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9-23 10:38:07

수정의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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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lack><colcolor=white> 수정의 밤
독일어 : Kristallnacht(수정의 밤)
Novemberpogrome 1938(1938년 11월 학살[1])
파일:external/cdn.timesofisrael.com/Magdeburg-German-Federal-Archive.jpg
마그데부르크의 파괴되어 버린 유대교 상점
파일:external/www.yadvashem.org/photo03.jpg
불타는 유대교 회당
기간 1938년 11월 9~10일
위치
[[나치 독일|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
]][[틀:국기|
파일: 특별행정구기.svg
행정구
]][[틀:국기|
파일: 기.svg
속령
]]

1. 개요2. 배경3. 진행4. 유대인 말살의 시작5. 기타

[clearfix]

1. 개요

수정의 밤 당시 바덴의 부엘 마을을 찍은 영상[2]
"모든 유대인이 두드려 맞고, 쫓기고, 약탈당하고, 모욕과 굴욕을 당했다. SS는 유대인들을 침대에서 끌어내려서 무자비하게 유대인들의 아파트에서 그들을 때렸으며, 그리고 나서 ... 유대인들이 거의 죽으려고 할 때까지 쫓았다. 피가 도처에서 흘렀다."
1938년 11월 9일 밤부터 10일 새벽 사이 나치 독일에서 나치당원과 여타 독일인들이 독일 전역[3] 유대인 가게를 약탈하고 시나고그 방화한 사건. 당시 깨진 유대인 상점의 진열대 유리창 파편들이 반짝거리며 거리를 가득 메웠던 것에서 '수정의 밤(Kristallnacht, 크리스탈나흐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 배경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Bundesarchiv_Bild_146-1982-174-27%2C_N%C3%BCrnberg%2C_Ausweisung_polnischer_Juden.jpg
1938년 독일에서 추방되는 폴란드인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erschel_Grynszpan_nov_7_1938.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rnst-vom-Rath.jpg
총격 사건의 가해자 헤르셸 그린슈판
(Herschel Grynszpan)
총격 사건의 피해자 에른스트 폼 라트
(Ernst vom Rath)

독일에서 1933년 나치당이 집권하자마자 실행한 조치 중 하나는 공직에서 유대인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비록 유대인은 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고, 법계와 의료계는 점진적으로 폐쇄되었지만, 1938년까지 개인 사업은 거의 손대지 않은 채로 놔두고 있었다. 이때의 유대인 이민은 특별히 많이 생기지도 않았고, 현금제한조치는 유대인 뿐만이 아니라 비유대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유대인의 재산을 형편없는 가격에 팔도록 압박하는 개별 행위는 있었지만, 이러한 것은 대부분 시골에서 일어나는 일이었다. 물론 경찰이 이런 일들을 제지한 적이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나치 당국은 이런 일이 전국적인 부동산 가격에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는 동안에 유대인에 대한 나치당의 공격은 점점 더 강도가 높아졌다. 1935년 유대인과의 성관계를 금지하는 뉘른베르크 법이 발표되었고 반유대주의는 극심해졌지만, 그럼에도 유대인들은 오랜 박해에 대한 경험으로 이마저도 참아냈다. 베를린 공동체의 한 근본적 시온주의자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기도 했다. "어떠한 법 아래서도 삶은 가능하다. 하지만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허용되지 않는지를 완전히 모르는 상태에서 사람은 살 수 없다."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유대인들은 나치당과 잠정협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참지 못하게 만드는 사건이 결국 벌어지게 된다. 그 시작은 독일에 거주하던 외국 출신 유대인들을 무조건 추방하려는 나치당의 조치에서 시작되었다. 특히 폴란드 국적 유대인들의 강제 송환을 골자로 한 나치 독일의 유대인 추방 정책을 예의주시하던 폴란드 제2공화국 정부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오스트리아 영내에 살던 2만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이 귀국하지 못하도록 5년 이상 아무런 왕래 없이 외국에 거주하던 폴란드계 유대인들의 여권을 무효로 만드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 조치는 독일에 거주하던 5만 명의 폴란드계 유대인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이로 인해 더 이상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추방할 수 없게 되자 이때까지 이 문제를 담당하고 있던 외무부는 모든 책임과 권한을 비밀국가경찰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비밀국가경찰은 폴란드 측의 입장과 관계 없이 폴란드계 유대인들을 국경 너머로 내몰았다. 물론 폴란드는 이들의 입국을 거부했으며 폴란드는 독일한테 "자꾸 폴란드계 유대인들 추방하면 우리도 똑같이 독일인들 전부 추방한다"고 협박했지만 독일은 막무가내였다. 극한 상황에 처한 사람들은 편지를 보내서 자신들의 상황을 외부에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마침 프랑스 파리에 불법체류하고 있어서 화를 면했던 17세 소년 헤르셸 그린슈판(Herschel Grynszpan)[4]은 가족에게서 온 편지를 읽은 후 매우 분노했고 1938년 11월 7일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을 찾아가서 3등 서기관이었던 에른스트 폼 라트(Ernst vom Rath)를 권총으로 쏘았다. 라트는 치명상을 입고 병원으로 실려갔으나 9일에 사망했다.

