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05 14:42:23

오족협화

1. 개요2. 상세3.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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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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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제작된 오족협화 선전 포스터[1]
오족협화()는 일본 제국이 1931년에 만주사변으로 획득한 만주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하여 내세운 구호이다. 이 선전 괴뢰국 만주국을 통해서 만주국이 실효지배하는 만주지역에서 이용되었다.

오족에 포함되는 다섯 민족은 조선족, 만주족, 한족, 몽골족, 야마토족이다. 시기에 따라 조선인 대신 백계 러시아인이 들어갈 때도 있었다.

2. 상세

만주지역 고조선 건국 이후부터 후삼국 시대까지만 해도 절반 가량 한민족의 지역이었으나, 926년에 발해가 멸망한 이후에는 몽골, 거란, 여진 등 북방유목들이 차지하려고 달려드는 지역이 되었다. 적어도 원나라가 무너진 이후부터 만주 여진족이 주류인 지역이 되었다. 후금이 세워지고 나서 여진족 만주족으로 개칭된 후, 만주족이 명나라를 무너뜨리고 청나라를 세우자, 만주지역은 청나라라는 중화제국의 수많은 지역 중에 특이할 것이 하나 없는 지역이 되었고, 청나라는 만주족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만주를 봉금의 지역으로 두었지만 명나라령이었던 요동지방에는 원래 한족의 비율이 꽤 되었던 것과 더불어 본래 유목민족인 고로 유목민족 특유의 인구부양력 문제로 만주족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2] 만주에는 금방 다른 민족이 들어왔다.

가장 먼저 조공책봉관계가 되어 더이상 최전방이 아니게 되었던 만큼, 조선인들이 먼 옛날 자신들의 조상들이 살던 곳에 슬금슬금 들어오기 시작했다. 조선 청나라 사이에 국경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고, 조선 정부가 만주에 조선인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수수방관하면서 남만주 지역인 간도에서 조선인 인구비율이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늘기 시작했다. 한족은 본래 요동에서 살고 있었긴 하지만 청나라 시기까지도 전 만주 지역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민족은 아니었다.[3] 하지만 중화민국이 성립한 이후, 한족들의 구역이었던 대륙 본토가 군벌들에게 찢겨져서 각축장이 되자, 한족 피란민들이 비교적 안전하면서도 농업이 가능한 만주로 피난을 오면서 만주의 한족 비율이 상당히 늘어났다. 몽골인 인구도 무시할 수 없었는데, 본래 몽골도 만주도 같은 청나라령이었던 만큼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인들도 만주에 들어와서 살았다. 만주족이 유목생활을 포기하고 농경민족으로 전환한 것에 비하여, 몽골인은 유목생활을 유지했기에 만주족에 전혀 동화되지 않았고, 몽골인들은 척박한 지역에 따로 살았던 만큼, 한족에 동화되지 않아서 독자적인 문화를 유지했다.

1931년, 일본 제국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들어올 때, 이미 만주는 빈 땅이 없는 지역이었다. 대한제국을 침략했을 때는 지계 발급이 늦어져서 토지소유권이 불분명했던 것을 이용해, 동양척식주식회사을 만들어 토지조사사업를 빌미로 조선인들에게서 토지를 강탈했으나, 만주를 점령할 때는 개화기가 끝난 지 한참 지난 후였기에, 만주는 이미 근대적인 토지제도가 정착한 곳이었고 따라서 이런 편법으로 토지를 수탈하는 데는 무리가 있었다.[4] 어느 지역을 통치하든 안정적으로 통치하려면 그 지역에 자국에 충성하는 핵심 민족의 인구가 일정 비율 존재해야 하는데, 대다수의 인구가 일본 제국에 통치를 받고 있던 조선인조차도 일본 제국에 충성하지 않았다.[5]

따라서 자신들의 백성인 야마토 민족의 비율이 높아질 때까지는 만주에 사는 여러 민족들을 어느 정도 달래가면서 통치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하여 만주의 주요 민족성분을 차지하던 만주족, 한족, 조선족, 몽골족 4개의 민족을 자신들의 민족인 일본인과 섞어서 오족()이라 칭하고, 함께 공존하며 살자고 한 것이다.[6]

일본 제국은 만주국을 건국한 1932년부터 일본인 개척촌을 짓고 일본인을 계속 만주로 이주시켰으나[7], 제2차 세계 대전 일본 제국 패전으로 끝날 때까지, 만주 일본인 비율은 충분하지 못했으므로 만주가 소련군에 의하여 일본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때까지도 오족협화라는 구호는 계속 유지되었다.

물론 오족협화에서 진정한 협화는 없었다.[8] 실상은 해당 지역에서 일본인의 비율이 늘어날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헛소리였을 뿐이었고, 일본인들은 만주국 내에서 압제자 노릇을 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하고 만주를 뱉어 낼 때, 일본인과 같은 시기에 들어온 조선인[9]은 만주에 거주하는 것을 허락받을 때, 일본인들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축출되어야만 했으며, 그들은 히키아게샤가 되었다.

3. 같이보기



[1] 왼쪽부터 한족, 조선인, 만주족, 몽골인, 일본인. 들고 있는 국기는 만주국 국기이며 다섯 사람 아래 '대만주국'이라 쓰여 있다. 다른 민족은 모두 옛 전통 옷을 입고 있지만 일본인만 서구식 정장을 입은 게 특징이다. [2] 하지만 누르하치가 만주를 통일할 쯤에 농경에 종사하는 만주족 수도 상당히 늘었고 다수의 만주족이 반농반목을 하는 실정이었긴 하다. [3] 애초에 만주는 대한제국이 멸망한 이후에 들어간 조선인들이 만주 북방에서까지 농지를 가꾸기 전까지는 쌀농사를 못 짓는 지역이었고, 쌀농사가 안되는 지역은 인구부양력이 얼마 되지 않는다. [4] 애초에 이런 식의 강탈은 반발을 불러 일으킨다. 조선의 경우 열강들의 외면 하에 모든 조선의 의병들을 잔인하게 총칼로 다 밀어버렸던 뒤라서 반발을 감수할 수 있었는데 반해, 만주는 중국의 한 지역인 고로 괜히 지역민들을 건드렸다가 반란이 일어나면 중국과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막기 힘들었다. [5] 당연하다. 개화기 이후 만주에 넘어간 대부분의 조선인들은 경제적 문제로 넘어간 사람들이고, 그 경제적 문제 중에 하나가 일본 제국의 수탈이었다. [6] 한때 일본이 연해주를 탐내 은근슬쩍 조선인을 내선일체라는 명분으로 일본인에 포함시키고 조선인의 자리에 러시아인을 넣어 오족의 성분을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할힌골 전투의 패전 이후 일본은 연해주를 차지하려는 생각을 완전히 포기했다. [7] 심지어 조선인들의 이주도 권장했다. 당시 일본인은 조선인들을 만주로 보내고 일본인을 조선으로 보내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었다. [8] 게다가, 마지막의 和 라는 글자는 일본적인 것, 더 나아가서는 일본 그 자체를 의미하는 글자로 쓰이기도 하는데( 화과자, 와카 등)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족협화라는 말 자체가 '다섯 민족이 일본(제국)에 협력한다' 라는 뜻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 [9] 물론 대한제국 성립 이전부터 들어온 인구도 상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