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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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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사천성 정부주석
정체 劉湘
간체 刘湘
한국식 독음 유상
영문 Liu Xiang
포등(甫澄)
출생 1888년 7월 1일 청나라 사천성 대현
사망 1938년 1월 20일 중화민국 호북성 한커우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쓰촨육군속성학당
직업 정치가, 군인
사천주석
재임기간
1935년 2월 10일 ~ 1938년 1월 20일

1. 소개2. 생애
2.1. 유년 시절2.2. 군벌의 길2.3. 쓰촨의 지배자2.4. 대장정과 장제스의 개입2.5. 몰락과 죽음
3. 여담4. 참고문헌5. 관련문서

1. 소개

중화민국 군벌. 1920년대부터 쓰촨성에서 활약했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 쓰촨의 공고한 지배자가 되어 혼란스럽던 쓰촨에 안정을 가져왔으나 1935년부터 장제스 난징 국민정부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중앙과 마찰을 빚게 된다.

2. 생애

2.1. 유년 시절

류샹은 1888년 7월 1일 쓰촨성 다이현에서 출생했다. 육군소학에 들어가려 했으나 낙방했고 중학교조차 들어가지 못하다가 나중에 쓰촨육군속성학당에 입학했는데 거기서 워낙 공부를 못해서 학생들은 "최소한 나는 류샹보다는 공부를 잘한다.", "나는 류샹보다는 노력을 한다."라는 식으로 류샹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부모의 질책에 변명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렇게 유년시절에는 두각을 보이기는 커녕 오히려 열등한 자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류샹이었지만 그는 혼란한 쓰촨의 상황을 십분활용하여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는 길에 나섰다.

1915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 홍헌제제를 단행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하자 이에 반발한 진보당, 중화혁명당이 들고일어나는 호국전쟁이 발발했으며 전국 각지의 반발과 일본의 이권 요구 속에서 갈등하던 위안스카이가 칭제를 취소하고 급사하자 중국은 대혼란에 빠졌다. 베이징을 중심으로 한 북양정부와 남방군벌들 간의 전쟁과 다툼이 끊이지 않았고 쓰촨은 남북이 서로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으로 전락하면서 큰 혼란에 휩싸였다. 쓰촨은 호법전쟁 중에는 루룽팅, 탕지야오 등에게 장악되어 북양정부 공격을 위한 발판으로 쓰였고 북양정부는 윈난과 구이저우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쓰촨 장악이 필수적이라면서 쓰촨을 차지하려 들었다. 이 때문에 쓰촨엔 윈난, 구이저우를 비롯한 외부 군인들이 몰려와 심한 간섭을 해댔는데 이 때문에 쓰촨을 지배하는 지배자도 끊임없이 바뀌고 지배 기구의 연속성 또한 없었다. 이 때문에 길어야 1년, 짧게는 2주만에 지도부가 갈리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런 혼란상 때문에 쓰촨에는 1917년 이래로 다른 지역에서는 없었던 독특한 지배구조가 수립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방구'라는 것이었다. 이는 인접한 여러 현을 묶어서 이 지역을 지배하는 군대의 장이 그 지역을 통치하는 제도로, 쓰촨성에는 수많은 방구들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방구제는 1916년부터 포착되다가 웅극무가 실질적인 쓰촨 독군에 취임한[1] 1918년 이래로 대국을 안정시키다는 명목으로 제도화되었다. 초기에 이런 방구 체제는 그저 치안 등의 사무에 국한하고 있었으나 군인들의 위세가 강했던 쓰촨의 사정과 쓰촨을 장악하려던 탕지야오의 압력 등이 겹치면서 각군은 주둔지역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며 재정, 행정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성정부에 보내지는 세금은 턱없이 부족하고 군비 수급도 되지 않았다. 결국 1919년부터 각군이 각 방구에서 군비를 독자적으로 조달, 즉 사실상 마음대로 통치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제도가 바뀌기에 이르렀다. 결국 방구 안의 군사세력은 권력주체로 성장하기에 이르렀고 방구를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벌어지면서 쓰촨의 혼란은 가중되었다.

