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옌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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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핑 국민정부 초대 주석
중화민국 4대 행정원장
중화민국 5대 국방장관
정체 閻錫山
간체 阎锡山
한국식 독음 염석산
영문 Yan Xishan
백천(伯川)
출생 1883년 10월 8일 청나라 산서성 오대현
사망 1960년 5월 23일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png
학력 일본육군사관학교
직업 정치가, 군인
종교 유교
주석
재임 기간
초대 1930년 9월 9일 ~ 1930년 11월 4일
행정원장
재임 기간
4대 1949년 6월 3일 ~ 1950년 3월 7일
국방장관
재임 기간
5대 1949년 6월 13일 ~ 1950년 2월 1일

1. 개요2. 생애
2.1. 유년시기와 신해혁명2.2. 산서왕이 되다2.3. 국민혁명 시기2.4. 반장전쟁2.5. 산서로 복귀2.6. 30년대와 중일전쟁2.7. 국공내전2.8. 말년
3. 여담4. 매체에서5. 주요경력6. 참고문헌7. 관련문서

1. 개요

청나라의 혁명가, 중화민국 군벌, 군인, 정치가. 산시(山西)의 실질적인 군주로 40년 가까이 군림했던 군벌로 산서왕, 산서의 토황제란 별명이 있었으며 군벌로서는 드물게 경제성장, 사회개혁에 적극 힘썼기 때문에 모범 장관으로 불렸다.

2. 생애

2.1. 유년시기와 신해혁명

1883년 10월 8일 청나라 산서성 북서쪽의 오대(五臺 우타이)현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으며 한때 아버지의 가업을 물려받아 평범한 삶을 살았으나 가업이 몰락하면서 산서무비학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1904년 일본 유학을 떠나 진무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동맹회에 가입하여 혁명사상에 접하게 되었다. 1907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21기로 입학, 1909년 5월 27일 졸업했다. 이때 쌓은 인맥이 꽤 화려한데 오카무라 야스지, 이타가키 세이시로, 도이하라 겐지 등과 두루 인맥을 맺어 일본 군부와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1909년 졸업 후 귀국한 옌시산은 산서신군에서 군개혁과 신식군대 훈련의 임무를 맡는 한편 혁명 세력을 조직했다. 신해혁명(1911)이 일어나자 옌시산은 산시성의 성도인 타이위안에서 타이위안 기의(太原起義))를 일으켜 반혁명파 군인들을 숙청하고 혁명군을 조직하여 산시성을 장악, 산시성의 독립을 선포했다. 이후 옌시산은 산시의 입헌파, 경찰, 혁명장령들의 투표를 거쳐 산시의 도독으로 추대되었다. 사실 타이위안 기의에 옌시산 직속 병력들이 매우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옌시산이 대표로 추대된 것은 옌시산이 타이위안 기의를 기획한 조직(산서신군, 동맹회)의 핵심 인물이었던데다 타이위안 기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공헌한 바가 컸기 때문이다. 물론 옌시산이 산시 성 출신이라는 것도 중요한 장점이었다.
파일:염석산(1911).jpg
1911년의 옌시산

산시성에서의 혁명은 유혈을 최대한 줄이는 쪽으로 흘러갔기 때문에, 산시성의 혁명군은 구 청조의 관리들, 입헌파 인사들과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특히 구 기득권층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였던 옌시산은 산시성 유력자들의 지지를 받는데 성공함으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이후 옌시산은 군사들의 약탈 행위를 단속하여 산시의 치안을 확보했고 옌시산은 산시의 안정의 아이콘이라는 이미지를 확보하는데 성공한다.

1911년 12월 12일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차오쿤의 부대가 반격해오자 옌시산은 패하여 산시 성 북방으로 철수했는데 산시에서의 혁명세력이 안착하고 산시 성의 유력자들이 옌시산에게 돌아올 것을 촉구함에 따라 옌시산은 1912년 2월 19일 남하를 시작, 4월 4일에 타이위안에 입성했고 다시 산시 성 도독에 취임하고 군정부를 조직했다. 옌시산은 혁명파 장령들을 정부에 기용하였고 일본군 편제를 본따서 산서군을 재편성했다. 1913년 내몽골 독립을 저지하기 위한 몽고원정군을 파견했다.

