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족공화를 상징하는 오색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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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족공화(五族共和)는 중화민국에서 내세운 정치구호이다. 한만몽회장(漢滿蒙回藏), 즉 한족, 만주족, 몽골인, 위구르, 티베트인으로 구성된 중국의 민족들이 어울리자는 뜻이다. 영어로는 보통 Five Races Under One Union라고 한다.[1]2. 역사
오족공화에 해당하는 한족, 만주족, 몽골인, 위구르, 티베트인의 지도 |
장치옌이 처음 주장했다. 쑨원은 신해혁명 이전과 혁명 시기에는 한족 민족주의를 주창했으나 혁명 이후 중화민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오족공화를 수용했다.
중화민국 시기 해당 구호를 밀어준 배경에는 청나라의 멸망 전후하여 영국과 러시아가 각각 티베트와 몽골, 동튀르키스탄을 노리는데 있었다. 청나라 치하의 티베트와 외몽골은 청나라 멸망 이후 자신들은 만주족의 청나라와 관계를 맺었을 뿐 한족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으며 독립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한 편 청나라 치세 당시에는 만주족, 몽골족은 귀족 계급에 속했고, 티베트인은 명목상으로나마 한족보다 우대받던 민족 계급이기도 했다. 여기서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좡족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도 있는데, 좡족이 사는 광시 지역은 만주, 몽골, 티베트, 동튀르키스탄과 달리 한족의 전통적 영역인 중국 본토로 간주됐기 때문이다. 즉, 오족공화는 한족과 중국 본토 바깥에 살고 있는 대표적인 민족들의 연합을 주장하는 구호였던 셈이다.
- 한족(漢) :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중화 제국의 영토는 크게 확장되었지만 한족의 주 거주 지역은 이전 명나라 영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청나라가 새로 정복한 지역의 한족 인구는 희박한 편이었고, 만주를 제외하면 이주를 희망하는 한족도 많지 않았다.
- 만족(滿) : 만주족의 청나라가 멸망한 이후 상당수의 만주족은 기득권 지위를 상실하고 평소에 만주족과 원한이 깊었던 한족이나 후이족들에게 보복을 당한다. 한 편 티베트와 몽골은 상술한 것처럼 만주족의 청나라와 관계를 맺은 것이지 한족과는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으며, 독립을 시도하고 동시에 러시아 제국/소련 혹은 인도를 식민통치하던 영국과 접촉하던 상황이었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과거 청나라 영토 영유권 전체를 주장하기 위해 만주족과 한족은 같은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것이 자연스러웠다.
- 몽골족(蒙) : 몽골족은 만주족과 함께 팔기군의 주축이었고, 청나라의 성립과 정통성은 원나라의 옥새를 이어받아 만몽연합정권이 구성됨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 편 중화민국 북쪽에서는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인 소련이 외몽골 일대의 영토를 노렸다.
- 회족(回) : 무슬림들을 그냥 다 뭉뚱그린 표현이다. 20세기 초반 청나라 영내에는 후이족 외에도 여러 무슬림 민족 집단이 살고 있었으나, 청나라 정부는 이들을 편의에 따라 이들을 회민(무슬림 백성)으로 혹은 팔기군에 편입할 때는 몽골팔기로 분류하였지 구체적으로 분류하지는 않았다.[2] 참고로 동튀르키스탄 일대의 튀르크계 무슬림들을 위구르족이라고 지칭한 계기는 소련의 튀르크 언어학자 세르게이 말로프의 민족 분류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3][4] 신장성의 경우는 민족 구성이 복잡하고 무슬림 민족집단끼리의 알력이나 차이도 만만치 않아서 오족공화 같은 막연한 이론이 무용지물일 수 밖에 없었다.
