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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성용(기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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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문화훈장 수훈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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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금호아시아나 제2대 회장
박성용
朴晟容|Park Seong-yawng
파일:박성용 회장.jpg
<colbgcolor=#454a51> 본명 박준구(朴準求)
문호(雯湖)
본관 밀양 박씨
출생 1932년 2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
(現 전라남도 순천시)
사망 2005년 5월 23일 (향년 73세)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
국적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
직업 기업인
학력 광주서중학교 (졸업 / 26회)
중앙고등학교 (졸업 / 41회)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 사회학 / 중퇴)
일리노이 대학교 ( 경제학 / 학사)
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 ( 경제학 / 석사)
예일 대학교 대학원 ( 경제학 / 석사 · 박사)
서울대학교 ( 철학 / 명예박사)[1]
부모 아버지 박인천 어머니 이순정
형제자매 남동생 박정구,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여동생 박경애[2], 박강자[3], 박현주[4]
배우자 마가렛 클라크 박(Margaret Clark Park)[5]
자녀 장녀 박미영
장남 박재영
종교 불교

1. 개요2. 생애3. 상훈4. 어록5. 가족관계6. 음악계 육성 후원7. 이야깃거리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기업인. 금호아시아나 제2대 회장.

동생들과 달리 이름이 유일하게 돌림자가 아닌데, 동생 박삼구 전 회장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준구(準求)였는데 후에 개명했다고 한다.[6]

기업 경영자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한국 클래식 음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한 인물로 평가된다.[7]

2. 생애

1932년 2월 17일 전라남도 순천군 순천읍(현 순천시)에서 금호아시아나의 창업주인 금호 박인천 회장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주서중학교(26회), 중앙고등학교(41회)[8]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문학부 사회학과에 진학했다가 중퇴하였다. 이후 미국에 유학 가서 1959년 일리노이 대학교 어배너-섐페인 캠퍼스 경제학과를 졸업했고, 이어 일리노이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1965년 예일 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박사 학위 취득 후 1965부터 1967년까지 케이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 조교수, 1967부터 1968년까지 UC 버클리 조교수로 근무했다.

국제부흥개발은행( IBRD) 부총재의 딸(미국인)과 결혼할 당시, 장인이 "한국으로 귀국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포함한 3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1968년 IBRD와 협력할 일이 생긴 청와대에서 박성용의 도움을 얻고자 금호그룹에 압력을 행사, 결국 장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귀국해 1968부터 1970년까지 2년 동안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경제비서관을, 이후 1970년부터 1971년까지 김학렬 경제기획원장관 비서관을 역임하였다. 1971년부터 1974년까지 서강대학교 경상대학 경제학과 교수를 역임하였다.

1974년 교수직을 그만두고 금호그룹 경영에 참여하였다. 1974년 금호실업 대표이사가 되었고 1979년 금호그룹 부회장, 1984년 박인천 회장이 별세 후 금호그룹의 총수가 되었으며, 1987~1997년까지 전국경제인연합회 부회장도 지냈다. 1996년 바로 아래 동생인 박정구에게 총수직을 물려주고 명예회장직으로 물러났다.

회장에 오른 직후 부실한 상태였던 금호건설 광주고속에 인수시키는 과감한 조치를 단행해 적자를 만회하고, 이후 건설업의 호황에 힘입어 금호건설도 흑자 전환을 맞이했다. 아시아나항공의 출범도 그의 회장 재임 기간에 이루어졌다. 동생 박정구 시대에 재계서열 10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그 기반을 잘 마련해주었다고 평가받는다.

2005년 5월 23일 미국 캘리포니아 주 샌프란시스코의 한 병원에서 숙환인 폐암으로 별세했다.

3. 상훈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7년)
  • 몽블랑 문화상 (2004년)
  • 금관문화훈장 (2005년)

