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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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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초4. 중세5. 근세
5.1. 폴란드-리투아니아5.2. 코자크 헤트만국
6. 근대
6.1. 러시아 제국6.2. 오스트리아 제국
7. 현대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7.2. 소련의 통치
7.2.1. 현대 우크라이나의 형성
7.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소련 붕괴7.4. 러시아와의 갈등

1. 개요

우크라이나 역사는 키예프 공국에서 시작되어 현대의 우크라이나 독립(1991년), 그리고 오렌지 혁명 유로마이단까지 설명한다.

2. 고대

고대 그리스인 역사가들이 보리스테네스 강이라고 불렀던 오늘날의 드네프르 강 유역은 동유럽의 대표 평원지대이다. 고고학자들에 따르면 기원전 3300년경부터 본격적으로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는 종족들이 나타나 모계 사회를 가진 원주민들을 정복하며, 정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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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무렵 스키타이족이 이 지역의 원주민인 킴메르족을 몰아내고 정착했다. 때마침 고대 그리스인들도 기원전 8세기부터 흑해 연안에 여러 식민 도시[1]들을 건설하면서 이 지역과 교역을 하게 되었고,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에 정착한 스키타이인들에 대한 역사 기록을 남길 수 있었다. 흑해 해안가에 식민 도시들을 건설한 그리스인들은 이들에게 올리브와 포도주가 담긴 항아리를 팔고, 밀을 구입해서 식량이 부족했던 아테네에 수출하였다. 그리스산 물산은 스키타이족에게 매우 인기가 있었는지 오늘날의 키이우, 하르키우, 폴타바 등에서 그리스 도자기들과 그리스 드라크마 화폐가 발굴된다고 한다. 경우에 따라서 보리스테네스 강 유역의 스키타이인이 노예로 붙잡혀 아테네로 팔려가는 일도 생겼는데, 아테네인들은 이들 스키타이인들이 유달리 피부가 희다고 기록했다.[2]

기원전 3세기 무렵부터 스키타이족이 같은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인 사르마티아인, 알란인에게 밀려나 몰락하면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그리스인들이 흑해에 세운 식민 도시 상당수가 파괴되었다. 흑해의 그리스인들은 보스포로스 왕국을 중심으로 힘을 합쳐 흑해 무역을 지속하고, 유목민들의 침입을 격퇴하였다. 보스포로스 왕국은 중간에 폰토스 왕국 미트리다테스 6세에게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최종적으로는 로마의 속국으로 자리잡았다.

서기 3세기 무렵에는 드네프르 강 일대에는 새로이 게르만계 고트족들이 이주하기 시작했다. 비옥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서 세력을 키운 고트족이었지만, 새로이 아시아 초원에서 나타난 훈족의 침략을 받자 이들 대다수는 다시 드네프르 강 평야를 버리고 난민 혹은 침략자가 되어 당시 쇠퇴기에 접어들었던 로마 제국으로 이동했다. 훈족 역시 이후 몰락했기 때문에 뿔뿔이 흩어져버리자 공백지가 되다시피 한 드네프르 강 유역에 슬라브족들이 대거 이주했다.

파일:Slavic_peoples_6th_century_historical_map.jpg

4~5세기 서로마 제국의 쇠퇴와 멸망 이후 게르만족 서유럽 쪽으로 이주하고 그 사이에 고대 슬라브족인 베네디족(웬드족), 스클라베니족, 안테스족이 게르만족의 빈자리를 점거하며 중유럽과 남유럽으로 진출하였다. 그리고 스클라베니족은 슬라브라는 이름의 기원이 된다.

한편 드네스트르 강과 드니프로 강 유역 및 아조프 해 연안에 이르는 오늘날의 우크라이나에 해당하는 땅에는 얀테스족이 이주해서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 알란족, 사르마트족과 섞여 살았다. 그리고 이미 이곳에 정착해 있었던 이란계 백인 유목민족들이 슬라브 민족과 통혼하여 혼혈화하면서 슬라브 문화에 동화되었고, 이들이 우크라이나인의 시조가 되었다. 6세기의 동로마 제국 역사가인 프로코피우스 아바르족의 지배를 받는 슬라브족들은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고 이방인 손님들을 환대하며, 성격이 유쾌하다고 기록했다.이때도 동유럽 특유의 술에 찌든 호탕함이 있었나보다

3. 중세 초

파일:East_Slavic_tribes_peoples_8th_9th_century.jpg

7세기 말부터 이 지역을 장악한 튀르크계 하자르 칸국은 이전에 우크라이나에 들어왔던 훈족이나 아바르족과는 다르게 일방적인 파괴와 노예화는 지양하고, 슬라브족들과 비교적 평화롭게 교역하였다. 이들의 전임자였던 아바르족들이 기회만 되면 동로마 제국에 슬라브족들을 이끌고 쳐들어갔던 것과 다르게 하자르 칸국은 흑해와 카스피해의 무역 거점들을 안전하게 유지하는데 신경을 썼다. 흑해 연안과 카스피해 연안은 200년 가까이 '팍스 하자리카'를 누렸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슬라브인들은 꿀과 밀랍으로 세금을 납부했다. 하자르 칸국의 지배층인 아크 하자르인들은 혈통상으로는 슬라브인과 거의 동화되어 밝은 색의 머리와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으며, 유대교로 개종했다.

모든 슬라브가 카간을 자칭한 것은 아니었지만 '카간'이라는 단어가 쓰이지 않았던 930년경 이전까지는 확실히 '카간'이라 칭하는 슬라브족들이 아랍 페르시아 사서에 남아 있었다. 노르드계 바이킹들이 여러 지역에 흩어지면서 무역, 약탈 기지들을 개척했고, 이러한 과정 중에 바이킹들의 분파인 바랑인( 루스)들이 세운 루스 카간국 노브고로드에서 키예프로 거점을 옮기면서 키예프 공국이 나타났다.

3.1. 키예프 공국

류리크가 지금의 러시아 벨리키 노브고로드에서 류리크 왕조를 세우고, 류리크 이후 제2대 대공에 오른 바랑인 올레그가 882년 지금의 우크라이나 지방을 정복하고 중심지를 이 곳으로 옮겨 키예프 공국을 세웠다. 이 나라가 우크라이나의 시초다. 이 키예프 공국은 동슬라브 3국의 정체성이 구별되기 전에 존재했던 나라로 러시아 역사의 시초이기도 하므로 러시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는 본래 한 뿌리였다. 당시 키예프 루스인들은 겨울철에 오늘날 러시아, 벨라루스에 속한 삼림 지역에서 벌목을 해서 만든 목재로 작은 배를 만들어 각기 특산물을 가지고 드니프로 강과 그 지류를 배를 타고 내려가 먼저 지류가 모이는 키예프로 집결한 후, 강을 따라 함께 흑해로 내려갔다. 키예프에서 집결했다가 한꺼번에 내려가는 이유는 튀르크계 페체네그족의 약탈과 습격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바랑인 스뱌토슬라프가 이끄는 키예프 공국이 10세기 사이에 하자르 칸국을 쳐부수고, 장악하던 흑해와 북유럽을 잇는 하천 교역로를 정복하였다.

이 시기, 키예프 루스를 구성하던 공국들은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동로마 제국의 명군인 바실리오스 2세 재위 시절 키예프 공국의 볼로디미르 1세는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정교회를 받아들였다. 이는 유대교를 믿은 하자르 칸국이나 이슬람을 믿는 불가르족,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 왕국[3]같은 이웃 경쟁자들과 키예프 공국을 차별화하려는 의도였다. 9세기 동로마 제국의 슬라브족 출신 선교사 키릴로스와 메토디오스 형제가 대 모라비아 왕국 불가리아 제1제국에 선교를 하면서 만든 키릴 문자가 나중에 키예프 루스에도 도입되었다. 이 시기의 키예프 공국은 드니프로 강을 중심으로 스칸디아비아와 흑해를 잇는 교역을 바탕으로 상공업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아바스 칼리파조와 동로마 제국에서 직수입한 문물을 통해서 서유럽보다 더 발전된 문화를 자랑했다. 불가리아어를 바탕으로 한 교회 슬라브어로 중세 초부터 중세 말까지 러시아의 연대기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키예프 공국은 체계적인 세금 징수 시스템이나 행정 시스템이 잡혀있지 않았으며, 안정되지 않은 공위 계승권 문제로 잦은 내분에 시달리고 있었다. 중앙집권은 커녕 공위 계승권이 안정되지 않았기에 공위 계승권자들이 서로 다른 도시를 다스리며 내전을 벌이는 일이 흔했고, 흑해 연안의 페체네그인, 쿠만인들과 같은 유목민들과 지속적으로 힘겨루기를 하는 과정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할 수가 없었다. 종종 야로슬라프 1세가 페체네그족 침략자들을 궤멸시키거나 블라디미르 모노마흐 같은 유능한 지도자들이 나타나 루스를 재결합할 때도 있었지만, 흑해와 스칸디나비아를 잇는 교역로가 쇠퇴하면서 국운이 기울기 시작했다. 키예프가 위치한 드니프로 강 일대의 비옥한 흑토 지대는 키예프 공국이 강성하던 당시에는 플러스 요인이었겠지만, 탁 트인 평야 지대인 특성상 유목민으로부터 방어하기 힘든 위치였다.

파일:KievanRus.jpg

십자군 전쟁 이후 아크레, 야파 같은 십자군 도시들과 베네치아, 제노바 같은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직거래를 시작한뒤 흑해 무역이 쇠퇴하였고,키예프 공국은 전사집단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줄 수 없어 군사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1240년 몽골 제국 바투 칸이 이끄는 서방 원정군이 쇠락한 키예프 루스를 대대적으로 침공해 키예프 전투가 일어났다.[4] 몽골군의 막강한 군세에 결국 키예프는 처참히 함락당했고 키예프를 비롯한 도시 대부분이 말 그대로 지워지고 말았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50만 명 이상의 루스인들이 몽골인의 침략 과정에서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5] 멀리 북쪽의 노브고로드 공국 이외의 주요 키예프 공국 도시들은 씻을 수 없는 타격을 입었다.

4. 중세

4.1.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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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2~1223년부터 개시된 몽골의 침략 결과 수즈달, 리야진(랴잔), 키예프 등이 차례로 함락되면서 키예프 루스는 멸망했다. 키예프 루스 영토였던 곳 대다수는 몽골 튀르크 타타르인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타타르의 멍에라는 암울한 지배기에 놓이게 되었다. '타타르인의 멍에'라고 부르는 이 시기 당시 모스크바 대공국 관리들의 주요 일과 중에 하나는 세금을 늦게 내는 농민들을 거꾸로 묶어놓고 때리는 일이었다고 한다. 모스크바 공국의 중흥을 이끈 이반 1세의 '깔리타(돈주머니)'라는 별명이 나온 배경 또한 이와 같았다.

