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22:15:50

중국사의 후궁 제도



1. 개요

중화민국 이전 중국 대륙에 존재했던 옛 국가의 역대 중국 제왕(帝王)의 측실(側室·妾室)을 설명하는 문서.

한국에선 흔히 제왕의 측실의 통칭으로 ' 후궁'이란 단어를 사용하나 중국에선 황비(皇妃), 빈비(嬪妃), 빈어(嬪御), 비빈(妃嬪) 등의 칭호가 더욱 익숙하며, 당나라를 전후하여 편찬된 사서(史書)엔 비(妃)를 황제의 후궁을 통칭하는 단어로 쓴다. 제왕의 적실(嫡室)인 후(后)와 첩실(妾室·側室)을 통합해 후비(后妃)라고 한다.

2. 특징

황제가 사망하여 새로운 황제가 즉위하면 황후 황태후로 봉숭된다. 이를 정통 황후 혹은 적후(嫡后, 正后)라 구분하며 혼인 순서에 따라 원후(元后: 첫 황후)· 계후(繼后: 재혼으로 맞이한 황후)로 구별하기도 한다. 만일 황제가 선황제의 후궁의 아들일 경우엔 황제의 생모인 후궁은 정통 황후와 함께 황태후로 봉숭되며 사후 황후로 추존된다. 이에 추존 황후, 혹은 서후(庶后)라 구분한다.

황후 출신이 아닌 황제의 생모가 반드시 태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경우 국태비(國太妃)·태비(太妃)를 쓰기도 했다. 황자(皇子: 황제의 아들) 출신이 아닌 황제로서 생부를 황제로 추존하지 못한 황제의 생모는 국태부인(國太夫人)[1]으로 봉작되기도 했다.

3. 고대

고대 국가인 하나라 상나라의 제왕의 적실은 왕비(王妃)로 봉작했다. 이 시대 제왕의 후궁은 말희 달기 같은 일부 실명만 알려질 뿐이다. 이후 주나라의 제왕의 적실을 왕후라고 규정하는데 이는 당시엔 아직 황제(皇帝)를 쓰지 않았으며 《주례》에 "제왕은 오직 1명의 정처를 후(后)로 삼는다."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2]

전한 시대에 편찬된 사마천의 《 사기》에 따르면 전설시대 삼황오제 중 1명인 황제(黃帝)에게 4명의 아내(妃)가 있었는데 이 중 가장 뛰어난 아내(妃) 1명을 으뜸에 두어 원비(元妃)로 삼고, 나머지 세 아내(妃)를 차비(次妃)라 하여 예우에 차등을 두었다고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같은 입장의 정처 4명에게 서열을 정한 것에 불과하나 이후 1후 3부인의 기원이 되어 원비가 정궁이고 차비가 후궁이라 인식되기도 한다.

주나라의 주공이 지었다고도 전해지는 《의례》《주례》에 따르면 제왕은 오직 1명의 정처를 후(后)로 삼고, 그 외 부인 3원, 빈 9원, 세부 27원, 어처 81원을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것이 현존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후비제도로 알려지고 있다. 《주례》의 천관총재(天官冢宰) 편에 따르면 3부인에겐 각 81명의 여어(女御)가, 9빈에겐 각 9명, 27세부에겐 각 3명, 81어처에겐 각 1명의 여어가 배치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어란 시녀(侍女: 궁녀)를 뜻한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 이러한 제도가 실현된 기록은 존재하지 않으며, 당시 국가 호구의 규모로나 진의 패망 후 건립된 한나라( 전한)의 후비 제도와 비추어도 무리한 사항이 아닐 수 없다.

4. 춘추전국시대

춘추전국시대의 공자(孔子)와 그 후학들이 집필한 《 예기》곡례편(曲禮篇)에 따르면 "공후(公侯)는 부인(夫人)이 있고, 세부(世婦)가 있고, 처(妻)가 있고 첩(妾)이 있다."라고 나온다. 또 혼의(婚義)에는 "천자(天子)의 후(后)는 궁(宮) 6명, 부인(夫人) 3명, 빈(嬪) 9명, 세부(世婦) 27명, 어처(御妻) 81명을 세워 천하(天下)의 내치(內治)를 맡고 천자(天子)는 6관(官), 3공(公), 9경(卿), 27대부(大夫), 81원사(元士)를 세워 천하의 외치(外治)를 듣는다."고 되어 있다.

제후에게도 천자와 별도의 격이 있었다. 왕제(王制)에는 "대국(大國)은 3경(卿), 하대부(下大夫) 5인, 상사(上士) 27인이라.’ 하였고, 《예기(禮記)》 제의(祭義)에 ‘제후 부인(諸侯夫人)은 3궁(宮)을 세우면 대국(大國)의 부인(夫人)은 3궁(宮), 3세부(世婦), 5처(妻), 27첩(妾)을 세우는 것이라."라고 나온다. 반면에 《춘추호씨전(春秋胡氏傳)》에는 "제후(諸侯)는 한 번에 9명의 여자에게 장가드는데, 적부인(嫡夫人)이 행(行)하면 질제(姪娣)가 따른다. 그런즉, 부인(夫人)이 1이고 잉(媵)이 2이고 질제(姪娣)가 6이라."라고 나온다.

춘추전국시대부터 전한 개국 전까지 제왕의 여인은 후(后)·비(妃)·부인(夫人)·희(姬)·미인(美人)으로 호칭했는데, 같은 인물의 호칭이 혼용(混用)되어 있고 기준이 없어 적·첩을 정확히 구분할 수 없다.

5. 한나라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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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는 한고제 유방이 기원전 202년에 건국한 전한과 기원후 25년에 광무제 유수가 건국한 후한으로 구별한다. 중국에서는 서한과 동한으로 구분한다.

