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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헌제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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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憲帝制
Declaration of Empire of China
파일:천단제사.jpg
칭제 후 천단에 제사를 지내는 위안스카이

1. 개요2. 배경3. 전개
3.1. 위안스카이의 권력 강화3.2. 군주제 여론 조성3.3. 여론 조작3.4. 국민대표대회3.5. 황제에 오르다
4. 결과5. 참고문헌6. 관련문서
6.1. 인물6.2. 사건

1. 개요

1915년 12월 12일 중화민국 대총통 위안스카이가 추대의 형식을 빌어 황제에 즉위하고 중화제국을 선포한 일을 말한다.

2. 배경

위안스카이는 쑹자오런 정적을 암살하고 선후대차관 사건을 일으키는 등 연일 독재를 강화하였다. 이에 쑨원 등 국민당 세력은 위안스카이를 몰아내기 위해 제2차 혁명이라 불리는 계축전쟁을 일으켰으나 2개월 만에 위안스카이에게 진압당하고 말았다.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한 위안스카이는 1914년 신약법 발표를 통해 '초급총통제'라 불리는 황제적 총통제를 실시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아예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싶어하고 있었다.

3. 전개

3.1. 위안스카이의 권력 강화

파일:대총통 취임.jpg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와 각국 공사들

1913년 시점에서 위안스카이는 자신에게 반대하던 국민당을 2차 혁명을 구실로 난당으로 몰아 국회에서 몰아내고 량치차오의 진보당과 연정을 하여 국회를 장악하고 있었다. 1913년 9월 진보당은 정식으로 대총통을 선출하고 헌법을 나중에 제정하자는 의안을 제출했고 잔류한 국민당 의원들도 동의하면서 10월 4일 임기 5년 중임제의 대총통 선거법을 공포했다. 10월 6일의 대총통 선거에서 위안스카이는 경찰과 공민단이라는 명의의 깡패들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통해 1차 투표에서 759명 중 471표를 얻었다. 당시 법률상 75% 이상의 지지를 받아야만 대총통으로 당선될 수 있었기 때문에 2차 투표가 진행되었고 2차 투표에서 745명 중 497표를 얻어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0월 7일 리위안훙이 부총통에 당선되었고 10월 10일 위안스카이는 자금성 태화전에서 마치 황제처럼 정식 대총통에 취임했다.

위안스카이는 헌법연구회를 조직하여 자신에게 유리한 헌법을 작성하라고 국회에 압력을 넣었으나 국회는 이를 고려하지 않고 여전히 내각책임제 성격이 강한 천단헌법 초안을 작성했다. 이 천단헌법에도 대총통 권한이 임시약법에 비해 대폭 강화되어 위안스카이의 의중이 어느 정도는 고려되었으나 위안스카이는 만족하지 않고 국민당 해산령을 내려 국회를 정회시켜버렸다. 그리고 국회를 유지시켜달라는 량치차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국회를 대체하기 위한 정치의회를 조직, 1914년 1월 10일 중화민국 국회 해산을 단행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조.

1913년 12월 22일 위안스카이는 <약법 수정안에 대한 자문>을 제출했다. 정치회의는 위안스카이에게 입법기관을 조직해 약법을 준수해달라고 부탁했고 1914년 1월 11일 정치회의에 입법기관 구성 방법과 명칭, 직권 범위, 위원 선거방법을 자문했다. 1월 24일, 정치회의는 약법회의를 조직하고 자세한 것을 논하자고 했고 1월 26일에 <약법회의 조직조례>가 공포, 약법회의가 조직되었다. 3월 18일 약법회의가 개회되었고 3월 20일 <약법 수정대강 7조>가 제출되었다. 이는 의회를 양원제에서 단원제로 바꾸고 권한을 대폭 축소하여 행정기관 산하에 두며 외교대권, 관제, 관규 제정권, 문무관리 임면권이 모두 대총통에게 귀속되었다. 이것이 이른바 <초급총통제>이다. 5월 1일 위안스카이는 이를 중화민국 약법, 혹은 신약법이라 하여 공포하였고 5월 3일 중앙관제개혁을 통해 국무원을 폐지하고 정사당을 설치했다. 그리고 국무경으로 국무총리를 대신하게 하고 7월에 기존의 국무원 산하 조직들을 총통부로 예속시켰다. 6월 20일에 참정원이 설립되면서 정치회의는 해산했다. 여기에 1913년 12월 29일 약법회의가 위안스카이에게 영합하기 위해 대총통 선거법을 수정하면서 5년 중임제의 대총통은 10년 무한 연임제의 사실상 종신 대총통제로 바뀌게 되었으며 자신의 후임에 대해 위안스카이가 추천할 수 있어 사실상 세습까지도 가능해졌다. 위안스카이는 그야말로 황제와 같은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3.2. 군주제 여론 조성