1915년에는 군사교육단을 창설하여 장교들을 육성하는 한편, 옌시산 자신에게 위협이 될 수 있는 혁명파 장령들을 숙청하거나 명예직만을 줌으로써 권력을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집중시켰다. 독자적인 무장세력으로 성장할 싹수가 보이는 자들은 예외없이 토벌해버렸다. 옌시산의 숙청작업은 훗날 중일전쟁, 국공내전 시기까지 이어졌으며 이렇게 숙청, 살해된 정적은 수백 명에 달한다. 옌시산은 차라리 능력은 좀 부족할지라도 믿을 수 있는 심복만을 중용하는 경향이 있었다.

2.2. 산서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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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의 옌시산

옌시산은 산시성의 절대권력자가 되었지만 위안스카이가 중화민국 대총통으로 취임함에 따라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위안스카이에게 개길 힘이 없던 옌시산은 즉각 위안스카이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군축을 함으로 위안스카이의 부하가 되었다. 이때 옌시산은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산서순안사 진용(金永)에게 밀려 액정경비만을 사용하는 등 큰 제약을 받게 되었다.

황제병 걸린 위안스카이가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선포하고 중화제국의 황제를 칭하자 옌시산은 어서 즉위하라고 아첨하여 리춘, 탕지야오와 함께 1등 후작 작위를 받지만 호국전쟁이 발발하여 전국 각지의 반발에 밀린 위안스카이는 83일만인 3월 23일 제제를 취소했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16년 6월 6일 병이 악화되어 급사했다. 이후 리위안훙이 대리총통이 되었고 위안스카이가 파견한 진용도 산시를 떠났고 옌시산은 산시 내부의 경쟁 군벌들을 모조리 내쫓고 다시 산시에서 떵떵거릴 수 있게 된다. 옌시산은 실질적인 권력자인 돤치루이에게 로비를 하는 한편, 자신이 산시의 지배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한 산시의 경제성장과 근대화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리위안훙은 옌시산을 싫어하였으나 돤치루이의 지지를 받는 옌시산을 산시성장에 임명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그를 퇴진시키고 옌시산의 정적들로 교체하려 했으나 실패한다.

옌시산은 1916년 병기를 만들던 육군수계소(陸軍修械所)에 동원국(銅元局)과 철기국(鐵器局)을 신설, 화폐 제조를 시작했으며 동원 개주작업을 통해 거액의 자본을 확보, 이를 바탕으로 군수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했다. 옌시산 산하 군수공장들은 독자적인 각인을 새겨 생산해낸 짝퉁 총기들로 유명한데, 가장 유명한 것은 마우저 C96을 카피한 "산시 17식 권총(山西17式, Shanxi Type 17)". 그 밖에도 콜트 M1911 톰슨 기관단총도 베껴 썼는데, C96도 M1911, 톰슨처럼 .45 ACP탄을 쓰게 개조한 데다 중국 불법복제판 중에서는 성능이 가장 좋아서 다른 곳에서도 평이 좋았다고.

그리고 자신의 지시로 혁명군이 1913년에 발행했던 공채를 모두 갚아줌으로 자신의 정권에 대한 신뢰를 얻어냈다. 하지만 옌시산이 그 돈을 현금으로 다 갚아줄 능력은 없었고 대신에 산서성은행의 주식을 나누어주었다. 1917년 9월 다시 산시의 성장으로 취임한 옌시산은 1919년 1월 산서성은행을 설립했고 모든 교역을 자신이 발행한 은원과 동원으로 처리하게 함으로 혼란한 금융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기존의 화폐의 유통을 정지, 자신이 발행한 돈으로 교환해주었다. 그리고 전통적 금융활동과 상호 발행도 규제함으로 기존에 발행된 것들은 1923년까지 성정부가 모두 정산해주었다. 이처럼 옌시산은 오랜 세월 계속된 전통 금융기관의 지폐 발행 등을 상업 정돈을 명분으로 오랜 시간에 걸쳐 근절해가며 자신이 발행권을 독점함으로 정권을 견고히 했다. 1927년엔 규제 하에 그나마 통용이 허용되던 전통 금융을 모두 혁파하고 완전한 화폐 통일을 이뤄냈다. 그리고 성장 재취임 후부터 신정운동이란 것을 시작하여 산시성 전체의 호구조사를 통해 촌을 중심으로 하는 행정제도를 도입하고 지방자치제를 실시했다.

