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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신현준 |
2대 김석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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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대 김태성 |
37대 김계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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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대~17대 : 해군 제2참모차장 / 초대~9대, 17대~현임 : 해병대사령관 / 30대~현임 : 서북도서방위사령관 겸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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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무공훈장 수훈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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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width=100%><table bgcolor=#fff,#191919><tablecolor=#373a3c,#ddd><width=20%> 1950
더글라스 맥아더
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육군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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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육군원수 ||<width=20%> 1951
이근석
공군준장 ||<width=20%> 1951 1953중복수훈
백선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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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권
육군대장 ||<width=20%> 1951
심일
육군소령 ||
1951 이명수 육군일등상사 |
1951 김용식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홍재근 육군일병 |
1951 김용배 육군준장 |
1951 박노규 육군준장 |
1951 김백일 육군중장 |
1951 김홍일 육군중장 |
1951 함준호 육군중장 |
1951 1953중복수훈 손원일 해군중장 |
1951 최용남 해병소장 |
1951 김성은 해병중장 |
1951 1952중복수훈 김정렬 공군중장 |
1952 이형근 육군대장 |
1951 권동찬 육군준장 |
1952 김종오 육군중장 |
1952 1953중복수훈 신현준 해병중장 |
1953 장덕창 공군중장 |
1953 최용덕 공군중장 |
1953 마크 클라크 미 육군대장 |
1953 김교수 육군대위 |
1953 김한준 육군대위 |
1953 김용배 육군대장 |
1953 민기식 육군대장 |
1953 임충식 육군대장 |
1953 한신 육군대장 |
1953 김점곤 육군소장 |
1953 이성가 육군소장 |
1953 이용문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임부택 육군소장 |
1953 1954중복수훈 강문봉 육군중장 |
1953 김동빈 육군중장 |
1953 김종갑 육군중장 |
1953 백인엽 육군중장 |
1953 1954중복수훈 송요찬 육군중장 |
1953 유재흥 육군중장 |
1953 최영희 육군중장 |
1953 함병선 육군중장 |
1953 최치환 총경 |
1954 김만술 육군대위 |
1954 허봉익 육군대위 |
1954 김경진 육군소령 |
1954 김웅수 육군소장 |
1954 송석하 육군소장 |
1954 엄홍섭 육군소장 |
1954 임선하 육군소장 |
1954 백재덕 육군이등상사 |
1954 최득수 육군이등상사 |
1954 김옥상 육군일병 |
1954 조재미 육군준장 |
1954 안낙규 육군중사 |
1954 박병권 육군중장 |
1954 이응준 육군중장 |
1954 이준식 육군중장 |
1954 장도영 육군중장 |
1954 최석 육군중장 |
1954 최창언 육군중장 |
1954 박옥규 해군중장 |
1954 김석범 해병중장 |
1955 김창룡 육군소장 |
1955 정긍모 해군중장 |
1956 서정학 이사관(치안국장) |
1960 미군무명용사 - |
1961 김금성 공군준장 |
1961 국군무명용사 - |
1964 박정희 대통령 |
1966 이종세 육군상사 |
1966 강재구 육군소령 |
1966 이인호 해병소령 |
1967 송서규 육군대령 |
1967 채명신 육군중장 |
1967 지덕칠 해군중사 |
1967 정경진 해병대위 |
1967 신원배 해병소위 |
1968 최규식 경무관 |
1968 이익수 육군준장 |
1968 최범섭 육군중령 |
1970 이세호 육군중장 |
1972 이무표 육군대위 |
1972 임동춘 육군대위 |
1975 찰스 B. 스미스 미육군중령 |
1980 육군대장 |
2002 장철부 육군중령 |
2006 김영옥 미 육군대령 |
2011 조달진 육군소위 |
2015 윌리엄 스피크먼 영 육군병장 |
2021 에밀 카폰 미 육군대위 |
2023 랄프 퍼켓 미 육군대령 |
<colbgcolor=#cc101f><colcolor=#ffd800> 출생 | 1915년 10월 23일 | ||
경상북도
김천군 (現 경상북도 김천시) |
|||
사망 | 2007년 10월 15일 (향년 91세) | ||
플로리다 주 | |||
묘소 |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273호 | ||
본관 | 평산 신씨 | ||
재임기간 | 초대 해병대사령관 | ||
1949년 4월 15일 ~ 1953년 10월 15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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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cc101f><colcolor=#ffd800> 배우자 | 함혜용 | |
자녀 | 2남 4녀 | ||
학력 |
하얼빈 보통학교 (고등과 / 중퇴) 조선경비보병학교 (졸업) 미국 육군참모대학교 (졸업) 국방대학교 (행정학사 / 1기) |
||
종교 | 가톨릭 ( 세례명: 요아킴) | ||
경력 |
주
모로코 대사 주 바티칸 대사 제5대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 신민주공화당 국방외교안보행정특보위원 자유민주연합 국방외교안보행정특임고문 |
||
비고 |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 등재 친일인명사전 등재 |
||
군사 경력 | |||
임관 |
봉천군관학교 (5기) 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2기) |
||
복무 | 만주국 육군 | ||
1937년 ~ 1945년 | |||
한국광복군 | |||
1945년 ~ 1946년 | |||
대한민국 해군 | |||
1946년 ~ 1949년 | |||
대한민국 해병대 | |||
1949년 ~ 1961년 | |||
최종 계급 |
상위 (만주국 육군) 대대장 (한국광복군) 중장 (대한민국 해병대) |
||
주요 보직 |
인천기지 사령관 진해특설기지 참모장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
중일전쟁) 여순사건 6.25 전쟁 |
}}}}}}}}} |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군인, 정치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초대 해병대사령관을 역임하였다.공식적으로 창씨개명한 이름은 우다가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이다.