한편 중화민국의 정계에서는 1913~1914년 사이에 중국에는 공화정치가 합당하지 않으며 군주제를 다시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퍼지고 있었다. 표면상 이 주장은 청나라를 복고하고 선통제를 다시 즉위시켜야 한다는 복벽파들의 주장으로 보였다. 실제로 일부 황족과 노내선, 송육인 등 청나라 유신들을 중심으로 복벽파들은 선통제의 복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아들 위안커딩이 황태자가 되고 싶어서 조장한 점도 있었다. 위안커딩은 1913년 낙마 부상으로 독일로 휴양을 갔다가 빌헬름 2세를 만나 중국이 군주제를 실시해야 강해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황태자, 나아가서 황제의 꿈에 부풀게 되어 연일 아버지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기고 있었고 위안스카이의 환심을 두고 다투던 월계와 환계 심복들이 황제적 총통이 된 위안스카이에게 남은 것은 황제 자리 밖에 없다고 부추겼다.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부추긴 대표적인 인물로 양사기 등이 있었다.

측근들의 부추김에 위안스카이는 짐짓 반대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지만 1914년 11월 23일 복벽 운동 징치령을 발표하면서 자신의 즉위에 방해가 될법한 청조의 복벽파들을 탄압할 것을 지시하면서 복벽파들의 행동을 중단시켰다. 결국 마침내 위안스카이는 "너희들이 알아서 해라"라는 식으로 발언하며 황제 자리에 야욕을 드러냈다. 위안스카이는 이러한 군주제 여론 조성에 있어서 적극적으로 나서진 않았더라도 적어도 묵인, 방관하였다. 그러던 중 일본 제국의 21개조 요구가 있자 위안스카이는 일본의 지지를 얻기 위해 이를 수락하고 말았다. 일본은 위안스카이의 즉위를 부추겼고 영국은 처음에는 중국의 혼란을 우려하여 반대하다가 일본이 찬성하자 찬성으로 선회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의 심복 펑궈장, 돤치루이 등은 위안커딩이 위안스카이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고 설치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들의 세력이 예전보다 강성해진 것은 둘째치고 만약 공화제의 형식이라면 그들이 위안스카이의 뒤를 이어 다음 대총통이 되는 것을 도모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제국이 선포된다면 위안커딩이 후계자가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돤치루이의 경우에는 노골적으로 위안커딩을 비난하면서 강경하게 제제 운동에 반대했고 난징의 펑궈장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위안스카이는 돤치루이의 사직을 종용하는 한편 펑궈장은 구슬렀다. 1915년 4월 양탁[1]이 <군헌구국론>을 발표하여 군주제를 주장했고 위안스카이는 양탁이 세상에 드문 영재라고 극찬하며 매우 좋아했다. 1915년 6월 펑궈장이 군주제 실시의 의사가 있냐고 묻자 위안스카이는 부인했다.
"난 절대 황제가 될 생각이 없네. 원씨 집안에는 예순 살을 넘긴 사람이 없어. 내 나이 올해 쉰여덟이야. 황제가 된다 해도 몇해나 하겠나? 그리고 황제는 자식들에게 물려주는 법인데 큰아들 커딩이는 장애가 있고, 둘째 커원이는 가짜 선비고, 셋째 커량이는 도적인데 누가 대업을 이을 수 있겠어? 걱정하지 말라구."