2.2. 군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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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의 류샹
이런 상황 속에서 1909년 속성학당을 졸업한 류샹은 쓰촨육군에 입대하였고 1916년 쓰촨 제1사단 2여단장이 되었다. 1918년엔 2사단장이 되었다. 1920년 6월에는 충칭을 점령하여 충칭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쓰촨에서는 남방에서 임명한 웅극무와 북방에서 임명한 유존후가 서로 쓰촨독군을 자처하면서 개싸움을 벌이고 있던지라 혼란한 상황이었고 류샹 등 타지 군인들의 횡포를 불만스럽게 여기던 쓰촨의 군사세력들은 여러차례 통전을 내면서 유존후의 독군 지위 등을 인정하지 않음을 표명했다. 이는 유존후가 북방 군대를 불러들일 것을 두려워한 것이었다. 북방에서 일방적으로 임명한 독군 지위를 포기하라는 토착 군사세력들의 요구에 웅극무와 유존후 모두 동의를 표했지만 유존후는 독군 자리를 다시 차지하기 위해 북방의 개입을 요청했고 이에 12월 13일 류샹 등의 쓰촨의 군사세력들은 자치를 주장하면서 웅극무와 유존후에게 태도 표명을 요구했다. 웅극무는 찬성했지만 유존후는 태도 표명을 유보했다. 이때 북양정부에서 유존후를 지원사격하기 위해 쓰촨의 군인들에게 여러 감투를 내려주면서 회유했지만 대다수의 군인들이 북양정부의 조치를 거부하면서 1921년 1월 완전자치를 표명하게 된다. 1921년 1월 8일 류샹과 단무신은 연명으로 다음과 같은 성명을 내놓았다.
"중화민국의 합법적 통일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는 쓰촨성은 완전히 자치한다. 성공민의로써 성자치근본법을 제정하여 일체의 직권을 행사한다. 정치 혁신을 도모하고, 평민교육을 보급하고, 실업진흥에 힘쓴다. 그리고 남북 어느쪽에 대해서도 비호하지 않는다. 각 성에 대해서는 계속 친목을 도모하지만 외성의 군대가 본성 경내로 들어오는 것을 불허한다."

이어 쓰촨을 통치할 기관과 지도자가 부재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1921년 6월 6일 쓰촨의 장령들이 모여 류샹을 군사장관, 쓰촨총사령 및 쓰촨성장으로 추대했다. 류샹은 7월 2일 취임했다. 원래 쓰촨의 성도는 청두로, 류샹은 청두에서 취임해야 정상이었지만 충칭의 중요성을 알아본 류샹은 충칭을 떠나려 하지 않았으나 짧은 연합의 시기가 끝나고 곧이어 방구 쟁탈전이 다시 시작되면서 1922년 1,2군 내전이 벌어졌고 웅극무와 류샹의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때 류샹 휘하인 2군 군장 양썬이 류샹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1군 3사단장 등석후의 공격에 패배함에 따라 곧 충칭에서 축출되었다. 류샹도 곧 하야하게 된다. 이에 양썬은 호북 변경에 밀려났다가 우페이푸 지지를 천명하며 쓰촨에 재진입했고 류샹이 이에 합세하였다. 이 와중에 중원의 패권을 둔 우페이푸- 돤치루이의 싸움이 시작되면서 쓰촨, 귀주, 윈난, 북양군이 모두 충돌하는 대혼란이 벌어졌고 쓰촨 전역이 전쟁터가 되었다. 웅극무는 류샹의 공격에 패하여 쓰촨을 떠났고 류샹은 제때 우페이푸와 단절하여 장쭤린, 돤치루이 등과 연계하여 우페이푸를 견제했다. 결국 장쭤린에게 패한 오페이푸가 실권하면서 북양군도 철수했다.