2. 생애
1915년 10월 23일 경상북도 김천군(現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출생하였다.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1932년 2월 하얼빈 보통학교 고등과를 중퇴, 만주 파견군 14사단 사령부의 사단참모 다데이시(立石方亮) 대위 전속 통역으로 종군했다. 1934년 2월에서 1935년 3월까지 14사단 작전참모 세키하라(關原六) 대좌의 권유로 만주군 제5관구 고문부(顧問部)에서 통역으로 근무하고 1935년 3월 세키하라 대좌의 후견으로 청더(承德)에 있는 만주국군 보병 제34단 본부 배속 단장 수행 및 통역을 맡았다.1936년 6월 만주국 중앙육군훈련처(봉천군관학교)에 입학해 러허성 난핑(灤平)의 제5교도대에서 기초군사훈련을 받고, 군관학교 교육을 받은 뒤 1937년 9월에 제5기로 졸업[2]했다. 1937년 10월부터 박격포중대에서 견습 군관으로 복무해 12월 보병 소위로 임관했다. 이후 대각진(大閣鎭) 부근에서 이장명(李長明)이 이끄는 항일 빨치산부대 진압을 위해 배장(排長: 소대장)으로 작전 참가했다. 1938년 4월 제5군관구 제5교도대(敎導隊: 교육대) 보병 제5사단 제6련에 배치되고 1938년 12월 1일부터 제6관구 옌지( 연길)지구사령부에 부임했다. 이후 강재호 소위(봉천군교 4기), 김백일 소위(봉천군교 5기), 마동악 상위(군의관)와 함께 간도특설대 창설요원으로 활동했다.
1940년 우다카와 요시히토(宇田川義人)로 창씨개명을 하고 11월 국경사변종기장(國境事變從軍記章)[3]을 받았다. 12월 훈춘농업고등학교와 훈춘협화회 산하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임관했다. 1941년 3월 중위로 승진하고 1942년 2월 안투현(安鬪縣) 청년훈련소 배속장교로 근무한 뒤 1943년 4월 간도특설대로 원대복귀하였다. 이후 간도특설대 기박련(機迫連 : 기관총 박격포 중대)에서 백선엽 소위(봉천군교 9기)와 근무하고 9월에 만주국 훈장 훈6위 경운장을 받았다. 1943년 12월 중국공산당 산하의 팔로군 토벌작전을 지원하였다. 1944년 3월 1일 대위로 진급, 8월에 만주군 보병 제8단 제6연장(連長: 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보병 제8단에는 박정희, 이주일, 방원철 등이 복무하였다. 신현준이 이끄는 제6련은 팔로군과 교전했다.[4]
일본 제국이 전쟁에서 항복하자, 8월 17일 직위 해임과 무장해제된 후 제8단 제3영 예하 제7련에 전속, 9월 미윤(密雲)으로 이동 후 만주군 제8단을 떠나 박정희, 이주일 등과 베이핑(北平: 베이징)에서 광복군 제3지대 핑진(平津)대대에 들어가 대대장으로 활동했다. 당시 이주일은 제1중대장을, 박정희는 제2중대장을 맡았다.
