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6-27 23:48:08

김천흥

{{{#!wiki style="margin: 0 -10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현재 회원
[분과별 예술 분야]
문학분과: 소설, 시, 아동문학, 평론
미술분과: 건축, 공예, 동양화, 서양화, 서예, 조각, 태피스트리
음악분과: 국악, 바이올린, 성악, 작곡, 지휘, 첼로, 피아노
연극분과: 극작, 무대미술, 연기, 연출
영화분과: 감독, 시나리오, 연기
무용분과: 무용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유종호 전뢰진 안형일 김정옥
김우창 이신자 황영금 임권택
황동규 최종태 이경숙 조흥동
이근배 윤명로 이재숙 최청자
김원일 이종상 서계숙 박정자
서정인 유희영 한명희 김숙자
한말숙 박광진 윤대성
김후란 엄태정 나인용 김지미
김화영 김숙진 나덕성 손숙
김주연 강찬균 신수정 정승희
오세영 최의순 이경숙 김민희
정현종 정상화 김민 박명숙
유안진 윤승중 이영자 손진책
정연희 홍석창 백병동 정지영
김주영 조정현 장혜원 이호재
오정희 김형대 김성길 신영균
신달자 이철주 윤미용 신구
윤흥길 - 정진우 이강백
천양희 - 이만방 안성기
전상국 - 김우진 김긍수
최동호 - - -
권영민 - - -
김광규 - - -
작고 회원
문학분과 미술분과 음악분과 연극·영화·
무용분과
박종화 고희동 박태준 안종화
염상섭 이상범 현제명 이규환
조연현 장발 이주환 유치진
유치환 손재형 김성태 이해랑
서정주 배렴 김동진 오영진
윤백남 김환기 성경린 변기종
오상순 윤효중 김영의 서항석
이헌구 노수현 김원복 이광래
김동리 도상봉 정훈모 김동원
황순원 김인승 이흥렬 박진
김말봉 배길기 임원식 김정환
곽종원 허백련 김생려 이진순
모윤숙 이종우 김세형 조택원
신석초 김은호 이혜구 유한철
박영준 이병규 이상춘 이병일
김광섭 장우성 장사훈 이원경
이은상 김경승 김자경 김천흥
박화성 이순석 김기수 김소동
박목월 오지호 박민종 김충실
백철 김종영 전봉초 차범석
최정희 박영선 김성진 유현목
안수길 박득순 정희석 송범
윤석중 천경자 홍원기 장민호
오영수 이유태 황병덕 김수용
김기진 유영국 정회갑 최금동
임옥인 류경채 김순열 임성남
구상 김원 김순애 이근삼
손소희 김기창 이성천 신봉승
이범선 이종무 황병기 김기영
조병화 김충현 이인영 박현숙
김춘수 이준 백낙호 김문숙
정한모 허건 권오성 강성희
김윤성 박노수 강석희 김지헌
박연희 권옥연 김남윤 임영웅
선우휘 백문기 이규도 이병복
정한숙 문학진 박노경 김기덕
신동집 남관 백성희
강신재 이대원 박조열
박양균 권순형 황정순
한무숙 오승우 송수남
김성한 이광노 김학자
전숙희 윤영자 변장호
홍윤숙 권영우 남궁원
김남조 손동진 오현경
이호철 민경갑
김종길 조수호
김요섭 이수덕
홍성유 서세옥
문덕수 김흥수
이어령 김병기
박두진 한도용
서기원 송영방
조경희 권창륜
성찬경
김윤식
최일남
박완서
이청준
박희진
오탁번
신경림 }}}}}}}}}