1925년 7월에는 양썬과 류샹의 대결이 시작되었는데 양썬은 귀주군을 등에 업고 류샹과 대결했으나 충칭을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려던 귀주군은 1926년 5월 류샹을 중심으로 하는 쓰촨연합군의 공격에 쫓겨났고 류샹은 6월에 다시 충칭을 점령할 수 있었다. 그러던 중 7월에 국민당의 1차 북벌이 시작되고 국민당은 쓰촨성 출신 인물들을 쓰촨에 파견하여 우페이푸와 관계가 밀접했던 쓰촨의 군벌들을 회유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등석후, 전송요, 유존후, 류샹 모두 국민당에 대해서 반대 입장을 표명했지만 국민당이 창사, 우한, 난창 등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고 우페이푸를 밀어내자 우페이푸 반대 통전을 보내면서 급격히 국민당 지지로 선회했다. 양썬은 국민혁명군이 후난에 진입하자 즉각 대표를 파견하여 국민당과 교섭하고 우페이푸와 국민당 사이에서 간을 보다가 1926년 9월 영국 해군과 충돌이 발생하자 격노하여 국민당에 합류하게 되었다. 11월 21일 양썬은 국민당 20군 군장으로 임명되어 국민당에 제일 먼저 합류했다.

류샹은 8월 13일 자신을 충칭에서 쫓아내려던 우페이푸를 견제하기 위해 8월 13일 반 우페이푸 통전을 내보내고 국민당 옹호를 표명했다. 그리고 국민당과 교섭을 시작, 뢰심휘, 유성훈, 류원후이 등과 함께 각각 21군, 22군, 23군, 24군 군장에 임명되었다. 뢰심휘와 유성훈은 11월 26일 즉각 국민당 합류를 선언했지만 류샹은 21군 군장 자리가 쓰촨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할 권한이 없다는 것과 내부의 반국민당 심복들의 반발에 잠시 고민하던 중 대세가 국민당에 있다고 판단하여 잠시 12월 17일에 21군 군장에 취임했다. 류원후이는 1927년 1월 1일에 같은 바오딩 군관학교 출신인 보정파 등석후, 전송요를 끌어들인 다음에 24군 군장이 되었다. 등석후는 28군, 전송요는 29군 군장이 되었다. 마지막까지 북양군벌에 충성하던 유존후도 1927년 7월에 국민당에 합류하여 15사단장에 임명되었고 1933년 5월에 23군 군장이 되었다.[2] 물론 국민당이 이들에게 원했던 것은 단지 이들이 우페이푸를 돕지 않는 것 정도였으며 쓰촨 군사세력들 역시 국민당에 적극 호응하여 북벌에 참여할 생각 따윈 없었다.

이 시기부터 류샹은 충칭을 완전히 장악하여 안정적인 통치를 할 수 있었다. 류샹은 1921년부터 계획하고 있던 충칭 근대화와 행정 개혁을 실시하여 충칭의 발전을 도모했다.

2.3. 쓰촨의 지배자

허나 충칭은 장악했으되 이 시기까지 류샹의 세력은 미약했다. 장강 하구와 쓰촨 동남부를 장악한 20군장 양썬을 비롯하여 식량 공급지인 영천, 강진 일대를 점령한 22군 뢰심휘와 충칭 인근의 합천을 점령한 28군 등석후가 모두 충칭을 위협하고 있었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24군의 류원후이로 1928년과 31년에 쓰촨성 주석에 임명되는 등 가장 막강한 세력을 자랑했다. 처음에 류샹은 휘하 부대의 군비를 조달하기도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었지만 행정, 군제 개혁을 실시하고 단무위원회를 설립하여 자경단인 민단 정리에 들어가면서 토호열신의 폐단을 줄이고 내부 중심지를 다질 수 있었다. 이런 개혁을 바탕으로 류샹은 1928년 양썬과의 전쟁에서 승리, 양썬이 가지고 있던 쓰촨 동부와 장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여 폭발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양썬은 충칭 북쪽으로 멀직이 쫓겨나고 말았다. 뢰심휘도 충칭을 공격하려다가 1928년 12월에 패전, 1929년 쓰촨 남부로 밀려 소세력으로 전락했으며 류샹의 최후 공격에 전멸하고 말았고 하야하고 잠적했다. 등석훈은 류샹과 류원후이의 연합공세에 밀려 완전히 몰락했고 1931년에 류샹에게 완전히 항복한다. 이렇게 국민당 합류 직후인 1927년부터 1932년에 이르는 5년 동안 쓰촨 내부 군벌들은 외부의 간섭 없이 쓰촨 내부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내전을 벌였고 이 내전의 결과로 류샹의 지배구역에 크게 확장되어 류원후이와 쓰촨의 패권을 놓고 대립하게 되었고 양썬 등이 탈락하고 유존후가 내전에 개입하지 않고 방관하면서 류샹-류원후이-전송요-등석후 4명이 쓰촨을 지배하는 시대가 열리게 되고 쓰촨은 6~7개의 방구로 나뉘어 통치되었다. 이 시기에 류원후이가 68개 현, 쓰촨의 46%를 지배하면서 압도적인 1위 세력이었고 류샹은 28개 현, 19%의 지역을 지배했다.[3] 등석후는 14개현, 전송요는 28개현, 양썬은 5개현, 유존후는 4개 현을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4명 지배 체제는 오래 가지 않고 1931년 이류지전[4]이 발발하면서 세력균형이 깨지게 되었다.

