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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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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의 초대 임시 대총통
이름 쑨원 (孫文 / Sūn Wén)
본명 손덕명 (孙德明·孫德明, Sūn Démíng[1], Sun Yat-sen[2])
일선(逸仙, Yat-sen)[3]
본관 광동성 동완현[4]
별명 중산 (中山, Zhōngshān)
출생 1866년 11월 12일, 청나라 광둥성 광저우[5]
사망 1925년 3월 12일 (59세 총 21305일), 중화민국 경도특별시 협화의원[6]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pn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png
학력 홍콩 Alice 의학교 의과대학원 의과박사
정당 흥중회
중국동맹회
중화혁명당
중국국민당
직업 정치가, 외과 의사, 혁명가
배우자 루무전( 1885년 - 1915년)
천추이펀( 1892년 - 1925년)
아사다 하루( 1897년 - 1902년)
오쓰키 가오루( 1903년 - 1906년)
쑹칭링( 1915년 - 1925년)
자녀 아들 쑨커, 장녀 쑨진위안,
차녀 쑨진완, 3녀 미야가와 후미코
종교 개신교 (회중 교회)
서명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un_Yat_Sen_Signature.png

1. 개요2. 생애
2.1. 혁명 활동에 투신하기까지2.2. 흥중회 설립과 반청활동의 시작2.3. 성숙되는 사상, 그러나 연이은 실패2.4. 중화민국의 성립2.5. 군벌의 난립2.6. 최후의 승부수
3. 평가
3.1. 중화권에서의 위상3.2. 개인적인 면
4. 창작물에서5. 주요 경력6. 관련문서

1. 개요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225px-Sunyatsen1.jpg
'쑨원은 정심(正心), 성의껏 모두 앞에서 선서한다. 지금부터 구(舊)를 없애고 신(新)으로 바꾸고 자립하여 국민이 된다. 성의를 다하고 전력을 당하여 중화민국을 옹호하고, 삼민주의를 실행하고, 오권헌법을 채용한다. 정치를 공명하게 하며, 인민을 안락하게 하고, 국가의 기초를 영원히 강고하게 하며, 세계 평화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중화혁명당 모임 도중,1919년 1월 12일.


말할 필요도 없는 중국의 국부(國父)이자 영웅[7]

중화민국의 인물이자, 중화민국 북양정부의 초대임시대총통. 광둥 성 향산(지금의 중산시, 中山市) 출생으로 중국인들에게는 쑨 중산(孫中山, Sūn Zhōngshān)이라는 경칭으로 불리고 있다. 관화 병음으로는 쑨 원(Sūn Wén)[8]이지만, 영어권에는 그가 자신의 호 이셴(逸仙)의 광둥어식 발음 얏센(Yat-sen)으로 알려져 있다.

광동 사람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하는 중국어를 쓰던 사람은 아니고, 홍콩 영화에 나오는 광동어를 쓰던 사람이다. 본명은 쑨 떠밍(광동어로는 Syūn Dāk-mìhng)인데 스스로 문(文)이라 이름을 바꿨다. 참고로 공자가 존경한 고대 문명국 주나라의 초대왕이 무왕(武王)이고 그의 아버지가 문왕(文王)이며, 중국은 옛날부터 암암리 중국문화의 계통을 상징적으로 문왕 주공 공자로 이어진다 생각하였다. 문(文)이란 글자는 아무한테나 올리지 않는, 중국에 있어서 최고의 시호였다. 따라서 이름을 문으로 바꿨을 때부터 자신이 새로운 공화국 문명의 시조가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를 가진 것으로 추측된다. 영미권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이름 쑨 얏센(Sun Yat-sen)은 중국 광저우의 중산대학의 영어명칭 'Sun Yat-sen University'로도 쓰인다.[9]

중산이라는 호(號)는 그가 일본에 있을 때 사용한 가명인 나카야마(中山)에서 유래하였다. 당시 일본 귀족의 성씨를 빌린 것.

