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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가 있는 민족만 서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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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실베이니아의 우크라이나 민속 축제 |
맨큐의 경제학의 저자 그레고리 맨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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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은 미국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인 또는 우크라이나인 후손들이다. 미국내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인 97만여 명2009년 기준으로 우크라이나계 미국 유대인 인구를 제외하면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 인구보다 적은 편이다.2. 역사
우크라이나인들의 본격적인 미국 이주 역사는 18세기 말 폴란드 분할 이후로 시작되었다. 19세기에 서부 갈리치아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 지역이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을 당시에,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당시 주어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대폭 축소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했는데 그 여파로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반대로 서부 갈리치아 일대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 극악한 농노 착취가 그대로 이어졌고, 빈곤과 기근에 시달리던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상당수가 캐나다로 이주했으며, 일부는 미국 북동부 지역으로 이민하였다.당시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들로 분류되는 경우가 흔했고, 이들 우크라이나인들은 러시아인의 일부로 미국에 이주했다. 다만 캐나다와 다르게 우크라이나계 이민자 중에는 유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오늘날 미국 유대인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이민해 왔으나 이들 대다수는 스스로 우크라이나계라는 정체성이 없으므로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통계에는 잘 포함되지 않는다.[1] 이를테면 밥 딜런 같은 경우가 있다.
이 외에도 흑해 독일인들도 포함되었다. 러시아 제국내의 유대인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정부의 유대인 박해로 인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우가 많았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소련이 출범하자 우크라이나 본토에서 직접 이주한 경우는 적었지만, 폴란드나 다른 유럽국가들을 통해 미국으로 이주한 경우는 많이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된 뒤, 우크라이나와 미국은 공식 수교했다.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에 남아있던 유대인이나 개신교 신도 상당수가 미국으로 추가로 대거 이민하였다. 2016년 통계 조사 결과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중 34만 5천여 명은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나왔다.
또한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이 영 안 좋기 때문에 소득수준이 훨씬 높은 미국으로 이주를 희망하는 우크라이나인들이 늘고 있다. 다만 미국으로 이민하는 경우는 체스 선수, 스포츠 스타, 유명 배우, 유명 피아노 연주자 등등에 한정되는데, 이는 미국이 근로 소득은 높아도 서유럽/ 북유럽에 비해 공교육과 의료보험, 복지 제도가 영 좋지 않은지라 일반적인 우크라이나인들 입장에서 리스크가 상당히 크기 때문이다.[2] 다만 이민 인구가 10만여 명(주로 유대인) 이상 증가한 것은 사실이라 2018년 기준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인구는 1백만여 명을 넘었다고 한다.
소련 해체 후 우크라이나계 러시아인이나 우크라이나 내 러시아어 사용자(우크라이나 동부·남부 출신)[3]가 미국으로 생계형 이민을 하는 경우도 생겨났는데, 이들은 일반적인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과 달리 러시아계 미국인에 묻어가는 경향이 강하다. 이들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지는 블라디미르 푸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침공 후에는 전쟁 장기화 등의 영향으로 미국 외에도 다른 나라로 망명을 가거나 정착하려는 난민들도 조금씩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3. 문화
3.1. 종교
대니네 동네에는 그의 아버지의 추종자들, 즉 칙칙한 옷을 입은 러시아 하시드파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관습과 인식은 그들이 버려두고 온 땅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사모바르에 차를 끓였고, 각설탕을 입에 물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먹었으며, 때로는 러시아어 때로는
이디시어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 / 체임 포톡 저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 / 체임 포톡 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지역은 근세 유대교 하시딤파의 본산이었다.[4] 폴란드-리투아니아가 폴란드 분할로 멸망하고 우크라이나 중부 지역까지 장악한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 리투아니아와 다르게 유대인들을 박해하였으며, 우크라이나 현지인들의 불만의 화살을 평소에 서로 사이가 나쁜 유대인들에게 돌리는 일이 많았다. 상술한 것처럼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우크라이나에서 포그롬( 반유대주의 유혈 폭동)이 빈발하자 많은 유대인들이 미국 이민을 택했다. 오늘날 미국 유대인 인구 가운데 92% 이상이 아슈케나짐 유대인인데 이들 중 상당수가 우크라이나 출신이기도 하다. 물론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미국인들은 이들을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취급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은 현지의 반유대주의를 피해 이주한 경우이니만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는 척을 진 상황이었다. 미국 유대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지만, 이들에게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5]
자신을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으로 규정하는 인구의 상당수는 정교회,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고 있다. 미국 내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세는 4만여 명에 달하며 신도 수가 이민에 힘입어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물론 우크라이나 출신 미국인의 대다수는 엄연히 아슈케나지 유대인들로 유대교를 믿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 미국에서는 우크라이나 출신 이민자들의 이민 비자 발급을 대단히 까다롭게 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에 같은 유대인 친척이 있다는 것이 증명되지 않는 이상 아니면 이민이 매우 힘들다고 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이주한 우크라이나계 유대인들은 우크라이나인 정체성 대신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정체성이 훨씬 강한 편이었지만, 소련 붕괴 이후 미국으로 이주한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소련 시절 교육의 영향 등으로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외에도 우크라이나인이라는 정체성도 강한 편이라고 한다.