말은 이렇게 했지만 위안스카이는 돤즈구이, 장진방, 뇌진춘, 원내관, 하수전 등의 심복들을 시켜 군주제를 준비하고 있었다. 위안커딩은 진보당을 포섭하기 위해 량치차오를 초대하여 공화정을 비난하고 군주제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며 그의 뜻을 떠보았지만 량치차오는 오히려 위안스카이가 군주제를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일가를 거느려 톈진으로 도주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세무총감독 겸 참정원 참정 량스이와 교통부 차장 엽공작이 주도하는 교통계 파벌을 포섭하려 했다. 위안스카이는 숙정청을 시켜 육군차장 쉬수정, 교통부 차장 엽공작, 재정부 차장 장호가 횡령을 했다는 혐의로 탄핵하였고 량스이 등에게 죄를 면해줄테니 군주제에 찬성할 것을 요구했다. 교통계는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협조하지 않으면 숙청당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위안스카이의 제제 운동에 적극 협력하게 되었다.

이어 위안스카이는 각 지방의 장군들을 베이징에 불러 공화정에 문제가 없는지 물으면서 그들의 속내를 떠보았다. 위안스카이의 의중을 알아차린 장군들은 하나같이 운영이 잘 되지 않으며 대총통에 더 많은 권한이 있어야 한다고 위안스카이에게 아첨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외교관 루정샹, 외교차장 조여림 등에게 일본, 미국, 독일이 하나같이 군주제에 찬성하고 있다고 그들을 구슬렀고 본격적인 제제에 나서게 되었다.

3.3. 여론 조작

1915년 8월, 위안스카이의 미국인 정치고문 프랭크 J. 굿나우(Frank Johnson Goodnow)[2]가 베이징의 신문은 <아시아일보>에 <공화와 군주론>이란 글을 발표하여 중국에는 공화제가 부적당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일본인 법률 고문 아리가 나가오(有賀長雄)도 동조했다.
파일:프랭크굿나우.jpg 파일:아리가나가오.jpg
프랭크 굿나우 아리가 나가오

8월 14일에는 소위 주안 6군자라 불리는 양탁, 손육군, 호영, 유사배, 호영, 이섭화 등이 주안회 선언을 발표하여 군주제를 주장했다.
신해혁명 당시 국민들은 감정에 사로잡혀 국정을 미처 고려하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공화국을 세웠다. 중화민국 건립 이후 나라는 많은 위험을 겪어왔고 국민은 심한 고통을 겪고 있다. 이렇게 계속 나아간다면 고통은 끝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대 정치학자 굿나우 박사도 군주제는 공화제에 비해 우수하므로 중국은 군주제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다. 중국 국민은 눈앞의 일만 보고 나라가 망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 나라 밖의 사람들도 우리 나라에 관심있는 사람은 큰 소리로 우리를 위하여 질책하고 충고하고 있는데 어찌 우리나라 사람은 반대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책을 도모하지 않는가. (...) 그러면서도 장차 애국이라 말하겠는가.

이들은 신해혁명 폭발 이후 창황하게 중국의 사정에 맞지 않은 공화제를 제정하여 혼란만 있다고 지적하며 브라질, 아르헨티나, 멕시코 등 중남미 국가를 사례로 들며 공화정이 들어서면 당쟁, 전화가 끊이지 않으니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제도 개혁이라는 당연히 제정을 복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맞춰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들이 민의에 따라 국체를 군주제로 변경할 것을 요청했다. 다만 주안회의 주장이 청나라 시대의 전제군주제를 복고하자는 정도로 시대착오적인 것은 아니라서 입헌군주제를 주장하기는 하였다.
본회가 국가를 위하여 도모하여야 할 일은 먼저 혼란을 정리한 이후에 잘 다스려야 하는 것이므로 먼저 혼란을 정리하는 길은 민주를 폐지하고 군주를 회복하는 것이며 잘 다스리려면 민주 전제를 페지하고 군주 입헌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이 본회가 토론한 결과이다.

