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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八路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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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군 패치 | ||
깃발[1] | 제18집단군 패치 | |
창설일 | 1937년 8월 22일 | |
소속 | 국민혁명군 | |
참전 |
제2차 세계 대전 국공내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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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八路軍, Eighth Route Army정식 명칭은 ‘ 국민혁명군 제8로군’[2]이며, 1927년 난창 폭동 때는 공농홍군으로 불렸다. 제2차 국공합작 후에 명목상 국민혁명군 휘하에 편입되면서 국민혁명군 제8로군, 노군이 집단군으로 개편된 이후에는 국민혁명군 제18집단군이 되었다. 국공합작 결렬 이후에는 다시 홍군이라고 하다가 1947년에 인민해방군으로 다시 명칭을 바꾸었다.
원래 국민혁명군 제8로군은 월계군벌인 천지탕 아래에 있던 부대로 1936년 천지탕이 장제스에 대항해 2차 양광사변을 일으켰다가 몰락한 이후 부대가 해산되었고, 제2차 국공합작 이후 홍군이 그 부대명을 쓰게 되었다.
2. 상세
1926년부터 1928년까지 중국국민당이 중국공산당과의 협력으로 중국의 군벌을 타도하던 중인 1927년, 국민당 내에서 좌우익의 대립이 심할 대로 심해져 결국 반공 성향인 장제스의 명령에 의해 4.12 상하이 쿠데타(4.12사태)가 이루어졌는데, 이 공격으로 국공합작을 유지하던 우한 국민정부에서 국공합작을 청산한 장제스의 난징 국민정부가 떨어져 나가게 되어 중국 내 공산당이 큰 타격을 입었다. 게다가 마일사변, 코민테른의 6월 지시 등이 겹치면서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마저도 국공결렬을 결정, 제1차 국공합작의 종결로 이어지게 되었다.마오쩌둥은 군벌이나 열강에 대항하려면 군대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상기 언급한 상하이 쿠테타로 인한 경험은 마오쩌둥에게 독자적인 공산당 군대를 조직하도록 만들었다.
1937년에 약 3만 명의 인원으로 결성되었으며, 중일전쟁으로 치안과 행정령이 붕괴된 화북 일대에서 적극적인 선전전과 반대세력에 대한 숙청을 병용해 세력을 불리면서 급속도로 숫자가 늘어 1945년에는 60~98만 정도의 숫자로 증가하였다. 국공합작 선언에서 8년이 지난 1945년에는 정규군만 130만명에 비정규군과 민병대는 220만명에 달하는 등 화북의 전쟁으로 인한 세력 공백을 십분 활용해 다시 장제스 정권에 도전할 세력을 확충했다.
팔로군이라는 명칭은 당시 중국대륙의 '정통정부'인 중화민국 국민정부로부터 '공산당의 군대'가 정식으로 인정받아 공비라는 멸칭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첫 이름이며 팔로군 시기 일본을 상대로 어느정도 선전을 거두었다. 따라서 홍군 내부와 민중들에게 그 평판이 좋았기에 홍군은 팔로군이라는 이름을 꾸준히 쓴 것이다.
팔로군은 소련군이 일본 제국에게서 탈취한 장비를 인계받아 사용하였으며, 급격히 숫자가 늘어난 후기에는 정규전을 벌일 정도의 전력으로 증강되었다.
1927년 2월, 김좌진 장군이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 겸 군사부 위원장을 겸하고 있을 당시, 녹림 출신의 중국 구국군 13군 사령관 양우일(楊宇一)이 휘하의 참모 손림(孫林)을 특파하여 김 장군을 초청하였다. 평소 휘하 병사들에게 한국인으로부터의 금품 갈취를 금지시켜온 양 사령관의 인품을 높이 사 오던 김좌진 장군은 이 초청을 받아들이는데, 이 자리에서 오간 이야기가 중국군과 독립군의 연합이었다. 하지만, 이를 파악한 장쭤린에 의해 체포되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장쭤린으로서는 국민당의 중앙정부가 그런 계획을 자기 영역에서 꾸미게 둘 수는 없었다. 이로써 독립군의 공식적인 팔로군 참가는 무산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일부 독립군은 팔로군으로 참여하였으나, 독립전쟁에 활용되기 보다는 국공내전에 참가하게 되었다.
