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3-24 15:47:05

포그롬


1. 개요2.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
2.1. 영향2.2. 음모론
3. 폴란드의 포그롬

1. 개요

Погро́м / Pogrom[1]

포그롬에 대한 보편적인 정의나 엄격한 기준은 없다. 보통 좁게는 러시아 제국 및 동유럽에서 일어났던 반유대주의 폭동 학살 및 유대인들이 관련된 민족적, 종교적 충돌을[2], 넓게는 러시아 제국뿐만 아니라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일어났던 반유대주의 폭동과 학살(Ex: 1934년 트라키아 포그롬, 1941년 부쿠레슈티 포그롬)을 말하며 더 나아가면 그냥 홀로코스트와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결국 유대인에 대한 단순 우발적 폭력행위나 우연히 우대인들이 휘말린 사건부터 의도적이고 조직적인 학살까지 모두 포그롬으로 지칭하니 용어 사용에 주의해야 한다.

2. 러시아 제국의 포그롬

일반적으로 러시아사 최초의 포그롬이라 여겨지는 것은 키예프 루스의 1113년 키예프 반란이다. 다만 민족적, 종교적 이유보다는 정치적, 경제적 이유로 발생한 충돌에서 유대인들이 휘말린 것에 가깝다.

러시아는 원래 유대인이 많이 거주하던 국가가 아니었으나 폴란드 분할 과정에서 상당수의 아슈케나지 유대인 인구가 거주하던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지역을 손에 넣었다. 구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상공업의 진흥을 위해 유대인의 국내 이주를 장려하는 한편 농노들을 가혹하게 착취하였는데[3][4] 귀족들이 유대인에게 마름 일을 맡겼으므로 자연스레 유대인과 정교도 농민은 서로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최초의 직접적인 원인은 1881년 일어난 러시아 제국 제12대 차르 알렉산드르 2세 암살 사건 때문인데 알렉산드르 2세는 대표적인 개혁군주로 농노 해방과 서민들의 생활안정에 힘을 기울여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던 명망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유대인 1명이 암살자와 연관이 있다는 사실이 와전되어 암살자가 유대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러시아 제국의 200여개 마을과 도시에서 유대인들이 공격을 받아 인명 및 재산 피해를 입었는데 이것이 첫번째 포그롬이다.

원래부터 반유대주의가 강했던 농촌 주민들은 러시아 제국의 농노 해방과 뒤이은 산업화 과정에서 도시에 유입되면서 기존에 도시에 터를 잡고 있던 유대인들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특히 포그롬 중 키시뇨프(Кишинёв)[5]에서 일어난 피의 중상과 관련된 포그롬이 매우 잔혹했다. 이 사건은 당대에 굉장한 국제적 충격을 주었는데 테오도르 헤르츨 영국령 우간다 계획을 수립하고 클라라 렘리히를 비롯한 유대계 미국 노동운동가들은 이때 러시아를 탈출해 미국에 정착했으며 심지어 지구 반대편 기타 잇키 러일전쟁을 앞두고 러시아의 야만성을 규탄한 글에서 강동육십사둔 사건[6]과 함께 이 사건을 언급했을 정도였다.

당시 해당 도시는 유대인과 러시아인들뿐만 아니라 다양한 민족들이 살던 곳이었는데 반유대주의 성향의 신문 " 베사라비아인"이 1903년 3월 어떤 마을에서 피의 중상이 벌어졌다는 기사를 실었으나 이는 지방정부에 의해 반박되었다. 그러나 반유대주의가 고조되었고 이에 불안감을 느낀 유대인들은 대표단을 꾸려 베사라비아 주지사인 라벤에게 보냈으나 자신은 유대인들이 피의 중상을 저질렀다고 믿지 않으며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도 생각치 않다는 말뿐만인 답변만을 받고 돌아왔다.