만주군 복무만으로도 이미 '일제 부역'이라는 비판을 받기에 충분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그가 항일 독립운동가들과 그 항일조직들을 소탕하기 위해 만들어진 부대인 간도특설대 간부였고, 그것도 창설요원이었다는 점이다.[5][6] 대한민국 해병대의 초대 사령관이 간도특설대 출신인 친일반민족행위자였던 것은 두고두고 해병대 역사에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7]
1946년 5월 6일 미군 수송선을 타고 8일 부산항에 도착한 후, 봉천군관학교 동기 정일권의 권유로 해안경비대총사령부 견습사관으로 입대하고. 12월 한국군 중위로 정식 임관, 1947년 9월 해병소령 진급/부산기지 사령관, 1948년 5월 조선해안경비대 진해특설기지 참모장이 되었다.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나자 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다음, 해상에서 반란군을 진압했다. 1949년 4월 15일에 약 380명의 병력으로 진해 덕산 비행장에 해병대가 창설되며 중령 계급으로 초대 사령관을 지냈고, 제주 4.3 사건이 일어나자 해병대 병력을 제주도에 배치했다. 김백일, 박정희, 정일권, 백선엽, 이한림, 김석범, 원용덕, 김창룡 등과 함께 국군 내의 대표적인 만주군 인맥이다.
해병대 창설의 계기는 신현준의 건의에서 시작됐는데, 1948년 여수·순천 10.19 사건 직후 신현준은 해군본부에 "육전대와 같은 상륙부대가 있었으면 진압이 보다 수월했을 것"이라고 보고했고, 이 신현준의 보고내용에 주목하고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 해군본부가 해병대 창설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 인천 상륙 작전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활약하면서 그의 판단은 신의 한 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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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은성태극무공훈장을 수여받고 있는 신현준. |
5.16 군사정변 후 해병 중장으로 예편했다. 미국 네바다주립대학에 유학을 갔다가 귀국하여 초대 모로코 대사, 초대 바티칸 대사로 외교 분야에서 활동하였으며, 세계반공연맹 사무총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10월, 향년 93세를 일기로 별세 후 국립대전현충원 장군제1묘역에 안장되었다. 해병대 초창기를 함께 이끌었던 후배 김성은 전 사령관이 세상을 떠난 지 5개월 후의 일이었다.
3. 수상
- 미국 은성훈장 (1950년 10월)
- 태극·을지·충무무공훈장 (1952년
- 태극·충무(2회)무공훈장 (1953년)
- 을지무공훈장 (1954년)
- 태극무공훈장 (1955년)
- 무공포장 (1956년)
4. 관련 문서
[1]
개명 전 이름은 신봉균(申奉均).
[2]
동기로 김찬규(
김백일),
송석하,
김석범,
윤춘근,
석희봉,
문용채,
문이정 등이 있다.
[3]
만주사변 참여자 기장
[4]
김효순에 따르면, 신현준이 팔로군의 행태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것은 만군 8군단 중대장으로 있던 1944년 9월에 겪은 일 때문이었다. 허베이 성 쭌화 현에 주둔해 있던 그의 부대는 팔로군 약 100명이 하오뉘타(허베이 성 '지'현에 있던 마을로 지 현은 1973년 톈진 시에 편입됨.) 남쪽 부락에 잠입했다는 정보에 따라 새벽에 출동했다. 신현준의 부대는 일본군 복장을 한 팔로군의 기습으로 위기에 봉착했다가 격전 끝에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전투가 끝나고 부대 인원을 점검했더니 전사 3명, 행방불명 2명으로 집계됐는데, 그 다음날 행방불명 처리된 두 명이 나타나면서 문제가 터졌다. 팔로군이 부상한 행불자 둘을 치료해준 뒤 농민을 시켜 들것에 태워 부대로 보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신현준은 허위 보고를 한 것에 자책감이 들면서 동시에 적군 부상자를 치료해 무사히 돌려 보내기까지 한 팔로군의 조치에 충격을 받았다. 그 때문에 신현준은 나중에 만군 시절 체험 가운데 이 일을 가장 잊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고백했다고 한다.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29~30쪽.
[5]
신현준의 간도특설대 활동 증거는 다름 아닌 만주군 동기생이자, 훗날 그의 후임으로 제2대 해병대사령관이 되는
김석범의 저작 <만주국군지>다.
[6]
신현준 본인은 자서전(老海兵의 回顧錄) 등에서 당시의 행적을 '공비토벌'로 표현했다.
[7]
당시 막 독립된 상황에서 군사적 소양이 있던 사람들은 대다수가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이었으며, 미군은 반공산주의 정책으로 만주군과 일본군 출신들을 선호했다. 항일 투쟁을 한 중국군이나 독립군 출신들은 수도 적고 힘도 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