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06:31:32

윤치호 일기

1. 개요2. 설명3. 기타4. 고종 독살설5. 외부 링크6. 같이 보기

1. 개요

윤치호가 청년 시절부터 죽기 직전까지 무려 60년간(1883년 1월~1943년 10월) 꾸준히 저술한 일기다. 격동의 구한말부터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오랜 세월에 걸쳐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던 지식인의 생생한 시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자료로 꼽히고 있다.[1]

당초 윤치호의 일기는 사후 자녀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1968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 제공되어 사료화되었다. 이후 유족들은 1990년에 일기 원본을 포함한 각종 관련 자료 원문을 윤치호의 모교인 에모리 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이후 한문, 영어로 쓰여진 원문이 국문으로 번역, 출간되었고, 에모리 대학교도 기증받은 원문을 디지털화하였다.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서 원문 및 국역 텍스트를,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원문 이미지를 온라인으로 제공하고 있어 쉽게 열람이 가능하다. (아래 외부 링크 참조)

2. 설명

1883년 1월 1일부터 1887년 11월 24일까지는 한문으로 일기를 썼고[2], 1887년 11월 25일부터 1889년 12월 7일까지의 일기는 국문으로 썼으며, 1889년 12월 7일 이후의 일기는 영어로 썼다.[3] 1908년부터 1915년까지 일기는 전해지지 않는데, 이는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다가 1915년에 가석방되는 과정에서 일제 당국에 압수된 후 분실된 걸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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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호의 자필 영어 일기 원문[4]

윤치호는 어학 실력이 매우 뛰어나 한국에서 제대로 영어를 배운 최초의 인물이다.[5] 그의 영어 일기를 보면 오늘날 미국인들이 봐도 어려워하는 라틴어 계열 고급 어휘를 매우 많이, 자유자재로 구사했음을 알 수 있다. 어휘뿐만 아니라 어법이나 문장 구성도 거의 완벽하다. 에모리 대학 재학 시절에는 그가 쓴 에세이를 교수가 영어 문어체 글쓰기의 모범 예시로 학생들에게 공유하기도 했다고 한다.

아쉬운 점은 윤치호가 그의 천부적 어학 능력을 한국어를 위해 거의 활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6][7] 만약, 그가 이 시기에 서양의 대표적 저작들을 한국어로 옮기는 번역 작업을 거들어 주었다면 근대화 과정에서 독자적인 문어 전통을 어느 정도 쌓을 수 있었을 것이며 현대 한국어에 대한 일본어 영향이 꽤 줄었을 것이다. 일본어 잔재론도 덜 나왔을 것이다.

윤치호의 일기 중 국문(한국어)으로 기록한 부분은 대체로 발음나는 대로 그냥 쓰면서도, 과도교정으로 인해 아래아를 필요 이상으로 많이 사용했다. 이후 영어로 일기를 쓰면서도 영어 찬송가를 한국어로 번역해야 할 때는 '훌륭한 영어를 잘못된 조선어로 바꿔야 함이 고통스럽다'고 일기에 적기도 했다. 그는 조선에서의 타자기 수요가 없으리라고 염세적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자식들에게는 조선어 읽기와 쓰기를 가르쳐 다중언어 구사자로 자랄 수 있게 했고, 본인도 조선어 관련 세미나에 참석해 연사들의 강연을 청취하곤 했다. 여러 정황을 볼 때 윤치호는 한국어를 민족 교육의 중요한 수단으로 보고 본인도 적극 활용했을지언정, 한국어의 어법 체계를 다듬기 위해 본인이 연구하는 데에는 큰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구한말 정치인으로서,[8] 일제강점기 개혁 운동가로서, 친일파로서 자신의 매우 솔직한 생각을 숨김없이 터놓았고[9] 당시 주변 환경에 대한 온갖 자잘한 내용들이 적혀있어 한국근현대사를 연구하는 데에 귀중한 서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개인 회고록이 그렇듯이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영국사와 서양 근현대사 전공인 박지향 서울대학교 교수가 이 일기를 통해 윤치호에 대한 수정론적 해석을 제시하였다.

