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화민국 산동성 정부주석 | ||
정체 | 韓復榘 | |
간체 | 韩复榘 | |
한국식 독음 | 한복구 | |
영문 | Han Fuju | |
자 | 향방(向方) | |
출생 | 1890년 1월 25일 | |
청나라 직예성 패현 | ||
사망 | 1938년 1월 24일 (향년 47세) | |
중화민국 호북성 우한 | ||
국적 |
청나라
→ 중화민국 → 중화민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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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 없음 | |
직업 | 정치가, 군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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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원래 펑위샹의 휘하였다가 반장전쟁 때 장제스의 편에 서서 산동성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중일전쟁 중에 적전도주를 일삼다가 처형당했다.위의 사진에서도 볼수 있듯이 과거 영문 표기가 Han Fuchu라서 한푸추로 번역하는 경우도 있다.
2. 생애
2.1. 초기 이력
1890년 직예성 패현에서 태어났다. 빈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먹고 살 길이 빠듯했기 때문에 청나라 군대에 들어갔는데 이때 상전으로 만난 것이 바로 펑위샹이었다. 졸병으로 시작한 한푸쥐는 펑위샹 휘하에서 중대장, 연대장을 역임했으며 1924년 펑위샹이 북경정변을 일으켜 국민군을 조직하고 국민군 1군 사령관에 취임하자 녹종린의 임편 1사단 예하 보병 제1여단장에 임명되었다.2.2. 반봉사건과 국민혁명
1925년 10월 펑위샹의 지시로 국민군 대표가 되어 일본에 보내 견학을 했는데 이때 테이코쿠 호텔에 투숙하던 중 봉천군벌의 대표 궈쑹링을 만나게 되었는데 궈쑹링은 이런 얘기를 했다."이상하고 야릇한 일이 하나 생겨 당신과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 합니다. 이번에 내가 막
도쿄에 도착했을 때 갑자기 일본 참모본부의 중요한 위치에 있는 직원 한 사람이 나를 찾아와 몇마디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묻습디다. '당신이 이번에 일본에 온 것은
장쭤린 장군의 밀약 체결 임무 때문에 대표로 온 것 아니냐?' 그래서 내가 '아니오. 단지 견학하러 온 것 뿐이오. 다른 임무는 없소. 더욱이 밀약 체결의 일은 알지도 못합니다.' 그랬더니 그 일본인은 풀이 죽어 나가 버립디다. 당시 나는 영문을 알수 없어 '이게 도대체 어떻게 어찌 된 일인가?' 했습니다. 후에 자세히 들어보니 장쭤린이 그동안 감히 승인하지 않고 있던 매국적
21개조 요구를 승인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일본에서 그 대가로 대량의 군사 무기 지원을 얻어 국민군을 공격하려는 것입니다. 장쭤린은 개인적 욕심에 모든 것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를 팔아 먹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기르던 호랑이 고기를 베어 늑대를 제집에 끌어들이는 격이니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나는 양심에 따라 일을 할 뿐이며 그가 만일 국민군을 공격하면 나는 그를 공격할 것입니다. 오늘 담화 내용은 비밀을 지켜 주시고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 말하지 마시오."
이에 한푸쥐는 이렇게 대답했다.
"저는 곽 선생의 인격에 한층 존경심을 표합니다. 제가 돌아가면 분명히 선생의 뜻을 펑위샹 선생에게 전하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11월 5일 귀국한 한푸쥐는 수원 특구의 포두로 돌아와 펑위샹에게 궈쑹링에게 들은 말을 전했다. 마침 장쭤린의 논공행상에 불만이 많아 손봉전쟁을 일으켜 장쭤린에 맞서는 쑨촨팡과 합작할 생각을 하고 있던 펑위샹은 반색하며 궈쑹링과 합작을 꾀하여 11월 6일, 한푸쥐를 톈진에 파견하여 궈쑹링과 협상하게 했다. 이에 펑위샹 및 열하독판 리징린과 결탁한 궈쑹링은 1925년 반봉사건을 일으켜 장쭤린과 양위팅 타도를 기도했으나 관동군의 개입으로 실패했다. 이때 펑위샹과 한푸쥐는 국민군 2군의 악유준이 동맹인 리징린을 공격하는 난리가 벌어지는 바람에 궈쑹링을 돕지 못했다.