4. 어록

"문화와 예술을 사랑한다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고, 젊음을 사랑한다는 것이며, 인류의 미래를 믿는 것이다."
박성용 명예회장의 예술사랑 어록. 금호아시아나 문화재단 사무실 벽면에도 고인의 어록이 적혀 있다.
"해가 다르게, 아니 짧게는 달마다 변화와 성장을 거듭하는 음악 영재들의 소식을 접하다 보면 큰 기쁨과 감사한 마음을 갖게 됩니다. 지금도 토요일마다 자신의 음악회를 준비하며 음악 세계에 푹 빠져 있는 미래의 음악인들을 지켜보면 새로운 희망과 의지를 얻게 됩니다. 이 친구들을 위해 내가, 우리 기업이 해야할 일들을 떠올리다 보면 잠이 오지 않아요."
"고구마는 먹는 것만 생각하면 분명 소비재다. 그러나 먹고싶은 것을 참고 아껴두었다 땅에 심으면 자본재가 된다. 소비재도 활용하기에 따라서는 자본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고구마 경제학이라고나 할까. 기업경영도 마찬가지다. 사내유보를 늘려 설비투자및 기술개발투자를 확대하고 맨파워를 키우면 초일류기업으로 발돋움할 수 있지만 반대로 고구마 먹어치우듯 이익을 그때그때 서버리면 미래를 기약하기 어렵다. 소비재까지 자본재로 활용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금호그룹도 발전하고 사원 여러분도 성장할 수 있다."
1995년, 금호그룹 사원대상 특강을 묶은 경영어록에서 #
"아직까진 우애있게 잘 해왔다고 봅니다. 몇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자산은 공동분배하고, 개인사업은 안하며, 새 사업은 4형제가 똑같은 지분을 나눠한다는 것 등 입니다. 한 사람이 욕심을 내면 화목은 깨지게 돼있습니다. 특히 윗사람이 욕심내면 안 돼요. 형제 간에 싸우는 것처럼 불효(不孝)가 어디 있습니까. 우린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보고있나 39
1996년 4월 1일,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직을 물려주기 닷새 전에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회장직을 동생에게 물려주면서 각별히 당부하신 말씀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 #
"내가 그룹총수에 오른 것은 잘나서라기보다 단지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뛸 수 있을 때 뛰어야 한다. 너도 더 나이들기 전에 회장을 맡아 경영능력을 마음껏 펼쳐보기 바란다."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경영직을 물려주면서 했던 말.
"아시아나 만세!"
1988년 12월 15일, 김포국제공항에서 아시아나항공 B737-400 1호기 도입식 中
"금호는 성장하는 그룹이다. 지난해 외형은 7천 5백억원 수준이다. 그동안 그룹성장에 발판을 마련한 타이어, 운송, 석유화학 분야의 성장기반을 계속 도모하면서 신규 민항사업에도 그룹차원에서 지원을 아끼지 않을 방침이다. 70년대의 정착기를 거쳐 80년대 들어서는 고도성장을 거듭하는 마당에 항공사업까지 참여하게돼 책임감을 느낀다. 특히 민항은 경쟁체제를 갖출 경우 오히려 발전이 가속화된다는 점은 외국의 예를 보더라도 알수있다. 기존 사업분야와의 조정을 통해 그룹 도약의 발판으로 삼을 계획이다."
1988년 2월 13일, 국내 제2민항 사업자로 금호그룹이 선정되었고, 향후 아시아나항공 사업추진에 대한 인터뷰 中.
"우리가 가진 가장 값진 자산은 인간자산이며 인간자산을 아끼는 의미로 제일 먼저 건강해야 한다."
1986년 8월, 사내 금연운동을 주도하면서. 금호그룹은 국내 기업중 최초로 모든 사업장에 금연을 실시하였으며, 훗날 아시아나항공 역시 전세계 항공사 중 최초로 전노선 기내 금연을 실시한 바 있다.
"기구개편은 금호실업과 삼양타이어를 주식회사 금호로, 광주고속과 금호건설을 주식회사 광주고속으로 합병, 4개사를 2개사로 대형화한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기구개편은 오랫동안 검토해왔으며, 형제들의 의견도 같았습니다. 타이어를 수출하기 위해 금호실업을 설립했고, 종합무역상사로 발돋움 했지요. 그러나 지금은 생산과 판매를 분리해 둘 필요성이 없어졌다고 판단되어 합치게 된 것입니다. 금호건설과 광주고속 합병은 모기업인 광주고속이 계속 호황을 누리리라는 보장이 없고, 레저등 신규사업 진출도 계획할 필요성이 있어 단행된 것입니다. 금호건설은 83년 4월부터 해외건설수주를 거의 중단하고 국내건설에만 치중해오고 있습니다. 이번 통합으로 일반주주들에게 염려를 끼쳐 죄송하게 생각합니다마는 통합 후 수지를 대폭개선, 주주들에게 보답할 것입니다. ··· 생소한 분야의 진출은 삼가야 된다고 봅니다. 경영을 보수적으로 해 지난날의 실패를 재현하지는 않겠습니다. 한때 전자분야에 진출한 적도 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지요. 소비재 분야에는 판매와 신제품 개발 등에 경험도 없습니다. 화학분야등 중간재 분야에 전력투구할 작정입니다. ··· 국내기업들은 앞으로는 과거와 같이 인플레 요인에 의한 성장을 기대하기 어렵게끔 환경이 바뀌어졌습니다. 모든 경영인들은 이점에 유념하여 무리한 시설확장이나 문어발식 영토확장은 지양해야 할 것이며 많은 기업인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금호그룹도 회장 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임직원이 그러한 방향으로 기업을 운영해 나갈 것입니다. 재기를 위해 모든 금호인이 합심단결해 나갈것입니다. 사무 자동화, 에너지 절약과 사원교육에 대한 투자확대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입니다."
1984년 7월 11일, 금호그룹 2대 회장 취임식 직후 그룹 비전에 관한 인터뷰 中.
"경영효율성을 위해 계열사를 통합관리할 수 있는 지주회사체제로 가야 합니다."
1972년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당시 부친 박인천 회장에게 지주회사 설립 건의를 하면서. 금호그룹체제 출범을 알리는 신호탄이였다고 회자된다.