한편, 키예프 대공국의 남서부 국경지대에 위치해 있는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이 자리잡은 갈리치아 볼히니아 지방은 몽골의 침략에 의한 피해가 적은 편이었다. 키예프 루스가 처참하게 무너지자 대공 다닐로는 바투 칸에게 직접 가서 굴욕을 감수하고 신종해 일단 위기를 넘겼다. 이 지역은 공후들보다는 지주들의 힘이 더 막강했으며 폴란드와 헝가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러시아 측에서는 키예프 루스가 멸망하고 키이우 등 현재의 우크라이나 일대가 몽골의 직할 지배를 받으면서 키예프 루스 후계 국가가 등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이때까진 루스 세계의 변방에 있었지만 독립을 지키고 이후 힘을 길러 루스 영역의 최강국이 되는 모스크바 대공국이 직계로 계통이 이어진다고 보았다. 반면 우크라이나 측에서는 몽골 침공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은 남서부의 이 갈리치아-볼히니아로 키예프 루스의 직계가 이어진다고 보았다. 역사가 토마셰프스키는 이 루테니아 왕국을 '최초의 우크라이나 국가'로 평가했다.[6]

아직 볼히니아 공국이 키예프 루스에 속해 있던 시절인 1187년, 헝가리 왕이 이 지역을 정복하려다 실패했으며, 12년 후 볼히니아의 공후 로만 므스티슬라비치가 갈리치아를 합병하여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통일함으로써 갈라치아-볼히니아 공국이 되었다. 로만은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오스 3세의 요청을 받고, 튀르크계 쿠만족들과 싸워 연거푸 대승을 거두며 1201년 발칸 반도에서 쿠만인들을 축출해내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동로마 제국 앙겔로스 왕조의 공주와 결혼했다. 로만은 나이 든 상태에서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아 1205년 폴란드인의 매복 기습을 받고 전사했다. 로만이 죽은 당시 큰아들 다닐로는 겨우 세 살이었고, 막내아들 바실코는 돌잡이 아기였다.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이 지역을 차지하려는 헝가리 국왕 언드라시 2세의 간섭을 받으며 다시 분열되었다.[7]

로만의 아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이웃 지역 공후들의 궁정에서 떠돌아다녀야 했다. 다닐로는 이 와중에 일반 루테니아인 농부들의 삶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현실 감각을 익혔을 뿐만 아니라 과거 로만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에게 격려를 받으면서 자라났다. 다닐로는 1221년부터 1264년까지 재위하며 선정을 펼쳐 볼히니아를 부흥시켰다. 1230년대가 되자 다닐로와 그의 형제들은 볼히니아를 헝가리 왕국로부터 탈환하였다. 다닐로는 세금을 감면하고 도시의 민회를 부흥시켰기에 언제나 루테니아인들의 지지를 받았다. 1245년 다닐로와 바실코는 헝가리 국왕의 사위인 갈리치아의 로스티슬라프 공을 격파하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다시 통일했다. 갈리치아로 건너간 다닐로는 르비우 시를 건설했고, 그의 동생 바실코는 볼히니아를 다스리게 되었다. 다른 형제들의 경우와 다르게 이들은 통치권을 나누고 나서도 서로 다투지 않고 사이좋게 지냈으며,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는 하나의 나라처럼 운영되었다.

몽골 제국의 침략군이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를 파괴시켜려 들자 다닐로는 당장 무리하게 싸우는 방법 대신에 직접 가서 조공을 바치는 방법을 택했고, 이 와중에 타타르에게 향하는 로마 교황의 사절들과 합류했다. 다닐로는 루테니아인들이 가톨릭 유럽과 힘을 합쳐서 타타르인을 무찌르는 계획을 세우고, 이 와중에 1253년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는다.[8] 다닐로가 왕위를 승인받은 이후 갈리치아-볼히니아 공국의 이름은 루테니아 왕국으로 변경되었다. 생각과는 다르게 교황은 결국 다닐로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지 못했고, 가톨릭에 대한 정교회 주민들의 반감으로 결국 교황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되었지만, 왕이라는 칭호와 루테니아 왕국이라는 국명은 계속 이어졌다. 다닐로는 키예프를 몽골인들로부터 탈환하려는 계획까지 세웠으나, 타타르인들에게 계속 조공을 바치는 상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1264년 다닐로가 세상을 떠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동생 바실코도 형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루테니아 왕은 다닐로의 아들 레우 1세가 계승했다. 서유럽의 힘을 빌려 몽골에 대적한 아버지와 달리 레우 1세는 몽골과 친하게 지내며 서유럽 방면으로의 진출을 시도했다. 북쪽으로는 벨라루스의 지배권을 두고, 리투아니아 대공국과 대결했으며, 서쪽으로는 폴란드의 수도 크라쿠프를 위협하고 루블린을 차지하는 등 레우 1세는 루테니아 왕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1301년 레우 1세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아들 유리 1세가 왕위를 이었는데 유리 1세의 치세 아래에서 루테니아 왕국은 경제적으로는 여전히 번영을 누렸으나 폴란드로부터 빼앗은 루블린을 다시 빼앗기는 등 쇠퇴의 징조가 보이기 시작했다.

유리 1세는 7년의 짧은 치세 이후 1308년에 사망했고, 왕국은 그의 두 아들인 안드리와 레우 2세 형제가 공동으로 다스리게 되었다. 형제는 폴란드와 동맹을 맺고 리투아니아와 몽골에 대적했는데 1323년 몽골과의 전쟁에서 형제가 모두 전사하고 말았다. 형제 모두 후사가 없었기 때문에 그동안 루테니아 왕국을 다스리던 다닐로의 직계는 끊기고 말았고, 루테니아 왕국은 다시 갈리치아와 볼히니아로 분열되어 갈리치아는 루스인 보야르들이 차지하고,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 공작 류바르타스가 차지했다. 일단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보야르 3자 간의 합의로 유리 1세의 외손자였던 폴란드 피아스트 왕조의 볼레스와프가 '유리 2세'라는 이름으로 루테니아 왕에 등극했는데 1340년 유리 2세의 등극 이후 커져가는 폴란드의 영향력에 반감을 가진 보야르가 유리 2세를 독살했다. 이를 빌미로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3세가 갈리치아를 침공해 1349년 전적으로 갈리치아를 합병했다. 볼히니아는 류바르타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난 이후 사실상 리투아니아가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국가 갈리치아-볼히니아는 이 시점에서 사실상 멸망했다. 이후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갈리치아와 볼히니아의 지배권을 두고 1392년까지 전쟁을 벌이다가 1392년 오스트루프 협정으로 갈리치아는 폴란드에, 볼히니아는 리투아니아로 분할한다는 합의를 보고 분쟁을 끝냈다.

4.2. 리투아니아 대공국

중세 가톨릭권에서는 정교회 루스인들이 사는 지역을 라틴어로 러시아라는 뜻의 루테니아라고 불렀다. 이른바 루테니아라고 불린 지역 대부분이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팽창 과정 와중에 리투아니아 영토로 흡수되었다. 당시 몽골인, 튀르크계 킵차크인들은 우크라이나 지역의 슬라브인들에게 공물을 부과하고, 종종 쳐들어가서 노예로 팔 생각만 하며 관리를 안 하고 있었는데, 이 틈새를 노리고 리투아니아인들이 킵차크 칸국이 지배하고 있던 과거 키예프 공국의 영토 대부분을 정복한 것이었다. 리투아니아인들은 흑해 인근까지 타타르인들을 밀어부쳤는데 토크타미쉬 칸의 타타르군에게 보르스클라 강 전투에서 저지당하기 이전까지,[9] 영토를 계속 확장시켜 나갔다고 한다.

리투아니아는 북유럽부터 러시아까지 동서남북이 전부 기독교로 개종하는 와중에도 토착 다신교를 믿고 있다가 유럽에서 가장 늦게 기독교로 개종한 국가로[10]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리투아니아인들은 오늘날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영토 일대의 루테니아인 정교도들의 인심을 얻기 위해서 '해방자'를 자처하며 정교회 신도들을 동등하게 대우했다. 게르만계 튜튼 기사단의 강제개종 및 체계적인 파괴나 몽골인들의 무차별적인 노예 사냥에 비교하면 리투아니아인들의 침공으로 인한 유혈 사태는 애들 장난에 불과한 수준이었다. 리투아니아는 루테니아 귀족들의 기득권을 보장하였고, 이에 호응한 많은 도시들에 리투아니아군이 무혈입성했다.

리투아니아의 요가일라가 폴란드의 야드비가 여왕과 결혼을 위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1385~1386) 발트 토속 신앙을 믿던 다른 리투아니아인들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명령을 내렸다.[11] 리투아니아인들이 발트 토속 신앙을 믿었을 당시에는 루테니아 지역의 정교회 주민들과 통혼하고, 오히려 키예프 루스의 후계자를 칭하며 큰 마찰없이 잘 지냈지만, 점점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 지주들이 이주해오고 리투아니아인 지주들이 폴란드 가톨릭화되면서 이후 일어날 커다란 불화의 씨가 뿌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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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에서 킵차크 칸국이 쇠퇴하면서 1430년 크림 반도를 위시로한 크림 반도 일대에 타타르인들의 크림 칸국이 독립했다. 크림 반도의 타타르인들은 유목과 농업을 부업으로 삼고 슬라브인들이 사는 지역에 쳐들어가서 사람들을 납치해 노예로 파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12] 크림 칸국은 오스만 제국의 번국으로써 오스만 제국의 대리전을 수행하는 역할도 병행했다. 키예프 공국이 멸망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의 지배가 시작된 이후에도 우크라이나 남부는 계속 타타르 세력의 노략질과 납치에 시달려야 했다.

15~16세기에 벌어진 크림 칸국의 침략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고, 타타르족이 납치와 약탈만 주로 일삼으며 정착을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에는 많은 공백지들이 발생하게 되었다. 크림 칸국의 전사들은 지주까지 싹 잡아가는 바람에 초르노젬으로 비옥한 드니프로 강 일대는 사람이 아예 살지 못해서 야생 상태로 복구되기까지 했을 정도였다.[13] 코사크들은 이 공백지들에 정착하여 독자적으로 크림 타타르족들과 맞서 싸우며 성장해나간다.

북쪽의 모스크바 지역은 노가이 칸국이나 크림 칸국의 세력과 멀리 떨어져 있었고, 리투아니아인들의 정복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적당히 타타르족의 눈치를 보면서 독자적으로 성장하여 모스크바 대공국이 되었고 이후 루스 차르국 러시아 제국을 거쳐 오늘날의 러시아가 되었다.