산시 성 자체는 중국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었으므로 옌시산이 여타 군벌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산시 성을 안정적으로 발전시켜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 때문에 옌시산은 중립화를 선언하여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등 여타 군벌들간의 내전에 관여하지 않는 한편, 변발·아편·전족 금지, 여성교육 확대 등 근대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1919년 컬럼비아 대학교 교수 존 듀이가 중국을 방문하자 산서성에 특별초빙하여 강연을 하게 하였다. 1923년 기준으로 산서성의 소학교 졸업자는 78만 4935명으로, 총 1089만에 달하던 산서성 인구의 7.2%였는데 지금 보면 볼품없는 수치로 보일 지 모르나 그 당시 기준으로는 중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으로, 2위인 산동성의 3배에 달했다.[1] 옌시산의 산시성 발전을 위해 근대화를 수행해야 한다는 발상은 옌시산 본인의 일본 유학 경험과 중국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외국인들과의 만남이 큰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바탕으로 산시의 농업경제 회복과 민생안정이 이루어졌으며 재정 수입의 증대로 산시의 상업이 발달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유가 무엇이 되었건 당시 다른 군벌들이 대부분 타 군벌들과의 경쟁과 국민 착취에 몰두하고 있었던 것과 비교한다면 '산시 성 먼로주의'라고도 평가되기까지 하는 당시 옌시산의 행보는 상당히 이색적인 것이었다. 이후 산시는 외부인들로부터 다른 주들의 롤모델로 타지역에서 산시의 발전상을 배우기 위한 대표단을 파견하기도 했고, 옌시산은 모범적인 군벌로 평가받기도 했다.

2.3. 국민혁명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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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펑위샹과 함께 찍은 사진.

192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 옌시산은 지배 영지는 작아도 휘하 병력만 20만 대군을 거느린 대군벌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주변의 우페이푸, 장쭤린, 펑위샹 등은 그 몇배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었고 옌시산은 철저히 눈치를 살피며 여러 군벌들 사이를 오가면서 그때그때 제일 잘 나가는 군벌에게 붙곤 했다. 환계가 커졌을 땐 환계에 붙었고 직계가 커졌을 땐 직계에 붙었으며 1924년엔 펑위샹과 동맹을 맺은 상태였다. 하지만 1926년 펑위샹이 산시를 노리자 장쭤린, 우페이푸와 손잡고 펑위샹을 공격했다. 이를 직봉풍전쟁이라 하는데 펑위샹은 이 싸움에서 패해 소련으로 도주했다.

그런데 1926년 7월, 장제스 중국 국민당 국민당의 1차 북벌을 선포했다. 국민혁명군의 상대가 옌시산의 동맹인 장쭤린이기 때문에 옌시산은 형식적으로는 국민당과 적대하는 듯 했지만 국민혁명군의 진로에 옌시산의 영토가 없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적대 관계가 아니었다. 1926년 12월, 장쭤린을 대원수로 추대하는 일에도 참여했던 옌시산이었지만 장제스의 군세가 우페이푸와 쑨촨팡을 격파하고 안휘, 산동에 이르자 옌시산은 보경안민을 선포하며 국민당과 적대하는 일을 피해버렸고 급기야 국민당에게 붙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여 타이위안에 국민혁명군 진수 연합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왕징웨이의 제안에 따라 북벌군 제3집단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이후 장제스는 4.12 상하이 쿠데타를 통해 공산당 숙청을 실시했고 왕징웨이의 우한 국민정부도 7월 분공을 결정하면서 완전한 국공결렬이 일어났다. 중국은 잠시 세개의 정부가 대립하는 듯 했으나 우한 국민정부와 북양정부의 공격을 동시에 받고 궁지에 몰린 장제스가 우한의 요구에 따라 사퇴하면서 영한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로써 분열된 국민당이 통합되었고 1928년 탕성즈 등이 몰락하고 경제위기의 심화로 장제스가 복귀하여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재취임했다. 장제스는 1928년 국민당의 2차 북벌을 선포했고 옌시산은 여기에 합세하여 3군 사령관이 되었다. 옌시산은 펑위샹을 견제하려는 장제스의 계획에 따라 베이징을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하면서[2] 장제스, 펑위샹, 리쭝런의 뒤를 잇는 국민당의 4대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성장하였고 차하얼 성을 비롯, 북방의 막대한 지역을 지배하는 대군벌로 성장했다.