3. 진행

그러나 사건은 이 소년의 체포로 마무리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은 곧 독일 전역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틀 후 라트가 사망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기 시작했다. 특히 이 사건을 확대시킨 주범은 괴벨스였다.

에른스트 폼 라트는 반나치주의 혐의로 게슈타포의 감시명단에 올라가 있었던 사람이었다.[5] 하지만 괴벨스는 라트가 반나치주의자였던 것에 딱히 관심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이득이었다. 괴벨스는 그토록 부르짖던 유대인의 독일인 위협론을 꺼내들었고 전국의 돌격대원들에게 라트의 복수를 부르짖기 시작했다. 물론 라트가 숨을 거두기도 전인 11월 8일부터 이미 전국적으로 유대인 회당과 상가, 자택에 대한 무분별한 테러 행위가 시작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장검의 밤 사건 이후 사실상 독일 지역의 정치깡패로 전락해 버린 돌격대였다. 물론 나치당 조직이 돌격대를 지원하였으며 언론들은 이 사건을 괴벨스의 가이드라인을 따라 과장하여 보도함으로써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폭력을 열심히 부추기고 있었다. 이 사건 이후 히틀러는 괴벨스와의 식사 자리에서 이 시위를 격화 시키기 위하여 경찰을 고의로 철수 시키도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수정의 밤 사건이 1938년 11월 9일에 본격적으로 발생했다. 뷔르거브로이[6] 맥주홀 폭동 15주년을 기념하여 뮌헨 구 시청에서 열린 공식 행사를 진행하던 중 이 소식을 접한 괴벨스는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피의 보복을 주장했고 곧이어 괴벨스의 명령은 말단 시군 조직까지 하달되었다. 그날 밤과 다음 날 새벽 독일 전역에서 수천 개의 유대인 상점이 파괴되었고 유대교 회당은 거의 대부분 불탔다.

수정의 밤으로 인한 유대인 사망자는 나치당 기관[7]의 "공식" 추정치에 따르면 91명이었다. 이것은 물론 최소 추산치다. 영국의 홀로코스트 학자 리처드 에반스(Richard J. Evans)는 자살한 유대인 300명을 포함해 2,000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다고 추산했다. 부상자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독일,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 시나고그(유대교 회당) 267개가 파괴되었고 유대인 상점 최소 7,000개, 백화점 29개, 그리고 유대인 공동묘지 다수가 손상을 입었다. 뒤이어 하인리히 힘러의 명령으로 약 3만명에 달하는 유대인 남성들이 체포되어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에 있는 강제수용소로 끌려갔고 몇 달 뒤에 풀려나기는 했지만 여기서도 500여 명이 추가로 살해되거나 병사, 자살했다.

또 독일 거주 유대인에게는 10억 마르크의 벌금을 부과하고 보상 보험을 몰수하여 수정의 밤에 피해를 입은 비유대계 사람들의 소유물을 변상하는 데 적용했다. 처음에 나치는 보험사들에게 유대인 가입자들에게 보험금을 지급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보험사들이 보험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자신들의 신용도 문제가 생긴다고 항변하자 방침을 바꾸어 보험사들은 규정대로 보험금을 지급하고 대신 지급된 보험금을 국가에서 몰수하는 쪽으로 방침을 바꾼 것이다.