5. 근세

5.1. 폴란드-리투아니아

이반 3세, 이반 4세 등 여러 유능한 군주들의 지도하에 모스크바 대공국은 주변의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며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폴란드 왕국- 리투아니아 대공국 동군연합[14]과 충돌하여 국경 분쟁을 벌이고, 타타르인들과 싸워나가면서 정교회 신앙의 수호자라는 정체성을 세운 상황이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상황이 많이 달랐다. 1569년까지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대부분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영토였다. 그러나 같은 해 루블린 조약을 통해 동군연합 관계에 있었던 폴란드 왕국과 연방을 이루고 폴란드-리투아니아로 거듭나면서, 오늘날 우크라이나 영토의 중앙부에 해당하는 지역을 폴란드 왕국에 반강제적으로 양도했다. 폴란드 왕국의 법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법보다 농민에게 더 가혹했는데, 리투아니아 대공국 법에는 농노가 영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이 가능했으나 폴란드 왕국 법에 의하면 왕령지의 농민이 아닌 이상 귀족 지주를 상대로 진정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우크라이나인들과 러시아인들은 같은 정교회를 믿고 있었지만 상황이 많이 달랐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자국 농노들을 가혹하게 착취했지만[15]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특히 심했다. 정교회 신자는 법원에서도 일방적으로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교육이 가톨릭계에 집중된 이상 사실상 교육과 학문으로부터도 배제되다시피했다. 루테니아 사회의 지도층들은 이러한 사회 분위기 때문에 하나둘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게 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는 지방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도시민들의 곡물 교역을 금지하는 법을 제정했다. 우크라이나에서 대농장을 경영하는 귀족들은 직접 사람들을 고용해 비스와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운체계를 이용해 그단스크로 곡물을 실어날랐고, 그곳에서 독일인 상인들이 곡물을 운송해 팔았다. 서유럽과의 곡물 교역에서 이득을 본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은 동군연합 시절부터 농민의 토지소유를 금지시키고 귀족 소유 장원에 긴박시키는 조치를 잇따라 발표했다. 귀족의 지배를 뿌리치고 폴란드-리투아니아 남동부의 변방으로 달아난 농민들도 있었으니, 이들이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전신인 자포로제 코사크가 되었다.
루블린 연합 이후 이 지역에서 발생한 변화는 스텝 변경 지방 식민지화의 가장 중요한 추진자들이 볼히니아 공후들을 도와주었다. 폴란드 국왕 영지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유지되는 폴란드 국왕 소속으로 소규모의 이동성이 좋은 상비군은 타타르의 공격을 물리치고 스텝 지역에 계속 농민들이 정착하는 것을 독려했다. 스텝 변경 지역의 식민화에 또 하나의 자극이 된 것은 발트 지역 교역에 이 지방이 포함된 것이었다. 유럽 시장에서 곡물 수요가 계속 늘어나면서 우크라이나는 장차 '유럽의 빵바구니'라고 불리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 시절 이후 우크라이나 곡물이 유럽 시장에 나타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농민들은 정부 중심지에 가까운 농지의 농노제를 피해 이 지역으로 대량으로 이주해왔다. 이 지역에서 공후와 귀족들은 새 정착자들이 지주를 위한 의무노역과 상당 기간 동안 공납을 면제해주자 농민들이 우크라이나 스텝 변경 지방으로 계속 이주해 왔다. 이에 대한 보상으로 이들은 스텝 지역에 정착해 농지를 개발해야 했다.

동쪽으로의 이주 물결은 우크라이나 유대인들에게 새로운 경제, 문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보수적 추정치에 따라도 16세기 중반부터 17세기 중반까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숫자는 4,000명에서 열 배 이상인 5만 명으로 불어났다. 이들은 새로운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고, 시나고그를 건설하며, 학교를 열었다. 그러나 새 기회는 대가 없이 얻어지지는 않았다. 유대인들은 서로 상반되는 이익을 가진 두 집단인 지주와 농민 사이에 끼게 되었다. 원래 두 집단은 모두 정교도였다. 그러나 17세기 중반이 되자 많은 공후들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폴란드 귀족들이 이 지역으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면서 유대인은 불만에 찬 정교도 농노들과 돈에 둔 먼 가톨릭 지주들 사이에 휘말렸음을 알았다. 이것은 시한폭탄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세르히 플로히 저 / 허승철 역

원래 자포로제 코사크는 14세기부터 존재했지만 가혹한 농노제를 피해 달아난 농민들, 그리고 귀족을 포함한 다른 사회집단 출신의 이탈자들이 속속 합류하면서 숫자가 불어났다. 처음에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하며 동남부 국경지대를 타타르로부터 수호하던[16] 코사크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종교 및 경제적 갈등이 첨예해지면서 서로 반목하게 되었다.[17]

시간이 지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코사크 및 정교도 집단의 갈등은 경제적 성격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다분히 내포하게 되었다. 특히 폴란드가 우크라이나를 병합하면서, 많은 독일인 유대인들이 우크라이나 및 벨라루스 지방에 마름 혹은 잡상인으로 정착하게 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지주들은 민족을 가리지 않고 농민들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정교회 신도들은 특히 야만인 취급을 하고 종교적인 이유로 차별을 하여 종교 분쟁을 일으켰다. 정교회 신도들은 법원에서도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정교회 사회의 지도층은 가톨릭 귀족들의 유•무형의 압력을 받아 하나둘씩 정교회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여기에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리투아니아인 지주, 유대교를 신봉하는 유대인 마름과의 갈등을 겪으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와 정교도 집단간의 갈등은 단순히 계급적, 경제적 갈등뿐만 아니라 인종적, 종교적 성격도 내포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코사크들이 폴란드에 대해서 반란을 일으킬 때는 언제나 광범위한 유대인 학살이 동반되곤 했다.[18]

원래 우크라이나 지방 도시민의 다수를 차지하던 정교도들은 시간이 갈수록 폴란드인 귀족이나 유대인, 독일인 등이 도시에 유입되면서 입지가 점점 축소되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계속 정교회 신도들의 입지가 추락하는 상황에 맞서기 위해 정교도는 1570년대 리투아니아의 아카데미를 본 딴 고등교육 기관을 설립하였다. 당시 세워진 학교들은 슬라브어-그리스어-라틴어로 교육했기 때문에 "그리스 학교" 혹은 "그리스-슬라브 학교"라고 불렸다. 그리스-슬라브 학교들은 교수진의 부족으로 운영에 심각한 어려움을 겪기도 했으나, 동유럽 역사에 상당한 영향을 남기는데 성공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1580년에는 금속활자를 이용하여 슬라브어로 된 성경 완역본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우크라이나인들을 얼마나 차별했는지에 관련해서는 이론이 분분하다. 당시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전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더불어 개인까지는 아니지만 정치 참여권을 가지고 있는 '시민'의 최소 단위인 귀족마다 성문화된 종교의 자유를 누리던 나라였다. 우크라이나에서의 가톨릭 교회의 침투는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서 주도한 것이 아니라 타타르와의 전쟁으로 인해 공백지가 된 우크라이나 일대에 투기성 지주가 된 비시니오비에츠키, 자모이스키, 코드키에비츠 같은 거대 귀족 가문들이 주도한 것이었고, 이 와중에서도 오스트로그스키 가문처럼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오히려 정교회 신앙 보존에 치중하면서도 세력, 권력 등은 하등 꿀릴게 없는 가문들도 적지 않았다. 정교회를 의식적으로 차별했다기보단 반종교개혁 시대의 조류에 따라 귀족 가문들 사이의 최고 교육 기관이 예수회 학교들이 되었고, 여기에 자연스럽게 정교도들은 배제되었다. 당연히 여기에 맞서 정교도들도 자체적으로 몽골-타타르에게 얻어 맞고 리투아니아에게 종속화되면서 자신들이 정신차리지 못하는 사이 르네상스 인문주의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서방 기독교의 제도적 우위를 카피하려고 했고, 이런 서방 가톨릭 세력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했던 정교도들의 노력의 결산이 17세기 중반 신학자 페트로 모힐라(Петро Могила) 주도하의 키예프 총대주교좌 복구와 훗날 키예프-모힐라 아카데미의 전신이 된 키예프 신학교 설립이었다.[19]

정리하자면 당시 우크라이나 정교회권 사회로의 가톨릭 폴란드 침투는 1차원적인 식민지, 억압자의 구도가 아니라 이런 변화 자체가 가능하게 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자체의 미묘한 정교 관계의 틀에서 봐야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사회는 계급간 차이가 강했지만 적어도 귀족 계급 내에선 동네 쩌리 잔반에서 나라 전반을 뒤흔들 대귀족까지 평등하게 시민권과 참정권을 누렸고, 이런 귀족 공화국의 시민권 중에는 종교의 자유도 당당하게 포함되어 있었다. 다만 이런 성문화된 참정권을 누리는 지배 계층만에게 한정된 종교의 자유는 16세기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이후 옆나라 신성 로마 제국에서 결국 무너졌듯이 실제 적용의 영역에서는 명백한 한계를 보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 국가에선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출신 귀족들의 종교의 자유를 존중했어도, 가톨릭계 귀족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종교를 강요하는 것 또한 막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 피지배계층이 다수였던 현지 우크라이나 정교회도 바르샤바, 빌뉴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적어도 자신들은 핍박받는다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반면 이런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종교적 자유 덕분에 끝까지 개종을 안하고 버티겠다는 정교회 귀족층은 나름 위기의식을 느껴 경쟁적 모방에서 신학교 신설까지 적극적으로 정교회권의 반격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보흐단 흐멜니츠키는 이런 정교회의 이념적, 교회 조직적 재정비가 어느 정도 성공한 덕분에 본격적으로 동슬라브 루스 민족의 정교회 신앙을 명분으로 내세워 반란을 일으켰으니, 일시적인 처우나 자치권, 봉급 문제로 빨리 반란을 일으켜 빨리 진압되었던 이전 시대의 코사크 반란과는 달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령 우크라이나를 반쪽으로 쪼개버리고, 연방 자체에도 동유럽의 패자 위상을 상실케하는 엄청난 타격을 입힌 동유럽판 30년 전쟁이라 부를만한 규모의 반향을 일으켰던 것이다(일명 대홍수). 결국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이때 상실한 위상을 되찾지 못하고 프로이센 왕국, 오스트리아, 러시아 제국에게 분할되어 멸망했다. 폴란드 분할로 갈리치아,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자카르파탸), 부코비나[20]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역은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5.2. 코자크 헤트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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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자크는 흑해와 육로를 통해 동로마 제국을 공격했던 그 영광스러운 루스인과 동일한 민족이며, 야벳의 자손들[21]이다. 이들은 루스 군주인 올렉 공 시절 모녹실라 배를 타고 항해하며, 바퀴가 달린 배를 이용해 해로와 육로로 콘스탄티노플 공격했던 바로 그 군단과 같은 가문 출신이다. 바로 이들이 루스의 신성한 군주 볼로디미르 대공 시절의 마케도니아, 일리리아를 정복했다. 이들의 조상은 볼로디미르와 함께 세례를 받았고, 콘스탄티노플 교회로부터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16세기 키예프 시의 형제단과 정교회 성직자들이 코사크의 지원에 감사를 표시하면서 남긴 명문

폴란드인 귀족들과 루테니아인 농노들 사이의 종교 갈등은 폴란드에 재앙을 불러들였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루테니아 지역의 영토를 잃어버린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정교회 탄압과 이에 따른 보흐단 흐멜니츠키 코사크 반란 그리고 뒤이은 루스 차르국의 개입이었다.( 대홍수 참조) 원래 우크라이나의 코사크들은 크림 타타르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폴란드 본토까지 보호해주는 든든한 방패 역할을 한 대가로 반 독립적인 자치를 누렸고, 코사크가 아니었던 서부 우크라이나의 농노들도 타타르인들에게 납치당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농노로 사는 것이 나을거라는 체념하에 가톨릭 지배자들에게 충성을 바쳤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들의 시대착오적인 가톨릭 강요 및 착취와 폭정이 이어지자 1648년 코사크 헤트만 보흐단 흐멜니츠키가 폴란드 대신에[22] 그동안 대립하던 사이였던 크림 칸국과 손을 잡고 폴란드를 공격하면서 폴란드-리투아니아 동부 영토 전역이 전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폴란드는 군대를 재정비해 반격에 나서는 와중에 처음에 흐멜니츠키를 지원하는 듯 했던 크림 칸국이 코사크들을 배신하였다. 자세히 설명하자면 흐멜니츠키는 코사크들의 숙적에 해당하는 크림 칸국을 처음부터 믿지 않았고, 대신 크림 칸국을 번국으로 참고 있는 오스만 제국 측에 접근하여, 오스만 제국의 직접 지원을 조건으로 흐멜니츠키가 직접 이스탄불을 방문하여 신종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에서 베네치아 공화국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기 때문에, 코사크 지원은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오스만 제국 측에서는 흐멜니츠키를 직접 도와주는 대신에 크림 칸국 측에 흐멜니츠키를 지원할 것을 명령하였다. 그러나 크림 타타르족들은 코사크가 폴란드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이 전쟁이 가능한 오래 끌기를 바라고 있었다. 크림 칸은 흐멜니츠키가 폴란드군을 격파하는 것을 돕지 않는 대신 폴란드 왕과 강화협상을 벌였다. 1651년 여름 볼히니아의 베레스테츠코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림 타타르군은 처음에는 코사크 편에서 참전하다가 전투가 한창 진행되는 상황에서 전장을 떠났고, 이 틈을 노린 폴란드군이 코사크군 핵심 부대를 포위하여 섬멸시켰다.