이런 제제 여론은 위안스카이의 어용 세력이었으므로 당연히 반발이 일었다. 량치치오가 <이상하도다, 국체문제여>라는 글을 발표해 군헌구국론을 반박했고 "소위 청원자들은 모두 원씨 스스로가 청원하는 것이고 (...) 소위 옹립하려는 자들도 원씨 스스로 옹립하는 것이다."라고 제제 운동에 대해 싸늘하게 비평했다. 장사교는 "스스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은 그 이름이 나는 것을 원하지 않으며 나이 든 관리는 물러나는 길 밖에 없다. 그런데 신문 언론은 함께하려 하지 않는다."라고 제제를 주장하는 언론을 비판했고 왕봉영, 서불소 등도 주안회에 편지를 보내 주안회의 주장을 비판했다. 쉬스창이나 캉유웨이를 비롯한 복벽파들도 선통제의 복위를 주장하면서 위안스카이의 제제 운동을 비판했다. 심지어 주안회가 위안스카이의 복벽 운동 징치령을 어겼다고 고소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위안스카이는 학자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것에 자유가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제제 운동을 옹호했다.

주안회는 공민청원단을 조직하는 한편 9월 2일 참정원에 청원서를 올려 국체를 바꿀 것을 요구했다. 이에 위안스카이는 9월 6일 양사기를 파견하여 입장을 밝혔다.
"군주제로 바꾼다는 것은 총통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렵지만, 국민의 청원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한 것으로 대다수 국민의 의견을 들어본다면 타당한 방법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이에 위안커딩이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했던 일이 바로 일본 외무성이 톈진에서 발행하던 <순천시보>를 위조하여 아버지에게 갖다바친 일이었다. 이를 보고 위안스카이는 여론이 자신의 즉위를 지지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었다.[3] 위안커딩의 만행은 이로 끝나지 않아서 위안스카이가 평소에 존경하던 학자 엄수[4]가 주안회의 군주제 주장은 백해무익하다고 만류하고 주안회가 위안스카이를 속이고 있다고 충언하자 위안커딩은 지팡이를 휘둘러 창문의 유리창을 모조리 깨버리는 등 난폭하게 행동했다. 사람들이 위안커딩이 엄수를 해치려 한다고 귀뜸해주자 놀란 엄수는 톈진으로 돌아가 다시는 위안스카이의 부름에 응답하지 않았다. 또한 위안커딩은 당재례가 위안스카이에게 요임금과 순임금이 아들이 아니라 현자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말을 하자 그를 쫓아내기도 했다.

이어 주안회는 이름을 헌법협진회로 고치고 9월 16일 참정원에 2차 청원서를 보내는 한편 9월 19일 전국청원연합회를 조직하여 심운패를 회장으로 삼고 나언도, 장진방을 부회장으로 삼고 수많은 청원단을 만들었다. 이들은 "공화 정치를 유지하여 나간다는 것은 중국의 역사와 나라의 사정에 적합하지 않아서 오랫동안 정치적인 안정을 기대할 수 없다."라고 주장했다. 양탁도 경쟁적으로 각종 청원단을 만들어 경사상회 청원단, 상무총회 청원단, 교육회 청원단, 부녀 청원단, 거지대표 청원단(...), 인력거 청원단, 기생 청원단까지 조직하여 모든 인심이 군주제를 요구하는 것처럼 위안스카이를 부추겼다.
이렇게 된 이래 22개의 성과 특별 행정구의 각 단체들은 원로들을 추천하여 동인회를 결성하자고 공동으로 호소하고 있는데, 그 호소문이 수만 언에 다다르고 참여한 사람도 수만명에 달하고 있으며 그들이 바라고 있는 것은 군헌 두 글자 뿐이다.

봉천순열사로 파견된 돤즈구이도 각성 장군, 도통, 호군사들을 연합해 황제 즉위를 청하고 참정원에 계속 체제 개혁을 요구했다. 이에 참정원은 9월 17일, 1915년이 지나기 전에 국민회의를 소집하거나 별도 대책을 세울 것을 결의했고 위안스카이는 11월 20일 이전에 국민회의를 소집하여 국체를 결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전국청원연합회는 3차 청원서를 바쳐 국민회의 소집을 반대하고 별도 기관을 통해 국체를 정하자고 했다. 참정원은 민의를 존중한다는 구실로 국민회의 대신에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겠다고 했다.