4. 유대인 말살의 시작

이 사건을 계기로 독일에서 유대인을 박멸하자는 주장은 선전이 아닌 현실이 되어 버렸다. 히틀러가 묵인하고 괴벨스가 연출하여 자발성이라는 탈을 쓰고 조직적으로 행해진 수정의 밤은 유대인들에 대한 나치 독일의 조치가 이제는 확실하게 물리적인 폭력과 축출로 바뀌게 되었음을 확인시킨 사건이었다. 이전까지 나치당은 유대인에 대한 공개적 폭력과 조롱을 가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1933년 집권 이후 정권 안정화와 군사력 증강을 위해 길거리에서 갈색 셔츠단과 친위대의 공개적 유대인 폭행에 대한 독일 국민들의 불편한 눈치를 보아야 했고 유대인 문제에 대해 신경을 쓸 정도로 여유 있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유대인에 대한 불매운동과 추방, 점진적 권리 박탈 등이 진행되고 있었지만 수정의 밤 사건을 빌미로 국민들의 유대인에 대한 증오를 부추기는 데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말살 정책을 실행해도 된다고 판단해 방향성을 극단적인 방향으로 선회했다. 히틀러는 딱히 크리스탈나흐트 당시 별 다른 선동은 하지 않았지만 국방군과 경찰력으로 하여금 돌격대와 친위대원들의 폭력행위를 방조할 것을 지시했다.

유대인에 대한 격리 정책은 다윗의 별을 겉옷에 달게 하는 것부터 시작되었고 모든 유대인이 표식을 달고 다닐 때쯤 추방이 시작되었다. 나치 체제의 2인자인 헤르만 괴링이 1938년 10월에 열린 경제와 군비 확충 계획을 위한 회의에서 요청했던 것처럼 유대인 문제는 "모든 수단을 통해" 해결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사유재산의 완전 몰수 거지가 되어 버린 유대인들의 강제 이송, 그리고 이들을 잠정적으로 수용할 게토의 설치뿐이었다.

이런 조치들의 실행을 반대할 만한 세력은 독일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제가 있다면 나치 독일에서 누가 주도권을 쥐고 어떠한 방식으로 일을 추진하는가 정도였다. 사유재산 몰수는 포그롬이 아직 끝나지 않았던 11월 10일에 이미 확정되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발생할 이익을 둘러싸고 4개년계획부 장관으로써 국가를 대표했던 헤르만 괴링과 당을 대표했던 선전부 장관 파울 요제프 괴벨스 사이에서 갈등이 생겼다. 그러자 히틀러는 헤르만 괴링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와 더불어 포그롬 때문에 발생한 모든 피해에 대한 배상과 보상 책임은 유대인들에게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각 부처 장관과 관료들은 이에 동의했다. 곧이어 우선은 유대인 소유의 상점들이 그리고 공장과 회사들이 그들의 말대로는 "아리안화"되었다.

유대인 소유 사업체들은 싼 값으로 독일인들의 손아귀에 넘어가거나 해체되었다. 유대인들은 처분금조차 직접 관리할 수 없었다. 사업체를 처분한 대가로 받은 돈은 은행 계좌에 입금되었지만 그 계좌는 인출이 금지되었고 이후 국가가 몰수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파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들은 살기 위해서 갖고 있던 사치품과 보석들을 시중에 내다 팔아야 했고 당연히 정상가보다 헐값에 매매되었다. 유가증권 주식은 매매조차 금지되어 강제 기탁금 형태로 보관해야 했다. 관청들은 일자리를 잃은 유대인들 가운데 노동 능력이 있는 일부를 군수 산업과 기타 부문에서 값싸게 착취할 수 있었다.