2. 생애

2.1. 혁명 활동에 투신하기까지

1866년 11월 12일 빈곤한 농가에서 5남 3녀중 다섯째로 태어난 쑨원은 여섯살 때부터 소작농이던 아버지를 돕던 빈곤한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아홉살이 되던 해 동네 서당에 들어가 전통적인 교육을 받던 도중 1879년 자신보다 장남 쑨메이(孫眉)가 거주하던 하와이로 건너가 영국 성공회 미션스쿨인 이올라니 학교(‘Iolani School)[10]에서 서구식 교육을 받게 되지만 하와이 원주민 출신 아이들과 싸우고 중국 전통 문장을 낭독하는등의 생활로 적응을 잘 하지 못했다. 이러한 환경속에서 쑨원은 서구 문물에 대한 익숙함과 중국 전통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동시에 가지게 된 듯하다. 이후 1882년 이올라니 학교를 차석으로 졸업해 하와이 왕국의 칼리카우아 왕으로부터 기념품을 삼는등 뛰어난 성적을 보였고 그가 처음으로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된 시기 역시 이때였다.

그러나 기독교에 입문하고 싶다는 쑨원에 반대한 쑨메이는 다음 해 그를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서양식 생활에 익숙해진 쑨원은 고향의 신상을 부숴버리는등 혀닞에서 마찰을 일으켰고 결국 쑨원은 반년이 채 가기전에 홍콩으로 도피하고 만다. 홍콩에서 역시 영국 성공회 계열의 발췌서원(拔萃書院)에서 의술을 공부하고 선교사 찰스 헤이거(C. R. Hager)에게서 세례를 받고 형 쑨메이의 소개로 루무전(盧慕貞)과 결혼하게 된다. 한편으로 쑨메이는 쑨원에게 자신의 사업을 잇게 할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은 이 제의를 거부하고 홍콩에서 공부를 계속했다.

이후 1884년 청불전쟁이 발발하고 여기서 청나라가 패배에 가까운 졸전을 벌이자 전통 체제에 불만을 품게 된다. 이후 1886년 광저우에서 박제의원(博濟醫院)에서 동서양 의술을 공부하는 동안 청나라 체제에 불만을 품는 정스량(鄭士良) 등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본격적으로 민족주의적 혁명의 발상을 구축하게 된다.

의술을 몇년동안 공부한 쑨원은 1892년 서의서원(西醫書院) 1기를 취우수 성적으로 졸업하며 의사 면허를 취득하는데 성공한다. 이후 1893년 마카오에서 중서약국을 여나 마카오 면허가 없다는 것이 문제가 되어 광저우에서 약국을 열며 만주족 타도를 결의하는 모임을 활성화시키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까지만 해도 그의 혁명사상은 구체적인 무언가가 있다기보다는 단순히 체제 변혁을 꿈꾸는 것이었고 그것을 성공시킬수만 있다면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등[11] 의 원론적인 방법에 그쳤던 것으로 보인다.

2.2. 흥중회 설립과 반청활동의 시작

1894년 6월 쑨원은 리훙장의 농상업의 개편과 인재등용방법의 혁신등을 내용을 담은 상소문을 올린다. 쑨원은 이 상소에 자신의 인맥을 총동원하는등 나름의 공을 세웠지만 결국 상하이의 영자신문에 실리는 것에 불과한 초라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한편 직후 청일전쟁 청이 밀리자 마침내 쑨원은 정상적인 방법의 개혁을 포기하고 공화제를 통한 새로운 나라를 세울 것을 결심하게 된다. 1895년 11월 쑨원은 호놀롤루로 건너가 현지 화교와 연합해 "달로를 몰아내고 중국을 회복하여 합중정부를 창립하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정치단체인 흥중회를 결성하게 된다. 이때 흥중회의 선언문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당당한 중화가 인접국에 대항하지 못하고 문물,예절이 이민족에게 경멸당하고 있다. (중략) 어리석은 노예가 국가를 잘못 통치하여 백성을 해함으로서 한번 넘어지니 다시 일어서지 못하는 극단적인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제 힘센 이웃나라가 구워삶아 (중략) 과분의 위기가 목전에 이르었다.

이후 홍콩으로 돌아간 쑨원은 3월부터 반년간 광저우에서의 무장봉기를 준비하나 실행 직전 당국에게 들키면서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쑨원은 간신히 도망쳣지만 쑨원의 절친인 루하오둥은 결국 체포하여 사망하고 만다.[12] 이후 일본을 거쳐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흥중회 분회를 설립했고 1896년 런던을 체류하였다가 청 영사관에서 구금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13] 이 사건을 계기로 서양인에게도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이후 량치차오와 교류하며 그와 합작할 계획을 꾸미기도 했지만 그의 스승인 캉유웨이의 반대로 좌절됟었고 1900년에는 후이저우에서 봉기를 일으켜 2만명의 세력을 확보했지만 일본의 타이완 총독부가 당초의 지원계획을 철회하면서 보급부족으로 11일만에 어이없이 자진해산하고 말았다.