2.4. 반장전쟁

하지만 장제스는 북벌이 끝난 이후 편견회의를 통해 군벌 세력을 감축하려 했고 지방분회를 폐지함으로 군벌의 영향력을 약화하려 했다. 이에 크게 불만을 품은 군벌들은 잇다라 반란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반장전쟁이다. 옌시산도 평진위수사령관에 임명되어 베이징과 톈진의 지배권을 보장받은 것 때문에 표면상으론 오랫동안 장제스와 국민정부에 복종하는 입장이었으나 국민정부가 베이핑 정치분회 주석에 자기 사람을 임명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평진위수사령 자리에 사의를 비치며 장제스의 베이핑 방문에 맞춰 병가를 내버리는 등 갈등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후 반장정쟁이 발발하자 옌시산의 경우에는 1929년 2월 리쭝런이 호남성 정부주석 루디핑을 무단파면한 호남 사건, 1929년 3월 바이충시의 반란을 포함한 1차 장계전쟁의 발발, 5월의 펑위샹 1차 장풍전쟁에는 장제스를 옹호하며 중앙의 편에 섰으나 펑위샹이 궁지에 몰리기 시작하자 전제 3집단군 총사령의 자격으로 펑위샹에게 반란을 일으킨 것에 대해 나무라면서도 자신이 하야하여 그의 체포령이 해제되는 것을 도울 터이니 그것이 실현되면 같이 외유하자는 기묘한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펑위샹은 입산독서를 핑계로 옌시산의 본거지인 타이위안으로 피난하였다. 이에 국민정부는 7월 6일 펑위샹 체포령을 철회하였다. 하지만 이것은 옌시산이 중원을 지배하기 위한 계획의 포석이었다.

결국 1929년 9월 장파쿠이가 반란을 일으키고 1929년 10월 펑위샹이 2차 장풍전쟁을 일으켰다. 12월에는 탕성즈가 장파쿠이에게 합류하면서 장당전쟁이 벌어졌지만 장제스에게 모두 진압되었다. 이 시점까지 사태를 관망하던 옌시산은 1930년 장제스에게 동반하야를 요구하면서 중원대전을 일으켜 중국의 지배자 자리를 꿈꾸었지만 장제스에게 패배하면서 11월에 하야를 통전, 베이핑 국민정부를 해체하고 일본이 지배하는 다롄으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 도이하라 겐지와 밀약을 맺어 산서로 돌아가 화북을 장악하는 것을 일본이 지원하는 대가로 관동군이 중국 동북부를 점령하는 것을 원조하기로 하였다.

2.5. 산서로 복귀

1931년 8월 5일 옌시산은 스여우싼이 난동을 부리는 틈을 타서 장쉐량과 관동군의 도움으로 자신의 고향에 돌아왔다.[3] 하지만 옌시산은 자신의 산시 복귀를 알리지 않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가 없어진 산시는 무주공산이 되었으며 정부 활동은 정지되었다. 옌시산의 부하들은 장제스에게 자신을 옌시산의 후임으로 삼아달라고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성장을 맡은 쉬융창을 막후조종하여 다시 지배권을 확보했고 장제스 지지를 선언하였다. 화북과 산서를 지배하려 했던 장쉐량은 옌시산의 복귀를 막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지배지역이 평진지역으로 축소되었다. 장제스는 1차 양광사변에 대응하느라 옌시산의 복귀를 방해하지 않았다.

옌시산은 자신이 없는 동안 엉망이 된 산시의 질서를 다시 회복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고 1932년 장제스와 타협하여 2월 29일, 타이위안 수정공서 주임에 취임함으로 다시 산시의 지배자로 인정받았다. 이후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이에 대응하지 못한 장제스의 난징 정부에 항의하는 시위대에 경찰이 발포한 것을 구실로, 옌시산은 산시에서 장제스에게 충성하는 국민당 세력을 축출하고 자신이 통제할 수 있는 국민당 찌꺼기만 남김으로 다시 산시의 군주로 군림하게 되었다. 장제스는 옌시산의 이러한 행태에도 옌시산이 반공 활동과 더불어 장제스의 난징 정부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는 조건으로 그를 여전히 공직에 남겨두었다. 어쨌거나 중원대전으로 인해 옌시산의 피해도 컸는데 영토 손실은 별로 없었으나 그간 그가 안정적으로 운영해오던 산시의 재정이 파탄난 것의 타격이 컸다. 이 피해는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순간까지 회복되지 않았고 그가 일본군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되는 단초를 제공한다.