팔로군은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로서 마오쩌둥이 일본의 중국침략에 맞선다는 명분으로 국공합작을 이끌어낸 군대이다. 물론 실상은 공산당은 항일보다는 세력 확장과 국민당에 대한 팀킬을 일삼았다. 전후에는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을 막 마친 소련군이 제공한 50만 명을 무장시키기 충분한 일본제 노획 무기들을 제공받고 국민당에 맞서기 무리가 없는 장비까지도 갖추게 된다. 중일전쟁 종전 시점까지 공산군은 소련의 외면으로 소총조차 부족한 경보병과 기병, 약간의 포병으로 구성된 군대였지만 이때 전차와 항공기도 인수하면서 기갑부대와 공군이 생긴다.[3]
6.25 전쟁에 참전한 중공군 중에도 마오쩌둥과 펑더화이가 가장 신뢰한 정예부대들에 팔로군 출신 부대들이 있었다.
3. 대중매체
내가
천진을 떠나 태행산 국군에 입대했었다는 것에서 시작하여, 민간인들이 국군에 파는 양곡들을 태행산에 있던 팔로군들이 어떻게 방해했다는 거며, 어떻게 약탈해 간다는 사실, '멸식대(滅食隊)를 조직하여 민가를 돌아다니며 양식을 보는대로 다 착취해 버리는 것을 이들의 주목적으로 일삼는다는 것이며, 소위 구국금(救國金), 또는 장병 위로금, 등등의 명칭을 내세워서는 어려운 농민들에게 기금하여 줄 것을 강요 했다는 것, 그러다가 눈에 거슬리면 공연히 어진 백성들에게
친일파라는 죄명을 씌워서 죽인다는 사실, 종래에는 일본 놈들 군복을 입고 일본군으로 가장하여 우리 국군을 습격 했다는 사실, 이면으론 엉뚱한 흉계를 꾸미면서도 태연스럽게 '웃음 외교'를 한다는 사실, 우리 국군은 일선에서 일본군과 홍협군을 대항하여 열심히 싸우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놈들은 뒤에서 우리 국군의 병력을 소멸시키는 데에만 주력했다는 사실!, 나는 태행산에서 겪었던 모든 일들을 샅샅이 말했다. 나중에는 자신도 모르게 극도로 흥분되어 눈물까지 흘리면서, 내 자신이 팔로군에게 총을 맞고 산에서 굴러 떨어지다가 구사일생으로 어떤 친구의 보호를 받아 황하를 건너오게 되었다는 사실과 팔로군이 쏜 총알이 아직도 내 오른쪽 어깨에 박혀 있다는 등 사실을 전부 말했다.
