)
- 양세웅 - 미하라 세오(三原世雄): '세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순옥 - 난바라 준교쿠(南原順玉)
- 양원석 - 야나가와 지로(柳川次郎)
- 양원용 - 야나하라 다쓰(梁原龍;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하라 류(梁原龍; 이름 부분을 음독)
- 양익현 - 야나가와 마스사카(梁川益賢;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가와 에키겐(梁川益賢;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川'을 붙여 창씨하고, '익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인택 - 요시하라 게이(良原慶)
- 양재창 - 야나가와 아리노부(梁川在昶;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가와 자이초(梁川在昶;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川'을 넣어 창씨하고, '재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재하 - 아오키 아리카와(靑山在河; 이름 부분을 훈독), 아오키 자이카(靑木在河; 이름 부분을 음독): '재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양정수 - 야나가와 마사히데(梁川正秀;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가와 세이슈(梁川正秀; 이름 부분을 음독): 양/정수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양종호 - 야나가와 가네테루(楊川鐘皓;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가와 쇼코(楊川鍾皓; 이름 부분을 음독): 양/종호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양주삼 - 야나하라 주조(梁原柱三): 양/주삼으로 분리하여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양칠성[168] -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
- 어담 - 니시카와 단이치(西川潭一), 니시카와 류단(西川龍潭): 담(潭)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어우봉 - 니시카와 마사토키(西川正時; 이름 부분을 훈독), 니시카와 세이지(西川正時; 이름 부분을 음독)
- 엄민영 - 기지야마 도시오(雉山敏夫): '민'(敏)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엄윤필 - 도미하루 준스케(富春潤弼)
- 엄익대 - 가와고에 요쿠타이(川越翼大)
- 엄주완 - 미쓰하라 히로가쓰(光原裕勝)
- 엄창섭 - 다케나가 가즈키(武永憲樹)[169]
- 여권현 - 미야모토 겐켄(宮本權鉉): '권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여경엽 - 도미모토 기요마사(富本淸正)
- 여구현 - 우메다 규겐(梅田求鉉) / 우메다 히데요시(梅田秀吉): 전자의 경우는 본래 이름인 '구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여대현 - 미야하라 다이켄(宮原大鉉)
- 여사보 - 우메모토 시스케(梅本師輔): '사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여재홍 - 아오키 하루요시(靑木春吉; 이름 부분을 훈독), 아오키 슌키치(靑木春吉; 이름 부분을 음독)
- 염동호 - 라렌 모치마스(羅廉用培; 이름 부분을 훈독), 라렌 요호(羅廉用培; 이름 부분을 음독)
- 염송희 - 사토 마쓰에(佐藤松枝)
- 염홍섭 - 다마가와 고쇼(玉川弘燮)
- 예종석[170] - 구사우치 무네스즈(草内宗錫; 이름 부분을 훈독), 구사우치 소샤쿠(草内宗錫;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는 한자를 파자하여 창씨했으며, 이름은 원래 이름인 '종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국영 - 오하라 고쿠에이(大原國泳): '국영'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규봉 - 미즈노 다케오(水野隆雄)
- 오긍선 - 구레 교젠(吳兢善): 성씨를 일본식으로 읽고, '긍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남학 - 구레야마 다케히로(吳山猛浩;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야마 모코(吳山猛浩; 이름 부분을 음독) / 다케키요 난쓰루(猛淸南鶴; 성씨 부분을 훈독), 모세이 난쓰루(猛淸南鶴; 성씨 부분을 음독):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남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대근 - 다나카 다이콘(田中大根)
- 오말수 - 구레야마 스에모리(吳山末守;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야마 마쓰슈(吳山末守; 이름 부분을 음독); 오/말수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상 - 다카야마 긴조(高山欽蔵)
- 오세흥 - 다카야마 나가히사(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야마 조큐(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석주 - 구레야마 샤쿠주(吳山錫柱): 성씨에 山를 넣어 창씨하고, '석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문강 - 기타하라 후미타케(北原文剛; 이름 부분을 훈독), 기타하라 분고(北原文剛; 이름 부분을 음독): '문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복렬 - 다케시로 후쿠레쓰(武城福烈): ‘복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봉희 - 구레야마 보키(吳山奉禧): 오/봉희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병문 - 기요무라 헤이분(淸村炳文): '병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병욱 - 이와시로 헤이쿄쿠(岩城炳旭): '병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성덕 - 히라가 유사쿠(平賀右作)
- 오성환 - 도요하라 세이칸(豊原晟煥) / 도요하라 조칸(豊原增煥)
- 오세윤 - 구레하라 모토히로(吳原基弘): 성씨 뒤에 '原'을 붙여서 창씨하였다.
- 오세호 - 마쓰카와 마사노리(松川正德)
- 오세흥 - 다카야마 나가히사(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야마 조큐(高山長久;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숙자 - 다카야마 요시코(高山淑子)
- 오순영 - 구레모토 준에이(吳本淳榮)
- 오순환 - 다케다 미쓰나리(竹田光成; 이름 부분을 훈독), 다케다 고세이(竹田光成;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연길 - 구레모토 후치요시(吳本淵吉;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모토 엔키치(吳本淵吉;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고, '연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영근 - 우미무라 에이콘(海村英根)
- 오영세 - 야마모토 네이요(山本檸世): '영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용수 - 미야카와 류슈(宮川龍洙): '용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완수 - 구레 간이치(吳完一):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 발음으로 읽고,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인본 - 구레야마 히토모토(吳山仁本;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모토 진혼(吳山仁本; 이름 부분을 음독): 오/인본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두성 - 구레카게 도세이(吳影斗成)
- 오정수 - 후쿠야마 기스케(福山喜介)
- 오제도 - 구레야마 세이도(吳山制道): 오/제도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청곡 - 구레야마 기요타니(吳山淸谷;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야마 세이코쿠(吳山淸谷; 이름 부분을 음독) / 구레야마 지네(吳山千根; 이름 부분을 훈독), 구레야마 센콘(吳山千根; 이름 부분을 음독)
- 오치한 - 구레타케 데루히코(吳竹輝彦): 성씨에 竹을 넣어 창씨하였다.
- 오태여 - 구레시로 다이요(吳城泰艅): 성씨에 城을 넣어 창씨하고, '태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오평운 - 마쓰카와 히라쿠모(松川平雲;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카와 헤이운(松川平雲; 이름 부분을 음독) / 마쓰카와 히데우미(松川榮雲;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카와 에이운(松川榮雲; 이름 부분을 음독)
- 오학순 - 구레즈 가쿠준(吳洲學順) / 구레세 가쿠준(吳瀨學順)
- 오해건 - 구레 마사오(吳正夫):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 발음으로 읽었다.
- 오혜숙 - 마쓰오카 하쓰요(松岡はつよ)
- 오호영 - 야마다 고에이(山田浩榮)
- 옥예준 - 다마무라 레이슌(玉村禮俊)
- 옥지준 - 다마무라 도모토시(玉村智俊)
- 옥형근 - 다마오카 게이콘(玉岡炯根): 옥/형근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岡을 넣어 창씨하였다.
- 용한천 - 다쓰카와 구니타카(龍川漢天; 이름 부분을 훈독), 다쓰카와 간텐(龍川漢天; 이름 부분을 음독)
- 우기돈 - 단요 기이치로(丹陽基一郎): 본관인 단양(丹陽)으로 창씨하고, 기(基)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우병기 - 도쿠야마 헤이키(德山丙基): '병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우장춘 - 스나가 나가하루(須永長春): 나가하루는 장춘(長春)의 일본식 독음이고, 스나가란 성은 그가 망명 조선인을 지원하는 일본인의 명목상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얻게 된 성씨이다. 아내 와타나베 고하루가 친정의 반대를 무릅쓰고 조선인과 결혼하면서 의절하여 이 일본인의 명목상 양녀가 되어 우장춘도 아내의 성을 따른 것이다. 다만 해외 논문 등을 발표할 때에는 '나가하루 우'(Nagaharu U)로 쓰는 등 우씨 성을 고집했다고 한다.
- 원덕상 - 모토무라 하지메(元村肇; 이름 부분을 훈독), 모토무라 조(元村肇; 이름 부분을 음독)
- 원병희 - 모토무라 헤이키(元村炳喜): 원/병희로 분리하고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원의상 - 모토무라 주칸(元村壽完)
- 원서상 - 모토무라 호운(元村奉云)
- 원응상 - 모토무라 오조(元村應常): 원/응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원종억 - 모토하라 쇼오쿠(元原鍾億): '종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원진희 - 모토무라 신키(元村晉喜):'진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원훈상 - 모토무라 시게모리(元村重盛)
- 위기철[171] - 시라이시 기테쓰(白石基喆): '기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위정학 - 미야마 쓰루이치(三山鶴市; 이름 부분을 훈독), 미야마 가쿠시(三山鶴市; 이름 부분을 음독): 학(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건석 - 야나기사와 겐지로(柳澤健次郞)
- 유근택 - 다마가와 마사키(玉川昌樹)
- 유명한 - 야나기하라 히로시(柳原博)
- 유성덕 - 가나에 히데카즈(金江秀一; 이름 부분을 훈독), 가나에 슈이치(金江秀一; 이름 부분을 음독)
- 유수호 - 야나가와 도시타카(柳川壽鎬)
- 유순식 - 야나기 미쓰시게(柳光茂)
- 유승렬 - 에모토 이사오(江本烈; 이름 부분을 훈독), 에모토 레쓰(江本烈; 이름 부분을 음독): 강릉 유씨의 본관을 따와 에모토(江本)로 창씨하고, 본명의 마지막 한자 '렬‘(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시환 - 야나기 도키아키(柳時煥;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기 지칸(柳時煥; 이름 부분을 음독)
- 유영 - 히라야마 에이(平山瑛): '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영민[172] - 에하라 나가토시(江原永敏; 이름 부분을 훈독), 에하라 에이빈(江原永敏; 이름 부분을 음독): ‘영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영선[173] - 기유 나가요시(杞兪永善; 이름 부분을 훈독), 기유 에이젠(杞兪永善; 이름 부분을 음독): 유/영선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杞을 넣어 창씨하였다.
- 유이암 - 야나기하라 리간(柳原李岩)
- 유인수 - 에무라 히사오(江村久雄)
- 유종남 - 야나하라 쇼난(柳原鍾湳): 유/종남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유재기 - 아마기 교신(天城虛心)
- 유재환 - 야나기다 도요카즈(柳田豊一)
- 유진순 - 다마가와 진준(玉川鎭淳): '진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진영 - 유무라 시즈다마(兪村鎭靈; 이름 부분을 훈독), 유무라 진레이(兪村鎭靈;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村을 붙이고 '진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진후 - 기모토 하루모리(杞元春盛)
- 유태설 - 구니모토 다이세쓰(邦本泰卨): '태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태진 - 야나가와 다이신(柳川太璡): 유/태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川을 넣어 창씨하였다.
- 유태훈 - 니레 야스아키(楡泰明): '태'(泰)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유필목 - 마에다 히쓰보쿠(前田必穆): ‘필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홍순 - 나카하라 고준(中原鴻洵): '홍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학이 - 에하라 가쿠이(江原鶴伊): ‘학이’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유한영 - 야나모토 구니나가(柳本漢永; 이름 부분을 훈독), 야나모토 간에이(柳本漢永; 이름 부분을 음독): 유/한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하였다.
- 유헌열 - 야나기사와 겐레쓰(柳澤憲烈) / 야나기자와 노리하루(柳澤憲治): '헌열'과 '헌'(憲)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유혁로 - 야마다 유이치 (山田唯一)
- 유형기 - 야나가와 에이키(柳川瀅基): '형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육영수 - 구가미 에이슈(陸海英修; 성씨 부분을 훈독), 리쿠카이 에이슈(陸海英修; 성씨 부분을 음독) [174]: 성씨에 해(海)를 넣어 창씨하고, '영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갑병 - 히라누마 히데오(平沼秀雄)
- 윤관[175] - 히라누마 간지(平沼灌次): 창씨는 본관에서 가져오고, '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윤김자 - 히라누마 가네코(平沼金子)
- 윤길중 - 히라누마 요시시게(平沼吉重;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누마 기치주(平沼吉重; 이름 부분을 음독): '길중'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도중 - 이토 다비시게(伊東度重;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도주(伊東度重; 이름 부분을 음독): '도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동주 - 히라누마 도주(平沼東柱): 성만 일본식으로 바꾸고, '동주'는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본관 파평 윤씨에서 평(平)을 따왔고, 파평 윤씨의 시조 윤신달이 연못에 떠 있던 옥함 속 아이였다는 설화에서 소(沼 : 연못)를 따온 것이다. 당시 일본 유학에 필요한 도항증명서 발급 탓에, 창씨명을 만들었다. 자세한 사항은 윤동주 문서 각주 참고.
- 윤두헌 - 히라누마 분포(平沼文甫): 상술된 윤동주 시인의 사례와 동일한 창씨 방법이다.
- 윤만영 - 히라카와 모리오(平川盛雄)
- 윤범행 - 이토 노리유키(伊東範行;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한코(伊東範行; 이름 부분을 음독): '범행'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병운 - 히라누마 헤이운(平沼秉運): '병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병희 - 마쓰다 헤이키(松田秉禧): '병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복영 - 히라누마 후쿠에이(平沼福永)
- 윤복이 - 이토 후쿠이(伊東福伊)
- 윤사혁 - 히라카와 히로토시(平川博敏)
- 윤상구 - 이토 소큐(伊東相求): '상구'를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윤상덕 - 이무라 쇼토쿠(伊村商德): ‘상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상필 - 이하라 아이스케(伊原相弼; 이름 부분을 훈독), 이하라 소히쓰(伊原相弼; 이름 부분을 음독): '상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상희 - 히라이 소키(平井相曦): '상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석중 - 히라오카 나가이에(平岡永宇;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오카 에이우(平岡永宇; 이름 부분을 음독)
- 윤석칠 - 히라누마 세키시치(平沼石七)
- 윤선 - 히라누마 사다코(平沼貞子)
- 윤억병 - 마쓰오카 게이지(松岡敬治)
- 윤이신 - 이이즈미 쓰구노리(伊泉二申; 이름 부분을 훈독), 이이즈미 니신(伊泉二申; 이름 부분을 음독): '이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익선 - 히라누마 에이이치(平沼榮一)
- 윤종화 - 이자카 가즈오(伊坂和夫)
- 윤창로 - 이토 기로(伊藤喜老)
- 윤치소 - 이토 지쇼(伊東致昭)
- 윤치오 - 이토 지고(伊東致旿):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오'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윤치왕 - 이토 지오(伊東致旺):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왕'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윤치주 - 히라누마 지슈(平沼致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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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 - 이토 지코(伊東致昊): 尹에 人변을 붙이고 뒤에 東을 붙여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치호'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윤치호의 경우 신문 광고를 빌려 창씨개명을 적극 추천하기도 했다.
지코가 아니다!! 물론 지코의 발음도 치코지만. 역시 기회주의적인 부역자이를 두고 한국어로 발음이 비슷한 '이 똥 치워'라고 윤치호를 욕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 윤태림 - 이토 다이린(伊藤泰林): '태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태빈 - 이토 야스아키(伊藤泰彬;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다이빈(伊藤泰彬; 이름 부분을 음독): '태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윤필석 - 히라누마 마스코(平沼增子)
- 윤형남 - 히라노 교난(平野亨南): 이름 부분으로 형남을 그대로 썼다.
- 윤효중 - 이토 다카시게(伊東孝重; 이름 부분을 훈독), 이토 고주(伊東孝重; 이름 부분을 음독): '효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음순남 - 무라타 노리히사(村田德壽; 이름 부분을 훈독), 무라타 도쿠주(村田德壽;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각종 - 아오야마 가쿠쇼(靑山覺鍾): '각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녕 - 야스하라 고네이(靖原甲寧): '갑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룡 - 다마다 고류(玉田甲龍): ‘갑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용 - 오타 가즈오(大田一夫) / 나가카와 고요(永川甲用): '갑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갑성 - 이와모토 세이이치(岩本正一)
- 이강수 - 구와타 도슈(桑田唐洙)
- 이강원 - 히가시조노 야스모토(東園康元; 이름 부분을 훈독), 히가시조노 고겐(東園康元; 이름 부분을 음독): '강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강혁 - 리하라 고카쿠(李原康爀): 이/강혁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강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겸제 - 후쿠다 겐지(福田謙治): '겸'(謙)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이경린 - 아사키 게이린(朝木景麟)
- 이경봉 - 리무라 고후(李村庚封) / 교가쿠 호켄(許學鳳憲) / 리무라 다이호(李村泰鳳)
- 이경식 - 리 게이쇼쿠(李敬植)
- 이경우 - 오모리 기미히로(大森卿弘): '경'(卿)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이경원 - 고다 도라아쓰(孝田寅淳; 이름 부분을 훈독), 고다 인준(孝田寅淳;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경철 - 고모토 게이테쓰(孝本敬喆)
- 이경희[176] - 리노이에 게이키(李家敬姬): 이/경희로 분리하여 성씨에 家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계창 - 리노이에 기초(李家癸昶)
- 이계한 - 마쓰모토 게이조(松本啓三): '계'(啓)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공택 - 구니모토 도시오(國本敏雄)
- 이공후 - 니야마 기미아쓰(丹山公厚; 이름 부분을 훈독), 니야마 고코(丹山公厚; 이름 부분을 음독): '공후'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광근 - 구니모토 교스케(國本㳟助)
- 이광수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 香山는 일본의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도읍으로 정한 나라현 가시하라(橿原) 시에 있는 가구산(香久山)[177][178]에서 가져왔으며, 광수(光洙)의 光과 일본식 郞을 합쳐 이름으로 삼은 것.
- 이광훈 - 히로무라 미쓰히로(廣村光勳; 이름 부분을 훈독), 히로무라 고쿤(廣村光勳;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교상 - 히라키 교소(平木橋相)
- 이교식 - 미나미다 교쇼쿠(南田教植): '교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권재 - 오야마 겐사이(大山權載)
- 이구범 - 오야마 다카시(大山隆司)
- 이국빈 - 리노이에 나카오키(李家中興)
- 이규남 - 미나미 구니오(南邦雄)
- 이규면 - 마쓰노 게이벤(松野圭冕): ‘규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규완 - 아사다 료(淺田良)
- 이규태 - 이와모토 가즈나리(岩本一成)
- 이규현 - 마쓰노 다마쓰루(松野圭鉉;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노 게이켄(松野圭鉉; 이름 부분을 음독): ‘규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극훈 - 마사키 무네히로(正木極勳; 이름 부분을 훈독)
- 이근상 - 오야마 세이고(大山淸吾)
- 이근석 - 아오키 모토미쓰(靑木根皙): '근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근수 - 가미야 긴슈(桂宮瑾洙): '근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근창 - 니야마 네마사(丹山根昌; 이름 부분을 훈독), 니야마 곤쇼(丹山根昌; 이름 부분을 음독): '근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금룡 - 가야마 나가하루(香山長春)
- 이금여 - 리무라 고토나레(李村琴汝; 이름 부분을 훈독), 리무라 긴조(李村琴汝; 이름 부분을 음독) / 리무라 다쓰사와(李村龍澤; 이름 부분을 훈독), 리무라 류타쿠(李村龍澤;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금하 - 구니모토 긴지(國本錦二): ‘금’(錦)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긍종 - 미야무라 가오루(宮村薰)
- 이기동 - 나카무라 기토(中村起東): '기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명 - 리노이에 기메이(李家起明): 이/기명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家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기방 - 마쓰무라 모토히로(松村基弘): '기'(基)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복 - 기무라 기후쿠(木村基福)
- 이기선 - 구니모토 모토요시(國本基善;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기젠(國本基善;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기세 - 다카야마 모토요(高山基世): '기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순 - 가네시로 기준(金城基順)
- 이기승 - 야마무라 기쇼(山村基升): '기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기웅 - 미야무라 다쓰오(宮村起雄)
- 이기을 - 아오미 기오쓰(靑海氣乙): 성씨는 본관에서, 이름은 그대로 따와 사용하였다.