한나라의 법에서는 매년 8월마다 호구를 조사하였는데, 이를 실시하면서 중대부(中大夫), 액정승(掖庭丞), 관상가[相工]를 보내어 도성인 낙양의 양가(良家) 출신 동녀(童女)로 나이 13세 이상에서 20세 이하까지를 살피도록 하여, 자태가 빼어나 미색이 있고 관상이 좋을 경우에 후궁으로 들여보냈다. 또 명덕황후의 경우처럼 직접 상주하여 후궁으로 들어간 특수한 경우도 존재하였다.

5.1. 한무제 이전

전한을 건국한 유방은 황후 1인을 두는 주나라의 제도를 답습하였으나 후궁의 작호와 위계는 달리 정하지 않고 전국시대 열국의 제왕의 처첩을 상징하는 호칭인 부인(夫人), 미인(美人), 희(姬)를 썼다.
등급 작호
??? 부인(夫人), 희(姬), 미인(美人)

이후 한무제 이전까지 해당 호칭을 썼다. 또 전한 시대를 기점으로 황제의 적실로 책봉된 여인과 황제의 생모로서 봉숭·추숭된 여인을 황후로 삼는 것이 정식으로 제도화된다.
등급 작호
1등급 부인(夫人)
2등급 미인(美人)
3등급 양인(良人)
4등급 팔자(八子)
5등급 칠자(七子)
6등급 장사(長使)
7등급 소사(少使)

5.2. 한무제 이후

전한의 7대 황제인 한무제 때에 이르러 황후 아래 여관직(후궁+시녀)인 첩여(婕妤), 형아(娙娥), 용화(傛華), 충의(充依)가 증설되었으며, 한 원제 때 소의(昭儀)가 추가되어 황후의 아래에 놓였다. 이후 전한의 후비 제도는 황후 1인 아래 빈어 14등급으로 나뉘었다.

황태자의 처는 비(妃)로 삼았으며, 첩은 양제(良娣)와 유자(孺子)로 삼았다. 황손의 처는 부인으로 삼았고, 첩에겐 정식 작호가 없다.

밑에 나오는 작위들 중 일부는 원제가 만들었다.
등급 작호
1등급 소의(昭儀)
2등급 첩여(婕妤)
3등급 형아(娙娥)
4등급 용화(傛華)
5등급 미인(美人)
6등급 팔자(八子)
7등급 충의(充依)
8등급 칠자(七子)
9등급 양인(良人)
10등급 장사(長使)
11등급 소사(少使)
12등급 오관(五官)
13등급 순상(順常)
14등급 공화(共和), 오령(娛靈), 보림(保林), 양사(良使) 등

5.3. 후한 시기

전한에서는 많은 작호나 명칭을 가진 후궁들이 있었지만, 후한 광무제가 이를 혁파하여 황후와 귀인(貴人)만을 두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이후로 점차 미인(美人), 궁인(宮人), 채녀(采女)의 직위를 설치하기에 이른다. 결과적으로 전한 때는 14등급으로 세분했던 후궁의 작위가 후한 때는 4등급이 되었다.

또한 황실 남성 혹은 제후로서 봉왕(封王)된 왕의 적실과 생모, 외국의 왕의 적실은 옛 제도 그대로 왕후라 규정했는데 이는 후한 때 비(妃)로 교체되었으며, 태자의 적실은 비(妃: 태자비)로 봉하는 제도도 이 때 생겨났다. 이 제도는 중국의 황실이 사라질 때까지 대체적으로 그대로 쓰여진다.
등급 작호
1등급 귀인(貴人)
2등급 미인(美人)
3등급 궁인(宮人)
4등급 채녀(采女)

귀인은 금인자수(金印紫綬)를 받았는데 녹봉은 조 수십 곡(斛)에 불과하였다.

미인, 궁인, 채녀는 작질(爵秩)이 없고 세시에 맞추어 하사품을 받았을 뿐이었다.

5.3.1. 황후 시호

황후는 사망 이후 황제와 마찬가지로 시호를 받았는데, AB황후의 형태로, A는 남편인 황제의 시호글자를 따왔고, B가 황후 본인에 대한 시호이다.

예컨대 광열황후의 경우, '광'은 광무제에서 따온 글자이고 '열'이 황후 본인에 대한 시호이다.

화제의 황후인 화희황후의 경우, '화'는 화제에게서 따온 글자이고, '희'가 황후 본인에 대한 시호이다.

다만 폐위되었으면 정식 시호가 없이 황제의 시호만을 땄는데, 예컨대 광무황후 곽씨 효환황후 등씨 등을 들 수 있다. 이는 누구의 황후였다가 폐위되었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므로, 폐위된 황후 본인에 대한 시호가 아니다.

6. 위진남북조 시대

제왕의 첩의 작위로 비(妃)가 쓰이기 시작한 것은 위진남북조 시대로, 당시에는 빈(嬪)이 비보다 서열이 높았다. 비(妃)가 작위로서의 빈(嬪)[3]의 윗서열로 뚜렷이 교체된 것은 원나라 때에 이르러서이다. 중국 후궁의 호칭으로 비빈(妃嬪)을 쓰기도 하고 빈비(嬪妃)를 쓰기도 하는 것은 이로 인한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6.1. 삼국시대