3.4. 국민대표대회

10월 8일[5] 위안스카이는 <국민대표대회 선거법>을 공표하였고 10월 10일 국민들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조용히 기다리라는 명령을 발표했다. 국민대표대회 준비는 위안스카이 부자와 측근들이 선출, 투표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지휘했다. 10월 25일 선거가 시작되어 11월 20일 대표 선출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1월 28일 국체 결정 투표가 행해졌는데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들이 각 성에서 투표를 진행하고 그 표를 베이징에 보냈는데 투표장이 일단 각 성의 장군과 순안사의 관서였으며 투표장마다 군경이 경호한다는 명목으로 병사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감시원들이 투표를 감시하였다. 그리고 대표들에게 거마비라는 명목으로 500원이 지급되는 등 정상적인 투표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투표가 시작되자 제제를 부추기던 일본과 영국이 태도를 바꾸어 체제 개혁을 늦추라고 했고 러시아도 동참했다.10월 28일 오후 일본, 영국, 러시아 공사들이 합동으로 외교총장 루정샹을 만나 군주제 추진을 연기할 것을 권고했다.
"중국의 제제복귀가 급속히 추진되고 있는데, 중국에는 지금 이에 반대하는 소리가 자뭇 높아지는 현상이다. 만약 제제가 실행된다면 뜻밖의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크다고 본다. 중국에서 만일 불행한 사태가 발생된다면 그것은 중국과 관계를 가진 각국으로서도 매우 염려되는 일이다. 따라서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현명한 조치를 취하여 제제의 실행을 잠시 연기함으로써 환란의 발생을 미연에 방지해주기 바란다. 우리가 중국에 이같은 권고를 하는 것은 결코 중국의 내정을 간섭하자는 뜻이 아니라, 다만 극동의 평화를 위해서이다.

11월 1일 위안스카이는 다음과 같이 화답했다.
"중국의 제제주장은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일이지만 정부는 계속 이것을 거부해왔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이 주장이 날로 강화되고 있기 때문에 만약 정부가 이를 강압한다면 커다란 문제가 발생될 것이다. 정부는 지금까지, 인민들의 국체변경을 위한 입법원에 대한 청원 등에 대하여 아직은 그 시기가 아니라고 언명해왔다. 그러나 중국의 약법에 의하면, 주권은 국민 전체에 속해 있고, 국체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국민의 여론에 따르지 않을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그리고 치안문제에 대해서도, 각 성은 민의에 따라 국체문제를 해결한다면 문제가 발생할 까닭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어 프랑스와 이탈리아도 루정샹에게 군주제 추진을 늦추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듣지 않았다. 어차피 미국이 불간섭주의를 추구하여 뭐라 말이 없던 것도 있었고 열강들도 제1차 세계 대전 때문에 정신이 없었을 뿐더러 위안스카이를 적대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2월 11일 참정원에 전국 국민대표 1993명의 표가 모였다. 그리고 1993명 전원이 군주제에 찬성했다. 이어 각 성에서 위안스카이를 황제로 추대하자는 옹립서가 올라왔는데 여러 성에서 올라온 문서가 모두 내용이 같았다. 이는 위안스카이의 측근 주계검이 두 차례에 걸쳐 각 성에 미리 지시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이어 양탁과 손육군이 참정원이 각 성의 총대표로 위임받아 국민대표대회 총대표 이름으로 추대서를 올리자고 제안했다. 이어 현장에서 비서장 임장민이 추대서를 낭독하고 참석한 대표 전원이 기립하여 만장일치로 '삼가 위안스카이 대총통을 중화제국 황제로 추대하여, 국가최상이며 국가최고의 주권을 봉정한다'라는 결의를 통과시키고 해산했다.

