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21 01:29:47

박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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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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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박인천
(1946~1984)
제2대
박성용
(1984~1996)
제3대
박정구
(1996~2002)
제4대
박삼구
(2002~2009)
제5대
박찬법
(2009~2010)
제6대
박삼구
(2010~2019)
권한 대행
이원태
(2019~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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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fff> 금호아시아나그룹 제3대 회장
박정구
朴定求|Park Jeong-koo
파일:박정구회장.jpg
<colbgcolor=#454a51> 출생 1937년 8월 10일
전라남도 광주군
(現 광주광역시)
사망 2002년 7월 13일 (향년 64세)
경기도 고양시 일산구 마두동 국립암센터
(現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마두동 국립암센터)
국적 파일:대한민국 국기.svg 대한민국
본관 밀양 박씨
동산(東山)
학력 광주서석국민학교 (졸업)
광주서중학교 (졸업)
광주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법학 / 학사)
부모 아버지 박인천 어머니 이순정
형제자매 박성용
누나 박경애
남동생 박삼구, 박찬구, 박종구
여동생 박강자, 박현주
배우자 김형일
자녀 장녀 박은형
차녀 박은경
삼녀 박은혜
장남 박철완
종교 불교( 법명: 동산)[1]

1. 개요2. 생애3. 상훈4. 어록5. 여담6. 가족관계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 기업인. 금호아시아나그룹 제3대 회장.

2. 생애

금호아시아나그룹을 창립한 박인천 전 회장의 5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광주서중학교, 광주고등학교(5회),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했다. 1960년, 대학 졸업 직후 삼양타이어에 입사했다가 광주여객 영업과장으로 재직하여 아버지를 도왔다. 이후 입사 12년만인 1972년에 광주고속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하였다.

1981년 말에는 오일 쇼크로 인하여 타이어 업계 전체가 극심한 위기에 직면할 때 한 해 적자가 50억원이 넘었던 (주)금호 사장으로 긴급투입되어 2년만에 순이익 120억원 규모의 흑자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러한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1984년 일본 유수의 기업인상인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을 받기도 했다. 이때 금호타이어는 세계 10대 타이어 메이커로 성장했고 금호석유화학은 세계 7위의 합성고무업체가 됐다. 박정구 회장의 최대 업적은 바로 중국시장 진출인데, 1996년 금호고속과 금호타이어를 국내 업체 중 최초로 현지에 진출, 난징에 타이어 생산 공장을 준공, 특히 남경 공장은 영업개시 3년만에 흑자를 냈었고, 2011년까지 중국 타이어 시장 점유율 1위를 달성하였다. 선전시, 우한시, 항저우시 등에서 벌이고 있는 고속버스 운송사업도 60여개 신설 노선을 확보하는 등 중국 성(省) 내에서 최대의 운수회사로 자리잡았다. 또한 이 때 즈음 아시아나항공의 중국 노선 개척에도 큰 업적을 이루었으며 중국발 환승객 유치를 통해 아시아나항공이 단기간에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96년 4월 6일, 큰형 박성용이 명예회장으로 물러난 후 그룹 회장직을 이어 받아 총수직에 오른 뒤 '비전 경영'을 내세우며 기존 사업을 통폐합하는 등 내실을 다지고, 아시아나항공을 단기간에 세계 중위권 항공사로 성장, 리조트 등 신사업을 개척하며 금호그룹이 재계 순위 10위권에 진입하는 결실을 맺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01년 2월 폐암 판정을 받았고, 미국의 암 전문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뒤 그 해 9월달에 귀국하여 요양해왔으나 병세가 갑자기 악화돼 2002년 7월 13일 모친인 이순정 여사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코미디언 이주일의 옆 병동에 입원해 있었다고 한다. 그 후 박삼구가 회장을 승계했다.[2]

3. 상훈

  • 국민훈장 모란장 (1984년)
  • 이글클럽 최고경영자상 (1984년)
  • 건설부 장관 표창장 (1990년)
  • 동탑산업훈장 (1993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 (1996년)
  • 금탑산업훈장 (2002년)

4. 어록

- "정직하고 깨끗하게 얻는 이익만이 가치가 있다."
- "단순히 외형만 부풀리는 거대기업으로의 일류를 추구하기보다는 의(義)로서 기업윤리를 지켜가야 한다."
- "세계화, 개방화, 지방화 시대를 맞아 국내 기업이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민, 기업, 정부, 학계, 언론계 등이 5위(位) 1체(體)를 이뤄야 하고, 높은 기업문화의 부가가치를 무한대로 키워야 한다."
- "아무리 경영상황이 어렵더라도 인위적인 인원감축과 같은 경영처방 대신, 구성원의 사기를 북돋아주며 오히려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협력경영과 신뢰경영을 펼침으로써 궁극적으로 종업원과 함께 가꾸는 기업의 모습을 실현하여 세계 초일류 기업이라는 우리의 커다란 뜻을 완성시켜 나갑시다."
1997년 9월 19일, 금호그룹 비전경영 선포 1주년 특별 사내방송에서.
- "초일류 기업은 초일류 인재가 만들고, 그 인재는 교육과 훈련을 통해 성장합니다. 인재는 기업경영의 근간을 이루는 차별적 요소입니다. 기업이 심혈을 기울여 선발한 인재를 경영환경에 맞게 교육시키고 능력을 발휘할 장을 제공한다면, 그 인재는 주체적, 능동적, 창의적으로 활동하는 초일류 인재가 되어 초일류 기업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1997년 3월, 월간 HRD 인터뷰 기사 중.
- "88년 올림픽에 대비할 수 있게 노력을 첫째 해야겠고, 저희가 수송업계에 약 40년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좋은 양질의 서비스를 국민에 선물해야겠다는 그런 생각, 우리 전 국민의 재산이고, 국가의 재산이라는 그런 차원에서 국민주를 모집해서 회사를 잘 운영해 볼까 합니다."
1988년 2월 12일, 국내 제2민항 사업자로 금호그룹이 선정되었고, 향후 아시아나항공 사업추진에 대한 인터뷰 中. #