삼국지를 쓴 진수 위나라 출신이다 보니 이런 쪽의 기록은 위나라 쪽이 상세하다. 귀빈(貴嬪)이 숙비(淑妃)보다 서열이 높은 것이 특징이다.
등급 작호
1등급 부인(夫人)
2등급 귀빈(貴嬪)
3등급 숙비(淑妃)
4등급 숙원(淑媛)
5등급 소의(昭儀)
6등급 소화(昭華)
7등급 수용(修容)
8등급 수의(修儀)
9등급 첩여(婕妤)
10등급 용화(容華)
11등급 미인(美人)
12등급 양인(良人)
13등급 차인(鹾人)

6.2. 서진 ~ 소량

구분 작호
3부인 귀빈(貴嬪), 부인(夫人), 귀인(貴人)
9빈 숙비(淑妃), 숙원(淑媛), 숙의(淑儀), 수화(修華), 수용(修容), 수의(修儀), 첩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기타 미인(美人), 재인(才人), 중재인(中才人)

6.3. 남진

구분 작호 정원
3부인 귀비(貴妃), 귀빈(貴嬪), 귀희(貴姬) 각 1인
9빈 숙원(淑媛), 숙의(淑儀), 숙용(淑容), 소화(昭華), 소용(昭容), 소의(昭儀), 수화(脩華), 수의(脩儀), 수용(脩容) 각 1인
5직 첩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승휘(承徽), 열영(列榮) 각 1인
기타 미인(美人), 재인(才人), 낭인(良人) 무제한

6.4. 북위

북위의 초대 황제인 태조 도무제의 후궁이 모두 부인(夫人)의 작호를 쓴 것으로 미뤄 개국 당시엔 후궁 관제가 특별히 정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3대 황제인 세조 태무제 때에 이르러 소의(昭儀), 귀인(貴人), 초방(椒房)이 등장하는데, 황후의 바로 아래 서열인 소의를 좌소의(左昭儀)와 우소의(右昭儀)를 나눈 것이 특색이다.

이후 북위의 6대 황제인 효문제 때 한족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후궁 제도 역시 주례의 내용을 모방한 형태로 전면 개정되어 황후 아래 준국모의 작위로 좌소의와 우소의를 둔 것만 제외하고 그 아래로 3부인(三夫人), 9빈(九嬪: 3빈과 6빈으로 상하 구별), 세부(世婦), 어녀(御女)로 구분토록 했다.
등급 작호
좌소의(左昭儀), 우소의(右昭儀)
3부인(三夫人) 귀빈(貴嬪), 부인(夫人), 귀인(貴人)
3빈 숙비(淑妃), 숙원(淑媛), 숙의(淑儀)
6빈 수화(修華), 수용(修容), 수의(修儀), 첩여(婕妤), 용화(容華), 충화(充華)
세부(世婦)
어녀(御女)

6.5. 북제

서열 구분 작호 정원 품계
1등급 좌아영(左娥英)·우아영(右娥英) 각 1인
2등급 숙비(淑妃) 1인
3등급 좌소의(左昭儀)·우소의(右昭儀) 각 1인
4등급 3부인 홍덕(弘德), 정덕(正德), 숭덕(崇德) 각 1인
5등급 3빈(三嬪: 上嬪) 융휘(隆徽), 광유(光猷), 소훈(昭訓) 각 1인
6등급 6빈(六嬪: 下嬪) 선휘(宣徽), 선명(宣明), 응휘(凝暉), 응화(凝華), 순화(順華), 광훈(光訓) 각 1인
7등급 27세부 광훈(廣訓), 수훈(修訓), 정훈(靜訓), 경훈(敬訓), 경완(敬婉), 경신(敬信), 소영(昭寧), 소화(昭華), 완화(婉華), 방화(芳華), 방유(芳猷), 정화(正華), 광정(光正), 무광(茂光), 명범(明範), 명신(明信), 명숙(明淑), (弘猷), 홍유(弘徽), 영칙(令則), 휘칙(暉則), 휘범(暉範), 정범(貞範), 염의(艷儀), 요의(曜儀), 요덕(曜德), 화덕(和德) 각 1인 종3품
8등급 81어처 무덕(茂德), 경무(敬茂), 무범(茂範), 묘범(妙範), 수범(修範), 영범(英範), 휘장(暉章), 경장(瓊章), 요장(瑤章), 양원(良媛), 양신(良信), 정신(正信), 유화(柔華), 사유(思柔), 영의(令儀), 수의(秀儀), 신의(慎儀), 묘의(妙儀), 완의(婉儀), 수정(修靜), 무의(茂儀), 윤의(潤儀), 여의(麗儀), 홍의(弘儀), 숙의(肅儀), 목의(穆儀), 목규(穆閨), 목화(穆華), 명의(明懿), 숭명(崇明), 명훈(明訓), 명염(明艷), 경순(敬順), 숭경(崇敬), 수경(修敬), 경영(敬寧), 소순(昭順), 소용(昭容), 소신(昭慎), 목광(穆光), 요광(曜光), 광범(光範), 내범(內範), 염광(艷光), 원광(媛光), 방원(彭媛), 숙용(肅容), 정숙(靜肅), 숙규(肅閨), 회순(懷順), 회덕(懷德), 정의(貞懿), 정응(貞凝), 정목(貞穆), 정원(貞媛), 정신(貞慎), 홍신(弘慎), 휘숙(徽淑), 휘아(徽娥), 홍염(弘艷), 염화(艷華), 완덕(婉德), 명완(明婉), 염완(艷婉), 방완(芳婉), 응완(凝婉), 수원(修媛), 수예(修禮), 영숙(英淑), 숙의(淑懿), 숙위(淑猗), 승한(承閒), 수한(修閒), 한화(閒華), 여칙(麗則), 유칙(柔則), 양칙(良則), 묘칙(妙則), 훈성(訓成), 영훈(寧訓), ???? 각 1인 정4품