1935년, 화북분리공작에 한창이던 일본 제국은 옌시산을 끌어들이기 위해 타이위안으로 관동군 참모 이시모토, 주중 일본 대사관 무관 타카하시 등을 잇달아 파견해 그를 포섭하여 화북분리공작에 활용하려 했지만 옌시산은 일본의 뒤통수를 치고 재정부장 겸 행정원 부원장 쿵샹시에게 전보를 보내 일본의 시도에 대해 고해바치며 국민정부가 일본에 대해 더욱 경계를 갖추어야 한다고 경고했다.
타이위안을 방문한 일본 군관들이 갖고 있던 지도를 볼 때, 일본은 처음에는 다만 황하 이북을 일소 교전시의 보급기지로 이용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지금은 장강 이북 지구까지 확대하였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에 일본은 옌시산 포섭을 포기했다.

2.6. 30년대와 중일전쟁

이후 옌시산은 산시 성에서 은행 조직 개편, 내전으로 위축된 산시의 상공업 활동 촉진, 난징 국민정부의 법폐 발행에 대한 대응을 하며 산시를 안정적으로 통치했고 이 과정에서 내세운 것이 바로 생산경제발전에 집중한 십년계획이었는데 덕분에 산시엔 중공업이 대거 육성되었고 이는 1935년 난징에서 장제스가 실행한 5개년 계획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옌시산은 산시로 숨어든 공산당 토벌에도 참가했으나 공산당 토벌이 장제스의 권위 확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아서 그리 열성적으로 참여하진 않았다. 하지만 초공작전과는 별개로 옌시산 역시 공산당에 대응해야 했는데 여러 군벌과의 전쟁 및 중원대전의 결과로 산시의 경제는 거의 파탄 지경에 이르렀고 1928년에서 1930년에 걸친 자연재해와 경제대공황의 여파가 중국을 휩쓸면서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다. 이러한 위기를 틈타 홍군 25군과 섬북홍군이 산시에서 활동을 전개했고 이러한 공산당의 위험에 대응하기 위해 옌시산은 1935년 9월 18일 자신의 명의로 난징의 행정원에 편지를 보내어 "섬서성과 산서성은 하천을 끼고 서로 마주보는 거리가 무려 2천여리에 걸쳐 있으며 지역이 광할하여 군대의 힘으로만 봉쇄하긴 어렵다. 겨울에 강이 결빙되면 공산비적이 어느 곳으로나 도강 가능하니 한곳도 방심할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옌시산은 1935년 8월 29일부터 9월 11일까지 타이위안에서 방공회의를 개최하여 촌락에 방공을 선전하고 산시의 예산 사용을 개혁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며 난징 국민정부의 소작농, 자작농 보호와 토지소유 제한 움직임을 담은 토지법 제정의 움직임에 발맞춰 토지사유제를 폐지하고 토지촌공유제 실시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토지촌공유제에 따르면 산시성 정부가 모든 토지를 매입한 후 이를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단위에 맞춰 분배한다는 것으로 분배 가능 나이에 징병문제, 세금 문제 등을 매우 구체적으로 연구한 상세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토지촌공유제는 국민정부의 승인을 받아 1933년부터 시험적으로 일부 촌락에서 실행되었으나 부농과 지주의 험악한 반발을 샀고 옌시산이 1935년 9월 16일 토지공유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중일전쟁 등의 시작으로 전면 시행되진 못했다. 1935년 11월 기동사변이 발발한 이후 화북의 군정대권을 정리하기 위해 펑위샹과 공동으로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후 마오쩌둥의 동정항일에 맞서 마오쩌둥의 산시 침공을 분쇄하였고 1936년 서안 사건이 발생하자 조정자를 맡아 장제스 석방을 위해 노력을 기울였으나 장쉐량이 옌시산에 대해 불신을 품게 되면서 별 도움은 못됐다. 2차 국공합작 설립 이후 홍군이 팔로군으로 개편되자 홍군은 옌시산의 지휘를 받게 된다. 옌시산은 희생구국동맹회를 창설, 반일을 외쳤으며 이를 위해 공산당과 긴밀히 협력하였고 저우언라이를 정치고문으로 삼았다.

