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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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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의 북벌
시기 1926년 7월 9일 ~ 1928년 12월 29일
장소 중국 전역
원인 쑨원 사후, 전개된 국민혁명군의 통일전쟁.
교전 세력 중국 국민당
( 국민혁명군)
북양정부
봉천군벌, 직예군벌을 망라한 북양군벌 연합
지휘관 장제스
리쭝런
탕성즈
옌시산
펑위샹
장쭤린
우페이푸
쑨촨팡
장쭝창
병력 약 25만 명 약 100만 명
피해 피해 규모 불명 피해 규모 불명
결과 난징시에 국민정부 수립.
영향 외형상 통일의 한계, 반장전쟁 발발.
파일:external/www.ccfd.org.tw/12.jpg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1]

1. 개요2. 배경
2.1. 호법전쟁의 실패2.2. 천중밍과의 합작과 결렬
3. 전개4. 평가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
6.1.1. 국민당6.1.2. 공산당6.1.3. 북양군벌6.1.4. 열강
6.2. 사건
6.2.1. 북벌 이전6.2.2. 국민당의 1차 북벌(1926.7.1~1927)6.2.3.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1. 개요

1924년부터 1928년까지 중화민국에서 있었던 민족 통일 운동. 이 중에서 중국 국민당 군벌들의 군웅할거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 벌인 일련의 군사작전인 북벌(Northern Expedition, 중국어: 北伐, 병음: běi fá)이 유명하다.

이로 인해 위안스카이 사후 지방 단위로 사분오열되어 있던 중국 대륙에 형식적으로나마 전국을 통치할 수 있는 국가가 수립되게 되었다.

2. 배경

2.1. 호법전쟁의 실패

1916년 중화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가 실패로 돌아간 위안스카이가 죽은 이후 중국 전역은 군벌들의 지방정권이 난립하여 난세에 돌입했다. 이 시기 쑨원(손문)은 자신의 고향인 광저우에서 돤치루이(단기서)에게 축출된 국회의원들의 지지를 받고 광둥정부의 수반으로 선출되어 대원수 칭호를 받고 호법전쟁에 참여했다. 하지만 루룽팅, 탕지야오 등의 군벌들은 쑨원을 이용할 생각밖에 없었고 북양정부와 협상하여 원하는 바를 얻은 이후에는 쑨원의 북벌 호소에 광둥의 군벌들은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1918년 쑨원은 중앙정부도 북벌도 대원수도 필요하지 않다는 군벌들의 공격에 궁지에 몰렸고 실망하여 이들과 결별하여 상하이로 돌아갔다. 해당 문서 참조.

2.2. 천중밍과의 합작과 결렬

1920년 ' 객가 장군' 천중밍(진형명)이 광저우의 지배자가 되면서 쑨원을 초청하게 된다. 하지만 둘의 관계는 계속 북벌을 주장하는 쑨원과 광둥을 중심으로 한 남방정권을 세우려는[2] 천중밍이 격렬한 의견충돌을 빚으면서 크게 악화된다. 천중밍은 아편을 근절하고 광둥을 개발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있었지만 북벌을 촉구하는 의회의 지지를 등에 업은 쑨원과 장제스(장개석)는 천중밍에게 북벌을 위한 거액의 예산을 거듭 요구, 천중밍은 이를 불쾌하게 여기고 있었다. 천중밍과 그의 참모들은 쑨원을 허풍선이라는 뜻의 대포라고 조롱했고 이에 장제스는 천중밍을 광둥정부에서 내쫓아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지만 천중밍의 지지가 필수불가결이었던 쑨원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천중밍은 천중밍대로 자신을 내쫓으라고 날뛰는 장제스를 고깝게 여겨 측근들에게 그를 '땅콩'이라고 하면서 비꼬았고 쑨원에게 '무뢰배 장씨'를 내쫓을 것을 요구하는 등 쑨원이 장제스를 곁에 두는 것을 불만스러워했다.

그러던 중 1922년 쑨원은 첫번째 북벌을 결정하고 후난 성 군벌들과 연합하여 광둥성 북부를 장악하려 했는데 후난 성 군벌들의 배신과 천중밍, 예쥐를 비롯한 광둥 군벌들의 반발로 실패로 돌아간다. 결국 쑨원과 완전히 틀어진 광둥 군벌들은 1922년 6월 16일 쑨원의 대원수부를 공격한다. 이때 위기에 처한 쑨원을 군함을 이끌고 달려가 구조한 것이 바로 장제스[3]로 이때부터 장제스가 쑨원의 최측근 중 한명으로 인정받게 된다. 이 사태에는 영국이 개입하여 쑨원의 안전한 퇴로를 보장받게 해주었고 이후 천중밍은 대군벌 우페이푸(오패부)에게 광둥과 장시의 총독으로 인정받게 된다.