1926년 직봉풍전쟁이 발발했으나 옌시산, 우페이푸, 장쭤린이 연합하여 펑위샹을 두들기는 통에 박살나버렸다. 이후 1927년 펑위샹이 국민혁명에 가담하면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국민혁명군으로 편제되었으며 3방면군 총지휘 겸 6군 군장에 임명되어 하북을 공격했다. 국민당의 2차 북벌에서 국민혁명군 2집단군 전선총지휘 겸 3방면군 사령관 겸 6군 군장에 임명되어 북벌에 나섰다. 통일이 완수된 후 편견회의 결과에 따라 20사단장 겸 하남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었다.
2.3. 반장전쟁
1929년 편견회의에 불만을 품은 군사참의원 장 겸 우한정치분회 주석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 해임시키는 호남 사건을 일으켜 1929년 3월에 계계군벌과 장제스 사이의 1차 장계전쟁이 발발했다. 장제스는 한푸쥐를 3로군 사령관에 임명하여 우한을 공격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군비 문제와 산동성 지배 문제를 놓고 장제스와 관계가 악화된 펑위샹의 지시로 1929년 4월에 스여우싼, 마훙쿠이 등과 함께 하남성에 주둔, 카이펑과 정저우에서 장제스에 맞서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에 장제스는 한푸쥐 등을 포섭하기 위해 접촉을 시작했는데 펑위샹은 이를 차단하기 위해 한푸쥐를 섬서성으로 이동시켰다. 5월 15일 쑨렌중과 함께 펑위샹을 호당구국군 섬서로군 총사령관에 추대하였고 1차 장풍전쟁에 참여했으나 장제스가 그를 하남성 정부 주석에 임명하자 5월 21일 뤄양에서 장제스 옹호 통전을 보내 펑위샹 진영에서 이탈했다. 이후 토역군 13로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펑위샹 부대와 맞섰다.1930년 중원대전이 발발하자 진포철로에 배치되어 산동성 방어를 맡았으나 푸쭤이의 공격에 패배하여 칭다오로 패주했다. 하지만 장쉐량이 중앙옹호를 통전하고 관내로 진출하면서 옌시산의 베이핑 국민정부는 순식간에 무너졌고 옌시산과 펑위샹 모두 하야를 통전하고 옌시산은 일본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망명했으나 펑위샹도 산동성 태산에 은거해야 했다. 이후 유진년, 스여우싼과 함께 산동성의 대권을 놓고 경쟁하였으나 한푸쥐는 편을 잘 선택한 덕에 1930년 9월 산동성 정부주석에 임명되어 향후 7년 간 산동성을 지배하게 되었다.
2.4. 산동왕 시절
1931년 1차 양광사변 때 장제스의 편을 서 스여우싼을 축출하였고 1932년 산동 동부의 유진년(劉珍年)을 축출하고 산동성의 지배권을 완전히 장악했으며 그해에 과거 산동을 지배했던 군벌 장쭝창이 만주사변을 틈타 항일을 주장하며 산동의 지배권을 회복하기 위해 산동으로 돌아오자 스여우싼을 시켜 장쭝창에게 숙부를 잃은 산동정부 부총참의 정계성을 사주하여 장쭝창을 피살하게 했다. 장제스가 신생활운동을 시작하자 중국 국민당 산동성 당부를 통해 산동성 신생활운동 촉진회를 성립시키고 각 현에 분회를 설치하여 신생활운동의 보급에 나섰으며 쑹메이링이 부녀지도위원회 지도장에 취임하자 자신의 아내인 고예진을 시켜 산동성 부녀도덕 촉진회를 조직했다.1935년 이후 일본의 화북분리공작 때 옌시산 등과 함께 회유를 받았지만 묵살했다. 1936년 수동사변이 발생하자 제남에서 장제스와 회담하며 대책을 논의했다. 하지만 1936년 서안 사건이 일어나자 쑹저위안과 함께 장제스 처형을 주장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 후 옛 상전인 펑위샹의 6전구에 배속되어 쑹저위안[1], 쑨롄중, 스여우싼 등과 함께 화북에서 항전에 나서 산동성 정부 주석 겸 3집단군 사령관을 맡았다. 하지만 과거에 한 진영이었으니 지휘가 용이할 것이라는 장제스의 예상과 달리 한푸쥐 등은 펑위샹의 말을 듣지 않았다.