- 티베트족(藏) : 티베트족 외에도 그냥 티베트 근처에 티베트 불교를 믿는 민족 전반을 다 싸잡아서 장족으로 분류했다.[5] 티베트가 독립국이던 시절 중화민국은 티베트에 행정력을 행사하는데 실패했지만, 대신 칭하이성에 상당수의 티베트계 주민들이 있었다.[6]
원래 입헌군주제를 유지하면서 청나라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입헌파들의 주장에서 중요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의 주요 논지 중 하나는 애초에 청나라의 여러 민족들을 구심점으로 묶는 것은 청나라 군주정인데, 청나라를 없애버리면 자연스럽게 몽골, 만주, 티베트, 위구르는 떨어져나갈 것이라고 우려를 표명했지만 쑨원과 같은 한족 민족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을 무시하면서 소수민족들이 한족의 공화국에 알아서 귀부할 것이라는 뇌피셜로 일관했다. 청나라 붕괴 이후 소수민족 이탈이 현실화되면서 입헌파가 맞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군주정 붕괴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자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다민족 공화국 개념인 오족공화였던 것. 그러나 북양정부 수립 후에도 국민당의 강경 한족주의자들과 중국의 여러 군벌들은 이러한 구호에 불쾌감을 느꼈다고 한다. 애초에 만주족에 대항한 한족 민족주의 혁명을 주장하던 쑨원에게 있어서 타도 대상이며 압도적 소수인 만주족과의 공화라는 개념 자체가 어이가 없는 것이었지만 신해혁명은 쑨원이 아니라 청나라 입헌파들이 주류가 된 혁명이었고 쑨원은 임시정부와의 지분 협상 과정에서 마지못해 이를 받아들였으나, 그가 북양정부와의 관계를 단절하면서 자연스럽게 오족공화도 부정해버렸다. 다만 완전히 폐기해버린 것은 아니어서, 중화민국 국민정부 시기나 심지어는 국부천대 이후의 장제스 집권기에도 간혹 오족공화를 거론한 사례가 있다.[7]
오늘날 중국에서도 쓰이지 않는다. 애초에 국공내전 한참 이전인 북양정부의 이념이라서 북양정부 멸망과 함께 사라진 이념이니 내세울 이유도 없거니와 국공내전의 승리 이후 중국 공산당은 과거 신장의 성스차이 군벌정권에서 도입한 소련식 소수민족 구분체계를 도입하여 소수민족 분류를 더 세분화했기 때문이다. 오족공화 자체가 엄청나게 세분화되는 현행 민족개념에 부적합하기도 하고, 지방의 왕공 제도를 인정하는 등 연방제, 자치제의 개념이 강한데 중국공산당의 성격상 용납가능한 부분이 아니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게 지금의 중화민족이다.
3. 평가
손문의 민족주의는 大한족중심의 배타적 민족주의에서 출발하였고, 그것이 그의 민족주의의 핵심이었다. 청말 손문은 청조의 전복을 도모하기 위해 만주족을 배척하는 한족중심의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는데, 청조의 몰락 이후 기존의 입장을 바꾸어 소수민족을 모두 포섭하고자 하는 의도로 포용적 민족주의로의 전환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의 민족주의는결국 한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기반으로, 소수민족을 한족중심의 문화로 동화시킴으로써 국가의 민족적 통일성을 유지하고자 함으로써, 평등주의적인 민족주의가 아니라 차별주의적 민족주의(즉 ‘중화주의적’ 민족주의[8])로 귀착되었다.