수세에 몰린 흐멜니츠키는 '신종'을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지원을 요청했고[23], 루스 차르국은 '폴란드 가톨릭의 압제로부터 정교도들을 해방시킨다'라는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 지역으로 공격해왔다. 이 와중에 스웨덴 제국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 몰다비아 공국, 트란실바니아 공국 등이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영토를 노리고 개입하면서 규모가 몇 배로 커져 이른바 '대홍수'로 불리는 전쟁으로 번져나갔다. 흐멜니츠키가 급사하고 우크라이나 땅은 온갖 세력이 뒤엉킨 전쟁터가 되었고 흐멜니츠키 봉기의 결과로 우크라이나는 드니프로 강을 경계로 서쪽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동쪽은 루스 차르국이 지배하게 되었다. 키예프는 처음 협상과는 다르게 결국 루스 차르국으로 넘어갔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우크라이나 흑토 지대를 상실하고, 동시에 곡물을 수출하던 비스와 강 수운 체계가 박살나면서 국부의 대부분을 상실하여 약소국으로 전락했다. 우크라이나의 완전 장악 및 흑해 진출을 노린 루스 차르국은 스웨덴과의 대북방전쟁을 기점으로 1721년 러시아 제국을 선언했고 이후 크림 반도를 비롯한 우크라이나 남부를 노리고 크림 칸국, 그리고 그 종주국인 오스만 제국과 10여 번에 걸친 전쟁을 벌여, 1783년 크림 칸국을 합병하는 데 성공했다. 이로써 동부 및 남부 우크라이나는 완전히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왔고, 가톨릭과 이교도 타타르들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준 러시아를 동부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적어도 처음에는 열렬히 환영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를 장악하게 된 루스 차르국의 지도자들은 코사크들의 기대와는 다른 행보를 보여준다. 로마노프 왕조 러시아 제국 표트르 1세는 코사크들을 징발하여 신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설을 비롯한 여러가지 위험한 노역과 군역을 강제했는데, 당시 코사크들의 탄원서를 보면 요새 건설 공사 등에 파견된 코사크들 중 2/3에서 1/6 정도가 파견나간 장소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하소연을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현재도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으로 추앙받는 이반 마제파 스웨덴 국왕 칼 12세를 믿고서 대북방전쟁때 스웨덴 편으로 참전하여 루스 차르국에 대항해 반란을 일으킨 데는 이와 같은 배경이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렇게 간단하게 볼 수 없다. 우크라이나 카자크와 농민은 단일 집단이 아니었다. 물론 정교회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지주들을 공격하고 농민들을 보호했던 이상적인 코사크 지도자도 있었지만 수많은 농노를 부려먹던 봉건귀족이나 아예 마적단 두목(...)이었던 쪽이 더 많다. 여튼 우크라이나의 코사크와 농민은 서로 싸우고 반목하고 착취당하는 것도 일상적이었다는 것.[24] 이반 마제파는 표트르 1세와 사적 친분까지 있는 최측근이었으며 러시아 내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과 자치권을 가진 봉건영주였다. (애시당초 이 때문에 표트르 1세가 헤트만령 자치권을 제한하려하자 마제파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기도 하고) 헤트만령 내부 상황은 순전히 마제파와 코사크 지도자들의 권한이었고 표트르 1세조차 함부로 개입할 순 없었다. 마제파와 코사크 고위인사들의 농노, 재산, 특권은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귀족들을 훨씬 능가했으며[25] 후에 반란을 일으키면서 표트르 1세가 코사크들을 노역, 군역, 개척에 강제해서 죽게 만들었다고 비난하며 반란을 일으켰지만 표트르의 총애를 얻고 자기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한 걸 넘어서 반대파들을 숙청하려는 목적으로 안 가도 되는 코사크들도 보낸게 본인들이었다. 때문에 마제파의 봉기는 같은 코사크들 사이에서도 큰 지지를 얻지 못하고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26][27]

러시아 제국의 통치하에서 키예프 루스의 후손들이 몽골의 침략 이후 수백년만에 다시 하나로 모였지만, 이미 러시아인 우크라이나인의 문화는 언어부터 많이 달라져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정교회 성직자들이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들과 대치하던 일은 물론 서유럽의 "종교개혁 VS 반종교개혁"[28] 싸움의 여파가 루테니아에도 영향을 주었던 이유로 우크라이나어 어휘와 문법에는 폴란드어나 체코어 등 서슬라브어파 언어의 영향이 강하게 남았기 때문이다. 러시아 제국이 우크라이나 동부를 장악한 이후 한동안 모스크바의 정교회 성직자들이 키예프 일대의 정교회 성직자들의 어휘나 문체 등을 모방하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폴란드 분할 이전부터 목소리를 내었던 르비우 형제단이 신경이 쓰이자 폴란드인들은 루테니아 정교회 신자들이 하나로 모여 폴란드 가톨릭에 대항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대책을 만들었다. 일부러 르비우 시의 정교회 신자들 중 일부에게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르비우 시내에서 다 쫒아내버리겠다고 협박한 것이다. 거기에 폴란드는 브레스트 연합으로 우크라이나와 벨라루스의 정교회를, 전례는 정교회 양식이나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벨라루스 그리스 가톨릭 등의 동방 가톨릭 교회로 재편하여 정교회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교황의 지배 아래로 귀속시켜 루테니아인들을 종교 문제로 서로 다투게 만들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서방 가톨릭 교회로 개종시키려 했다. 흐멜니츠키 봉기 이후 폴란드-리투아니아는 자국 영내의 정교회 신도들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는데 1676년 폴란드 의회는 정교회 신도들이 국외로 이주하거나 혹은 외국에서 이주해 오는 것, 총대주교들과 교섭하여 종교적 문제의 결정권을 넘기는 것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사형이나 재산 몰수형에 처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후 폴란드 귀족들은 정교회 성직자 상당수를 압박하고 포섭한 것을 기반으로 1708년을 전후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영내 정교회는 동방 가톨릭으로 완전히 통합시키고, 영내 남아있는 정교회 신도들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로, 즉 명목상이나마 전부 동방 가톨릭 교파들로 개종시켰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 사이에는 정교회 전례만 유지하고 교황 수위권을 인정하는 형태의 교파인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뿌리박게 되었다.[29]

러시아 제국은 시베리아에 있었던 튀르크, 몽골, 퉁구스계 국가들을 정복하는데도 코사크들을 적극 활용하여 시베리아를 향해 넓은 영토를 단기간 내에 확장하는데 성공했다. 시베리아와 쿠반 강에 있는 코사크인들의 정착지는 아직도 옐로우 우크라이나, 그린 우크라이나 등 우크라이나 출신 이산민들이 주로 정착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6. 근대

6.1. 러시아 제국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멸망시키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와 같이 3차례에 걸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분할하면서 르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3 자카르파탸주, 체르니우치주의 서남부 5주 일대[30]를 제외한 우크라이나 전 지역을 차지했다. 러시아인 인구가 우크라이나에 대거 정착하는 한편, 우크라이나 동부의 코사크들은 러시아 제국의 정예 기병대가 되어 러시아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코사크 기병들은 카프카스 투르키스탄, 시베리아 일대의 병영 도시에 이주 정착했다. 러시아의 지배를 가장 덜 받은 갈리치아 지방은 우크라이나의 주류 교파인 정교회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교회라는 동방 가톨릭 교회의 일파가 다수를 차지했다.

이후 예카테리나 2세 시대에 헤트만령이 폐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당 사건은 우크라이나 역사에 결정적인 분기점을 맞는다. 당시의 폴란드-리투아니아 체제에 익숙한 우크라이나 코사크 엘리트들은 폴란드 슐라흐타에 유사한 존재들이었다.[31] 반대로 전제정 체제하의 러시아 귀족들은 봉건영주라기보다는 지방관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나 표트르 1세 사후 러시아 차르들이 쿠데타로 옹립되고 폐위되는 상황이 오면서 전제정의 붕괴와 함께 폴란드 슐라흐타적인 존재로 변모했다.[32]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코사크들은 자신들의 신분적 특권이 러시아라는 대제국에 의해 제도화되고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고 이것은 헤트만령의 자치권 폐지가 초기에 코사크 엘리트들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던 주된 원인이었다.[33] 실제로 헤트만령의 자치권이 폐지된 이후 러시아 제국 정부는 그곳의 카자크 스타르쉬나들에게 러시아 귀족(Дворянство)로 편입시켜 주었으나, 여기에는 두 가지 조건이 있었다.

1. 오랜 역사를 가진 '슐라흐타'임을 증명하는 문서화된 증거를 당국에 제출할 것
2. 제국 정부에서 공무를 수행한 경력이 있을 것

때문에 카자크 사회에서는 대대적인 고문서 찾기 및 위조(...) 광풍과 이에 대응하는 제정 당국의 검증 강화가 악순환으로 나타났고, 옛 카자크 귀족층의 러시아 귀족층 편입은 1세기 동안 기나긴 진통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옛 전통적인 카자크에 대한 재인식이 시작되었으며, 이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기원이 되었다.
18세기 말 19세기 초에 이르자 드보랸스트보 편입을 두고 일어난 이러한 갈등 상황은 역사 인식에 있어 1764년 헤트만 국가 폐지 당시만 해도 그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역설적 결과를 빚어내기 시작하였다. 그전까지 자신의 카자크적 과거를 완전히 망각한 채 특권 귀족인 "슐라흐타로서의 현재"를 누려왔으나 이제 존재의 위기에 직면한 다수의 카자크 엘리트 사이에서 갑자기 자신들의 역사, 특히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는 외견상으로는 드보랸스트보 편입 심사로 촉발된 고문서 찾기 광풍이 가져온 당연한 결과였지만, 1764년의 시점에서 제정 정부도 카자크 엘리트 자신들도 예상치 못했던 것은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이러한 호고주의(好古主義)적 관심의 폭발이 관방국의 깐깐한 심사 및 검증과 만나게 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었다. 바로 이어지는 장에서 살펴보겠지만, 일단 이러한 카자크적 과거에 대한 자각과 제정 정부에 대한 카자크 엘리트들의 점증하는 불만이 맞물리자, "슐라흐타적 현재"와 "카자크적 과거" 사이의 이 모순적 만남은 카자크 엘리트 사이에 카자크 정체성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의 탄생 및 집단기억의 전면적 재구성을 촉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헤트만 국가의 카자크 엘리트들이 스스로를 "슐라흐타"로 여기며 이에 따른 신분적 권리의 인정을 제정 정부에 촉구하던 이 상황이 이 시점의 소러시아가 사실상 완전히 탈카자크화한 완연한 신분제 사회가 되었다는 증거였다면, 제정 정부로부터 바로 그 슐라흐타 신분의 제도적 인정을 받기 위한 바로 그 노력이 상기한 "탈카자크화"에 의해 망각되고 거의 소멸되어 가던 "카자크 정체성"의 재발견을 촉발한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카자크적 과거와 슐라흐타적 현재 간 이 모순적인 만남 속에서 구(舊) 카자크 헤트만 국가의 영토에서는 훗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라 불릴 또 다른 "미래"를 구성하게 될 새로운 민족서사가 바로 이 아이러니로부터 태동하기 시작하였으나, 그 서사의 첫 시작을 알리게 될 저작이 바로 "우크라이나 민족의 [첫] 권리 선언" 「루시인의 역사」였다.