3.5. 황제에 오르다

12월 11일 정오, 위안스카이에게 황제에 올라달라는 추대서가 올라왔다. 위안스카이는 오후에 이를 거절하는 화답을 보냈다.
중화민국의 주권은 전체 국민으로부터 온 것이다. 국민대표대회에서 표결하여 입헌군주제로 고친 이상 본 총통은 이를 반박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본인에게는 충분한 공적이 없다. 신해혁명 전에는 정계의 요직에 앉아 이미 승하한 황제를 따랐지만 부끄러움과 후회가 많다. 그런데도 제위에 오른다면 마음이 어찌 편안하겠는가? 이는 도덕적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중화민국 초기에 있는 힘을 다하여 공화정을 세우겠다고 참의원에 맹세도 했다. 오늘 만약 황제가 된다면 이 맹세를 저버린 것이니 신의를 저버리게 된다. 그러니 다른 사람을 추대하기 바란다.

이에 오후 5시, 참의원이 다시 개회하여 15분만에 총 2600자에 달하는 장문의 추대서를 만들어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추대서에는 위안스카이의 여섯가지 공적을 거론하며 도덕적 문제와 신의 문제가 없다고 부추겼다. 12월 12일 아침, 위안스카이에게 추대서가 도착했고 위안스카이는 마침내 국민의 열성적인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는 구실을 대며 제위를 승인한다는 입장을 발표했다.
"오늘날 국민들이 공화제에 염증을 느끼고 군헌으로 나가고 있다."

이에 5개국 대표는 더 이상 반대하지 못하고 장래의 일을 지켜보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12월 13일 위안스카이는 백관들의 하례를 받고 12월 14일 각 부와 행정기관에 제제로 바꾸는 준비를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한편, 입헌군주제를 위해 참정원에 군주입헌 헌법기초위원을 추천하라 하여 양탁 10명을 헌법기초위원회에 임명했다. 12월 15일에는 부총통 리위안훙을 무의친왕에 책봉하고 12월 19일 등극대전주비처를 조직하였는데 이미 지난 9월부터 준비해온 것으로 위안스카이의 사양이 말 그대로 가식임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즉위 예산으로 590만원을 책정하여 성대한 즉위식을 준비했다. 위안스카이는 중화민국이 표방한 만주족, 몽골족, 회족, 장족에 대한 대우 조건이 유효하다고 천명했으며 나이 많고 덕망 높은 인물들에겐 자신에게 신하로 칭하지 않아도 된다고 발표, 경친왕, 순친왕, 리위안훙, 세속, 나동, 주복을 '옛 동료'로 쉬스창, 장건, 조이손을 '옛 친구'로 선정하여 언제든지 황제를 접견할 수 있고 황제에게 무릎꿇고 인사할 필요가 없는 특권을 주었다.

12월 21일에는 장쉰, 펑궈장, 니쓰충, 강계제 등 6명을 1등 공작에, 탕지야오, 옌시산, 리춘, 자오티 등 9명을 1등 후작에, 진윈펑, 차오쿤 등 12명을 1등 백작에, 리허우지 등 4명을 1등 자작에, 16명을 1등 남작에 봉했고 12월 23일 장쭤린 등 3명을 2등 자작에, 9명을 2등 남작에, 7명을 3등 남작에 봉했다. 12월 31일에는 연호를 제정하여 1916년을 홍헌원년으로 선포했다. 1월 10일에 외몽골도 홍헌 연호를 사용하겠다고 알려왔다.[6] 위안스카이는 1월 1일에는 총통부를 신화궁으로 개칭하고 1월 5일 전국에 제제의 이로움을 선전하는 한편 2월 21일에 우페이푸 등 2명을 3등 남작에 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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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 기념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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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제국지새와 황제지보의 인문

위안스카이는 즉위를 위해 그야말로 물을 쓰듯이 돈을 썼는데 즉위식을 위한 590만원을 포함해서 심복들을 위한 하사금, 각종 작전비로 1천만원을 소요했고 궁궐 개축비용으로 470만원을 썼으며 45만 달러를 소요하여 용의 조각과 자수가 새겨진 호화로운 옥좌를 만들고 9폭 병풍과 부채를 걸었다. 그리고 베이징의 가장 큰 복장점 서부상에서 용포를 특별 주문하였는데 50만원 짜리 제사용 용포와 20만원 짜리 즉위용 용포로, 용포 제작비용만 70만원이었다. 또한 여론 매수를 위해 쓴 돈이 30만원, 심복들에게 지급한 작전비가 300만원이었다. 위안스카이의 얼굴을 새긴 화폐도 준비되었으며 중화제국지새, 황제지보라는 옥새를 새로 만들었다. 보옥으로 만들어진 이 인장에는 <나면서부터 천명을 받들었으며 황제의 지위가 천지와 더불어 다함이 없다>라는 뜻의 <誕膺天命 歷祚無彊> 여덟글자가 새겨졌다. 위안스카이가 즉위를 위해 쓴 돈은 총 6천만원에 이르렀고 이는 재정파탄을 일으켜 위안스카이의 목을 죄게 되었다.

