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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4년 동튀르키스탄 일대에 소련군이 침공하여 현지에 친소 군벌 정권을 세운 사건이다. 중국국민당 측은 소련과의 외교적 마찰을 피하느라 소련과의 전쟁을 피했고, 그 결과 소련에는 친소 성향의 성스차이 군벌 정권이 들어섰다.2. 배경
동튀르키스탄 일대는 러시아 제국령 튀르키스탄(서튀르키스탄)과 인접한 위치로 러시아 제국 측과 교류가 활발하였고,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상당수의 러시아 백군 난민들이 해당 지역을 통해 피난하면서 소련에서도 해당 지역을 주시하기 시작했다. 한 편 20세기 초반 신장성의 권력자였던 양쩡신은 실질적인 반독립세력을 구축하고 중국 국민당과 소련 사이에서 줄타기를 벌이다가, 이를 괘씸하게 여긴 국민당 측에 의해 암살당한다.이후 후임자로 들어선 진수런은 골수 중화주의자에 한족 우월주의자로 위구르인들을 열등인종 취급하며 심각한 수준의 탄압을 가했다. 위구르인들이 경작하던 토지를 한족 이주민들에게 무상으로 배분하고 위구르인 농민들을 쫓아낸 것은 물론, 기득권을 인정받던 위구르인 왕공들의 여러 권익들마저 임의로 축소시켰다. 한족 경찰서장이 위구르인 여성을 집적대다가 맞아죽는 사건이 벌어지자 진수런은 복수를 부르짖으며 사건과 관계가 없는 위구르인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며 심지어 항복한 반란군마저 잔혹하게 처형하는 등 행동으로 민심을 크게 이반시켰다. 이 상황에서 간쑤성과 칭하이성 일대의 후이족 군벌 중 하나인 마중잉이 신장성 일대로 쳐들어와 진수런을 몰아내고 신장성에 자리잡으려 시도하였다.
소련의 신강 침공의 배경에는 동튀르키스탄과 소련과의 지리적 인접성, 그리고 해당 지역에 개입한 후이족 군벌 마중잉 때문이었다. 마중잉이 디화(오늘날의 우루무치에 해당) 일대를 위협하자, 소련 측에서는 마중잉이 일본의 스파이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의심하고 일본이 해당 지역에 마수를 뻗치면 위험하다는 판단 하에 일단의 소련군을 파견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3. 전개
소련이 전차, 전투기, 그리고 겨자가스 등 화학무기를 사용하는 포병 등을 포함한 7,000명의 소련 OGPU 부대로 구성된 2개의 여단[1]이 마중잉이 이끄는 36사단에게 거의 궤멸당했던 성스차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소련군은 표식이 없는 제복으로 위장하여 전투를 치렀고, 마중잉과 같이 싸우던 장배원은 연이어 쿨자, 타르바가타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포로로 잡히지 않기 위해 자살했다. 소련군은 인력이나 기술 면에서 우세했지만, 심각한 사상자와 피해를 입었고 심지어 중국 무슬림 부대들이 약 30일 동안 진격을 저지하기도 했다. 이때 장제스는 소련의 침공에 맞설 경우 외교적 고립이라든지 국력차 등을 감안하여 이렇다할 대처를 하지는 못하였다.마중잉의 36사단은 결국 4월 6일에 카슈가르로 후퇴했고, 아크수시까지 성스차이의 군대에게 추격당했다. 그러나 점차 추격은 약화되었고, 마중잉은 마랄베시와 페이자와트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소련군과 맞섰다. 6월에 폭격이 계속되자, 마중잉은 카슈가르에서 호탄으로 이동할 것을 지시했다. 7월 4, 5, 6일에 마중잉이 호탄으로 진격한 후, 알 수 없는 이유로 국경을 넘어 소련 측으로 투항후 소식이 다시는 들려오지 않았다. [2] 결국 평화협정이 체결되었고, 신강 지역은 기존의 성스차이 정권과 남쪽의 퉁가니스탄으로 둘로 나뉘어졌다.
4. 결과
이후 동튀르키스탄 일대는 수년간 소련의 실질적인 지배를 받게 되면서, 소련의 여러 사회 제도 등이 도입되는데 이는 오늘날 동튀르키스탄 독립운동 및 위구르 민족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여담으로 소련군은 2차대전 당시 만주 일대에서 백계 난민들을 생포했을 때 총살하거나 굴라크에 끌고가는 경우가 많았으며 6.25 전쟁 당시 서울에 살던 백계 난민과 그 후손들을 모조리 굴라크로 끌고 갔지만 신장성의 백계 난민들은 당시 소련군을 지원한 대가로 총살이나 굴라크행을 면하는 등 후한 대우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