"오늘 저는 이론을 따지려고 이 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회장이 평소에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우의 말을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방해 버렸지만, 그 학우의 말은 백퍼센트 정확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비린내나는 산역사의 것입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또 민간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팔로군에게 이렇다할 말 한 마디도 없었지만, 우리 국군에겐 억울한 줄 알면서도 우리들의 총지휘관을 파면시켰었던 사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하북 대평원에서도 생겨, 열렬한 반일 전우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사실이 내 머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께서 들어 두어야 되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민국 이십칠년 말부터 팔로군들은 신하에서 하북 백성과 군인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설복시킨 다음 이십팔년 초에는 류보청, 하룡, 여정조 들과 합세하여, 왕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복마장에서 당건사를 포위하여 하북의 민간인과 군인 사존 중학교 학생들을 기습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들에게 맞아죽은 학생들의 수만 무려 오백여명에 달했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삼백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때 잡혔었던 포로들은 전부 삼민주의 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에 무참하게 참살당했던 것입니다. 팔로군들은 이 기습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평한로 사방에 있는 하북 지방의 군민들을 추격하는 한편, 형대, 사하, 자무에서도 반일 국군을 습격케 했으며, 그 후 무안에서는 제일 전투 지역 이십일 분대인 이광의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연이여 융평, 요산, 속진 등지에서 반일 보안단을 전부 해산시켜 버렸으며, 후에 석가장 부근에서는 우리 국군을 인솔하여 산해관 동북 방면으로 유격전을 하러 가는 이들을 기습하여 지휘관인 조동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계실줄 믿습니다만 이 조동이야 말로 우리가 늘 존경해 오며, 유격대의 어머니라고 부르던 조씨 노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이 두 모자가 반일분자가 아니라는 억측 밑에서 참살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어느 한 분도 이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믿으실 분이 안 계시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생생한 사실들은 공산당의 신사군들이 하북 지방에서 얼마나 비행을 저질렀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우리 국군들을 참패시켜 놓고, 지방 백성들의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반면, 반일 전쟁을 거절하며 강소성 정부를 소멸시키는 등, 이 모든 비행이 전부 이들 팔로군들의 스스로 저지른 반역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단 말을 멈췄다. 단 밑에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며 울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걸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몇몇 학우들께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청년들로서 현실에 불만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들 이 현실에 만족을 느끼고 있는줄 아십니까?제가 태행산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때 겪은 그 모든 고난과 위험을 후방에서 세상 모르고 향리에만 도취되어 살아가는 일부 특권층에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일선은 출생입사며, 후방은 취생몽사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듯 아픕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직 취생몽사 속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역시 적으며, 대다수의 우리 백성들은 갖은 고생 속에서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취생몽사의 인간과 별 차이 없는 또 하나의 기막힌 현실들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우리들 눈앞에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학생들이 어느 야심가의 선동과 유혹에 사로잡혀 덩달아 교련 장교를 배척하며, 교내 군사 훈련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전수업까지 휴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까지 저 함락 구역에서 망국노들이 걷고 있는 그들의 생활을 맛보지 못했을줄 압니다. 비록 맛은 못봤다 하지만, 여러분은 망국노의 수치와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군사 예비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 것은, 다름아닌 우리 청년들 하나 하나가 후세에 올 우리들의 자손에게 영원히 망국노로 안 만드는 신성한 책임을 지워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군사 훈련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심지어 파괴까지 하려는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것이 취생몽사와 다를게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더 무서운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정부에서 그들을 해산시킨 것도 양민을 괴롭히기만 일삼아 오던 이들의 비행을 처음엔 참아오다가 드디어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이러한 결정을 내려 단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에 책임 추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책임추궁할 것이 있다면 그건 왜 진작 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가를 추궁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이를 좀 더 일찍 결정하고 실천했다면, 그동안 억울하게 희생당한 반일 국군과 우리들의 선량한 동포의 피해가 적었을 것이며, 희생도 덜 당했을 것입니다. 정부를 추궁하고, 지금 와서는 다시 신사군을 회복하자는 맹랑한 조건을 내세우며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민간인을 해치며 항전을 파괴키시던 반란군들의 난동이 다시금 이 나라에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는 진심으로 이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정부에서 신사군을 해산 처분한 것도 단순히 군의 기강을 위반한 군인에 한해서였지, 그들이 공산당 부대라고 무조건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 한푸쥐, 스여우싼, 이복은 전부 국민당원이었지만, 그들이 반일 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에 의해 총살당한 사실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 군대의 군기를 일관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단행한 이 처사를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걸 여러분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복지, 석삼우, 이복이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정부를 추궁할 사람이 계십니까? 신사군들의 반란 행위는 이들 한,석,이, 세 사람의 반란 행위보다 몇천배 몇만배 더 엄청나게 큰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모르고, 이러한 반란군들을 지지한다면 자각을 못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취생몽사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더 무서운 취생몽사인 것입니다. 저도 반일 군인이었습니다만은 여지껏 아무런 정당에도 가입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삼년동안이나 정치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고금을 통해 어떤 국가든지 일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 이념에 위배되는 개인의 무력과 사상의 존재를 허락, 또는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은 책에서나 교수님들의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력으로 마음대로 어느 지역을 점령 하여선 제 멋대로 특수한 정부를 세워서, 중앙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천고의 기문이라 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국회가 있어 정부 시책의 잘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부를 비평하고 추궁할 대로 했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혹평을 가하고 한층 더 추궁해도 저는 찬성합니다. 왜? 그것은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건 민주 국가의 집정자로선 의당 받아야할 편책이기도 합니다. 만약 집권당의 집정이 좋지 못하면 헌법에 의해 정식으로 공포한 다음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의지에 비추어 우리가 원하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기만과 유혹과 공포 등 이러한 수단으로 국민을 협박, 공갈해 가며 심지어 살해해 가면서 나라를 소란시키는 것은 저로선 결사 반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믿으며 자기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를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이윽고 나는 결론을 맺었다. 우뢰같은 박수 소리가 고막을 울려왔다. 나는 벌겋게 흥분된 입술로, 이 우뢰같은 박수 소리에 콧등이 시큰하며 감격하고 있었다. 아직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고 있는데, 꼬마와 정미장이 웃으면서 단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감격적인 얼굴이 마음에 아무런 간적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내가 연사였다는 것 조차 망각해 버렸다. 나는 그들에 부축되어 단 위를 서서히 내려갔다.