- 이기응 - 시미즈 미쓰조(淸水光三)
- 이기찬 - 야스시로 하지메(安城基; 이름 부분을 훈독 1), 야스시로 모토(安城基; 이름 부분을 훈독 2), 야스시로 기(安城基; 이름 부분을 훈독 3): 이름 부분의 ’기‘(基)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길용 - 기무라 요시타쓰(木村吉龍; 이름 부분을 훈독), 기무라 기치류(木村吉龍; 이름 부분을 음독)
- 이길춘 - 히로무라 요시하루(廣村吉春)
- 이낙림 - 기무라 라쿠린(木村洛林)
- 이난영 - 오카 란코(岡蘭子): '난'(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남수[179] - 나가야마 난슈(永山南洙): ’남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남식 - 시모오카 요시카즈(下岡義和)
- 이내붕 - 구니모토 라이호(國本來鵬)
- 이능섭 - 도엔지 노쇼(東園寺能燮) / 도엔지 노쇼(東園寺能昭): '능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대영 - 우미히가시 다카토모(海東孝朋; 성씨 부분을 훈독), 가이토 다카토모(海東孝朋; 성씨 부분을 음독)
- 이대영 - 고마시로 다이에이(駒城大榮): '대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대의 - 구니모토 다이기(國本大儀)
- 이단 - 마쓰모토 아마오(松本天雄) / 마쓰모토 아키사이(松本明宰) / 마쓰모토 도모사이(松本朋宰)
- 이달례 - 기요미즈 다쓰레이(淸水達澧): ‘달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덕숙 - 이와키 센우(岩木宣雨)
- 이덕진 - 오야마 요시미치(大山善道)
- 이도재[180] - 리야마 도자이(李山道在): 이/도재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돈화 - 시로야마 가즈구마(白山一熊)
- 이동근 - 이다 도콘(井田東根)
- 이동욱[181] - 리카와 도교쿠(李河東旭): 이/동욱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河'를 붙여 창씨하고, '동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동인 - 아사노 도진(朝野東仁) / 아사노 도진(淺野東仁): '동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朝野라는 창씨명은 '전주 이씨 → 조선'에서 온 듯. 개화승으로 유명한 그 이동인이다. 임종국의 연구에 의하면 창씨개명 1호. 승려라는 것도 일본식 불교인 진종대곡파(眞宗大谷派)의 본찰인 히가시혼간지에서 법계를 받았다. 이전에 범어사와 통도사에서 정식승적에 올랐는지는 이론이 있으나, 본격적인 활동시기에 일본에서 법계를 받은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개화승 부분도 논란이 있어서, 임종국은 이동인을 이중스파이로 지목했다.
- 이동철 - 미야모토 도테쓰(宮本銅哲)
- 이동화 - 기코 도카(木子東華): 성씨 이(李)를 파자하여 기코(木子)로 창씨하고, '동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동화[182] - 리노이에 마코토(李家實)
- 이동혁 - 모리야마 하쓰미(森山肇三; 이름 부분을 훈독), 모리야마 조산(森山肇三; 이름 부분을 음독)
- 이두연 - 마쓰타니 도엔(松谷斗淵): '두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득춘 - 간야마 쇼키(完山鍾喜)
- 이만봉 - 미야모토 반호(宮本萬奉)
- 이만성 - 리하라 반세이(李原萬成)
- 이만수 - 오히라 반슈(大平晩秀): 이름으로 만수를 사용하였다.
- 이만식 - 가와하라 히라사다(河原平定; 이름 부분을 훈독), 가와하라 헤이테이(河原平定; 이름 부분을 음독)
- 이만종 - 미야무라 반쇼(宮村萬鍾) / 미야무라 도라야스(宮村寅泰; 이름 부분을 훈독), 미야무라 인타이(宮村寅泰; 이름 부분을 음독)
- 이만준 - 마키야마 반슌(牧山萬濬): '만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묘묵 - 리노미야 우다마(李宮卯默; 이름 부분을 훈독), 리노미야 보모쿠(李宮卯默; 이름 부분을 음독): '묘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교 - 아키야마 히데미네(秋山秀峰)
- 이명구 - 마키하라 히로사다(牧原廣定)
- 이명박 -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그의 본관인 경주시의 옛 이름 월성(月城)에서 따와 月山이라 창씨하였다. 일본 오사카 출생으로 유년기를 일본에서 보냈다. 따라서 통명이었던 아키히로가 주가 되어, 그것을 그냥 한국이름 '명박'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183]
- 이명섭 - 리미야 메이쇼(李宮明燮): '명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세 - 하루야마 아키요(春山明世): '명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우 - 세토 아키라(瀬戸明): '명'(明)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준 - 구니모토 아키토시(國本明俊)
- 이명직 - 마키노 메이쇼쿠(牧野明植): '명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명흠 - 고토야마 이즈미(琴山泉)
- 이명희 - 마쓰바라 미오코(松原澪子)
- 이무영 - 나가요시 야스오(永佳泰雄; 성씨 부분을 훈독), 에이카 야스오(永佳泰雄; 성씨 부분을 음독)
- 이민수[184] - 아오키 빈슈(靑木敏洙): ‘민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민제 - 기무라 민사이(木村民濟)
- 이민호 - 요시우미 도시히로(芳湖敏浩;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우미 빈코(芳湖敏浩; 이름 부분을 음독): '민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범익 - 기요하라 노리마스(淸原範益; 이름 부분을 훈독), 기요하라 한에키(淸原範益; 이름 부분을 음독): '범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근 - 도요무라 헤이콘(豊村炳根)
- 이병렬 - 기요하라 헤이레쓰(淸原炳烈): '병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수 - 모모이 류지(桃井隆治)
- 이병숙 - 기야마 도이치(木山登一)
- 이병식 - 히로바야시 유사쿠(廣林雄策)
- 이병용 - 오와다 헤이요(大和田炳瑢) / 오와다 모토이치(大和田元一): '병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재 - 히라카와 헤이사이(平川炳㦳): ‘병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태 - 히로무라 도요마스(廣村豊益)
- 이병학 - 아오키 헤이가쿠(靑木柄學): '병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병호 - 가와모토 히사오(川本久雄)
- 이보담 - 기무라 호탄(木村寶潭): '보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복만 - 미야모토 노리타케(宮本德武)
- 이복준 - 구니모토 도시토미(國本俊福;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슌후쿠(國本俊福; 이름 부분을 음독) / 구니모토 도미토시(國本福俊;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후쿠슌(國本福俊; 이름 부분을 음독)
- 이봉재 - 구니모토 호사이(國本鳳宰)
- 이봉창 -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 / 아사야마 쇼이치(朝山昌一) / 마쓰이 가즈오(松井一夫): 아래 이완용처럼 일제가 창씨개명을 강요하지 않았던 시절에 알아서 일본식 이름을 붙인 것이다. 이는 이봉창이 일본을 좋아하여 뼛속까지 일본인이 되고자 노력했기 때문. 그는 일본어도 아주 잘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일제강점기의 조선인으로서 차별을 벗어날 수 없었고, 이것이 그가 독립운동에 뛰어든 계기가 된다.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임시정부를 찾아갔을 땐 유창한 일본어 실력과 일본식 이름으로 인해 친일파 밀정으로 오해당한 바 있다. 다행히 김구가 이 때 이봉창이 내뱉은 말 "당신들 너무 한심한 거 아니오? 나 같았으면 그 때(덴노의 행차) 수류탄만 있었으면 콱"을 듣고 일단은 받아줬지만, 감시를 붙이는 등 한동안 안 믿었다고 한다.
- 이부원 - 구니모토 다쓰야스(國本龍康;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류코(國本龍康;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삼철 - 아오키 산테쓰(淸水三哲)
- 이삼탁 - 미야모토 산타쿠(宮本參鐸): ‘삼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상기 - 사가와 아이모토(佐川相基; 이름 부분을 훈독), 사가와 소키(佐川相基; 이름 부분을 음독): '상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상만 - 하야마 도모오(巴山智雄)
- 이상문 - 마쓰오카 에이지(松岡潁治)
- 이상배 - 요시다 유키히로(義田幸弘)
- 이상순 - 니시하라 소준(西原相淳)
- 이상용[185] - 미즈타니 소요(水谷相容): ‘상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상용[186] - 구니모토 규세이(國本救生)
- 이상태 - 후루키 노부노리(古木獻實)
- 이상혁 - 히라이 쇼카쿠(平伊商赫) / 히라이 소카쿠(平伊相赫)
- 이상호 - 오야마 아이토라(大山相虎;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쇼코(大山相虎;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상훈 - 도요타 사치유키(豊田祥薰)
- 이서국 - 도요후치 즈이코쿠(豊淵瑞國)
- 이서향 - 기모토 고레유키(木元是之)
- 이석규 - 오히가시 구니오(大東國男; 성씨 부분을 훈독), 다이토 구니오(大東國男; 성씨 부분을 음독): 상술된 박남규의 사례와 비슷하게 자신이 지지하던 일본 제국의 대동아 공영권을 이름에 담아 대동국의(大東國)남아(男)라고 작명하였다.[187]
- 이석구 - 리야마 세키큐(李山奭求) / 리야마 세키(李山奭): 전자는 이/석구로 분리하여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였고, 이름으로 석(奭)과 석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석두 - 이와모토 분진(岩本文璡) / 이와모토 이에히로(岩本宇弘)
- 이석범 - 리미야 샤쿠한(李宮錫範)
- 이석순 - 도요타 샤쿠준(豊田錫淳)
- 이석우 - 기무라 도시오(木村敏夫)
- 이석훈 - 마키 히로시(牧洋)
- 이선봉 - 야마모토 센호(山本先奉)
- 이선홍 - 다케다 젠코(武田善洪) / 다케다 히데오(武田英雄): '선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선화 - 모리야마 후미코(森山芙美子)
- 이성근 - 가나가와 아키라(金川聖): '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래 - 미야모토 고타로(宮本光太郞)
- 이성범 - 도요무라 세이한(豊村聖範): '성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원 - 기무라 세이겐(木村星源): ‘성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성재 - 오모토 마사로(大本正郎)
- 이성환 - 야스오키 세이칸(安興晟煥; 성씨 부분을 훈독), 안코 세이칸(安興晟煥; 성씨 부분을 음독): '성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세영 - 모기 사카에(茂木榮)
- 이수길 - 시로키 히사키치(城木壽吉)
- 이수암 - 시바야마 슈간(芝山秀巖)
- 이수영 - 히라모토 히데나가(平本秀永;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모토 슈에이(平本秀永; 이름 부분을 음독): ‘수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수원 - 이시다 모리모토(石田守元; 이름 부분을 훈독), 이시다 슈겐(石田守元;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수철 - 히로모토 주테쓰(廣本壽哲)
- 이수현 - 도쿠하라 모리쓰루(德原守鉉; 이름 부분을 훈독), 도쿠하라 슈겐(德原守鉉; 이름 부분을 음독): '수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숙종 - 미야무라 주쿠쇼(宮村淑鍾): '숙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순재 - 히로키 준사이(廣城順載): 본관인 광주에서 廣자를 따와 성씨를 창씨한 것으로 보인다. 이름 부분은 "순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 이승구 - 미시마 쇼이치(三島承一): '승'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승동 - 구니모토 쇼도(國本昇童)
- 이승우 - 고무라 쇼우(梧村升雨): '승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승찬[188] - 다카기 노보루(高木昇): ‘승’(昇)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심재 - 히로무라 시치후쿠(廣村七福)
- 이심훈 - 미야무라 요시오(宮村榮夫)
- 이아지 - 미나미카와 아키(南川阿只)
- 이양로 - 다카모리 요시로(高森良魯)
- 이연오 - 도미히라 엔고(富平演五)
- 이연형 - 이시무라 렌코(石村連珩)
- 이영근 - 가와모토 다쓰오(河本龍雄) / 우에다 다쓰오(上田龍雄)
- 이영만 - 호시야마 만지로(星山萬次郞)
- 이영석 - 아키타 네이샤쿠(秋田寗錫): ‘영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영수 - 구니모토 아키요시(國本明克)
- 이영숙 - 마키야마 게이코(牧山慶子)
- 이영준 - 기하라 에이준(木原永淳)
- 이영택 - 마쓰모토 나카시(松本仲司)
- 이영환 - 아사노 에이칸(朝野榮還): '영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영희 - 엔리 후쿠오(延李福男)
- 이오복 - 마쓰모토 다다시게(松本均薰)
- 이오영 - 요시카와 고에이(吉川午永)
- 이옥덕 - 가와모토 교쿠토쿠(川本玉德)
- 이옥순 - 구니시로 다마노리(國城玉順;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시로 교쿠준(國城玉順; 이름 부분을 음독): ‘옥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완손 - 구니모토 간손(國本完孫)
- 이완용 - 리노이에 간요(李家完用):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완용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의외로 생전에 일본어는 거의 못했다고 한다. 대신 영어는 매우 유창하였다고 한다.
- 이완종 - 미야무라 간이치(宮村完一): '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 - 오하시 슈류(大橋集龍): 개명 전 이름인 '집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설 - 미야모토 요세쓰(宮本容卨): '용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용수 - 가키무네 구니타다(桓宗邦忠)
- 이용안 - 히로무라 요간(廣村容顔)
- 이용운 - 호시야마 요운(星山用云)
- 이용환 - 마쓰바라 요칸(松原用煥)
- 이용휘 - 요시카와 히로마사(義川浩正)
- 이운붕 - 도요나가 호우(豊永鵬宇): '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원국 - 구니모토 모토쿠니(國本源國) / 구니모토 다케나리(國本武成)
- 이원규 - 모리 겐타이(茂李源泰) / 모리 하라미(毛利原三): '원'(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원우 - 나카하라 하쓰오(中原初夫)
- 이원춘 - 간야마 모토하루(完山元春)
- 이원형 - 산도 마사요시(三道正義)
- 이윤종 - 미야무라 인쇼(宮村允鍾): '윤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은영 - 하라야마 노리스케(原山德助)
- 이은용 - 스기모토 긴류(杉本銀龍)
- 이응준 - 가야마 다케토시(香山武俊): '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영은[189] - 마쓰가와 에이긴(松川永垠): ‘영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영찬 - 야스카와 에이산(安川永贊): '영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윤세 - 리노이에 인세(李家允世): 성씨에 家를 붙여서 창씨. 의미는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윤세'
- 이윤영 - 쓰키시로 에이이치(月城榮一)
- 이원보 - 리노이에 겐포(李家源甫): 성씨에 家를 붙여서 창씨. 의미는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원보'
- 이원찬[190] - 하타니 마쓰토요(羽溪松豊; 이름 부분을 훈독) / 하타니 쇼호(羽溪松豊; 이름 부분을 음독): 본관인 우계를 가져와서 창씨하였다.
- 이원창[191] - 고마키 히데야스(駒城秀康)
- 이익화 - 니시하라 요쿠가(西原翊華): '익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익흥 - 오야마 마스오키(大山益興; 이름 부분을 훈독), 오야마 에키교(大山益興; 이름 부분을 음독): '익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인기 - 호시무라 도라오(星村寅夫): ’인‘(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인범 - 요시모토 히토마사(義本仁範; 이름 부분을 훈독), 요시모토 진한(義本仁範; 이름 부분을 음독): '인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인숙 - 나카야마 이에하쿠(中山家伯)
- 이인주 - 이와모토 닌슈(岩本仁周)
- 이임재 - 가미야 후미오(桂宮文雄)
- 이장우 - 이와무라 아키아메(岩村章雨;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무라 쇼우(岩村章雨; 이름 부분을 음독): '장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재규 - 니와 사이케이(新和載圭)
- 이재기 - 미야모토 데이린(宮本廷麟): 이름은 개명 이전의 본명인 '정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이재복 - 아키타 미호(秋田美穗)
- 이재선 - 이와모토 구니요시(岩本國義)
- 이재순 - 아오키 자이슈쿠(靑本在夙)
- 이재옥[192] - 시게무라 다케오(茂村武雄)
- 이재인 - 오시로 노리코(大城宗子)
- 이재일[193] - 모토하라 미노루(本原實)
- 이재학 - 오하라 후미오(大原郁生)
- 이전용 - 구니모토 슈요(國本周鎔)
- 이정걸 - 야마모토 세이게쓰(山本正杰): ‘정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정규 - 구니모토 데이케이(國本貞圭)
- 이정남 - 도쿠무라 사다오(德村貞男)
- 이정만[194] - 간야마 데이반(完山廷萬): ‘정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정석 - 요시마키 도키(吉卷東奎)
- 이정섭[195] - 미야모토 아키쇼(宮本晶燮): '정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정섭 - 에야마 마사아키(江山正明)
- 이정순[196] - 다카미쓰 조준(高光丁順)
- 이정순[197] - 리노이에 데이준(李家廷順)
- 이정철 - 야마모토 세이테쓰(山本正喆)
- 이정현 - 다쓰야마 데이켄(龍山定鉉)
- 이제국 - 구니모토 아오네(國本蒼根;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소콘(國本蒼根; 이름 부분을 음독) / 구니모토 라쿠코쿠(國本洛國)
- 이제술 - 미야모토 사이주쓰(宮本濟述)
- 이종구 - 모리타 가네히사(森田鍾久; 이름 부분을 훈독), 모리타 쇼쿠(森田鍾久; 이름 부분을 음독): ‘종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남 - 스모다 쇼난(李田鐘南): 이/종남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종덕 - 에모토 쇼도쿠(江本鍾悳): '종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렬 - 이와쿠니 쇼레쓰(岩邦鍾烈)
- 이종린 - 미즈하라 쇼린(瑞原鍾麟): '종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만[198] - 쓰키시로 쇼마(月城鍾萬): '종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만[199] - 도쿠모리 쇼반(德守鍾晩)
- 이종섭 - 마쓰타니 헤이오(松谷平雄)
- 이종술 - 마쓰이와 데쓰(松岩徹)
- 이종실 - 야스무라 쇼지쓰(安村鐘實): '종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욱 - 히로타 쇼이쿠(廣田鐘郁): '종욱'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이종은 - 시바무라 쇼인(芝村鍾殷): '종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준 - 이와무라 쇼준(岩村鐘駿): '종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태 - 이와모토 쇼타이(岩本鐘泰): '종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태 - 스즈키 기이치로(鈴木貴一郎)
- 이종항 - 아오키 가네쓰네(靑木鐘恒; 이름 부분을 훈독), 아오키 쇼코(靑木鐘恒; 이름 부분을 음독): '종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종호 - 히로무라 쇼코(廣村鍾浩)
- 이주상[200] - 오야마 주소(大山冑相): '주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주필 - 가와모토 슈스케(河本周弼)
- 이준식 - 가와하라 구니노리(河原邦典)
- 이준옥 - 미쓰이 도시타마(三井俊玉; 이름 부분을 훈독), 미쓰이 슌교쿠(三井俊玉;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준항 - 스모다 리젠(李田李善)
- 이준호 - 미모토 슌코(三本濬鎬): ‘준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중섭 - 호시야마 주쇼(星山重燮)
- 이중수 - 마시로 나카히데(眞城仲秀): '중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지응 - 마키야마 시오(牧山芝膺)
- 이진영[201] - 기바야마 신에이(牙山軫榮): ‘진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진호 - 리노이에 신코(李家軫鎬): 글자 그대로 이씨 집안의 진호라는 뜻이다. 이완용과 동일한 창씨 방법이다.