1928년 북벌이 끝나고 난징 국민정부가 자리잡으면서 국민정부가 쓰촨에 개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까지 국민당이 임명한 성정부위원이나 취한 조치들은 쓰촨에 어떠한 실질적인 영향을 주지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쓰촨은 반장전쟁같은 거대한 외부의 소요에도 휘말리지 않고 자기들끼리의 리그를 유지하였다. 결과적으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끌었던 이류지전에서 장제스는 단지 정전을 요구하는 통전을 보낼 뿐 어떤 개입도 하지 않았고 류샹은 1933년 8월에 순조로운 승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68개 현으로 지배세력을 확장했다. 이로써 류샹은 명실상부하고 쓰촨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2.4. 대장정과 장제스의 개입

그런데 이류지전이 한창이던 1932년 12월~33년 1월에 걸쳐 장궈타오 쉬샹첸의 홍군 제4방면군이 나타나 쓰촨 북부의 3개 현을 점령했다.[5] 장제스의 초공작전으로 대부분의 홍군이 섬멸 위기에 놓여 있었으나 마오쩌둥과 더불어 이들 쉬샹첸 부대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이었다. 초기에 홍군과 마주한 전송요 등의 쓰촨의 북부 군벌들은 홍군을 매우 얕잡아보고 홍군을 추격해서 쓰촨까지 온 후쭝난에게 "미약하나 홍군은 쓰촨의 군대가 철저히 소멸시킬 수 있으니 중앙의 대군이 진입하지 말라."라고 대표를 보내 요구했다. 류샹 편에 가담했던 전송요는 청두에서 류원후이와 싸워 이긴 후에 처리할 수 있는 '사소한 재난' 정도로 이를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전송요의 주력부대가 청두에서 싸우는 사이에 홍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2월에 정전한 전송요는 홍군을 토벌하라는 중앙의 명령에 따라 2개 현을 수복하였다. 손쉽게 이긴 전송요는 홍군을 더욱 얕잡아 보게 되었고 4월 말 다시 후방을 비우고 류원후이를 상대하러 떠났다. 그러나 홍군은 6월 말에 다시 공격해왔고 전송요를 크게 밀어붙혔다. 그러나 쓰촨 군벌 대다수는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청두를 점령하여 빨리 쓰촨을 통일하는 일에만 열중했다. 소위 '선안천'[6] 주장이었다. 이는 쓰촨 군벌들 중 누구도 홍군의 역량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덕분에 중앙의 추격을 피한 홍군은 쓰촨 북부에서 휴식을 취하며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7개 현을 점령한 홍군은 섬서 북부와 쓰촨 남부로 확장하고 정식 근거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제스는 1933년 7월 류샹을 쓰촨토비총사령관으로 임명하고 각 군에게 류샹의 지휘를 받게 했다. 8월 류원후이가 완전히 몰락하자 그제야 쓰촨 군벌들은 홍군의 토벌을 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홍군은 동쪽으로 침투하며 유존후의 여러 중심 근거지들을 점령했다. 이때 홍군이 만현까지 함락시킨다면 쓰촨과 외부가 단절되고 류샹의 근거지인 충칭에 대혼란이 올 수 있었다. 이에 대한 혼란 때문에 상단의 운행이 정지되고 충칭에서 무려 1억 5천만에 달하는 금액이 상하이, 한커우 등으로 유출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린 류샹은 10월에 토비총사령관에 취임하고 쓰촨 군대를 정리하여 5로군 15만명을 동원, 3개월 안에 홍군을 섬멸할 것이라 큰소리쳤다. 하지만 10개월이 지나 1934년 여름이 되도록 쓰촨 동북부의 홍군은 일소되지 않았다. 이때 쓰촨군대는 내전에 지친 데다가 보급, 군비, 교통, 연락 등의 통일적인 체계가 없어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게다가 등석후와 전송요 등은 토비가 끝나면 다음 목표는 자신이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이에 류샹은 이들에게 안전보장과 더불어 군비와 무기를 지원하면서 단합을 가졌으나 실질적으로 류샹이 혼자서 싸우고 있었고 홍군도 류샹 부대가 주력이라 판단, 나머지 부대는 소극적으로 대처하면서 류샹의 21군만 집중적으로 타격했다. 이에 류샹은 잇달아 패배하면서 여러 정예 부대를 상실했고 류샹의 손실은 거의 재앙적이었다. 비단 군사적인 패배 뿐만 아니라 2천만 이상의 군비를 지출하여 재정상황도 처참했다. 당시 충칭의 상황은 전력공사가 임금을 지불할 돈까지 모조리 착취당해 노동자들이 파업하여 정전 상태가 되었고 일부 지역에서 2031년까지의 세금을 예징하는가 하면 강제로 돈을 쓰게 하고 이를 거부한 사람들을 총살하였다. 그리고 돈을 가지고 나가려는 여행객도 모조리 총살했다.