4월 6일 부활절 첫번째 날 도시 광장들에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충돌이 있었고 이후 약 30분 만에 도시의 대부분이 무질서 상태에 빠졌다. 유대인 상점들이 파괴되고 약탈되었고 그 다음은 집이었다. 이를 보고받은 주지사 라벤은 군부대에 전보를 넣었으나 대부분의 장교와 일부 사병들은 부활절 휴가로 병영을 나간 상태였기 때문에 빠른 대응이 불가능했다. 때문에 저녁까지 폭동이 계속되었다가 식어갔으나 다음날 아침에 다시 재개되었고 최종적으로 낮에 소집된 군대가 거리에 진입하면서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군대는 폭동 진압을 위해서는 총기 사용 허가를 받았으나 군중은 군대를 보자마자 도망쳤기 때문에 실제 일어나진 않았다.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가 편찬한 유대 백과사전에 의하면 49명 사망, 586명 부상, 1500채 이상의 집이 훼손되었다. 반면 러시아 제국 공식 보고서에 따르면 42구의 시신이 발견되었고 이 중 38구가 유대인이며 이들은 몽둥이, 돌, 삽, 도끼 등에 살해당했고 총상은 없었다. 456명이 부상을 당했고 1350여 채의 가옥이 훼손되었다.

이후 대대적인 치안 강화령이 떨어졌고 800~1000여명이 폭력행위에 가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주지사는 해임되어 친유대인 성향의 세르게이 우루소프가 새 주지사로 임명되었고 경찰 고위간부들도 해임되거나 좌천되었다. 4월 24일 내무장관 플레베에 의해 황제가 모든 지방정부 책임자들에게 혼란을 종식시키기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성명서가 발표되었고 정부는 피해자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했다. 당국은 일부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돌렸으나 그들이 정식으로 기소되지는 않았다. 5월에는 유대인 거주구를 150여개 도시와 마을로 확대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사회에서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을 돕기 위한 모금 활동과 주동자들에 대한 비난이 있었다. 보수주의자 미하일 카트코프가 편집장으로 발행하는 시사잡지 루스키 베스트니크는 "분명히 그 일에 가담한 자들만이 아니라 예방하고 신속하게 막아야 했던 사람들도 역겹고 부끄러운 자들이다", 노보예 브례먀는 "최근 역사상 키시뇨프에서와 같은 포그롬은 존재하지 않았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는 것은 하느님께서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기사를 실어 비난했다.

그러나 해당 포그롬이 끝난 후에도 각 민족, 종교들 간의 충돌이 계속해서 이어졌고 한 해 동안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절도, 강도, 살인 사건이 급증하여 1000명 이상이 해당 혐의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반체제 성향의 변호사들은 이를 정치 투쟁을 위해 이용하고자 했다. 1903년 5월 영국 언론은 내무장관 플레베가 주지사에게 포그롬이 임박했으나 저지하지 말고 방관하라는 내용이 담긴 전보를 중간에 탈취했다고 기사를 썼고 이로 인해 러시아 제국 정부가 해당 포그롬을 주도했다는 비방이 일어났다. 당연하게도 탈취했다는 원본은 공개되지 않았고 혁명으로 제정이 무너진 후 위원회가 이를 조사했지만 증거를 찾진 못했다.[7]

2.1. 영향

포그롬이 일어난 결과 엄청난 수의 유대인 인구가 러시아 제국을 떠나 미국, 캐나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영국[8],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였다. 특히 미국으로 이주한 유대인 인구가 많았는데[9] 포그롬 이전 미국 유대인 인구 대다수가 네덜란드 출신 세파르딤들이었다면 19세기 말 러시아 유대인 이민이 폭증한 후에는 미국 유대인 인구의 90~95%가 아슈케나짐이었을 정도였다. 러시아 제국은 자국의 정교회 신도들이 미국이나 캐나다로 이민하는 것은 제한하였지만 유대인이나 가톨릭 신도[10]들은 제5열쯤으로 여겨 이민 비자를 쉽게 내 주는 편이었고 그 결과 오늘날 미국은 세계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많은 국가가 되었다.[11] 물론 이렇게 포그롬을 피해서 미국에 이주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우크라이나계 혹은 벨라루스계, 리투아니아계라는 자각이 없었고 이들은 자신들의 민족 정체성을 미국 유대인으로 정의하였다.