- 이찬 - 아오바 가오루(靑葉薰)
- 이찬용 - 마쓰가와 아키요시(松川明義) / 마쓰가와 산요(松川燦容): '찬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찬응 - 나가야마 산오(永山贊應)
- 이창근 - 히라마쓰 쇼콘(平松昌根): '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복 - 기하라 시게루(木原茂)
- 이창수[202] - 마쓰모토 아키라(松本彰)
- 이창수[203] - 구니모토 쇼주(國本昌洙): '창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수[204] - 기무라 쇼주(木村昌壽)
- 이창용 - 히로카와 소요(廣川創用): '창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창의 - 야마노 쇼기(山野昌儀)
- 이채옥 - 아오야마 사이교쿠(靑山彩鈺)
- 이천귀 - 히라모토 센키(平本千貴)
- 이철 - 아오야마 아키라(靑山哲; 이름 부분을 훈독) / 아오야마 데쓰(靑山哲; 이름 부분을 음독): '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초생 - 아키타 유타카(秋田豊)
- 이추형 - 이시무라 슈코(石村秋珩)
- 이춘덕 - 교야마 다케마사(京山武正; 이름 부분을 훈독), 교야마 부세이(京山武正;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춘영 - 다쓰모토 슌에이(龍本春榮)
- 이춘화 - 기노시타 요코(木下洋子)
- 이충구 - 마키야마 다다모토(牧山忠求)
- 이충의 - 구니모토 다다요시(國本忠儀)
- 이치홍 - 미쓰야마 하루히로(光山治洪; 이름 부분을 훈독), 미쓰야마 지코(光山治洪; 이름 부분을 음독): ‘치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칠성 - 아오미 시치세이(靑海七成)
- 이태길 - 도쿠가와 다이키치(德川泰吉): '태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순 - 야마키 다이준(山木泰淳): '태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용 - 마쓰자와 다이요(松澤泰鎔), 마쓰자와 나리요시(松澤成宣): '태용'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태율 - 시바야마 다이리쓰(芝山太律)
- 이태준 - 아오모토 모토히로(靑本基弘)
- 이태희 - 미에 다이키(三江太熙) / 미에 다쓰오(三江達夫): '태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택규 - 마키야마 다쿠케이(牧山宅珪): '택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판덕 - 미야모토 사다노리(宮本判德)
- 이판수 - 호시야마 시게토시(星山成淑)
- 이판암 - 구니모토 쇼류(國本承龍)
- 이판오 - 리시로 가하쿠(李城化白)
- 이패울 - 이와오카 하우쓰(岩岡覇鬱) / 이와오카 하우쓰로(岩岡覇鬱郞)
- 이학래 - 히로무라 가쿠라이(廣村鶴來)
- 이한득 - 간야마 간토쿠(完山漢得)
- 이한림 - 가스미 간린(香住翰林): ‘한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한창 - 히라카와 신지(平川眞次)
- 이항녕 - 노베야마 미쓰타로(延山光太郎)
- 이해용 - 산슈 가이요(三州海用): '해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해익 - 와나가 히로미쓰(和永博光)
- 이현렴 - 리노이에 겐렌(李家顯濂)
- 이현재 - 히로카와 마사토시(廣川賢載)
- 이형근 -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 이형산 - 다케다 교산(武田亨山)
- 이호 - 리노이에 히로시(李家澔): '호'를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이호선 - 구니모토 다카요시(國本鎬善; 이름 부분을 훈독), 구니모토 고젠(國本鎬善; 이름 부분을 음독)
- 이호철 - 야마모토 고테쓰(山本湖喆)
- 이홍규 - 마루야마 아키오(丸山晃生)
- 이홍기 - 이와이 고키(岩井鴻基)
- 이홍묵 - 다케다 미쓰모리(武田光盛)
- 이홍복 - 미에 세이지(三江成二)
- 이홍빈 - 니카와 히로아키(仁川洪彬; 이름 부분을 훈독), 니카와 고힌(仁川洪彬; 이름 부분을 음독): '홍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화복 - 마키야마 가후쿠(牧山化馥)
- 이황월 - 미나미카와 아키(南川阿只)
- 이효식 - 오하라 소이치로(大原總一郞)
- 이훈구 - 스모다 히로히사(李田勳久; 이름 부분을 훈독), 스모다 군쿄(李田勳久; 이름 부분을 음독): 이/훈구로 분리하여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이흥렬 - 나오키 교네쓰(直木興烈) : '흥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흥재 - 히로카와 마사우미(廣川正海)
- 이희간 - 우메다 지로(梅田二郎)
- 이희남 - 다케하라 히카루(竹原熙) / 다케하라 히로시(竹原弘)
- 이희순 - 시바야마 기준(芝山熙淳): '희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희승 - 기노시타 기쇼(木下熙昇)
- 이희적 - 히라이 기테키(平居熙迪): '희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이희준 - 아오키 엔키치(靑木延吉)
- 이희춘 - 기무라 요시하루(木村喜春; 이름 부분을 훈독), 기무라 기슌(木村喜春; 이름 부분을 음독): ‘희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인재웅[205] - 마쓰이 히데오(松井秀雄)
- 인정식 - 기류 이치오(桐生一雄)
- 인창환 - 다카기 쇼칸(高木昌桓): '창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인태식 - 다카기 야스하루(高木泰治; 이름 부분을 훈독), 다카기 다이지(高木泰治; 이름 부분을 음독): '태'(泰)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갑준 - 도요카와 고준(豊川甲準): ‘갑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동혁 - 도요하라 도가쿠(豊原東爀): '동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문환 - 도요카와 후미오(豊川文夫): 본관인 풍천을 가져와 창씨하고, 문(文)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임병식 - 하야시 쓰네오(林常雄):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창씨.
- 임석진 - 하야시바라 요시(林原吉; 이름 부분을 훈독), 하야시바라 키치(林原吉;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原을 붙여 창씨하였다.
- 임선규 - 하야시 나카로(林中郎):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창씨하였다.
- 임숙재 - 도요카와 주쿠사이(豊川淑宰): 본관인 풍천(豊川)을 가져와 창씨하고, '숙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원빈 - 도요카와 모토아키(豊川元彬; 이름 부분을 훈독), 도요카와 겐힌(豊川元彬; 이름 부분을 음독): ‘원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임용길 - 도요카와 류키치(豊川龍吉): 본관인 풍천을 가져와 사용하고, 이름 부분은 '용길'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 임용태 - 도요카와 다쓰야스(豊川龍泰; 이름 부분을 훈독), 도요카와 류타(豊川龍泰; 이름 부분을 음독)
- 임창하 - 하야시 가오루(林薰)
- 임헌평 - 하야시 노리히라(林憲平; 이름 부분을 훈독), 하야시 겐페이(林憲平;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는 일본에도 있는 하야시(林)로 유지하고, '헌평'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ㅈ #===
- 장광곤 - 유키 나가모토(結城永元; 이름 부분을 훈독), 유키 에이겐(結城永元; 이름 부분을 음독)
- 장규원 - 다카야마 기겐(高山逵源): '규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경근 - 나가야마 게이네(長山暻根): '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기상 - 하리모토 모토스케(張元基相; 이름 부분을 훈독 1), 하리모토 모토토모(張元基相; 이름 부분을 훈독 2), 하리모토 기소(張元基相;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元을 넣어 창씨하고 기상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장기창 - 나가타 모토마사(長田基昌; 이름 부분을 훈독), 나가타 기쇼(長田基昌; 이름 부분을 음독): '기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대익 - 하리무라 다이스케(張村大翼; 이름 일부를 훈독), 하리무라 다이요쿠(張村大翼; 이름 일부를 음독): 장/대익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村'를 붙여 창씨하였다.
- 장덕조 - 마고나가 히가시(孫長東; 이름 부분을 훈독), 마고나가 도(孫永東; 이름 부분을 음독)
- 장도영 - 나가하라 미치히데(長原道英): '도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도환 - 나가모토 도칸(長本道煥): '도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두현 - 마쓰나가 도켄(松永斗鉉): 이름은 원래 이름인 두현을 그대로 따왔다.
- 장면 - 다마오카 쓰토무(玉岡勉): '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그의 본관 옥산(玉山)에서 따와 옥강(玉岡)이라 창씨하였다.
- 장병옥 - 도모노키 헤이교쿠(友軒炳玉): '병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병하 - 유미나가 마사오(弓長正雄): 성씨를 파자하여 유미나가(弓長)로 창씨하였다.
- 장봉숙 - 다마가와 호주쿠(玉川鳳塾): ‘봉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봉준 - 하리마 호슌(張間奉俊): 장/봉준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間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석상 - 우에오 이시시모(上生石霜; 이름 부분을 훈독), 우에오 샤쿠소(上生石霜; 이름 부분을 음독): '석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석원 - 오이케 류조(大池龍藏)
- 장석주 - 다카타니 요시(高谷義; 성씨 부분을 훈독 1), 다카야 요시(高谷義; 성씨 부분을 훈독 2), 다카타니 기(高谷義; 이름 부분을 음독 1), 다카야 기(高谷義; 이름 부분을 음독 2)
- 장성봉 - 나가노 하루오(長野春雄)
- 장세정 - 하리타 요사다(張田世貞; 이름 부분을 훈독), 하리타 세테이(張田世貞; 이름 부분을 음독): 장/세정으로 분리한 뒤 성씨에 田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연송 - 하리야마 쓰라마쓰(張山連松; 이름 부분을 훈독), 하리야마 렌쇼(張山連松;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연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영인 - 다마야마 나가히토(玉山永仁; 이름 부분을 훈독), 다마야마 에이진(玉山永仁; 이름 부분을 음독): ‘영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영호 - 다마야마 나가히로(玉山永浩; 이름 부분을 훈독), 다마야마 에이코(玉山永浩; 이름 부분을 음독): ‘영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영후 - 조몬 에이코(張問榮厚): 장/영후로 분리하여 성씨에 問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용관 - 야스모토 류칸(安本龍官): '용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우식 - 다마야마 도모히코(玉山友彦)
- 장윤식 - 오사 준지(長潤二) / 오사 세이지(長淸二): 윤(潤)을 그대로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장응상 - 도쿠야마 다카아쓰(德山喬厚)
- 장응진 - 하리마 오신(張間應震): 성씨에 '間'를 붙여 창씨하고, '응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인근 - 시마다 하리카즈(島田張一; 이름 부분을 훈독), 시마다 조이치(島田張一; 이름 부분을 음독)
- 장준식 - 하세가와 도시나오(長谷川俊植; 이름 부분을 훈독), 하세가와 슌쇼쿠(長谷川俊植; 이름 부분을 음독): '준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영 - 하리에이 도시히데(張營俊英) / 하리나가 도시히데(張永俊英) : '준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준하 - 하리야스[206] 슌가(張安俊河): 장/준하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安을 넣어 창씨하였다. 역시 당시에 흔한 창씨법이다.
- 장준환 - 다마야마 도시아키(玉山駿煥; 이름 부분을 훈독), 다마야마 슌칸(玉山駿煥; 이름 부분을 음독): ‘준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직상 - 하리모토 기비스케(張元稷相; 이름 부분을 훈독 1), 하리모토 기비토모(張元稷相; 이름 부분을 훈독 2), 하리모토 쇼쿠쇼(張元稷相; 이름 부분을 음독): '장'씨 뒤에 元을 넣어서 창씨했다. 이름은 그대로 가져옴.
- 장창국 - 마쓰모토 도시하루(松本敏治)
- 장하진[207] - 유우키 기요히라(結城淸平; 이름 부분을 훈독), 유우키 세이페이(結城淸平; 이름 부분을 음독)
- 장한철 - 하리모토 간테쓰(張元漢哲): 장/한철로 분리하여 성씨에 元을 넣어 창씨하였다.
- 장헌근 - 하리마 노리시로(張間憲四郎): 성씨 뒤에 '間'을 붙여 창씨하고, 이름 부분에 '헌'을 사용하였다.
- 장헌식 - 하리마 노리나오(張間憲植; 이름 부분을 훈독), 하리마 겐쇼쿠(張間憲植; 이름 부분을 음독): '헌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혁주 - 노구치 미노루(野口稔) / 노구치 가쿠추(野口赫宙): '혁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장현식 - 마쓰야마 다케오(松山武雄)
- 장홍식 - 하리마 히로나오(張間弘植; 이름 부분을 훈독) 하리마 고쇼쿠(張間弘植; 이름 부분을 음독): 장/홍식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間를 넣어 창씨하였다.
- 장효상 - 우에카와 고소(上川孝相)
- 장훈 - 하리모토 이사오(張本勳): '장'에다 本을 넣어 창씨했다. 이름 부분은 "훈"을 그대로 사용.
- 전기석 - 미나미다 기샤쿠(南田基錫)
- 전기호 - 다나카 기코(田中淇昊) / 다나카 가요(田中河溶)
- 전덕룡 - 다하라 도쿠류(田原德龍):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덕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두업 - 게이야마 마스노리(慶山斗業; 이름 부분을 훈독), 게이야마 도교(慶山斗業; 이름 부분을 음독)
- 전봉덕 - 다나카 호토쿠(田中鳳德): 이름 부분으로 봉덕을 그대로 썼다.
- 전병하 - 젠모토 기스케(全本吉助)
- 전병희 - 다무라 헤이키(田村秉熙)
- 전석숭 - 마쓰이 시게요시(松井重喜)
- 전석영 - 마쓰다 다마오(松田圭生)
- 전성욱 - 에하라 세이교쿠(江原聖旭): '성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순평 - 다무라 준페이(田村順平)
- 전승수 - 미야케 가쓰히데(三宅勝秀): '승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원강 - 마쓰다 노리히데(松田範秀;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다 한쇼(松田範秀; 이름 부분을 음독): 족보명인 ‘한수’(範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예용 - 에하라 레이조(江原禮三): '예'(禮)를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전의근 - 오하라 요시타네(大原義植)
- 전정현 - 니시야마 마사오(西山正雄)
- 전중근 - 마쓰야마 나카네(松山仲根;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야마 주콘(松山仲根; 이름 부분을 음독): ‘중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창근[208] - 이즈미 마사네(泉昌根; 이름 부분을 음독), 이즈미 쇼콘(泉昌根; 이름 부분을 훈독): ‘창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전천수 - 나카무라 다이타로(中村大太郞)
- 전최식 - 미야모토 다카타네(宮本最植)
- 전태현 - 히라노 다이켄(平野泰鉉) / 히라노 히로요시(平野泰賢;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노 다이켄(平野泰賢; 이름 부분을 음독)
- 전택부 - 젠케 다쿠후(全家澤鳧): 창씨개명 당시에 전씨 집안이라는 것을 유지하기 위해 성을 '전가(全家)'로 했다고 생존 당시 KBS 프로그램인 《사랑방중계》에서 밝힌 바 있다. 이름 부분은 '택부'를 그대로 사용. 덤으로 호인 '오리'는 이름자에 있는 鳧(물오리 부)에서 따온 듯.
- 전필순 - 히라야스 요네즈(平康米洲)
- 전홍주 - 다모토 히로우네(田本弘疇; 이름 부분을 훈독), 다모토 고추(田本弘疇; 이름 부분을 음독)
- 전희석 - 나쓰다 기세키(夏田熙奭)
- 정광조 - 가와우에 히로토모(川上廣朝): '광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광해 - 마쓰나가 미쓰타카(松永光隆)
- 정건영 -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
- 정건유 - 가네우라 다케히로(金浦健裕): '건유'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교원 - 도리카와 교겐(鳥川僑源): '교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섭 - 우미모토 후미카즈(海本奎燮; 이름 부분을 훈독), 우미모토 게이쇼(海本奎燮; 이름 부분을 음독): '규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식 - 우카와 기요나오(烏川圭植; 이름 부분을 훈독), 우카와 게이쇼쿠(烏川圭植; 이름 부분을 음독): '규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규환 - 라이야마 게이칸(萊山圭煥): '규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기창 - 니데하라 모토마사(日出原基昌): '기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209]
- 정난교 - 나카하라 유조(中原雄三) / 나카하라 헤이키치(中原平吉) / 우미히라 란쿄(海平蘭敎): 창씨개명한 이름이 이례적으로 3개나 있는 인물이다. 첫번째 이름은 갑신정변 실패 이후 망명길에 지토세마루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三郞)[210]가 직접 지어준 이름이고 세번째 이름은 1940년에 창씨 개명령이 떨어졌을 때 개명했던 이름이다.
- 정남균 - 마쓰바라 미나오(松原南均;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바라 난긴(松原南均; 이름 부분을 음독): '남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노진 - 긴조 로친(錦城魯鎭)
- 정대건 - 가와히가시 반주(河東萬壽)
- 정대길 - 히다카 다이키치(日高大吉): ‘대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대윤[211] - 가와히가시 지토시(河東千壽; 이름 부분을 훈독), 가와히가시 센주(河東千壽; 이름 부분을 음독)
- 정목식 - 히다카 에이쇼쿠(日高榮植): 본명에서 마지막 한자 ‘식’(植)을 이름 부분에 사용하였다.