4. 결과

즉위는 1916년 1월 1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위안스카이가 옥좌에 오르기도 전에 1915년 12월 25일 차이어, 량치차오, 탕지야오, 리례쥔이 호국군의 거병을 알리고 호국전쟁을 일으키면서 중화제국은 시작도 하기 전에 반란에 직면했다. 이어 전국 각지에서 즉위를 촉구하며 아부하던 장군들도 호국군의 기세에 군주제 반대 통전을 보내며 급기야 독립을 선포하니 위안스카이는 1916년 3월 23일 제제를 취소하고 6월 6일 사망하면서 위안스카이의 황제 놀이는 1916년을 기준으로 겨우 83일, 그 전해인 12월 12일을 기준으로 한다 하더라도 겨우 백일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자세한 것은 호국전쟁 문서 참조.

호국전쟁 이후에도 호법전쟁, 안직전쟁, 1차 직봉전쟁, 2차 직봉전쟁, 손봉전쟁, 직봉풍전쟁이 일어나는 등 중화민국은 군웅할거의 난세에 돌입하여 장제스로 천하를 통일하기 전까지 분열되었다.

이때 정신 못차리고 황태자가 되려고 날뛰던 위안커딩은 나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학자의 길을 걸으며 중일전쟁 일본 제국의 회유를 거절하고 국공내전 이후에도 살아남는다.

위안스카이의 제제는, 입헌군주제 표방, 나름의 민의 중시 명분, 궁녀 간택을 비롯한 일부 구습 폐지를 천명하여 무턱대고 과거로 돌아가는 행각이라고까진 볼 수 없었으나 이미 종신총통제를 실시하여 절대적인 권력을 틀어쥔 상태에서 일부 측근들의 부추김에 여론과 반대세력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무모하게 강행한 반동적 행각은 틀림없었다. 결국 량치차오를 비롯하여 위안스카이에게 협조하던 혁명세력들을 등돌리게 하고 쑨원 등은 그야말로 불구대천의 원수로 만들어 그의 체제를 더욱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대가는 위안스카이 자신의 목숨과 중국의 대혼란이었다.

5. 참고문헌

  •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신승하, 대명출판사.
  • 원세개 평전, 허우이제
  • 아편전쟁에서 5.4운동까지, 호승, 인간사랑.
  • 다큐멘터리 중국 현대사 1권, 서문당 편집실, 서문당.
  • 중국 근현대사 2권 근대국가의 모색(1894~1925), 가와시마 신, 삼천리.
  • 중국현대정치사론, 장옥법, 고려원.
  •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신동준, 인간사랑.

6. 관련문서

6.1. 인물

6.2. 사건


[1] 혹은 양도. [2] 위안스카이의 제제에 찬성한 것 때문에 개듣보 학자가 헛소리한것 정도로 폄하받는 일도 있는데 법학, 행정학에서는 나름 일가견이 있는 인물로 존스 홉킨스 대학교 총장을 지내며 미국 정부에서 일한 인물이다. [3] 위안스카이 문서나 호국전쟁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나중에 신문을 조작했단게 들킨 위안커딩은 위안스카이에게 채찍으로 두들겨맞고 신임을 잃게 된다. [4] 주안회는 엄수에게 묻지도 않고 자신들의 주안회 선언에 엄수의 이름을 도용하는 일을 한 바가 있다. [5] 혹은 10월 18일. [6] 하지만 1월 3일에 대외적으로는 민국 연호를 사용하게 하여 외국에서는 황제인지 총통인지 모르겠다면서 황제 총통이라고 빈정댔다.