설상가상으로 평소에 류샹이 스승으로 모시며 존경하던 자칭 '신선' 유종운이 군사위원장에 임명되었는데 이것이 큰 문제점으로 작용됐다. 그는 모든 분야에 점을 쳐서 결정하는(...) 막장 행보를 보였고 이 때문에 왕릉기를 비롯한 장령들의 불만이 폭발했다. 이에 류샹은 왕릉기를 당식준으로 교체했으나 이 때문에 오히려 부대들이 크게 동요, 만향 전투에서 쉬샹첸에게 박살나고 말았고 이 때문에 류샹은 유종운을 끼고 돌았던 것 때문에 엄청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결국 8월 23일 류샹은 더 이상 토비에 방법이 없다면서 총사령관에서 하야하여 충칭으로 떠났다. 이에 놀란 쓰촨 전역에서 그의 사직을 철회할 것을 요청하는 요청이 빗발쳤고 중앙에서도 그의 사직 접수를 거부했다. 사실 그의 사직 역시 정치적 난관을 돌파하려는 술수였던 것이다. 덕분에 쓰촨의 정치적 상황는 빠르게 안정되기 시작했다. 류샹은 중앙의 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하기로 결정했고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첫째 초비는 전국성의 문제이지 쓰촨 한성의 문제가 아니므로 중앙과 하나로 연합한다면, 사기를 진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로 지휘관을 징벌하는 것보다 쉽다. 만약 중앙과 연합하지 않더라도 제5로는 21군 부대이니 류샹이 생각대로 처리할 수 있지만, 기타 각로가 과거 류샹과 적인 경우도 있고, 친구인 경우도 있었으며, 지위 또한 상당하기 때문에 고려해야 될 바가 많으니 긴밀한 연계를 가질 수 없다. 중앙의 명령을 받는다면 고려할 필요도 없다. 둘째, 재정금융혼란은 전방을 불안하게 했던 원인 가운데 하나이다. 후방 재정곤란은 전방이 더욱 잘 알고 지방은행의 지폐가 태환되지 못할 때, 후방재정은 즉각 위기에 빠진다. 재정 붕괴시 전방이 즉시 동요하거나 와해되니, 빨리 정리할 방법을 강구하여 후방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전방은 문제가 없을 것이다.