- 정문규 - 지야마 분케이(智山文圭)
- 정민조 - 마쓰나가 미쓰히로(松永光弘)
- 정상봉[212] - 다마다 기요타로(玉田淸太郎)
- 정석모 - 모미지가와 세키보(楓川碩謨): '석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석용 - 마쓰가와 샤쿠요(松川錫溶): '석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선래 - 나카하라 젠라이(中原善來): ‘선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수부 - 가와히가시 에이조(河東榮造)
- 정순갑[213] - 야마다 유지로(山田祐次良)
- 정순호 - 가와히가시 준코(河東淳浩): ‘순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승수 - 오야마 가쓰오(大山勝秀)
- 정승종 - 가와하라 시게오(河原重夫)
- 정연기 - 구사모토 젠키(草本然基): '연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영숙 - 후쿠나가 시즈코(福永靜子)
- 정영주[214] - 하나야마 에이슈(華山永周): ‘영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용신 - 아오야마 신스케(靑山信介): '신'(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운석 - 히가시모토 운세키(東本雲碩): ‘운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운성 - 고마쓰 운세이(小松雲成): '운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운순 - 가와히가시 기요코(河東喜代子)
- 정을선 - 가와히가시 린겐(河東麟現)
- 정인과 - 도쿠가와 진카(德川仁果) / 도쿠가와 진카(悳川仁果): '인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인섭 - 히가시하라 도모카즈(東原寅燮; 이름 부분을 훈독), 히가시하라 인쇼(東原寅燮; 이름 부분을 음독): '인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인승 - 하나야마 인쇼(華山寅承)
- 정인택 - 고마쓰 미키(小松幹)
- 정일권 - 나카지마 잇켄(中島一權): '일권'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했다.
- 정일형 - 도쿠다 가즈유키(德田一亨): '일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일홍 - 도미카와 기시치(富川喜七)
- 정재춘 - 히가시무라 슈이치(東村秀一)
- 정조원 - 데이무라 아사모토(鄭村朝元; 이름 부분을 훈독), 데이무라 조겐(鄭村朝元; 이름 부분을 음독): 정/조원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였다.
- 정지용 - 오유미 오사무(大弓修): 동이족을 나타내는 한자 夷를 파자하여 大弓으로 창씨하고, 활 쏘는 자세를 뜻하는 修를 이름으로 삼았다.
- 정진호 - 히가시모토 시즈히로(東本鎭浩; 이름 부분을 훈독), 히가시모토 진코(東本鎭浩; 이름 부분을 음독): '진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태균 - 기리모토 다이킨(桐本泰均): '태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창윤 - 오야마 쇼인(大山昌允): '창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천모 - 히가시카와 텐보(東川天謨): '천모'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철수 - 우카와 데쓰슈(烏川哲洙): '철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춘수 - 가타니 슌주(禾谷春洙): '춘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충원 - 우카와 주겐(烏川忠源): '충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취열 - 기타지마 에쓰코(北島悅子)
- 정치화 - 노타카 지카(乃尊致化): '치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칠성 - 오하라 에이이치(大原榮一)
- 정형식 - 니시무라 에이쇼쿠(西村瑩植)
- 정해봉 - 니테이 가이호(日鄭海鵬): 성씨 앞에 '日'자를 붙여 창씨하고, '해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정호시 - 미쓰다 후타오(光田二夫)
- 정훈 - 가마 이사오(蒲勳): '훈'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강제 - 도모에야마 고보(巴山高芳; 성씨 일부를 훈독), 하야마 고보(巴山高芳; 성씨 일부를 음독)
- 조경하 - 아오바시 교카(靑橋鏡夏): '경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경호 - 마사마쓰 아쓰타카(昌松京鎬; 이름 부분을 훈독), 마사마쓰 교코(昌松京鎬; 이름 부분을 음독): '경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관호 - 시라카와 간코(白川寬鎬): ‘관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기간 - 아마야 다다시(天谷正)
- 조남헌 - 와다 아리쓰네(和田有恒)
- 조덕로 - 사토 도쿠로(佐藤徳老)
- 조동민 - 미나야스 도빈(咸安東敏): '동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동식 - 하야시카와 도쇼쿠(林川東植): '동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두영 - 이시이 히데카즈(石井英一; 이름 부분을 훈독), 이시이 에이이치(石井英一; 이름 부분을 음독)
- 조문상 - 히라하라 모리쓰네(平原守矩)
- 조명수 - 시라카와 요시오(白川義雄)
- 조명하 - 아케가와 도미오(明河豊雄): 이름인 명하(明河)를 성씨로 사용하였다. 참고로 이 이름은 독립운동에 뛰어들고자 일부러 창씨개명한 이름이라고 한다.
- 조명호 - 모리야마 메이코(森山明鎬): ‘명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병교 - 후쿠카와 에이이치(福川永一)
- 조병렬 - 가가와 히사시(嘉川久士)
- 조병상 - 나쓰야마 시게루(夏山茂; 성씨 일부를 훈독), 가야마 시게루(夏山茂; 성씨 일부를 음독)
- 조병학 - 나쓰야마 헤이가쿠(夏山秉學): '병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상만 - 이와모토 나오미쓰(岩本尙滿): '상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상옥 - 후루야마 쇼교쿠(古山尙鈺): '상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선부 - 다카야마 미사코(高山美佐子)
- 조세경 - 도미나가 아키라(富永晃)
- 조소영 - 시라카와 고키치(白川亨吉): 이명인 '형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승제 - 조무라 쇼사이(趙村昇濟): 성씨에 村을 넣어 창씨하고, '승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용순 - 하야시카와 준이치(林川淳一)
- 조용택 - 가가와 류타쿠(賀川龍澤), 가가와 노부모토(賀川信本): ‘용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우식 - 시라카와 에이지(白川榮二)
- 조응구 - 고조노 유타카(香園豊)
- 조연현 - 도쿠다 엔켄(德田演鉉): '연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영례 - 오카도 레이코(大門禮子)
- 조원환 - 야마모토 겐칸(山本元煥): '원환'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재근 - 시로타 가즈나리(城田一成)
- 조재석 - 마쓰야마 사이세키(松山載奭)
- 조정현 - 히라마쓰 데이켄(平松貞顯): ‘정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종춘 - 시라카와 겐조(白川元藏)
- 조준갑 - 이케모토 슌코(池本俊甲)
- 조중구 - 다케무라 고이치로(竹村吳一郎)
- 조진만 - 조케 미치오(趙家庸夫): 조씨 집안인 사실을 유지하기 위해 趙家로 창씨한 것으로 추정된다.
- 조태연 - 도요카와 야스나가(豊川泰永; 이름 부분을 훈독), 도요카와 다이에이(豊川泰永; 이름 부분을 음독)
- 조택원 - 후쿠카와 겐 (福川元): '원'(元)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춘성 - 가가와 하루카즈(嘉川春一; 이름 부분을 훈독), 가가와 슌이치(嘉川春一; 이름 부분을 음독): ‘춘’(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춘원 - 시바야마 하루모토(芝山春元): '춘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홍벽 - 구니모토 고헤키(邦本鴻壁): ‘홍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희문 - 마쓰바라 기분(松原羲聞): '희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조희연 - 오무라 지사부로 (大村智三郞)
- 조희영 - 도쿠야마 기에이德山僖英): ‘희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만우 - 아케모토 마사오(朱本正夫)
- 주영복[215] - 니하라 구니오(新原國雄)
- 주영석 - 오하라 에이샤쿠(大原永錫): '영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영섭 - 마쓰무라 에이쇼(松村永渉): '영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영환 - 모토시로 히데미치(本城秀通)
- 주요한 -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 마쓰무라 요칸(松村耀翰): 이름 '고이치(紘一, 굉일)'는 일제의 황도정신이자 일본 제국주의 핵심사상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이다.
- 주재년 - 신조 아리토시(新城在年; 이름 부분을 훈독), 신조 자이넨(新城在年; 이름 부분을 음독): '재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진선 - 마쓰야마 진센(松山鎭旋): ‘진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주진욱 - 마쓰야마 도라오(松山虎雄)
- 주진효 - 구마카와 진코(熊川鎭孝)
- 증혜향 - 히라야마 히사코(平山ヒサ子)
- 지희열 - 나카하라 다케시(中原健)
- 진갑섭 - 오하라 고쇼(大原甲燮): ‘갑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진강욱 - 하라이 오카아키(原井岡旭; 이름 부분을 훈독), 하라이 고쿄쿠(原井岡旭; 이름 부분을 음독): '강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진기천 - 난바라 에쓰오(南原日夫)
- 진병우 - 진다 즈이우(陳田瑞宇)
- 진병효 - 진다 헤이코(陳田柄孝)
- 진양근 - 마쓰모토 히로네(松本洋根): '양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진의종 - 오하라 도시유키(大原敏亨; 이름 부분을 훈독), 오하라 빈쿄(大原敏亨; 이름 부분을 음독)
- 진택수 - 나가이 다다하루(永井忠治; 이름 부분을 훈독), 나가이 추지(永井忠治; 이름 부분을 음독)
- 진학문 - 하타 마나부(秦學): 성씨를 그대로 일본식으로 읽고, '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진학철 - 오하라 가쿠테쓰(大原學哲): ‘학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ㅊ #===
- 차남진 - 도쿠야마 난친(德山南鎭): '남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차영락 - 구루마마타 나가히데(車又永秀; 이름 부분을 훈독), 구루마마타 에이슈(車又永秀; 이름 부분을 음독)
- 차인찬 - 야스다 진스케(安田仁贊)
- 차정일 - 야스다 넨이치로(安田稔一郞)
- 차종순 - 노베카와 무네아쓰(延川宗淳; 이름 부분을 훈독), 노베카와 쇼준(延川宗淳; 이름 부분을 음독)
- 차종실 - 야스다 소지쓰(安田宗實): ‘종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차준담 - 구루마다 슌단(車田濬潭): 성씨에 田을 붙여 창씨하고, '준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차준철 - 나카가와 슌테쓰(中川濬哲) / 나카가와 도요키치(中川豊吉)
- 차한옥 - 야스다 구니타마(安田漢玉;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다 간교쿠(安田漢玉; 이름 부분을 음독), 야스다 데쓰오(安田哲夫): ‘한옥’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천병규 - 지다 게이이치(千田圭一): '병규'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 천복만 - 야마하라 후쿠타로(山原福太郞)
- 천장욱 - 오야마 다테마사(大山健正) / 오야마 다테타다(大山健忠)
- 천재봉 - 지바라 닌샤쿠(千原仁錫)
- 천화실 - 지바 가즈미(千葉和實)
- 채규엽 - 하세가와 이치로(長谷川一郎)
- 채기목 - 모하라 모토키요(茂原基穆; 이름 부분을 훈독), 모하라 기보쿠(茂原基穆; 이름 부분을 음독): '기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채병덕 - 오시마 헤이토쿠(大島秉德): 이름은 병덕을 그대로 썼고 성은 새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 채수일 - 히라마쓰 주이쓰(平松洙鎰): ‘수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채실건 - 니카와 사네타케(仁川實健; 이름 부분을 훈독), 니카와 지쓰겐(仁川實健; 이름 부분을 음독): '실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채중락 - 가메모토 주라쿠(龜本重洛): '중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채필근 - 사가와 스케치카(佐川弼近; 이름 부분을 훈독), 사가와 히쓰긴(佐川弼近; 이름 부분을 음독): '필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갑석 - 도미타 고샤쿠(富田甲錫)
- 최갑순 - 마쓰아쓰 고젠(松厚甲善)
- 최갑술 - 에카 고주쓰(江華甲述)
- 최경락[216] - 다카무라 가즈히코(高村和彦)
- 최경만 - 쓰루하라 다케오(鶴原武雄)
- 최경재 - 구모야마 요시아리(雲山慶在; 이름 부분을 훈독), 구모야마 게이자이(雲山慶在; 이름 부분을 음독) / 구모야마 히사시(雲山久)
- 최경진 - 에토 요시노부(江東慶進; 이름 부분을 훈독), 에토 게이신(江東慶進; 이름 부분을 음독): '경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광환 - 하나야마 고칸(華山光煥)
- 최규하 -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출신지역인 강원도가 바다와 가까운 점을 통해 우메하라(梅原)으로 창씨하였다. 이름 부분은 '규하'에서 圭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게이나쓰(圭夏)'였다는 얘기도 있다.
- 최규협 - 다카야마 게이쿄(高山圭俠): ‘규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금숙 - 모리야마 긴슈쿠(森山金淑): ‘금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낙철 - 가야마 라쿠테쓰(佳山洛哲): 성씨를 파자하여 가야마(佳山)로 창씨하고 낙철을 그대로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최남근 - 마쓰야마 다다요시(松山忠義)
- 최대교 - 에모토 다이쿄(江本大教): '대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동 - 야마카 무네(山佳棟;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카 도(山佳棟;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고, '동'(棟)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최득룡 - 오야마 도쿠류(大山得龍): ‘득룡’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만달 - 야마에 다쓰오(山江達雄): '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만성 - 하토야마 세이지(鳩山成次): ‘성’(成)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무웅 - 기쿠무라 헤이모(菊村秉茂)
- 최문경 - 아사히 후미노리(朝日文卿; 이름 부분을 훈독), 아사히 분쿄(朝日文卿; 이름 부분을 음독): ‘문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명하 - 다케야마 다카시(武山隆)
- 최병권[217] - 야마무라 헤이켄(山村炳權): ‘병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병협 - 니오카 한조(新岡繁蔵)
- 최린 - 가야마 린(佳山麟): 崔를 파자하여 佳山으로 창씨하고, '린'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 최수부 - 다카야마 히데오(高山秀夫). 일본 후쿠오카 출생으로 일본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창씨는 성인 崔를 의역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름 부분은 "수부"를 그대로 사용.
- 최순기 - 요시야마 호지로(芳山逢次郎)
- 최순철 - 이쿠모토 미쓰쿠라(育本光藏; 이름 부분을 훈독), 이쿠모토 고조(育本光藏; 이름 부분을 음독)
- 최상문 - 마루야마 쇼분(丸山翔文): '상문'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상욱 - 마쓰야마 가즈아키(松山和暎;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야마 와에이(松山和暎; 이름 부분을 음독)
- 최상철 - 미야마 소테쓰(三山相喆): ‘상철’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석현 - 야마모토 쇼스케(山本祥資)
- 최승렬 - 도쿠야마 쇼레쓰(德山昇烈): '승렬'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승우[218] - 난바라 노부유키(南原信行)
- 최양호 - 다케야마 요코(武山養浩): '양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안국 - 와다 긴고(和田欽五)
- 최월상 - 쓰키무라 에이주(月村英柱)
- 최연 - 다카야마 기요타다(高山淸只)
- 최연국 - 아사히 노보루(朝日昇)
- 최영의 - 오야마 마스타쓰(大山倍達): 崔에서 山을 따고 앞에 大를 붙여 창씨하였으며, 한민족을 뜻하는 배달을 이름으로 썼다. 그래서 그의 이명이 '최배달'인 것.
- 최옥숙 - 이와타 에미코(岩田榮美子)
- 최윤 - 야마카 준(山佳潤):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고, '윤'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윤경[219] - 히라야마 도요아키(平山豊秋;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야마 호슈(平山豊秋; 이름 부분을 음독)
- 최윤주 - 미야타케 겐스케(宮竹謙輔)
- 최을규 - 아오야마 오쓰케이(靑山乙圭): ‘을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익하 - 와야마 마스나쓰(和山益夏): '익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이주 - 간야마 니슈(完山二周): ‘이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인규 - 호시 인케이(星寅奎): '인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일근 - 야마모토 가즈네(山本一根;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모토 잇콘(山本一根; 이름 부분을 음독): ‘일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인범 - 쓰바라 히토노리(津原仁範; 이름 부분을 훈독), 쓰바라 진한(津原仁範; 이름 부분을 음독): '인범'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재엽 - 다카야마 자이요(高山在燁): '재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정규 - 야마모토 마사오(山本正夫)
- 최정묵 - 오야마 아키라(大山晃)
- 최종옥 - 야마다 마사오(山田正雄)
- 최종활 - 사이 무네카쓰(佐井宗活), 사이 무네하루(佐井宗治)
- 최주성 - 오야마 히로마사(大山博正)
- 최준집 - 마루야마 류준(丸山隆準)
- 최준홍[220] - 마루야마 도시히로(圓山俊洪; 이름 부분을 훈독), 마루야마 슌코(圓山俊洪; 이름 부분을 음독): ‘준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지화 - 데쓰하라 시카(鐵原志化): '지화'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지환 - 후지야마 다카모리(富士山隆盛)
- 최창조 - 기요가와 마사토모(淸川昌朝; 이름 부분을 훈독), 기요가와 쇼초(淸川昌朝; 이름 부분을 음독): '창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준[221] - 야스노 마사토시(安野昌俊; 이름 부분을 훈독), 야스노 쇼슌(安野昌俊; 이름 부분을 음독): '창준'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학 - 마쓰야마 쇼가쿠(松山昌學): '창학'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한 - 가하라 쇼칸(香原昌翰): ‘창한’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호 - 야마모토 마사타카(山本昌鎬;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모토 쇼코(山本昌鎬; 이름 부분을 음독): '창호'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홍 - 히로타 마사히로(廣田昌弘): '창홍'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창현 - 마키야마 마사쓰루(牧山昌鉉): '창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충순 - 다케야마 다카히로(武山孝大)
- 최탁 - 미와 다쿠(三和卓): '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태봉 - 다카야마 다이호(高山泰鳳): '태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필완 - 마쓰야마 시즈코(松山靜子)
- 최하영 - 가야마 가에이(香山夏永): '하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학서 - 히라야마 가쿠즈이(平山學瑞): ‘학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학선 - 미야마 요시오(三山善夫): 이름 부분의 마지막 한자인 ’선‘(善)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항묵 - 오야마 히다케(大山日剛) / 오야마 다케시(大山剛)
- 최행순 - 하토야마 고준(鳩山香順): ‘순’(順)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헌 - 후쿠야마 겐(福山獻): ‘헌’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현배 - 쓰키나리 겐바이(月成鉉培): '현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형직[222] - 가야마 사다요시(佳山定義): 성씨를 파자하여 창씨하였다.
- 최형직[223] - 다카야마 게이쇼쿠(高山炯稷) / 다카야마 후미카즈(高山文一): "형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효대 - 다케야마 고다이(武山孝大): '효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최희남 - 미야모토 요시오(宮本吉雄)
- 추범순 - 이와모토 본준(岩本凡巡)
===# ㅌ #===
- 탁경현 -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
- 탁춘봉 - 야마모토 하루미네(山本春峰; 이름 부분을 훈독), 야마모토 슌보(山本春峰; 이름 부분을 음독): '춘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ㅍ #===
- 편덕렬 - 가타에 기요노리(片江淸德; 이름 부분을 훈독), 가타에 세이토쿠(片江淸德; 이름 부분을 음독)
- 표신통 - 신쇼 신토(新昌信通): ‘신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ㅎ #===
- 하명완 - 가와하라 메이칸(河原明完): 하/명완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하성구 - 가와무라 게이오(河村慶雄)
- 하성일 - 미야모토 하쓰이치(宮本初市)
- 하유용 - 가와모토 류요(河本柳用)
- 하준석 - 가와모토 도시스즈(河本駿錫; 이름 부분을 훈독), 가와모토 슌샤쿠(河本駿錫; 이름 부분을 음독): '준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하판락 - 가와모토 한라쿠(河本判洛) / 가와모토 마사오(河本正夫): 하/판락으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本을 넣어 창씨했다. 이름은 '판락'을 그대로 사용.