3. 전개

3.1. 기반확보(1924~1926)

3.1.1. 1차 국공합작

1923년 쑨원은 윈난과 장시의 반 천중민 군벌들과 동맹을 맺고 양희민, 류전환을 비롯한 여러 군벌들에게 40만 위안의 군비를 지원하여 광저우를 쳤다. 이 싸움에서 패배한 천중밍은 광둥 동부로 밀려났고 쑨원은 1923년 2월 다시 광저우에 입성하여 3차 광둥 정부를 수립했다. 쑨원은 상하이에서 국민당을 재건하기 위해 소련 및 공산당과 접촉했다. 코민테른에서 네덜란드 공산당원 헨드리퀴스 스니블릿이 중국공산당원들에게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는 것을 허락하자고 제안했고 채택되면서 국공합작의 근거가 마련되었다. 소련은 국민당이 공산주의를 실행할 가능성은 없다고 판단했으나 국민당을 혁명정당으로 인정하고 국민당과 협력하기로 결정, 중국 공산당에게도 국민당과 협력할 것을 지시했다. 그해 9월 장제스가 직접 모스크바를 방문해 트로츠키와 만났고 소련의 군사고문단 지원 및 군사적,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승인받았다. 하지만 소련은 장제스가 역설한 북벌의 필요성에 광둥 정부는 구 청나라의 토대를 계승한 범국민적인 조직이 아니라면서 북벌이 시기상조라고 지적했다. 이에 장제스는 매우 불쾌해하며 소련인들은 믿을 수 없는 자라고 쑨원의 비서인 랴오중카이(료중개)에게 주장했다. 장제스는 쑨원에게 소련인들은 구 러시아 제국 시절의 제국주의를 포기하지 않았으니 협력하면 안된다고 주장했으나 소련은 국민당을 지원하는 유일한 열강이었고 쑨원은 소련과의 협력을 포기할 수 없었다. 쑨원은 소련에서 특별고문인 미하일 보로딘을 초빙하였는데 보로딘은 쑨원을 개명한 지방총독 정도로 매우 저평가했지만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성심성의껏 국민당에 협조하였다.

1923년 말 광둥 동부로 밀려났던 천중밍의 반격이 시작되자 보로딘은 토지 분배, 최저임금제, 휴일 보장을 통한 국민당의 볼셰비키화를 통해 농민, 노동자 대중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상인과 향신 지지자들을 잃을까봐 두려워하여 이를 거절했다. 하지만 쑨원은 보로딘의 주장에 따른 레닌주의 노선을 국민당 노선에 상당수 포함시켰고 천중밍 군대를 격퇴한 1924년 1월 20일부터 10일 간 국민당 1차 전국대표회의를 열고 정식으로 국공합작을 이루었다. 종신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가입을 정식으로 허락했고 삼민주의를 대표이념으로 채택했다.[4] 중국 국민당의 중앙집행위원회에는 예비위원을 포함하여 41석의 위원직이 있었는데 그 중 10석이 중국 공산당에 할당되었다.

3.1.2. 국민당의 1차 동정(東征)

1925년 2월 천중밍이 다시 광저우를 공격하자 장제스는 황푸군관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소련인 고문들을 대동하여 반격에 나섰다. 이 전투에서 국민당이 크게 승리하였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1차 동정 문서 참조.

장제스는 약탈을 엄격히 금지하는 한편 국민당을 선전하는 집회를 열어서 민심을 얻었다. 국민당의 이러한 행보에 중국의 대중과 지식인들은 크게 고무되었고 중국 공산주의의 거두인 천두슈(진독수)는 장제스를 반대하는 자는 곧 반혁명분자라고 공언하기도 하였다. 국민당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농민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 저우언라이를 비롯한 정치위원들을 시켜 토지 개혁 정책을 발표하였는데 이는 당연히 농민들의 지지로 이어졌다. 군벌군대들이 강제 징병, 강제 징용, 약탈을 일상적으로 한 반면 국민당은 어느 것도 빼앗지 않았고 이에 곳곳에서 노동자와 농민들이 국민당에 자발적으로 협조하여 길과 지역정보와 물자를 제공했다. 또한 군사들에 대한 엄격한 상벌제도, 부상병에 대한 후한 복지, 전사자들에 대한 예우로 인하여 국민당과 교군의 사기도 크게 올랐다. 소련도 국민당의 군사력과 장제스의 지휘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고 국민당과 장제스의 명망은 중국 전역에서 알려지게 되었다.