그렇다면 현재의 불만을 과거로 투사시킴으로서 미래를 위해 새롭게 재구성될 이 새로운 민족서사란 과연 어떠한 내용이었던 것일까? 그것은 소루시인이야말로 키예프 루스를 계승하는 진정한 정통 루시이며, 카자크야말로 이러한 루시 정통성의 역사적 계승자라는 "독자적 소루시 역사 담론"이었다.
구자정, 우크라이나 문제의 기원을 찾아서 (박영사, 2023), 120-122.

러시아 정부의 검열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억압에도 불구 러시아 제국 영내에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완전히 사멸화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상징하는 인물로 러시아인 귀족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농노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역사가 니콜라이 이바노비치 코스토마로프(1814~1870)를 들 수 있다. 19세기 우크라이나 문화 운동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하르키우 대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러시아 제국 정부가 신설한 키이우 대학교 역사학 교수가 되었다. 코스토마로프는 1847년 타라스 셰우첸코와 함께 우크라이나 분리주의를 지원했다는 혐의로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다. 같이 유형을 갔다왔던 셰우첸코는 유형 이후 폐인이 되어 더 이상 창작 활동을 하지 못했으나 코스토마로프는 학계로 복귀하는데 성공하였고 186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 교수로 임명되었다.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역사에 대해 방대한 저술을 남기면서, 남부 러시아인(우크라이나인)과 북부 러시아인(러시아인)은 서로 다른 민족이라는 주장을 철회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 그가 저술한 보흐단 흐멜니츠키 전기 및 자포로제 코사크에 대한 연구 덕분에 재차 유형에 처하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6.2. 오스트리아 제국

르비우를 중심으로 한 갈리치아 일대에서는 오스트리아의 방임 아래 우크라이나인들이 우크라이나어로 민속 문학을 수집하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근간을 만들고 있었다. 중세 폴란드 시절 교역의 중심지였던 르비우 시에는 르비우 형제단이라는 우크라이나인 상공인 단체가 있었는데, 이들은 우크라이나어 인쇄물을 발간하는 등 민족주의적 활동에 열심이였다. 르비우 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치하에서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 역할을 이어나갔다.[34]

정작 우크라이나 서부 영토의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의 처지는 매우 좋지 않았다. 같은 가톨릭 교회임에도 로마 가톨릭 신자들은 라틴 전례를 따르지 않는 이단이라면서 그리스 가톨릭 신자들을 차별했으며, 폴란드 독립운동을 주도하다 모조리 쓸려나간 러시아의 폴란드인 지주들과 달리 갈리치아의 폴란드인 지주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시절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예전과 다를바 없이 이들을 착취했다. 그들을 착취하는 폴란드인 지주들과 빚으로 옭아매어 얼마 없는 땅까지 뺏어가는 유대인 대금업자들에 대한 우크라이나인들의 증오는 엄청났다.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서부에 해당하는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은 척박한 토지에 과도한 인구, 거의 없다시피한 교육 수준, 원시적인 수준의 영농 기술, 상황을 개선시키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지주들과 오스트리아 당국의 무관심 등 여러 요인들이 합쳐져 기근과 영양결핍과 열약한 환경으로 인해 만연한 질병, 또다시 그로 인해 저하된 농업 생산성이 다시 기근을 불러일으키는 등 악순환이 계속 반복되는 곳으로 대영제국한테 쥐어짜이는 그 아일랜드와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오스트리아 제국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다. 갈리치아의 폴란드계 유력인사였던 스타니스와프 슈체파노프스키(Stanisław Sczepanowski)는 갈리치아의 현실을 고발한 자신의 저서에 이들이 다른 지역보다 음식은 절반 밖에 못 먹으며 일은 1/4 밖에 하지 못 한다고 기록을 남겼고 결국 가난을 견디지 못한 갈리치아의 농민들은 르비우나 크라쿠프 같은 대도시나 부코비나 공국 같은 근접한 오스트리아 제국 내 다른 지역, 멀리는 미국이나 캐나다, 브라질 등 외국으로 빠져나갔다.

러시아 영토 내에서는 우크라이나인 자체를 차별한 건 아니었지만,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 우크라이나어에 대한 탄압이 꾸준히 이어졌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동부의 민족주의자 상당수가 그나마 직접적인 탄압이 덜한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로 피신하여 민족주의 활동을 이어가면서 우크라이나 서부는 반러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갈리치아 지방의 경제권은 오스트리아계 독일인이 장악당하고, 폴란드인과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은 기근과 과잉 인구에 시달리며 르비우 시에 빈민가로 꾸준히 유입되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빈곤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국가와 민족이 없어서 비롯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고 민족주의적 사상을 키워나갔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을 가난한 농업 지대에 총알받이용 병력 공급 지역 즈음으로 여겼으며, 갈리치아는 빈곤 문제가 심각해지고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간의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갈리치아 내 우크라이나인들은 특별한 기술이 있을 턱도 없고 그 때문에 농업 이민을 선호한데다, 차라리 춥더라도 평소에 사이가 상당히 좋지 않았던 폴란드계나 유대계, 독일계랑 부딪힐 일이 적은 캐나다로 이민하는데 이들은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캐나다인의 직계 기원이 된다.

이 갈리치아 지역의 빈곤은 19세기 후반에 특히 극심했는데, 해당 지역은 우크라이나 내 다른 지역들이 비옥한 흑토 지대인 것과 다르게 비교적 척박한 편이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갈리치아 지역 주민의 소득 증대에 대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인구가 두 배로 증가하는 동안 식량 생산은 답보 상태에 머물렀다. 해당 지역이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편입되고 중부-동부 지역이 러시아 제국으로 갈라지면서 전통적인 무역로마저 단절되었고 설상가상 별다른 공업 투자도 이루어지지 않자 도시에서도 잉여 노동력을 흡수하지 못하면서 상황은 더 악화되었다.[35]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오스트리아 내 다른 지역 농민들보다 두 배 적게 먹는 대신 낙후된 농업 기술과 허약한 건강상태로 4분의 1 정도의 효율로 일하며, 농업 이외에 주 산업은 주류 양조 산업으로 농촌 내 알콜 중독이 만연하였다. 절망적이고 빈곤한 사회 분위기 속에 우크라이나계 농민 아동의 초등학교 취학률은 15% 정도로 당시 오스트리아 평균을 한참 밑돌았다. 서구 세계에는 아일랜드 대기근이 유명하다면 중유럽에서는 이른바 "갈리치아의 빈곤"이 기근의 대명사로 통했을 정도였다. 영양실조로 연간 5만여 명이 목숨을 잃는 상황에서,[36]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 농민 가정 상당수는 이웃 폴란드인 농민들을 따라 아메리카로 대량 이민을 결정하였다. 갈리치아 전체 인구의 4분의 1 정도가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이 중 상당수가 유럽 여타 지역 그리고 미국과 캐나다 이민을 결정했다. 특히 캐나다로 많은 인구가 이민하였다.

갈리치아의 우크라이나인들이 브라질로 이민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오늘날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들은 이민 온 지 4~5세대가 지났지만, 이른바 “ 콜로니”라고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미르와 어느정도 흡사한 농업 공동체를 만들어서, 밀과 쌀, 콩을 재배해 판매하고, 이 외에도 자신들이 우크라이나에서 자주 먹던 호밀과 메밀 등을 경작한다. 이들 상당수는 라틴 아메리카 각지의 재침례파 공동체 못지 않게 출산율이 높고, 또한 배타성이 강해 우크라이나계 외 다른 (로마 가톨릭을 믿는) 브라질인들을 걍 다 쵸르니(우크라이나어로 흑인)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사는 시골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어의 갈리치아(할리치) 방언이 많이 통용된다고 한다.[37]

오스트리아령 우크라이나에서는 주로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 신도들이 해외 이민을 갔다면 러시아령 우크라이나의 경우 유대인들이 미국이나 서유럽으로 이민가는 경우가 흔했다. 러시아 제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당시 주어졌던 유대인들에 대한 특혜를 대폭 축소하고, 반유대주의를 조장하는 대신 유대인들의 이민 비자는 쉽게 내주는 편이었다.[38] 이러한 연유로 우크라이나에서 미국으로 이민한 경우는 캐나다의 경우와 다르게 유대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니네 동네에는 그의 아버지의 추종자들, 즉 칙칙한 옷을 입은 러시아 하시드파 유대인들이 모여 살고 있었다. 그들의 관습과 인식은 그들이 버려두고 온 땅의 산물이었다. 그들은 사모바르에 차를 끓였고, 각설탕을 입에 물고 천천히 차를 마셨다. 그들은 고향 음식을 먹었으며, 때로는 러시아어 때로는 이디시어로 말을 주고 받으면서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탈무드의 아들(The Chosen) / 체임 포톡 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폴란드에 이르는 지역은 근세 유대교 하시딤파의 본산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우크라이나가 독립국이 아니었으므로 당시 미국인들은 이들을 러시아계 유대인으로 취급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한 유대인들은 포그롬을 피해 이주한 경우이니만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와는 척을 진 상황이었다. 미국 유대인 중 적지 않은 수가 우크라이나 지역 출신이지만, 이들에게는 우크라이나계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은 별로 없는 편이다.

7. 현대

7.1. 우크라이나 독립운동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우크라이나를 지배하던 러시아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전화에 휘말렸다. 우크라이나 서부는 오스트리아에, 나머지는 러시아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들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서로 적과 적으로 싸워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는 중 러시아는 볼셰비키 혁명이 발생하면서 독일에게 유리하게 국경선을 내준 후 휴전할 수밖에 없었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역시 연합군에게 패배하면서 공중분해되었다.( 민족자결주의 참조)

이렇게 러시아가 휘청이는 사이 우크라이나에도 다시 독립 국가가 들어설 뻔 했다. 1918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이 지역은 잠시 독일의 괴뢰 정부 우크라이나국이 들어서지만 곧 독일 제국이 패망한 뒤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서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으로 (공산국가는 아니다) 각각 분리독립을 이루고, 현 우크라이나 동부지방은 네스토르 마흐노가 설치한 마흐노우슈치나가 선포되었다.

하지만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독립하는 그 순간부터 서우크라이나의 지배에 반발하는 폴란드인들의 봉기와, 이에 호응하여 개입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침공에 맞서 싸워야 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침공을 당했다. 동서 우크라이나는 1919년 1월 통일을 선언했으나 수도 키예프는 2월 5일 붉은 군대에 함락되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영역은 오늘날 우크라이나 중서부-남서부 일대로 축소되었다. 소비에트 러시아의 점령지에는 1월 6일 선포된 괴뢰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설치되었다. 1919년 초 데니킨 백군이 소비에트 러시아에 반격을 가하자 3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도 반격하여 한때 키예프 인근으로 진출했지만, 곧바로 소비에트 러시아의 반격을 받아 1920년 초에 이르면 우크라이나 서부의 도시 카미야네치포딜스키 일대로 영역이 쪼그라들게 된다.