- 하창순 - 가와모토 쇼준(河本昌順)
- 하치량 - 가와모토 료(河本亮)
- 하태규[224] - 가와모토 이치로(河本一郎)
- 한규복 - 이가키 게이후쿠(井垣圭復): '규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관영 - 도쿠모토 미쓰타카(德本光毅)
- 한기방[225] - 고이에 모토쿠니(子家基邦; 이름 부분을 훈독), 고이에 기호(子家基邦; 이름 부분을 음독): '기방'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기동 - 우에하라 기토(上原奇東)
- 한도린 - 에하라 도린(江原道麟): ‘도린’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동석 - 아사카와 도샤쿠(朝川東錫): '동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순기 - 신노 준키(神農順基)
- 한순봉 - 니시하라 준호(西原順鳳): ‘순봉’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승인 - 니시하라 쇼인(西原昇寅)
- 한승택 - 니시하라 쇼타쿠(西原承澤)
- 한운성 - 기요하라 구모나리(淸原雲成; 이름 부분을 훈독), 기요하라 운세이(淸原雲成; 이름 부분을 음독): ‘운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은진 - 기요야마 가네하루(淸山銀珍; 이름 부분을 훈독), 기요야마 긴친(淸山銀珍; 이름 부분을 음독): '은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정석 - 오하라 사다스즈(大原定錫; 이름 부분을 훈독), 오하라 데샤쿠(大原定錫; 이름 부분을 음독): '정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종건 - 니시하라 쇼겐(西原鐘建): '종건'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진섭 - 야마우치 세이키치(山内靑吉)
- 한차용 - 간야마 지요(韓山次用)
- 한창묵 - 기요하라 마사다마(淸原昌默; 이름 부분을 훈독), 기요하라 쇼모쿠(淸原昌默; 이름 부분을 음독): ‘창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창우 - 간 쇼유(韓昌祐)
- 한치진 - 아오야마 데쓰토(靑山哲人)
- 한택교 - 히라하라 이에노리(平原宅教;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하라 다쿠교(平原宅教; 이름 부분을 음독): '택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흥 - 닛센 슌케이(日仙俊炯): 족보명인 '준형'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한희석 - 이가키 기샤쿠(井垣煕錫): '희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함건환 - 에칸 다테아키(江咸健煥; 이름 부분을 훈독), 에칸 겐칸(江咸健煥; 이름 부분을 음독): 함/건환으로 분리하여 성씨에 江을 넣어 창씨하였다.
- 함상규 - 에하라 소케이(江原相圭)
- 함성욱 - 에하라 다카후미(江原誠郁)
- 함용삼 - 에하라 요조(江原溶三): ‘용삼’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함화순 - 마쓰다 미호코(松田美保子)
- 허기락 - 이와무라 기라쿠(岩村基洛): '기락'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룡 - 다이우 노리카즈(大宇德和)
- 허연죽 - 이와무라 하스토시(岩村蓮俊; 이름 부분을 훈독), 이와무라 렌슌(岩村蓮俊; 이름 부분을 음독) / 이와무라 하스타케(岩村蓮竹)
- 허영호 - 도쿠미쓰 마코토(德光允) / 도쿠미쓰 쓰바사(德光翼)
- 허하백 - 가네무라 가와노리(金村河伯; 이름 부분을 훈독), 가네무라 가하쿠(金村河伯; 이름 부분을 음독): '하백'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섭[226] - 아사히카와 가즈(旭川燮; 이름 부분을 훈독), 아사히카와 쇼(旭川燮; 이름 부분을 음독) / 아사히카와 가즈이치(旭川和一; 이름 부분 일부를 훈독), 아사히카와 와이치(旭川和一; 이름 부분 일부를 음독): '섭'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영 -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郎)
- 허응하 - 마쓰야마 오카(松山應河): ‘응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허정자 - 가와하라 마사코(河原正子): '정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명남 - 호시모토 아키오(星本明男): ‘명남’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명림 - 호시야마 슌린(星山峻臨): ’림‘(臨)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사선 - 구로야마 기젠(玄山己善):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이명인 기선(己善)을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 현영만 - 마쓰모토 노부히라(松本亘平; 이름 부분을 훈독), 마쓰모토 고헤이(松本亘平; 이름 부분을 음독)
- 현영섭 - 아마노 미치오(天野道夫) / 히라노 히데오(平野永男) / 구도 히데오(工藤永男): 본명인 ’영남‘(永男)을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인 - 고토 진(後藤仁): 인(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제명 - 구로야마 스미아키(玄山濟明; 이름 부분을 훈독), 구로야마 사이메이(玄山濟明;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山을 넣어 창씨하고 '제명'을 그대로 이름으로 썼다. 역시 흔한 창씨법.
- 현준혁 - 다이호 기나루(大砲黃成; 이름 부분을 훈독), 다이호 오세이(大砲黄成; 이름 부분을 음독)
- 현영조 - 노베야마 에이소(延山永祚): '영조'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현용주 - 노베야마 다쓰슈(延山龍珠): '용주'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호소회 - 닛타 쇼카이(新田所回): '소회'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건표[227] - 히로하라 겐효(洪原建杓): 홍/건표로 분리하여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였다.
- 홍건희 - 도요야마 겐키(豊山建熹): ‘건희’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난파 - 모리카와 준(森川潤)
- 홍목 - 오야마 아쓰시(大山穆) / 오야마 유키노부(大山幸伸): 목(穆)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이두 - 미쓰이 도시마사(三井利斗; 이름 부분을 훈독), 미쓰이 리토(三井利斗;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홍(洪)을 파자하여 미쓰이(三井)로 창씨하고, '이두'를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사묵 - 오하라 시모쿠(大原思默): '사묵'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순봉 - 오무라 유조(大村裕造)
- 홍순완 - 가하라 준칸(香原淳完): ‘순완’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순태 - 도쿠야마 준타이(德山淳泰): ‘순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승호 - 기요카와 미키오(淸川幹夫)
- 홍양명 -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 홍영선 - 오야마 가즈쿠니(大山和邦)
- 홍영자 - 오하라 에이코(大原映子)
- 홍인석 - 가가와 진샤쿠(香川仁錫): '인석'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인의 - 도쿠야마 히토요시(德山仁義; 이름 부분을 훈독), 도쿠야마 진기(德山仁義; 이름 부분을 음독): ‘인의’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재준 - 미나미카와 아리토시(南川在駿; 이름 부분을 훈독), 미나미카와 자이슌(南川在駿; 이름 부분을 음독)
- 홍정옥 - 도쿠야마 도모코(德山智子)
- 홍종국 - 도쿠야마 요시히코(德山善彦)
- 홍종철 - 히로우미 쇼테쓰(洪海鍾轍; 성씨 부분을 훈독), 고카이 쇼테쓰(洪海鍾轍; 성씨 부분을 음독): 홍/종철로 분리한 다음 성씨에 海를 넣어 창씨했다. 이름은 '종철'을 그대로 사용.
- 홍종현 - 미쓰이 쇼켄(三井鐘顯): 성씨인 '홍(洪)'을 파자하여 '미쓰이(三井)'으로 창씨하고, '종현(鍾顯)'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진기 - 도쿠야마 신이치(德山進一)
- 홍청파 - 고누마 기요모토(洪沼淸源; 이름 부분을 훈독), 고누마 쇼겐(洪沼淸源;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 뒤에 沼를 넣어 창씨하였다.
- 홍치업 - 난요 지교(南陽致業): 본관인 '남양'으로 창씨하고, '치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홍태욱 - 도쿠야마 미치히라(德山道平; 이름 부분을 훈독), 도쿠야마 도헤이(德山道平; 이름 부분을 음독)
- 홍헌표 - 도쿠야마 가이치(德山嘉一)
- 황경현 - 도모타 세이이치(共田盛一)
- 황남두 - 요코야마 난토(橫山南斗): ‘남두’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대임 - 가이가네 히로토(海金大任; 이름 부분을 훈독), 가이가네 다이닌(海金大任; 이름 부분을 음독)
- 황덕한 - 히야마 도쿠칸(檜山德漢)
- 황벽응 - 아리타 헤키오(有田碧應) / 아리타 슌타쿠(有田賰澤): '벽응'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상기 - 기하라 하지메(黃原基; 이름 부분을 훈독 1), 기하라 모토(黃原基; 이름 부분을 훈독 2), 기하라 기(黃原基; 이름 부분을 음독): 성씨에 原을 넣어 창씨하고, 이름의 마지막 한자인 ’기‘(基)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염규 - 히로타 렌케이(廣田濂圭): ‘염규’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유성[228] - 요코다 다카오(橫田隆雄)
- 황의명 - 마쓰다 요시아키(松田義明) / 보무라 요시아키(尨村義明): '의명'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또한, 창씨개명 시 사용한 성씨들 중 하나인 보무라(尨村)는 황희의 호에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 황의영 - 나가미즈 기에이(長水義瑛): '의영'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종국 - 나카야마 도미오(中山富雄)
- 황종률 - 미쓰다 노부아키(光田矗顯)
- 황종률[229] - 마쓰바라 마사요시(松原正義) / 히하라 마사요시(檜原正義)
- 황찬 - 이하라 산(井原燦): ‘찬’(燦)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창섭 - 히라모토 마사카즈(平本昌燮; 이름 부분을 훈독), 히라모토 쇼쇼(平本昌燮; 이름 부분을 음독): 본관인 '평해(平海)'를 히라모토(平本)로 창씨하고, 이름인 '창섭(昌燮)'을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태성 - 나가미즈 게이쇼(長水憲昭)
- 황판옥 - 다카야마 사다타마(高山判玉)
- 황호남 - 나카야마 기쿠오(中山喜久雄)
- 황화수 - 도미하라 히데오(富原秀男): ‘수’(秀)를 그대로 이름 부분으로 사용하였다.
- 황희남 - 구니시로 야스시(國城康司)
10. 해외 사례
10.1. 독일계 미국인들의 개명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독일계 미국인들이 탄압을 피해 의미가 같은 영국계 성씨나 철자를 영어풍으로 고친 성씨로 개명을 하였다.<rowcolor=#000> 前 | 後 |
슈미트(Schmidt) | 스미스(Smith) |
뮐러(Müller) | 밀러(Miller) |
슈나이더(Schneider) | 테일러(Taylor) |
피셔(Fischer) | 피셔맨(Fisherman), 피셔(Fisher) |
코흐(Koch) | 쿡(Cook) |
베버(Weber) | 위버(Weaver) |
치머만(Zimmermann) | 카펜터(Carpenter) |
플라이셔(Fleischer) | 부처(Butcher) |
비어만(Biermann), 브라우어(Brauer) | 브루어(Brewer) |
호프만(Hoffmann) | 스튜어드(Steward) |
융(Jung) | 영(Young) |
융커(Junker) | 스콰이어(Squire) |
슈마허(Schumacher) | 슈메이커(Shoemaker) |
파스빈더(Fassbinder) | 쿠퍼(Cooper) |
바그너(Wagner) | 웨인라이트(Wainwright) |
엥겔(Engel) | 엔젤(Angel) |
베커(Becker) | 베이커(Baker) |
베르크만(Bergmann) | 마이너(Miner) |
게르버(Gerber) | 태너(Tanner) |
개르트너(Gärtner) | 가드너(Gardener) |
헤르초크(Herzog) | 듀크(Duke) |
에거(Egger), 에거스(Eggers) | 해로우(Harrow) |
퓌르스트(Fürst) | 프린스(Prince) |
히르슈(Hirsch) | 벅(Buck) |
바이스(Weiß) | 화이트(White) |
슈바르츠(Schwarz) | 블랙(Black) |
브라운(Braun) | 브라운(Brown) |
푀르스터(Förster) | 포레스터(Forester), 포스터(Forster) |
크뤼거(Krüger) | 포터(Potter), 크루거(Kruger) |
예거(Jäger) | 예거(Jager), 헌터(Hunter) |
바흐(Bach) | 브룩(Brook) |
부슈(Busch), 보슈(Bosch) | 부쉬(Bush) |
게르스테(Gerste) | 발리(Barley) |
바스(Barth) | 비어드(Beard) |
아이히만(Eichmann) | 오크맨(Oakman) |
프리드만(Friedmann) | 피스메이커(Peacemaker) |
글뢰크너(Glöckner) | 벨맨(Bellman) |
트링크바서(Trinkwasser) | 드링크워터(Drinkwater) |
드룸프(Drumpf) | 트럼프(Trump) |
아이젠하우어(Eisenhauer) | 아이젠하워(Eisenhower) |
후버(Huber) | 후버(Hoover) |
11. 유사 사례
11.1. 강요 차원
- 류큐 왕국은 1522년에 아마미 군도를 병합한 후 아마미 군도의 야마토 민족계 토착민들을 류큐인에 동화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야마토식 이름을 버리고 류큐식 이름을 쓰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역사 때문에 오늘날 아마미 군도 주민들은 정체성은 야마토 민족이지만 언어, 문화적으로는 류큐 왕국의 지배에 따른 흔적이 적지 않게 남아있는 복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임진왜란 직후에 명나라의 장군인 모문룡이 조선을 상대로 해적질을 일삼아서, 이것이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 결국 이에 대해 조선이 명나라 측에 항의하는 지경에 이른 바람에 같은 명나라 장군인 원숭환이 그를 체포해서 처형해버리고, 뒤이어 조선군이 모문룡의 본거지인 평안북도 철산군 가도를 점령하자 조선 조정에서 가도의 주민들과 그의 부하들을 포함해서 거기에 남아있던 한족들에게 몽땅 조선식 의복과 상투를 강요하고 중국식 성명을 전부 조선식으로 고쳐버렸다.
- 바빌로니아에 끌려간 남유다 왕국의 유민들도 창씨개명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의 주역 다니엘과 그 친구들은 바빌론식 이름을 갖고 있었다. 에스델서의 에스델과 모르드개 역시 히브리식 이름은 아니며 각각 이슈타르와 마르두크에서 따 왔다는 설이 유력하다.
- 베트남은 참파와 캄보디아를 정복했을 때 두 민족에게 베트남식 성씨와 이름( 한자) 사용을 강요할 뿐 아니라 다른 동화 정책과 문화 말살 정책도 펼쳤는데 참파의 경우 이슬람과 힌두교를 믿던 참족에게 종교별로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강요했고[230] 힌두,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그 자리에 베트남인들이 믿는 대승 불교 사찰을 지었다. 캄보디아를 잠깐 합병했을 때는 합병 1년 만에 창씨개명, 풍습개조, 지명개명, 직할화, 캄보디아 왕족과 관리들에게 베트남식 단령 착용 강요 등을 시행하는 동시에 남부 베트남의 크메르족 마을의 경우 베트남인 촌락으로 크메르족 촌락을 포위하고 강제 통혼 혼혈을 시켜가면서까지 동화시키려고 하였다. 오늘날 베트남 남부 지역 주민들은 베트남화된 참족과 크메르족의 후손이라서 그런지 베트남 북부 지역 주민들과 달리 전형적인 동남아시아인의 스테레오타입(황인과 네그리토의 혼혈)이 드러나는 편이다.
- 프랑스는 19세기에 알제리에 프랑스식 이름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프랑스식 적극적 동화정책의 일환이었는데 반발이 너무 심해서 손해가 크자 1900년대부터 방침을 바꿔 연합주의로 전환했다.
- 위에도 적혀 있지만 대만이 일본 식민지였을 때 비슷하게 폐성창씨가 이뤄졌다. 예를 들면 위의 창씨개명한 사람 목록에 나와 있듯이 리덩후이(李登輝)는 일제강점기에 이와사토 마사오(岩里政男)라는 성명을 썼었다. 한국 성씨를 남긴 조선과는 대조적으로 대만은 호적에서 중국 성씨를 아주 없앴다. 한편, 조선인이라면 누구나 창씨개명을 실시하도록 강제했던 것과는 달리, 대만인은 일본 성씨로 바꾸고 싶어도 자격을 갖춘 사람만 바꿀 수 있도록 허가제를 두어 엄격히 관리했다. 허가 기준은 일본어에 능통한 지, 천황을 잘 모셨지, 사상에 문제가 없는지 등이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1944년까지도 대만의 폐성창씨 비율은 전 대만인의 2%에 해당하는 7만 명에 지나지 않았다.
- 반대로 대만섬이 중화민국으로 반환된 후에는 중화민국 당국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한족 방식의 성명을 등록할 것을 강요하였다. 때문에 오늘날 대만 원주민 대다수는 이때 생겨난 한족식 성명을 법적 성명으로 사용한다.
-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치 독일은 룩셈부르크 대공국을 점령하고 아예 독일의 일부로 합병했을 뿐더러 룩셈부르크의 프랑스어 사용을 전면 금지했으며 프랑스식 이름을 가진 사람들에게 모두 독일식 이름으로 이름을 고칠 것을 강요했다. 현대 룩셈부르크인들 중에서도 룩셈부르크 북부 지역 사람들은 독일어가 모어이고 독일식 이름을 쓰는 경우가 많다.
- 이탈리아 파시스트당 역시 트리에스테 지역을 차지하면서 그 지역에 살던 슬로베니아인들에게 이탈리아식 이름으로 개명할 것을 강요했다. 그리고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성씨가 바로 AC 밀란에서 2대 째 전설을 이어오고 있는 말디니 가문( 체사레 말디니 - 파올로 말디니)이다. 본래는 성이 믈라디치(Mladic)였다고 한다.
-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집권 후 신질서(Orde Baru)시기에 화교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강제로 고쳐서 인도네시아식으로 만들 것을 강요하는 법령을 발표도 했다. 이 때문에 현재 인니의 중국계 대다수는 성씨가 다음절이다. 만약 중국계 인도네시아인 등 다른 나라의 중국계 주민들 중에 인도네시아식 다음절 성씨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100% 인도네시아 화교 혈통이다.[231]
- 1980년대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에서는 '재생과정(Възродителен процес)'이라는 정책으로 튀르키예계 주민들의 튀르키예풍 성씨를 슬라브식 성씨로 고치게 했다.[232] 이에 대한 반발로 1989년 국경이 개방되자 30만 가량의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이 튀르키예로 이주하였다.[233] 다만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도 적지 않으며 특히 아랫동네인 그리스 의 경우처럼 튀르키예어를 쓰고 튀르키예계 정체성을 가졌으면서도 종교는 정교회인 이들이나 아예 무신론자라서 불가리아 공산당의 비위에 거슬리지 않았던 이들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들에 비해 차별을 덜 받았기 때문에 튀르키예로 이주하지 않고 그대로 불가리아에 남는 경향이 더더욱 강했다. 튀르키예로 이주한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이 튀르키예식 성씨를 쓰는 것과 달리, 불가리아에 그대로 남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의 후손들은 여전히 슬라브식 성씨를 쓰고 있다.[234] 사실 이러한 일은 튀르키예계 불가리아인만 겪은 게 아닌데, 포마크인· 알바니아계 불가리아인· 그리스계 무슬림· 보슈냐크인· 쿠르드족 같은 불가리아의 다른 무슬림 민족들도 불가리아 인민 공화국의 강요에 의해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으로 변형시킨 경우가 많았다.