3.1.3. 쑨원의 죽음과 왕징웨이의 집권

1924년 2차 직봉전쟁이 발발하자 쑨원은 봉천군벌 장쭤린(장작림)과 동맹을 맺어 북방을 도모하려 하였다. 1924년 11월, 쑨원은 북상선언을 발표하고 상하이를 거쳐 일본에 도착했다. 이 시점에서 장쭤린은 돤치루이, 펑위샹 등과 연합하여 우페이푸를 패퇴하고 패권을 거머쥐게 되었다. 쑨원은 1924년 12월 31일 베이징에 도착했으나 장쭤린 역시 쑨원의 주의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쑨원은 장쭤린의 냉대를 받다가 급격한 병세 악화로 인해 쓰러졌다. 쑨원은 1925년 1월 26일 베이징협화의원에서 개복 수술을 받고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2월 중순에 퇴원한 쑨원은 베이징의 국민당원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서 생애 마지막 정치활동을 전개했고 이때 그의 비서로 활약하여 후계자를 자처하게 된 것이 왕징웨이였다. 3월 12일 쑨원이 사망했고 베이징 서산 벽운사에 안장되었다.

쑨원을 잃은 국민당은 주도권을 놓고 분열하기 시작했다. 린썬, 쩌우루, 셰츠, 쥐정 등 우익성향의 원로들이 중심이 된 노(老)동지파, 왕징웨이(왕정위)와 후한민(호한민)의 당권파, 쑨원의 아들인 쑨커(손과)가 이끄는 태자파가 쑨원의 빈 자리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는데 그 중에서 당연히 당권파가 제일 유력했다. 당권파의 거두인 41세의 왕징웨이는 과거 순친왕 암살사건에 연루된 사람으로 대단한 미남으로 유명했다. 그는 보로딘과 소련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청나라 관료를 지내 고전학문에 능통한 45세의 후한민은 왕징웨이와는 반대로 우익적인 성향으로 반공주의자였다. 왕징웨이는 쑨원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있었으나 다이지타오를 비롯한 이론가들도 무시할 수 없었고 후한민은 대리 대원수를 지내며 행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이때 보로딘이 왕징웨이를 지지하여 1925년 7월 1일 국민정부가 수립될 때 왕징웨이가 만장일치로 국민정부 주석에 선출되었다. 랴오중카이가 재정부장, 황푸군관학교, 군대의 당대표를 겸했고 장제스는 8인 군사위원회의 위원이 되었다. 우파 성향의 후한민은 실질적으로 업무가 없는 외교부장으로 좌천되었다.[5] 이에 후한민을 비롯한 국민당 우파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그러던 중 1925년 8월 20일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국민당 재정부장 랴오중카이가 암살되었고 특별위원회가 구성되어 외교부장 후한민, 군정부장 쉬충즈 등에게 책임을 물어 모두 숙청하였다. 이어 린썬, 쩌우루 등의 원로들에게도 국민혁명을 화북에 전파하라는 구실로 사실상 추방함으로 국민정부는 왕징웨이의 좌파가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으며 장제스도 국민정부의 실질적인 2인자로 등극했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문서 참조. 한편 화북으로 추방된 원로들은 분노하여 서산회의를 소집, 국공합작의 파기를 선언하고 상하이 당부를 접수하여 상하이 당중앙을 설립하여 국민당은 둘로 분열되었다.

3.1.4. 국민당의 2차 동정

국민당 우파 숙청 이후 기존의 교군이 당군으로 재편되었다. 국민정부는 국민당의 1차 동정 이후 양희민, 유전환 등이 우페이푸와 내통하고 있었다는 증거 문건을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장제스로 하여금 1925년 5월 이들을 숙청하게 했다. 양희민과 유전환를 숙청한 후 국민정부 산하의 부대들은 국민혁명군으로 재편되었다. 그 직후 양희민, 유전환 숙청,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 등으로 국민정부가 혼란스러워진 틈을 타서 1차 동정으로 복속되었던 광동 동부의 천중밍 세력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제스는 동정 총지휘에 취임하여 천중밍 군대를 완전히 정벌했으며 1925년 12월에서 1926년 2월에 걸친 남정을 통해 하이난 섬까지 장악했다. 자세한 것은 국민당의 2차 동정 문서 참조.