2.3. 성숙되는 사상, 그러나 연이은 실패

1901년경부터 쑨원은 후일 국민당의 혁명론인 삼서론을 최초로 구상시키는등 자신의 사상을 점차 체계화시켰다. 이후 도쿄와 센프란시스코 등지에서 다시 세력을 규합한 쑨원은 1905년 7월 도쿄에서 흥중회와 다른 세력들을 규합시켜 중국동맹회를 창설시킨다. 이후 후일 삼민주의라고 불리는 삼대주의의 사상을 확립시키고 삼서론의 필요성을 강론하고 혁명언론 민보를 창설하는 등의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1907년 청 정부의 압력을 받은 일본 정부가 쑨원을 내쫓으면서 문제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한다. 일본 정부는 쑨원을 출국시키는 대신 어느 정도의 활동금을 지불했는데 민간의 지원까지 합쳐 1만 5천엔에 달하는 전별금을 겨우 2천엔만 민보 유지를 위해 내놓고 나머지는 무력봉기를 위해 가져가버린 것이다. 이로 인하여 중국동맹회 내에서 다시 갈등이 펼쳐지게 되었다. 하지만 막상 그해 9월 광둥성 서부에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17일만에 자진해산시키고 12월 진남관 일대에서 다시 일으킨 봉기마저도 탄약부족으로 다시 실패로 끝내고 만다. 이후 청조의 압력으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체재마저 금지당한[14] 그는 다시 광둥성 일대에서 혁명활동을 일으키지만 1910년 2월의 광저우 봉기도 당국의 사전차단으로 실패로 끝난다.

이 시점에서 이미 동맹회 내부는 쑨원의 혁명노선에 회의를 품는 장빙린,쑹자오런의 비판으로 실질적으로 분열된 상태였다. 이후 쑨원은 각지의 화교를 찾으면서 구걸에 가까운 연설로 다시 자금을 모아 1911년 4월 광저우에서의 봉기를 준비하지만 이 역시 실패로 끝나고만다. 이로서 쑨원의 정치시대는 완전히 끝나보인듯했다. 하지만 신해혁명이라는 대사건이 터지면서 쑨원의 정치인생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2.4. 중화민국의 성립

일반적으론 신해혁명의 주동자로 여겨지지만, 사실 그는 신해혁명이 일어날 당시 미국에 있었다. 게다가 막상 봉기가 일어나던 타이밍에는 너무 피곤해 그 다음날이 되고나서야 본격적으로 혁명에 대한 대응에 나섰다. 아마 본격적인 상황을 잘 몰랐기에 이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지 예측하지 못한게 아니었을까 싶다. 여하튼 그는 이후 미국과 유럽을 순방하면서 혁명군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고 본격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청조에 대한 차관 지원을 중단시키는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12월 25일 대중의 환호 속에서 상하이에 상륙한다. [15] 이후 쑨원은 12월 27일 중화민국 초대임시총통에 선출된 뒤 태음력을 폐기하고 태양력을 사용할 것을 결의한 뒤[16] 1월 1일 중화민국을 선포하고 공식적으로 초대 대총통에 취임한다.

그러나 그는 지방 유력자들이 선출시킨 얼굴마담 이상의 의미는 없었고 전국 각지로 번져가던 혁명도 청조의 뒤늦은 조치로 점차 소강되어가고 있었다. 결국 쑨원은 북방에서 위안스카이와 타협해 청조 황실을 대우하고 그에게 임시대총통을 넘기는 조건으로 그해 4월 대총통직을 사임하고 만다.