5. 기타

  • 이 사건을 다룬 책 중 대한민국에 출간된 것으로는 <크리스탈나흐트-대학살의 전주곡> 등이 있다.
  • 반유대주의에 현혹되지 않고 유대인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 주려고 한 양심적인 사람들이 있었다. 물론 이들의 노력만으로 독일 전역의 유대인 박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상술했듯이 돌격대와 폭도를 막을 수 있는 힘은 오직 경찰과 국방군에 있었는데 이들은 개입금지를 명받은 상태였다. 아니 경찰력은 오히려 폭도를 돕는데 더 집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 한편 명분을 제공한 사건을 일으킨 헤르셸 그린슈판은 이후 교도소에 갇힌 뒤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나서 사람들이 그의 행방을 찾았지만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1960년에야 ' 1944년쯤에 교도소 측의 학대 및 질병으로 죽었으며 시체는 대충 파묻혔다'는 교도관들의[8] 대략적인 증언이 나오면서 1944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증언이 나온 해에 법원에 의해 정식으로 사망이 선언되었다.
  • 폴란드 국경으로 추방된 유대인들은 몇 달 후 폴란드 입국이 허용되었으나 1년 후 폴란드 침공이 터지면서 이들 중 대다수는 홀로코스트에 희생되었다.
  • 퇴위 후 네덜란드로 망명 가 있던 빌헬름 2세는 이 사건에 대한 소식을 접하고 "처음으로 독일인인 것이 부끄러워졌다"고 탄식했다.[출처1] 제위에 있었을 때도 그렇고 제위에서 물러난 후에도 공개적으로 카이저는 어떠한 논평도 하지 않았으나 내부적으로는 치를 떨며 영국의 메리 왕대비와의 서신 교환에서 깡패들의 난동, 볼셰비즘 그 자체라고 비난했다. 하지만 나치와 결탁하고 있던 황자들은 공개적으로 나치의 난동을 지지했다.(...)
  • 영화 책도둑에도 나온다. #
  • 수정의 밤 사건은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확립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히틀러가 집권하기 전만 해도 원래 유대인은 단순히 ' 유대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그냥 개종하면 끝이었고,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은 대다수의 유대인들도 무관심했을 정도로 비주류였다.[10] 그런데 아돌프 히틀러 반유대주의를 내세워서 집권한 이후에 뉘른베르크 법을 제정하고 수정의 밤 사건을 일으키면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확립되었고, 결정적으로 600만명의 유대인을 학살한 홀로코스트가 밝혀지면서 나라 없는 민족인 유대인들이 자기 민족들만의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시오니즘이 크게 지지를 받았고, 결국 이스라엘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히틀러가 내세운 반유대주의가 오히려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확립되고, 자신이 싫어하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건국하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1] pogrom( 포그롬) 자체가 폭동, 학살이라는 의미의 러시아어 단어에서 유래한 단어다. 현재 독일에서는 공식적으로 이 명칭을 많이 사용한다. [2] 친위대원들과 돌격대원들이 보이며 시나고그(유대교 회당)가 불타고 있다. 영상에는 안 나왔지만 유대인 상점들도 이미 공격받아 파괴된 상황이었다.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유대인들은 도합 70명 가량으로, 이들 중 대부분은 이후 남프랑스에 설치된 귀르스(Gurs)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학살되었다. 위 영상은 마을의 소방수에 의해 촬영되어 2000년대 와서야 발견되었다. [3] 안슐루스 뮌헨 협정으로 인해 독일 영토가 된 오스트리아 주데텐란트를 포함한다. [4] 그의 가족은 뉘른베르크 인종법 직후 독일을 탈출해 프랑스에 거주했는데 비슷한 시기 폴란드에서 자국 바깥에서 5년 이상 거주할 경우 시민권을 박탈하는 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졸지에 무국적자이자 불법체류자가 되었다. 이들은 서프로이센의 폴란드 편입 당시 정든 고향을 버리고 자신의 조국인 독일을 택했던 유대인이다. 폴란드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부터 유럽에서 유대인에게 가장 우호적인 곳이었으나 폴란드 독립 이후 폴란드 민족주의를 강조하면서 차츰 반유대주의 성향이 강해졌다. [5] 라트 자신은 돌격대에서 활동한 경력도 있고 나치당원이기도 했다. [6] 해당 맥주 브랜드는 같은 뮌헨 연고인 뢰벤브로이에 인수되었다. [7]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최고당재판소(Oberste Parteigericht der NSDAP). [8] 이들도 자세한 건 몰랐고 전해 들었다고 한다. [출처1] Our German Cousins: Anglo-German Relations in the 19th and 20th Centuries (1974) by John Mander, p. 219 [10] 1917년에 영국이 밸푸어 선언을 하기는 했지만 영국이 약속을 안 지킨 게 한 두 번이 아니라서(...) 안 지켰어도 그만이었다. 심지어 당시 영국 밸푸어 선언 전인 1915년에 이미 맥마흔 선언으로 이중계약까지 한 상태였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