왕람(王藍)의 <람여흑(藍與黑)> 中
"오늘 저는 이론을 따지려고 이 곳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나는 우람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회장이 평소에 이론을 전문적으로 연구한 학우의 말을 한 푼의 가치도 없다는 듯이 비방해 버렸지만, 그 학우의 말은 백퍼센트 정확한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은 이론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피비린내나는 산역사의 것입니다. 정부 당국에서는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서, 또 민간에게 더 이상 자극을 주지 않기 위해서, 팔로군에게 이렇다할 말 한 마디도 없었지만, 우리 국군에겐 억울한 줄 알면서도 우리들의 총지휘관을 파면시켰었던 사실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이 하북 대평원에서도 생겨, 열렬한 반일 전우들이 억울하게 희생당했던 사실이 내 머리 속에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 친애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께서 들어 두어야 되실 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민국 이십칠년 말부터 팔로군들은 신하에서 하북 백성과 군인들의 마음을 감언이설로 설복시킨 다음 이십팔년 초에는 류보청, 하룡, 여정조 들과 합세하여, 왕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복마장에서 당건사를 포위하여 하북의 민간인과 군인 사존 중학교 학생들을 기습했던 것입니다. 이 때 그들에게 맞아죽은 학생들의 수만 무려 오백여명에 달했으며,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삼백여명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 때 잡혔었던 포로들은 전부 삼민주의 청년단원들이었기 때문에 무참하게 참살당했던 것입니다. 팔로군들은 이 기습작전의 성공을 계기로 하여 평한로 사방에 있는 하북 지방의 군민들을 추격하는 한편, 형대, 사하, 자무에서도 반일 국군을 습격케 했으며, 그 후 무안에서는 제일 전투 지역 이십일 분대인 이광의 부대를 해산시켜 버렸던 것입니다. 연이여 융평, 요산, 속진 등지에서 반일 보안단을 전부 해산시켜 버렸으며, 후에 석가장 부근에서는 우리 국군을 인솔하여 산해관 동북 방면으로 유격전을 하러 가는 이들을 기습하여 지휘관인 조동을 죽였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잘 아시고 계실줄 믿습니다만 이 조동이야 말로 우리가 늘 존경해 오며, 유격대의 어머니라고 부르던 조씨 노인의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공산당들은 이 두 모자가 반일분자가 아니라는 억측 밑에서 참살을 했던 것입니다.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어느 한 분도 이런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믿으실 분이 안 계시리라고 확신하는 바입니다. 이 모든 생생한 사실들은 공산당의 신사군들이 하북 지방에서 얼마나 비행을 저질렀나를 충분히 설명해 주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일선에서 우리 국군들을 참패시켜 놓고, 지방 백성들의 민심을 어지럽게 하는 반면, 반일 전쟁을 거절하며 강소성 정부를 소멸시키는 등, 이 모든 비행이 전부 이들 팔로군들의 스스로 저지른 반역적 행동이었던 것입니다.