하지만 이 협상은 청을 무너뜨리는 것까지는 성공했지만, 중화민국을 공화국으로 만들지는 못했다. 완전히 실권을 장악한 위안스카이는 사사건건 의회와 부딪혔고, 내각책임제를 유지하려는 국무총리 탕사오이를 축출하고 내무총장 자오빙쥔을 내세워 쑹자오런 암살 사건, 선후대차관 사건 등으로 독재를 강화하였다. 이에 쑨원은 계축전쟁으로 맞섰으나 진압당했다. 이후 쑨원은 쑹자오런의 국민당의 후신을 자처하는 중화혁명당을 구성하나 지나치게 쑨원 개인에게 의존하는 체제로 인하여 오히려 구 동맹회 회원에게도 외면당하고 만다.
한편, 위안스카이는 1914년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하고 초급총통제를 실시해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한 다음, 1915년 12월 12일 홍헌제제를 통해 중화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하다가 호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굴욕적으로 퇴위하고 결국 병이 악화되어 죽고 말았다. 향년 60세. 그의 뒤를 이은 리위안훙은 국회와 구약법의 회복을 선언했다.

2.5. 군벌의 난립

위안스카이의 사후 대리총통 리위안훙이 국회와 약법을 회복시키면서 중화민국은 일시적으로 안정을 찾는 듯 했지만 정부 안에서는 국무총리 겸 육군총장 돤치루이와 대총통 리위안훙 사이의 부원지쟁이, 국회 내부에서는 연구계, 교통계, 헌정상각회가 헌법 제정 문제로 격렬히 대립했다. 결국 장훈복벽 이후 국회가 해산되면서 중앙에서는 북양군벌 내의 파벌들이 돌아가며 베이징을 장악, 정치적인 실권을 행사했다. 주로 돤치루이, 쉬수정 안휘군벌 펑궈장, 차오쿤, 우페이푸 등의 직예군벌 간의 파벌싸움이었다. 호법전쟁 시점에는 장쭤린 봉천군벌도 가담하면서 헬게이트가 열렸다. 지방에서는 북양군벌과 충돌하던 광둥, 광시, 윈난 등 지방군벌들이 독자적인 길을 모색했다. 쑨원은 그 와중에 1차 호법운동을 벌여 광동, 광서, 운남의 탕지야오, 루룽팅 계계군벌, 전계군벌들과 협력해 1917년 광둥 지역에 호법군 정부를 창설, 호법전쟁을 통해 북양군벌을 토벌하고 중화민국을 되찾기를 시도했다. 하지만 애초에 지방군벌들은 쑨원이 가진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이용해 자신들의 세력을 보존하는게 목적이었기 때문에 쑨원의 북벌론에 큰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그를 1918년에 실각시키기까지 했다. 이에 실망한 쑨원은 모든 직위를 포기하고 상하이로 이동한다.

이후 쑨원은 상하이로 자신의 사상을 담은 쑨원학설을 저술하는 등의 활동을 했으나 1919년 2월 열린 남북화의가 5월에 결렬되고 1919년 5.4 운동 발발로 북양정부의 힘이 쇠퇴하는등 쑨원은 다시 재기의 기회를 잡게 된다. 이에 1919년 10월에 중화혁명당을 개조해 국민당을 창설했다. 1920년 탕사오이 등 익우사 정객들의 광저우 군정부 부정 이후의 합류로 다시 정통성을 회복한 쑨원은 광동군벌 천중밍의 협력으로 광저우로 복귀해 1921년4월 27일 2차 군정부의 비상대총통에 취임한다.[17] 이후 5월에는 군정부를 취소하고 정식 대총통에 취임하여 2차 호법운동을 전개했으나 1922년 영풍함 사건으로 축출당하면서 또다시 쫓겨나게 된다.

2.6. 최후의 승부수

두 번이나 군벌들에게 쫓겨나 도피생활을 하면서 쑨원은 군사력이 없는 자신들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온 한 가지 계기가 있었으니, 러시아 혁명의 발발과 연이은 소련의 해외 기득권 포기 및 약소민족 지원 선언이었다. 물론 당연히 공산주의를 확대시키기 위한 노림수였다. 소련의 특사 마링(Maring)은 중국 안에 공산당 세력을 키우기 위한 파트너를 찾고 있었는데, 그 대상으로 국민당과 쑨원을 선택한 것.