동정의 결과로 국민당은 넓은 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는데 새로운 재정부장 쑹쯔원(송자문)이 실시한 재정개혁으로 1924년에서 1926년 사이에 정부 수입이 2배로 늘었다. 국채 수입도 크게 증가했고 은행 저축액은 6배로 늘었다. 유가증권도 성공적으로 유통되었다. 수입이 늘자 당연히 국민당의 군사력도 크게 증강되었고 국민당의 성공을 목도한 우차오수(오조추), 천궁보(진공박)를 비롯한 중국 각지의 젊은 지식인과 엘리트들이 잇달아 국민당에 합류했다. 국민당은 중국 각지의 민족주의자, 진보 지식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3.1.5. 중산함 사건

하지만 급격히 국민당의 실력자로 성장한 장제스는 주페이더, 탄옌카이 등 다른 군사실력자들의 질시를 받게 되었으며 북벌 시작을 놓고 키산카를 비롯한 소련 고문들과도 마찰을 빚었다. 이 와중에 왕징웨이마저 자신의 권위 확보를 위해 다른 군사실력자들을 지원하게 되면서 장제스와 왕징웨이의 관계도 크게 악화되었고 장제스를 음해하는 각종 불온 선전과 유언비어가 난무하였다. 장제스의 정치적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중산함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회항하는 일이 벌어지자 장제스는 이를 자신을 납치하려는 소련과 공산당의 음모로 간주하고 정변을 일으켰다. 이 사건으로 주석 왕징웨이는 충격을 받아 프랑스로 외유를 떠났고 공산당도 강경한 자세를 수정하여 장제스에게 협조하게 되면서 장제스는 국민정부의 지배자가 되었고 북벌이 시작되었다. 자세한 것은 중산함 사건 문서 참조.

3.2. 북벌(1926~1928)

3.2.1. 국민당의 1차 북벌 4.12 상하이 쿠데타

1926년 7월 9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가 총사령관 취임식과 북벌 서사전례를 거행, 북벌을 거행할 것을 선언함으로 국민당의 북벌이 시작되었다. 8개군, 10만명의 국민혁명군은 압도적인 숫자의 군벌군과 싸워 이들을 분쇄했고 국민당은 우한, 난창, 난징, 상하이 등 주요 도시들을 차례로 함락시키며 거대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국공 갈등이 격화되었고 1927년 4월 12일 국민당 우파의 수장인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발동하여 공산당에 대한 선제공격을 감행하게 된다.

3.2.2. 영한분열

장제스에 대해 얕잡아보고 그가 독자적인 청당행위에 나설 것이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체 상하이 정변을 허용했던 우한 정부는 4월 17일 장제스에게 인민 학살의 책임을 물어 출당 조치를 취했고 반혁명의 수괴라고 비난하고 25만 위안의 현상금을 걸었다. 그간 협력 관계였던 소련도 장제스가 반역자라고 비난했고 소련의 기관지인 이즈베스티야에는 소련 유학 중이던 장징궈가 장제스에게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라고 비난하는 편지가 개재되었다.[6] 장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자적인 난징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우한에서는 탕성즈 등이 우한 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병력의 우세함을 들어 난징을 재빨리 토벌할 것을 주장했으나 우한과 난징-상하이 일대의 경제력 자체가 비교가 되지 않았을 뿐더러 우한 정부는 공산당의 무리한 토지개혁과 지주, 향신, 자본가 공격으로 인해 내부 소요와 인플레이션으로 고생하고 있었고 중산층 출신 당원들이 동요하고 있었다. 반면 부유한 난징과 상하이의 경제력 및 혁명의 근거지인 광동을 차지한 장제스는 여러 면에서 우한 정부보다 훨씬 유리한 상태였고 장제스 개인을 지지하는 청방과 자본가들의 협력으로 인해 재정 상태는 비교할 수도 없이 풍족했다.

하지만 장제스는 전체 병력은 우한보다 많았을지언정 북양군벌과의 대치 상태로 인해 즉각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병력을 적었고 따라서 어느 한쪽이 상대를 손쉽게 압도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우한, 난징 각 국민정부는 즉각적인 대치를 회피하고 북벌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3.2.3. 국공결렬

1927년 7월, 우한 국민정부도 분공을 결정하고 공산당과의 관계를 청산했다. 해당문서 참조.