손문은 왜 오족공화론을 지지한 것일까? 배경한은 손문의 오족공화론 또한 소수민족의 영토가 중국의 영토라고 생각한 전통적 중화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배경한은 손문의 민족주의가 反帝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1920년대에도 여전히 이러한 “전통적(중화주의적) 영토관념”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1912년 ‘혁명의 와중에서 한 뼘의 영토(寸土)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국주의의 일환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손문의 오족공화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武昌起義직후 몽골과 티베트의 독립 요구에 대응하여 등장하였던 오족공화론이 표리부동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21년 3월 6일 「在中國國民黨本部特設駐粤辦事處的演說」에서도, 손문의 한족중심주의적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李國棟은 손문 민족주의가 신해혁명 이전 혁명 강령으로 삼았던 “驅除韃虜”가 편협한 민족감정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오족공화사상도 大한족중심 민족주의에 머물렀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오족공화론이 주체의 보편성이나 실행가능성, 그리고 내용적으로 모두 완벽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손문은 여기서 오족을 한족에 동화해야 그들의 민족주의가 성공할 것이라고 강조하였는데, 그가 말한 ‘동화(assimilation)’는 동등한 지위를 갖는 두 개 이상의 문화 사이에서 일어나는 ‘문화변용(transcultruation)’과는 전혀 다른 자기중심적 문화관에 기초한 것이다. “‘동화’는 자연적이고진화적으로 발생하는 일방적 과정이고, 시간이 흐르면서 소수민족문화가 주류 문화에 적응하는 필연적 결과를 만들어내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1940년 쿠바의 인류학자 Fernando Ortiz에 의해 만들어진 ‘문화변용’은 두 개 이상의 이질적인 문화가 오랜 시간에 걸쳐 본래의 문화적속성과는 다른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는 것이지만, ‘동화’는 하위문화와 상위문화라는 문화 간의 위계구조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동화’를 통한 중화민족의 완성은 한족문화에 대한 자부심에서 비롯된 것이며, 대내적으로는 중화민국의 모든 구성원의 단결을 요구하는 중화민족주의로서, 대외적으로는 아시아의 단결을 요구하는 大아세아주의의 형태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손문의 ‘중화주의적’ 민족주의의 본질과 한계
손문은 왜 오족공화론을 지지한 것일까? 배경한은 손문의 오족공화론 또한 소수민족의 영토가 중국의 영토라고 생각한 전통적 중화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배경한은 손문의 민족주의가 反帝的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1920년대에도 여전히 이러한 “전통적(중화주의적) 영토관념”을 고수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또한 1912년 ‘혁명의 와중에서 한 뼘의 영토(寸土)도 잃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대중국주의의 일환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힘으로써 손문의 오족공화론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武昌起義직후 몽골과 티베트의 독립 요구에 대응하여 등장하였던 오족공화론이 표리부동한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1921년 3월 6일 「在中國國民黨本部特設駐粤辦事處的演說」에서도, 손문의 한족중심주의적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므로 李國棟은 손문 민족주의가 신해혁명 이전 혁명 강령으로 삼았던 “驅除韃虜”가 편협한 민족감정을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후의 오족공화사상도 大한족중심 민족주의에 머물렀다고 비판한 것이다. 나아가 그는 오족공화론이 주체의 보편성이나 실행가능성, 그리고 내용적으로 모두 완벽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지적하였다.
광복이후, 세습적 관료, 완고한 舊黨, 復辟적 宗社黨이 하나로 합쳐, 오족공화를 만들어냈다. 근본적인 잘못은 여기에 있다는 것을 어찌 알겠는가? 오족의 수를 보자면, 서장인은 단지 사오백 만이고, 몽고인은 백만이 되질 않고, 만주인은 백만에 불과하고, 회교는 비록 수가 많지만, 대부분은 한족이다. 그들의 형세로 보자면, 만주인은 일본의 세력 하에 있고, 몽고는 러시아에 속하고, 서장은 대부분 영국의 수중에 있으니, 그들이 모두 자위능력이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으니, 우리 한족이 그들을 도와야 맞다. 한족은 사억이고, 혹은 그 수에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정으로 독립적인 하나의 완전한 한족 국가라고할 수 없으니, 실로 우리 한족의 막대한 수치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당의 민족주의가 성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만주는 일본에, 몽고는 러시아, 서장은 영국에 붙었으니, 즉 자위능력이 없다는 표증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떨쳐 일어나, 한족을 따르게 하자. 형제들 현재 하나의 조화적 방법이 있는데, 즉 한족을 중심으로 하여, 그들을 우리에게 동화시키고, 또한 기타 민족들이 우리 조직에 참여하여 건국의 기회를 갖도록 하는 것이다. |
손문의 ‘중화주의적’ 민족주의의 본질과 한계
새로운 중화민국은 ‘오족공화(五族共和)’를 내세우면서 청 제국 내부의 여러 비한 종족을 그 구성원으로 포함하고자 하였으나 이는 당시 한족과 비한족들이 ‘중화민족’으로 하나의 정체성을 갖추었기 때문이 아니라 신생 중화민국의 영토를 드넓은 청 제국의 판도에 걸쳐 구성하고자 이들 지역을 자신의 영토로 포괄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에서 비한족 집단들은 이전 청조 아래 주어졌던 정치적 승인이 철회되고 한화의 대상으로서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이 부정되었다.