이 상황에서 우크라이나는 1920년 폴란드와 동맹을 체결하고 그해 5월에 키예프를 탈환한다.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러시아를 막는 것이 급선무라 여겼고, 폴란드 입장에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야 자국의 독립을 보장받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원래는 벨라루스 일대의 국경충돌에 불과했던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폴란드-우크라이나 동맹과 소비에트 러시아가 정면대결하는 전면전으로 발전했다. 전쟁 끝에 러시아와 폴란드는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체결하여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동서로 분할했다. 볼셰비키가 통치하는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의 한 구성국이 된다. 이 복잡한 과정은 이 링크를 참고.

이 와중에도 볼셰비키· 멘셰비키· 사회혁명당·민족주의자·극우주의자·무정부주의자들도 가만히 있지는 않고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계속 내전을 벌였다. 거의 비슷한 시기 우크라이나에서 멀리 떨어진 러시아 극동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도 자신들 관할 지역인 극동을 우크라이나국의 일부라고 선언하기도 하였다. 자세한 건 젤레나 우크라이나 문서 참고. 이들은 오랜 세월이 지나 대부분은 러시아인 정체성으로 동화됐지만, 현재도 연해주에 거주하는 러시아인들 중에는 우크라이나식으로 '~엔코'로 끝나는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러시아에 가까웠던 동부 우크라이나에서도 민족주의자들의 독립 움직임이 있었지만, 이들은 소련에게 철저히 탄압당했다. 당시 소련 국방장관인 레프 트로츠키는 우크라이나의 오데사에서 자랐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을 철저히 짓밟으면서 "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의 사투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렇듯 러시아인들은 전통적으로 우크라이나의 국체를 부정하고 다른 나라가 아닌 그저 러시아 자국의 불가분의 일부이자 변방의 하나 생명선?라고 생각한다. 현재의 블라디미르 푸틴도 마찬가지. 이쪽에서는 역사적으로 근대 이전에 우크라이나 지방을 부르는 이름이, 자국인 ' 대(大) 러시아와 대비되는 ' 소(小)러시아'라는 뜻인 말로로시야(Малороссия)였다. 대부분의 우크라이나인들은 말로로시야라는 단어를 수치스럽게 생각하였으며 혁명, 내전, 독재, 탄압, 집단 아사, 학살의 피비린내나는 20세기의 상처 때문에 현대에 우크라이나 사람 앞에서 '말로로시야인'이라고 발언하는 행위는 모욕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전간기 시절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의 주목할 만한 인물로 예우헨 코노발레츠가 있다. 우크라이나 무장조직(UVO)을 만들어 무장투쟁을 했으며, 당시 폴란드령 리비우에 본부를 두고 소련에 대한 테러를 감행했다. 1938년 결국 스탈린의 명령으로 예우헨은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NKVD에 암살된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사상을 이어 받아 그의 동지였던 안드리 멜니크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발전시켜 이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갔다.[39]

7.2. 소련의 통치

소련 치세에서 이런 우크라이나 탄압은 트로츠키와는 앙숙이었던 이오시프 스탈린 치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스탈린이 추진한 집단농장화 정책 때문에 소련 전역에서 아사자가 대량 발생했는데, 피해는 특히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다. 바로 1932년~ 1933년 우크라이나 대기근(홀로도모르)이다.[40] 때문에 미국인들이 가진 대공황에 건 뿌리깊은 공포 이상으로 우크라이나가 기근에의 공포심은 크다. 현대 우크라이나의 반러감정의 직접적인 연원이기도 하다. 소련에서 집단농장화 정책을 펼 때 가장 반발이 심했던 지역이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이었는데[41] 기근의 피해가 유독 바로 그 우크라이나와 카자흐스탄에 집중되었으니, 일부러 소련에서 우크라이나인들을 작정하고 굶겨죽였다고 의심할 만했다. 동부 우크라이나는 제정러시아 시절부터 석탄의 주산지였는데, 스탈린의 무자비한 공업화 몰빵으로 엄청나게 산업화했다. 그러면서 이곳에 러시아인 인력이 다수가 이주해와서 살았다. 소련 공산당 서기장을 지낸 니키타 흐루쇼프도 러시아로 이주해온 광부였다.

우크라이나 태생으로 소련의 고위직에 오른 인물로는 트로츠키, 보로실로프, 즈다노프, 리즈코프 등이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의 독소 불가침조약에 따른 폴란드 분할 당시, 폴란드에 속하던 서우크라이나 지역은 소련이 합병했다. 소련은 서부 우크라이나를 자국의 우크라이나 사회주의공화국에 편입시키면서 1921년 '빼앗긴' 영토를 수복한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한편 서부의 우크라이나인들은 2차 대전 당시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여 유대인들과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제노사이드를 벌였다. 폴란드인은 폴란드 정부에서 동화를 강요했으므로, 유대인은 경제의 대지분을 차지했으므로 불만을 가졌다. 이후 독소전쟁으로 독일이 전전의 폴란드 동부 영토로 밀고 들어오자 해당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이에 협력하여 해당 지역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데에 적극 동참했다.
파일:81-pogrom-lviv-07-1941.jpg
1941년 르비우 게토에서 촬영된 사진
유대인 여성이 폭도들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유대인들이 싸그리 절멸당한 후에는 1943년 봄부터 600년가량 함께 살아오던 볼히니아와 갈리치아 일대의 폴란드인들을 상대로 대량 학살을 벌였다[42] 여기에다가 전후 서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전에 40%에 이르던 폴란드인이 싸그리 현 폴란드 영내로 이주되면서 결과적으로 서부 우크라이나는 우크라이나 전체 국토에서도 우크라이나인 비율이 가장 높은 지역이 되었다. 물론 서부인들은 이런 소련의 지배를 탐탁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독소전쟁을 개전하고 우크라이나 지역을 독일군이 점령하고 우크라이나 국가판무관부를 설립하자 이들을 해방자로 환영했으나,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의 민족주의자들이 설립한 우크라이나 국가정부를 강제해산하였고, 수탈과 기아, 민간인 학살 등이 나오자 반독으로 돌아선다. 전쟁 기간 중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기로 독일과 소련 양쪽에게 우크라이나 민간인들이 학살당하는 경우가 허다했고 때문에 전사자 포함, 약 700만에 달하는 인명피해를 입었다.[43] 이후 2차 대전 말기인 1945년 우크라이나 국민위원회가 다시 독립을 따내지만, 명목상의 독립이었고, 우크라이나는 스테판 반데라를 중심으로 독립투쟁을 벌였지만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은 소련에 철저히 격파 분쇄되고 소련에 재점령되었다.

7.2.1. 현대 우크라이나의 형성

제2차 세계 대전 후, 연합국의 대지분을 보유한 소련은 폴란드의 항의에도 1939년 병탄한 폴란드령 서부 우크라이나 영토를 확정했고, 대신 폴란드는 독일의 동부 영토를 할양받았다. 서부 우크라이나에 살던 사람들은 원래부터 대부분 우크라이나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에게 별로 명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부 우크라이나인들이 소련의 지배를 달가워한 것도 영 아니었다.

특히 우크라이나의 서남부 5개 주는 우크라이나인이 전체 인구의 88.1%로 압도적으로 많다(단 르비우[44][45]는 전쟁 전에는 폴란드계가 전체 시민의 2/3을 차지하긴 했다).

폴란드 영토에다가 종교는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인데도 왜 반폴란드 성향이 강하냐면, 이 동네 일대가 2차대전 이후 영토, 인구 교환 때 까지 지주, 귀족 등 상류층은 폴란드인, 의사 같은 전문직은 유대인들이 다 해먹고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을 믿는 현지 동슬라브계 우크라이나인들은 대부분 농노 취급을 당했기 때문이다. 르비우에 살던 폴란드인들은 2차대전 이후 대부분 현재의 폴란드 영역으로 쫓겨났고, 남아있는 폴란드계 숫자는 타 지역보다 많지만 그게 전체 인구의 1%에 불과하다. 게다가 우크라이나의 폴란드계 자체가 원래 가장 우크라이나에 동화한 집단이다. 테르노필, 이바노프란키우시크[46], 자카르파탸주, 체르니우치주)는 1939년, 또는 1945년까지 러시아/소련 땅이었던 적이 단 1번도 없었다. 이들 지역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화국을[47] 거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했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 왕국의 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완전히 소련 영토로 들어왔다. 이들에게 러시아는 철저히 외부세력일 뿐이다.

반대로 몰도바 남쪽의 해안지대인 부자크는 이때부터 우크라이나의 영역이 되었다.[48] 그리고 우크라이나는 1954년에 우크라이나 출신자인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기에 소련의 행정구역 개편으로 크림 반도를 러시아에게 받았다. 크림 반도의 인구는 110만 명을 차지한다.[49]

이렇게 소련에서 크림 반도를 우크라이나로 이관했던 이유는 단순한데 우선 우크라이나 주변의 땅이니깐 행정편의상 관리를 쉽게 하기 위해서 줬고, 그리고 어차피 소련이라는 체재가 하나의 체제니깐 러시아의 관할 구역을 우크라이나의 관할 구역으로 넘겼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해체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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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라는 민족적 개념은 폴란드와 러시아에 맞서고 탄압받으면서 성장했으므로 러시아에 대한 감정이 지역마다 매우 다를 수밖에 없다. 키예프가 있는 내륙의 서부 우크라이나와 공업도시 하르키우(제2도시, 러시아어 하리코프)와 항구도시 오데사(제3도시), 크림 반도 등이 속한 동부 우크라이나는 지지정당부터 민족, 언어 구성까지 제법 다르다. 그래서 서부 지방은 러시아에 이질감이 상당히 심한 반러시아( 반러) 성향인 반면, 러시아와 붙어있는 동부 일부 지방은 러시아어를 많이 쓰고 러시아에 대한 이질감이 적은 친러시아( 친러) 성향인 편이다.

우크라이나의 민족 구성을 보면 크림 반도만이 유일하게 러시아계가 50%를 넘는 지역(58%)이고 나머지 지역은 우크라이나계가 다수다. 2014년 분리주의 세력이 점령을 시도한 우크라이나 동부의 도시 하리코프도 우크라이나계 48% 대 러시아계 40%로 반반이다. 물론 러시아어가 더 우세한 지역들이 동부에 꽤 있지만 그건 우크라이나계 가운데 러시아어 사용 인구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일부는 자신을 러시아인이라고 생각한다.

서쪽에 있는 독일, 폴란드와 일단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친하게 지내는 편이지만, 역사적으로 서부를 집어삼키던 폴란드는 우크라이나 서부를 잃어버린 자기들 땅이라고 여기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폴란드를 견제하고 있다. 대신에 폴란드는 이미 소련 지배에서 벗어난 우크라이나를 세계에서 최초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이후 지금의 폴란드-우크라이나 국경을 인정했기에 여기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크림 반도보다는 갈등의 여지가 적은 편이다. 무엇보다도 전후에 서우크라이나 지방에 거주하던 폴란드인들이 죄다 독일로부터 받은 슐레지엔, 힌터 포메른 등으로 강제이주되었기에 동부 우크라이나나 크림 반도처럼 민족자결주의 같은 주장으로 반란을 일으킬 껀덕지도, 민족구성을 이유로 이웃 국가가 침공할 여지도 없다.