3. 기타

당시 유교의 영향이[10] 어느 정도 남아 있던 청년 시절의 한문 일기에는 유달리 일기 첫머리에 愼(삼갈 신)자가 항상 들어가 있는데, 일기 내용상 그렇게 삼가서 행동하지 않은 듯한 날에도 적어둔 걸 보면 일종의 좌우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1] 이 당시 쓴 일기 중 1884년 5월 15일자에는 KYEKANヲシタ(KYEKAN오 시타 = KYEKAN을 했다)라는 정체불명의 단어가 있는데 이것이 ' 계간'(鷄姦)을 뜻하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것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국사 편찬 위원회에서 운영하는 한국사 데이터 베이스에서는 실제로 그렇게 해석해놓고 있다. 정말 계간이라고 해도 단순한 남색인지 양성애인지는 알 수 없다. 이 대목들 말고도 곳곳에 일본어 근대 한국어로 주변인의 전보나 대화 등을 원어 그대로 인용해 놓은 부분들이 많아 사료적 가치가 높지만,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제공하는 번역은 이러한 디테일들이 많이 누락되어 있는 편이다. 손글씨를 전산화하는 과정에서 오자가 많이 생겨 내용 판독이 어려운 탓인 듯.

문학 사상사에서 일제 강점기 시기 일기 중 중요 대목을 발췌 번역한 물 수 없다면 짖지도 마라라는 책이 나와있다.

4. 고종 독살설

'윤치호의 일기' 중 고종 독살설의 긍정론에 힘을 실어주는 대목이 있다.
완벽한 건강을 누리던 황제가 식혜를 섭취한 뒤 반시간 만에 격렬하게 몸을 뒤틀면서 죽었다. 황제의 팔다리가 하루 이틀 사이에 엄청나게 부풀어 올라서 통 넓은 한복 바지를 벗기기 위해 바지를 찢어야 할 정도였다. 민영달과 몇몇 사람들이 약용 솜으로 광무태황제의 입안을 닦아낼 때 황제의 이가 모두 빠져 있고, 혀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피트(30.38㎝)쯤 되는 검은 줄무늬가 목 부위에서부터 복부까지 길게 나 있었다.
The Emperor who enjoyed perfect health died inside of half an hour after he had taken the 食醯 or sweet rice water, in violent contortion. His limbs were so swollen in a day or two that his spacious Korean trousers had to be slit open to take them (trousers) off. When Min Yong Tal and others tried to wash the inside of the Emperor's mouth with medicated cotten they found the tongue had actually disappeared while the teeth had all dropped out of their sockets. A streak of black mark about a foot long extend from the throat to the abdomen.
윤치호 일기 (1920년 10월 13일자)

5. 외부 링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총서
에모리 대학교 도서관
  • Yun Ch`i-Ho papers, 1883-1943
    현존하는 윤치호 일기의 원문 이미지가 Original Diaries 항목에서 온라인으로 제공되고 있다.