- 위의 불가리아와 비슷한 사례인데 러시아 제국 및 소련의 지배를 받았던 무슬림 민족들은 현재까지도 국적이 러시아인지 아닌지를 막론하고 이슬람식 이름을 슬라브식으로 변형시켜 만든 성씨를 쓰고 있다.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이슬람 카리모프, 라흐몬 나비예프 등이 대표적이다.
- 보슈냐크인, 튀르키예인, 알바니아인, 쿠르드족 등 구 유고슬라비아의 무슬림 민족들 또한 유고슬라비아의 지배에 따른 영향으로 이슬람식 성씨를 슬라브식, 정확히는 세르보크로아트어권식으로 -비치 돌림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소수민족도 여권을 발급받을 때 일종의 창씨개명을 당한다.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소수민족의 이름을 여권에 적을 때는 원음이 아니라 그 이름의 표준 중국어 음차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원음이 Rehimjan인 이름은 赖希木江을 거쳐 Laiximujiang으로 변하고 여권에는 REHIMJAN이 아니라 LAIXIMUJIANG이 적힌다. 중국/민족 문서의 여권 발행 시 이름 표기 섹션 참고. 중국공산당은 위구르족들에게 중국식 성씨를 강제하고 있다.
11.2. 자발적인 개명 차원
- 영어 이름을 가지는 경우. 중국인과 한국인에게 자주 보인다. 반면 인도인의 경우 영어 구사능력이 뛰어나지만 이름이 영어로 발음하기 더 기괴한 인도식 이름을 고수한다.
- 태국의 화교들은 태국식 성명을 따로 쓰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전직 총리인 탁신 친나왓과 잉락 친나왓은 객가족 출신의 화교인데, 두 이름은 태국식으로 고친 성명이며 각각 丘達新( 관화 : 추다신, 한국 한자음 : 구달신)과 丘英樂(관화 : 추잉러, 한국 한자음 : 구영락)이라는 중국 이름이 있다.
- 과거 캐나다에선 과거 퀘벡 출신 사람들에게 프랑스식 이름을 버리고 영국식 이름을 쓸 것을 우회적으로 요구한 바가 있다. 프랑스식 이름을 쓰면 취직에 차별을 한다거나 등등. 퀘벡 출신 만화가 기 들릴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아버지인 프랑수아 들릴이 프랑수아 들릴이란 이름으로 직업을 구하러 가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으나 프랭크 들릴로 이름을 바꾸자 그제야 직업을 얻었다고 한다.
-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령 핀란드 대공국이 되기 전까지 700년 가까이 스웨덴의 지배를 받았고[235] 많은 핀란드인들이 스웨덴 문화에 동화되어 자연스럽게 스웨덴식 성명을 사용하고 스웨덴어를 구사했다. 그런데 스웨덴에게서 핀란드를 빼앗은 러시아는 초반에는 핀란드인들의 전통을 존중하는 듯 하다가 차츰 핀란드에 러시아 문화를 강요하자 핀란드에서는 핀란드 고유의 전통과 문화를 지키자는 페노마니아 운동이 분다. 페노마니아인들은 핀란드 고유의 문화의 중추로 핀란드어에 주목해 기존에 구사하던 스웨덴어 대신 핀란드어 사용을 장려했고 스웨덴식 성명 역시 핀란드식으로 고쳤다. 특이한 점이라면 스웨덴계로 동화된 핀란드계가 아닌 스웨덴에서 이주해와 핀란드에 정착한 순수 스웨덴계 역시 페노마니아 운동에 경도되어 성명을 핀란드식으로 고친 경우도 많았다는 것이었다.[236]
- 중동유럽에 거주하던 유대인 분파인 아슈케나지의 경우 아슈케나지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독일어의 영향을 받아 독일식 성명이나 아니면 당시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거주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향을 받아 슬라브식 성명을 사용했다.[237] 그런데 19세기 말 시오니즘이 대두되면서 시오니즘에 경도된 아슈케나지 유대인은 '옛 조상들이 쓰던 이름으로 돌아가자'는 의도에서 기존에 쓰던 게르만/슬라브식 성명을 버리고 이를 히브리식으로 창씨개명을 했다. 예를 들어 다비트 그륀은 다비드 벤구리온, 골다 마보비치는 골다 메이어로 이름을 바꾼다던가. 물론 모든 시오니스트들이 히브리식으로 창씨개명을 했다는 건 아니고 하임 바이츠만처럼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성명을 버릴 수는 없다고 그대로 유지한 유대인도 있었다.
- 벨기에는 과거에 프랑스계 주민들이 우대를 받고 네덜란드계 주민들이 천대를 받는 경향이 강했으며, 당시에는 공용어도 프랑스어 하나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네덜란드계 주민들 중에서 출세를 위해 성만 그대로 네덜란드식인 채 프랑스식 이름을 쓰고 더 나아가 언어, 문화적으로 프랑스화되는 이들이 속출하기도 했다. 그 후손들로는 지정환 신부와 장 클로드 반담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네덜란드계 벨기에인임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어가 모어였다.
- 제1차 세계 대전 때 영국에서 반독일 정서가 퍼지자 왕족들이 독일계 성씨인 색스-코버그-고사(Saxe-Coburg-Gotha, 독일어로 적을 때는 Saxe-Coburg und Gotha(작센-코부르크-고타))를 버리고 왕실이 보유한 성(castle)의 이름을 따서 윈저(Windsor)로 바꿔야 했다. 그리고 역시 독일계 귀족인 배튼버그(Battenberg, 독일식으로는 바텐베르크) 가문이 성씨를 마운트배튼(Mountbatten)으로 고쳤다. 이 둘은 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인 에든버러 공작 필립의 성씨이기도 하다. 미국에서도 발음은 똑같지만 성의 독일식 철자를 영어식 철자로 바꾸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가 34대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Eisenhauer였던 성씨를 Eisenhower로 바꾸었다. 31대 미국 대통령 허버트 후버도 Huver에서 Hoover로 고쳤다. 45대 미국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도 조부 대에서 Drumpf를 Trump로 고쳤다. 그리고 독일령이나 오스트리아령이던 슬라브 문화권의 독일계 주민들은 해당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독일식 성씨를 -스키 돌림의 슬라브풍 성씨로 바꾸는 경우가 많았으며, 독일식 성씨를 고수하던 이들은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강제로 추방당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 서양에서 다른 국가로 이민하는 사람이 본래 자신의 성과 이름을 해당국 언어에서 대응되는 이름으로 변경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예를 들어 만약 'Friedrich Johansen'(프리드리히 요한젠)이라는 이름을 가진 독일인이 있는데 이 사람이 미국 시민권을 취득하면서 'Frederick Johnson'(프레더릭 존슨)이라고 개명하는 식. 대개는 본래 가지고 있던 철자를 유지하지만 종종 이런 식으로 바꾸는 경우도 있다. 사실 이는 나라마다 발음이 좀 다를 뿐이라고 생각하거나, 같은 유래의 유사한 이름으로 번역하는 것에 가깝다. 그리고 미 대륙 초창기에 이주한 러시아 등 동구권 국가 사람들도 차별을 우려하여 나타샤는 나디아로, 토마시 같은 폴란드식 이름은 톰(토머스)으로 개명했으며 아예 앤더슨 같은 영어권 성으로 개명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 사실 동양에서도 한자 성명을 쓰는 사람들은 한중일간 이민시에 한자의 자형을 고치거나 독음을 고치기도 한다.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게, 중국 행정시스템에는 정체자 입력이 안 되고, 일본은 구자체 사용이 가능하긴 하나 현지인이 알아보기 어려운 등 제약이 많다. 반대로 중국이나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는 경우에는 정체자로 바꾸던가, 아예 한자표기 자체를 포기하고 서양인들처럼 로마자 표기만 해야 하고. 또한 독음의 경우에도 지들 편한 대로 읽어버리다 보니 매번 후리가나나 한어병음을 붙여야 되는데, 상당히 귀찮은 일인데다 수기입력이 아닌 경우 불가능하다. 한국의 경우에는 현지식 독음을 한글이나 로마자로 표기할 경우 문제 없으나, 대한민국 귀화나 외국인등록시에 로마자표기가 아닌 한자표기를 선택하면, 알아서 한국식 독음으로 바꿔버린다. 예를들어 마오쩌둥이란 성명을 가진 중국인이 대한민국 외국인등록증에 " 모택동(毛澤東)"이라 표기되는 게 싫다면 "毛澤東"으로 신고하면 안 되고 "Mao Zedong" 이라고 신고해야 된다. 후자로 신고할 경우 한국 체류 서양인들처럼 한글/한자 표기는 되지 않고 로마자만 남는다.[238]
- 앙겔라 메르켈 현 독일 총리의 할아버지는 폴란드인으로 독립운동에도 가담했던 루드비크 마리안 카지미에르차크(Ludwik Marian Kaźmierczak, 1896~1959)인데, 원래 비엘코폴스키에 주 포즈난(Poznan - 1차 대전 전까지는 독일 제국령 포젠)에서 살았지만 이후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여 경찰로 살았으며, 1930년 이름을 독일식인 루트비히 카스너(Ludwig Kasner)로 고쳤다.
- 프랑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빌헬름 아폴리나리스 데 코스트로비스키 (Wilhelm Apollinaris de Kostrowitzki)라는 폴란드식 이름이 본명이었는데, 가족이 프랑스로 이주하면서 이름을 프랑스식으로 고쳤다.
- 출생 당시 프랑스령 지역에서 태어난 이탈리아 작곡가 주세페 포르티누노 프란체스코 베르디의 출생 증명서는 '조셉 포르튀냉 프랑수아 베르디'라는 프랑스식 인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 작곡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헨델은 영국에 귀화하면서 이름을 영국식인 조지 프레드릭 헨델로 고쳤다.
-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진 후 혁명군의 만주족 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만주족은 대부분 한족식으로 성씨를 바꿨다. 주로 본래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와서 중국식 성씨를 짓는 경우가 많았고, 일부는 만주족이 중원 입관 이후 자신의 이름 첫글자를 한족식 성씨처럼 쓰던 풍습인 수명성(隨名姓)에서 따와 중국식 성씨를 짓기도 했다. 조상이 만주족으로 귀화한 한족인 경우 조상의 한족식 성씨를 썼으며, 조상이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 청나라로 끌려가 만주족에 동화된 조선인 포로였던 경우에는 조상의 조선식 성씨를 썼다. 아버지가 만주족이고 어머니가 한족 출신 첩인 경우에는, 아버지의 만주족식 성씨에서 뜻이나 발음을 따온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와 어머니의 한족식 성씨를 쓰는 경우가 공존했다.
- 나폴레옹 시기 프랑스 장군인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는 스웨덴의 왕위 계승자가 되면서 이름을 칼 요한 밥티스트 율리우스로 개명하고 나중에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다.
11.3. 번역 차원
- 영국 고전 동화 피터 래빗이 다른 유럽권 국가에서 출간될 때는 ' 피터 래빗'을 해당 국가에서 통용해서 쓰는 이름으로 번역하여 출간한다. 가령 프랑스에서는 피에르 라팽(Pierre Lapin), 독일에서는 페터 하제(Peter Hase) 스페인에서는 엘 코네호 페드로(El Conejo Pedro)로 출판하는 식.
- 유럽어 위키백과의 각 언어판에서 군주와 왕족의 이름은 본명이 아닌 해당 언어식의 이름으로 번역되어 기재된다. 예를 들어 엘리자베스 1세의 스페인어판 문서명은 이사벨 1세, 이탈리아어판에서는 엘리사베타 1세, 독일어판에서는 엘리자베트 1세로 기재된다. 현대에 재위한 군주의 경우 후안 카를로스 1세처럼 해당국의 명칭을 존중하여 그대로 기재하는 경우도 있지만,[239][240] 번역된 이름을 항목명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네덜란드 빌럼 알렉산더르 국왕의 스페인어판의 문서명은 기예르모 알레한드로, 이탈리아어판의 문서명은 굴리엘모 알레산드로이다. 사실 이건 옛날 브리태니커에서부터 이랬다. 단, 군주제 국가일 경우. 공화국의 수장 이름은 원어 표기법을 존중한다. 이를테면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이탈리아어 위키백과에 ' 프란체스코 올랑드'로 기재되는 경우는 없다.
- 카운터사이드:일본에도 서비스를 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현지화 작업의 일환으로 한국인 캐릭터들에 한하여 모두 일본식 이름으로 창씨개명이 진행되었다.
12. 한국
한국에서도 귀화인들에게 한국식 이름을 만들도록 시키긴 한다. 한국 민법에서는 1993년 이후 호적에서의 성명 글자를 성을 제외하고 5글자로 제한시켰기 때문이다. 다만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으로 귀화하러 오는 외국인의 수가 적었기 때문에, 특별히 귀화인을 겨냥했다기보다는 이름이 긴 사람이 속속 생겨나자[241] 업무를 처리하기 난감해진다는 이유 때문에 행정편의주의적인 관점에서 이름의 글자수를 제한시키기는 한다. 예외 규정이 둘 있는데, 1993년 이전 호적에 등록한 자, 그리고 한국 국적자와 외국 국적자의 혼인으로 출생한 자의 경우 외국 국적자 측의 성을 따르기로 결정하여 외국식 이름으로 한국 호적에 등록시킬 때는 5글자 초과가 가능하다. 없는 성을 만들어도 된다는 게 다르고 그렇기 때문에 일본인이 귀화할 경우 일본인으로써의 성씨를 그대로 써도 되기는 하다.대신 한자를 한국 한자음이 아닌 방식으로 읽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된다.[242] 예를 들어 사토 마사요시( 佐 藤 正 義)라는 일본인이 한국으로 귀화를 할 경우, 자기 이름을 한국어로 읽는 그대로 쓰고 싶다면 원칙적으로는 성명을 한글로 '사토마사요시'라고 써야 하며,[243] 마치 인명용 한자 이외의 한자를 이름에 썼을 때처럼 한글로만 이름을 표기해야 한다. 물론, 佐藤을 성으로, 正義를 이름으로 등록시켜 사용할 수 있지만, 이 경우에는 성명을 한국 한자음대로 무조건 '좌등정의'로 읽어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일본 성씨를 한국식으로 쓰는 예가 양산시에 거주하던 망절씨의 시조 망절일랑.[244] 호사카 유지도 귀화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는데, 공문서에는 순한글 성씨 및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다. 한국 출생이지만 황목치승(荒木治丞)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아라키 하루스케'라는 평범한 일본인의 이름이다.
네이버 지식iN에 '창씨~'등으로 검색하면 '제 이름은 ○○○인데, 제 창씨명이 궁금해요'라는 질문이 다수 나온다. '창씨'라는 것은 (성)씨를 '만든다란' 뜻이기에 창씨명이 '일본식 이름'이란 뜻이 아니라는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애초에 이름이란 고유명사이니 이름이 홍길동이면 일본에서도 홍길동(에 가까운 발음)이라서 굳이 일본식으로 음독/훈독할 필요는 그닥 없다. 현재는 洪吉童(ホン·ギルドン) 또는 シム·チョン(沈淸)처럼 쓰는 게 보통. 일본에 완전히 정착해서 자식 낳고 산다면 몰라도.[245] 사실 굳이 바꾸는 경우는 개인 취향 문제이거나 현지에서 상용하지 않는 한자이거나 해서 발음을 곤란해 한다거나 아니면 공식 성명은 아니지만 현지인과 친근하게 교류하기 위해 별칭으로써 재미삼아 만들어 붙이는 경우이다. 또는 드물지만 업무상/학술적인 이유로 불가피하게 재특회가 활개치는 지역에서 체류해야 하는 경우에도 (일본인으로 위장하기 위해)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사실 그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더라도, 외지인 티가 나면 이지메하거나 배척하여 끼워주지 않으려고 하는 경우도 있다 한다. 물론 일본의 조직에 끼어들 일이 없는 단기체류자는 해당사항이 없다.
이는 미국 등 서양권 국가로 유학/ 이민/귀화한 사람들 중에서도[246], 가끔 로마자로 한국이름을 표기할 수 있음에도 "제임스 리" 라던지 "데이비드 킴" 같이 현지식 이름을 지어다가 붙이는 경우[247]가 있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한자를 파자해서 일본식/중국식 성명표기를 하고 싶으면 하면 되고, 하기 싫으면 안하면 된다. 온전히 상황과 주변 환경, 대인관계에 따른 개인의 선택일 뿐이다.
이름을 바꾸는 것은 아니지만 한자문화권 사람이 자신의 이름을 소개할 때 일본식 한자음을 빌어서 하는 경우는 많다. 예를 들어 이름이 성준이라면 '세이타의 成에 슌스케의 俊입니다.' 하는 식으로. 이건 단순히 표기법이나 뜻을 이해시키기 위한 차원을 넘어서 각종 지원서 등의 공문서에서는 비록 발음은 한국식, 중국식으로 후리가나를 달더라도 한자식 이름을 쓰는 외국인이라면 이름을 한자로 써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본 내에서 한자와 독음이 잘 매치가 안 되는 성명을 가진 사람의 경우에도 똑같이 한다. 단, 이 경우는 다른 사람의 이름보다는 대중적으로 쓰이는 훈독음을 알려준다.
사실 저런 한국식 한자성명의 일본식/중국식 독음에 대한 문의가 넘치는 이유는, 해당국에서는 한자성명 사용자는 타국인이라 할지어도 한자 표기를 강요하며, 그렇게 표기된 한자를 현지인들은 자기들 멋대로 읽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중국, 일본국적/출신 체류자의 성명이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히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한자 표기를 아예 지우고 로마자 표기나 순한글 표기가 가능한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중국과 일본은 허락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는 로마자 표기가 우선이지만, 한자를 쓰는 경우가 이렇다는 것이다. 그나마 일본은 재류신고 등 공문서를 제외하면 한국식 독음대로 가타카나 단독 표기를 하는 것은 가능하나, 한어병음 단독 표기를 절대 불허하는 중국은 답이 없다.