위급한 상황에 쓰촨의 유력자들도 동조하면서 대표들이 난징으로 파견되어 류샹의 복직과 더불어 중앙의 파병을 요청하게 되었다. 결국 장제스는 10월 중순 류샹에게 난징에서 만날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고 1934년 10월 29일 류샹은 총사령관에 복직할 의사를 밝히며 난징으로 떠났는데 이는 그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쓰촨을 떠난 일이었다. 11월 13일 충칭을 떠나 20일 난징에 도착한 류샹은 12월 10일까지 장제스 및 중앙의 주요 관원들을 만나 중앙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하고 다음과 같은 사항에 합의했다.
  • 1. 성정부를 정식으로 성립하며 류샹이 토비총사령관으로 주석을 겸임한다.
  • 2. 중앙군은 입천하지 않지만, 기타 방법으로 류샹의 토비를 원조한다.
  • 3. 중앙이 고급참모단을 파견하여 군사를 돕는다.

한편 청두의 21군 장령들은 왕릉기를 추대하며 홍군과 싸우자고 했으나 왕릉기는 거부하고 상하이로 떠났다. 문제의 유종운은 24일에 사직 통전을 내보낸 다음에 잠적하여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2.5. 몰락과 죽음

장제스는 류샹과의 합의에 따라 1935년 2월 10일 쓰촨성 성정부 개혁에 착수하여 그동안 직권을 행사한 적이 없던 쓰촨성 성정부를 크게 강화했다. 초기 성정부 조직에 있어 류샹의 의견이 처음에는 크게 반영되었고 류샹은 성의 미정, 군정 대권을 독식할 수 있었다. 류샹은 충칭에서 업무를 시작할 것을 밝히며 기존의 정치 중심지인 청두를 떠나 충칭을 중심으로 삼았다. 이는 홍군이 청두를 위협하고 있다는 군사적 이유도 있었으나 충칭이 류샹의 정치 중심지라는 것이 크게 작용했다. 이렇게 류샹의 개인권력이 크게 강화되면서 류샹은 방구제가 이미 쓰촨에 장애라는 쓰촨 내부 인식을 이용하여 이류지전과 초공작전을 거치면서 약화된 방구들도 차례로 해체되었다. 이로 인해 성정부를 대신에 각 방구들이 관할하던 군비와 세금 징수가 모두 성정부에 귀속되면서 성정부는 크게 강화되었다. 이미 크게 약해져 있던 각군은 2월 13일 이가옥을 시작으로 자신들의 행정기구를 철폐하고 권한을 류샹에게 넘겨주었다. 물론 처음부터 각군의 영향력이 없어진 것은 아니라 세금 징수 금지 등의 조치 등이 바로 사라지거나 이에 완전히 순응한 것이 아니라 등석후 등은 세금징수를 다시 허가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류샹은 불만세력을 억누르고 엄격한 제한 조치를 취했고 행정인원 교체를 통해 민, 재정권 접수를 시도했다. 또한 행정인원 선발 방식을 개혁, 군벌들의 인사권 남용을 막고 성정부 행정을 혁신했다.

하지만 장제스의 군정조직이 쓰촨에 설치되고 참모단이 파견되면서 쓰촨은 차차 장제스에게 예속되기 시작했다. 쓰촨 군대는 중앙군과 연합하여 홍군의 진격을 저지했는데 이 과정에서 활약한 참모단의 영향력이 증대되기 시작했고 중앙군이 차차 쓰촨 내부에 주둔하기 시작하면서 청두를 비롯한 주요 지역에 중앙군이 들어왔다. 거기에 3월 2일에 충칭에 장제스 본인이 직접 들어와 10월 말까지 군사 계획을 지휘하며 자신의 지휘권을 과시했다. 홍군이 북상하면서 쓰촨의 초공 군사작전이 마무리되자 장제스는 아예 참모단을 국민정부군사위원회위원장 충칭행영으로 개조했다. 이 때문에 행영기구와 중앙군이 충칭에 상주하게 됨으로 장제스의 명의로 각 성 군정 사무가 정리되기에 이르렀다. 1935년 3월 26일 장제스는 쓰촨에 행정독찰전원을 설치했고 새로운 지휘계통을 확립함으로 쓰촨을 직접 통치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류샹을 비롯한 토착 군벌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 여기에 류샹은 양영태, 허잉친, 장췬 등과 연계하여 장제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1936년 10월 25일 한커우에서 양영태가 암살되고 서안 사건 당시에 중앙과 쓰촨의 긴장 상태가 벌어지자 풀려난 장제스는 류샹에 대해 대놓고 불만을 터트리며 강력한 조치를 행할 것이라고 하였고 1937년 봄 섬서, 호북을 통해 중앙군 10개 사단이 쓰촨에 주둔하게 했다. 류샹은 중앙을 옹호하며 각 부대로 하여금 중앙군에게 오해를 사지 않게 지시하는 등 중앙과 관계를 개선하려 했으나 1937년 6월 쓰촨군 개혁으로 쓰촨 전군을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에 소속시키고 군사비도 충칭행영에 이관시켰으며 훈련 업무, 군관학교도 접수해버렸다.