2.5. 적전도주와 죽음
중일전쟁 시기의 한푸쥐 |
1937년 9월, 일본군이 옌시산의 영지인 산서성 공격을 감행하자 장제스는 한푸쥐에게 일본군의 측면과 후방을 교란시켜 일본군의 산서성 공격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으나 한푸쥐는 산동성 남쪽으로 멋대로 퇴각해버렸다. 결국 10월 26일 일본군이 낭자관을 함락시키고 산서성의 성도 타이위안을 공격, 11월 8일에 함락시켰다.
1937년 12월 23일 일본군이 산동성 공격을 감행하였다. 12월 26일 지난이 함락되고 1938년 1월 10일 칭다오도 점령당했다. 한푸쥐는 부하들을 버리고 산동성 정부의 국고와 은괴를 챙겨서 가족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도주했다. 쑹저위안과 쑨롄중 역시 펑위샹의 전선 사수 명령을 무시하고 퇴각했고 방어선이 와해되어 화북 전역이 일본군의 손에 함락되고 펑위샹은 패전에 책임을 지고 6전구 사령관직에서 사임했다. 더 이상 지킬 것이 없는 6전구는 폐지되었다.
한푸쥐의 비겁한 적전도주에 격노한 장제스는 1938년 1월 11일 카이펑에서 1, 5전구 단장 이상 주요 군벌들과 지휘관회의를 개최하여 고위 장교들의 군기가 부재한 것과 명령 불복종 관행이 만연한 것이 중국군의 가장 큰 패인이라고 지적하고 한푸쥐를 꾸짖었다. 그러자 한푸쥐는 "나는 산동을 잃은 책임을 진다지만, 난징을 잃은 책임은 누가 질 것인가?"라고 장제스에게 대들었다. 격노한 장제스는 그 자리에서 한푸쥐를 면직시키고 우한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다. 또한 한푸쥐를 포함하여 멋대로 후퇴를 감행한 여단장 급 이상 고급장교 41명을 전격적으로 체포하여 사형을 언도했다.
1938년 1월 24일, 한푸쥐 등은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고 공개처형되었는데 이는 전국적으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국민혁명군의 기율 향상과 단결에 기여했다. 물론 끈 떨어진 신세인 한푸쥐가 만만해서 손쉽게 죽였다는 다소 냉소적인 평가도 있긴 하다.[2]
3. 가족
아내는 3명이었다. 4남 1녀를 두었는데 딸은 한푸쥐 동생의 딸을 입양한 것이다.둘째 부인은 유명한 여배우라 한푸쥐가 사교모임에 갈 때는 둘째 부인을 대동했다고 한다.
한푸쥐 사후 첩들은 모두 재가했다.
3남까지는 모두 정실 소생이다.
장남은 어릴 때부터 정신이 온전치 못했고 결국 정신병원에서 사망했다.
차남은 항미원조전쟁 참전용사이다. 제대후 란저우 전력국에서 일했다. 간쑤성 정협 위원으로도 선출되었다.
3남은 황포군관학교를 졸업했다.
4남은 셋째 부인 소생이다. 북경전력학원[3]에서 교수로 근무하다가 오스트리아로 유학갔고 오스트리아에 정착했다.
4. 여담
장제스에게 권력을 빼앗기고 불만이 많던 사천군벌 류샹과 결탁하여 반장음모를 꾸몄다는 썰이 있다. 1938년에 처형된 것도 적전도주보다는 이 반장음모가 걸린 것이 핵심이었다는게 이 야사의 설명인데... 판단은 각자 알아서.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만주군벌 장작림, 쉬처, 아지랑이.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2,3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제2차 세계대전, 앤터니 비버, 글항아리.
- 장개석 연구, 배경한, 일조각.
- 중일전쟁, 권성욱, 대명출판사.
- 중일전쟁과 중국의 대일군사전략(1937~1945), 기세찬, 경인문화사.
- 郭松齡의 '反奉事件', 송한용, 역사학연구 19권, 호남사학회.
6. 관련문서
- 2차 직봉전쟁
- 북경정변
- 핍궁사건
- 제노전쟁
- 선후회의
- 손봉전쟁
- 반봉사건
- 직봉풍전쟁
- 국민혁명
- 편견회의
- 반장전쟁
- 1차 양광사변
- 만주사변
- 제1차 상하이 사변
- 열하사변
- 하매 협정
- 진토 협정
- 기동사변
- 수동사변
- 서안 사건
- 중일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