포그롬은 반유대주의를 재생산하기도 하고 포그롬에 희생된 유대인들 중 사회적 강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사회적 약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희생시키는 경우도 나타났다.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들은 이민 목적지로 미국이나 팔레스타인을 희망했지만 이스라엘 건국 이전에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독립 이전까지 생계난에 시달리는 경우가 많았으며 미국이라고 유대인들을 두 팔 벌려 환영해준 것은 아니었다.[12] 이런 상황에서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와 연계된 유대인 갱단들이 해외 이주를 희망하던 유대인들 중 미국 이민이 힘들었던 취약 계층 여성들을 대상으로 사기, 인신매매를 벌이곤 했는데[13] 이들에 의해 인신매매된 여성의 숫자는 15만여 명에서 22만여 명 사이로 추산된다. # 유럽에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갓 입항한 피해자들은 마치 중세의 노예 시장 비슷하게 자신들을 데려가려는 포주들 혹은 하인을 찾는 부유층들 앞에서 알몸으로 행진하며 치아의 상태 등등을 검사받아야 했고( 스페인어) 브라질의 유대인 사회에서는 이렇게 인신매매된 여성들과 같은 시나고그와 유대인 묘지를 공유하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이들은 자신들만의 시나고그에서 따로 예배를 봐야 했다. 한 편 남미에서 이루어진 유대인 인신매매 관련한 언급은 미국이나 브라질, 아르헨티나에서 반유대주의적인 목적으로 확대 재생산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자주 언급되지는 않는 편이다.[14]

같은 맥락에서 포그롬은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지의 민족주의 운동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쳤다. 특히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경우 외세의 압제가 오랫동안 이어진 이유로 자체적인 부르주아 민족문화 발전이 지지부진한 지역이었는데[15] 도회지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유대인과 농촌을 중심으로 거주하던 정교회 신도들이 서로를 증오하고 배격하는 상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추진력을 얻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러한 사례의 대표적인 예시로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주도했으나 나치와 협력하고 유대인 홀로코스트 동조 관련 논란이 있는 스테판 반데라, 유대인이지만 "우크라이나어는 러시아어의 방언에 불과하다."고 주장한 레프 트로츠키, 우크라이나인이었지만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장본인 중 하나였던 라자르 카가노비치 등이 있다. 포그롬이 활발했던 지역에서 유대인들과 정교회 신도들은 서로 남남으로 여기는 정도를 넘어 서로를 주적으로 삼아 증오하였다. 그 결과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북유럽/동유럽 국가 상당수[16]가 독립하는 가운데에서 포그롬이 심각했던 지역들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의 독립 달성에 실패하였고 그 여파는 제2차 세계 대전 과정에서 유대인 인구가 궤멸당한 오늘날에도 이어진다.

이러한 러시아 제국의 반유대주의 정책은 나중에 비수가 되어 돌아왔는데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제국에 앙심을 품고 있던 유대계 미국인 금융가 제이콥 쉬프가 일본의 전쟁 국채를 대량으로 매입하면서 일본의 승리와 제정 러시아의 붕괴 계기를 만들었다.[17]

