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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李象範, 1897-1972.대한민국의 화가, 친일반민족행위자. 호는 청전(靑田). 전통 수묵화로 유명한 화가이지만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1897년 충청남도 공주군 정안면 석송리에서 아버지 이승원과 어머니 강릉 김씨 사이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6개월만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서 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머니는 10살이던 1906년 서울로 이주하게 되고 서울에서 사립보통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집안의 어려운 형편으로 인해 금방 학교에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 때 그가 선택한 길이 바로 그림의 길이었다.그는 고희동에게 그림을 가르쳤던 심전 안중식의 경성 서화미술회 강습소 혹은 서화미술원에 1914년 들어간다. 이는 최초의 근대식 미술학원으로서 심전과 함께 소림 조석진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이는 조선 왕가의 후원금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청전 또한 이곳에서 돈 걱정 없이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이곳에서 뛰어난 재능 덕에 청전은 심전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상범의 호인 청전이 바로 안중식의 호 심전에서 전 자를 따서 심전이 내려준 호였을 정도. 1918년 서화미술원을 졸업하게 되었지만, 서화미술원은 그의 기수를 마지막으로 문을 닫는다.
1922년부터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그 당시 조선총독부는 조선미술전람회 약칭 선전이라는 미술 전람회를 열어 그림을 전시하고 수상을 하였다. 청전은 1회부터 마지막 1944년 23회까지 여기에 참가하여 4회부터 13회까지 10년 연속 특선을 차지하는 진기록을 거두기도 했다. 그리하여 17회부터는 심사 참여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이 때의 그림 중 현존하는 것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는 < 초동>으로 이 그림은 1977년 본 소유자 박주환 동산방화랑 대표가 국립현대미술관에 기부하여서 미술관이 소장하게 되었고 등록문화재 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초동은 전통적인 산수화 기법에서 벗어나 근현대로 나아가던 한국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다. 우선 전경은 진하게 후경은 연하게 라는 서양 원근법의 요소가 이 그림에는 적용되어 있다. 또한 전경의 사물들을 세밀하게 묘사하여 그림의 대상이 되는 사물의 개체적 사실에 주목했다는 점이 중요 요소로 꼽힌다. 그리고 화면 앞을 가로질러 지나가는 고랑의 명암 표현도 두드러진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새로운 표현 기법이 아닌 기존의 한국화 기법인 미점준으로 그려져 있다. 이는 청전의 작품의 주요 특징으로 나타나는 기법으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어떤 것이 우리의 것인가라는 문제는 나로 하여금 우리의 습속과 전통과 풍경을 살피게 했고 그것을 어떻게 그림에 흡수시킬 것인가를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우리나라의 언덕과 같은 느린 경사의 산과 초가집, 초부들을 발견하고 그러한 소재에 가장 어울리는 화법으로 미점법을 발견해낸 것은 바로 이때였다."
이렇듯 이 작품은 작품 인생에 기초가 되는 그림이라 할 수 있겠다. 또한 이 그림은 근현대로 달려나가는 우리나라 전통 산수화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사진과 서양화가 도입됨에 따라서 이들이 목표로 하는 관념적 세계에서 벗어난 '현실의 재현'이 우리나라의 화가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었고, 이로 인해 전통 산수화가 사실묘사 방향으로 나아가 '사경산수화'를 만들어낸 그 결과물이 바로 이것이다.
한편 그는 이쯤 변관식, 노수현 등 친한 화가들과 함께 동연사(同硏社)를 결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단체는 얼마 지나지 못해 전시조차 가지지 못하고 해산되고 만다. 그리고 초동을 발표한 1926년의 다음해, 염상섭의 소설 ‘사랑과 죄’를 시작으로 동아일보의 삽화가로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다양한 인물화 시도를 한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다가 1936년에 사건이 일어나는데, 그것은 바로 동아일보의 일장기 말소사건이었다. 체육부 기자였던 이길용 기자가 제안하여 벌어진 일이었던 이 일에 동아일보 미술 담당 기자로서 이상범은 직접 사진의 일장기를 물감을 이용해 흐릿하게 만들었다. 그리고도 사진의 흔적이 남자 동판에 현출되어 남은 흔적을 청산가리 농액을 이용해 없앤 뒤 이를 인쇄하게 되었다. 그리고 잡혀가 40일간 모진 고문을 받고 언론계와 일체 연을 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나게 된다. 이 후 지금 종로구 누하동의 한옥집에 자리를 잡고 1933년에 개설한 청전화숙의 운영에 전념하게 된다. 그리고 금강산 사생을 통해 자신의 그림 방식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이 시기 그는 과거의 항일 경력을 잊고 친일 활동에 참가하게 된다. 1942년 8월 선생은 조선남화연맹의 창립을 주도한다. 그리고 1942년 10월과 12월 두 번의 전시를 통해 벌어들인 돈을 육군과 해군에 헌납하여 일제의 전쟁에 협력한다. 그리고 1943년 8월 6일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라는 징병제 개시 기념 시리즈에서 김종한의 시 나팔수의 삽화를 그림으로서 또 한번 친일 활동을 하였고 후에 친일인명사전에 기록되게 된다.
광복 이후 그는 조선미술협회에 참여했고, 1949년부터 은퇴하는 1961년까지 홍익대학교 교수로서 활동한다. 하지만 그러던 도중 한국 전쟁이 발발하고 동요하지 말라는 이승만의 방송을 믿고 마루 밑에 숨어 국군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국군은 돌아오지 않았고 아사 직전에야 발견되어 조선미술가동맹에 강제로 가입한다. 이 단체는 북한군이 선무 공작을 위해 사용되는 예술품들을 만들기 위해 결성한 단체로서 이곳에서 북한군의 강요 하에 초상화와 포스터를 그리는 일을 해야 했다. 여기에 장남 이건영이 북으로 자진 월북 하면서 생이별의 아픔까지 겪게 된다.
이후로도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고 1953년에서 1960년까지 국전 심사위원을, 1957년 예술원 공로상, 1962년 문화훈장 1965년 서울시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1972년 5월 14일 만 74세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