나는 일단 말을 멈췄다. 단 밑에서 우레같은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며 울려왔기 때문이다. 나는 일부 학생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걸 느끼며 말을 계속했다.
"조금 전에 몇몇 학우들께서 현실에 대한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옳은 말씀입니다. 청년들로서 현실에 불만을 품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전들 이 현실에 만족을 느끼고 있는줄 아십니까?제가 태행산에서 전투에 참가하고 있을때 겪은 그 모든 고난과 위험을 후방에서 세상 모르고 향리에만 도취되어 살아가는 일부 특권층에 비교해 본다면 과연 일선은 출생입사며, 후방은 취생몽사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를 볼 때 우리의 가슴은 갈기갈기 찢어져 나가는듯 아픕니다. 다행히도 우리 주변엔 아직 취생몽사 속에서 사는 사람의 수가 역시 적으며, 대다수의 우리 백성들은 갖은 고생 속에서 용감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취생몽사의 인간과 별 차이 없는 또 하나의 기막힌 현실들이 여기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것은 바로 우리들 눈앞에 공공연히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학생들이 어느 야심가의 선동과 유혹에 사로잡혀 덩달아 교련 장교를 배척하며, 교내 군사 훈련을 거부하고, 심지어는 전수업까지 휴학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학우 여러분! 여러분은 아직까지 저 함락 구역에서 망국노들이 걷고 있는 그들의 생활을 맛보지 못했을줄 압니다. 비록 맛은 못봤다 하지만, 여러분은 망국노의 수치와 고통이 어떤 것이라는 것쯤은 충분히 상상해볼 수 있을줄 압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조국의 품안에서 군사 예비 교육을 받고 있다는 이 것은, 다름아닌 우리 청년들 하나 하나가 후세에 올 우리들의 자손에게 영원히 망국노로 안 만드는 신성한 책임을 지워줄 수 있게 해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중대한 사명에도 불구하고, 군사 훈련을 무용지물로 생각하며, 심지어 파괴까지 하려는 자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생각할때, 그것이 취생몽사와 다를게 어디 있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더 무서운 취생몽사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번 정부에서 그들을 해산시킨 것도 양민을 괴롭히기만 일삼아 오던 이들의 비행을 처음엔 참아오다가 드디어 더 이상 참을수가 없어 이러한 결정을 내려 단행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정부에 책임 추궁을 하고 있습니다. 정부에 책임추궁할 것이 있다면 그건 왜 진작 이런 조치를 취하지 못했는가를 추궁할 것 밖에 없습니다. 만약 정부에서 이를 좀 더 일찍 결정하고 실천했다면, 그동안 억울하게 희생당한 반일 국군과 우리들의 선량한 동포의 피해가 적었을 것이며, 희생도 덜 당했을 것입니다. 정부를 추궁하고, 지금 와서는 다시 신사군을 회복하자는 맹랑한 조건을 내세우며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민간인을 해치며 항전을 파괴키시던 반란군들의 난동이 다시금 이 나라에 나타나고 있으니 우리는 진심으로 이것을 바라고 있는 것입니까? 정부에서 신사군을 해산 처분한 것도 단순히 군의 기강을 위반한 군인에 한해서였지, 그들이 공산당 부대라고 무조건 처리한 것은 아닙니다. 한푸쥐, 스여우싼, 이복은 전부 국민당원이었지만, 그들이 반일 명령을 집행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군법재판에 의해 총살당한 사실도 있습니다. 