13. 번역상의 표기
참고로 서양의 인물은 언어마다 이름을 다르게 표기하는 경우가 많고[248] 지금도 교황이나 왕족의 이름을 적을 때는, 요한 바오로 2세는 영어로 쓸 땐 John Paul II, 이탈리아어로 쓸 땐 Giovanni Paolo II, 우크라이나어로는 Іван Павло II라고 쓰는 것과 같이 언어마다 다르게 표기하는데 이 경우는 창씨개명처럼 취급하기 곤란할 듯하다. 호적상의 사람 이름을 고치는 게 아니라 그냥 과거 유럽의 관례를 따라 이름을 해당국 국어로 '번역'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래 마리아 안토니아였다. 그냥 마리아가 프랑스에서는 마리, 영국에서는 메리라고 자동으로 불리게 되었던 것. 같은 원리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신/인물 이름들은 유럽권에서는 자국의 언어(표기 방식)로 '번역'된다.따라서 만약 민족국가 형성 전, 여러 국가의 역사에 영향을 미친 인물의 이름이라면 차라리 당대의 공용어 격인 라틴어(또는 그리스어)로 표기하는 게 중립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대표가 카롤루스 대제. 좀 경우는 다르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도 유사한 사례다.
한편 이런 '번역식' 인명표기는 한자문화권에서도 똑같다. 현대에는 원어를 존중하여 표기하는 경우가 많지만[249], 근대 이전 인명/지명은 그런 것 없이 자국의 방식대로 읽고 쓰는 게 보통이다. 현대 한국어에서 일본어 한자 읽기가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이건 역사적인 이유가 겹치면서 생긴 특수한 예이고, 한국도 근대 이전에는 일본의 인명/지명도 예외없이 한국식으로 읽었다. 근대 이전의 풍신수길, 이후는 이등박문을 생각하면 된다. 중국의 경우도 19세기 말~20세기 초 인물들은 한국식 독음과 중국식 독음 모두 통용된다. 표기법상으로야 신해혁명 이후 인물은 중국식 독음 표기가 원칙이지만 대략 이홍장과 원세개, 양계초 이후 인물들이 여기 해당한다. 손문, 장개석, 모택동이 대표적이고, 이들보다 후대 인물로 20세기 후반~21세기 초엽까지 활동한 등소평, 조자양, 강택민도 한국식 독음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호금도, 습근평 등 중국인들의 이름이 거의 한국식 독음으로 불리지 않는다. 단, 조선족들이나 북한에서는 여전히 한국식 독음으로 부르고 있다. 또 영화배우인 양조위, 장국영, 유덕화 등의 경우도 한국식 독음이 널리 퍼져 있다.
이렇게 읽는 법이 정착된 것은 외래어 표기법이 비교적 최근인 1987년에 발표된 영향이 크다. 중국인이건 일본인이건 일평생 한자 그대로 읽어왔는데 어느날 갑자기 싹 바꾸라고 하니 당시의 지식인들과 기자들이 이걸 어색해 해 그동안 읽던 방식 그대로 써 온 것이다. 그런 표기법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고, 이는 현재 우리도 '모택동, 등소평'이라고 쓰지만 않지 그게 누구인지는 다 알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그 시절에 사회생활을 하시던 분들이 은퇴한 2000년대 이후에는 한자를 그대로 읽는 표기법은 점점 사라지고 중국, 일본식 독음대로 표기하고 있다. 앞으로 등장하는 일본인, 중국인은 100% 모국어 독음으로 표기될 것이다. 지금은 일종의 과도기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하다.
14. 참고 문헌
- 창씨개명정책과 조선인의 대응(구광모, 중앙대학교) - 배경, 전개, 목적 부분.
- 동화정책 사례연구 -창씨개명을 중심으로- (구광모, 중앙대학교) - 배경 부분.
- '족보'와 '창씨개명' -김달수의 <族譜>와 가지야마 도시유키의 <族譜>를 중심으로.(박제홍, 김순전, 전남대학교)
- 창씨개명-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미즈노 나오키, 정선태 역, 산처럼 2008)
- 식민지 조선과 대만의 창씨개명, 개성명 비교 연구.(이승일, 한국외국어대학교)
- 굿모닝 예루살렘( 기 들릴) - 퀘벡 사례 관련.
[1]
교육계를 위해 변호하자면 '창씨개명'이란 4음절 자체에는 강제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일본식 성명강요로 쓴 것이다.
[2]
당장에
3대 천하인들도 보면 씨를 바꾼 경우가 많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바꾸기 직전의 씨는 하시바였고 또 그 이전에는 기노시타였다. 그밖에도 후지와라, 헤이지 등을 쓰기도 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어릴 적에는 마쓰다이라 이에야스였다.
[3]
21세기에도 일본은
민족주의,
보수주의적 성향이 강해 외국인의 시민권 획득에 큰 제한을 두고 있다.
[4]
조선인뿐 아니라 중국인, 오키나와인, 심지어
관서 출신 일본인과 청각장애인들도 상당수 살해당했는데 이들 역시 어차피 외형적 차이는 크지 않았고 저 발음들은 못했기 때문이다.
[5]
식민지 조선에서의 근대화와 일본어 교육 - 야마다 간토, 제2기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 4권 p259
[6]
그러나 대만은 꽤 엄격한 자격을 필요로 하는 허가제였기 때문에 1944년이 되어서도 2%만이 폐성창씨를 했었다.
[7]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치안을 담당했던 경찰기관.
[8]
대조적으로
대만에선 기존의 폐성창씨를 그대로 추진했는데, 조선과는 달리 허가를 받은 자만이 일본식 성씨를 가질 수 있었다. 심지어 대만은 조선과 달리 폐썽창씨에 긍정적인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들 입장에선 자신들이 조선인에 비해 더 차별 받는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9]
초대 덴노인
진무 덴노가 일본을 건국한 것을 기념하는 날. 한국의
개천절 같은 기념일이다.
[10]
다만 황도유림(천황과 일본 제국을 위해 헌신하라는 유학을 따르는 유림들)의 세력이 컸던
경상북도에서는 유림들의 참여율이 초기, 후기 가릴 것 없이 높게 나타났다. 2월에만 전체의 50%가 넘는 창씨개명이 경상북도에서 접수되었다. 초기 경상북도에서 유달리 창씨개명 참여율이 높았던 것도 이 때문인 듯. 창씨개명이 완료될 때까지 전체 경북 유림 2만 6842명 중 2만 6670명이 창씨에 참여하였다.
[11]
지금의
대구광역시, 강원도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포함,
울진군 전역 및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제외
[12]
지금의
세종특별자치시 부강면 포함,
괴산군 청천면 삼송리 제외
[13]
지금의
대전광역시,
세종특별자치시(부강면 제외) 포함,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제외
[14]
지금의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
서해 5도) 제외) 포함,
연천군 신서면 제외
[15]
현재의 인천광역시 옹진군 백령면, 대청면, 연평면 (
서해 5도)을 포함
[16]
경기도
연천군 신서면, 경상북도
울진군 및
영양군 수비면 본신리 포함,
영월군 상동읍 덕구리 및 천평리는 제외
[17]
지금의
부산광역시,
울산광역시 포함
[18]
지금의
광주광역시,
제주특별자치도 및 전라북도
부안군 위도면 포함
[19]
지금의
충청남도
금산군 전역과
충청남도
논산시 연무읍 고내리, 황화정리, 마전리, 봉동리, 안심리, 신화리 포함, 부안군 위도면은 제외
[20]
호주의 소재불명 등 창씨를 할 수 없는 호적 제외
[21]
당시 창씨 신고율을 높게 보이게 하기 위해 호적수를 조작한 정황이 확인되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름이 바뀌었다는 증언이 많다. 해방 직후 조선의 문맹률이 78%이었던 걸 생각하면 그냥 면사무소 직원들이 원래 이름 베이스로 대충 그럴듯한 일본식 이름 짓고 당사자한테 통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37집 창씨개명과 친일 조선인의 협력
[23]
그저 반대했다는 이유로 잡아다가 처벌이 가능한건 당시 일본 본토가 파시즘화 상당히 진행되어
치안유지법을 근거로 정치적으로 마음에 안드는 사람들은 반동분자로 몰아 처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 민사령이 적용되는 조선 또한 이전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24]
정주수.(2021).호적상담 사례로 본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이야기(2).사법행정,62(5),56-71.
[25]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帝國議會說明資料. 第5卷", 東京, 不二出版, 1994, 75쪽. - 홍성표. (2022). 윤동주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연희전문 학적부 창씨 관련기록의 재검토-. 동방학지, 201, 143-168.에서 재인용
[26]
한국 근현대사 사료DB 출처 1940년 조선총독부 직원록, 최대 1943년까지 볼 수 있다
[27]
朝鮮姓名復舊令에依하야名復舊 檀紀四貳七九年拾貳月貳拾四日改訂함(조선성명복구령에 의하여 이름을 복구함.
단기 4279년 12월 24일 개정함.)
[28]
"한국식 이름을 가졌던 사람이 일제강점기 창씨개명으로 일본식 이름을 가지게 된 경우라면 성명복구령에 의하여 당연히 종전의 한국식 이름으로 복구되었어야 하는데 아직까지도 창씨개명된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면, 그 창씨명은 이미 무효로 된 이름이므로 개명의 절차에 따라 개명할 사항이 아니고 호적 정정의 대상으로서 호적공무원이 직권정정절차에 따라 정정하여야 할 사항이고, 다만 그러한 창씨개명의 사실이 호적(제적)상에 명백히 나타나 있지 아니한 때에는 사건본인은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는 서면을 첨부하여 직권정정을 촉구하는 의미의 호적정정 신청을 본적지 시(구)·읍·면의 장에게 제출할 수 있을 것이다."(구 호적선례 2-339).
[29]
대표적으로
추성훈이 있다.
[30]
이렇게 링크한 이유는 바로 밑 문단에 서술.
[31]
다만 이는 사실 기만에 가깝다. 이미 일본에서도 성씨는 거의 합쳐져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씨고 성이고 다 갈아지는 것이나 다름없다.
[32]
사실 일제 입장(...)에서는 이 우려가 기우는 아니었던 것이, 조선인 징병이 시행된 후 징병된 조선인들이 일본군에서 배운 기술이나 무기등을 가지고 탈출해 독립군측에 도움을 준 경우(...)도 많았고(당장
지청천 등이 해당 케이스다.) 쁘락치가 되는 경우도 많았다.
[33]
다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 것이 도호쿠 지방에서도 아이누-조몬인의 혈통은 높아봤자 9%정도다. 이들이 아이누의 생물학적 후예라 하긴 무리가 많다.
[34]
김영달,{創氏改名の硏究}, 1997, 未來社
[35]
이승일, "일제시기 조선인의 일본국민화 연구: 호적제도를 중심으로"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4 : 2000
[36]
미즈노 나오키, 조선총독부는 왜 창씨개명을 실시하였는가, 2004
[37]
宮田節子, “창씨개명의 실시과정”, 정운현 편역, 창씨개명 (학민사, 1994), 71~4면, 100~2면.
[38]
뿐만 아니라 출생, 혼인, 사망, 상속, 진학, 취직 등 개인의 법률적 행위에 있어서 필수적인 서류였다. 당시의 호적등본은 현재의 법적 서류에 비유하자면 딱 맞아떨어지지는 않지만 대체로 '가족관계증명서+혼인관계증명서+기본증명서+친양자관계증명서'에 주민등록등본의 기능까지 합쳐진 존재라고 볼 수 있다. 호적초본은 기본증명서+혼인관계증명서와 주민등록초본의 기능이 포함되었다고 이해하면 무리가 없다.
[39]
매일신보, 1940.05.17, 석간 2면
[40]
매일신보, 1940.06.29, 조간 2면
[41]
朝鮮高等法院判決錄(1933.3.3.판결문)
[42]
이와 관련하여 經國大典 법규를 참고. “文武官六品以上祭三代, 七品以下祭二代, 庶人則只祭考妣. 若嫡長子無後則衆子, 衆子無後則妾子奉祀”(經國大典 禮典 奉祀條) ; “嫡妾俱無子者 告官立同宗支子爲後....尊屬與兄弟及孫 不相爲後”(經國大典 禮典 奉祀條). 즉, 경국대전 '奉祀條'는 조부모 부모 등을 제사함에 있어 品階와 庶人을 구분하여 적장자를 원칙으로 제사를 받드는 것에 대해 규정한다. 그리고 '立後條'는 嫡妻와 첩이 모두 아들이 없는 경우는 官에 신고하여 성과 본이 같은 同宗의 支子를 세워 家를 이어가게 하는 원칙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하여 존속과 형제 및 손자의 行列에서는 서로 立後(입양)하지 않음도 규정하고 있다.
[43]
윤치호는 1940년 6월 17일, 성을 이토(伊東)로 바꾼 후 이토 치코(伊東致昊)로 개명했다.
[44]
참고로
윤치호는 일본을 가리켜 지상천국이라고 극찬했으며, 일본이 1941년 미국 진주만을 공습하자 열렬히 환호하며 조선청년들한테 일본군에 자원입대하라고 연설을 하고 다니던 친일파였다. 그런 사람조차 창씨개명에 대해서는 이렇게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이다.
[45]
윤치호 일기:1916~1943(김상태 역, 역사비평사, 2001)463페이지
[46]
당시 일제가 미군 공습에 대비하여 실시했던 '방공연습'의 일본어(호코렌슈)와 발음이 비슷해서 놀림을 받았다.
[47]
무려 300년 이상을 지배받았으니 어쩔 수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 스페인어를 아직도 쓰고 이름도 스페인 이름임에도 전쟁까지 벌이며 독립했다. 스페인이 벌이던 차별에는 이들도 반발했고
시몬 볼리바르 같은 남미 독립 영웅도 심지어 스페인 계 혈통의 혼혈 귀족임에도 스페인과 남미는 다른 나라라고 주장해 독립전쟁을 이끌었다. 필리핀 독립을 이끌던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수백여 년 지나도 일본에 대하여 일본어나 이름은 낯설지 않아도 차별이 이어질 테고 결국 이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48]
현재 이들은 고인이거나 살아 있더라도 일제강점기에 갓난아기여서 '개명'을 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창씨개명 피해자들 중 중년층도 제법 되는 편이었으나 이들이 모두 65세를 넘는
200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창씨개명의 피해자들은 전원 노인이 되었으며, 남자들이 많아 보이는 것은 당시 취학률은 남자 쪽이 여자보다 더 높았기 때문이었다.
[49]
나머지 4명은 창씨개명을 한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알 수 없으나 당대의 인구 분포 및 방송에서 조선어를 함께 사용했던 점을 미루어 본다면 이 4명 중에도 조선인이 한 명 이상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50]
이원구의 할아버지는 을사오적 이근택이다.
[51]
당시 일본 제국의 4대 방송국은 도쿄 방송국 (東京, JOAK), 오사카 방송국 (大阪, JOBK), 나고야 방송국 (名古屋, JOCK), 경성방송국(京城, JODK)로, 경성방송국 역시 코드 넘버링을 A,B,C,D로 일관되게 했을 정도로 비중이 있었던 방송국이다. 이들은
NHK 및
KBS로 계승된다.
[52]
조선인과 조선 출신의 일본인
[53]
미즈노 나오키. (2008). 창씨개명 - 일본의 조선지배와 이름의 정치학, 69, 80-82
[54]
정주수.(2021).호적상담 사례로 본 일제강점기 창씨개명 이야기(2).사법행정,62(5),56-71.
[55]
조선총독부, "朝鮮總督府 帝國議會說明資料. 第5卷", 東京, 不二出版, 1994, 75쪽. - 홍성표. (2022). 윤동주의 창씨개명(創氏改名) -연희전문 학적부 창씨 관련기록의 재검토-. 동방학지, 201, 143-168.에서 재인용
[56]
예외로 의사는 최상류층 자제 출신이 적은 대신 되는 것이 굉장히 어려웠다. 애초에 조선인 의사는 전문학교, 의대 출신을 전부 포함해 약 2~4천명 수준으로 조선내 의과 대학에서 조선인 보다 일본인이 더 많이 배출되던 직종이다. 거기다 부모가 고등학교까지 진학시킬 정도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 지주 여야 했고 일본의 차별 정책 때문에 조선인 출신으로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자비로 유학을 가거나 외국인이 운영하던
세브란스병원을 통해 진학하는 게 현실적이었을 정도다.
# 당연히 1년 학비도 보통학교 선생의 연봉과 맞먹었다.
[57]
지금도 혐한들은 범죄자 이름이 한국식 같으면 재일이 벌인 범죄라고 단정한다. 예로 당시 일본의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는 한국어로 풀이하면 유종열인데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위해 광화문 철거하는 것을 결사 반대 하자 총독부 직원들이 조선인 아니냐고 흉을 봤다는 일화가 있다.
[58]
1911년 조선총독부령 제124호 <조선인의 성명개칭에 관한 건>과 그에 관련된 통첩에 의하면, '일본인으로 혼동하기 쉬운 성명'으로 바꾸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이 법규는 1939년 창씨개명에 관한 법령들이 발표되면서 폐지되었다.{미즈노 나오키, '조선인의 이름과 식민지 지배', 2007}
[59]
"(전략)~ 오해하여서 안 될 것은 조선사람이
내지식으로 씨를 붙이고 이름을 지으면 내지인과 같은 월급을 받을 수 있겠지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는 모양인데, 그렇게는 되지 않는다. 아직도 내지와 조선 사이에는 전적하지를 못함으로~(후략), '알기쉬운 씨와 양자-변호사 이승우씨의 해설', '매일신보 193911.11, 3면
[60]
조선시대 당시 대표적인 명문가 중 하나로 유명 인물로는
권근·
권람·
권율 등이 있다.
[61]
혹은 안토. 한자 표기는 같다.
[62]
이를테면 안동의 안(安)과 권(權)을 따서 안켄(安權)이라고 한다거나.
[63]
본명
심재설.
야인시대의 등장인물로도 나왔던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심영이라는 예명으로 알려져 있다.
[64]
소설
비명을 찾아서의 주인공 기노시타 히데요(木下英世 목하영세)도 조선식 성은 박씨다.
[65]
ex)鄭 = 奠+邑.
[66]
현대 일본에서는 國 대신 国을 쓰지만 당시에는 國이 표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일본에서 인명에서는 国을 안 쓰고 國을 쓰는 경우가 있다.
[67]
그러나
전주 이씨를 제외한 다른 본관의 이씨 집안들은 창씨개명할 당시에
宮 자나
國 자 등을 일본식 이름 작명에 사용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68]
1930~40년대에 태어난 할머니 이름이 춘자(春子), 방자(方子)와 같은 이름이 많은 것도 그 이유다. 한국인이 듣기엔 촌스런 옛날 이름 이지만 일본어로 바꾸면 하루코, 마사코 등 지극히 평범한 여자아이 이름이 되기 때문이다.
[69]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나기 다이코인데 일본 현지에서도 통할 정도였다.
[70]
그래서 일제강점기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1984년에
대한민국
문화훈장을 받았다.
[71]
재일교포와 상관없는 도호쿠 지방에서 종종 보이는 성씨. 실존 인물로는 전 야구선수 곤 히로아키 등이 있다.