독일 또한 악랄한 소련 폴란드로부터 우크라이나를 해방시켜준 구원자들인 줄 알았더니 소련보다 더한 학살을 저지르고 간 일이 있어 전혀 좋게 보지는 않는다. 북쪽에 있는 벨라루스와는 사이가 영 나쁜데 벨라루스가 과거 키예프 공국으로 같은 동족이면서도 여긴 러시아 지배를 받아들인 편이며 현재도 친러이기 때문.[50] 둘이 과거 키예프 공국 이야길 하며 서로를 옛 우리땅이라 까고,[51] 벨라루스는 친러 성향이니 우크라이나와 사이가 나쁘다. 한편 우크라이나는 구 소련 시절 벨라루스에 부득이하게 체르노빌산 낙진을 선물해줌으로써 빅엿을 먹여준 적이 있다.

7.3.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소련 붕괴

1980년대 후반에 소련이 개혁개방에 나서자 그 동안 숨죽였던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소련 전체의 경기침체가 지속될수록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세력의 세는 커져갔고, 1990년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 선거에서 상당수의 의석을 확보하며 약진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소련 해체는 서부와 키이우에서만 지지를 받았을뿐, 동부에서는 여전히 우크라이나 독립에 대해 미적지근한 입장을 보였으며 1991년 소련 국민투표때까지도 독립을 하기보다는 소련에 잔류하자는 의견이 더 높은 지지를 보였다.

하지만 러시아에서 옐친이 대통령이 되어 중앙정부와 따로 놀려고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우크라이나도 좀더 독자적인 행보를 보여야된다는 의견이 점점 지지세를 늘렸고 그러던 도중에 8월 쿠데타가 벌어졌다. 쿠데타가 미수로 그쳤지만 중앙정부가 무력화되어 독립을 제어할 방해막이 제거된데다가 경기침체는 지속되었기에 독립의 목소리는 높아졌고, 동부지역에서도 서방으로부터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 독립을 하는것이 낫다는 여론이 대세가 되어 우크라이나 독립투표에서 당초 독립반대 여론이 높을것으로 예상되었던 도네츠크와 루한스크 등 동부에서도 독립찬성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했고 그나마 크림반도 정도만이 접전을 기록한 정도였다. 이러한 독립투표는 고르바초프의 재기할 발판을 완전히 제거했고, 크라우추크는 61%의 득표율을 확보하며 우크라이나의 초대 대통령이라는 타이틀을 달수있었다. 하지만 독립 후 우크라이나의 경제상황은 어려웠다. 우선 가격자유화로 초인플레이션이 터지면서 예금이 급속히 휴지조각이 되고, 복지제도도 마비되어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구매력이 급속히 저하되었고, 지하경제도 판을 쳤으며, 서방의 지원도 예상보다 미적지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암울한 경제상황을 몇년간 지속되어 1994년에 임금지급을 요구하는 도네츠크 지역 광부들의 파업이 터지자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재신임 투표격으로 대통령 선거를 예정보다 일찍 치렀고 1994년 대통령 선거에서 레오니드 쿠치마가 집권했다. 레오니드 쿠치마는 화폐개혁을 통해 물가상승을 어느정도 잠재우는데 성공했고, IMF 외환위기 기간이 지나자 우크라이나의 경제성장률이 고공행진하기 시작하여 우크라이나의 경제난을 종식시키는 업적을 세웠다. 그러나 레오니드 쿠치마는 쿠치마 역시 부패에서 자유로운 정치인은 아닌지라 민영화 과정에서 올리가르히들과의 유착이 많았고, 거기에 더해 2001년에는 기자살해사건이 폭로되면서 쿠치마에 대한 반대시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며 쿠치마에 대한 민심은 바닥에 떨어졌다.

하지만 쿠치마에 대한 반대세력은 좌로는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우로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이르기까지 다양했고, 이 때문에 이해관계도 복잡했던지라 쿠치마 정권에 대한 탄핵에까지는 이르지는 못했으며, 이후 야누코비치가 동부와 러시아계 주민들을 대상으로 지지세를 늘리며 정권재창출은 가능할 정도의 지지세는 확보하게 되었다. 한 편 반 쿠치마 진영에서는 빅토르 유셴코를 대안으로 내세웠고, 2004년 대선은 접전이었지만 야누코비치가 쿠치마의 후계자라는 한계때문에 유셴코가 다소 우세할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개표결과는 야누코비치의 근소한 표차 당선되었지만. 선거과정에서 많은 부정이 저질렀다는것이 알려지게 되면서 시위가 일어났고, 결국 재선거를 통해 유셴코가 당선되었다. 이것을 오렌지 혁명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누코비치가 만만치 않은 지지를 얻었던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많은 동부유권자들이 억하심정을 드러내고있던데다가, 유셴코도 티모센코와 갈등이 일어나며 유셴코의 지지기반이 공중분해되어버렸으며 2006년 총선에서 야누코비치가 총리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가 의회해산을 통한 재총선을 통해 티모셴코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총리를 역임하였지만 유셴코와 갈등을 벌였던것은 여전했고, 유셴코는 2008년 세계금융위기에 대한 대처에 실패해 지지율이 10%대에 불과했다. 2010년 대선은 접전으로 서북부는 티모셴코, 동남부는 야누코비치를 지지하는 현상이 극명히 나타났으며 야누코비치는 낙승이 예상된 당초 예상에 비해서 신승을 했지만 대통령직에 오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통령이 된 야누코비치 티모센코를 감옥에 보내는 악수를 냈고, 2011년으로 호전세를 보였던 경제도 2013년을 기점으로 외환위기가 닥쳐오면서 다시 악화될 조짐을 보이자 러시아의 경제지원을 받아들일려고 했다가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간의 업보로 인해서 야누코비치가 유로마이단 혁명으로 축출되었다. 하지만 동부에서는 친서방 정치인들을 못믿겠다는 여론이 여전히 다수를 차지했고, 거기에 더해서 친서방 세력들이 동부를 자극하는 발언까지 보도되자, 일부지역에서는 아예 러시아와 붙겠다는 선택을 했고, 이로 인해서 안보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7.4. 러시아와의 갈등

2010년대와 2020년대에 걸쳐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점점 위기를 맞고 있다. 유로마이단 이후의 문제들로 인하여 후유증을 겪고 있다. 러시아인이 많았던 크림반도 2014년, 모든 표식을 제거한 러시아군의 점령 하에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다시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러시아인이 과반은 아니지만 집중거주하는 돈바스에는 크림 반도처럼 위장된 러시아군의 은밀한 침투하에 도네츠크 인민공화국 루간스크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른바 돈바스 전쟁의 시작이었다. 당초 중도세력이었던 신임 포로셴코 정권은 러시아의 침탈이 도를 넘자 친서방, EU 및 나토 가입을 지향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후임 젤렌스키 정권도 같은 정책을 이어가자 러시아가 격렬하게 반발하여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계속해서 위협하였고, 결국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52]