마침내 1937년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옌시산은 2전구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산시 방어를 맡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격은 너무도 강력했고 일본군은 쑹저위안, 탕언보, 웨이리황의 부대를 잇달아 격파한 후 베이핑, 톈진을 모두 점령하고 국민혁명군의 반격을 무력화하여 황허 이북의 중국 영토를 모조리 함락시켰다. 이때 옌시산도 차하얼 성을 비롯해서 산시 바깥의 영토를 모조리 잃었다. 펑위샹이 수비하던 6전구가 무너지자 일본군은 옌시산의 영지인 산시로 몰려들었다. 옌시산은 홍군과 연합하여 평형관 전투 신커우전-타이위안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했으나 흥분한 일본군은 더욱 거세게 공격해왔다. 결국 1937년 11월 옌시산은 산시의 성도 타이위안을 내주고 린펀(临汾)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1938년 1월 15일, 펑위샹, 리지선, 리쭝런, 청첸, 천샤오콴과 함께 국민정부 군사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공산당이 옌시산 휘하의 부대들을 습격해 섬멸하는 일이 잦아지자 옌시산은 정말로 열받았고 일본군을 상대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 미운 공산당도 잡을 겸 1940년부터 일본군과 협상을 시작했다. 옌시산은 적극적인 반공으로 돌변, 희생구국동맹회와 산서청년항적결사대를 습격해 몰살시키는 진시사변을 일으켜 공산당과 완전히 돌아섰다. 옌시산은 자신이 일본에 저항하지 않으며 공산당을 토벌하는 대가로 일본군의 산시 철군과 식량 및 철 지원을 요구했다. 일본군이 고압적으로 나오자 옌시산은 협상 결렬을 선언했는데 이때 협상대표로 파견된 일본 대표가 하나야 타다시였다.(...) 하지만 일본군의 태도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으니 다름아닌 옌시산이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이 박살났다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또한 일본군이 옌시산을 암살할 것이란 거짓 정보가 들어온 것도 옌시산의 협상 거부 선언에 한몫했다. 결국 1943년에 일본군은 옌시산과의 비공식적인 휴전에 동의했고 산시의 옌시산 영지에는 공산당과 국민당 간첩을 잡아내자는 플랜카드가 걸렸다. 이후 중일전쟁에서 중국이 승리하자 옌시산은 전혀 주저 없이 장제스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했고 수천명에 달하는 일본군 패잔병과 장교들을 흡수하였다.

2.7. 국공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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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의 옌시산
더러워 보이던 인상이 급격히 부드러워졌다...

일본군이 항복하자 옌시산이 몰입했던 일은 일본군에게 빼앗겼던 타이위안을 비롯한 산시 북부의 탈환이었다. 옌시산은 휘하의 19군을 동원, 타이위안을 탈환했고 일본군과 괴뢰군의 무장해제를 명령했다. 하지만 중일전쟁 기간 동안 세력을 확장한 중국 공산당은 옌시산이 손쉽게 산서에서의 패권을 되찾게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고 무력행사에 들어갔다. 옌시산 휘하 4개 사단 1만 7천명은 산시 성 동남부인 샹당지구를 재점령했는데, 마오쩌둥은 국민당을 몰아내고 샹당지구를 점령할 것을 명령했다. 이에 1945년 8월 31일 공격 명령을 하달 받은 2만 8천명의 공산군이 9월 10일부터 상당지구에 대한 공세를 시작했다. 이때는 마오쩌둥과 장제스가 충칭에서 고급요리와 담배를 즐기며 회담을 하던 시점이었다. 이 국공회담이라는 것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 상당전역이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공산군의 습격에 19군은 참패했다. 옌시산은 19군에게 항전을 명령하였고, 23군과 83군도 급파했으나, 공산군의 습격에 패배했고, 19군도 포위섬멸당했다.​ 옌시산은 3개 군 11개 사단을 잃었으며, 이때 3천 명이 전사했고 3만 명 이상의 포로를 내었다. 그래도 화북에서 푸쭤이 등이 어느 정도 버티면서 한동안은 타이위안을 중심으로 한 정권을 유지할 수는 있었으나 요심 전역, 회해 전역에서 국민정부군이 섬멸되고 국민정부가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옌시산의 오랜 산시 통치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만주에서 공산당에게 참패 당한 국민당은 화북에서 완전히 밀려났고 공산당의 화북병단은 산시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옌시산은 국민당이 무너지기 전까지 웨이리황, 후쭝난 등과 함께 산시의 공산당을 토벌하고, 1947년 옌안을 점령하는 등 잠시 잘 나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네룽전이 지휘하는 화북야전군 1병단의 공격이 시작되자, 그의 세상도 끝장났다. 옌시산은 산시에서 물러날 곳이 없었기에 다른 군벌들이 맥없이 무너진 것과 달리 8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서 미친 듯이 저항했다. 하지만 1948년 10월 5일 샤오디엔 전투에서 2개 사단을 잃었으며 타이위안이 포위되었다. 옌시산은 일본군들까지 모조리 동원하고, 후쭝난이 보낸 지원병력을 투입하여 싸웠으나, 결국 홍군을 격퇴하는 데 실패했다. 옌시산은 타이위안을 잃을 바엔 차라리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며, 타이위안 곳곳에 가솔린과 폭약을 설치했고, 자신도 자결하기 위해 독약을 준비했다. 공산군도 옌시산이 조밀하게 요새화한 타이위안을 뚫진 못했고 전선은 잠시 소강상태에 빠졌다.

