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8-28 22:05:58

김광섭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현재 회원
[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유종호 전뢰진 안형일 김정옥
김우창 이신자 황영금 임권택
황동규 최종태 이경숙 조흥동
이근배 윤명로 이재숙 최청자
김원일 이종상 서계숙 박정자
서정인 유희영 한명희 김숙자
한말숙 박광진 윤대성
김후란 엄태정 나인용 김지미
김화영 김숙진 나덕성 손숙
김주연 강찬균 신수정 정승희
오세영 최의순 이경숙 김민희
정현종 정상화 김민 박명숙
유안진 윤승중 이영자 손진책
정연희 홍석창 백병동 정지영
김주영 조정현 장혜원 이호재
오정희 김형대 김성길 신영균
신달자 이철주 윤미용 신구
윤흥길 - 정진우 이강백
천양희 - 이만방 안성기
전상국 - 김우진 김긍수
최동호 - - -
권영민 - - -
김광규 - - -
작고 회원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박종화 고희동 박태준 안종화
염상섭 이상범 현제명 이규환
조연현 장발 이주환 유치진
유치환 손재형 김성태 이해랑
서정주 배렴 김동진 오영진
윤백남 김환기 성경린 변기종
오상순 윤효중 김영의 서항석
이헌구 노수현 김원복 이광래
김동리 도상봉 정훈모 김동원
황순원 김인승 이흥렬 박진
김말봉 배길기 임원식 김정환
곽종원 허백련 김생려 이진순
모윤숙 이종우 김세형 조택원
신석초 김은호 이혜구 유한철
박영준 이병규 이상춘 이병일
김광섭 장우성 장사훈 이원경
이은상 김경승 김자경 김천흥
박화성 이순석 김기수 김소동
박목월 오지호 박민종 김충실
백철 김종영 전봉초 차범석
최정희 박영선 김성진 유현목
안수길 박득순 정희석 송범
윤석중 천경자 홍원기 장민호
오영수 이유태 황병덕 김수용
김기진 유영국 정회갑 최금동
임옥인 류경채 김순열 임성남
구상 김원 김순애 이근삼
손소희 김기창 이성천 신봉승
이범선 이종무 황병기 김기영
조병화 김충현 이인영 박현숙
김춘수 이준 백낙호 김문숙
정한모 허건 권오성 강성희
김윤성 박노수 강석희 김지헌
박연희 권옥연 김남윤 임영웅
선우휘 백문기 이규도 이병복
정한숙 문학진 박노경 김기덕
신동집 남관 백성희
강신재 이대원 박조열
박양균 권순형 황정순
한무숙 오승우 송수남
김성한 이광노 김학자
전숙희 윤영자 변장호
홍윤숙 권영우 남궁원
김남조 손동진 오현경
이호철 민경갑
김종길 조수호
김요섭 이수덕
홍성유 서세옥
문덕수 김흥수
이어령 김병기
박두진 한도용
서기원 송영방
조경희 권창륜
성찬경
김윤식
최일남
박완서
이청준
박희진
오탁번
신경림 }}}}}}}}}


파일:나무위키+유도.png  
은(는) 여기로 연결됩니다.
동명이인에 대한 내용은 김광섭(동명이인) 문서
번 문단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 에 대한 내용은 문서
번 문단을
번 문단을
부분을
부분을
참고하십시오.
파일:external/tv.pstatic.net/20070522135026197119342.jpg
<colbgcolor=#0047a0><colcolor=#ffffff> 창씨명 카네보시 코우쇼(金星珖燮)
이산(怡山)
본관 전주 김씨[1]
출생 1904년 9월 22일[2]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송신동
(현 함경북도 어랑군 어대진노동자구)
사망 1977년 5월 23일 (향년 72세)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삼부아파트 자택
학력 경성공립보통학교 (졸업)
중앙고등보통학교 (중퇴)
중동학교 (졸업)
와세다대학 ( 영문학 / 학사)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311호
상훈 건국훈장 애국장

1. 개요2. 생애3. 대표 작품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독립유공자, 시인.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1904년 9월 22일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면 송신동(현 어랑군 어대진노동자구)에서 김인준(金寅濬)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성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경기도 경성부 운니동(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운니동)에 거주하였으며,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가 중퇴하고 중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 영문과에 진학하여 1932년 3월 졸업했다.

귀국 후 1933년 4월부터 모교인 중동고등보통학교의 영어교사에 채용되어 교사 재직 중에 꾸준히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는데, 1939년 3월 3학년 을조 교실 학생들에게 " 일본인과 조선인은 모두 일본인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에 차별이 있었고, 일본인이 조선에 도항하는 것은 자유롭지만 조선인은 허가 없이는 일본에 도항할 수 없다. 이러한 차별대우는 조선인에게 자유를 주지 않겠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조선인을 용인하기 어렵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몰래 조선의 독립을 기도해야한다"며 학생들이 일제의 민족차별정책에 대해 자각하도록 동기를 심어주었고, 1940년 6월에는 4학년 갑조 학생들에게 "중동학교에서 조선어 과목의 폐지는 조선어의 근절을 목표로 하는 정책이다. 하지만 조선민족이 존속하는 한 조선어는 절멸해서는 안된다"며 조선어말살정책을 비판하였다.

또한 1940년 9월에는 같은 교실에서 이광수 이태준을 들어 '조선에서의 민족주의자'로 소개하고는, "조선인으로서 위 두 인물을 알고 그들의 작품을 접할 필요가 있다"며 민족의식을 고취하였고 같은 달 "이번에 한글신문인 조선일보 동아일보 조선총독의 탄압에 의해 폐간당했는데, 두 신문의 폐간이 조선 문학의 근절을 목표로 한 것이라 본다면 이는 조선인을 문맹화하려는 첫걸음인 것을 알 수 있다"며 일제의 언론탄압정책을 비판하기도 했다. #

결국 그는 1941년 2월 21일, 이로 인하여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잔혹한 고문을 당하였고 1942년 5월 31일에서야 경성지방법원에서 공판에 회부되었다. # 결국 그해 9월 1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이른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아 그해 11월 30일부터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파일:김광섭(시인 독립운동).png
1942년 1월 14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44년 11월 30일 만기출옥한 후에는 조용히 지내다가 8.15 광복을 맞았다. 8.15 광복 미군정청 공보국장으로 근무했으며, 1947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가 결성되자 창립총회에서 출판부장에 선출되었다. # 그러다가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첫 공보비서관을 지냈다. 1951년 사퇴 후 대전에서 대전신문사 사장을 역임했다. 1958년 10월에는 세계일보[3] 발행인에 취임하였다. #

한편, 1952년부터 1970년까지는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했으며, 작품활동을 이어나가던 중 1977년 5월 23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여의도동 삼부아파트 자택에서 지병인 뇌졸중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

김광섭 시인 사후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77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2010년 11월 4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4묘역에 이장되었다.

그가 지은 시로는 1966년 지은 ' 성북동 비둘기'가 대표작이다. 현대 문명의 삭막함을 노래한 시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김광섭 개인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는데 시를 쓰기 전인 1961년부터 김광섭은 성북동에서 거주하고 있었고, 당시에는 성북동에 채석장이 있었다. 성북동이 현대의 부촌으로 바뀐 것은 1970년대 후반 이후이다.

그의 시 '저녁에'는 1970년 김환기 화백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와 1980년 유심초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라는 곡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3. 대표 작품



[1] # [2] 1942년 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에는 1906년 9월 21일생으로 기재되어 있다. [3] 통일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세계일보와는 다르며, 1960년 4.19 혁명 이후 민국일보로 신문 이름을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