정부 당국에서 군대의 군기를 일관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단행한 이 처사를 옳다고 보십니까? 그르다고 보십니까? 저는 이걸 여러분들에게 묻고자 하는 것입니다. 한복지, 석삼우, 이복이가 억울하게 죽었다고 정부를 추궁할 사람이 계십니까? 신사군들의 반란 행위는 이들 한,석,이, 세 사람의 반란 행위보다 몇천배 몇만배 더 엄청나게 큰 사건입니다. 우리들이 이것을 모르고, 이러한 반란군들을 지지한다면 자각을 못하고 있는 일부 학생들의 취생몽사와 무엇이 다르다 하겠습니까? 이것 역시, 더 무서운 취생몽사인 것입니다. 저도 반일 군인이었습니다만은 여지껏 아무런 정당에도 가입해 본적이 없습니다. 저는 삼년동안이나 정치과에서 정치학을 공부했지만, 고금을 통해 어떤 국가든지 일개 민주주의 국가의 국민으로서 국가 이념에 위배되는 개인의 무력과 사상의 존재를 허락, 또는 옹호할 수 있다는 것은 책에서나 교수님들의 강의에서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무력으로 마음대로 어느 지역을 점령 하여선 제 멋대로 특수한 정부를 세워서, 중앙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은 천고의 기문이라 안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날 우리는 정부를 비판하는 기사를 신문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 국회가 있어 정부 시책의 잘잘못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정부를 비평하고 추궁할 대로 했습니다. 이것보다 더한 혹평을 가하고 한층 더 추궁해도 저는 찬성합니다. 왜? 그것은 민주국가의 국민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하는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건 민주 국가의 집정자로선 의당 받아야할 편책이기도 합니다. 만약 집권당의 집정이 좋지 못하면 헌법에 의해 정식으로 공포한 다음 우리는 우리의 양심과 의지에 비추어 우리가 원하는 정당에 투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도의 방법을 쓰지 않고, 오직 기만과 유혹과 공포 등 이러한 수단으로 국민을 협박, 공갈해 가며 심지어 살해해 가면서 나라를 소란시키는 것은 저로선 결사 반대하는 것입니다. 민주주의를 희망하고 믿으며 자기 국가와 국민을 사랑하는 자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를 결사 반대할 것입니다."
이윽고 나는 결론을 맺었다. 우뢰같은 박수 소리가 고막을 울려왔다. 나는 벌겋게 흥분된 입술로, 이 우뢰같은 박수 소리에 콧등이 시큰하며 감격하고 있었다. 아직 박수 소리가 장내를 뒤흔들고 있는데, 꼬마와 정미장이 웃으면서 단 위로 뛰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의 감격적인 얼굴이 마음에 아무런 간적도 없이 점점 가까워지자, 나는 내가 연사였다는 것 조차 망각해 버렸다. 나는 그들에 부축되어 단 위를 서서히 내려갔다.
왕람(王藍)의 <람여흑(藍與黑)> 中
중일전쟁과 국공내전 시기를 배경으로 하여 왕람(王藍)이 1958년에 출판한 소설 <람여흑(藍與黑)>에 작중 중일전쟁 당시 팔로군과 신사군의 만행이 생생하게 표현되어 있다. 소설의 주인공 장성아(張醒亞)도 팔로군의 습격으로 총을 맞고 하마터면 죽을뻔 했었다. 위에 인용된 장면은 군에서 제대한 후 국립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한 주인공이, 국민당 정부의 신사군 해체에 불만을 품고 동맹 휴학을 추진하는 공산당원 학생들에 맞서서 반공 연설을 하는 장면이다.
참고로 왕람은 직접 중일전쟁에 참전하였던 사람이고, 그의 친구도 그와 함께 참전했었는데, 그의 친구는 전쟁 도중 전사했다고 한다. 전쟁 이후 왕람은 자신이 겪은 전쟁을 소재로 여러 편의 소설을 썼는데, <람여흑>은 그의 소설들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걸작이다.