5. 여담

-"88년 전국제안왕에 선정됐을 때 시상식장에서 가족들끼리 축하파티를 하고 있는데, 회장님이 갑자기 나타나더군요. 그리고는 집사람에게「당신남편은 금호의 보배」라며 지갑을 툭툭 털어 돈을 몽땅 축하금으로 주더군요. 그때 지갑에 51만원이 있었는데, 50만원을 주고 1만원만 비상금이 필요하다며 도로 가져갔습니다."
  • 성격이 상당히 소탈하고 직원들과도 잘 지내는 타입이었다고 한다. IMF 경제 위기를 맞았음에도 직원 해고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위기를 극복한 훌륭한 기업인. 바로 아랫 동생마이너스의 손으로 불릴 정도의 경영능력으로 그룹을 위태롭게 하면서 그의 빈자리가 재조명되는 중이다.
  • 박정구 회장은 생에 말기 유언을 남기라는 가족의 권유조차 뿌리치면서 "반드시 일어나겠다"는 투병의지를 보이기도 했으며, 故 이주일과도 병원에서 인연이 되기도 했으며 타계하기 며칠 전에도 이주일의 손을 꼭 붙잡고 “우리, 열심히 살아봅시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 부하직원이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솔직하게 보고하면 크게 책임을 묻지 않았지만, 허위로 일처리를 하거나 거짓말 한 직원들에게는 모질다 싶을 정도로 매우 엄격하게 다스렸다고 한다.
  • 박정구 회장이 마흔을 넘어서 본 장남 박철완 금호석유화학의 개인 최대주주이며, 상무로 재직한 바 있다.
  •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과 사돈관계이다. 박정구 회장의 장녀인 박은형씨는 김 전 회장의 차남 김선협 아도니스 부회장과 혼약을 맺은 사이다. 이러한 인연 덕분인지 동생 박삼구 전 회장, 박찬구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이 각각 김 전 회장의 빈소를 찾아 고인의 마지막 길을 기렸다. 또 다른 여담이지만 대우그룹 사태 이후 2005년 귀국길에 오른 김우중 전 회장이 탑승했던 항공사도 아시아나항공이였고, 박삼구 회장 역시 당일 항공편을 맡은 기장, 승무원들에게 "편안하게 잘 모셔오라"고 각별하게 부탁했다.
  • 광주 유스퀘어 문화관에 그의 아호를 딴 동산아트홀이 있다.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창업주 시절부터 오늘날까지 클래식 음악 예술에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 영어 일본어 구사가 가능했고, 국내 및 해외의 유명 사회과학분야 또는 기업경영관련 책이나 잡지들을 자주 탐독했다. 음식은 설렁탕이나 부대고기찌개 등 대중음식을 선호했으며 특히 중국 음식을 좋아했다. 다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편이였고, 상당히 무뚝뚝해 역대 다른 회장들에 비해 인터뷰 자료들이 상당히 적은 편이지만, 그룹 내부에서는 인정과 의리도 중시하는 외유내강형 인물이였으며, 선이 굵고 대범하며 포용력이 있어 임직원들이 많이 따랐다는 평가.
  • 고향인 광주에 대한 애향심이 대단하여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직도 맡았을 정도다. 15대~17대 회장직을 맡았으며, 당시 낙후되었던 광주광역시/ 전라남도의 지역경제발전에 큰 관심과 지원을 하였다.

6.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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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굉장히 독실한 불자였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는 사실이지만, 고인의 부모님인 박인천 창업회장, 이순정 여사를 포함 8남매 가족 전원이 불자 가족이다. 단, 둘째동생 박찬구 회장은 결혼 개신교 개종. 고인은 어릴 적부터 어머니 이순정 여사의 금타화상의 가르침을 들으며 자라왔던 걸로 알려졌으며, 회사 일로 머리가 복잡해질 때면 법련사나 칠보사를 찾아 향을 피우고 참선을 했을 정도이다. 또한 고인은 1996년 9월, 송광사 서울분원인 법련사 불일범종 제작에 참여해 2억원의 불사금을 지원한 바 있다. [2] 이후 대한통운 대우건설의 무리한 인수로 그룹 자체가 흔들리더니 결국 형제의 난으로 박찬구 금호석유화학을 갖고 나갔고, 금호그룹의 유서깊었던 금호타이어도 계열 분리되었으며, 큰 형이 설립했던 아시아나항공마저 매각하게 되어 그룹 자체가 쪼개지는 최악의 상태가 되고야 말았다. 결국 2020년에 금호아시아나그룹이 해체되어 금호고속 금호건설로 나뉘었다. 불행 중 다행히도 이제 범금호가를 대표하는 그룹은 금호석유화학그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