이후 1923년 북벌군을 재조직해 광저우를 회복한 이후 쑨원은 육해군 대원수로 취임해 임시적인 정부로 삼았다. 이후 소련과의 논의 끝에 제1차 국공합작에 합의했다. 이에 따라 공산당원들의 국민당 입당이 허가되었고, 쑨원은 국민당의 자체적인 군사력 강화에도 착수했다. 하지만 여전히 광둥성에 남아있는 몇몇 군벌들과의 싸움은 지속되었고 쑨원 본인은 2년 안에 베이징을 공격할 수 있다고 했지만 그 구상은 사실상 허상이었다.

이런 와중에 펑위샹이 정변을 일으켜 단촤루이를 축출하고 전후 처리를 위해 쑨원을 초빙하자 대원수직위를 후한민에게 맡기고 북상하였다.[18] 그러나 베이징에 도착하기 직전 병으로 쓰러진 쑨원은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곧바로 입원하였다. 당연히 전후 협상은 쑨원을 사실상 무시한 채 이루어지고 말았다.

1925년 1월이 되자 수행원들이 유언을 남길 것을 권유했지만 쑨원 본인은 "유언을 남기면 뒷사람들이 그것을 악용할 것이기 때문에 안 남기는 것이 좋다."라고 거절했으나[19] 2월이 되자 왕징웨이가 쓴 총리유촉(總理遺囑)을 공식 유언으로 승인하게 된다. 이후 한달간을 더 앓던 그는 3월 11일 마지막 유언을 남기게 된다.
"내가 이번에 베이징에 온 것은 지반을 포기함으로서 평화통일을 꾀하고 국민회의에 의해 새로운 구가를 건설하여 삼민주의와 오권헌법을 실행하기 위해서였다.(중략) 십수년에 거쳐 국가를 위해 분주히 뛰어다닌면서 품어온 주의를 결국 완전히는 실행하지 못하였다. 동지 제군들이 고군분투하여 국민회의를 하루라도 빨리 성립케 하여 삼민과 오권의 주장을 달성하기 바란다. 그렇게 하면 나는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이후 자신의 유해를 난징 쯔진산에 묻고 그것을 영구보존해달라고 당부한뒤 그 다음날 3월 12일 오전 9시 30분 쑨원은 사망한다.

3. 평가

3.1. 중화권에서의 위상

가히 전 중국인의 국부.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의 양안과 홍콩, 마카오 그리고 더 나아가 중국계 싱가포르인 등 해외의 화교들까지 전부 존경하는 인물이다.

중화민국 국부로 추앙받는 정치가이자 대륙에서도 존경하는 인물. 쑨원의 묘를 중국에서는 중산묘가 아니라 중산(中山陵)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보면 그가 현대 중국사에 끼친 영향이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중국에서 묘지명으로 능(陵)을 쓴다는 것은 그 의미가 큰데, 이유인즉 천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중산릉 부근에 몽골을 몰아내고 명나라를 건국해 한족 왕조를 부흥시킨 홍무제의 효릉(孝陵)이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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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난징 교외에 위치한 중산릉. 1929년 6월 1일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쑨원을 기념하는 건물이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싱가포르 세 곳에 모두 존재한다. 중화인민공화국 광저우 중산기념당, 중화민국 타이베이 국부기념관, 싱가포르에도 중산기념당이라는 이름으로 존재. 영어로는 모두 Sun Yat-sen Memorial Hall로 불리고 위치해 있는 도시만 구분한다.

파일:external/www.drnh.gov.tw/01_7a.jpg 파일:external/www.wst.net.cn/052010.jpg 파일:external/www.president.gov.tw/k6.jpg 파일:external/hk.on.cc/bkntw-20160520090544594-0520_04011_001_01p.jpg
하일 쑨원 중화민국 정부에서는 중화민국을 건국한 '국부'(國父)로서 최고의 위인으로 추앙받고 있다. 주요 관공서마다 그의 초상화가 걸려있고, 장제스를 비롯한 역대 총통들은 모두 그의 초상화 앞에서 취임 선서를 거행하고 있을 정도. 정치 지도자로서 쑨원의 이미지가 긍정적이니 망정이지, 다른 나라의 경우였다면 개인 숭배라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는 대목.