대만에서는 왕람의 람여흑, 반인목(潘人木)의 련의표매(蓮漪表妹), 기강(紀剛)의 곤곤료하(滾滾遼河), 서종패(徐鍾珮)의 여음(餘音) 195-60년대 출판되었고, 중일전쟁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이 네 작품들을 사대항일소설로 꼽는다, 여러 차례 드라마화,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국내에서도 1967년 삼일각에서 상과 하, 두 권으로 번역 출판 되었었다. 번역의 퀄러티는 대체적으로 우수한 편이지만, 세로본이라 가독성이 떨어진다는게 옥의 티. 그리고 출판 년도가 오래된 만큼 절판이 되었고, 헌책방에서 구하기도 쉽지 않다. 그나마 국립중앙도서관 디지털자료실에서 열람이 가능하긴 하다. # 영화화도 되었는데 오래된 영화라 찾기는 좀 힘들지만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선 보인다.[4][5]
위에 인용된 내용에서도 보듯이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정세에 대해 매우 상세히 몰입감 있게 자세히 잘 설명 되었기 때문에, 이 시기 중국에 대한 아무런 사전 배경지식이 없이도 충분히 몰입하면서 읽을 수 있다. 또한 이 시대 여러 계층의 중국인들의 생활상에 대해서도 고증이 잘 된 편이다.[6]
야인시대에서는 금강이 일제시대 당시 중국 전역을 떠돌아다녔는데 한번은 팔로군에 몸담은 적도 있었다고 언급된다.
4. 관련 문서
[1]
깃발 왼쪽에 있는 한자는 "국민혁명군제18집단군". 제2차
국공합작 이후
중일전쟁 대비를 위해 군이 재편되어
국민혁명군 제18
집단군으로 개칭되었다.
[2]
노군/로군(路軍)은
국민혁명군의 부대 편성 단위로, 2개 이상의
군단(중화권에서는 '군단을 군(軍/军)'이라고 한다)이나 다수의
사단을 휘하에 두었다. 타국군의
야전군급에 대응하는 부대 편성 단위로 1938년 집단군(集團軍)으로 개편되었다.
[3]
1차 국공내전 당시 전향한 국민당 조종사를 통해 복엽기를 운용한 적은 있다. 해군의 경우에는 중일전쟁 시기 왕징웨이 정권 해군 수병들이 포함을 이끌고 홍군에 투항하면서 강상부대를 편성해 운영한 전적이 있다.
[4]
사실
대만과
홍콩에서 여러번 영화 내지는 드라마화되었는데 가장 잘 알려진 건
1965년
홍콩 쇼브라더스사에서 제작한 영화다. 이 당시 가장 잘나갔지만 개봉한 시점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여배우 임대(林黛)가 여주인공 당기 역을, 홍콩배우
관지림의 아버지로 더 유명한 배우 관산(關山)이 남주인공 장성아 역을 맡았다.
[5]
그러다 비교적 최근인 2023년 12월부터 2024년 2월까지 대만
CTS 채널의 공식 유튜브채널 중 하나인
華視懷舊頻道에
1983년 대만 드라마판 전편이 업로드되어 유튜브에서도 비교적 쉽게 볼 수 있게 되었다.
[6]
간단한 줄거리는, 고아 출신의 장성아가 자기와 비슷한 처지의 여자인 당기, 최상류층의 딸인 정미장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가지면서 항일전쟁과 이후 국공내전에 참가한다. 당기는 전쟁 중 우여곡절 끝에 술집에서 노래 부르는 창녀가 되고, 장성아는 정미장과 약혼하나 국공내전 중에
대만으로 피난가다가 탑승하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부상을 입어 정미장은 장성아를 버리고
홍콩으로 떠난다. 설상가상으로 비행기 추락으로 인해 다리에 입은 부상이 악화되면서 결국 장성아는 다리 한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게 된다. 군병원에서 살면서 국민당 잔당들을 따라 태국에 들어간 당기와 연락을 시도하지만 답장은 없고, 장성아는 회한만 남은 인생을 회고한다. 그나마 다행히 막판에 동향인으로부터 당기의 근황이 담긴 편지를 받게 되지만 당기는
태국으로 건너가 국민당 잔병들의 치료에 힘쓰는데 보태기로 결심하고, 장성아는 이 당기의 편지를 보면서 한 쪽 다리만을 의지한 채 반공 강연을 이어나가는 등 혼자
대만에서 남은 인생을 계속 살아나간다는 결말을 맞는다. 처음 발표되었을때는 약간 희망적인 메시지가 있었으나, 수정된 판에는 그런 건 없다. 시대가 시대인만큼 해피엔딩 같은 건 있을 수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