하지만 푸쭤이가 수비하던 베이핑과 톈진이 함락되면서 옌시산을 제외한 장강 이북의 모든 국민당 부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옌시산도 더 이상 버티지 못했다. 옌시산은 무려 3대 1의 수적 열세에 처해 있었고, 물자도 부족했다. 옌시산은 난징으로 날아가 대리총통 리쭝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리쭝런의 코도 석자였다. 이 무렵 공산군의 총공세가 시작되어 옌시산은 다시는 산시를 밟아보지 못했다. 옌시산의 부하 왕징궈는 공산당 지하조직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고, 후쭝난이 보내주는 공수로 연명하여 악착같이 버텼지만 대세를 돌이킬 순 없었다. 1949년 4월 24일 산시는 함락되었고 옌시산의 왕국은 사라졌다.[4][5]

한편 난징도 4월 23일 함락되었고 옌시산은 광저우로 옮겨간 국민당 정부에 합류했다. 탕성즈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난을 공산군에 바치자, 허잉친은 자신이 물러나지 않으면 배반 당하거나 자살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며 사임했다. 리쭝런은 후임 행정원장에 자신의 입맞에 맞는 인물을 세우려 했으나 그 꼴을 볼 수 없었던 장제스는 옌시산을 지지했고, 그 결과로 옌시산은 허잉친의 뒤를 이어 제4대 행정원장 겸 제5대 국방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붕괴 직전의 국민정부의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장제스와 리쭝런의 고래싸움 사이에서 눈치보는 일 밖에 없었고 이 와중에 10월에 광저우가 함락되고 11월에 충칭으로 이전했는데 12월 1일에 충칭도 함락되고 호남과 광서도 넘어가는 난장판 속에서 국부천대를 결정, 타이베이를 임시수도로 정하고 타이완으로 이주했다. 물론 그동안 아무 것도 안 한 건 아니고, 11월에 장제스 복귀를 촉구하여 장제스가 다시 총통이 되는 것에 일조했다. 그래봐야 10월 1일 본토에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된 이후 기껏 섬 몇개와 국경지대 오지만 남은 상황이긴 했지만....

2.8. 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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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의 옌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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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한 옌시산.(1950년)

국부천대 이후 1950년 1월 국방장관에서 사퇴해서 구주퉁에게 대행하게 했고 1950년 3월 1일, 타이베이에서 장제스가 다시 총통에 복직했다. 3월 8일 장제스는 천청을 신임 행정원장에 임명했고 천청의 임명안이 입법원에서 통과되면서 옌시산은 행정원장에서 사퇴했다. 행정원장 사퇴 이후 1952년 10월 10일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국민당 중앙평의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총통 자정에 임명되었으나 아무런 실권도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옌시산은 장제스에게 일본으로의 출국 허락을 요청했지만, 장제스는 그가 타이완을 떠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후 역사책이나 자신의 개인철학, 중화민국의 현재 정치상황에 대해 분석하는 책을 쓰며 조용히 살다가, 1950년대에 완전히 은퇴했다. 뒤로 갈수록 대접이 박해져서 말년에는 자동차에 넣을 기름을 얻기도 어려운 처지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1960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

3. 여담

6.25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쓴 책인 <평화 혹은 세계대전>에서 북한이 곧 남한을 침공할 것이나 남한은 이를 극복할 것이고 곧 미국의 지원으로 압록강까지 진격할 것이고 중공이 북한을 지원할 것이며 그 결과로 미군이 남한에 오래 주둔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은 바가 있는데 그의 분석은 적중했다.