대신 범록연맹을 비롯한 대만 독립진영 일부에게는 장제스 만큼은 아니더라도 은근히 부정적 인식을 받고 있다. 천수이볜 정부 시절 역사 교과서에서 쑨원을 기존의 '국부'가 아닌 '외래인'으로 규정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온건한 독립파들은 국부는 아니라도 아시아 민주주의 지도자 정도로 여기기라도 하지만, 과격한 독립파에게는 그냥 대만과는 전혀 상관없는 중국인 1일 뿐이다. 물론 많은 대만인은 쑨원을 국부로 받아들이지만 일부 독립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며 국민당 시절 중국화 교육의 유산이라고 규정한다. 중화민국의 국민의례에는 국기와 쑨원 사진(국기 앞에 건다)에 3차례 허리를 숙여 절하는 것이 있다. 일부 독립파들이 이것을 거부하는 성향이 있다. 대만 남부에서는 쑨원 동상이 독립파 대만인들에게 파괴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런 경향이 모든 독립파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경우 마오쩌둥에 앞선 '혁명 선행자'로 평가한다. 기독교식으로 비유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 이전에 활동했던 세례자 요한 정도의 위상인 셈. 그렇지만 벌써 사망 100주기가 다 되어가는 만큼 현대 본토 중국인들에게는 생각만큼 큰 관심을 받고 있지는 못하다.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지는 관심과 세례 요한에 대해 가지는 관심 차이를 생각해보면 명백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에 큰 공을 세웠음은 대체적으로 긍정적이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100년 전 인물이라는 막연한 이미지로만 남아있을 뿐 특별한 비판을 받지도 않고 열렬한 추앙을 받고 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묘지를 으로 칭한다거나 주요 도시에 중산이라는 도로명이나 지명이 거의 반드시 존재할 만큼 공식적으로 중국의 위인 대우는 확실히 받고 있다. 또한 대만에서 민주진보당 범록연맹이 집권하는 시기에는 양안관계를 강조하기 위해 쑨원을 양안의 국부로서 의도적으로 띄워주는 경우가 있다.

쑨원 탄생 150주년 기념식에 본토에서는 시진핑 주석이 참가하였으나, 정작 대만에서는 조용한 상태이다. #

홍콩 마카오는 기독교 교세가 강한 만큼 쑨원을 위대한 중국인 그리스도인으로 뽑는다. 홍콩인 신자들은 쑨원과 함께 중국 최초의 목사인 량파 목사, 중화민국의 총통인 장제스 등의 인물을 가장 위대한 중화 기독교인으로 뽑는다. 쑨원 본인부터가 홍콩과 인연이 깊고, 홍콩 사람들과 똑같은 언어인 광동어를 썼다. 지금도 광둥 성은 기독교 교세도 꽤 강한 편이다. 두 지역의 중국 국민당 지지자들에게는 역시 중국을 세운 국부로서 존경받으며, 민주파 홍콩인, 마카오인에게도 민주주의를 추구한 선구자로서 추앙받는다. 이 경우에는 중국 공산당에 맞서 민주주의 수호 및 중국 내 민주화 운동가들에게 동기부여를 위해서 쑨원의 이미지를 이용하는 것이 크다. 재미있는 점은 대만의 독립파와는 다르게 홍콩 독립운동 지지자들은 쑨원을 존경한다는 것. 쑨원이 많은 기간 홍콩에서 활동했던 점이 크며, 쑨원의 혁명 정신으로 홍콩을 중국으로부터 독립시키겠다라는 신념 때문이다.

3.2. 개인적인 면


우리가 흔히 인민복이라 부르는 옷을 발명한 사람이 쑨원이다. 흔히들 인민복은 중국 본토에서만 입는다고 알려져 있는데, 쑨원이 일본 거주당시 일본의 가쿠란에 영향을 받아서 우리도 저런 실용적인 옷이 있으면 좋겠다 싶어서 만들어 낸 것이 '중산복(中山裝)'이다. 이 옷이 훗날 재봉방식의 변화에 따라 ' 마오복'이라고도 하는 인민복과 타이완의 국민복으로 나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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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국공내전 직전에 중재협상 과정에서 찍은 마오쩌둥 장제스. 두 사람이 입은 옷을 보면 둘의 차이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상의 앞 주머니를 드러나지 않게 안쪽으로 재봉하면 인민복, 드러나게 재봉하면 국민복이 된다.