그리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류샹은 공군에 대한 통제권도 박탈당했다. 류샹은 상하이 전투와 난징 전투에 참여했으며 23집단군을 인솔하여 항일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한커우에서 병환에 걸려 앓아눕게 되었다. 그가 병상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충칭으로 수도가 이전하자 7천만 사천인들의 이름으로 환영한다고 발표했는데 얼마 안가서 병환으로 급사하였고 "민족의 생존과 쓰촨인의 영광을 쟁취하기 위해, 적군을 국경 밖으로 내쫓지 않으면, 우리 쓰촨군은 하루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겠다."이라는 유언을 남겼다.

중앙정부는 류샹을 1급 상장으로 추서한 후 1월 22일 후임 쓰촨 성장에 장췬을 임명했다. 류샹의 죽음으로 쓰촨 군벌들의 이해의 대변자가 사라지게 됨에 따라 중앙은 분산된 쓰촨 세력을 상대해야 했다

3. 여담

일설에 따르면 류샹은 산동성 정부주석 한푸쥐와 공모하여 반장 음모를 꾸미고 있었는데 한푸쥐가 1월 11일 적전도주 및 명령 불복종죄로 체포되자 충격을 받고 죽었다 카더라...

4. 참고문헌

  • 국민정부시기 사천의 지역정권과 국가통합, 김영신, 고려대학교 대학원.
  • 민국초 사천지역 군벌과 사천염정, 임지환, 성균관대학교, 전북사학회.
  • 사천성내 유상 세력의 확대와 중경 지배, 김희신, 상명대학교, 사명사학.
  • 사천성 방구체제와 지역통합, -21군 방구의 단무 개혁을 중심으로(1926~1934), 김희신, 중국근현대사학회.
  • 위키피디아 영어판 류샹 문서.
  • 위키피디아 일본어판 류샹 문서.

5. 관련문서


[1] 엄밀히 말하자면 독군으로 추대되어 광저우 군정부의 승인을 받았으나 독군 취임을 거부하고 총사령 탕지야오 대리의 명의로 지배했다. [2] 앞서서 유성훈의 23군이 언급된 것을 상기해야 하는데 유성훈의 23군은 1927년 6월 류원후이의 24군의 공격을 받아 전멸했고 유성훈은 6월 27일 하야 후 고향에 칩거하면서 쓰촨 쟁탈전에서 탈락하고 만다. 이에 대한 설명 없이 두개의 23군 얘기가 동시에 나오는 곳이 많아 유성훈의 23군과 유존후의 23군을 혼동하는 일이 많은데 읽으면서 주의를 요망하는 대목이다. [3] 하지만 류샹의 지배면적은 류원후이보다는 좁아도 압도적인 물산과 세수를 자랑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매우 풍족했다. [4] 유상-류원후이 두 유씨의 싸움이라고 이류지전. [5] 4방면군은 제4차 초공작전으로 악예환 소비에트가 붕괴되어 사천으로 이주했다. [6] 쓰촨(川) 내부 안정(安)을 먼저(先) 한다. 장제스의 선안내 주장과도 일맥상통하는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