5.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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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음악계 육성 후원

범금호가한국의 메디치라는 별칭을 얻게 된 데에는 문화예술, 특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박성용 회장의 애정과 관심, 파격적인 지원 정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성용 회장은 그룹 경영권을 동생 박정구 회장에게 물려주고 명예회장이 된 후 금호문화재단 이사장직을 맡았다. 이를 통해 대한민국 클래식 음악 영재를 후원하는 사업을 꾸준히 해왔다. 첫 수혜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이었다. 이후 수많은 클래식 음악 유망주들이 박 회장과 금호그룹의 지원을 받았는데 박 회장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유망주로 직접 점찍고 지원을 결심한 마지막 유망주가 바로 한국인 최초의 쇼팽 국제 피아노 콩쿠르 우승자였던 피아니스트 조성진이다.

1997년 예술의 전당 이사장직을 맡았고, 2003년 한국메세나협의회 제4대 회장을 맡았다. 윤이상의 음악적 고향 통영에서 2002년부터 시작된 통영국제음악제의 출범 당시 이사장을 맡아 적극 후원했다. 그 결과 통영국제음악제는 세계 음악계에서도 명성을 인정받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악제가 되었다.

2000년 그룹 사옥을 회현동에서 신문로로[9] 옮기려 할 때 "서울시내 한복판에도 제대로 된 실내악 연주회장이 있어야[10] 한다"면서 실내악 전용 공연장의 설립을 강력하게 추진했고 이 건물 3층에 '금호아트홀'을 만들었다.[11] 이 금호아트홀에는 박 회장의 지정석까지 있었는데 별일이 없으면 이 공연장에서 열리는 연주회에 거의 매번 찾아왔다. 중앙 통로 바로 앞줄 왼쪽 블럭의 가장 오른쪽 통로 옆자리(G열 7번)가 그의 지정석이었다. 통상적인 관념으로 본다면 그다지 인기 있는 자리는 아니지만 통로 때문에 시야가 열려서 거기 앉으면 피아니스트의 손과 무대가 딱 보이므로 클래식 매니아에게는 꽤 좋은 자리이다.[12] 덕분에 생전에는 매번 그 자리와 옆자리를 판매하지 않다가 연주회를 못 갈 것이 확실할 때만 뒤늦게 오픈하곤 했으며, 사후에도 그 좌석 뒤에 작은 기념 현판을 부착하고 공연장 로비에 그의 흉상을 세우기도 했였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본인이 공연장의 소유주임에도 단 한 번도 공짜로 공연을 보지 않았고 다른 관객과 똑같이 돈을 내고 표를 사서 지정석에 앉았다고 한다.

다만 그가 정열을 바쳤던 금호아트홀은 공연장 입주 건물이 도이치자산운용에 매각되면서 임차 재계약에 실패했고 결국 2019년 4월 30일의 연주를 마지막으로 폐관되었다.[13] 당연하게도 많은 클래식 음악인들이 안타까움과 아쉬운 감정을 내비치고 있다.[14] 이후에는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구내 지하공간인 백양누리에 있는 공연장, 금호아트홀 연세에서[15] 공연을 이어나가게 되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박 회장이 2005년 세상을 떠나자 클래식 음악의 발전을 지원하며 문화예술 진흥에 힘쓴 고인의 공로를 높이 평가해 금관문화훈장을 사후 추서했다.