첫 아내는 19세에 결혼한 루무전(盧慕貞)으로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 쑨커와 딸 쑨얀과 쑨완을 두었다. 둘은 1915년 9월에 이혼했다. 아들은 중화민국의 고위직에 오르게 된다. 두 번째 아내인 쑹칭링은 그의 절친한 친구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쑹야오주 ('찰리 송'이라는 미국식 이름이 유명하다. 중국어판 성경을 팔아서 떼돈을 번 후, 정치활동=혁명사업에 투신했다.)의 딸이었으며 쑨원의 비서였다.(쑨원과 쑹칭링의 아버지는 친구사이. 고로 그와 그녀의 사이는 무려 26살 차이. 이 때문에 현재 타이완에서는 쑨원이 진성 ' 로리콘'이 아니었는가 하는 평가도 있고, 그의 패러디 동인지도 있다. 흠좀무. 저 둘 외에도 일본 망명 중에 결혼한, 22살 차이나는 일본인 아내 오오츠키 카오루(大月薰)가 있었으며[20] 그 외 첩이 둘 더 있었다.

종교적으로는 개신교(감리교) 신자였으며 오늘날 홍콩의 교회에서는 가장 위대한 중국인 기독교인으로 쑨원을 뽑는다..
출신지 탓에 객가족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자세히는 알 수 없다.

블라디미르 레닌은 이 사람을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처녀다운 순진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대만)의 도로에도 보면 중산이라는 이름을 붙인 도로가 있는데, 시내도로 이름이 중산로(中山路)라든가 중산대도(中山大道)라는 식으로 되어있다. 대만의 경우에는 고속도로 이름까지 중산이라고 되어있는데, 중산고속공로가 그렇다.

중일전쟁 당시 중화민국 해군이 운용한 건보트 중산함과 중화민국이 건조한 자국함인 경순양함 이셴(얏센)은 쑨원의 호를 붙인 함선들이었는데, 이셴은 장인 전투에서 좌초 당해 일본군에게 노획되어 아타다라는 이름으로 개명당한 채로 일본군 해군에 편재되어 연습함으로 운용되었고 중산은 우한 전투에서 격침당했다. 다행히 이셴은 2차대전이 끝날때 까지 살아남아 대만으로 반환되었고, 중산은 격침당한지 59년 뒤에 인양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4. 창작물에서

쿠보 노리타다의 《도교사》에서는 청조의 관헌에게 쫓기는 도중에 관세음보살을 만났다고 여러 차례 이야기 하고 다녔다고 한다만 쑨원은 전술한 것처럼 기독교(신교)를 믿었기 때문에 신빙성은 없다. 단 기독교 인구가 적은 당시 동아시아인에게 어필하기 위해 한 얘기일 가능성은 있다.[21]

영화 황비홍 시리즈의 2편에서 등장하는데, 시기가 1885년이다보니 10대 후반으로 등장한다. 마지막에는 무사히 도피하면서 배 위에서 깃발을 펼쳐든다.

서유요원전에서는 백운동의 석벽에 새겨진 천강36성의 명단 가운데 한 명으로 써있다. 서유요원전의 천강36성은 천하를 뒤엎는데 성공하는 천명을 받은 혁명가들의 목록이다. 쑨원 밑에는 마오쩌둥이 써있다.

야스히코 요시카즈의 《 왕도의 개》에서는 주인공과 가끔씩 만나거나 협조하는 조역으로 등장하는데 아직 채 제대로 된 혁명가가 되기 이전의 젊은 시절의 모습이다. 이 때는 위에서 설명한 국민복도 입지 않고 청나라 복식을 하고 있고. 여기서 쑨원은 근대 중국의 국부가 아니라 의욕은 넘치되 상당히 새파란 얼치기였던 것으로 젊은 모습이 그려져 다른 매체 대비 상당히 너프된 듯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야스히코가 김옥균에 무지막지하게 버프를 거는 것과 대비하면 꽤 신기하다. 사실 그렇게 많이 나오지도 않는다.[22] 후속작인 하늘의 혈맥에서도 중국인 유학생들 동창회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왕도의 개보다 나이가 많은 모습으로 등장하며 중국인 유학생들로부터 국부로서 존경받는 모습을 보인다.

중국 전함소녀에서는 손중산의 다른 이름 얏센(逸仙)에서 따온 중화민국 경순양함 의인화되었다.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세계관에서는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코믹스 "어쌔신 크리드 : 템플러스" 에서 중국 템플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였다는 사실이 언급된다. 심지어 그냥 죽은 것도 아니고 암살단 에게 암살당했다(...).