2.2. 음모론

영국 신문에서는 경찰이 포그롬을 조직했다고 보도합니다. 거기서 그들은 허황된 이야기만을 반복합니다.
1905년 11월 9일, 니콜라이 2세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널리 퍼진 의견과 달리, 포그롬은 러시아에서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들은 1881–4, 1905–6, 1917–21의 세 거대한 흐름 속에서 나타났다. 1917년 혁명 이후의 내전기를 제외하면 모든 포그롬의 95% 이상이 1881, 1882, 1905, 1906의 4년 동안 일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널리 퍼진 의견과 달리 정부에 의해 조직되거나 어떠한 불확실하고 은밀한 개입으로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분명 경찰은 자주 느리게 대응하거나, 유대인 피해자를 보호하지 않거나, 심지어 폭동이나 포그롬에 공개적으로 동정심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많은 곳에서 경찰은 신속하게 행동하여 폭동을 진압하려고 시도했으며, 특히 1881년과 1882년의 흐름에서 자주 성공했다.
Albert S. Lindemann (eds), Richard S. Levy (eds), . 2010. Antisemitism: A History. Oxford University Press.
초기 역사서술의 대부분은 차르 사회의 모든 계층, 특히 고위 관리들 사이에 존재하는 노골적인 반유대주의 때문에 유대인이 학살의 희생양이 되었다는 견해를 수용했다. 그리고 훨씬 후에 연구자들은 이 첫인상을 수정했다. 실제론 포그롬은 러시아 남부의 특정 지역에 국한되었고 제국의 나머지 지역으로 퍼지지 않았다. 또한 폭동 계획에 고위 관리의 참여를 확증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실제로 많은 가해자가 처벌을 받았다고 주장되었다. 정권은 폭력의 원인을 조사하기 위한 위원회를 만들기까지 했다.
Jonathan Dekel-Chen(eds), David Gaunt(eds), Natan M. Meir(eds), Israel Bartal(eds). 2010. Anti-Jewish Violence: Rethinking the Pogrom in East European History. Indiana University Press.

러시아 제국 정부가 포그롬을 주도했거나 최소한 알면서 묵인했다는 설, 포그롬의 횟수와 규모에 대한 과장 등은 상당히 오래된 음모론이다. 차르 정부가 황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을 사회적 약자인 유대인들로 돌리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그롬을 일으켰다는 게 일반적인 내러티브다. 키시뇨프 포그롬 당시 서구 언론에서는 내무장관 플레베가 주지사 라벤에게 포그롬을 저지하고 말고 방관하라는 내용이 담긴 전보를 중간에 탈취했다고 보도하였고 아일랜드계 언론인 마이클 다비드 등은 '비밀 취재'를 통해 아이들은 고층 집에서 던져 죽였고, 시체를 토막냈고, 수십명의 여자들이 강간당했으며 범죄자들은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고 풀려났다는 식으로 보도했지만 이는 근거 없는 소리였다. 아이러니한 점은 포그롬의 선동자들은 러시아 제국 정부가 유대인들을 편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이다.

200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이러한 서술을 반복하는 학자들이 적지 않았지만 이후에는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면서 반유대주의적 정서나 정책을 강조하는 학자들조차도 정부와 포그롬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주장하지는 않으며[18] 당대 야당, 반체제, 혁명인사들의 선전과 그걸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서구 언론들의 영향으로 인한 선입견과 음모론으로 해석한다. 동유럽 유대인사의 권위자인 존 클리어는 당국이 포그롬을 선동하거나 허용했다는 주장은 처음부터 근거가 빈약한 역사적 신화(Myth)에 불과하며 포그롬 자체가 동유럽에서 흔한 일도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포그롬 신화가 학술 및 대중 문헌에 너무 깊숙히 자리잡고 있어서 이를 바로잡는 것이 어렵다고 지적했다.

물론 동유럽과 러시아 제국이 전통적으로 반유대주의 정서가 강했고 일반 서민들이나 말단 경찰, 관료들부터 고위 정부인사들까지 이를 공유했으며 개개인이 가담하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대인들에 대한 공공연한 폭력행위가 흔하게 일어나는 건 아니었고 정부는 이를 억제하려고 했다. 직접적인 원인은 중앙정부의 지방에 대한 낮은 통제력, 자본주의화로 인한 빈부격차의 증대, 혁명과 반혁명 충돌로 인한 사회 혼란 증대, 치안력과 공권력의 약화였다는 것이다.