6. 같이 보기



[1]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이태진(李泰鎭) 서울대 명예교수는, 윤치호 일기가 60년간 쓰였다는 점에서 예를 찾기 어려운 것일 뿐만 아니라, 각 시기마다 국가적, 사회적 현안에 대한 소견이 실려 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했다. [2] 희한하게 1884년에는 처음으로 영어 문장으로 일기를 쓴 대목이 있는데, 하필이면 그 대목이 자기가 사귀던 기생 백씨와 드디어 정을 나눴다는 내용이다. 기록은 하고 싶은데 남이 볼까봐 의도적으로 영어로 써서 내용을 감춘 듯. accomplish라는 단어가 잘 안 외워졌는지 accoprish라고 잘못 썼던 것도 눈에 띈다. 여담으로 윤치호는 첫째 부인 강씨가 바람을 피우자 한동안 여러 기생과 지내다가, 이 백씨와는 꽤 진지한 사이가 되어 집안에 양해를 구하고 첩으로 들였다. [3] 현장감을 담기 위해서인지, 일부 인물들의 말을 인용할 때는 한자를 섞은 근대 한국어 혹은 일본어 등으로 적기도 했다. 예를 들어, 궁궐 화재 당시 창덕궁으로 이어하기를 거부하던 고종황제의 말인 '나 죽거던 태자궁이나 데리고 가거라'라든가, 을사조약 당시 박제순이 '다 잘 되었으니 인궤 들여보내시오'라고 재촉한 대목이나, 고종의 국장 당시 조선인들이 장례행렬을 보고도 모자를 벗지도 않고 애도를 표하지도 않는 일본인 구경꾼들을 보면서 '무에 조아 웃니(뭐가 좋아서 웃니)?'라고 야유하던 모습, 일본인들은 자기들끼리 '이렇게 늠름한 군인들을 보면 조선인들은 벌벌 떨 테지.'라며 자기들끼리 떠들던 모습 등이 기록되어 등이 있다. [4] 위 이미지는 1940년 8월 10일자 일기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0일, 토요일, 흐림, 무더위. 오전 10시 20분 기차로 경성을 떠나 송도에 갔다. 12시 30분쯤 도착하여, 곧장 고려병원으로 가서 알렌을 병문안했다. 로라의 말로는, 알렌이 간밤에 잠을 잘 자기는 했지만, 과민반응이 아주 심하더란다. 김병선 박사에게 물어보니, 이틀 전에 39.9도까지 올랐던 열이 오늘 아침에는 많이 가라앉아 37.5도로 내려갔단다. 4시 35분 기차를 타고 경성에 돌아왔다.(10th. Saturday. Cloudy. Heat. Left Seoul 10:20 a.m. for Song Do. Arriving there about 10:30 went straight to Koryu Hospital to see Allen. Laura told me that Allen had a good sleep last night but that he is very irritative. Dr. Kim Pyong Sun said the temperature which rose to 39.9 two days ago came down to 37.5 this morning. Returned to Seoul by 4:35 p.m. train.)" [5] 보빙사가 미국으로 파견되기 전 그로버 클리블랜드 대통령에게 보내는 국서를 영어로 번역한 사람이 윤치호였으며, 갑신정변이 일어난 날인 우정총국 개국 연회에서도 영어 통역으로 합석해 있었다. [6] 그러나 다른 관점으로 보면 오히려 다행인 것이 친일파였지만 어학적 재능은 탁월했던 그가 번역 작업에 손을 대었으면 현대 한국어 어휘 대부분이 그가 만든 단어들로 구성되었을 것인데, 이러면 후세 입장에서는 싫어도 쓸 수밖에 없으며 불편한 진실 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진실이 되었을 것이다.한국인 입장에서 말이다. [7] 조금 앞선 시기 나쓰메 소세키, 후쿠자와 유키치, 니시 아마네 등의 일본인 언어학자 및 번역가들이 만든 번역 한자어들이 바로바로 근대 일본어에 흡수되었고 다시 한국어, 중국어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낭만'이라는 말은 나쓰메 소세키가 로망이라는 말을 번역할 일본어가 없어서 새로 만들어낸 한자어다. [8] 이 때 세계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가는데 고종이 결단력을 확실히 못내리고 우유부단하게 대처한다고 비판하였다. [9] 윤치호 본인은 독립 협회 활동 전후 시기에 차라리 일본서 살고 싶다거나 조선은 차라리 문명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더 나을거다 운운하는 글을 자기 일기에 적어놨다. 이 시기 윤치호 일기를 보면, 미국은 인종 차별하고 중국은 더럽고 조선은 중국보다 못한데 일본은 세계의 정원으로 가장 아름다운 낙원이다라고 칭송하고 있다. 윤치호 일기가 본격적으로 번역되면서 윤치호의 친일 협력 시기를 상당히 앞으로 당겨잡는 이들이 많아졌다. 다만 윤치호 일가가 상당히 행동을 조심하였으며, 윤치호의 행동이 전형적인 민족 계몽 운동에 닿아있어서 윤치호를 친일로 비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불똥이 튀고, 무엇보다도 윤치호의 독립 협회 활동에서 친일적 요소를 찾으면 안그래도 깨끗하지 못한 독립 협회가 다시 또 까이게 된다라는 문제점이 있다. 그래서 친일 협력 시기를 쉽게 올려잡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10] 윤치호는 서얼이라 과거 응시자격도 없어 조선 기준으로 사대부에 못 낀다. 아버지 윤웅렬도 서얼에 무관이라 정통사대부가 아니다. 구한말이 아니라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서얼집안 출신으로 잘해봐야 무관이나 역관 정도 벼슬만 가능하다. 다만 윤치호는 아버지가 아들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기대를 많이 걸었기에 사대부에 준하는 수준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11] 이는 그의 아버지인 윤웅렬과 윤치호 특유의, 최대한 적을 만들지 않으면서 살고자 했던 처세 방식을 떠올리게도 한다. 또는 '홀로 있을 때도 마음을 살펴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바르게 함'이라는 성리학의 용어인 신독(愼獨)을 지칭하는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숨김없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일기에 모두 적은 것도 신독의 일환이었을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