박 회장은 단지 음악가들에 대한 금전적 후원만 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클래식에 조예가 깊었던 매니아로 알려져 있다. 박 회장이 점찍은 첫 번째 유망주 손열음이 책에서 밝힌 바에 의하면 박 회장이 저택에 있는 그랜드피아노를 조율하는데 본인의 지론과 조율사의 지론이 충돌하는 바람에 이를 해결하고자 손열음에게 의견을 자문할 정도였다고 한다. 박 회장은 A음이 약간 낮은 440Hz인게 좋아서 그렇게 조율해달라고 했지만 조율사는 보통 442Hz 정도로 살짝 높게 조율하는게 추세여서 현재의 추세대로 하겠다며 박 회장의 희망사항을 거절하게 된다. 이후 박 회장과 조율사가 대판 싸웠는데 대뜸 박 회장이 손열음에게 전화를 걸어 "넌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 일은 손열음이 한국예술종합학교 2학년 재학 중이던 때였는데 이 당시 손열음은 불과 17세의 소녀 연주자였다.

파일:external/dimg.donga.com/70535757.2.jpg
2015년 4월의 10주기 추모행사에는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 등 금호그룹이 발굴, 육성한 클래식 음악인들이 다수 참석했다.

7. 이야깃거리

약력을 보면 알겠지만, 대기업 회장인 동시에 교육, 정치 분야에도 깊이 몸담은 사람이다. 물론 교육계 인사가 명망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지만, 대기업 회장이 교수 출신에 정부에서도 일한 경우는 드물다.[16]