7. 수나라 시대

8. 당나라 시대

당나라에서는 4부인(귀비, 숙비, 덕비, 현비), 9빈(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27세부(첩여(婕妤), 미인(美人), 재인(才人)), 81어처(보림(宝林), 어녀(御女), 채녀(采女))를 두었다. 기황후(드라마)에 나오는 후궁 품계가 여기서 나온 것. 배경이 된 원나라는 하술하듯 아주 단순한 후궁 품계를 가졌다.[4] 다양한 후궁 품계가 궁중암투를 묘사하기에 더 좋았던 모양.
구분 품계 작호 정원
4부인 정1품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각 1인
9빈 정2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각 1인
27세부 정3품 첩여(婕妤) 각 9인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81어처 정6품 보림(寶林) 각 27인
정7품 어녀(御女)
정8품 채녀(采女)

태자궁
품계 작호 정원
정3품 양제(良娣) 2인
정4품 양원(良媛) 6인
정5품 승휘(承徽) 10인
정7품 소훈(昭訓) 16인
정9품 봉의(奉儀) 24인

이후 측비(側妃), 태자빈(太子嬪)이 추가되었다.

8.1. 현종 이후의 특징

현종 폐후 왕씨를 폐한 이후로, 당나라의 황후는 형태만 유지했을 뿐 실상은 이전과 다른 허명에 불과했고 정식으로 책봉되지 못했다. 현종 이후의 황제들 중 숙종 소종이 각각 장씨와 하씨를 생전에 황후로 세웠지만 이들의 경우도 전자는 안사의 난이라는 혼란기에 이루어졌고 후자는 당말의 전란기에 행해진 것이어서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 이외에 현종이 총애한 양귀비도 그저 귀비(貴妃)의 칭호만을 얻었을 뿐, 황후의 지위는 받지 못했다. 황후로 책봉된 덕종의 소덕황후와 헌종의 의안황후 등은 모두 사후에 책립되었다. 이처럼 사후에 황후로 승격되어 추증되는 방식은 현종시기에 확립되었다.

참고 : 임사영, 류준형 옮김, 『황제들의 당제국사』, 푸른역사, 2016.

8.2. 대표 인물

  • 측천무후 : 처음에는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 재인(才人: 정5품)이었다. 당 태종의 사후 관례대로 비구니가 되었다가 고종의 황후인 왕씨가 정적인 숙비(淑妃: 정1품) 소씨를 견제할 목적에 당 고종이 황태자 시절에 마음에 두었었던 서모 측천무후를 입궁시켜 당 고종의 소의(昭儀: 정2품)로 삼고 숙비를 축출했다. 이로 인해 비(妃)로 승격한 측천무후는 왕황후 역시 축출하고 황후에 올랐으며, 당 고종의 사후 황위에 오른 아들 예종을 폐하고 스스로 황제에 올랐다.
  • 한국부인 무씨 : 본명은 무순(武順)이다. 측천무후의 언니로서 황궁에 드나들다 당 고종과 통간하는 사이가 됐다고 전한다. 사후 특별히 국부인(國夫人)[5]으로 추증되었다. 《구당서》에는 당 고종의 6남인 노왕 이현이 측천무후의 소생이 아닌 한국부인의 소생이라 전하고 있다.
  • 위국부인 하란씨 : 한국부인 무씨의 딸로, 측천무후의 이질녀이다. 당 고종과 추문 관계에 있던 어머니 한국부인의 사후에 특별히 국부인으로 봉작됐다. 이모부인 당 고종과 통간하여 측천무후에게 살해됐다고 전한다.
  • 양귀비 : 당 현종의 후궁으로 본래는 당 현종의 아들 수왕 이모의 왕비였다. 중국의 4대 미인 중 한 명으로, 풍만한 미인의 대명사로 꼽힌다.
  • 정순황후 무씨 : 당 현종의 후궁이자 추존 황후로, 그녀의 생전 작위였던 무혜비로 더욱 유명하다. 당 현종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사후 정순황후로 추존됐으나 당 숙종이 즉위한 뒤 생모 귀빈 양씨(원헌황후)의 정적이었던 무씨의 황후로서의 예우를 일절 폐했다.

9. 송나라 시대

송나라 개국 초의 후비 제도는 당나라의 것을 답습해 1후 3부인 9빈 그리고 세부를 두었다.
구분 작호
3부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9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세부 정3품 첩여(婕妤),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그러나 진종 인종을 거쳐 9빈이 18인으로 대폭 증원되어 종전의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에 태의(太儀), 귀의(貴儀), 숙의(淑儀), 숙용(淑容), 순의(順儀), 완의(婉儀), 완용(婉容) 등이 추가되었다.

진종 때 종전의 3부인(귀비, 숙비, 덕비)에 신비(宸妃: 송 인종의 생모)가 더해졌고, 인종 때 5부인으로 증원되어 현비(賢妃), 정비(净妃)[6]가 있었다.

진종 시기 내명부
구분 작호
4부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신비(宸妃)
18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태의(太儀), 귀의(貴儀), 숙의(淑儀), 숙용(淑容), 순의(順儀), 완의(婉儀), 완용(婉容)
세부 정3품 첩여(婕妤),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인종 시기 내명부
구분 작호
5부인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신비(宸妃), 현비(賢妃)
18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태의(太儀), 귀의(貴儀), 숙의(淑儀), 숙용(淑容), 순의(順儀), 완의(婉儀), 완용(婉容)
세부 정3품 첩여(婕妤),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귀인(貴人)

세부에는 정3품 첩여(婕妤),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귀인(貴人) 등이 있으며 이외 국부인(國夫人), 군부인(郡夫人), 부인(夫人)과 군군(郡君), 현군(縣君) 등의 외명부 작위를 가져다 쓰기도 했다.