…
(중략)
…
현재 중국사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를 구성하는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조는 화하(華夏)의 역사적 강역을 넘는 유목민족을 포괄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한족은 그 일부로서 이에 포함되었는데, 중국은 오히려 이러한 청제국의 역사를 한화나 혹은융합을 전제로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이 만든 역사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청 제국 안에서 한족에 비해 특별한 지위를 승인받았던 만주 몽골 티베트인들이 제국 붕괴 이후 ‘과분’ 담론과 오족공화의 논의와 함께 그 역사적 목소리가 억눌려버린 것을 의미한다. 여기엔 중국의 오랜 역사를 일정한 역사 목적론적 입장에서 권력 담론으로 재구성하면서 청사가 중국 역사와 관련해서 담고 있는 많은 역사적 내용들이 잠식시켜버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청조(淸朝)의 제국 통치와 신해혁명, 그리고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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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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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사는 통일적 다민족 국가를 구성하는 ‘중화민족’ 다원일체론을 기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조는 화하(華夏)의 역사적 강역을 넘는 유목민족을 포괄하는 거대한 제국을 건설하였고 한족은 그 일부로서 이에 포함되었는데, 중국은 오히려 이러한 청제국의 역사를 한화나 혹은융합을 전제로 다원일체의 ‘중화민족’이 만든 역사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청 제국 안에서 한족에 비해 특별한 지위를 승인받았던 만주 몽골 티베트인들이 제국 붕괴 이후 ‘과분’ 담론과 오족공화의 논의와 함께 그 역사적 목소리가 억눌려버린 것을 의미한다. 여기엔 중국의 오랜 역사를 일정한 역사 목적론적 입장에서 권력 담론으로 재구성하면서 청사가 중국 역사와 관련해서 담고 있는 많은 역사적 내용들이 잠식시켜버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청조(淸朝)의 제국 통치와 신해혁명, 그리고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론
4. 같이보기
[1]
실제로 영어로 오족공화를 설명할 때
Ethnic 대신
Race를 쓴다. 동북아시아의 '민족' 개념이 영어의 Ethnic이나
Nation보다는 독일의
Volk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2]
한족 관료들은 한어를 못하는 무슬림들은 그냥 편의상 이런저런 멸칭으로 불렀다.
[3]
본래 이슬람교는 민족 간의 구분을 장려하지 않는다. 유사 사례로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민족 개념이 19세기 초반부터 성립이 되었더라 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인이라는 민족 명칭이 본격적으로 사용된 것은 20세기 초반부터였던 사례를 들 수 있다.
[4]
20세기 초반
성스차이 군벌 정권은 중화민국 정부보다는 오히려 소련과 훨씬 더 가까운 사이였다.
[5]
대표적인 사례로 계통상 위구르족에 가까운
유고족이 중화민국 시기 장족으로 분류된 사례를 들 수 있다.
[6]
지금도 중국 내 티베트족 인구 중 절반 수준인 300만명 정도만
티베트 자치구에 살고 있고,
칭하이성과
쓰촨성 서부에 사는 티베트족 인구가 각각 130만명에 달하므로, 민국시대에도 분포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가정하면 당대에도 상당히 많은 티베트계 주민이 중화민국의 통치 하에 있었을 것이다.
[7]
가령 1971년에 쓰여진 '나는 중화를 사랑한다'(我愛中華)
설명(중국어)
영상 라는 중화민국 군가의 가사에 오족공화를 거론한 구절이 있다. 현실적으로 중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소수민족들을 일정 부분 회유할 필요가 있으므로 오족공화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8]
손문이 말하는 중화민족주의와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이후 중국정부가 표방하고 있는 중화민족주의는 엄연히 다르다. 물론 일부 학자는 그 함의가 같다고 말하지만, 손문의 중화민족주의가 한족중심주의를 보다 적극적이고 명시적이라는 점에서 배타적이고 차별적인 민족주의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구분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손문의 그것은 한족의 문화적 우월성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그것을 통해 소수민족의 문화가 한족의문화에 동화해야 함을 당연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중화민족주의를 "중화주의적" 민족주의라고 규정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