파일:금관문화훈장 약장.png
금관문화훈장 수훈자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5px -13px"
1974
조택원
무용가
1975
안수길
소설가
1976
홍종인
언론인
1977
최석채
언론인
1978
방정환
독립운동가, 아동문학가
1979
고유섭
미술사학자
1980
전봉초
음악가
1981
김소월
시인
1982
이효석
소설가
1982
조지훈
시인
1983
홍승연
언론인
1983
천관우
언론인
1983
이육사
독립운동가, 시인
1984
이원수
아동문학가
1984
장발
미술가
1985
강소천
아동문학가
1986
홍진기
언론인
1987
김남중
언론인
1990
모윤숙
시인
1990
주시경
독립운동가, 국어학자
1994
김상만
언론인
1994
나운영
음악가
1994
이숭녕
국어학자
1995
공병우
한글연구가
1995
김소희
국악인
1995
문신
미술가
1995
정명훈
음악가
1995
이대원
미술가
1995
류경채
미술가
1996
송석하
민속학자
1996
신용호
기업인
1996
조병화
시인
1997
신순남
미술가
1997
홍두표
언론인
1997
최창봉
언론인
1997
정진숙
출판인
1997
고병익
역사학자
1998
방우영
언론인
1998
김연준
작곡가
1999
방일영
언론인
1999
방종현
국어학자
1999
김세형
음악가
1999
이유태
미술가
1999
김흥수
미술가
1999
장준하
독립운동가, 언론인
1999
송건호
언론인
2000
황순원
소설가
2000
백남준
미술가
2000
서정주
시인
2001
김기창
미술가
2001
김천흥
국악인
2001
장우성
미술가
2001
김수영
시인
2001
최영희
역사학자
2002
임권택
영화감독
2002
오지호
미술가
2003
박동진
국악인
2003
윤석중
아동문학가
2004
구상
시인
2004
이혜구
음악사학자
2005
박성용
기업인
2005
정세영
기업인
2006
신상옥
영화감독
2006
김동원
연극인
2006
차범석
극작가
2006
조남철
바둑기사
2007
송도균
언론인
2007
노성대
언론인
2007
송범
무용가
2008
박경리
소설가
2008
이청준
소설가
2008
김영랑
시인
2009
유현목
영화감독
2010
전숙희
수필가
2010
앙드레 김
패션 디자이너
2010
김영환
군인, 6.25전쟁기 해인사 폭격명령 거부
2011
박완서
소설가
2012
지관
해인사 주지
2012
이건희
기업인
2012
허동수
기업인
2012
김형규
국어학자
2013
이우환
미술가
2014
호머 헐버트
선교사, 한글 체계화 공헌 및 한글 보급·한글 홍보 공로
2014
전형필
문화재수집가
2014
이은관
국악인
2016
백성희
연극인
2016
임영웅
연극인
2017
박맹호
출판인
2018
최인훈
소설가
2018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2018
정지용
시인
2018
황병기
국악인
2020
서세옥
미술가
2019
김성환
시사만화가, 대표작《 고바우 영감
2020
손창근
미술품소장가
2021
윤여정
영화배우
2021
이어령
문화부장관, 작가, 정치인 겸 문학평론가
2021
박서보
화가
2022
송기숙
작가
2022
송해
희극인
2022
김우창
문학평론가
2022
김지하
시인
2022
이정재
배우
2022
황동혁
감독
2023
이미자
대중음악인
2023
조수미
성악가
2023
이미경
기업인
2024
이문열
소설가
}}}}}}}}} ||
김천흥
金千興
파일:이왕직 아악수 김천흥.jpg
<colbgcolor=#94153e> 본관 경주 김씨
출생 1909년 3월 30일
한성부(현 서울특별시)
사망 2007년 8월 18일 (향년 98세)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자녀 슬하 3남 3녀
경력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1922년~1940년)
대한국악원 이사(1945년~1950년)
국립국악원 원로사범(1951년~2007년)
대악회 이사장(1973년~1993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1978년~2007년)
무형문화재예술단 단장(1983년~1993년)
심재 정악단 창단 고문(2004년)
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
국립국악원 예술사
국립국악원 국악사
서울특별시 문화위원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
경희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보유자(1968년~200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39호 ' 처용무' 보유자(1971년~2007년)

1. 소개2. 생애3. 예술세계4. 일화

[clearfix]

1. 소개

대한민국 국악인이자 조선왕조의 마지막 무동.

2. 생애

파일:심소 김천흥.jpg

호는 심소(心韶). 1909년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동보통학교[1]를 졸업 후 1922년에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1923년 순종황제 오순탄신연에 무동으로 참가하였고, 해금을 전공, 양금을 부전공으로 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40년까지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아악수, 아악수장을 역임했다.