[72]
현대 기준 '야스'씨는 전국에 4000명, '구루마'씨는 전국에 1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73]
사타케 요시시게·
사타케 요시노부의 가신으로 구루마 쓰나타다(車斯忠)라는 사람이 있는데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 등장하긴 하지만 사타케 팬이 아니면 기억에도 잘 안 남을 이 사람이 구루마 씨의 대표 인물로 소개될 지경이다. 현대인 중에서는 무술 지도자 겸 배우인 구루마 쿠니히데(車邦秀)
#가 있다.
[74]
그래서 반대로 이런 고전 쪽에 통달한 지식인들의 모임인
조선어학회의 회원 중에는 본인의 성이 일본의 씨로 쓰였다는 사례를 고전에서 찾아내 서기에게 제시했고 어쩔 수 없이 서기가 수용해서 그대로 넘어간 사례가 있다. 조선어학회는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대거 집결한 곳이라 자연히 이 분야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75]
음독 그대로
세키가하라 전투 때에 근처에 난구 산(南宮山) 이 있어서 일본인들은 한두 번 정도는 들어 본 지명이다.
[76]
훈독(미나(미)+미야)
[77]
일본의 성씨는
한국의 성씨와는 반대로 한자로 썼을 때 2글자인 성씨가 다수이다.
[흥덕]
흥덕 장씨의 대다수는 하리모토로 창씨하였다.
[인동]
인동 장씨가 주로 쓴 일본식 씨명으로,
베풀 장자를 파자해
장궁이라는 새 뜻으로 만든 것.
[비개명]
[비개명]
[82]
순흥 안씨의 대다수는 야스다로 창씨하였다.
[83]
죽산 안씨중에 타케야스로 창씨한 사례들이 있다.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비개명]
[91]
倉衛는 의미상으로는 관계 없는 한자지만 '먹어라'라는 뜻인 喰らえ와 독음이 같다.
[92]
이 때문에 일제강점기에 조선에서 이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이에 착안한 것인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이 이 궁호를 빌미로 일본 교도관에게 천황을 욕보이면서 낄낄대며 개기다가 두들겨맞으며 고문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
[93]
일본어로 "
지쿠쇼"라고 읽히는 그 단어를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94]
대략 "엄이섭입니다." 같은 의미가 된다.
[95]
여담으로 해당 성씨의 발음은 이와지(いわじ) 내지는 이와니(いわに)로 읽히게 된다.
[96]
참고로 도요토미 가문을 무너뜨리고
에도 막부를 세운 도쿠가와의 성은 조선인들이 창씨명에 쓸 수 없게 했었다.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아들들이 일본 제국 본토에서 아직도 귀족 가문으로서 귀족원 의원, 귀족원 의장을 지내는 등 현역 귀족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으로 스스로
메이지 덴노에게 정권을 넘겨줘서 도쿠가와 가문은 근대화 이후에도 메이지 신정부의 귀족 가문으로 편입되었었다.
[97]
지금의 80대 중반~후반(1935~1941년생). 대표적으로 쓰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라는 이름으로 유명한 17대 대통령
이명박이 이 케이스다. 단, 이명박은 오사카 태생의 재일 한국인이었다.
[98]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음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99]
LG그룹 2대 회장
구자경과는 동명이인인 1888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하였다.
[100]
위의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1906년생의
공산주의 계파의
독립운동가이다.
[101]
성우
기영도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02]
독립운동가, 1931~1932년생,
함경북도
경흥군 출신.
[103]
독립운동가, 1925년생,
평안북도
자성군 출신.
[10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사회주의 계파 사회운동가 겸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05]
친일파, 1886년생,
황해도
재령군 출신
[106]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
[107]
대한민국의 가수
김명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08]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
[109]
대한민국의 무술인
김명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10]
또는 당시
서울
용산역(龍山驛)에서 "전투에서 전사하여 기차에 실려 돌아오는 황군 장병의 시신에서 깊은 감명을 받아 슬퍼했다"는 경험을 토대로 용산역(龍山驛)을 이름에 반영했다는 의견도 있다.
[111]
독립운동가. 1912년생.
경기도
양주군 출신.
[112]
독립운동가. 1923년생.
평안남도
평양부 출신.
[113]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14]
대한민국의 정치인
김봉두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15]
링크된 대한민국의 기업인
김삼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16]
독립운동가. 1873년생.
충청남도
아산군 출신.
[117]
독립운동가. 1912년생.
경상북도
대구부 출신.
[118]
독립운동가, 189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
[119]
독립운동가, 1910년생,
강원도
철원군 출신.
[120]
대한민국의 양궁선수
김신애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21]
김억 시인은
김소월 시인의 스승이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 '삼수갑산 - 차안서선생삼수갑산운'의 '안서선생'이 스승 김억을 일컫는다. 번역하면 '안서선생께 보내는 삼수갑산 운(답시)'로, 김억의 시 삼수갑산에 대한 답시임을 나타낸다.
[12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23]
친일반민족행위자, 1886년생,
경상북도
문경군 출신.
[124]
독립운동가. 1915년생,
황해도
금천군 출신.
[125]
친일반민족행위자, 1880년생,
한성부 출신.
[126]
승려, 1884년생,
경상남도
함양군 출신.
[127]
친일반민족행위자, 1888년생,
한성부 출신.
[128]
독립운동가, 1915년생,
경상북도
김천군 출신.
[129]
전자는 일본에서 일본인으로 위장해 생활할 당시에 사용하던 이름으로, 후자는
갑신정변 실패 이후 위험에 처하자
갑신정변을 주도한
개화파 세력들과 함께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승선한 지토세마루(千歳丸)호가 일본에 도착한 이후 헤어졌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30]
가수
김재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31]
대한민국의 국회의원
김재천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32]
독립운동가. 1907년생.
경기도
평택군 출신.
[133]
독립운동가. 1918년생.
전라북도
익산군 출신.
[134]
시인, 친일반민족행위자. 1914년생.
함경북도
경성군 출신.
[135]
독립운동가. 1920년생.
충청남도
서산군 출신.
[136]
한화그룹의 초대회장
김종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37]
독립운동가, 1902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
[138]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인
187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
[139]
독립운동가. 1921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
[140]
독립운동가.
평안북도
후창군 출신.
[141]
일제강점기 당시의 유명 배우. 독은기라는 예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142]
187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
[143]
친일반민족행위자, 1902년생,
충청북도
제천군 출신.
[144]
독립운동가, 1916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
[145]
친일반민족행위자, 1896년생,
전라남도
여수군 출신.
[146]
독립운동가, 1889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
[147]
링크된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48]
1904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법조인으로 활동했다.
[149]
야구선수
박광명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50]
정치인
박광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51]
1905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다.
[152]
김옥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갑신정변이 실패한 이후 떠난 일본행 망명길에서 지토세마루(千歳丸)호의 선원 쓰지 도주로(辻藤十郎)가 지어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153]
박정희의 창씨개명이 오카모토 미노루(岡本 実)나 마쓰모토(松本)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가 실제로 창씨개명 시기에 정식으로 작명한 일본식 이름은 "高木正雄" 하나뿐인 것으로 추측된다.
* 북한이 그의 친일 행적을 비판하려는 목적으로 퍼뜨렸다는 주장도 있고, 일부 전문가들도 본관인 고령(高霊)과, 본명인 정희(正熙)의 "正"등을 가져와 본관과 본명을 일부 유지하여 "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을 하였기에, 2차 개명을 하였단 걸 입증할 확실한 증거와 마땅한 이유가 없다는 점을 들어 이는 낭설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다.
[154]
대한민국의 트로트 가수
박태산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5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3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
[156]
동명이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박흥식과는 다른 인물로, 1900년대 중반
전라북도
남원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다.
[157]
대한민국 제 28대 법무부 장관을 지낸
백상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58]
1893년생.
일제강점기와
대한민국의 법조인으로 활동한 인물로, 1919년
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암살할 목적으로 자신의 집에 찾아와 자금을 요구하던
의열단원
윤병구,
유석현,
김지섭 등의
독립운동가들을
일본 경찰에 밀고하여 체포하도록 하였으며, 1927년에는 일본인 교장을 배척하는 운동을 벌였던
박종운,
박일봉 등 주도 학생들의 재판에 판사로 참여, 같은 달 비밀결사 단원
김응선 등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서 판사로 참여, 1931년에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획하고 전개한
임종만,
고인환 등의 학생들의 검사 측의 항고로 열린 항소재판과 이들에 대한 면소결정을 파기하여 본래 법원으로 돌려보냈고, 1932년에는 무장 독립운동 단체인 국민부, 군사부의
김형건,
박차석 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되어 열린 재판에 참여하는 등 여러 친일 행적을 보인 인물로, 이러한 경력으로 1934년에
일본 정부로부터 훈 5등 서보장을 수여받는 등 일본 정부로부터 여러 차례 훈장을 받은 인물이다.
[159]
187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
[160]
독립운동가, 1908년생,
경기도
경성부 출신.
[161]
독립운동가, 1913년생,
경기도
양주군 출신.
[162]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90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교육인으로 활동하던 인물이다. 여담으로, 친일파
김활란과는 학교 선후배 관계이다.
[163]
역사학자
서중석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64]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165]
1942년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방 이후에도 이 이름을
통명으로 삼았고, 일본에서 사업을 하는 동안 사실상의 본명으로 사용했으며, 현재도 일본에서는 이 이름을 쓴다. 그의
두
아들들 역시 일본 통명이 있다.
[166]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경기도
포천군 출신 인물이다.
[167]
교육인
신정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전라북도
옥구군 출신 인물이다.
[168]
친일반민족행위자임과 동시에
인도네시아의 독립운동가라는 독특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다.
[16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0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한 인물이다.
[17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기업인으로 활동한 인물이다.
[17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
[172]
대한민국의 기업인, 정치인, 비서실장을 지낸
유영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73]
영화감독
유영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74]
중앙일보 연재 청와대비서실
[175]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7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하였다.
[176]
정치인과 기업인을 지낸
이경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77]
해발 152 m짜리 야트막한 산이지만, 헤이조쿄를 둘러싼 야마토 3산 중 가장 신성시되었다. 만요슈에서도 가구산을 자주 언급하며, 오늘날 일본도 중요성을 인정하여 역사적풍토특별보존지구로 지정하여 보존한다. 지금도 종교인들이 종교적 목적으로 가구산에 오르곤 한다. 진무 덴노가 도읍했다는 우네비산도 아니고 하필 가구산에서 이광수가 성을 따왔음은 가구산이 야마토 3산 중 가장 특별한 곳임을 알았다는 증거이다.
[178]
그러나 이 설을 반박하는 의견 중 하나로, 당시 이광수가 자신이 살던 이북 지역의
묘향산(妙香山)의 지명을 가져와 가야마(香山)로 창씨하였다고 주장하는 의견도 있다.
[179]
대한민국의 모델 겸 유튜버인
이남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80]
구한말 시기의 조선 관료인
이도재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8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7년생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하였다.
[182]
위의
이동화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당시 일본에서 활동한 사회기관단체인이다.
[183]
참고로 이명박 형제는 '상' 자 돌림을 쓰고 있고(
이상득-이상은), 이명박 역시 족보에는 돌림자가 사용된 '이상정(李相定)'으로 기재되어 있다. 호적상 성명과 족보상 성명이 다른 경우는 주변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실제 사례로는
조국[250],
김대건 신부[251],
이만희[252],
한동숙[253],
심대평[254],
정형돈[255] 등이 있다.
[184]
대한민국의 작곡가
이민수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85]
독립운동가, 1898~1899년생,
경상북도
상주군 출신.
[186]
독립운동가, 1916년생,
평안북도
선천군 출신.
[187]
이 사람의 아들.
[188]
게임개발자
이승찬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89]
이영은으로 이어지는 인물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190]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93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은행원으로 활동하였다.
[19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6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
[192]
국회의원
이재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3]
무협소설 작가
이재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4]
국민의힘에서 활동하는 법조인 출신 정치인
이정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195]
1895년생의 언론인.
[196]
독립운동가, 1900년생,
경기도
파주군 출신.
[197]
독립운동가, 1919년생,
경기도
고양군 출신.
[198]
친일반민족행위자, 1885년생,
경상도
울산도호부 출신.
[199]
독립운동가, 1914년생,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
[200]
대한민국의 정치인
이주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01]
대한민국의 야구선수
이진영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02]
친일반민족행위자, 1903년생,
경기도
한성부 출신.
[203]
친일반민족행위자, 1909년생,
전라북도
전주부 출신.
[204]
독립운동가, 1920년생,
경기도
수원군 출신.
[205]
서정주의
가미카제 미화 및 찬양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이다.
[206]
학병으로 징집되었을 당시 일본 당국에 의해 작성된 육군전시명부에 창씨개명한 성 張安 옆에
가타카나로 하리야스(ハリヤス)라는 독음이 적혀져있다.
[207]
대한민국의 초대 여성가족부 장관
장하진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08]
영화감독
전창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 영화감독과 배우로 활동한 인물이다.
[209]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인 1889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경찰관료로서 활동한 인물이다.
[210]
지토세마루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辻勝十郞)의 아들로, 김옥균과 유혁로에게도 일본식 이름을 직접 지어줬다.
[211]
대한민국의 드라마 감독
정대윤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2]
기업인
정상봉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3]
대한민국 제7대 기상청장
정순갑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4]
뮤지컬 배우
정영주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5]
대한민국의 제 22대 국방부 장관과 제 42대 내무부 장관을 지낸
주영복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6]
대한민국의 경찰공무원
최경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7]
국회의원
최병권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18]
후백제의 관료
최승우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19]
대한민국의 아나운서
최윤경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20]
대한민국의 아이돌 가수
최준홍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21]
링크된 인물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하였다.
[222]
1892년생.
[223]
1895년생.
[224]
대한민국의 펜싱선수
하태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25]
일제강점기에 활동하였던 기업인이다.
[226]
1885년생의 인물로,
일제강점기 당시 관료로 활동했다.
[227]
정치인
홍건표와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28]
제 4대 국군방첩사령관
황유성 중장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229]
위의
황종률과는 동명이인으로, 일제강점기 당시 목회자로 활동한 인물이다.
[230]
다 알다시피 이슬람교에서 돼지는 기피의 대상, 힌두교에서 소는 신성한 존재다.
[231]
문제는 여기도 중국계 성씨는 너무 중국인 이름 같아서 화교나 그 후손으로 백프로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232]
가령 유명한 역도 선수 나임
술레이마노프(Наим Сюлейманов)는 나움 샬라마노프(Наум Шаламанов)로 변경되었다. 튀르키예로 탈출하고 나서 이름을 나임 쉴레이마놀루(Naim Süleymanoğlu)로 바꿨다. 해당 인물은 2017년 11월 사망.
[233]
혈통상 불가리아계였지만 조상이
오스만 제국 시절 이슬람교로 개종하여 대대로 무슬림으로 살아가게 된 포마크인 또한 독립국가 불가리아의 무슬림 탄압을 피해 튀르키예계와 함께 지금의 튀르키예 땅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많았다.
[234]
공교롭게도 튀르키예인의 가까운 친척뻘 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들 또한 독립국가 아제르바이잔에 사는 이들은 자신들을 지배했던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아 튀르키예식(아제르바이잔식) 이름과 슬라브식 성씨를 쓴다.
[235]
단순히
스웨덴의 지배를 받은 게 아니라 스웨덴 입장에서는 건국 초부터 원주민인
핀인들을 정복하면서 편입된
그냥 '본토의 일부'였다.
[236]
그래서 같은 우랄계 민족인
헝가리인들이 주변국 주민들에 비해 평균 신장이 작은 반면, 핀란드인들은 평균 신장이 주변국 주민들과 큰 차이가 없다.
[237]
고대 유대인 사회에서는 성씨라는 개념이 없었는데
디아스포라 이후 유럽에 정착하면서 성씨 개념을 받아들이고 아무래도 현지에서 가장 익숙한 게르만/슬라브식 성씨를 만든 것이다.
[238]
다만 중화권 출신 이민자의 경우 대개 전자를 택하는 편이다.
한자의 한국식 독음도 중국어의 방언 비슷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
[239]
이탈리아어 위키백과나
프랑스어 위키백과에서도 후안 카를로스 1세의 항목명은 Juan Carlos이다. 번역명을 썼다면 Giovanni Carlo나 Jean Charles로 기재되었을 것이다. 단,
폴란드어 위키백과에서는
Jan Karol이라는 번역명으로 기재되었다.
[240]
영어권에서 에스파냐 국왕의 이름을 지칭할 때는
이사벨 2세까지는 번역명을 사용하고,
후안 카를로스 1세부터는 원어 그대로 표기한다. 그 사이에 재위한
알폰소 12세와
알폰소 13세도 원어 그대로 부르기는 하지만, 이 경우는 알폰소에 대응하는 영어 이름이 원래부터 존재하지 않아 번역명을 사용할 수 없었다.
[241]
예를 들어
박초롱초롱빛나리
[242]
대한민국에서는 법률로 인명용 한자를 지정하는데, 인명용 한자의 음까지 같이 규정한다.
[243]
귀화하는 외국인의 경우 순한글 성씨도 가능하다. 단, 성과 명 사이에 띄어쓰기는 불가능하다. 저술가로 유명한
박노자가 귀화할 때 이런 식으로 성명을 지어 그의 가족관계등록부상 정식 이름은 '티코노프블라디미르'다.
[244]
아미키리 이치로(網切一郞)가 한국으로 귀화하면서 이름의 한자 표기를 그대로 유지하고, 한국식으로 읽은 '망절일랑'을 이름으로 사용한 케이스이다.
[245]
그 경우도 귀화하지 않으면 한국 이름 그대로 쓰는 사람도 많다. 특히 성인이 돼서 넘어간 케이스. 당장에
김무영 같이 일본에 완전히 정착했는데도 한국 이름을 꿋꿋이 유지하는 사례도 있다.(이 사람은 부인이 일본인인데다가
미필이라 한국에 돌아오면 군대에 가야 하기 때문에 그걸 회피하기 위해서 일본에 정착했을 수도 있다.)
[246]
혹은 장기체류 하지 않더라도 그냥 재미삼아서
[247]
물론 이런 경우는 사실 발음 문제가 크다. 구미권에서는 ㅓ나 ㅡ같은 모음의 발음을 어려워하기도 하고(우리에게 친숙한 언어 대부분은 ㅡ발음이 없다), 한국 이름 중 현지어로 이상하게 들리는 글자가 있는 경우(석-suck, 범-bum, 일-ill 등) 등이 있다.
[248]
예를 들어
프랑스의
잔 다르크(Jeanne d'Arc)는
영어로 Joan of Arc로 적는 경우가 많다. 잔 다르크가 현대인이었으면
프랑스어 표기 그대로 적었을 텐데 옛날 사람이거나 현대의 인물이라도 왕족일 경우에는 전통적인 방법대로 이름을 '번역'한다.
[249]
물론 쿨하게 씹고 전통적인 방식대로 '번역'하는 경우도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