5. 주요 경력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임시 대총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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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민국 임시 대총통 선출 1대 2대
쑨원 위안스카이
중화민국 호법군정부 육해군 대원수
(초임) 초대 대원수제도 폐지
쑨원 없음
중화민국 비상 대총통
(초임) 초대 광동정부 붕괴
쑨원 없음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대본영 육해군 대원수
(초임) 초대 대행
쑨원 후한민

1894 흥중회 창립, 중화혁명 발기
1896-1897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연구
1898 중서학교 창립
1904 중화혁명군 창립
1905-1912 중국동맹회 총리
1912 중화민국 선포
1912 중화민국 임시정부 제1대 임시대총통 취임
1912 국민연총회 총리
1912-1914 국민당 이사장 당선
1914-1919 중화혁명당 총리
1917-1918 중화민국군정부 육해군대원수 자임
1918-1919 중화민국군정부 총재(총재직) 개임
1921-1922 중화민국 비상대총통
1923-1925 중화민국 육해군대원수 대본영대원수
1919-1925 중국국민당 총리, 영구총리

6. 관련문서


[1] 쑨더밍 [2] 원래 Sun Yat-sen은 하단에 나오는 자신의 호인 얏센을 홍콩 시절부터 이름으로 사용한거다. [3] 얏센 [4] 원숭환이 출생한 곳이기도 하다. [5] 중화인민공화국 광둥성 중산시 [6] 중화인민공화국 베이징 둥청구 [7] 중화민국에서는 국부(國父)로,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진시황이래 2천년간 이어져 온 중화 전제황권을 최초로 전복시킨 혁명의 선행자(先行者)로서 존경받고 있다. [8] 쑨원의 모어인 광동어로는 '쉰 만'(syun1 man4) [9] 타이완 가오슝의 국립중산대학의 영어명칭도 'National Sun Yat-sen University이다. [10] 지금도 하와이의 명문학교로 명성이 자자하다. [11] 사실 1924년 국민당을 개조시키기 이전까지 쑨원은 중국 혁명을 성공시킬수만 있다면 군주제 복고나 영토할양도 상관없다는 극단적인 방안도 간혹 검토했었다. [12] 역사속에서 남긴 족적은 짧았지만 그의 흔적은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다. 오늘날까지 국민당의 당기이자 중화민국의 국장인 청천백일기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 [13] 쑨원 본인은 납치되었다고 주장했지만 청조는 그가 스스로 들어와 그를 가두었다고 언급했다.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14] 이와 별개로 황싱이나 다른 동맹회 회원이 다시 1908년 3월과 5월 광둥,원난 일대에서 봉기를 일으키지만 모두 실패로 끝난다. [15] 이때 혁명군은 쑨원이 대량의 차관이나 해군력을 가지고 올 것이라 기대했지만 쑨원 본인은 "혁명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왔다."라고 답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6] 중국 전통사상에서 역법에 대한 관장은 군주의 고유권한이다. 즉 달력을 개정한다는 의미는 청조 체제에 대한 공개적 부정을 의미한다. [17] 국회의원이 전원 참석하지 않아 완전한 정통성이 없어 비상대총통이라고 했다. [18] 도중 일본에 들러 대아시아주의에 대해서 연설한 것이 유명하다. 그러나 해당 연설에서 제일 유명한 '일본은 세계 문화의 미래를 위해 서양 패도의 번견이 될 것인가, 동양 왕도의 아성이 될 것인가'를 물은 것은 해당 연설이 아니라 해당 연설의 기록 말미에 추가한 것이다. [19] 실제로 그가 죽은 후에 왕징웨이, 후한민, 쉬충즈, 다이지타오, 랴오중카이 등이 그의 후계자 자리를 두고 다투었다. [20] 1888년생. 1903년 결혼, 1906년 중국 귀국 전에 이혼. 둘 사이에 딸이 있으며, 손자가 현재 일본에 생존하고 있다. [21] 쑨원이 활동한 일본은 기독교가 낮은지역이다. [22] 다만 이 작품의 손문은 한편으로는 무지막지한 버프를 받고 있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주제는 손문 사상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멸망흥한으로 대표되는 초기 손문의 민족주의적 사상보다는, 후기 손문의 사상을 주제로 다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