10. 금나라 시대

금나라 초기엔 당나라의 후비 제도인 1후 4부인 9빈 27세부 81어처 제도를 수용했는데, 당나라의 4부인(귀비, 숙비, 덕비, 현비)에 원비(元妃)[7]를 더하여 황후 아래 1등 후궁의 작위에 올리고 신분·출신 등의 이유로 황후에 올리지 못한 원배(元配·初室)의 작위로 썼다. 이후 태자가 황위를 승계하고 태자비가 황후에 오르는 것이 정착되면서 원비 역시 평범한 1등 후궁의 작위로 정착된다.
구분 품계 작호 정원
부인 정1품 원비(元妃),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각 1인
9빈 정2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각 1인
27세부 정3품 첩여(婕妤) 각 9인
정4품 미인(美人)
정5품 재인(才人)
81어처 정6품 보림(寶林) 각 27인
정7품 어녀(御女)
정8품 채녀(采女)

4대 황제이자 폐황제인 금 해릉왕 때에 이르러 미인을 밝혔던 그의 탐욕 아래 12비(妃)로 대폭 증가하기도 했다. 8대 황제인 금 선종 때 이르러 후비 제도가 다시 정비되어 작위와 숫자를 대폭 축소했다.

이에 5부인이 귀비(貴妃)·진비(真妃)·숙비(淑妃)·여비(麗妃)·유비(柔妃)로 교체되었고[8], 9빈은 종전의 것을 그대로 두었으나 첩여(婕妤)를 추가하고, 정3품에 여인(麗人)과 재인(才人), 정4품에 순의(順儀)·숙화(淑華)·숙의(淑儀)를 뒀다.[9] 그 아래는 여관(女官)으로 삼았다.
구분 품계 작호
5부인 귀비(貴妃)·진비(真妃)·숙비(淑妃)·여비(麗妃)·유비(柔妃)
정2품 소의(昭儀), 소용(昭容), 소원(昭媛), 수의(修儀), 수용(修容), 수원(修媛), 충의(充儀), 충용(充容), 충원(充媛), 첩여(婕妤)
정3품 여인(麗人), 재인(才人)
정4품 순의(順儀)·숙화(淑華)·숙의(淑儀)
여관(女官)

11. 원나라 시대

본래 몽골 제국은 칸의 여성형인 카툰(하툰)을 칸의 아내로 불렀으며, 서열이 나누어졌다. 이들은 이들의 내명부인 오르도를 관리했는데, 칭기즈 칸의 오르도처럼 여럿이 나누어져 있을 경우에는 그 오르도 내에서 가장 서열 높은 쿨란이 각 오르도를 관리했다.

원나라 쿠빌라이 칸이 중국을 지배한 뒤에 세운 나라라서 쿨란의 명칭이 황후로 바뀌기는 했지만 일부다처제의 형태로 황후를 여럿 두었다. 하지만 황후 중 제1황후인 정궁황후를 제외하면 나머지 제2황후부터는 고급 비(妃)로 여겼다. 그리고 황후의 금보와 옥책도 오직 제1황후만이 가질 수 있었고, 책립 의식도 제2황후부터는 참석할 수 없었다.

이는 금나라를 세운 여진족과 마찬가지이나 당나라의 후비제도를 수용하여 오직 1명의 황후를 두었던 금나라와는 달리 원나라 황제는 다수의 황후를 두어 고유의 일부다처제 결혼 문화를 고수했다. 이로 인해 원나라의 후비제도는 오직 황후·비(妃·妃子)·빈(嬪)의 3등급으로만 구성되었으며 정원엔 제한이 없었다.

예외적으로 원 혜종 때 비(妃)·빈(嬪)을 모두 두었을 뿐만 아니라 재인(才人)도 썼다.

흔히들 중국 하면 떠올리는 비빈제도는 원나라 때 형성되었다.

12. 명나라 시대

명나라의 기본적인 후비 제도는 6궁으로 1명의 정궁(正宮)인 황후(皇后) 아래 후궁인 비(妃)를 둔다. 초기엔 비 중 귀비(貴妃)를 으뜸으로 두었으며, 그 외의 비는 전 왕조처럼 호(號)를 정해둔 것이 아니라 숙비, 덕비, 현비, 여비, 영비, 신비, 강비, 장비, 유비 등 임의로 선택하여 차등을 두지 않았다. 비 외에도 비의 하위 등급인 첩여(婕妤), 소의(昭儀), 귀인(貴人), 미인(美人), 답응(答應) 등의 작위를 사용하기도 했는데 이들을 서비(庶妃)라 총칭한다.

빈(嬪)은 명나라 황태자의 후궁의 작위 중 하나로, 황제의 후궁으로 입궁이 내정된 자의 임시 작위로도 쓰였다. 이후 가정제 때 이르러 빈(嬪)이 황제의 후궁의 정식 작위로도 쓰이기 시작해 비(妃: 작위) 아래이자 서비(庶妃) 중 으뜸인 귀인(貴人)의 위에 놓이게 된다. 이후 빈(嬪)까지를 정비(正妃: 정식 후궁)[10], 귀인 이하를 서비(庶妃)로 구분한다.

태자의 후궁의 작위로는 본래 빈(嬪)이 있었으나 이후 빈은 황제의 후궁의 작위로 옮겨지고, 대신 재인(才人)·선시(选侍)·숙녀(淑女)를 두어 재인을 태자의 정궁인 태자비 바로 아래의 서열에 두고 숙녀를 가장 아래에 두었다. 친왕의 후궁은 시첩(侍妾)이다.