1940년부터 민간음악인들과 음악활동을 했고,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강사, 조선권번의 사무원으로도 활동했다. 광복 후 대한국악원 이사 겸 무용부장을 맡았고, 1951년 국립국악원 예술사가 된 후 2007년까지 연주원, 자문위원, 원로사범, 명예종신단원으로 활동했다. 이후 1964년에는 중요 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및 일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으며, 1971년에는 제39호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궁중정재의 대가로 통했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평생 후학을 양성했다. 민속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어 살풀이춤, 승무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2007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친구인 성경린과 함께 국악계의 산증인으로 활동했다.

3. 예술세계

조선왕조 궁중무용의 대가, 마지막 무동이라는 표현이 그를 압축적으로 잘 설명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하면서 해금과 양금을 각기 전공, 부전공으로 삼아서 졸업했고, 해방 이후에도 몇몇 음반에서 해금과 양금 주자로 활동한 적이 있다. 또 종묘제례악이나 궁중 정악 합주의 집박[2]으로도 참여하는 등, 기악 연주 쪽에서도 활발히 활동한 것이 사실이다.[3]

그러나 만년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무용 제자들을 지도했고, 이애주[4], 인남순 등 현재까지 활발하게 무용가로 활동하는 이들이 그의 제자인 것에서 드러나듯, 무용 분야에서의 활동이 두드러진 것이 사실이다. 또 그의 중요한 사승 인맥 중 한 사람이 한성준인 것 역시 주목할 부분. 궁중무용은 정악 거문고의 대가였던 이수경에게서 배웠으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권번 재직시절에는 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배우는데에도 주력하여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겸전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5] 그 때문에 살풀이춤[6]이나 승무로도 제법 많이 무대에 섰다.

장기는 예능보유자로 지정되기도 했던 처용무와 궁중 정재 가운데 독무인 춘앵전. 춤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정재 전반의 구성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정재에 포함되어 있는 창사(唱詞)도 잘했다. 담백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창사는 일품으로 꼽힌다.

4. 일화

1923년 이른 봄 그는 이왕직 아악부 2기생 중 무동으로 뽑혀 창덕궁 인정전 앞뜰의 순종황제 50회 탄신 축하연장에 참석하여 순종을 알현하였다고 한다. 더불어, 1910년 경술국치와 함께 사라졌던 궁중무동춤이 다시 선보인 것[7]도 이 때가 처음이라고 한다. 이때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증언하였다.
“그 때 순종 황제의 용안은 화사하시면서도 핼쑥했었습니다. 워낙 병약하셨던 터라 시종들의 부액(부축)을 받으셨지만, 너그러운 미소를 잃지 않고 진연이 끝난 아악부원들에게 가벼운 목례를 보내 주셨지요.”


[1] 서울봉래초등학교 [2] 일종의 지휘자격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오케스트라 지휘자와는 달리 시작과 끝을 알리는 역할만 한다. [3] 기본적으로 '집박'은 국립국악원 정악단 소속의 원로사범들이 주로 하는 경우가 많다. 60년대 녹음에서 후일 국악원장이 되는 김기수가 집박을 맡는 경우가 많고, 80년대 이후에는 김천흥, 성경린 등 1900년대 태생 원로 단원들이 집박을 맡아 녹음한 경우가 많이 나타난다. [4] 이애주는 이후 송범의 문하에 들어갔다가 한영숙의 문하로 들어가 한영숙류 승무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5] 다른 한 사람으로는 한영숙을 들 수 있다. 물론 이 분은 애초에 할아버지가 궁중무용, 민속악을 넘나들었던 대가 한성준이다.(...) [6] 그냥 하얀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나와서 아주 짧은 수건을 들고 춘다. 현재 실연되고 있는 한성준-한영숙류 살풀이와는 다소 다른 것도 사실이고, 이대조-이매방류의 그것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7] 1920년대는 사이토 마코토 총독 취임 후 조선 문화를 제한적으로나마 용인하(지만 교묘하게 친일파를 양성하)는 일명 문화정치가 시행될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