3.2.4. 영한합작

결국 둘 다 반공으로 돌아서게 된 우한과 난징 정부의 통합에 더욱 힘이 실리게 되고 장제스의 하야를 거쳐 양 정부가 통합되기에 이른다. 이때 장제스는 쑹메이링과 결혼하여 정치적 입지를 강화했으며 군사적 경쟁자인 우한의 탕성즈가 전횡을 일삼다 광서파에게 토벌되고 광서파가 재정난 등으로 궁지에 몰리자 이를 통해 지도자로 복귀하게 된다. 자세한 것은 영한합작 문서 참조.

3.2.5. 국민당의 2차 북벌

1928년, 펑위샹, 옌시산, 리쭝런과 함께 2차 북벌에 나선 장제스는 베이징을 점령하였다. 봉천으로 퇴각하던 장쭤린 황고둔 사건으로 암살당했고 장쭤린을 승계한 장쉐량 동북역치를 결정, 국민정부에 합류함으로 북벌은 완수되었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4. 평가

북벌은 중국 역사에서 남부에서 북쪽으로 진군하여 중국을 통일한 두 번째 사건이다. (첫 번째는 명나라 원나라 다)

외형상으로 중국을 통일시킨 중국 국민당 정부는 내면적으로는 '혁명적 장령'또는 '국민정부위원 겸 각 성의 주석'이라는 직함을 가진 군벌들의 불안정한 연합이었다. 재정부장 송쯔원은 1929년 1월 "중앙의 재정권은 겨우 강서, 절강, 안휘, 강소에만 미칠 뿐이고 그 가운데 안휘, 강서의 조세수입은 중앙에 들어오지도 않는다"라고 보고했다. 나머지 각 성의 조세수입은 장쉐량, 옌시산, 펑위샹, 리쭝런, 바이충시, 리지천 등 지방 군벌들의 직접 사병양성 등에 사용하고 있었다. 국민당 내부에도 왕징웨이 등 개조파, 셰츠, 쩌우루, 쥐정 등의 서산회의파를 비롯해 장제스에 대립하는 파벌이 다수 있었다.

장제스는 각 지방의 정치분회를 폐지하고 1928년 편견회의를 개최하여 군을 감축하려 했으나 이로 인하여 군벌들 간의 갈등이 폭발하여 반장전쟁이 발생하였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inese_civil_war_map_02.jpg
△ 북벌 후의 중화민국의 정세. 지도에서 남색 부분은 장제스가 이끄는 난징국민정부의 지배가 강한 영역. 핑크색 부분은 지방 군벌의 지배가 강한 영역이다. Li는 리쭝런, Feng은 펑위샹, Yan은 옌시산, Zhang은 장쭤린, 장쉐량 부자를 뜻한다.

5. 참고문헌

  • 장제스 평전, 조너선 펜비 저, 민음사(2014년)
  • 1928년 장학량 정권의 동북역치, 송한용, 전남대(1998).
  • 중국군벌의 성쇠와 초기 국민정부에 미친 영향, 오수열, 조선대(2013).

6. 관련문서

6.1. 인물

6.1.1. 국민당

6.1.2. 공산당

6.1.3. 북양군벌

6.1.4. 열강

6.2. 사건

6.2.1. 북벌 이전

6.2.2. 국민당의 1차 북벌(1926.7.1~1927)

6.2.3. 국민당의 2차 북벌(1928.4.7~1928.12.29)


[1] 오늘날 장제스를 대표하는 사진, 1926년 10월 10일 우한 함락 기념 열병식의 모습이다. [2] 이를 연성자치론이라고 한다. [3] 음모론에 의하면 상하이 검은 손의 원조를 받았다고 한다. [4] 이때 삼민주의는 크게 개조되면서 오늘날의 삼민주의가 확립되었다. 외국의 통제를 받지않는 자주 국가건설(민족주의), 민족자본에 의한 경제 건설(민생주의), 민생의 권리 향상을 통한 궁극적 민주국가 완성(민권주의)이 그것이다. 그러나 쑨원 사후 중국 공산당은 1차 전당대회 당시의 소련의 지원을 받아 반제국주의 국가 확립(민족주의), 공산주의와의 연대를 통한 민중 해방(민권주의), 노동자와 농민운동 지원(민생주의)가 정통 삼민주의라고 주장하였다. [5] 광저우 정부를 인정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장징궈는 소련의 강압떄문에 서술하였다고 변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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