명나라의 경우 적후(嫡后)와 서후(庶后)를 뚜렷이 구별했는데, 적처(嫡妻: 태자비, 친왕비 포함)로서 황후로 책봉되거나 추존된 적후는 홀수(기본 13자)[11]로 이뤄진 시호를, 후궁으로서 황후로 책봉된 경력이 없이 사후에 황후로 추존된 서후는 정후와 달리 후호(后號)를 붙일 수가 없기에 짝수(기본 12자)로 이뤄진 시호를 추시받는다.[12]

다만 정후가 폐비 또는 폐서인 되어 서후가 정후로 승격된 경우에는 후호(后號)를 부여받아서 시호가 13자로 된 경우는 있었다.

또, 후대 황제의 친모 혹은 친조모로서, 일찍이 사망하여 황태후로도 존봉된 적도 없는 경우엔 황후로 추존하지 못하고 황태후 혹은 태황태후로 추존했는데, 이 추존 작위로서의 황태후와 태황태후는 추존 작위로서의 황후보다 아래이다.[13]

특이한 점은 명나라의 후궁은 품계가 없는데, 품계가 없는 것은 청나라 대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 내명부 6궁제도
    • 정궁(正宮) 황후(皇后) - 적후(嫡后), 서후(庶后)
    • 정비(正妃) - 황귀비(皇貴妃), 귀비(貴妃), 비(妃), 빈(嬪)
    • 서비(庶妃) - 첩여(婕妤), 소의(昭儀), 귀인(貴人), 미인(美人), 답응(答應)
  • 태자궁
    • 황태자비(皇太子妃)
    • 재인(才人)
    • 선시(选侍)
    • 숙녀(淑女)
  • 친왕
    • 시첩(侍妾)

12.1. 황귀비

비공식 7대 황제인 대종 경태제 때 이르러 황후(皇后)와 귀비(貴妃)의 복합어인 황귀비(皇貴妃)란 새로운 작위가 최초로 등장해 황후에 준하는 등급으로서 귀비의 위에 놓인다.

이 작위가 만들어진 당시가 경태제의 황후 항씨의 국상 중이었으며 다음 해에 경태제가 폐위되었고, 같은 이유로 경태제의 다른 후궁들에 대한 정보도 기록에 거의 남아있지 않아 이때의 황귀비의 작위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릴 순 없지만 훗날 청나라 때 그랬던 것처럼 황후의 국상이 마칠 때까지 책봉을 유보하면서 그 동안 황후의 직임을 대리하며 후궁을 다스리도록 하기 위해 만든 작위였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14]

황귀비의 작위가 다시 쓰인 것은 31년 후인 8대 황제인 헌종 성화제 때이다. 황제 즉위 후 유모였던 만정아( 만귀비)를 후궁으로 맞이해 패륜이라는 주변의 질시에도 극진한 애정을 쏟아 귀비(貴妃)에까지 진봉시켰던 성화제는 성화 23년(1487년) 그녀가 사망하자 황후로 추존치는 못하고 대신 부황 천순제가 복위 뒤 무효화시켰던 황귀비 작위를 부활하여 만귀비를 황귀비로 추봉했다.

이것을 전례 삼아 성화제의 손자인 세종 가정제(11대)가 갓 책봉한 황태자의 생모 소비 왕씨를 황귀비로 격상했으며, 다음 해 가정제의 장남으로서 사망 후 특별히 태자로 추시해줬던 애충태자의 생모 귀비 염씨가 사망하자 역시 황귀비로 추시해주었다.

이후 명나라의 황귀비는 황태자 혹은 황태자 예정자의 생모를 책봉하거나, 귀비 혹은 각별한 총애를 받은 정비(正妃: 정식 비)를 사후에 추증하는 작위로 쓰인다.

13. 청나라 시대

청대 황궁의 규정에 따르면 나이가 약간 많은 8명의 단정한 궁녀를 선발해 아직 결혼하지 않은 황제와 잠자리를 갖게 했다. 이 8명의 궁녀들은 사의(司儀)·사문(司門)·사침(司寢)·사장(司帳)의 4개의 직함을 부여받고 봉록을 받는 등 일반 궁녀와는 다른 대우를 받았다.

이 규정의 목적은 어린 황제가 황후와의 첫날밤에 당황하지 않도록 미리 성경험을 갖게 하는 것과, 일찍이 성에 눈뜨게 하여 쉽게 성적 충동을 느끼게 함으로써 가까이에 있는 여성과 언제든 성관계를 갖게 하고 후사를 넓히는 데 있었다.

청나라의 후궁 또한 명나라 대처럼 후궁에 품계가 없었다.

13.1. 후금 시기

원래 여진족 일부다처제다 보니 일부다처제 형식이 남아있었다. 또 사칭(史稱)이라고 해서 집필 과정에서 사관이 독자의 이해의 용이함을 위해 한어(漢語: 중국어)가 아닌 여진족 언어로 된 작위명을 보편적인 작위명으로 바꿔 쓴 임시 이칭이 있었다. 중국 위키백과
  • 정실(正室) - 대복진(大福晉)[15]
  • 측실(側室) - 측복진(側福晉)(후궁)[16]
  • 천첩(賤妾) - 서복진(庶福晉)[17]
천총 6년(16332년), 중궁 대복진 아래에 동서궁 복진이 직책이 신설된다. 이 동서궁복진도 정실에 해당한다.