애시당초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은 직접적인 인과관계에 있지 않다. 유대인에 대한 적대감이나 차별의식이 있는 것과 그들에게 폭력 행위를 하는 건 엄연히 다른 의미고 실제로 반유대주의자들이 포그롬을 비난하는 것도 일반적이었다. 오히려 포그롬은 전쟁, 흉년, 전염병 등 여러가지 사회 및 자연적 악조건이 격화시킨 실질적인 이해 관계의 충돌이 원인이었다. 비슷하게 러시아 제국이 건재할 당시의 포그롬은 부유한 유대인에 대한 우발적인 폭력행위와 재산 파괴가 주된 내용이었다. 민족, 종교보다는 계급 충돌의 성격이 더 강했다는 것이다.[19]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조직적인 인종학살로서의 포그롬은 세계대전-혁명-내전 기간의 일이다.

아이러니한 점은 계획된 민족 학살로서의 포그롬 음모론 의혹을 최초로 제기한 쪽이 러시아 제국 정부의 고위 인사들이었다는 점이다. 이쪽은 혁명가들이 제국 체제를 뒤흔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민족적 충돌을 야기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를 표했다.

3. 폴란드의 포그롬

전통적으로 유대인에게 관대한 편이었던 폴란드에서도 민간의 반유대 정서로 인해 포그롬이 발생했다. 유명한 사례는 1941년에 예드바브네[20]에서 발생한 예드바브네 포그롬과, 1946년에 키엘체에서 발생한 키엘체 포그롬이다.[21]