김광두 전 대통령직속 국민경제자문회의 부의장을 금호로 영입한 장본인이다. 1997년 IMF 외환위기로 금호아시아나이 위기에 처하자 박성용 회장 본인과 자신의 동생이자 김광두 전 부의장의 광주서중학교, 광주제일고등학교 선배인 박정구 회장, 박삼구 회장과 함께 마포구 신수동에 있던 김광두 전 부의장의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연구실을 직접 찾아 금호아시아나 금호석유화학그룹의 감사위원을 맡아 그룹 내에 강력한 구조조정과 불필요한 계열사 정리 등 그룹의 위기극복을 직접 추진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김광두 전 부의장은 흔쾌히 수락하여 그룹의 위기극복을 성공적으로 진두지휘함으로써 금호아시아나의 성공적인 위기극복을 해내었고 이를 지켜본 박성용 회장과 박정구 회장, 박삼구 회장이 더 남아줄 것을 요청하여 2011년까지 금호아시아나 감사위원과 금호석유화학그룹 감사위원으로 재직한 바 있다.
  • 신정아가 금호미술관에 큐레이터로 재직 중이던 2001년, 그의 '예일대 박사' 학위가 가짜임을 파악해내고 해고시켰다. 본인이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데다가, 예일대 한국 동문회장이기도 했기 때문에 진작에 알아챌 수 있었던 것.
  • 예일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귀국해서 잠시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에 4학년들을 대상으로 '거시경제학 특강'을 가르친 적이 있었는데, 첫 강의에서 경제학의 기초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봤으나 학부생들의 실력이 너무나도 형편이 없어서 "너희들 서울대 상대 4학년생 맞냐?" 라고 일갈했다. 심지어 거시경제학의 기초라고 할 수 있는 에지워스 상자에서 생산가능곡선을 도출하는 방법조차 몰라서 눈만 끔뻑대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정도.[17] 결국 1학기 내내 거시경제학과 경제성장론을 그야말로 스파르타식으로 가르쳐야 했다. 당시 그의 수업을 들었던 사람 중에는 이준구 교수도 있었다.
  • 보수적인 재벌가의 맏아들이면 보통 다른 재벌가의 여식과 정략결혼을 하는게 상례인데, 이례적으로 미국인 여성인 마거릿 클라크 박 여사[18]와 연애결혼을 했다.[19] 유학 도중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열애 끝에 결혼했고, 그래서 슬하의 자녀들인 딸 박미영과 아들 박재영은 유라시안이다. 창업주인 박인천 회장은 내내 며느리를 인정하지 않다가 미국에 갔을 때 손주들을 보고 나서야 며느리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일반적인 재벌가와 달리 금호의 경우 2세, 3세로 이어지지 않고 형제 경영으로 이어진 이유 중에 이 부분도 어느 정도는 작용하였을 것이다.
    박성용은 결혼 후 클라크 여사에게 박인천 회장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해서 한국의 며느리가 지켜야 할 예절에 대해 귀가 닳도록 설명했고 클라크 여사는 자녀 박미영과 박재영을 이화여자고등학교 구정고등학교를 각각 졸업시키고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을 만큼 한국식 자녀교육을 고수했다고 한다. 박성용의 사망 후 클라크 여사는 미국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박미영은 캐나다, 박재영은 미국에서 거주 중이다. 외국인 며느리를 크게 반대했던 박인천 회장은 생전에 클라크 여사가 큰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것을 보고는 늦게나마 만족감을 표했다고 한다. 참고로 장남 박재영은 홍정욱의 저서 7막7장에 함께 유학하던 친구로 등장한다. 어머니가 미국인이라 영어도 잘하고 호쾌한 성격으로 묘사됐다.
-"12년 전 초겨울이었나요. 이른 아침 항공기 밑을 오가며 점검하고 있는데 손님이 한 분 다가오셨죠. 알고 보니 명예회장님이셨어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는 제 손을 잡으시며 '자네의 손이 아시아나를 있게 하네'라고 말씀하셨죠. 제 양손에 낀 기름 묻은 장갑도 개의치 않으셨던 어진 어른이셨는데…."
-"B767 항공기를 타시면 주무실 때도 뒷분이 불편하실까봐 등받침도 뒤로 젖히시지 않으셨던 명예회장님을 보고 많이 배웠는데….극락에서 이제는 편히 쉬십시오. 박삼구 회장님도 힘내시고요."
-"그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편안한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고정관념으로 보면 대기업의 회장이니, 신발도 좋고 점잖은 걸 신어야 하는데, 그런 형식에 개의치 않았다. 가령, 해외출장을 가게 되어 비서가 따라오면 “뭐 하러 따라와” 하며 혼을 내서 되돌려 보냈다. 아무 옷이나 편하게 걸치고, 배낭 같은 것 메고, 자기가 수속 밟고 가는 것이다. 대그룹의 회장이라고 하기엔 너무 소탈한 사람이었다."
전 부총리 겸 재무부장관 출신이였던 故 이승윤 금호그룹 고문의 자서전 "전환의 시대를 넘어" 中.
-"나보다 열일곱 살 위인 형님은 늘 내게 아버지 같은 어른이었다. 어린 시절 밥상예절을 형님에게 배웠고, 경영자가 된 뒤에는 문화예술을 후원하는 자세에 대해 배웠다."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명예 회장과의 인터뷰 中.
-"고인은 89년부터 16년간 장애아들에게 아버지 그 이상의 존재였다." ··· "경제적 지원은 물론이고 항상 정이 많고 소탈하신 모습으로 크고 작은 행사까지 직접 챙겨주시던 든든한 버팀목이셨다." ··· "특히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80년대부터 장애아들이 꼭 필요로 했던 실내시설 지원을 도맡으셨고, 아이들의 졸업 후 진로까지 걱정하셔서 장애인 직업재활센터를 만드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박성용 회장의 작고 후 유스퀘어에서 차려진 분향소에서 광주광역시의 특수학교인 은혜학교 당시 교장이였던 박순옥 수녀의 회상. 박 명예회장은 은혜학교의 지원을 위해 금호그룹의 경제적 지원은 물론 그룹사와 협력사들의 지원도 물심양면으로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학생들의 통학을 위한 차량 지원은 금호고속을 통해 이끌어냈다.

금호그룹 임직원들의 평가에 의하면 박성용 회장은 상당히 정이 많고 권위적이지 않으며 평소에도 구내식당에서 직원들과 스스럼없이 식사를 하며 소탈하신 분이였다고 회자된다. 아시아나항공의 한 직원은 "소탈하다 못해 좀 가난해 보일 정도로 낡은 배낭에 이어폰을 꽂고 미소를 머금으신 채 항공기에 탑승하셔서 회장님에 대한 인상을 바꿔놓으신 멋쟁이 자유인"이라고 고인을 회상했다. 또 다른 직원은 신입 사원때 박성용 회장을 몰라보고 "할아버지 어서 오세요. 어디 가세요? 예약은 하셨고요?" 라는 말실수를 하고, 그 할아버지가 회장님인걸 뒤늦게 깨닫고 따라가 사과드렸더니 "어때요? 정감 있어 난 참 좋구만. 조용히 가고 싶어 혼자 나왔으니 알리지 말아요. 할아버지에게 참 친절하구만." 이라고 말 할 정도로 자상한 할아버지 같은 분이셨다고 회고했을 정도. 당시 여타 기업 내에서 군대식 문화가 당연하게 여겨졌던 시절을 감안하면 가족 친화적인 기업문화를 중시했던 박성용 회장의 철학이 담겨져 있는 증거이기도 하다.