자세한 내용은 아래 문서 참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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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자1] 파일:우크라이나 원형 국기.png : 우크라군의 승리, 파일:러시아 원형 국기.svg : 러시아군/친러반군의 승리 [첨자2] 파일:ongo.png : 진행중, 파일:우크라이나 원형 국기.png : 우크라군의 승리, 파일:러시아 원형 국기.svg : 러시아군의 승리, ▣: 무승부 [첨자3] 파일:우크라이나 원형 국기.png : 우크라군의 공격, 파일:whattheydo.png : 공격주체 미상, 그 외 각주 참조 [BLR] 벨라루스 파르티잔 공격 [A] 러시아의 동남부 우크라이나 병합 이후 러시아 연방에 편입된 군민정청 [A] [B] 러시아의 동남부 우크라이나 병합 당시 독립적인 주로서 러시아 연방에 편입되지 않은 군민정청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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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드네스트르 강 하구에 티라, 드니프로 강 하구에 올비아, 오늘날 세바스토폴에 해당하는 케르손네소스, 테오도시아, 판티카파이온, 파나고니아, 오늘날 로스토프에 해당하는 타나이스 [2] 일례로 만화 《 히스토리에》에서는 주인공이 그리스인에게 납치된 스키타이인으로 설정되며, 올비아의 그리스 대상인에게 팔려갈 뻔한다. [3] 이미 볼로디미르 1세 시절부터 폴란드와 영토를 두고 다투기 시작했다. [4] 이후에도 몽골군은 진격을 멈추지 않고 1240년대 초까지 폴란드, 헝가리 등 동유럽 지역을 휩쓸고 다녔다. 그 덕에 동유럽이 막심한 피해를 입은 것은 덤. [5] 13세기 키예프 루스의 인구는 600~800만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6] 키예프 루스는 여러모로 동슬라브 3국의 공동 역사라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인 고유의 독립국가로서는 이 나라가 최초라는 것이다. [7] 헝가리가 갈리치아의 영토를 일부 떼어간 덕택에 헝가리와 슬로바키아, 루마니아에는 오늘날에도 루신인(Rusyns)이라고 불리는 소수민족이 남아 있다. 헝가리 국왕의 짧은 갈리치아-볼히니아 지배는 이후 합스부르크 제국 시대에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건설로 이어졌다. [8] 중세에 '왕'이라는 직함은 교황만이 공인할 수 있는 것으로, 다닐로가 교황으로부터 왕위를 승인받은 것은 루테니아 역사에서 유일한 경우였다. [9]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우크라이나 동부에 해당하는 지방을 점령하는데는 실패했다 [10] 우크라이나-벨라루스 일대를 정복하고 나서 14세기 말엽에 이르러서야 기독교로 개종했다. [11] 리투아니아인들의 성공적인 정복 활동과는 별개는 리투아니아 본토는 튜튼 기사단의 침략으로 초토화되었다. 튜튼 기사단을 완전히 무찌르기 위해 리투아니아인들이 폴란드인들과 힘을 합쳐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튼 기사단을 대패시키고 나서야 리투아니아 본토가 평화를 되찾게 되었다. [12] 이반 4세가 광기에 물들어 혼란에 빠진 와중에 크림 칸국에서 모스크바를 쳐들어가 10만명에 달하는 처녀들을 노예로 납치한 일도 있었다. [13] 보통 노예 시장에서 수요가 많은 젊은 여성들을 주로 납치해 수레에 실어가고, 아이들은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고 버리거나 그 자리에서 말발굽으로 밟아 죽였다고 한다. [14] 이때는 아직 루블린 연합 전이라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정식으로 선포되기 전이었다. [15] 헨리크 발레지를 따라 폴란드를 방문한 프랑스인들 상당수가 귀족들이 프랑스보다도 더 세련되고 부유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한 번 놀라고, 농노들이 평생 목욕 한 번 제대로 안하고 정말 꼬질꼬질하게 항상 배고파하며 사는 모습을 보고 두 번 놀란 경험을 여행기에 기록했다. [16] 오늘날 크림 타타르인의 직계 조상들이다. 그들은 중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와 러시아 주민들을 학살하고 납치하여 노예 시장에 팔아넘기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17] 초기 코사크들의 저항은 산발적인 봉기에 그쳤지만, 후술하듯 1648년 보흐단 흐멜니츠키라는 지도자가 나타나 코사크와 정교도들을 규합하자 아예 폴란드-리투아니아 귀족들의 지층을 박살내는 수준의 거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된다. [18] 이런 유대인 농민들은 우크라이나인 농노들에 비해서 훨씬 조세 부담이 적은 편이었다. [19] 키예프 루스가 멸망한 후에도 폴리투의 정교회 학교는 교회 슬라브어를 중심으로 한 12~13세기 교육 커리큘럼을 수백년간 그대로 유지했으나, 키예프 신학교 설립 등을 필두로 교육이 크게 개선되었다. [20] 갈리치아는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에 편입되었고, 카르파티아 루테니아는 동슬라브계 루신인이 다수인 지역이었지만 10세기 이래로 헝가리 왕국의 영토였으며, 동슬라브계 국가의 영토였던 적이 없었다. 자카르파탸가 애초에 우크라이나 영토로 편입된 것도 1945년 이후의 일이다. 부코비나의 북부와 베사리비아 북부의 일부가 합쳐져 신설된 체르니우치주는 현대 루마니아의 전신 중 하나인 몰다비아 공국의 영토였으나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를 받는동안 갈리치아에서 수탈당한 우크라이나인 농민들이 다수 이주하면서 1890년대 이후 우크라이나인이 루마니아인을 넘어섰다. [21]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폴란드인 귀족들은 자신들이 《 성경》에 나오는 인물인 노아의 아들 야벳의 자손이며, 정교회를 믿는 농노들은 의 자손이라고 주장했는데, 우크라이나인들은 여기에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야벳의 후손이라 주장했다. [22] 흐멜니츠키는 정교회 학교를 마친 이후 키예프의 가톨릭 예수회 학교를 다녔지만, 철저한 정교회 신봉자였다. 우크라이나어, 중세 루테니아어, 교회 슬라브어, 폴란드어, 라틴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고, 이런 지식 덕분에 그는 코사크 부대의 서기관으로 근무했던 친폴란드적인 인물이었다. [23] 1654년 1월 페레야슬라우에서 코사크 헤트만국이 루스 차르국의 속국으로 들어갈 것을 결의했는데 페레야슬라우 조약의 결과 코사크는 광범위한 자치권과 더 많은 군대의 보유 및 키예프 대주교구의 권리 존속 등을 받아냈으며, 그 조건으로 루스 차르국에 대한 신종 및 외교권의 박탈을 대가로 치뤘다. [24] '평등하고' '민주적인' 카자크 공동체가 존재했다는 모호한 내러티브가 반복되는데, 아이러니한 점은 농노제 하의 농민공동체조차 평등하고 민주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저 시대의 동유럽에서는 각박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같은 신분 내에서는 (그 시대 기준으론) 상당히 평등하고 민주적인 집단주의를 형성했던 게 많다. 문제는 이게 설정된 집단 밖에서는 반대 방향으로 작용하였다는데 있다. 폴란드가 귀족 신분 내에서는 평등한 시민권과 참정권을 누리게 했지만 바로 그 때문에 농민들이 가혹하게 수탈당한 것처럼 말이다. [25] 어찌보면 당연한게 표트르 1세가 전제군주정을 구축하면서 전통적인 러시아 봉건영주들을 녹봉을 받는 관료계층으로 대체시켰기에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귀족'들은 사실상 귀족이 아니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대러시아 지역 밖의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한 지역에서는 상황이 달랐고 1860년대 이전까지 봉건영주적인 존재들이 비교적 안정적으로 존속할 수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중앙정부에서 일시적으로 지방유력자들을 제거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지방유력자가 등장하여 그 자리를 대체했고, 결국 중앙정부는 이들에게 적당히 당근과 채찍을 제공하면서 자유를 인정해주는 대신 제국 통치를 수용할 것을 요구했다.) 상기 마제파도 표트르 1세가 우크라이나의 지방유력자들을 견제하기 위해 밀어줘서 헤트만이 된 인물이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마제파조차도 그런 지방유력자가 되어버렸고 결국 헤트만령의 자치권 제한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때문에 러시아 제국 시대를 통틀어서 실질적인 '러시아 귀족'들은 정작 러시아인보다는 비러시아계, 소수민족들이 더 많다. [26] 때문에 코스토마로프, 셰우첸코, 흐루셰우스키를 포함한 전통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마제파를 우크라이나의 착취자, 부귀영화를 위해 민족주의와 독립운동을 이용한 위선자로 비난하거나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 형성에 큰 역할을 했어도 마제파 개인은 전형적인 중세 봉건귀족이었지 민족주의적 영웅은 아니었다는 점은 인정한다. (역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가 마제파의 사욕을 위해 이용되었기에 독립하지 못하고 소멸했다는 평도 있다). [27] 이 같은 점은 마제파에 대한 당대에서부터의 양측의 인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제파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민족주의 사관이라 얽혀 민족영웅으로 신성시되거나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이용한 이기주의자 정도로 극과 극으로 나눠 평면적으로 묘사된다. 반면 러시아에서는 그 표트르 1세와 맞섰던 인물이니만큼 당대의 호걸이자 난세의 간웅 정도로 묘사한다. 당장 파데이 불가린의 '마제파'만 봐도 영웅적이지만 독선적인 표트르 1세와 교만하지만 카리스마 있는 마제파로 둘 다 나름대로의 명암을 가진 입체적인 인물들로 묘사된다. [28] 개신교 측의 루터교회와 칼뱅교회, 가톨릭 측의 예수회 모두 루테니아 일대에서 선교 차원에서 활발한 교육 사업을 벌였던 바 있다. [29] 훗날 그리스 가톨릭 교회들은 소련이 우크라이나 서부를 합병한 이후 친서방 세력으로 분류되어 당국의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30] 이 지역들은 오스트리아가 차지했다. [31] 같은 맥락에서 제정 시대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적 성향의 역사학자인 니콜라이 코스토마로프도 이반 마제파를 사실상의 '폴란드인'이라 지적한 바 있다. [32] 이게 단순한 비유가 아닌게 당장 아담 차르토리스키조차 러시아 귀족들이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모델로 하는 서구화를 원한다고 지적했다. 애시당초 당시 차르토리스키를 비롯한 폴란드인들이 러시아 제국의 고위관료가 되고 훗날 전제정을 다시 형성하려는 니콜라이 1세 시대에 탄압받은 것은 이러한 연유였다. [33] 같은 맥락에서 동란 시대에 폴란드 왕족을 러시아 차르로 추대했던 러시아 귀족, 대홍수 폴란드 분할 때 러시아 편에 선 폴란드 귀족, 헤트만령 폐지 당시에 오히려 그것을 반겼던 우크라이나 코사크 엘리트들의 동기는 모두 동일했던 것이다. [34] 다만 르비우는 폴란드인 우크라이나인보다 훨씬 더 많았던 만큼 크라쿠프와 더불어 폴란드 민족주의 운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35] 러시아령 우크라이나 지역의 농민 한 가구의 평균 경작지가 9에이커~40에이커 정도였다면 갈리치아-로도메리아 왕국 내 우크라이나인 농민 한 가구의 평균 경작지는 6에이커 정도에 불과하였고, 그마저도 우크라이나 동부나 중부의 농토보다 훨씬 더 척박해서 소출이 낮을 수 밖에 없었다. [36] 기근과 알코올 중독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 콜레라, 발진티푸스, 천연두 및 매독이 창궐해서 해당 지역의 평균 수명을 크게 낮추었다. [37] 브라질의 이웃 국가 아르헨티나에는 우크라이나계 아르헨티나인들이 30만여 명 정도 거주하는데, 이들은 시기적으로 브라질계보다 이민 역사가 늦고 종교도 우크라이나 그리스 가톨릭이 아니라 정교회 출신이었다. 1차대전 이후 독립한 폴란드 제2공화국은 정교회를 믿은 많은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루신인 소수민족 인구가 있었는데, 이들 상당수가 폴란드 제2공화국 내의 차별을 피해 1차대전 이후에도 계속 유럽계 이민을 환영하던 아르헨티나로 이주하였다. 폴란드 제2공화국에서 아르헨티나로 이주한 인구 중 절반이 정교회 신도였다고 한다. 아르헨티나에 정착한 우크라이나인들은 우크라이나계 브라질인처럼 폐쇄적인 농업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가 현지 아르헨티나인들과 동화되었다. [38] 당시 러시아 제국의 상업망은 이미 독일인이 장악하고 아르메니아인이 그 뒤를 잇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인구가 빠져나가더라도 당장 심각한 타격을 입은 것은 아니었다. [39] 안드리 멜니크는 상대적으로 온건파였는데, 그의 성을 따서 OUN-M이라 불렸다. OUN의 무장 투쟁을 중시한 강경파가 스테판 반데라가 이끌던 OUN-B 였다. [40] 적백내전 당시인 1921년~ 1922년에도 이미 1차례 대기근이 있었다고 한다. 1932년 대기근의 원인과 결과 논란은 문서 참고. [41] 우크라이나는 토지가 비옥하고 소출이 많아서 농부들이 절대 땅을 안 내놓으려고 했고, 카자흐스탄은 그 당시에도 유목 사회 전통이 강했다. [42] 폴란드를 비롯한 외국 사학계는 대개 10만 명 전후로 추산하고 있다. [43] 이런 독일의 우크라이나 천시는 독소전 패배의 원인 가운데 하나로도 지적받는다. [44] 폴란드식 이름으로는 르부프(Lwów). 공작의 아들 '레오( 사자)'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곳이라서 라틴어로는 레오폴리스라고 했던 도시다. 안 그래도 독일어로 뢰베(Löwe)가 사자인데, 정작 독일에서는 렘베르크(Lemberg)라고 한다. [45] 반폴란드, 반러시아 성향을 가진 극우 정당 자유당의 지지도가 높은데, 폴란드 코모로프스키(Bronisław Komorowski) 대통령이 서부 우크라이나를 방문했다가 극우청년한테 계란을 맞았다. [46] 옛 이름은 폴란드의 "헤트만" 스타니스와프 포토츠키의 이름을 딴 스타니슬라비우였으며, 1962년에 작가 이반 프란코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47] 르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테르노필 같은 경우는 도시로서의 기원이 중세 폴란드 왕국이나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 있는 도시들이었다. 이 동네는 그 이후로 줄곧 도시 외곽의 농촌은 우크라이나인 절대 다수였던 반면, 시내의 전문직은 유대인과 독일인들이, 정치적, 사회적 엘리트들은 폴란드인들이 양분하며 공존했으며, 19세기에는 폴란드 민족주의자들과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 양쪽의 핵심적인 활동 거점이었다. [48] 몰다비아 공국 오스만 제국의 종속국이었고, 오스만 제국은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프루트 강 동쪽의 베사라비아 지역을 러시아 제국에게 할양했는데, 초기 독립 상태에서 이 해안 지역을 나중에 차지한 셈이라 반드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 민족 구성을 따지더라도 몰도바는 루마니아의 일부였다가 소련이 병합했다. [49] 크림 반도는 2014년에 크림 공화국으로 독립하여 우크라이나에서 벗어나고 러시아에 도로 편입된다. [50] 표트르 대제가 코사크들을 탄압한 것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시초인데, 벨라루스는 일단 코사크들이 몰려살던 구역이 아니었다. 1863년 농노 해방때도 벨라루스 농노들은 러시아 제국에서 폴란드인 지주들을 몰락시킬 목적으로 가장 적은 토지세와 이자를 납부하면 되었던 반면, 우크라이나는 비옥한 토지의 많은 소출 때문에 가장 높은 토지세와 이자가 부과되었다. [51] 한때는 폴로츠크 공국 키예프 공국이 서로 치고 받던 사이이기도 했다. [52]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2022.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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