3.2. 언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반 이주한 우크라이나계 후손들의 경우 대부분 영어만 사용하는 편이다. 일부 정통파 하시딤 유대인들 중에서는 미국 내에서도 가정 내 일상 용어 및 예배 언어로 이디시어 사용을 고집하는 경우도 있다. 폴란드계 미국인들의 경우 이민 2~3세대들 중에서도 폴란드어 구사가 가능한 인구가 적지 않은 반면[6]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중에서는 2~3 세대가 지나면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를 잘 구사 못하는 편이라고 한다. 미국 내 일부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 커뮤니티에서는 미국 내에서도 우크라이나어를 보존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는 있다.1874~79년 사이 흑해 북부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독일계 후터파 신도들의 경우 평상시에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예배 및 가정 생활에서 후터파 고지 독일어 방언(Hutterisch)을 사용한다고 한다.
3.3. 리틀 우크라이나
시카고는 슬라브계 이민자들이 대거 정착한 도시 답게 우크라이나 국립 시카고 박물관, 우크라이나 현대 미술관을 중심으로 우크라이나계 빵집, 레스토랑, 상점이 있던 것으로 유명했다. 시카고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성당이 두 개 들어서있는데 하나는 20세기 초반에 또 하나는 1960년대 들어섰다. 이 외에도 우크라이나인 정교회 신도들을 위한 정교회 성당도 하나 있다.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는 그레고리력을 따르고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율리우스력을 따르기 때문에 같은 도시의 우크라이나인들이 종파에 따라 기념하는 휴일이 서로 조금씩 다르다.뉴욕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 리틀 우크라이나라는 이름의 우크라이나인 구역이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문화 박물관을 중심으로 8만여 명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들이 거주한다고 한다.
맨해튼 외에도 브라이턴 비치에는 1970년대 이후 이민 온 우크라이나계, 러시아계 유대인 이민자들이 밀집 거주하는 리틀 오데사도 있다.
4. 인물
- videogamedunkey
- 그레고리 맨큐 - 미국의 세계적인 경제학자로 우크라이나어로는 흐리호리 만키우로 불린다. 흐리호리 만키우로도 검색 가능하다.
- 나탈리 포트만
- 니콜 셰르징거
- 데이빗 커퍼필드
- 레니 크래비츠
- 밀라 요보비치
- 밀라 쿠니스
- 발렌티나 리시차
- 베라 파미가
-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 에버 앤더슨
- 잭 팰런스
- 조이 크래비츠
- 칼 세이건
- 타이사 파미가
- 폴 무니
- 해럴드 블룸
- Nikocado Avocado
- Proko
5. 관련 문서
[1]
레프 트로츠키나
우크라이나 대기근의 핵심 장본인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
라자르 카가노비치도 우크라이나계 유대인이었다. 당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은 서로 상성이 매우 안 좋은 편이었다.
[2]
이들 입장에서 좀 더 선호되는 이민 목적지로는
스웨덴,
독일,
영국 등이 있다. 우크라이나 본국에서 거리도 훨씬 가깝다는 이점도 있다.
[3]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화된 토착 우크라이나인을 모두 포함한다.
[4]
이들 하시딤파 유대인들은 리투아니아와 벨라루스 일대의 리트박 유대인들과 종교 전례 및 해석 차이로 대립하는 관계였다.
[5]
다만 소련 해체 이후 이주해온 유대인들의 경우에는 우크라이나계 정체성을 부정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6]
애초에 폴란드계 미국인 인구 규모는 900만여 명에 달하고
시카고를 중심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미국 내에서도 폴란드 문화를 지키기 유리한 입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