옌시산이 죽은 후, 그의 무덤은 산시에서 그를 따라온 사람들이 관리했는데 2001년 옌시산을 따라온 마지막 사람이 80이 넘은 노인이 되어 더 이상 무덤을 관리할 여력이 없자 타이베이 시에서 옌시산의 무덤을 관리하게 되었다.[6]

옌시산은 천하의 주도권을 논할 법한 거물급 군벌들 중에서[7] 공산당에 전향하지 않고 국민당에 남은 거의 유일한 인물이었고 중화인민공화국에선 그를 까는 프로파간다를 많이 내놓은 바가 있다. 옌시산은 중화인민공화국에서 발표한 43명의 전범 중 32호였다.

대륙에서 쫓겨난 후에도 산시에선 옌시산의 평가가 꽤 좋았다 하며 산시인들 중에서 아직도 옌시산을 그리워하는 인물이 있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장제스처럼 이 사람도 열심히 일기를 써서 2011년 중국에서 옌시산 일기를 묶어서 펴내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에 들어오길 바라는건 어림 없을 듯...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도 인연이 있다. 안창남을 비롯한 많은 숫자의 조선인 비행사들이 염석산(옌시산) 휘하 공군부대에 있었고 산서에서 생산한 무기들을 독립군들에게 제공하기도 하였다.
파일:염석산과 아이들.jpg
1947년 아들들과 함께 사진을 찍은 옌시산.

가족사항으론 아내 서씨와 아들 다섯이 있었다.

4. 매체에서

호이4에서 산서성의 지도자로 등장한다. 다른 세력들과 마찬가지로 중화민국의 군벌 복종 국가집중 테크트리가 뜰때 중앙에 복종한다는 선택지를 선택하면 중화민국군의 장성으로 편입된다. 원래 문서 상단의 프로필 사진을 기반으로 한 초상화를 썼는데 못만들었다는 비판이 많아서 실제 사진을 기반으로 한 초상화로 패치해주는 모드도 나왔고 1.5패치와 Waking the Tiger DLC가 나옴에 따라 1947년 시점의 사진을 기반으로 한 안경을 쓴 부드러운 인상의 더 그럴듯한 초상화로 바뀌었다.

5. 주요경력

베이핑 국민정부 주석
확대회의 개최 초대 베이핑 국민정부 멸망
옌시산
1930년 9월 9일 ~ 1930년 11월 4일
중화민국 역대 행정원장
파일:대만 국장.png
3대 4대 5대
허잉친 옌시산
( 1949년 6월 3일 ~ 1950년 3월 7일)
천청
중화민국 역대 국방장관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50px-ROC_Ministry_of_National_Defense_Seal.svg.png
4대 5대 대행
허잉친 옌시산
( 1949년 6월 13일 ~ 1950년 2월 1일)
구주퉁

6. 참고문헌

7. 관련문서


[1] 옌시산의 교육프로그램의 수혜자 중 한 사람이 다름아닌 인민해방군 원수 쉬샹첸이었다. [2] 옌시산의 제3집단군이 펑위샹의 제2집단군을 제치고 베이징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장제스의 펑위샹 견제책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때문에 펑위샹은 장제스에게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다. [3] 관동군이 옌시산을 귀국시킨 것은 장쉐량을 견제하기 위함이었고 이를 위해 비행기까지 제공했다. [4] 홍군에게 붙잡힌 왕징궈는 포로가 되어서도 끝까지 전향을 거부한 채 1952년 전범 수용소에서 옥사했다. 산시성 주석 량화지(梁化之)는 자살했으며 3만 명의 수비대도 전멸했다. [5] 산시의 함락으로 홍군의 포로가 된 사람 중에는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도 있었다. 그 역시 왕징궈처럼 전향을 거부하고 버티다가 1955년 옥사하였다. [6] 자녀들이 모두 해외로 이주해서 무덤을 제대로 돌볼 후손이 없었다. [7] 보면 장제스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준의 군벌들을 들자면 우페이푸, 장쭤린, 펑위샹, 리쭝런 등이 있는데 장쭤린은 만주사변이 터지기도 전에 황고둔 사건으로 죽었고 우페이푸는 중일전쟁 중에 일본인 치과병원에서 의문사했으며 펑위샹은 공산당에 전향은 안했지만 반장활동을 멈추지 않다가 1948년 역시 의문의 선박 화재 사고로 죽었고 리쭝런은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생활고에 시달리자 공산당에 붙어버렸다. 그걸 제외하면 일급상장 계급을 가졌던 탕성즈가 중공에 항복했으니 그나마 제일 높은 편이고 룽윈이나 차이팅카이처럼 개별 단위로 공산당에 붙은 군벌들은 부지기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