13.2. 숭덕제

숭덕원년에 기존의 동서궁복진을 재정립한다. 이들은 모두 정실이며 숭덕오궁이라고 부른다.
서열 배치
중궁(中宮) 황후(皇后)[18]
동궁(東宮) 신비(宸妃)[19]
서궁(西宮) 귀비(貴妃)
차동궁(次東宮) 숙비(淑妃)
차서궁(次西宮) 장비(莊妃)[20]

순치제 시기에는 후금과 숭덕제 시기, 강희제 이후 시기의 비빈 제도가 모두 섞여 있는 상황이었다. 비를 뽑긴 했지만 현비인 동악씨 외에는 책봉식을 치르지 않았다. 그 외에는 서비, 서복진, 격격 등이 존재했다.

순치제가 동서궁복진을 고친 동서이궁황비, 9빈 제도를 정했으나 시행되지 않았다. 또 동악비가 청 최초로 황귀비로 책봉되면서 황귀비 작위가 사용되기 시작했다.

13.3. 강희제 이후

강희 연간 초기까지 복진[21], 소복진, 귀격격[22], 격격 등의 서비가 있었으나 출신과 출산 여부에 따라 대우가 제각각이었다.[23]

강희 15년 효소인황후가 비의 신분, 효의인황후가 비급 격격으로 입궁하면서 비(妃)라는 품계가 다시 공식화되기 시작한다. 다음해, 효소인황후가 황후로 책봉되고 효의인황후가 귀비로 봉해지며 귀비라는 품계가 공식화되었다. 또한, 7빈을 책봉했다.[24]

강희 20년, 효의인황후가 황귀비로 책봉되면서 황귀비라는 품계가 다시 공식화되었고[25], 온희귀비가 귀비로 책봉되고 4비를 정하며 귀비와 비의 구분이 확정되었다. 이렇게 후궁이 동서십이궁으로 재편되었다. 그러나 후궁 품계가 완전히 정리되지 않았고, 책봉되지 않아 봉호가 없는 빈[26], 비급 격격[27] 등이 존재했다.
지위 작호 인원
정비(正妃) 황귀비(皇貴妃) 1인[28]
귀비(貴妃) 2인[29]
비(妃) 4인[30]
빈(嬪) 6인[31][32]
서비(庶妃) 귀인(貴人) 무제한[33]
상재(常在)
답응(答應)
관여자(官女子)[34]

옹정 시기부터 모든 비빈들이 귀인, 상재, 답응으로라도 품계가 있었다. 또한 강희제가 장성한 황자들을 낳은 비빈들을 위해 자신의 사후 출궁하여 왕부에서 지내라는 유지를 남겼으나 옹정 이후 선황의 비빈들은 출궁하여 왕부에서 지내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한다.[35]

순치연간의 황귀비는 부황후로 고안된 직책이지만 이후의 황귀비는 동악비만큼의 권위는 없었다. 그러나 황제들은 황귀비를 책봉할 때 신중을 기하여 귀비가 중병을 앓고 있을 때 위로하기 위해 진봉하거나 황후가 부재할 때 귀비를 황귀비로 진봉하여 다른 비빈과 함께 육궁을 관리하도록 하였다.[36]

건륭제 시기 들어 섭육궁사황귀비라는 직위를 설립했는데, 일반 황귀비의 차이점이라면 권한과 의전에 있어서 황후와 거의 같은 대우를 누렸다는 것이다. 황후가 공석일 때 황후의 권한을 대행하는 자리였다. [37]