예드바브네 포그롬은 독일 군경의 방관을 등에 업고 폴란드인이 일으켰고, 키엘체 포그롬은 나치가 패망한 뒤에 일어났다. 민주화 이후에도 폴란드에선 제2공화국 연간 및 나치 점령기의 반유대 정서에 대해 쉬쉬하면서 유대인을 도왔던 폴란드인의 선행만 강조하는 중이며, 2018년에는 당시 여당인 법과 정의의 주도로 폴란드인이 홀로코스트에 가담한 사례를 말하면 폴란드 법에 따라 처벌할 수 있다는 조항을 국가적 추모에 대한 법에 추가했다.
[1] 학살, 혹은 파괴를 의미하는 러시아어. [2] 이게 기준이 애매하다 보니 유대인과 관련 없는 민족, 종교 분쟁에 우연히 유대인들이 휘말려서 피해를 입은 것도 포그롬으로 지칭되는 경우가 있다. [3]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귀족은 거의 가톨릭 신도였고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지역의 농노들은 정교회 신도들이 많았는데 귀족들은 정교회 농노들과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유대인에게 마름일을 맡기는 편이었다. 비슷한 케이스가 이베리아반도의 알안달루스에서도 있었는데 무슬림 지주들이 가톨릭 농민들과 직접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마름 일 같은 미움받는 일을 유대인들에게 대신 맡겼다. [4]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동부 영토는 인구 밀도가 낮았기 때문에 대규모 도시가 발달하지 못해 상공업의 수익성이 낮아 서유럽에서 배척받던 유대인들이 상공업에 종사하였다. 이윤이 많이 남는 대외무역에서는 주로 폴란드 내 독일인과 네덜란드인, 아르메니아인, 카라임들이 이익을 보았다. [5] 현 몰도바 수도 키시너우(Chișinău, kiʃiˈnəw) [6] 아이훈 조약 당시 아무르강 좌안에 이미 형성된 중국인 공동체에 대해서는 청나라의 행정권을 인정했는데 의화단 사건 때 러시아군이 만주를 강점하는 과정에서 그간 걸리적거리던 중국인 정착촌을 이참에 쓸어 버렸던 사건이다. 중국인들이 최소 3천 명 학살당했다. [7] 다만 라벤이 해임되고 새로 주지사로 임명된 세르게이 우루소프(훗날 국가 두마 의원이 된다)도 내무장관 플레베나 주지사 라벤이 포그롬을 의도적으로 일으켰다는 것에 대해 조사한 것처럼 제국 정부에서도 내부의 고위인사 중 반유대주의자가 포그롬을 주도했다는데 어느 정도 가능성을 두고 파헤치긴 했다. 단지 그랬다는 확실한 증거는 찾지 못했지만. 훗날 우루소프는 플레베가 개인적인 반유대주의 때문에 포그롬을 일으킬 정도로 멍청한 인물이 아니며 그럴 만한 반유대주의자도 아니었다고 지적했다. [8] 대표적으로 라트비아의 이사야 벌린이 있다. [9] 자세한 내용은 미국 유대인,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벨라루스계 미국인 문서 참조. [10] 주로 폴란드계 러시아인 [11] 러시아 제국 입장에서는 유대인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독일인이나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금새 메꾸어 주었기 때문에 별 타격은 아니었다. 애초에 동유럽에서 상업 기반이 가장 탄탄했던 것은 유대인이 아니라 독일인이었던 것도 있고 포그롬으로 유대인 인구가 대거 빠져나가던 시점에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 인구가 오스만 제국이나 카자르 왕조에서 러시아 제국으로 이주해 왔다. [12] 오늘날 미국에서 친유대주의 분위기가 형성된 것은 2차대전에서의 미국의 승리와 홀로코스트의 공론화가 이루어졌던 후였다. [13] 이들 갱단들은 포그롬이 더 심화될 것을 우려하여 해외로 인신매매될 사람들은 같은 유대인 여성들 그중에서도 농촌의 빈곤 계층을 주로 노렸다. [14] 참조 참고로 아르헨티나의 유대인 인신매매 조직이 소탕되던 1930년대는 아르헨티나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고 외국인 이민을 제한하려던 시점이기도 했다. 한 편 당시 즈비 미그달의 소탕을 보도하던 아르헨티나 언론은 "이른바 고기 시장이 호텔 팔레스티나, 카페 파리지엔이라는 장소에서 열렸다.", "부패한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다 한 통속으로 인신매매를 방조했다.(다시 말해서 이런 놈들은 쿠데타로 쓸려나가도 할 말 없다.)"라는 식의 기사를 싣곤 했다. [15] 대표적인 우크라이나인 문호 니콜라이 고골은 러시아어로만 작품을 썼다. [16] 핀란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폴란드 [17] 쉬프는 이후에도 레닌 트로츠키에게 각각 2,000만 달러의 자금을 제공하여 러시아 혁명을 지원했다. [18] 상당히 오래 전에 작성되고 관련 분야 전반에 보수적인 관점을 고수하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만 봐도 반유대주의와 정부 정책이 그러한 토양을 만들었다고 지적하면서 간접적인 원인 제공을 했다고 하지만 "널리 믿어지는 바와는 달리 러시아 중앙 정부가 포그롬을 조직하지는 않았다(The Russian central government did not organize pogroms, as was widely believed)"고 기술한다. [19] 실제로 당시 주미 러시아 대사를 지냈던 아서 카시니는 1903년 5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그것은 러시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상대로 한 것이 아니라 농부들이 대부업자들을 상대로 한 것이다. 러시아에서는 유대인에 종교로 인한 대한 감정이 없다. 내가 말했듯이, 유대인은 소작농을 망치고, 그 결과 소작농이 모든 세속적인 재산을 잃고 살아갈 것이 없을 때, 분쟁이 일어난다. 러시아에 선량한 유대인들이 많이 있고 그들은 존경받고 있다. 유태인의 천재성은 러시아에서 인정받고 있으며, 유대인 예술가는 명예를 얻고 있다. 유대인들은 러시아의 금융계에도 나타난다. 러시아 정부는 자국 국민과 마찬가지로 유대인을 보호하며 폭동이 일어나 유대인이 공격을 받으면 즉시 폭동을 일으킨 사람들을 체포하고 엄벌을 가한다." 출처: Current Literature: A Magazine of Contemporary Record (New York). Vol. 35., No.1. July, 1903. Current Opinion. V.35 (1903). [20] 지금의 포들라스키에 주에 위치한 도시. 포그롬 당시 독일에 병합됐다가 독일 패망 후 폴란드가 되찾았다. [21] 키엘체에선 1918년에도 포그롬이 한 번 일어났는데 1946년 포그롬의 인지도가 더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