상당한 애연가였으나 1987년 금연에 성공하면서 금호그룹을 한국 최초의 금연문화를 구축했다.[20] 폐질환이라는 가족력 때문이다. 박인천 창업주가 젊은 시절 2년간 폐병을 앓은 적이 있었고, 박성용 명예회장과 박정구 회장도 애연가였지만 폐가 좋지 않았으며, 결국 두 형제 모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담배를 피우고 안 피우고는 개인의 권리지만 흡연자를 승진시키지 않을 권리는 나에게 있다"는 박 전 명예회장의 발언은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1] 이건희 방시혁이라는 두 경영인 출신 서울대 명예박사는 경영학 명예박사를 수여받았는데, 박성용 회장은 학술 및 예술진흥에 대한 업적으로 받은 거라 재벌 회장임에도 철학 명예박사를 받았다. # [2] 삼화고속 배홍철 회장의 모친 [3] 금호미술관 관장 [4] 대상그룹 임창욱 회장의 아내이자 임세령 대상그룹 부회장과 임상민 대상그룹 상무의 모친 [5] 국제부흥개발은행 부총재의 딸로, 미국인이다. [6] 출처 [7] 메세나의 대부라고 할 수 있다. [8] 정진석 추기경, 조홍식 중앙고 교장과 졸업 동기다. [9] 현 크레센도빌딩. 대우건설 본사가 한동안 이 건물에 있었다. [10] 금호빌딩 바로 뒤편에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한 공연장 중 하나인 세종문화회관이 있다. 그러나 공연 애호가들은 물론 연주자들도 세종문화회관에 대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공연장의 규모가 심각하게 큰데다 음향 보조 장치가 엉망이라서 관객이 듣기에 음질이 매우 불편하기 때문이다. [11] 이후 금호아트홀로도 부족하다고 판단했는지 그보다 더 작은 실내악 공연장을 하나 더 만들었는데 이것이 '문호아트홀'이다. '문호'는 그의 호다. [12] 다른 연주회와 달리 피아노 독주회 티켓 판매가 시작되면 가장 먼저 팔리는 자리가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친 블럭의 자리다. 이유는 똑같이 피아노 연주자의 손과 무대를 보기 위해서다. [13] 이보다 앞선 4월 25일에는 그동안 매주 목요일마다 '아름다운 목요일'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졌던 기획 연주회가 광화문에서는 마지막으로 열렸다. 금호아트홀 광화문 연주회장의 실질적인 고별무대였던 이날 공연에는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를 비롯해 여러 음악팬들이 참석하여 아쉬움을 달랬다. [14] 특히 같은 시기에 금호그룹이 아시아나항공을 매각하는 등 경영난을 겪는 상황이어서 더욱 비극적인 모습으로 비춰졌다. [15] 연세대는 동생 박정구 박삼구의 모교인데 박삼구가 2008년부터 12년간 총동문회 회장을 맡기도 했다. 금호아트홀 연세는 동문회장 재직 시절에 세워졌다. [16] 게다가 넷째인 박찬구 금호석유화학 회장은 아이오와 주립대 통계학과 학사 출신에 막내인 박종구는 기업에 관여하지 않았을 뿐, 교수 출신에 정부에서 차관까지 지냈다. [17] 에지워스 상자는 미시경제학의 마지막이자 대미인 일반균형에서 공부하는 부분이다. 다시 말해 거시경제학의 기초라기보다는, 거시경제학을 미시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미시경제학에서 다루는 내용들을 숙지하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다수의 학부수업이 그렇듯 교과서의 마지막에 나오는 부분인 파레토효율과 일반균형은 날림으로 배웠을 확률이 높다. 지금처럼 고시용 강의가 널리 퍼진 시절도 아니었으니... [18] 결혼 후 남편의 성을 따라서 박씨가 되었다. [19] 남편 사후 미국으로 귀국하였고 2013년에 미국에서 별세 [20] 이 일환으로 아시아나항공에서도 1995년부터 전 노선 기내 전면 금연을 시행하였는데, 전세계 항공사들 중 최초로 시행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