강희제~옹정제 시기엔 한자 봉호를 사용했으나 건륭제 시기부터 만주어 봉호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효의순황후 위가씨가 영비일 때 한문 기록에선 令이라는 봉호로 표기했고, 만주어 기록에선 mergan이라는 봉호로 표기했다. 빈 미만의 후궁은 봉호를 받는 경우도 있으나 대부분 칭호를 사용하는데, 칭호는 만주어 기록에 의미가 표기되지 않고 음을 표기한다.[38] 봉호가 있는 귀인이 칭호를 가진 귀인보다 지위가 높다.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청 말기로 갈수록 조상 중에 청 황후나 비빈이 있었던 가문이나, 애신각라 씨와 인척[39]인 가문 위주로 황후를 선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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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대부인과 동의어로, 고려 조선에선 대(大)와 태(太)를 겸용했다. 왕족으로서 왕위를 계승한 조선 임금의 생모를 봉작한 작위인 부대부인의 어원이다. [2] 주례(周禮)에 따르면, 천자는 후 1인, 부인(夫人) 3인, 빈(嬪) 9인, 세부(世婦) 27인, 어처(御妻) 81인, 도합 121명의 후궁을 둘 수 있다고 되어 있다. [3] 수양제 이후로 원나라 이전까지 작위로서의 빈(嬪)은 쓰여지지 않는다. 9빈의 빈(嬪)이란 부인과 마찬가지로 아내를 뜻하는 단어로 쓴 것일 뿐, 빈(嬪)의 작위를 가진 9명의 여인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4] 배경이 된 혜종(원) 시기 재인이 추가되긴 했다. [5] 정1품 관원의 모친과 아내의 작위 [6] 송나라에서 정비(净妃)가 쓰여진 것은 단 한 차례로써, 인종의 폐황후 곽씨가 강봉되어 받은 작위이다. 따라서 송의 5부인에 정비는 포함되지 않고 귀비(貴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현비(賢妃), 신비(宸妃)만을 인정한다. 4부인을 칭할 경우엔 신비를 빼고 귀비, 숙비, 덕비, 현비만을 인정하는데, 이는 신비가 현비보다 먼저 등장했지만 이후 현비는 여럿 존재하였으되 신비로 봉작된 여성은 송 인종의 생모 장의황후 이씨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7] 조선의 원비(元妃)는 조선 임금의 첫 왕후의 지칭이다. [8] 금 선종 역시 원비(元妃)를 두었지만 즉위 원년(1213년)과 2년(1214년)에 이뤄진 것이다. 금 선종이 익왕으로 있던 시절 한꺼번에 3명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그 중 2명이 왕씨 자매이며, 나머지 1명이 방씨(훗날 진비)이다. 1213년에 황제로 즉위한 선종은 왕씨 자매 중 동생을 일단 원비(元妃)로 삼았다가 다음 해 정식 황후(인경황후)로 봉작했고, 이때 숙비로 있던 언니 왕씨를 원비로 올렸다. 훗날 이 원비 왕씨(언니)의 아들(1198년 生)이 황위에 올라 금 애종이 되어 원비 왕씨 역시 사후에 황후로 추존돼 명혜황후가 된다. 후비 작위의 재정비 후 원비 왕씨를 귀비로 개칭한 기록은 없다. [9] 금 선종은 후궁의 작위로 원비(인경황후의 첫 봉작, 명혜황후의 2번째 봉작), 숙비(명혜황후의 첫 봉작), 진비(방씨), 여비(사씨)를 썼고, 사실 상 금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금 애종은 황후 1인 외 가까이 한 궁인이 있었으나 정식 후궁으로 봉작하지 않았다. 이에 실제로 이 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10] 중국의 비(妃)는 작위이기도 하지만, 작위와 상관없이 후궁을 모두 아우르는 통칭이기도 하다. [11] 시호의 마지막에 남편인 황제의 신분을 의미하는 후호(后號)를 시호 마지막 글자에 더한다. [12] 현재 중국에선 명·청의 적후는 3글자의 시호에 황후를 붙여 소개하고, 서후는 2글자의 시호에 황후(혹은 황태후·태황태후)를 붙여 구별한다. 한국에서는 모두 3글자 시호에 황후를 붙여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의 왕후(2글자 시호+왕후)를 기준한 탓이다. [13] 고려와 조선 초의 사후 추증된 작위로서의 왕태후는 왕후보다 격이 높다. [14] 황후인 향씨가 죽자 총애하는 후궁을 새로 황후를 책봉하려 했지만 신하들이 "3년상을 마치라"고 반발해서 만들었다는 얘기가 있다. [15] 사관은 사칭(史稱)으로 대비(大妃)=대복진(大福晉), 계비(繼妃)=계복진(繼福晉), 원비(元妃)로 나누었으며 원비(元妃)는 적복진(嫡福晉) 중 처음 맞이한 아내를 뜻하는 말로 사용했다. [16] 사칭(史稱)은 측비(側妃). [17] 사칭(史稱)은 서비(庶妃). [18] 신비, 장비의 고모이기도 하다. [19] 효장문황후의 언니로, 숭덕제 홍타이지의 총애를 받았으며 죽고 난 뒤인 1641년 원비(元妃)로 존숭된다. [20] 청나라 제3대 순치제의 생모. [21] 복진은 이후 빈(嬪)으로 개정되고 정비로 인정되었다. [22] 귀인으로 개정되었다. [23] 몽골 과이심부 출신인 혜비(慧妃) 박이제길특씨는 생전에 복진급 격격으로 있으며 책봉을 기다리다 급사하여 사후 혜비로 봉해졌다. [24] 이후 6빈으로 개정된다. [25] 그러나 동악비처럼 황태후의 존호를 바치는 행사나 책봉 조서를 천하에 반포하는 일은 하지 않았다. [26] 양비 위씨, 경민황귀비, 순의밀비 왕씨가 이러한 케이스다. 이들은 책봉식을 치르지 않은 서비였으나 책봉받은 빈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27] 평비 혁사리씨, 선비 박이제길특씨, 각혜황귀비는 책봉되기 전 비급 격격이었다. [28] 책립식(冊立式) 거행, 금책(金冊)과 금보(金寶) 받음. [29] 금책(金冊)과 금보(金寶) 받음. [30] 금책(金冊)과 금인(金印) 받음. [31] 금책(金冊) 받음. [32] 원칙적으로는 한 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직책이지만 비빈이 많은 경우 빈 이상 후궁이 한 궁에 두 명 거주하는 경우도 있었다. [33] 금책·금인 X. [34] 상궁급 궁녀. 후궁인 경우, 궁녀인 경우 모두 존재한다. 궁녀의 경우는 지체높은 궁녀, 후궁일 경우 승은을 입었지만 궁을 배정받지 못한 궁녀를 의미한다. [35] 옹정제의 황위 쟁탈전 이후 반감을 품은 태비빈들이 궁에 문안을 오지 않아서 괘씸히 여겨(혹은 추후 분란이 될 수 있어서) 그랬다고도 한다. 순유근비 진씨와 순의밀비 왕씨는 강희제의 사후 출궁하지 못했는데 그들의 자식들은 어머니를 왕부에 모시기를 원했으나 옹정제는 완곡하게 거절했다. [36] 청 역사를 통틀어도 곧 황후가 되지 않거나, 황후가 공석 혹은 문제 상황이 아니거나 본인이 병석에 있거나 곧 사망하지 않으면서 오랫동안 황후 아래서 황귀비로 있었던 이는 동악비 뿐이다. [37] 계황후, 효전성황후가 이런 방식으로 황후가 되었다. [38] 칭호는 성씨나 아버지의 이름과 관련이 있다. 유귀비 가리엽특씨는 해가씨라는 성을 사용하기도 하여 봉호를 받기 전 해라는 칭호를 썼고, 악귀인 서림각라씨와 안빈 소완니과이가씨는 아버지의 이름을 딴 칭호가 붙여졌다. 칭호가 성씨, 아버지의 이름과 관련이 없는 경우는 본명이나 황제가 하사한 이름과 관련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39] 즉 방계와 라도 혼인 관계가 있는 왕비 이상 급의 출신이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